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교회를 넘어서 18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5 본문
대구050704교회를넘어서18그리스도의몸으로서의교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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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대구강의 11] - 교회를 넘어서 18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5
05,07,0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예수님, 당신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지난 시간에 예고한 대로 어떻게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지, 즉 예수님의 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육의 몸이 영적인 몸이 되는지, 거기에 대해서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의 ‘중보기능’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말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예수님이 현재 우리가 있는 인간세계에 이렇게 오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 세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전혀 구원이 될 자격도 없고 권리도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인간을 추방을 시킬 때, 그렇게 추방을 당해야 하는 이유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추방할 때의 그 정당성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즉 인간들은 계속해서 그 추방의 정당성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자기들이 괴롭다고 하는 이유 때문에, 그것 때문에 인간들이 임의로 그 형벌과 저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추방된 상태에서 말이다.
◈ 인간은 구원받을 권리가 없어 !!
그것은 전혀 하나님이 허용하지 않는데, 그 근거가 바로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천국이라는 것이 있고, 구원이라는 것이 성사가 된다는 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천국과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인데, 그것은 인간들이 괴로워서 치는 몸부림이고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추방당한 인간들의 말은 전혀 들을 필요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과 구원이 주어진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인간들이 아닌 하나님께서 따로 누군가와의 계약에 의해서, 즉 언약에 의해서 천국과 구원이 형성된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철저히 추방당한 입장이니 말이다.
◈ 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되었는가?
그렇다면 어디에서 추방이 되었는가?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데, 우리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된 줄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는가? 물론 맞는 말인데, 창세기 3장에도 분명히 나오고 말이다. 하지만 무엇을 목적으로 해서 그렇게 추방이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인간들을 추방시켰다는 말이다. 즉 생명나무의 과실이 인간들보다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추방을 시켜서, 생명나무와 인간들을 격리시킨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저주를 받아야 하고, 그 저주의 끝은 죽음이라는 것이다. 남자는 이마에서 땀을 흘려야 하고, 여자들은 해산하는 고통을 맛보아야 하고 말이다. 즉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전학을 해버리고, 하나님은 생명나무의 과실을 보호함으로 말미암아서, 즉 이러한 생명나무의 과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천국과 구원을 만들어내신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곧 누군가가 오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가 오신다는 말이다.
◈ 예수님에게 어떤 요소가 있기에?
지금 우리는 무엇이 궁금한고 하니, 오늘 강의의 핵심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에게 어떤 요소가 있기에 구원될 자격도 전혀 되지 않는 인간들이 천국을 가게 되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어떤 요소가 있기에 말이다. 분명히 우리 인간은 구원을 받을 자격도 없고 권리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들이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예수님에게 어떤 요소가 있기에 그런 것이 가능하냐는 말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기존의 교인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에 어떤 오류가 있는고 하니,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사랑하사 예수님을 보내셨다. 그래서 그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 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는 말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구원받을 자격도 없는 인간들이 왜 메시야를 찾는가?
그런데 방금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인간들은 구원될 자격도 없고 권리도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의 바깥에서 메시야라는 외부인이 왔을 때 그들이 예수님을 “주여, 주여!” 라고 부르짖는데, 하지만 그렇게 부르짖는 의식이 무엇인고 하니, 결국은 자기도 한번 나름대로 살아야만 되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은 죽고 난 뒤에는 좋은 곳에 가야 되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그런 자격과 권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지금 이 땅에서는 고생하지만, 그래도 나중에는 호강을 해보겠다고 하는 심보로 메시야를 찾고 불러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은, 지옥에 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본인의 공로가 거기서 발생하게 된다는 말이다. 즉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자기처럼 부르짖지 않았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자기는 그런 주님을 부르고 또한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믿은 공로로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 단절인가? 가능성인가?
그런데 바로 이런 상식적인 것들이, 그런 신학이 범람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구원을 단절로 보지 않고, 즉 구원을 예수님의 능력으로 보지 않고, 가능성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가능성으로 말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도대체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야만 그 불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으로, 즉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지, 그것을 알아보려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 가능성이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그런 가능성이 있고, 그런 가능성을 제대로 발휘한 사람만이 천국에 간다고 하는, 그것이 이미 상식화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것을 먼저 염두에 두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을 전제로 !!
