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교회를 넘어서 21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8 본문
대구050905교회를넘어서21그리스도의몸으로서의교회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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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대구강의 15] - 교회를 넘어서 21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8
05,09,0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하늘에서 오셨다 !!
이제 오늘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는데, 먼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는 이 예수님을 통해서 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즉 하실 일이 있기 때문에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냥 심심해서 여행을 삼아 보낸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인간들끼리 사이좋게 살고 있는데 하늘에서 누군가가 오셨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늘에서 오셨다는 것은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데, 즉 “너희는 땅의 것을 생각하고, 나는 하늘의 것을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나는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요 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이렇게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는데, 사실 이것도 엄청 어렵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하늘에서 왔다” 라는 것을 세례요한은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까,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 내 뒤에 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러한 점이 어려운데, 묵시가 헛갈리는 것이 바로 이런 점이라는 것이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 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 역사란, 현재 인간들이 과거를 보는 관점 !!
지금 우리교회에서 교인들 십여 명이 중심이 되어서 교회사를 공부하려고 하는데, 칠곡강의를 마치고 말이다. 교회사 공부는 제가 먼저 대식씨에게 하자고 이야기를 했는데, 왜냐하면 역사라고 하는 것은 현재 인간들이 과거를 보는 관점이지, 과거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사를 공부하려면 아예 그러한 점부터 알고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 이순신 장군의 경우에 !!
예를 들어서, 이순신 장군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겠는가? 그 양반이 민주주의를 알겠는가? 공산주의를 알겠는가? 그 사람이 아는 범위가 50이라고 하면, 지금 21세기에 중학생들이 하는 범위가 150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그분의 시건머리(?)가 요즘 중학생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순신 장군을 영웅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정보사회이기 때문에, 그러한 영웅이 되려고 하면 영웅적인 행동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학생들이 엄청난 공부를 하는데, 그런 흘러난 과거를 모두 다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사, 혹은 역사를 공부하고 안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그 어떤 범위까지 알 수가 있는지, 그러한 것을 하나씩 알아 가는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이지, 결코 흘러간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라는 것이 말이다.
◈ 옛날에 역사는, 언제나 왕 중심으로 !!
제가 이번에 어떤 책을 구입했는고 하니, 과거 농노시대 때, 즉 중세유럽 봉건사회의 그들의 생활상을 그림으로 다 그려놓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의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놓듯이 말이다. 옷은 어떻게 입고, 농사는 어떻게 지었고, 또 어떤 집에서 살았는지 말이다. 그리고 상업적인 유통과정도 기록해놓고 말이다.
이러한 옛날의 역사는 어디까지나 왕 중심의 역사인데, 물론 지금 역사는 경제적 사회적 바탕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야기하고 조사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연구하는, 즉 옛날 사람들의 경제문화에 대해서 연구하는 관점은 마르크스 이후의 역사학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의 역사가는 왕 중심으로 기록하지, 그런 민중들의 것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말이다.
왜 그렇게 했는고 하니까, 신은 왕을 통해서 일을 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반 평민들이나 상놈들의 하루일과는 어떻고,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실록과 같은 것을 보면, 궁중의 역사이지, 일반인들을 이야기할 때는 그런 궁중과 연결이 될 때만 약간 언급하고 지나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역사’ 라고 하는 것은 현재 우리 인간들이 과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것을 살펴보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을 알려고 한다면 아예 시작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 나 보다 먼저 나신 자가 내 뒤에 온다 ??
다시 처음에 하던 예수님 이야기를 해보면, 여기서 세례요한의 경우에는 “하늘에서 왔다” 라는 것은 어떻게 표현하는가? “나 보다 먼저 계신다” 라고 하는데, 즉 “나 보다 먼저 나신 자가 내 뒤에 온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먼저 계시는데, 뒤에 온다고 말이다.
◈ 칸트 -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서 모든 것을 해석 !!
하지만 철학에 있어서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서 모든 것을 해석해서 자기의 개념으로 잡는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칸트가 말하는 ‘시간과 공간의 틀’ 이라는 것은,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을 말하는 것인데, 즉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 그러나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의해서 !!
하지만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의해서 이것이 그만 변하고 말았는데, 하지만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이다.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원리라고 하면, 일본의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이나 생각하지 말이다. 시간과 공간이 뒤틀려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빛의 속도’ 라는 것이다. 즉 빛의 속도에 따라서, 혹은 에너지나 질량의 속도에 따라서, 그 영역에 따라서 그때 그때의 시간과 공간의 영역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시간을 재보면 산 밑에서보다 늦게 가는데, 하지만 그것을 길가는 할머니에게 물어보면 뭐라고 하겠는가? 시간이 똑같이 가지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말이다. 물론 어머니에게 물어도 그렇고 말이다. 즉 이 우주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는, 그 누가 봐도 다 똑같다고 모두들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 서로 차원이 달라 !!
하지만 현대 물리학에서 공간이 뒤틀리는데, 여기서 뒤틀린다고 하는 것을 두 글자로 ‘차원’ 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15차원까지 수학에서 밝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차원의 경우에, 1차원이 2차원을 이해하지 못하고, 2차원은 3차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상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 속에서 시간을 마치 고속도로와 같이 보았는데, 즉 일종의 고속버스, 혹은 기차로 보았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 1장의 경우에 !!
이제 요한복음 1장을 보겠는데, 지금 이렇게 고속도로에서 자동차가 두 대 달려가는데, 똑같은 속도로 달린다는 것이다. 하루 24시간을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뒤에 가는 차가 앞에 가는 차를 앞지를 수가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분명히 안 되는데, 그런데 세례요한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이러한 시간의 역전, 즉 시간의 추월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이미 창세기 26장에서 시간의 추월이 있다는 것이다. 먼저 난 자가 나중에 난 자를 추월해서, 즉 야곱이 장자가 되고 에서는 장자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문제를 아주 사소하게 여기고 만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 구원이란, 시간의 역전이 있어야 !!
이 ‘구원’ 이라는 문제를 이 지금 시간의 틀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세계로 진입한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아닌 모든 이방인들의 사고방식이고, 나아가서 모든 인간들의 사고방식이란 것이다. 즉 고통과 질곡이 있는 세상에서 그것이 없는 곳으로의 탈출, 그것을 구원이라 본다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구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역전이 있어야 구원이 된 자라고 본다는 것이다.
◈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 !!
