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교회를 넘어서 23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10 본문
대구051017교회를넘어서23그리스도의몸으로서의교회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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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대구강의 18] - 교회를 넘어서 23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10
05,10,1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몸 - 1, 2, 3 !!
오늘 강의는 ‘몸’에 대해서 하겠는데, 편의상 1강, 2강, 3강으로 나누어서, 제 1강에서는 “머리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것을 하겠고, 즉 머리의 기능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는지,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1강은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의 기도문제를 가지고, 한 몸 안에서 머리와 지체가 어떻게 소통하는지,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 먼저, 솔로몬의 기도에 대해서 !!
거기에 앞서서 먼저 구약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왕인 솔로몬의 기도가 나오는데, 그러한 기도 가운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그 솔로몬의 기도에 대해서 너무나 흡족해하시면서 만점으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왕상 3: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왕상 3:11)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 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왕상 3: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 솔로몬아, 너의 기도는 100점 !!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고 하니까, 솔로몬이 기도하고 난 뒤에 하나님이 하신 그 기도에 대한 평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열왕기상 3장 11절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이 솔로몬 왕이 3가지 점에 대해서 기도를 하지 않았기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에 맞는다고, 즉 흡족해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열왕기상 3장 11절에 보면,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첫째는 자기가 오랫동안 살기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둘째는 자기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한 셋째는 자신의 원수가 죽기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솔로몬이 이러한 3가지의 기도를 하지 않았더니만,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기도에 대해서 만점처리를 하시고, 솔로몬의 원했던 지혜와 총명함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솔로몬이 이렇게 흔히 인간들이 하는 기도를 하지 않고, 그 3가지를 빼고서 다른 것을 가지고 기도했더니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대해서 기뻐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솔로몬이 그런 기도를 하게 되었는가? 솔로몬의 기도는 하늘에서 이미 정해진 뜻이 이 지상에 그대로 성취되기를, 즉 하나님의 뜻이 임하기를 기도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는 우리는 이 솔로몬이 한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이 될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응답을 하셨다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하는 이런 식의 기도 외에 다른 기도는 내가 응답하지 않겠다” 라고 하는, 그런 하나님이 거부하는 기도가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 아니, 어떻게 솔로몬이 그런 기도를?
그렇다고 하면, 솔로몬이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기도를 하게 되었느냐는 것인데, 이 부분이 참 재미있는데 말이다.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즉 인간들은 아담의 속성에서 내려오는 죄 때문에, 그래서 자기 위주로,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자기를 사수하기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이미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다듬어왔다고 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즉 솔로몬의 입에서 그런 기도가 나왔다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그 공로를 결코 솔로몬에게 돌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만 받는다 !!
제가 자주 하는 말 중에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만 받는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우리 기도는 소용이 없단 말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것만 받으시는 그러한 그 인간 됨됨이를, 이미 그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혹은 태어나서부터 계속해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그런 인간을 친히 만들어내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내면서 오셨음에 대한 증거가 곧 솔로몬의 입에서 나온 기도이고, 그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측면에서,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것만 받는다” 라고 할 수가 있고, 그러한 주장이 성립이 된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특별한 사건으로 발생된 인물이 곧, 솔로몬 !!
우리가 알다시피 솔로몬의 출생은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는데, 솔로몬은 출생의 비밀이 있는데, 그는 다윗과 바세바의 관계가 없었다고 하면 태어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솔로몬은 이러한 점에서, 인간의 뜻에 의하면 없었어야 될 사람인데, 거기에 개입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건으로 인하여 발생된 인물이 바로 솔로몬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솔로몬 만들기’에는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개입을 하신 것이지, 거기에 아버지인 다윗의 뜻이나 솔로몬 본인의 뜻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손수 만든 솔로몬의 입에서 나온 기도를 하나님은 기뻐 응답하시고, 또한 그 응답대로 솔로몬에게 땅을(?) 펼쳤다는 것이다.
◈ 우리의 몸과 그리스도의 몸 !!