그러므로 구원받을 가능성, 그런 구원받을 가능성을 발휘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이 한 행동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 구원이 되어야지, 그런데 가능성이 있는데서 구원된다고 하면, 그것은 인간들의 능력여하의 차이에 의해서 결판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잘나서 구원을 받은 것인데, 똑똑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고, 자질이 뛰어나서 구원을 받은 것이고, 종교성이 많아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여기서 기존신학의 허점이 나오는데, 이러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교회가 성경책을 가지고 어떻게 제대로 개발을 시켜줄 것인지, 그것을 서비스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을 자극해서 그 잠재되어있는 가능성을 어떻게 개발해줄 것인지, 여기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목회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런 목회의 힘을 모으기 위해서는 가능성의 정당성, 즉 인간에게는 구원을 받을 정당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교회에서는 신학이라는 것을 만드는데, 그러면 그 신학을 분석해보면 무엇을 나오겠는가? 즉 “신부가 목사가 시키는 대로 가능성을 가지고 시도를 해보면, 구원이 될 수 있는 근거가 여러분 속에서 발생합니다” 라는 식으로 신학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 결국은, 신학은 인간에게 희망을 !!
삼위일체가 어떻고, 예정론이 어떻고, 신론, 인간론 등등, 온갖 신학을 모두 동원해도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 것인데, 그 희망이 무엇인가? 외부의 도움이 없이도 본인의 가능성만으로도 자기가 알아서 잘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외부의 도움이라는 것도 어떠한가? 일방적으로 전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구원받을 가능성을 깔짝깔짝 자극을 시켜서, 뭔가 그동안 몰랐던 자기의 능력을 외부에서 자극을 주니, “아하, 나에게도 이런 구원을 받을 자질이 이미 넉넉히 있구나. 그런데 이전에는 왜 몰랐지?” 라고 하는 것을 자각하게 만드는 도움이라는 것이다.
◈ 우리 인간은 시체가 아니야 ??
그러니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등신과 같은 인간을 그냥 공짜로 데리고 가는, 즉 그냥 시체와도 같은 인간을 그냥 데리고 가서 구원을 시켜주는 것은 어떠한가? 그것이 비록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일반신학에서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용납을 하지 않는가? 만약에 시체를 데리고 가듯이 그렇게 낚싯대를 가지고 그렇게 낚아서 가버리면, 그렇게 되면 전적으로 인간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파괴시켜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가능성을 파괴시키게 되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들은 뭔가 한 수 배워서 그 배운 기술을 가지고 구원을 따내려고 왔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의 가능성조차도 박살을 내버린다고 하면, 자기는 15년을 교회에 다녔는데 당첨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무모하고 불확실한 짓을 할 것 같으면 교회에 오는 희망자체가 좌절되고 만다는 말이다. 만약에 그런 희망이 좌절되면 어떻게 되는가? 아무도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어야, 무엇을 하든지 그런 희망이 있어야 그래도 기대를 걸고서 매진을 하든지 말든지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런 구원받을 희망조차도 전혀 없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오고 밤을 새워서 기도를 하고 하느냐는 것이다.
◈ 레이기 8장에 제사장 위임식이 !!
여기서 미리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언약 속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까, 구약 레위기 1장부터 8장까지 보게 되면 나오는데, 특히 레위기 8장을 보면 아론과 그 아들들의 제사장 위임식이 나온다는 말이다. 레위기 같은 성경도 우리가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레 8:18) 또 번제의 수양을 드릴새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수양의 머리에 안수하매
(레 8:19) 모세가 잡아 그 피를 단 주위에 뿌리고
(레 8:20) 그 수양의 각을 뜨고 그 머리와 각뜬 것과 기름을 불사르고
(레 8:21) 물로 내장과 정갱이들을 씻고 그 수양의 전부를 단 위에 불사르니 이는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드리는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
(레 8:22) 또 다른 수양 곧 위임식의 수양을 드릴새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수양의 머리에 안수하매
(레 8:23) 모세가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아론의 오른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바르고
(레 8:24)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 오른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그 피를 바르고 또 그 피를 단 주위에 뿌리고
여기에 보면 이렇게 제사장 위임식을 하면서 피를 뿌리고 하는데, 그 피가 어디서 생산되는가? 공장에서 만드는 것인가? 제사장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데, 즉 히브리말로 메시야인데, 그러니 장차 오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제사장 위임식을 하게 되는데, 그러니 장치 오시는 분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야가 온다는 것이다.
◈ 여기에 나오는 ‘피’는 어디서?