그런 면에서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는, 시간의 역전은 없는데, 왜냐하면 서로 쌍둥이 형제간이니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시간의 역전이라기보다는 축복권과 저주권의 뒤바뀜인데, 서로 쌍둥이로 태어났으니 말이다. 형이 태어나고 3년 뒤에 동생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서로 손을 붙잡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세상에서는 먼저 태어난 자가 무조건 장자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야곱의 경우에, 어떤 사고방식을 가진 놈인지는 몰라도, 그것을 마구 뒤엎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의 “한 번 형은 영원한 형이다” 라는 것을 말이다. 도대체 그 어떤 가정에서 동생이 형을 추월해서 형이 되는 경우가 있던가요?
그것은 서로 쌍둥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인데, 물론 어릴 때는 서로 말을 놓고 똑같이 자라지만, 그러나 나중에 나이가 들면 반드시 형이 있고 동생으로 구분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않으면, 집안사람들이 쌍둥이라고 해도 그렇게 서로 막 먹는 것을 가만히 두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즉 형은 형이고, 동생은 동생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은 왜 그렇게 혼란을 야기시키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먼저 난 형이 동생이 되고, 또한 동생이 형이 되는, 그렇게 인간질서에 혼란을 주시는가? 그것은 바로, 구원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기존 사고방식을 전복시키는 것인데, 바다에서 나는 먹는 전복은 말고 말이다. 즉 이 세상 사고방식이 완전히 뒤엎어지지 않고서는 전혀 구원되었다는 소리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전복됨이 없이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말씀을 100% 다 오해를 하게 되는데, 그러니 성경말씀을 제대로 알게 되면, 기존의 우리가 알던 사건과는 완전히 뒤바뀐 사건을 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구원사건은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그야말로 완전히 전복된 사고방식을 요구하게 된다는 말이다.
◈ 사도바울의 경우에 !!
그러한 한 예로서, 사울이 바울로 될 때인데, 그때에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이 요구되었다는 것이다. 자기는 완벽하게 모든 율법을 다 지켰지만, 하지만 자기는 졸지에 전적으로 죄인 중에 괴수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죄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개념이 아닌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개념으로서는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에게 자책할 것이 없다고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보통 자신감이 아닌데, 율법적으로 스스로에게 책망할 것이 없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더 이상 도저히 따라올 수가 없는데, 그러니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에게 자책할 것이 없다고 하는, 바로 그것이 죄가 될 줄은 사도바울은 그야말로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 나는 지금 어디에 소속이 되어있는가?
여기서 조금 어려운 문제가 나오는데, 사도바울은 자기가 자책할 것이 없다고 했을 때, 그가 말하는 의와 죄의 기준이라는 것은, 자기 행동여부에 따라서 결정이 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행동을 잘하면 의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죄가 되고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즉 자기의 사고방식이 완전히 뒤바뀌고 난 뒤에는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 이제부터는 자기의 행동은 그만 사라져버리고, 현재의 자기가 소속된 영역이 어디인지, 바로 그 영역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엄습하고 있는 그 장(場)이 자기에게 그 어떤 영향력을 제공하고 있는지, 그래서 그것이 악한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이라고 하면 ‘죄’ 안에 있는 것이고, 의로운 영향력의 영역이라고 하면 ‘의’ 안에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 죄는 이미 인간이 소속된 영역 !!
그리고 사도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놀라운 이야기를 하는데, 바로 그러한 영향력이 흔히 말하는 시간개념과 공간개념이 아니라, 그것은 현재 존재하는 우리 신체, 즉 우리 몸이 아담에게 속했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에게 속했는지, 바로 그것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기존 철학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이야기인데, 백 날을 파도 그런 이야기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돌아가시려고 하는 어머니에게 “어머니, 당신은 죄인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 어머니가 얼마나 기가 차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어머니는 “야야, 내가 너를 키울 때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데,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가?” 라고 나올 것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죄’ 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인간의 행동여부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그러한 행동을 배태하는 자기 신체 자체가 이미 죄에 소속이 되어있고, 죄가 주무르고 있는 하나의 하수인으로서의 몸 전체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 다시,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 나 뒤에 왔다 !!
따라서 세례요한이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 나 뒤에 왔다”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나는 하늘에서 왔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늘에서 오신 분인데, 그런데 무엇을 가지고 있는고 하니, 놀랍게도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몸을 가지고 오셨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몸은 인간의 몸과 같이 뒤섞여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여기에서 인간들이 “저것은 하늘에 속한 것, 이것은 땅에 속한 것이다” 라고 구분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당연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전혀 불가능한데, 그런데 놀랍게도 세례요한은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나보다 먼저 계시는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물론 자기가 스스로 안 것은 아니고 말이다.
◈ 예수님의 기이한 행동은?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역전을 통해서, 즉 시간적 공간적인 것을 초월하는 전복의 상태, 그러한 역전의 상태가 예수님의 일상적인 행동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서 증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요한복음의 내용이고 말이다.
◈ 여인아, 목마르지 않는 물이 여기 있다 ??
요한복음 4장의 경우에, 사마리아의 한 여인은 마시고 마셔도 갈증이 생기는 물을 길러왔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우리들의 일반 신체나 몸에 전혀 적응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이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 게 고하시리이다
(요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만약에 예수님이 이러한 설교를 우리교회 강단에서 했다고 하면, 교인들은 그야말로 ‘띵!’ 인데, 머리에서 에밀레 종소리가 저절로 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 부딪침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는 것이다. 설교를 하려고 하면, 그래도 교회가 발전하든지 국가가 발전하는 방향으로 해야지, 왜 ‘띵!’ 하고 종소리가 나는, 즉 그런 부딪치는 설교를 하느냐는 것이다.
◈ 니고데모도 역시 ‘띵!’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이 “영으로 난 사람은 다 그렇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니고데모에게 ‘띵!’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에서는, 그렇게 안식일을 중요시하고 목숨걸고 지키는 유대인들을 ‘띵!’ 하게 하셨는데,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일부러 고치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안식일에 하면 안 된다고 금지하는 사항을 어기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서는, “내 살과 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영생이 없다” 라고 하심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다 ‘띵!’ 하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전에 먹은 오병이어의 떡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그것은 민중들이 원해서 예수님이 주신 떡이고 말이다.
◈ 예수님은 신체의 차이성을 통해서 !!
하지만 정말로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떡은 무엇인가? 모세 때에 하늘에서 내린 만나인데, 그것은 인간의 신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즉 예수님의 신체를 뜯어먹는 것이란 말이다.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몸이 아니라면 영생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신체의 차이성, 즉 하늘에서 내려온 신체와 땅에 있는 신체의 차이성을 보다 더 명확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몸은 낯설기 그지없어 !!
그리고 그것이 요한복음 마지막에 가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의 신체는 부활할 수 있는 그러한 신체이지만, 그러나 베드로의 신체는 죽기를 각오하고 따라가도 부활하지 못하는 신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몸은 그야말로 낯설기 그지없는 몸이고 신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서 왔다고 한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말이다.