오늘 우리가 ‘몸’에 대해서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이 몸은 머리와 지체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머리와 지체로서 몸을 규정할 수가 있는데,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머리와 지체가 붙어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몸 자체를 가지고 온전한 몸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앞에 ‘그리스도의 몸’ 이라고 하는 전혀 새로운 몸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 우리의 몸은 무엇이고, 또한 그리스도의 몸은 무엇인가? 즉 “현재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 몸을 확대해서 해석하면 그리스도의 몸에 접근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점은 우리의 몸을 언어분석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는 항상 비유적인데, 즉 근사치라는 말이다. 인간을 어떻게 비유로, 즉 은유적으로, 환유적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결코 우리가 하는 말과 실제적으로 그 사물이 1:1로 서로 똑같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하나님은, 말씀과 실제가 동일해 !!
하지만 하나님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말씀과 실제가 전혀 똑같은데, 예를 들어서, “빛이 있어라” 라고 하면 실제로 빛이 있다는 것이다. 말씀 그대로 말이다. 그러나 여러분이나 이근호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전혀 빛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빛을 표현할 때 빛이라고 한 것이지, 즉 이미 있는 거기에 대해서 뒤늦게 후차적으로 표현한 것은 인간의 언어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처럼 말씀 자체가 없는 데서 새롭게 생겨나는 창조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언어는 비유적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 몸 - 머리를 위한 지체로서 온전하게 될 때 !!
그것은 몸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즉 하나님께서 몸이라고 하는 것과, 우리가 우리 신체를 가지고 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가지고,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주물러서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보겠다고 하면, 그런 시도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보통 이러한 몸을 머리와 지체 부분으로 나누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머리를 통해서 지체를 만들어서, 즉 머리를 위한 지체로서 온전하게 될 때, 그것을 바로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규정을 한다는 것이다. 머리를 위한 지체로서 말이다.
그것은 바로 “빛이 있어라”, 혹은 “바다야 잠잠하거라” 라고 하면, 그 말씀 그 자체에 의해서 실제로 다른 어떤 장애물이나 방해물도 없이 그대로 생기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을 때는 인간의 도움이나 협조가 전혀 없이, 온전히 하나님에 의해서 그대로 몸이 된다고 하는, 그런 역사를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생하게 소개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 솔로몬의 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인지를 !!
그렇게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지체의 기능 가운데 하나 기도라고 볼 때,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기도를 탐색해봄으로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기도에 합한 솔로몬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머리에 지체로서 한 몸이 되는 모델케이스로서 합당하게 되었는지, 바로 그것을 한번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물론 우리도 기도를 한다고 하는데 말이다.
◈ 솔로몬은 죄로 인해서 등장한 자식 !!
지금부터는 솔로몬 이야기를 하면서 다윗을 말하려고 하는데, 이 다윗은 율법적으로 보자면 분명히 율법을 어긴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윗이 율법을 어겼으면 그것은 곧 죄가 되는데, 즉 다윗이 밧세바를 만나고 나서 드러난 현상이 바로 죄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죄라고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 둘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 그만 죽는데,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말이다. 다윗이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해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다윗의 행위가 죄였음이 드러나는데,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니 말이다.
◈ 아, 여디디아 !!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하나님은 왜 다윗을 죽이지 않고서 다윗의 자식을 죽였느냐는 점인데, 그러니 다윗의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억울한데, 잘못은 아버지가 했는데 죽기는 왜 자기가 죽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자식을 죽임으로서, 그 죽은 자식을 통해서 다윗의 죄를 발견하게 하고, 다시 밧세바와 다윗 사이에 자식이 있을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시는데, 즉 ‘여디디아’ 라고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여디디아’, 즉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라고 알려주고 인정을 해줌으로서, 어떤 용서의 틀이 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솔로몬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비록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용서를 받은 본인 다윗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까지도 알게 되었는고 하니, 다윗의 하나님은 그렇게 용서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다윗은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솔로몬이 태어나고 나서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었는데, 이 나단 선지자는 이전에 역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다윗의 죄를 지적했다는 것이다. 밧세바와 우리아 사건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디디아’ 라고 해서 솔로몬을 사랑한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곧 다윗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이다.