그런데 이 메시야는 어떠한가? 우리 인간들과는 철저히 분리된 분인데, 그러한 분리의 의미가 강하다는 것이다. 여기 레위기 8장에 나오는 제사장 위임식에서도 철저하게 분리되는데, 지금 아론이 손을 들고서 자신해서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닌데, 즉 자기의 가능성을 보고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방금 이야기한 것이 모세언약 속에 포함이 되어있는데, 이 모세언약이라는 전체적인 언약의 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인간들을 구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고 거룩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취지가 강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 하나님의 취지는, 인간구원이 아니라 !!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대목인데, 즉 “나를 찾아와서 나를 한번 구원해보지. 나를 땡겨보지” 라는 것이 아니라, “어느 놈이 저렇게 시끄럽노? 저리 꺼지라고 해라” 라고 하면서 보내버리고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약속 속에다 무엇을 집어넣어 놓았는고 하니까, 거룩하고 완벽한 창조의 피조세계를 전혀 인간과 의논하지 않고 임의로 만들어내겠다는 취지가 강렬하게 담겨있다는 것이다. 지금 전혀 감동이 되지 않는 분위기인데 말이다. (ㅋㅋ)
예를 들어서, 어떤 집이 없는 사람이 집을 지어달라고 탄원서도 내고 벽돌도 얻어다가 자기가 한번 지어보고 하는데, 그런데 집을 짓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귀찮다고 하면서 그만 나가라고 차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집이 없는 불쌍한 서민은 뭐라고 하는가? “이런 고층 아파트에는 누가 사는데?” 라고 하니, 거기서는 뭐라고 하는가? “아 아파트는 당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이 아파트에 입주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들은 지금 없지만 내가 새로 만들어서 입주를 시키겠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파튼 우리 집이 아니라 예수님 집인데, 즉 메시야의 집이라는 말이다. 거룩한 사람의 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처음부터 거룩한 사람들의 집, 거룩한 사람들의 세상, 거룩한 사람들의 나라, 즉 천국에만 관심이 있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추방을 시킬 때부터 그런 인간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기존 교회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이 자기들을 추방해서 고생을 하는데, 그러니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좀 불쌍히 여겨서 고생을 덜하도록 괜찮은 천국이라도 만들어달라고 하는, 그런 요구사항이 하늘나라에 상당될 줄로 알고 있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들의 그따위 요구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심도 없고 말이다.
◈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는 거룩한 피조세계를 !!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이런 인간들의 요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거룩한 피조의 세계에 자신의 원래부터 있던 계획을 그대로 추진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거룩’ 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마치 무인도에 갇혀있던 사람들에게 배가 온 것처럼, 그렇게 구세주가 왔다고 여기면 안 되고,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예수님이 오셨다고 하면, “야, 우리는 정말로 구원받을 자격이 없구나” 라고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새삼스럽게 깨달아져야만 하는데, 즉 “나 같은 인간이 구원을 생각하다니, 정말로 말도 안 되는 망상 속에 있었구나” 라는 것을 다시 한번 재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분은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천국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거룩한 그분에게 속한 것이지, 우리와 같은 놈들은 전혀 거기에 끼어들 입장이 전혀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보다 더 분명히 하고, 확고히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등장하심이 말이다. 그것이 바로 ‘언약’ 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추방은 여전히 유효해 !!
오늘강의의 전체 주제를 다시 한번 더 이야기하자면, 현재 우리는 지금 추방이 되었는데, 그 추방된 원칙과 원리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추방을 시켜놓고 취소시키는 법은 없다는 말이다. 아주 강력하게 역사하는데, “너희들 같은 인간은 추방이 되어도 마땅하고, 또한 저주를 받아도 마땅하다. 그러니 고생을 실컷 하다가 나중에 흙으로 돌아가서, 그냥 분해되어버려라” 라고 말이다.
그러한 강렬한 유효함,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생명나무에게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천사들을 동원해서 막아놓았다는 것이다. 즉 에덴의 동쪽을 틀어 막아버렸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이 여전히 유효한데, 인간들이 아무리 여기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짓이 종교이고 교회일 수도 있는데,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 비록 죄를 지었지만, 누군가가 와서 ??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을 하는데, 즉 “비록 인간은 그렇게 죄를 지었지만 누군가가 와서 데리고 간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이런 기존의 인간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이렇게 있는 사람들은 이미 죽은 자들인데, 그것이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죽었는가? 이미 저주 속에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죽여버린 것이고, 이미 죽었다는 것이다.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 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그렇게 죽이는 일을 누가 하는고 하니, 곧 메시야가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죽이는가? ‘거룩’ 이라는 이름으로 죽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 다 죽여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니 구원이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은 어떻게 되는가? 이 부분이 많이 어려운데 말이다.