◈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무슨 일을 벌리시는가?
강의를 다시 해보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어떤 분을 보내줄 때는 그분을 통해서 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즉 그분을 통해서 우리가 기존의 알지 못하던 낯설고 새로운 일을 벌리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집어넣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하고 집중해야만 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데, 즉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무슨 일을 벌이시는가?” 라고 하는, 그것만을 제대로 알면 된다는 것이다. 뭔가가 굉장히 복잡한 것 같아도, 이렇게 정리하고 나면 아주 간단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진짜 기독교이고 참된 복음인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실 것인가?” 라는 것만, 그것만 알아차리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 라는 것은 무엇을 배제하는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 라는 것은 완전히 빠져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통해서 하실 것은 하나도 없는데, 다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29절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 주여, 제가 무엇을 할까요?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데, 즉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일을 일으킬까?” 라고 여기니, 그것이 곧 하나님의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 역설적이지만 말이다. 즉 “주여, 제가 어떻게 무엇을 할까요?” 라는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종의 방해요소로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성도라고 한다면, “지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어떤 일을 벌이시는가?” 라는 것에 올인을 해야 하는데, 즉 주님이 하시는 일에 모든 것을 다 걸면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일에다 모든 것을 다 거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기도의 응답 - 나에게 올인해라 !!
기도의 경우에도 제대로 응답을 받으면 하나의 경우밖에 없는데, 자기가 제 아무리 “주님,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까요?” 라고 해도, 주님은 뭐라고 하시겠는가? “나에게 올인해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구름 속에서 “너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내 아들의 말을 들어라” 라고 한 말씀처럼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응답이라는 것이다. 즉 아들에게 몽땅 다 걸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아들에게 모든 것을 다 걸어야 하는데, 그러니 사나 죽으나 다 주의 것이고, 무엇을 하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도바울의 외침이고 말이다. 그러니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무슨 일을 하는지, 바로 그것만 알아차리면 된다는 것이다.
◈ 나는 쇠해야 하고 주님은 흥해야 !!
물론 말은 하기가 이렇게 쉽지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어려운고 하니까, 세례요한의 경우에 “나보다 먼저 계신 자가 내 뒤에 오신다”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나는 쇠해야 하고 주님은 흥해야 한다” 라고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렇게 오셨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일을 벌이시느냐는 말이다. 세례요한 자기보다 예수님이 먼저 계신 분이지만 뒤에 오셨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분이 오셔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가? 그것이 바로 자기는 쇠하고 예수님은 흥해야 하는, 바로 그렇게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즉 자기는 이제 은퇴를 하고, 주님은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
이렇게 “예수님께 모든 것을 다 건다” 라는 것을 문장으로 서술적으로 표현하면 쉽지만, 그러나 실제적으로 언제나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일은 항상 전복인데, 즉 거꾸로 뒤집고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사건들을 툭툭 터트리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붙잡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붙잡을 수는 없지만, 그런데 지금 우리가 지금 이 교재를 통해서 예수님의 몸에 대해서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렇게 붙잡지는 못해서 그래도 우리가 나름대로 정리를 하고 또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은 바로 아까도 말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 라는 점을 살펴봄으로서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 !!
거기에 대해서 제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굳이 정답이라고 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어떤 일을 하시는고 하니,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하신다는 말이다. 그것을 두 글자로 ‘교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고 하면, 그리스도의 몸의 확장인데, 그렇다면 그 세우는 엑기스(?)가 되는 그리스도의 몸이 어떤 몸인지를 알아야만, 그렇게 되어야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 바로 그러한 점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교재 291페이지를 한번 살펴보자.
** 천국에 합당한 몸 만들기는 맨 처음의 창조원리의 틀 안에서 실시된다.
(창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 2: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창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계속해서 교재 292페이지를 보자.
** 이 본문에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라는 것에 담긴 뜻이 무엇일까? 한 몸이라는 말이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두 사람, 즉 두 몸체로 분리가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으로서는 한 몸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창조원리에 의할 것 같으면, 출처가 되는 분에게 예속된 자는 비록 몸체를 따로 가지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한 몸 관계 속에 놓여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원리이다. 창기와 연합한 자는 창기와 한 몸이라는 준칙과 동일하다(고전 16:16)
(고전 6:16)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고전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
창세기 2장 23절에 보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결코 다른 몸이 아니라는 의미인데, 바로 자기 몸이라는 말이다. 즉 “내 몸과 한 덩어리이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지금 이러한 이야기를 왜 하느냐는 것이다.
◈ 주님의 몸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
이것이 참 중요한데, 어려워도 반드시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을 이야기하는데 왜 창세기 2장을 반드시 들고 나와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말하는 몸에는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반드시 담겨있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창조원리가 빠지고 없으면 그것은 몸이 아니라 흙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흙에서 몸이 되었다, 혹은 뼈가 되었다, 살이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몸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니, 사실은 처음부터 흙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흙이 아닌 이유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담겨있기 때문에, 몸으로 형성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 그리스도의 몸은, 자신의 창조력 발휘로 !!
그렇다고 하면 그리스도의 몸이란 무엇인가? 즉 그리스도께서 창조력을 발휘하는데, 어떻게 창조력을 발휘하시는고 하니,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즉 아담을 만드신 바로 그러한 창조원리가 이제는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主) 개념’ 인데, 신약성경에서 ‘주’, 즉 ‘큐리오스’ 라는 개념은 무엇인고 하니,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그대로 다 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사실은 그대로 모두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완성하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구약에서의 여호와는 예언만 하고 폼만(?) 잡았지, 그 실제적인 완성은 신약에 나타나신 주님께서 다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 그리스도의 몸이 되면 죽지 않아 !!
아무튼 여호와께서 하실 일을 주님께서 모두 다 하시는데, 그것이 신약에서는 완성이니, 구약에서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믿어도 죽었는데, 즉 흙으로 돌아갔다는 말이다. 하지만 신약에 오면,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에 죽지를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죽음을 뭐라고 표현했는고 하니, 옷을 벗는 것으로 여겼고, 그래서 사도바울 자신은 “내가 사나 죽으니 주 안에 거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자기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말이다.
◈ 나사로의 경우에 !!