이로서 다윗은 자기 인생의 아주 깊숙한 곳까지 하나님께서 관여하고 개입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윗언약으로, 즉 하나의 언약체계로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영원불변한 원칙으로서, 하나님은 그렇게 다윗을 도구로 삼아서 이 세상에 드러내었다고, 그렇게 다윗은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 솔로몬 -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
그러므로 솔로몬은 어떤 증거가 되는고 하니, 비록 그 어떤 죄인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한 증거물이 바로 솔로몬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을 아는 입장에서 더 이상 자기 자신 위주로 기도할 이유는 없어지는데, 왜냐하면 아버지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났으니 말이다. 즉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죄를 용서하시는 분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니 솔로몬의 경우에, 바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의 거룩한 천국 백성으로 구성해나가고 창조해나가신다는 것을 안 이상, 솔로몬의 입장에서는 자기를 자기 되게 하신 그 하나님의 뜻이, 이러한 백성을 통해서 이스라엘답게, 즉 남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솔로몬의 그 기도내용이, “하나님이여, 이 백성들을 하나님의 원래 원칙대로 잘 가르치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라고 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백성들에게 제대로 잘 전달이 되도록 말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이런 기도가 응답이 되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나중에 신약에 가면 머리와 지체라는 관계로서 성립된다는 것이다.
◈ 제 2강 - 머리가 무엇인가?
이제 두 번째 부분을 강의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즉 “머리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을 지금부터 살펴보자는 것이다. (어, 그것은 아까 1강이라고 했는데, 아닌가?) 일단 고린도전서 11장을 먼저 보겠는데, 3절부터 10절을 한번 읽어보자.
(고전 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 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고전 11: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고전 11: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 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고전 11:6)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고전 11: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고전 11: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고전 11: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고전 11:10)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 !!
여기에 ‘머리’ 라는 것이 자꾸만 반복이 되고 있는데, 3절에 보면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머리라는 개념을 통해서 남자와 그리스도가 연결되고, 또 여자와 남자가 연결되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머리가 최종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고 하니,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머리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하면,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 사이가 머리라는 관계로서 규정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머리에 대해서 양보하지 않아 !!
여기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머리에 대해서 양보하는 법이 없는데, 즉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쓴다든지 머리를 민다든지, 혹은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이 정해준 머리의 관계를 인위적으로 가리우고 희석시키는 일이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머리 부분에 대해서 신경을 쓰시는가? 7절에 보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 머리라는 것은, 머리와 머리가 아닌 자의 관계를 통해서 형상과 영광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식으로, 바로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질서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 천사는 영적 세계의 질서를 잡는 경찰관 ??
그 영적인 질서가 10절에 나오는데,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천사는 영적 세계의 질서를 잡는 경찰관인데, 그런 천사들이 항상 신경을 쓰는 것은 질서가 깨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천사는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그렇게 체계를 잡는 일에 종사하는 피조물이라는 말이다.
◈ 머리를 먼저 알아야 몸을 !!
이렇게 볼 때, “머리가 무엇인가?” 라는 것을 알아야만 몸을 알 수 있는데, 그러니 몸을 알기 위해서 머리부터 먼저 알아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 머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먼저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떠한지, 그것부터 알아야 머리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래서 머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면 몸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우리 몸의 머리라고 생각할 때는, 먼저 이 머리 부분이 정립되어야만 몸이 정립이 되는데 말이다. 그러니 머리 부분의 개념부터 먼저 정리를 하자는 것이다. 몸이 아닌 머리 부분부터 말이다.
◈ 머리를 아는 사람의 특징은?