그렇게 구원이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은, 메시야와 언약을 맺은 분이 있는데, 물론 그런 자들은 우리는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언약이 된 사람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해서, 그런 사람들만 데리고 간다는 말이다.
◈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 !!
예를 들어서, 창세기의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는 바로 야곱이 그런 인물이라는 것이다. 에서와 야곱은 같이 붙어서 태어나는데, 서로 싸우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태어났는데, 이 야곱은 제 아무리 악한 짓을 해도 구원을 받게 되어있고, 에서는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저주를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원래는 야곱이란 인간도 없고 에서라는 인간도 없는데, 그렇게 없는데 새로 생기게 해서 데리고 가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야곱을 구원하기 위함도 아니고 에서를 저주하기 위함도 아니고,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 아하, 하나님은 그런 분이군요 !!
그런 야곱과 에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즉 하나님의 온유와 자비를 보여주는, 그런 속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로 삼기 위해서, 즉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을 삼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없는 인간들을 만들어서 그런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렇게 자비하고 온유하신 분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없는 인간들을 만들어서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저주를 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구원의 과정을 통해서, 야곱은 평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와 사랑을, 즉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는 자들의 한 평생의 삶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적인 개념의 구원은 없는데, 그야말로 사도바울처럼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 라고 하는 고백만이 이 야곱에게서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즉 야곱 안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제 야곱은 주님의 것으로, 즉 그리스도의 소유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야곱은 죽고 나중에 이스라엘이 되는데, 즉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은 어떠한고 하니, 물론 야곱도 하나님이 지은 이름이지만, 이스라엘도 역시 하나님이 지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되게 하심으로서,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세 이전에 있었던 사랑, 자비, 온유 등과 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증거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야곱의 인생을 통해서 말이다.
◈ 피조세계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원래 피조세계라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증거해서 온 피조세계 자체가 하나님께 영원토록 영광을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피조세계, 즉 온 우주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악마는 반대하고 또한 아담도 반대를 하는데,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었고 말이다. 하지만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그런데 “내가 선악과를 따먹겠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지?” 라는 식으로 한다면, 즉 “내가 따먹지 못하도록 만들지를 말든지” 라고 한다면, 그렇게 해서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아담아, 니가 철이 없어서 따먹었구나. 이번 한번은 용서해줄 게”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서 무엇을 봐주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즉 “아이쿠, 저 피조물이 뭘 알겠는가? 교활한 마귀에게 그만 속았구나. 처음이니 봐줄 게” 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자기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
아무튼 하나님에게는 봐주는 것이 없는데, 즉 하나님은 그 어떤 순간이라도 자기 속성에 위배되어서, 그렇게 자기 속성을 양보해서 하시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자신의 속성인 엄위와 자비, 이러한 두 가지를 벗어나서 일을 하는 경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조상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으면, 그것으로 인간은 그냥 끝이 난다는 말이다. 그러니 범죄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가를 철저하게 보여주어야만 되는 존재물로서, 그렇게 우리가 지금 현재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을 때 우리 인간은 얼마나 비참하고 처절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지, 그렇게 하나님의 속성은 엄위하시다는 것을, 즉 하나님은 공의롭고 무서운 분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결국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인데, 하나님은 그렇게 거룩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민족의 사명을 안고 태어난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성도에게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구원이 되지 않는 인간에게 ‘예수’ 라고 하는 자기 아들을 희생하는 자비심을 퍼부어서, 저주의 대상이 놀랍게도 무조건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그런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도구로서 사용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직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는 말이다.
◈ 개인구원은 없어 !!
제가 방금 이렇게 강의를 했는데, 이렇게 함으로서 무엇을 사라지게 하는고 하니, ‘개인구원’, 즉 “지금은 고생을 하지만 나중에 편하게 살자” 라고 하는, 그러한 개인구원의 의식을 지우려고 지금 이렇게 강의를 했다는 것이다. 즉 개인구원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개인구원이 있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한 개인구원의 가능성을 노리는 신학이 당연히 나오게 되고, 그런 신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교회역사라는 것이 있게 되고, 그리고 이 교회역사는 교회를 정당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끌어 모으는 신학이 나오게 되고, 그런 신학은 당연히 인간의 가능성을 노리게 되고, 그 가능성은 결국 “개인도 잘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라고 하는 의식을 정당화해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짝퉁인데, 즉 전혀 가짜라는 말이다.