제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기존 사고방식에 대한 전복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러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사로가 등장하는데, 그가 죽은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고, 나사로는 잠자고 있는데, 즉 죽을병이 아니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려운 것은, 이 요한복음 12장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니, 예수님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런데 나사로는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예 예수님이 그런 말을 하지 말고 차라리 솔직하게(?) “내가 지금은 가지 않고, 나사로가 죽고 난 뒤에 간다” 라든지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 하나 하나가 다 시간과 공간에 얽매인 사람들에게는 전혀 납득이 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만 자꾸 내뱉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런 기존의 모든 사고방식을 깨부수는 주님의 작업인데, 즉 기존의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은 잘못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나사로는 죽은지 4일만에 다시금 살아났는데, 하지만 결국은 다시 이 나사로는 죽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치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속도로와 같은 역사 속에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고 또 죽고 하는, 그런 식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있는 자들에게는 그런 죽고 사는 순환구조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에게는 이러한 것이 다 종결되었다는 말이다.
◈ ‘예수 안’에서는 흙으로 돌아가지 않아 !!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그 어떤 원리가 작용하는가? 끊임없이 계속해서 살려주고 있는 생명의 원리가 있는 곳이 예수 안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란 것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강의하는 것이 언뜻 들으면 횡설수설하는 것 같지만, 지금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무튼 이 몸이란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과거의 구약에서의 우리 몸은 흙으로 돌아갈 몸인데, 그런데 신약에서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 흙으로 돌아가지를 않는가? 그것은 예수 안에 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구약 때는 미완성이었는데, 그냥 예언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흙으로 돌아간 것은 하나의 폼, 즉 일종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신약에서 있어서 영적인 세계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죽음이라는 것 자체가 아예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회당장 딸이 죽었을 때도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잔다고 하셨다는 말이다.
◈ 잠시 ‘언어’에 대해서 !!
여기서 예수님의 ‘잔다’ 라는 말조차도 사실은 예수님께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의미를 제대로 표현하지를 못하는데, 왜냐하면 이 ‘언어’ 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한계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잠시 이 언어에 대해서, 그 한계성에 설명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저쪽 개념과 이쪽 개념에서 서로 동일한 것이 있을 경우에는 그 개념을 겨냥해서 서로 대화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조용필을 이야기하는데, 마침 옆에 북쪽 사람이 있어서 그 조용필을 전혀 모른다고 하면, 적어도 조용필에 대해서는 그 사람과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서로 기존의 통하는 개념을 알고 있을 때는 그 통하는 개념을 기호로 만들었는데, 영어는 ‘A, B, C’로 만들고, 한글은 ‘ㄱ, ㄴ, ㄷ’으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것을 언어라고 하는데, 그러므로 언어는 기존의 개념이 굳혀져 있다고 여기고 사용을 한다는 것이다.
◈ 아니, 예수님이 영어가 아닌 아람어를 ??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슨 말을 사용하셨는가? 아람어로 말씀을 하셨는데, 과연 이 아람어가 하늘나라의 언어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제 아무리 연구하고 분석해도, 거기에서는 인간의 뜻만 나오지 진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신학교 교수들이 착각하고 있는데, 물론 그것을 인정하면 자기들 밥그릇이 날아가니 좀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 인간의 언어는, 은유와 환유를 벗어난 적이 없어 !!
현대의 하이데거나 소쉬르 이후에 언어라는 것은 어떻게 정의가 되는고 하니, 언어는 하나의 우발적이고, 그리고 거기에서 ‘기의(記意)’ 라는 것은, 즉 그 의미라는 것은 떠돌이이고 기껏해야 남는 것은 껍데기에 불과한 ‘기표(記表)’ 밖에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표는 반드시 두 가지로 사용이 되는데, 은유와 환유로 말이다.
여기서 은유라는 것은 다른 사물에 빗대어서 표현하는 것인데, 즉 “내 마음은 호수요” 라고 말이다. 그리고 환유라는 것은, 기존의 보여진 일부분을 이용해서 전체를 말하는 것인데, 즉 부분을 가지고서 전체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 영화에서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 ??
예를 들어서, 남녀간의 성 관계를 할 때, 포르노 영화관이 아니면 그것을 노골적으로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니 어떻게 표현하는고 하니까, 항구에 배가 들어온다든지, 아니면 달이 뜨는 장면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것을 은유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환유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직접 둘이 관계를 맺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침대가 흐트러지고 촛불이 꺼지고 하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변강쇠에 보면 그런 장면이 노골적으로 나오는데 말이다. 산이 흔들리고 바위가 마구 굴러 떨어진다는 것이다(ㅋㅋ). 그렇게 부분을 가지고서 짐작케 하는 것을 환유라고 한다는 것이다.
모든 언어는 이 은유와 환유를 벗어난 경우가 전혀 없는데,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선풍기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이름을 짓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그 물체는 변함이 없는데, 이름은 얼마든지 마음대로 지을 수가 있고, 붙이기 나름이라는 말이다.
◈ 예수님은, 인간의 말을 사용하면서도 통하지 않도록 !!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이 하셨다고 해서 절대적인 말씀이 아니고, 그것은 예수님의 신체가 인간들의 신체에 섞이다보니 인간들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말을 빌려온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인간의 말을 사용하면서도 말이 통하지 않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전략이라면 전략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서도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하셨는데, 아니 귀가 없는 자가 도대체 누가 있는가? 그러니 그것조차도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부부싸움을 하다가 마누라에게 귀를 물어뜯긴 자라면 몰라도 말이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전혀 분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하시는데, 아니 귀가 들으려고 있는 것이지, 듣지 않으려고 있는 게 전혀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은 절대적인 봉쇄이고 단절이라는 것이다.
◈ 다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가?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지금 우리가 강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일을 실시하고 있는지, 그것을 살펴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살펴보니 철저한 차단과 봉쇄로 일관되게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천국에 오지 마라. 지옥에 가라. 그것이 너에게 맞다” 라고 하시면서, 우리 인간들을 철저하게 배척하고 거부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기존의 구원관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다시 ‘몸’에 대해서 !!
이제 ‘몸’에 대해서 계속해서 하겠는데, “이 몸은 신약시대에서는 예수님이 완성해나가신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미 결론이 끝난 것이 아닌가?” 라고 할 수도 있는데,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신약에서 어떤 결론을 내릴 때는 그 결론에 담겨있는 뜻을 알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구약을 탐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신약의 에베소서 2장에서 몸이 나왔다고 해서 이 에베소서로 바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말이다. 도대체 그 몸이 구약의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먼저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구약의 창세기 2장에 나오는 몸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 창세기 2장 - 창조원리인가? 하나님의 형상인가?
지금부터 창세기 2장을 계속해서 하겠는데, 여기서 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담겨있다는 말이다. 즉 흙에서 몸이 되는데, 그것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원리가 담긴 체로 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 신학자들은 이것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즉 흙에서 창조원리가 담겨서 몸이 된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집어넣어서, 즉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서 흙에서 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즉 이렇게 흙에서 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몸이 죄를 지어서 흙이 된다면 무엇을 잃어야 하는가?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면 인간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어요 ??