그런데 이 머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나는 결코 머리가 아닙니다” 라고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즉 먼저 그런 전제를 깔고서 “머리는 이러이러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자기는 머리가 아니라고 하는데, 즉 자기 인생의 주도권은 결단코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하지만 자기가 머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떠한가? 제 아무리 성경을 보고 무엇을 하더라도, 그만 자기 몸 위주로 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몸 위주로 가게 되면, 인간은 평소에 자기 몸 위주로 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아무리 기도를 해도 당연히 자기 몸에 유익이 돌아오는 쪽으로 기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자기를 해치는 원수를 죽게 해달라고 하든지, 자기가 오래 살고 싶다든지, 아니면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 하는, 그런 모습이라는 말이다. 즉 아까 말한, 솔로몬이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신 바로 그 3가지 내용이라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개인구원이 아니라 머리와 지체로서의 관계 !!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고 하니까, 성경말씀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신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설정해놓으신 그리스도의 몸, 더욱 상세히 말하면, 머리 부분과 지체 부분을 확인하는 목적으로 주어진 책이라는 것이다. 또한 바로 그런 원칙으로 하나님은 이 우주를 다스리고 인도하고 계신다는 말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작업을 하시고 말이다.
그러니 머리 부분이 무엇이냐고 하면, 즉 머리가 무엇인지 알아서 자기가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면, 그것은 애초부터 틀린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그 원리원칙만 알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고 하니까, 일단 자기는 머리가 아니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머리로부터 부림을 당하는 지체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먼저 이러한 점에 대해서 분명히 하고 과연 머리가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일단 여기서 요한복음 14장 10절과 11절을 한번 찾아보자.
(요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 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여기서 예수님이 참으로 어려운 말씀을 하시는데, 예수님은 “스스로 하는 것이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아까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분명히 예수님의 머리는 하나님이라고 되어있었는데,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는 이미 머리라는 관계가 성립되어있다는 것이다.
◈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
그렇다고 한다면, 머리와 지체 사이가 어떤 관계에 놓여있을 때 그런 관계가 되는고 하니, 여기 요한복음 14장에 의하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 라고 하는데, 바로 그런 관계가 바로 예수님이 생각하고 있는 아버지와 머리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머리가 하나님 아버지인데, 예수님은 머리가 아니니 말이다. 바로 그런 머리와의 관계가 성립되려고 하면, 요한복음 14장 10절에 의하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 라고 하는 관계 속에 있을 때만, 그러할 때 머리와 지체의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 라고 하는, 이런 실존적인(?) 표현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 어떤 인간이라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고, 사실은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아담이 하와를 보고 “너는 내 뼈 중의 뼈이고, 살 중의 살이다” 라고 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인간끼리의 관계이고 말이다.
◈ 예수님만이, 오직 하나님과 그런(?) 관계가 !!
하지만 하나님이 자기 안에 있고, 자기가 하나님 안에 있는, 바로 이러한 경우는, 그야말로 예수님이 인간으로서는 처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말이다. 그런 인간은 지금까지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이니 말이다.
물론 다윗의 경우도 선지자로서 성신이 임했지만, 그러나 성신은 한시적으로 임했다가 빠지고 빠졌다가 임한다는 말이다. 즉 성신이 항상 그 속에 담겨있는 입장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 즉 ‘옛 언약’은 새 언약 이전의 모형이기 때문에, 즉 언약의 최종적인 완성단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에 성신이 영원히 그 사람과 함께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이 메시야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오실 메시야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메시야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때로는 악령을 보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성령을 보내기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에스겔이 제 아무리 성신을 받았다고 해도, 그가 메시야는 될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기를, “아버지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아버지가 있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바로 그러한 관계가 성립될 때에 비로소 머리와 지체 관계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어떻게 일을 하셨는가?