◈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면 어떻게?
여기서 우리가 무슨 작업을 해야 하는지가 드러나게 되는데, 즉 “이런 식의 신학과 모든 것이 다 가짜라고 한다면, 이것도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와 공의로움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왔는가?” 라는 것을 우리가 찾아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어렵고 힘이 들어도 말이다. 그것이 곧 우리가 해야하는 작업이라는 말이다.
제가 지난 시간에 그러한 중심에 누가 있다고 했는가?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즉 예수님의 존재성 안에는 앞에서 말한 인간의 가능성과 정당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속성이 몽땅 다 담겨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예수님은 이미 품고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무엇과 충동을 하는고 하니까, 예수님이 품고 온, 즉 엄위와 자비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서의 피조물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기존의 유대교가 만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것과 대전투가 벌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왜 가롯유다를 선택하셨는가?
그런데 여기 엄위와 자비에서 중요한 것은 가롯유다의 등장이고 그의 선택인데, 그것이 참으로 난해한 문제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왜 가롯유다를 선택하셨느냐는 말이다. 주님은 가롯유다를 선택하고 결국은 이 가롯유다를 버리게 되는데, 그러니 구원론을 제대로 공부하려고 하면 가롯유다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도 보았지 싶은데, 일단 요한복음 13장을 한번 살펴보자.
(요 13: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 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요 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요 13: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요 13: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요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 유대야, 니가 할 일을 속해 해라 !!
여기 13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있는가?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유다를 보고 “유다야, 이제 니가 할 일을 해야지. 자꾸 꾸물거리지 말고, 지금 바로 그때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떡을 한 조각 주니 사단이 유다 속에 들어갔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떡을 주시고 난 다음에 사단이 해야 할 일을 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제자들은 전혀 여기에 대해서 모르는데, 하지만 예수님과 사단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 왜 가롯유다와 같은 인간이 필요한가?
그렇게 해놓고 예수님은 이 유다를 보고 뭐라고 하시는가? “유다야,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뉘앙스를 한번 보라는 것이다. 즉 “자슥아, 너는 참 안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기 위해서 선택이 되고 쓰임을 받는데 말이다. 그런데 가롯유다가 태어난 것은 무엇인가?
(마 26:24)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원래 인간은 없는데, 왜 없는고 하니 인간은 죽어야 하니 말이다. 즉 아담은 죽어야 하는데, 그런데 아담의 후손이 태어난 것은 왜 그런가? 뱀의 후손과 아담의 후손이 약속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래서 아담의 후손들은 새끼를 까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깐 인간들 중에 하나가 바로 가롯유다인데, 그러니 예수님은 이미 이 가롯유다를 안다는 말이다.
◈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어느 정도로 아시는고 하니, 이미 자기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고, 또한 삼일만에 부활한다는 것도 모두 다 아신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신학자는 그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데(사실은 대부분의 신학자가 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다 후대에서 가필을 해서 사기를 쳤다고 본다는 말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그런 것을 미리 다 알았다고 한다면, 왜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했겠느냐는 것이다. 무슨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아니, 자기가 삼일 뒤에 부활을 하는데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는 것이다.
◈ 첫째는,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에 믿음이 그만 소실 !!
그래서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데, 즉 예수님이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주장한 것은 몇 가지 경우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주장은, 이것이 주로 대세를 이루는데 말이다. 즉 예수님은 처음에는 믿음이 있었는데,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에 그 믿음이 그만 소실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그동안 믿는 신이, 그것이 환상임을 비로소 십자가에서 깨닫고 가롯유다와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깽판을 놓는다는 것이다. 즉 “에이, 니 죽고 나 죽자” 라고 말이다. 자기가 실컷 이렇게 고생을 했는데, 이 정도로 하면 천사가 와서 데리고 가든지 해야 하는데, 그런 시나리오가 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냥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보자는 것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했으면, 말 그대로 약속이 틀리다는 것이다. 즉 버리지 않기로 했는데 버렸다는 말이다. 이것이 참 재미있는(?) 표현인데,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하나님, 저하고 한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의 목사 99%가 이런 마음가짐인데, 물론 교인들도 그렇고 말이다. 지금 교인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은 일종의 ‘교회놀이’를 하는 것인데, 즉 교회에 다니면서 실망을 많이 하고 나면 교회는 그냥 다니게 되는데, 믿음으로 다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하나님을 믿는 인간이 병신이란 것이다.