그렇게 되면 그만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그것이 마치 하나의 창조원리처럼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이 여기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데,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 인간에게는 전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것이 좀 어려운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제가 이렇게 그림을 하나 그렸는데, 여기에 이렇게 사람이 하나 나왔다는 말이다. 그런데 제가 여기 있는 이 사람을 그만 지워버렸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니 이 그림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림을 그린 작가가 없어졌다고 한다는 말이다. 사실은 그림이 없어진 것이지, 그림을 그린 작가가 없어진 것이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즉 우리가 이렇게 원래 몸이 무엇인지를 규정한다고 하면, “무엇은 남아야만 하고 무엇은 없어져야만 한다” 라는 원칙을 모두 다 포함되는 원리로 설명을 해주어야만, 그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몸을 제대로 설명하게 된다는 말이다.
◈ 여기에 형상이 있다. 알아서 잘해 ??
그런데 그들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지고 설명을 하게 되면 무엇이 날아가는고 하니, 결국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던져놓고는 나 몰라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여기에 하나님 형상이 있다. 알아서 잘해” 라고 말이다.
* 하나님 : 여기에 하나님 형상이 있다. 받았지?
* 인간들 : 예, 받았습니다.
* 하나님 : 알아서 잘해?
* 인간들 : 잘 알겠습니다.
* 하나님 : 그런데 왜 그래?
* 인간들 : 그만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 하나님 : 아이쿠,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네.
* 인간들 : ? ? ?
지금 그들이 이야기하는 스토리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맞는 이야기인가? 즉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놓고 방치하는 것이 과연 맞느냐는 말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몸에서 흙으로 돌아가도 변함없이 관여하고 있다고 하는 어떤 체제라고 하는 것을 이 몸에다가 적용을 시켜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논리적으로도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하도 기존의 신학들이 많기 때문에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비록 자기 몸이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처음에 몸을 만든 그 원리가 일관되게 흙이 되도록 하는 것에도 지속적으로 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약속’ 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약속 말이다.
◈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약속’ !!
다시 정리를 해보면, 흙에서 몸이 될 때에 창조원리가 주어지는데, 이 창조원리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다는 것이다. 이 약속이 나중에 보면 예수님인데 말이다. 즉 예수님이 담긴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그 몸은 장차 오실 몸의 모형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 보면,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표상’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 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 !!
물론 이것을 ‘예표’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신약시대에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신약시대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결론에 해당되는데 말이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아담은 오실 분의 예표이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아담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이마 어떤 분은 “목사님, 그것은 신약시대의 관점이 아닙니까?” 라고 하지 싶은데, 그러나 방금 말했지만 신약시대의 관점이 바로 결론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신약을 알고 나서 구약을 알아서, 그 둘을 합쳐서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니고, 신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모든 문제점의 종착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담은 예표이고 모형이다” 라는 관점을 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창세기 2장을 해석해야 창세기 2장이 율법이 아닌 복음이 된다는 말이다. 또한 그렇게 해야만 모든 구약의 말씀이 다 복음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원래 성경말씀이 다 복음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아담이 모형이라고 한다면, 과연 처음의 아담에게 무엇이 담겨있었는가? 하나님의 약속이 곧 창조원리로서 거기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약속은 비록 아담이 죄를 짓더라도 취소되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약속은 한결같이 내재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형상은, 약속을 실현시키는 주체자 !!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던져놓는 “야, 알아서 잘해” 라고 해서, 인간이 그만 “아이쿠, 죄를 지어서 그만 잃어버렸습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형상은 잃어버리고 되찾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시키는 주체자라는 것이다. 즉 보이지 않는 어떤 인물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고 하니까, 이미 그 형상이 되시는 분이 약속을 실현하는 예표로서, 그렇게 인간을 처음부터 만든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담은 창세전부터 이미 예수님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 ‘몸’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내포 !!
그러므로 이 ‘몸’ 이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내포되어있는데, 그래서 이 몸의 진의(眞意)는 구약부터 신약까지 계속해서 이어져서 그 내막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즉 몸이 담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다 쏟아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런 문제가 다 나온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결코 이 몸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이 몸을 우리의 구원문제와 결부시키게 되면, 성경내용이 전혀 엉뚱한 길로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 하나의 몸이 두 개가 되면서, 그만 흙으로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에 이렇게 아담의 몸이 있고 또 하와의 몸이 있는데, 이것이 이렇게 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몸이 하나인데, 한 몸이라고 하기보다는 하나의 몸이라는 표현이 더 좋지 싶은데, 아무튼 이렇게 몸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선악지식을 포함하게 되면 하나의 몸에서 그만 두 개의 몸이 되면서, 이 두 개의 몸이 모두 원래 있던 하나의 몸에서 그만 다른 세계로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원래 이 몸은 선악과는 상관없이 생명나무의 과일과 관련이 되어있는 몸인데, 그런데 그만 선악적인 지식이 오게 되면 두 개의 몸이 되면서, 그 어느 몸도 원래의 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몸으로, 즉 둘 다 흙이 되고 마는 실패한 몸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새로운 몸이 되려고 하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하고 난 다음에 무엇과 격리를 시키는고 하니, 생명나무과실을 따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아담과 하와를 그것과 분리를 시킨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려면 이 생명나무과실에서 나오는 새로운 몸이 하늘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왜 생명의 떡인가?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내가 곧 하늘에서 온 생명의 떡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신체가, 즉 새로운 몸이 나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땅에서 예수님의 신체와 우리 신체가 그만 대비가 되는데, 예수님의 신체는 성령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참으로 희한한 몸이 되어서 만지면 그냥 낫는다는 것이다. 귀신도 좇아내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 신체는 전혀 그렇지가 않는데, 우리는 남을 낫게 하기는커녕 자기 몸도 낫게 못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경우에도 자기를 위해서 기도했지만 헛방이었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는 몸은 후패할 몸인데, 그렇게 후패할 몸을 가지고서 어떻게 해본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인데, 사도바울이 자기의 후패할 몸을 가지고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 몸에 있는 가시를 위해서 3번씩이나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응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러한 기도를 하지도 않은 자들을, 즉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절름발이를 걷게 하고, 눈 먼 사람을 보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성령의 능력이 육적인 몸에 관여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즉 소경이 눈을 떴다고 하는 것은, “기존의 우리 몸은 죽어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은 그런 일들을 하셨다는 것이다.
◈ 여기, 새 자동차를 가져가라 !!
쉬운 예를 들어서, 우리가 완전한 고물 자동차를 주님께 가지고 가니, 주님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어디가 고장이고? 라이터를 바꿔줄까?”, 아니면 “새 차로 바꿔 줄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시건이(?) 없어서, “라이터를 바꿔주세요. 잘 보이지를 않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라이터는 일종의 폼이고 예표인데, 정말로 주님이 준비한 것은 새로운 자동차라는 말이다. 고물 자동차는 수리를 해도 다시 망가지는데 말이다.
