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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전도서 11:1-2 / 물 위에 던지기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전도서

전도서 11:1-2 / 물 위에 던지기

정인순 2010. 8. 9.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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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에 던지기

2007년 3월 18일

이근호

 

본문 말씀: 전도서 11:1-2

( 전 11:1 )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 전 11;2)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전도서의 특징은 인간들이 평소에 어떤 식으로 생활하느냐가 훤하게 다 나온다는 점입니다. 전도서에서 이것저것 지시하지 않더라도 인간들은 지혜와 묘안을 짜내어 자기 살 궁리는 빈틈없이 한다는데 있습니다. 누가나 예외없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가 일하지 말고 움직이지 말래도 부지런히 뭔가를 시도하게 됩니다. 보잘것 없는 개미 한 마리도 그렇게 움직이는데 사람은 말 할 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자기 생존과 생계에 관련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음을 마치 신이 허락하신 지혜처럼 여긴다는데 있습니다.

 

신과 결부하지 않더라도 인간 본능상 끊임없이 뭔가 하게 되어있는데, 그 본성과 신의 본성을 같은 선이라고 연결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때문에 발생되는 현상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구제를 이웃에게 부지런히 하면, 언젠가는 도로 보상받을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평소에 얼마나 잘못되게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를 말해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사람 위주로 계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 위주로 계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남기신 약속이나 말씀도 모두 사람들에게 유리하도록 제공된 약속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자기 이익과 유리한 점을 결부시키지 않을 경우가 드뭅니다.

 

여러 군데 구제를 해놓고서는 그 중의 하나 걸려들기를 기대하는 것은, 평소의 인간의 못된 심성이 하나님의 죄 규정에 여지없이 걸려든 꼴이 됩니다. 구제라는 착한 일을 착한 일대로 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가치가 일단 인정받은 유리한 점을 챙기고, 그 다음에 그 착한 일에 대한 하나님이 보상까지 주어지니 꿩먹고 알먹고 셈이 된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의 계산에 편들어 주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자기 부인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경우는 완전히 없습니다. 자기 유리와 자기 이익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일도 있을 수 없습니다. 펀드에 투자 하는 식으로, 혹은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는 펀드계의 속설처럼, 낚시 미끼를 던져놓으면 언젠가는 수지타산이 맞는 결과를 낳게 한다는 하나님의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몽땅 다 빼앗아버립니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말입니다. 도대체 하나님 앞에서 ‘내 것’이라는 것이 일체 있을 수 없습니다. 내 것이 없다면 투자하는 행위도 전혀 의미 없는 짓입니다. 물 위에 던지라는 말은 바다를 통한 해외 무역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시편 108:23-30에 보면 “ 선척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보나니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저희가 이리 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다를 배를 띄운 자들은 그 어떤 식으로 일단 배를 띄워놓았다면 자기 손으로 떠나버렸습니다. 자신이 관여할 사항이 아닙니다. 자신이 관리할 입장도 못됩니다. 인간들이 하는 모든 사업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사업 결정을 했다면 이미 과거지사입니다. 그 결정을 취소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미래가 어떤 사태가 기다릴런지 사람은 알 수 없을 뿐더러 설사 큰 사건이 터진다고 미리 알았더라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이 책임 하에 만족스럽게 수습할 일은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방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뭔가를 계속 시도합니다. 개미처럼 말입니다. 이런 상황은 곧 원인이 인간에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원인을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간주하며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원인을 찾아내라면 인간들은 ‘물 위에 음식물을 던지는 그 행위’를 지목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같은 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당당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약속대로 언젠가 돌려받아 내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자신도 미처 모르고 숨어있는 자신의 죄성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상대로 영업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것’이라는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것으로 실시하라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원인을 우리에게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 품으로 회수하고자 하는 시도인 것입니다.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면 그 결과에 대해서 우리가 기대할 자격이 없어지는 법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고집도 만만치 않습니다.

 

기어이 자신이 중심이 되고자 하는데서 사는 보람을 가지려고 합니다. 즉 ‘내 것이 따로 있음’에서 자신의 존재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평소에 인간들이 세상 살아가는 지혜 모습이요, 이런 사고방식으로 성경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같은 것을 들고 나와서, 실습하는데 분주하겠지요. “일단 구제 해보자.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대로 보상이 남이 아니라 나에게로 돌아오겠지”라고 말입니다.

 

이런 오해에서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도 제외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자기들 편이라고 여겼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악한 농부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포도원을 맡겼지만 그 농부들은 마치 이스라엘이라는 포도원이 자기 소유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자기 노동이 원인이 되어서 포도원이 잘 결실 맺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실은 포도원 농사가 잘 된 것은 그 원인자가 따로 계셨습니다. 인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안중에는 예수님도 그저 평범한 타인이요 라이벌일 뿐입니다.

 

평소에 우리 생활이 그렇지 않습니다. 이 농부들 하나님으로부터 진멸당했습니다. 전부터 하나님은 예수님을 원인자로 내세운 우주 경영을 해오셨던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점을 몰랐지만 당연히 진멸당해야 합니다. 이제 집에 우리가 가진 모든 것에 압류증을 붙여야 합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우리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기도와 은혜로 산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