◈ 교회는, 일종의 희망사항으로 !!
물론 목사도 하나님은 믿지 않는데, 다만 “이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것이다. 일종의 희망사항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면 깨끗하게 해주옵소서” 라는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제가 믿습니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해주면 고맙지요” 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기대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지금 죽어도 낙원에 간다” 라는 것이, 그래도 듣기에 기분이 좋은 말이기에 그렇게 기대를 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래도 행여나 모르니까, “아마 어쩌면 이렇게 될 수도 있을 거야” 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큰 실망을 하지 않기 위해서 미리 기대를 하지 않는데, 몰트만도 이 문제를 가지고, 즉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것을 가지고 쓴 글이 바로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 인데, 결국 해결점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정답을 모르겠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참 실망입니다” 라는 의미인데, 그렇게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실망을 했는데, 그런데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예수님의 공로도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99%는 믿지 않지만, 그래도 혹시나 천국에 갈까 싶어서, 그런 기대를 가지고 계속해서 교회에 다닌다는 말이다.
◈ 둘째로, 십자가 밑에 사람들이 믿음이 없어서 !!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첫 번째는 약속이 틀린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것인데, 즉 예수님 자신은 자기가 사흘만에 부활할 줄 알았는데, 그런데 십자가 밑에 있는 사람들은 몰랐다는 것이다. 즉 제자들과 여자들과 가족들은 말이다. 그들은 아직도 믿음이 없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연출을 하는데,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말이다.
물론 예수님 본인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줄을 알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감동적인 연출을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 밑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즉 “봐라. 나도 이렇게 십자가를 졌는데, 너희들도 십자가를 지면 하나님이 살리신다” 라고 말이다.
◈ 시편 22편이 그 연출 시나리오 ??
그것을 모델케이스로서 미리 보여줌으로서 그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렇게 연출을 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연출 시나리오가 시편 22편에 나오는데, 이 시편 22편은 다윗의 시(詩)인데 말이다. 1절을 한번 보자.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 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여기 1절에 보면 실제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구절이 나오고 있는데, 그러니 예수님은 죽을 때까지도 성경말씀을 하나라도 더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요?
다시 말해서, 시편 22편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내뱉음으로 말미암아서, 후대 학자들에게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성경에 응하게 하기 위함이라” 라는 리필을 달게 하기 위해서, 즉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은 합당하다는 것을 미리 예상토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은 미리 연출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주장이지 말이다.
◈ 세 번째로, 하나님이 직접 죽었다 !!
이제 세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이것은 옛날에 있었던 주장인데,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몰트만의 주장인데, 앞에서 말한 연출한 것과 조금 비슷하기는 한데, 그러나 앞의 것은 사람들을 보고 연출한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를 연출했다는 것이다. 즉 성부와 성자끼리 약속을 했는데, “아들아, 그렇게 하면 내가 살려줄게” 라고 말이다. 즉 하나님 내부에서 사랑으로서,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그 역할을 맡겼고, 예수님은 그대로 다 순종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3가지 이론이 나왔는데, 둘째와 셋째 주장은 하나님이 사람을 데리고 논 것인데, 즉 실제로는 버림을 받지 않았는데 버림을 받은 척한 것이고, 첫 주장은 진짜로 버림을 받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가 낙심한 예수를 다시 살림으로서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첫 번째 주장은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까, 예수님이 평소에 “내가 사흘만이 부활한다” 라고 말씀하신 것과 충돌이 되지 않겠느냐고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자기가 100% 부활을 할 것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부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일종의 희망사항이고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은 결코 믿음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보니 가능성의 반대말이 믿음이고, 믿음의 반대말이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실제상황이지, 결코 “내가 어떻게 될 걸.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것은 전혀 믿음의 축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것이지 말이다.
◈ 예수님의 구원의 요소들과 3가지 !!
오늘강의가 상당히 어렵다고 지난 시간에 미리 경고를(?) 했는데, 그렇다면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들하고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요소들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 지금부터 그것을 살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말한 인간의 가능성은 그야말로 전무한데, 실제로 예수님이 품고 오셨다는 말이다. 그것을 아까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거룩’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 번째 해답이 될 수 있는데(?), 즉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고 하니까, 이 구원이 언약을 따고 실효성을 발휘하면 된다는 것이다. 거룩의 실제 능력발휘라고 할까? 즉 ‘거룩의 실효성 발휘’ 라는 것이다.