히스기야가 기도를 해서 몇 년을 더 살았는가? 15년인가 더 살았는데, 150년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15년을 더 살다가 다시 죽었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기도를 하면 더 살게 해주시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모형이고 예표이니 말이다.
◈ 예수님의 몸을 기대해서 인간을 !!
그렇다면 우리의 몸은 무슨 몸인가? 그것은 바로 약속인데, 처음에 하나님이 만드신 몸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영원토록 죽지 않는 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약속이고 말이다. 즉 예수님의 몸을 기대해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부활은 하는데, 하지만 무슨 몸으로 부활하는가? 저주의 몸으로 부활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는 죽음이 없는데, 왜 이 땅에서는 죽음이 있는가? 그 전체가 곧 예표인데, 무슨 예표인가? “그리스도의 몸은 죽지 않는다” 라는 것을 보여준단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만든 몸은 그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기에, 그 몸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죽지 않는데, 그런데 그 몸의 속성상 하나는 저주의 몸으로 부활을 하고, 즉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벌을 받는 몸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몸은 축복의 몸인데, 즉 하늘의 영광을 받는 영원한 몸이 있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 몸의 방식으로 예수님의 그 사랑을 영원히 증거하고 찬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조물은 이 두 가지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 나니 인간은 그야말로 깨뿔도 아무 것도 아닌데, 즉 인간은 철저하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악한 역할을 하든 착한 역할을 하든지 간에 말이다. 여기서 혹시 여러분은 자괴감을 느끼지 않나요?
* 질문 -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20장의 둘째 사망은 무슨 의미인가요?
요한계시록의 언어는 지상의 언어를 계속해서 사용하는데, 하늘에서는 언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자체가 형이하학적인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이 지상에서는 지상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고, 현재 통용되는 우리의 개념을 사용해서 묵시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방금 질문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둘째 사망’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한데, 그래서 ‘둘째 사망’ 이라고 하는 이상한(?) 표현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 땅에서 둘째 사망이란 말은 없다는 말이다. 사망이면 그냥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인데, 도대체 두 번째 사망이 무슨 말이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둘째 사망이 중요한데 !!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에서 사망을 두 개로 보는데, 흔히 우리가 말하는 사망은 첫째 사망인데,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것은 사망도 아니라고 본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둘째 사망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중요한 것은 둘째 사망이지 첫째 사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첫째 사망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다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런데 둘째 사망은 그것이 아니라, 유황불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바로 이 중요한 둘째 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에 보면,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사망이 없다는 것이다. 첫째 사망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몸 자체가 하나의 예표 - 주님은 영원히 살아계신다 !!
이렇게 보니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몸 자체가 하나의 예표가 되는데, 즉 “주님은 영원히 살아계신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표로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신체도 우리 마음대로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 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렇다고 하면 도대체 그리스도의 몸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6장에 나오는데, 영적인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육적인 모임이 아니고 말이다. 즉 비록 육은 서로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서로가 하나라는 것이다.
(고전 6: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 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고전 6:16)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고전 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 그리스도의 몸은, 영적인 성도들의 모임 !!
다시 강조하지만, 그리스도의 모임은 영적인 성도들의 몸인데,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이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니 교회, 내 교회’ 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교회인가?) 이 몸은 전혀 육체적인 몸이 아니기에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우리가 다니는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봉사한다는 것이다. 자기 소유의 교회는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큰 교회, 작은 교회’ 라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말이다. 작은 주의 종이 어디 있고, 큰 주의 종이 어디 있는가? 교회자체가 전혀 자기 소유가 아닌데 말이다.
◈ 우리 몸은 예수님 몸의 영원성을 !!
여기서 마지막 결론을 다시 보겠는데, 그렇다면 마지막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까,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체는 어떤 의미인고 하니,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신체는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로서의 신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이 세상에서 버티면서 그 증거물로서 활용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체는 날마다 후패하는데, 그렇게 후패해야 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비록 후패하지만, 우리의 속은 날마다 새롭다” 라는 것을 통해서 영원한 분의 능력이, 즉 성령의 능력의 활동을 후패하는 우리의 신체마저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후패하는 우리 신체가 영원한 분의 능력을 전혀 방해할 수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아직도 이렇게 험악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데, 두 몸이 아니고 말이다. 아담과 하와처럼 두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 교회는 일제시대의 목욕통 ??
혹시 일제시대 때 사용하던 목욕통을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저는 그 목욕통을 볼 때마다 교회가 생각난다는 것이다. 혹은 똥을 퍼는 똥통이라고 해도 좋고 말이다. 그것을 제가 지금부터 한번 그려보겠는데, 혹시 이렇게 생긴 통을 보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일제시대 때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림이 영 이상한가요?
이것은 일종의 조각목인데, 이것을 주워 모아서 넝쿨을 가지고 묶고, 밑에는 합판을 깔아서 물이 흐르지 않도록 했다는 말이다. 이것을 적게 만들면 통 푸는 바가지가 되고, 중간 정도로 만들면 똥을 담는 똥통이 되고, 그리고 더 크게 만들면 목욕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 보면 이렇게 텅텅 비어있는데, 그런데 이런 조각목을 하나씩 묶는 끈의 모든 시선은 다 어디로 모아지는고 하니, 텅 비어있는 안으로 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 안에 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주님이 말이다.
◈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 !!
그러니 초대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할 때, 옆에 베드로를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고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이 아니라 옆에 있는 눈에 보이는 사도들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눈에 보이니 개별성이 있고, 그래서 속일 수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뭐라고 하는가? “너희들은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계시는 성령님을 속이는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 조각목들이 자기 역할을 다 하고서는 그만 빠져버린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일종의 조각목인데, 그것이 사도행전 5장의 말씀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왜 보이지 않는 분이 아닌 보이는 자들을 의식하느냐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의 경우에도 !!
그리고 성경에 또 있는데,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보면, 일곱 교회를 묶어놓았는데, 그런데 이 교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교회들은 빠지는데, 그러면서도 이 일곱 교회는 영원히 주님의 손안에 있으니 다른 것으로 대체가 된다는 말이다.
이것을 두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라고 하는데, 즉 지정된 좌석에 계속해서 다른 것으로 교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꾸만 교체가 되니 주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의 수는 전혀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 그리스도의 몸은 그야말로 퍼펙트 !!