그리고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왔는데, 그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라는 하늘의 음성이 들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일을 개시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일을 하셨는가?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일을 하셨는데, 자기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지,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있다고 해서, 예수님이 자기 마음대로 일을 만들어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목사님, 구원을 받았는데 굳이 또?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는데,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는 기도나 전도와 같은 것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성경도 그렇고, 교회도 다닐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라고 말이다. 즉 이제는 예수님이 모두 다 알아서 하실 것인데, 굳이 왜 자기가 그런 일을 해야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자기에게 누가 들어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즉 머리와 지체의 관계를 전혀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머리와 지체 사이의 원판은 자기 쪽에서 출발하면 안 되고,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떠한지, 그것을 가지고 출발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 예수님 - 아버지의 뜻이라면 !!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자기 안에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 안에 자기가 있음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막 먹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안에 있음으로서 도리어 자기 뜻을 챙기기 않고 오직 예수님이 오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위함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38절에 분명히 나오는데 말이다.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게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자기 마음은 그 잔을 피하고 싶은데, 하지만 아버지의 뜻이니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기도하셨다는 말이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물론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는 온전한 기도인데, 즉 자기 위주로 기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솔로몬이 그것을 미리 보여주었는데, 즉 자기가 잘되기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바로 머리 부분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제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의미는 이제 하나님과 예수님이 서로 똑같으니 막 먹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비로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모시는데 전적으로 자신이 헌신할 수 있다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머리와 지체의 관계인데, 그러니 예수님의 머리는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다.
◈ 예수님의 양식은?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제자들이 양식을 사려고 잠시 마을로 간 사이에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셨는데,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이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이 돌아와서 양식을 드시라고 하니,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나에게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라는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아니, 누가 예수님에게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라고 하니,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요 4: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요 4: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요 4: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요 4: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요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 양식은, 살아있는 타당성을 확보해야 !!
보통 ‘양식’ 이라는 것은, 받아먹도록 되어있는데, 그러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양식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이유를 제공하는 것을 두고 양식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이유를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무슨 이유로서 이런 일을 이 땅에서 해야하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그런 근거를 제공할 때, 즉 그렇게 살아있는 타당성을 확보하도록 하는 그 무엇, 바로 그것을 두고서 양식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양식은 바로 아버지가 주신 뜻이 곧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그 뜻을 행하고, 그것이 곧 예수님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는, 머리를 생각하지 않고 단독적으로 자기 자신을 생각한다고 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모습인데, 정말이지 전혀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솔로몬은 어떻게 그런 기도를?
솔로몬의 경우에, 그가 자기만을 생각한다고 하면, “하나님, 저에게 부귀영화를 주옵소서” 라는 기도가 나온다는 말이다. 하지만 솔로몬은 아는데, 자기가 이렇게 태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버지 다윗에게 용서하신 그 용서가 결심을 맺어서, 그래서 자기가 이렇게 태어났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솔로몬은 아버지에게 주신 그 용서 덕분에 자기가 존재한다고 하면, 더 이상은 자기를 위해서 배려한다든지, 자기를 위해서 기도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자기 자신을 배려할 수 없다고 하면, 자기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는가?
그러므로 솔로몬은 자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자기를 자기가 되도록 인도해주신 그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원칙만이, 오직 그것만이 자기를 통해서 이 백성들에게 전달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이스라엘의 모습이고 말이다. 이 정도가 되면 박수소리는 없어도 ‘아멘’ 정도는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가? (다같이 박수, 냉냉??)
◈ 이스라엘은 철저히 다윗에게 내려진 원칙을 유지해야 !!
사실 다윗사건 이후에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다윗의 개인적인 나라인데(?), 그래서 나라이름을 ‘유다’ 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다윗이 유다지파이니 말이다. 이제는 다수의 나라가 아니라, 다윗의 사적인 나라라는 말이다. 즉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없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결코 될 수 없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다윗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원칙을 유지할 때만, 그때만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고, 참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북쪽 이스라엘은 그만 삐쳐서, 자기들은 유다와 같이 의논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갈라섰는데, 그래서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유다나라도 뒤따라서 망하지만 말이다.
◈ 언제 남자는 여자의 머리가 될 수 있는가?