◈ 거룩의 실효성 발휘 !!
이 세 번째를 ‘3-1’ 이라고 하면, 여러분들은 “아하, 그 이야기를 하려고 목사님이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구나” 라고 눈치를 차리지 싶은데 말이다. 이 거룩을 언약을 가지고 그 실효성을 발휘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 언약이 바로 말씀인데, 이 말씀을 누가 이루는가? 메시야가 이루게 되는데, 그런데 그 말씀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죄인을 구원함’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아까 우리가 레위기를 보았는데, 거기에서 무엇이 나왔는가? ‘속죄해주심’, 그리고 ‘화목해주심’ 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데, 그리고 세 번째로는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지만 ‘온전히 바치게 해주심’ 인데, 사람들이 이 소리를 제일 싫어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구원을 받고 그냥 줄행랑을 놓기를 원하니 말이다.
◈ 예수님이 거룩을 품고 오셨는데, 그런데?
지금 제의 주장에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지적을 해주면 좋겠는데, 즉 지금 예수님이 거룩을 품고 오셨는데, 그런데 우리는 거룩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기에 구원을 받지 못하고 말이다. 즉 우리 인간들은 말씀을 지킬 자격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룩한 분이 오셔서 말씀을 제대로 지키는데, 그 말씀 속에 죄인을 구원한다는 것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소리를 들으면 참 기분이 좋은데, 우리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니 말이다. 그래서 속죄도, 화목도 참으로 듣기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을 온전히 이루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면 자기 백성을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헌신하도록 하는 것도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 말씀 속에 포함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분명히 포함이 된다는 것이다.
◈ 나는 ‘속죄’, ‘화목’, ‘의롭게 됨’이 좋아 ??
그런데 지금 이 세상에 있는 우리 인간들이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 속에는 이것들이 다 들어있는데, 그런데 우리들은 어떠한가? 그렇게 예수님에게 있는 것들 중에서 우리의 구미에 맞는 것만을 뽑아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속죄, 화목, 의롭게 됨 등등을 말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에게 그러한 자격이 있는가? 우리 인간들에게 그렇게 예수님에게 있는 것을 골라서 뽑아낼 수 있는 자격이 말이다. 분명히 없는데, 그런데도 고르고 뽑아내어서 믿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분명히 뭔가 예수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 기존의 성화론의 경우에 !!
그러니 지금 오늘 강의에서 궁극적으로 공격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들의 가지고 있는 기존의 성화론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을 그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은 누구의 숙제인고 하니 우리 인간들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숙제이고, 그런 예수님의 숙제가 전혀 오류가 없이 완벽하게 우리에게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능성’ 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가능성인데,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행위가 아니기에 가능성이 아니라 믿음에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즉 믿음이라는 것은 주님이 하신다는 것이고, 가능성은 자기가 뭔가 좀 해보려고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자기 가능성 발휘 말이다. 그러니 “내가 좀 해볼까? 믿어볼까?” 라는 것은, 인간의 행함이지 믿음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오실 메시야가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온전히 말씀을 다 이루십니다” 라는 것이 받아들여지는 것, 그것이 곧 믿음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게 되면 무엇도 포함이 되는가? 온전히 헌신하게 됨도 역시 포함이 된다는 것이다.
◈ 가능성이 아닌, 믿음으로 !!
여기서 제가 하는 말을 하나 들으면 고민이 그만 모두 사라지지 싶은데(ㅋㅋ), 즉 “내가 온전히 헌신해야지. 할 수 있다” 라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어디에 포함이 되는가? 그것은 또 다시 인간의 가능성에 포함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기분이 째지고(?) 좋으냐는 말이다. 그러니 “온전히 주님께 헌신한다” 라는 말을, 자기가 해야하는 숙제로 여긴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전혀 믿음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이러한 은혜를 받았는데 영광을 돌려야 마땅하지. 자기가 받았으면 당연히 좀 내놓아야지. 염치도 없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안 되지. 이제 받았으니 한번 열심히 잘해볼게요” 라는 합당한 반응이 보여야 믿음이 있다고 나오신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여전히 불신자로서 여전히 자기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가롯유다를 집어넣으면?