그러므로 결국은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몸인데, 즉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자들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영적인 모임에 대해서는 전혀 하자가 없이 아주 단단하게 묶여져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집사나 목사에게 신경을 쓰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보이니 말이다. 당연히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영적인 안목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에베소서 4장에서는 “우리가 매는 띠는 하나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당연히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이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요” 라는 것이다. 즉 두 몸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말이다.
(엡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 4:6) 하나님도 하니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단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양이 !!
그러니 성도에게는 두 개의 몸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머리가 하나밖에 없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어떻게 몸이 두 개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머리가 하나라는 것은 몸도 하나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리고 지체가 있을 뿐인데, 그 지체는 한 몸이라는 증거로서 지체라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표현하자면, “단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양이 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즉 다양을 통해서 단일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양하다고 해서 단일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우리는 매일같이 묵시로부터 공격을 당해야 !!
바로 이렇게 한 몸이 되게 하는 능력은 죽어도 다시 사는 능력으로서 역사하는데, 바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성경이란 그렇게 긴긴 역사로서 이어져왔다는 것이다. 그 구약성경의 긴긴 역사가 그대로 아담을 향한 아담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이 아담의 역사를 공격하는 것이 묵시이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약속이 아담의 역사를 공격한 것이라면, 지금 우리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여전히 아담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같이 묵시의 공격을 받아야만 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묵시로부터 공격을 말이다.
◈ 죽어도 산다, 죽어도 산다 !!
* 인간 : 주님, 이런 문제가 있는데요?
* 주님 : 이제는 죽어도 산다.
* 인간 : 이런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요?
* 주님 : 그래도 죽어도 산다.
* 인간 : 아니, 지금 이렇게 마누라와 싸워서 전치 3주 진단이 나왔는데요?
* 주님 : 아내가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해라. 죽어도 산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성경말씀이 이해되는데, “돈이 있는 자는 다 쓰지 못한 것 같이 하라” 라는 말씀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어떻게 이해가 되는고 하니까, 그것이 우리의 구원문제가 아니라, 원래부터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에, 즉 한 몸 안에서는 그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하지 말라” 라는 차원이 아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기를 당하고, 바람을 피우고, 자살을 하는, 그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역시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즉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어차피 우리는 흙으로 돌아갈 몸인데, 주님이 교체를 하면 하는 것이니 말이다. 주님이 교체를 하는데,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저항을 하고 말고 하느냐는 것이다.
◈ 몸이냐? 흙이냐?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몸은 사실 몸이 아닌데, 그냥 흙덩어리이지 말이다. 그러므로 흙이 흙을 방어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 흙에게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흙은 그냥 손을 떼면 되고, 몸이 다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몸이 어떻게 역사하느냐는 것인데, 거기에 따라서 그렇게 몸이 되어 가는데,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져간다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이 어떠한지,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교재에 보면 다 나오는데, 296페이지까지가 바로 지금까지 제가 강의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도록 하겠는데, 이제 교재 297페이지에 나오는 구약 에스겔을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 목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
* 질문 - 목사님,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선택이고, 그래서 교체도 주님이 알아서 하시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12제자를 선택했을 때, 물론 그들은 한 명은 아니었는데,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에서 가롯유다를 취한 것인가요?
최 간사님의 질문이 녹음된 것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잘 들리지 않을지 몰라도 제가 다시 질문을 정리해보겠는데, 다음과 같은 질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선택을 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머리가 하나이니 몸도 하나이고, 그래서 그 하나의 몸을 위해서 다양한 지체를 선택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체 개인의 입장에서, 자기가 선택이 되었는지 이런 원리를 가지고 어떻게 규정할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즉 자기가 구원이 되었는지, 되지 않았는지, 그런 틀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아까 두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즉 예수님은 인간적인(?) 역사적 개념도 이야기하고, 또한 예수님은 생뚱맞게도 묵시적인 개념도 이야기해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역사적인 개념으로 보자면, 그것은 개인구원인데, 예수님이 여기에 대해서 무시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이다.
◈ 가롯유다의 경우에 !!
예를 들어서, 가롯유다에게 “차리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라는 것이 그러한 경우인데,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차라리 가롯유다를 만들지 말지” 라고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취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가롯유다 개인의 입장에서 말씀하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잠시 가롯유다가 되었다고 가정을 하면, 지금 가롯유다가 구원을 받으려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가롯유다에게 마귀를 집어넣어서 그만 지옥에 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롯유다의 입장에선 “나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라고 말을, 지금 가롯유다 밖에서 예수님이 대신해서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지금 가롯유다의 마음이 어떠한지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두 알고 계시는데, 즉 가롯유다가 어떤 것을 챙기려고 하는지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그것도 이야기하고, 또한 이것도 이야기하고, 그렇게 둘 다를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 구원은 반드시 주님과 연결되어서 !!
여기에서 출발해서 다시 정리를 하면, 개인이 선택을 받는 것을 과연 확정지을 수 있는지, 개인적으로 말이다.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안 되고, 그 개인은 누구와 연결이 되어야 하는데, 즉 “나는 창세전에 주 안에서 예정이 되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어떻게 어떻게 선택이 되었다는 말은 할 수 없고 말이다.
이렇게 “나는 주 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할 때, 여기서 ‘나’ 라는 것은 주님에 의해서 굴복을 당하고 승복을 당한, 주님의 지체로서 ‘나’ 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주님과 결합시켜서 표현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코 주님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 옆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렇게 주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어느 놈이 이야기하지 못하겠노? 나도 그렇게 말하겠다. 아마 가롯유다도 그렇게 말했을 걸”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사람은 자기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누구를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고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남에게 좀 알아달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남에게 좀 알아달라고 그렇게 “나는 주 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했다면, 그 사람은 결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은 지금 모두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주 안에서” 라는 말을 상투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말을 사용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그래서 사용하는 가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에게 이해되도록 하기 위해서 고백을 하는 것과, 객관적으로 “이렇게 구원이 됩니다” 라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것을 다르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가롯유다야,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라는 것을 가지고 구원론을 정립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가롯유다가 구원이 되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따라서 구원에 관한 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다 알아서 하신다” 라는 것에서 출발해버리면, 그렇게 되면 모든 책임이 가롯유다가 아닌 예수님에게 다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 모든 것은 다 말씀대로 !!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고, 도대체 예수님이 가롯유다를 보고 “가롯유다야,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라는 말씀을 왜 하셨는지, 즉 어떤 말씀을 하려고 그렇게 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아야만 하는데,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은 다 말씀대로 된다” 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가롯유다에게 악한 역할을 맡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롯유다에게 “가롯유다야, 너는 개인적으로 보자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다 말씀대로 된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누구에게 예수님을 증거할 때는 상대방에게 개인적인 것도 이야기를 해주고, 즉 “‘나는 주 안에서 구원이 되었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세요” 라는 것도 이야기해주고, 또한 “사람이 구원이 되고 안 되는 것은 사람의 고백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것은 창세 전에 이미 예정이 되었습니다” 라는 것도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들 둘 다 이야기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정리를 하자면, “주 안에서 나는 이미 구원이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을 해주어야, 그것이 바로 구원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물론 ‘주 안에서’ 라는 것이 상투적인지 아닌지는 본인만이 알 수가 있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한 것은 굳이 알 필요도 없고, 사실은 알 수도 없다는 말이다. 자기 소관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 겨울수련회 - 인간의 자유에서 윤리가 나올 수 있는가?