다시 정리를 해보면, 이 ‘머리’ 라는 것은 머리가 되시는 분이 자기 속에 있고, 자기가 머릿속에 있을 때만 비로소 ‘머리’ 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 라는 표현을 아무리 해도, 그것은 전혀 머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다시 고린도전서 11장으로 돌아가서, 여자의 머리가 남자이고,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 여자에게 “너의 머리는 남자이니 무조건 복종해” 라고 한다면, 그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반칙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 여자가 남자에게 머리로서 복종하고 말을 들어야 하는고 하니, 그 남자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머리라고 인정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 경우에만 아내는 남편을 자기의 머리라고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 남자는,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를 담고 있어야 !!
그렇다면 남자가 예수님을 전적으로 자기 머리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도대체 어떤 경우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로 있었던, 그런 아무 긴밀하고도 치밀한 관계를, 그것을 말로서 표현하기가 참으로 곤란한데 말이다.
아무튼 아주 은밀하고 내밀한 관계, 그런 결속된 관계가 그대로 자기에게, 즉 자기의 빈 영혼(?) 속에 가득 차기를 원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면서, 그렇게 하면서 예수님을 자기의 머리라고 할 때, 바로 그런 사람이 정말로 예수님을 자기의 머리로 인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즉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어떤 관계였는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행여 예수님과 아버지의 그런 관계가 자기에게 쳐들어올까 싶어서 도망치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런 남자에게는 전혀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머리라는 것은 인간이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가지고 모델로 삼을 수가 없고, 진짜 모델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라는 것인데,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즉 자기 뜻이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이 우선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 뜻이 그대로 자기에게 임하기를 원해야만 하는데, 마치 솔로몬의 기도처럼 말이다. 즉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맺었던 그 친밀함이 그대로 자기에게 가득하게 넘치도록 해달라고 하는, 바로 그런 남자만이 정말로 여자의 머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런 남자를 유일한 머리라고 인정하는 여자만이, 비로소 그리스도의 혜택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 과연 어떤 사람이 ‘한 몸’ 인가?
그러니 남자든 여자든 간에,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가, 즉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좋아 보이고, 그것을 그대로 진리라고 인정을 하고, 또한 그 진리가 그냥 서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덮치기를 간곡히 소망하는 사람에게만이, 그런 사람만이 그리스도가 자기의 머리가 되고 자기는 그리스도의 참된 지체가 되는, 그런 ‘한 몸’ 이라고 비로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바로 ‘머리의 관계’ 인데, 이러한 머리 관계가 유독 예수님에게만 해당이 되겠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요한복음 14장 17절부터 20절까지를 한번 살펴보겠는데, 제가 읽겠습니다.
(요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 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 겠음이라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여기 17절에 나오는 ‘진리의 영’은 성령을 의미하는데, 그런데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라고 하는데,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범죄하고 나서 자기밖에 모르는데,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기만을 위해서 기도한 최초의 인간이 가인인데, 즉 자기가 죽지 않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범죄한 인간에게, 전혀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에 말이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특이하고 생소하다는 것이다. 즉 생전에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내용이라는 말이다.
◈ 이제는 성도도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처럼 !!
그런데 17절 후반부에 보면,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예수님과 아버지의 그런 머리라고 하는 관계가 이제는 ‘너희들’에게도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말이다.
그런데 여기 20절에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이 정말 중요한데,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예수님과 아버지가 겹치고, 또한 예수님과 성도가 겹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성도가 아버지 안에 있을 수는 없어 !!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아버지와 우리는 결코 겹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 안에 우리가 있고, 우리 안에 예수님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안에 있다” 라고 하는 공간적 개념의 한계이기도 한데, 즉 이 지상에서 가지고 있는 우리의 언어를 가지고 영적인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파티장에서 다함께 있다고 하면, “저 사람이 나와 함께 있고, 또 저 사람이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당연히 나도 그 사람과 함께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같은 영역에 있으니 말이다.
◈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게로 !!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그것이 해당되지 않는데, 옛날 구약시대의 제사장 언약에 의하면, 물론 예수님은 양다리(?)를 걸칠 수가 있어도, 결코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안에 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 안’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에도 그런 내용이 있는데, 22절과 23절을 살펴보자.
(요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 려 함이니이다
(요 17: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 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22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하는데, 즉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가 된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과 성도가 서로 하나가 되는데, 바로 이럴 때 그것을 두고서 머리와 지체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관계는 전혀 지체라고 이야기할 수 없고 말이다.
◈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성도에게 그대로 !!
이렇게 살펴보면, 이제부터는 성도 안에는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이 함께 계셔서, 과거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아버지와 맺었던 그 관계가 그대로 성도에게 쏟아지도록 실시하신다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요? 즉 이제는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그대로 복사가(?) 되어서 성도에게 쏟아진다는 말이다.
제가 처음에 강의를 할 때, 솔로몬이 하나님에게 합당한 기도를 한 것은 솔로몬의 개인적인 자질이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솔로몬을 만들어내신 분도 역시 솔로몬의 기도를 받으시고 평가하신 그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즉 바로 그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를 하는 솔로몬을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 성도는, 오직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
성도가 창세 이전부터 예정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인데,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통일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 땅에 성도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태어나서는 철저하게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가 됨을 증거하는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우리를 창세전에 예정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고백하도록 하고, 그리고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머리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을 하라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창조하셨다는 말이다.
◈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
그러므로 이것을 결코 개인적인 구원위주로 여기면 안 된다는 말이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러한 개인 구원을 없앴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래서 신학도 구원론이 아니라 모두가 다 기독론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예정하사 만들었기에 말이다. 거기에 인간의 개인구원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참으로 곤란하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머리와 지체가 합쳐질 때, 그것을 두고 ‘그리스도의 몸’ 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할 때는 우리 몸을 따로 생각하면 안 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아하, 내 몸은 내가 아니구나. 나는 지체일 뿐이고 내 머리는 주님이구나” 라고 생각해서 그리스도의 몸에 종속되어있다고 여겨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머리를 굴리고 자기가 어떻게 계획을 잡아서, 그러니 머리 부분은 없고 자기가 머리 노릇을 하고, 그렇게 해서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합당하도록 말씀대로 살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혀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자기가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순종하듯, 성도도 예수님에게 !!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 다시 한번 더 정리하면,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신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인 예수님이 서로 막 먹자는 것이 결코 아니란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오히려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안에 성도가 있고, 성도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 라고 하는 것은,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증거하는 철저한 하나의 지체로서의 위치와 사명을 지니게 되었다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라는 것이 요한일서 4장에도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여기서 요한일서 4장 12절에서 15절을 한번 읽어보자.
(요일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 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일 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4: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요일 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 니라
◈ 성도에게는, 오직 예수님의 뜻만 !!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데, 즉 13절에 보면,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철저하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고, 또한 철저하게 우리의 본래 개인적인 뜻은 날이 갈수록 모두가 다 날아가 버리고, 오로지 예수님의 뜻만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이고 말이다.
◈ 성령께서 날마다 교체하는 작업을 !!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것은, “과연 이러한 것을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가 있는가?” 라는 것인데, 즉 우리가 과연 말씀대로 살아갈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과연 그러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전혀 말이다.
오히려 우리는 매일같이 우리의 옛 습성으로 인해서, 즉 머리는 생각하지를 않고 자기가 머리라고 여겨서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즉 성경을 해석해도 독단적으로, 기도를 해도 독단적으로, 즉 “내 원수가 죽게 하시고,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시고, 또한 장수하도록 하옵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그렇게 노골적으로 하지를 않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고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속셈은 전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귀신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이지 못하는데, 바로 그러한 잘못된 우리의 모습을 성령께서는 날마다 교체하는 작업을, 그렇게 성도 안에서 계속해서 계속해서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즉 교체에 교체를 거듭한다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전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이미 머리가 되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고 하는 것을 명심하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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