참고로 이야기를 하면, 이번 겨울수련회에서 이러한 점을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즉 “인간의 자유에서 윤리가 나올 수 있는가?” 라고 말이다.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떻게 철학적인 하나님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그것을 주제로 해서 살펴보고자 한다는 말이다. 그러한 과정을 지금 글을 쓰면서 준비하고 있는데, A4 용지로 50장 정도로 썼는데, 아마 70장 정도로 마무리가 되지 싶은데 말이다.
그것을 조금만 이야기해 보자면, 인간의 자유를 가지고 윤리를 바라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절대선=절대악’이 되고 마는데, 바로 그러한 모순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윤리는 도무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말이다.
◈ 잠시 ‘교체’에 대해서 !!
그리고 아까 질문 중에서 ‘교체’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아무튼 주님은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교체했는데, 나중에는 일곱 교회가 다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빠져 나온 교회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빠져 나온 개인은 또 어디로 가느냐는 것이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 개인이 천당에 가는가? 지옥에 가는가?” 라고 하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빠져 나오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말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지옥에 갔는가? 또한 아버지의 첩과 간통한 아들이 지옥에 갔는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그는 영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찬식을 하다가 자기를 제대로 살피지 못해서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지옥에 가는가? 그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성찬식을 하는 도중에 “니는 그만 지금 죽어” 라고 하는 그 역할을 담당했을 뿐이란 것이다. 그 사람이 죽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몸은 이런 식으로 존속한다” 라는 것을 외부에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병에 걸리게도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몸’ 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바로 그것을 기능적으로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 주님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막아 !!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개인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다만 그리스도의 몸은 그런 식으로 빠졌다가 들어왔다가 한다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들이 다니는 교회가 다 그렇지 않는가요? 교인들을 보면 얼마나 속이 썩는지 모르는데, 그렇게 교회에 나온다고 찰떡같이 약속을 하고는 한 달이 다 되어서 전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성경적으로 따져보면, 그 사람이 나오기 싫어서 교회에 안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막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즉 “교회에 나오는 인간들아, 너희들 힘으로 나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자기가 나오기 싫어서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교회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철저히 그 사람은 나오지 않을 사람인데, 물론 그러다가 나중에 나올 수도 있고 말이다. 물론 그런 조치는 또 주님이 나중에 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몸은 머리가 되시는 분이 다 알아서 하시는데, 그렇게 해서 몸이 움직인다는 말이다. 결코 지체가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지체는 지체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다 알아서 하는데, 그러니 지체를 교체를 하고 싶으면 머리가 알아서 얼마든지 교체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에스겔의 ‘새성전’에 대해서 !!
아무튼 질문에 답변을 하다 보니 조금 곁길로 갔는데, 교재 297페이지에 보면 구약 에스겔에 대해서 나오는데, 그것을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이 에스겔서에 보면 새 성전이 나오는데, 그런데 이 새 성전에는 물이 흘러나온다는 말이다. 새 성전의 문지방에서 계속해서 물이 흘러나온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그것이 거의가 다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흘러나오는 물이 어떤 물인가? 그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죽었던 시체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에덴동산을 연상시키게 하는데, 에덴동산의 중앙에는 무엇이 흐르는가? 강이 흘러서 그 강물이 4개의 강이 되는데, 그런데 그 4개의 강물이 흐르는 곳마다 각종 보석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강물이 흐르는 중앙에 보면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있다는 말이다.
(창 2: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 2: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창 2: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 2: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창 2:14)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 에스겔의 새성전은 에덴동산의 예표 !!
그러므로 에스겔의 새성전은 에덴동산의 예표라고 할 수 있는데, 무슨 예표인가? 머리가 되시는 분에 의해서 모든 지체가 산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에덴동산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고 말이다. 즉 이 지상의 땅의 개념은 영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머리 때문에, 즉 부활의 능력으로 인해서 그 몸의 지체들이 산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그래서 에스겔에서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전이라는 것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데, 거기서는 성전을 예수님 자신의 육체를 두고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성전이 바로 예수님의 육체라는 말인데, 예수님의 영이 아니고, 머리도 아니고 말이다. 성전은 예수님의 신체, 즉 육체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 오늘 강의를 정리하면 !!
이제 오늘 강의를 정리하도록 하겠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의 신체를 보내셔서 뭔가를 나타내려고 하고 어떤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신체는 우리 신체와는 달라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신체인데, 물론 우리 신체는 한번 죽으면 살지 못하는 신체이고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우리 신체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고 보니까, 우리의 신체는 처음부터 생각한 그런 몸이 전혀 아니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런 제대로(?) 된 몸이 아니라,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임시로 만들어낸, 즉 흙으로 된 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예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위해서 태어났는데, 그래서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말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 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 복을 받은 몸과 저주를 받은 몸만이 !!
그런데 여기서 몸이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먼저 하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몸이 있는 반면에, 또 하나의 몸은 그리스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즉 그리스도의 심판을 보여주는 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의 60억 인구는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이 두 가지 중에서 하나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든지, 심판을 보여주든지 말이다. 즉 하나님의 복을 받은 몸과 저주를 받은 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몸이 지금도 수없이 태어나고 있는데, 특히 중국과 인도에서 엄청나게 말이다. 인도는 앞으로 15억의 인구가 되면서 중국을 앞지를 것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계속해서 생기는데, 그런데 그런 가운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과 에이즈와 항토병과, 또한 이름 모를 수많은 질병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보면, 제단에서 일어나는 성도의 기도로 인해서 심판이 주어지면서 계속해서 이런 사건들이 벌어진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사는 지구의 멸망이 서서히, 혹은 급작스럽게 다가오는데, 즉 세상이 그렇게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 때문에 해체가 되는가? 그리스도 때문에 해체가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 그것으로 되었지 않느냐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의 신체가 영적인 신체로 탈바꿈을 할텐데, 하지만 지금은 여전히 우리는 후패하는 신체를 가지고 있기에, 어떻게 하면 더 잘먹고 잘사는지, 그런 것에 연연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임을 알아서 오직 그리스도의 머리됨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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