여기서 잠시 우리가 하던 어려운 작업을 멈추고 조금 더 어려운 것을 하겠는데(?), 가롯유다를 여기에 한번 집어넣어서 살펴보자는 말이다. 가롯유다를 여기에 있는 이 공식에 대입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가롯유다를 말이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가롯유다에게 떡을 주시면서 빨리 일을 하도록 독촉을 하셨는데, 그러면 가롯유다의 경우에, 자기가 사단이 오는 것이 싫어서 본인이 저항할 수 있는가? “사단아, 물러가라!” 라고 말이다. 가롯유다가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도 옆에 있는데, 아무튼 가롯유다가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가롯유다는 전혀 그렇게 할 수 없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이 가롯유다는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도 물론 그렇고 말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악마의 경우에, 이 악마도 역시 예수님께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왜 예수님이 악마를 다루시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거룩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거룩이란, 이 세상의 모든 주도권을 쥐어야만 !!
이제 거룩이 이해가 되지요? 그러니 ‘거룩’ 이라는 것은, 흔히 말하는 고상하고 깨끗하고 품위가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거룩른 무엇인가? 이 세상의 모든 심판과, 제 아무리 작다고 해도 그런 모든 작은 움직거림에 대해서도 주도권을 쥐고 있는 분, 바로 그분이 거룩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거룩이고 말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예수님이 악마도 다룬다고 하니,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악의 장본인이 아니냐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악한 예수님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악마를 쥐고 흔드는 악의 두목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악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악마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권한을 가졌기에 거룩한 분이라는 것이다.
◈ 악마도 언약을 이루는데 동원이 !!
이런 개념은 2000년 기독교 신학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은 것인데, 기독교 2000년 신학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인데, 즉 악이 아니면 선이고, 선이 아니면 악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언약적으로 보자면, 언약을 위해서 악마가 있어야 하는데, 이 악마는 언약에 속한 거룩한 분을 위해서 다루심을 받을 때, 물론 악마의 짓은 악하지만, 악마에서 악한 것을 가지고 언약을 이룰 때, 그것을 두고서 거룩한 일로 본다는 것이다. 좀 이상하고 생소합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면, 거룩한 일이 무엇인고 하니, 악마마저도 예수님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룰 때, 그것이 곧 거룩한 일이란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마귀에 속한 우리들에게 거룩은 무엇인고 하니,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할 때, 그것을 곧 거룩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거룩의 개념이 전혀 다른데, 즉 인간들이 말하는 거룩은 인간의 가능성에서 나오는 것인데, 믿음이 아니고 말이다.
◈ 거룩한 일은, 거룩한 분의 솜씨 !!
예를 들어서, 간음한 여인이 간음한 것은 분명히 나쁜 일인데, 맞지요? 하지만 그 간음한 여인이 나쁘다고 돌을 던지는 것은 거룩한 일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 착한 일이 아닌가? 방금 제가 한 말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돌을 던질 수 있는 자가 거룩한 자가 아니기에 거룩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일은 거룩한 분의 솜씨라는 것이다. 즉 거룩한 자만이 거룩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룩한 자가 아니라면 결코 거룩한 일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 거룩한 자가 곧 기름을 부음을 받은 자이고, 그것을 세 글자로 ‘메시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야가 오시고, 우리가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것도, 즉 거룩이 되려고 하려면, 그것이 거룩한 메시야가 그렇게 해주셨기 때문에, 그래서 믿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거룩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
◈ 아, 불쌍한 가롯유다 ??
그러니 이 가롯유다의 경우에, 물론 개인적으로 보자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가롯유다 본인은 어디로 갔는가? 분명히 지옥으로 갔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가롯유다로 인하여 거룩한 일은 계속해서 진행이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오늘날 이단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단은 지옥에 가고, 그 이단을 활동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거룩한 일로서 유지가 되고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는가? 모든 것이 예수 안에서 ‘예’가 되고, ‘아니오’ 라는 것은 없다고 말했는데, 즉 악마 때문에 주님의 일이 방해를 받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에 베들레헴에 태어난 두 살 이하의 부모들이 슬피 우는데, 왜냐하면 난데없이 예수님의 가족이 ‘쉬익’ 하고 왔다갔는데, 그런데 그만 적들로부터 공격은 자기들이 완전히 당했다는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는 엄마 품속에 있던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이 억울하게 악마에 의해서 공격을 받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노동운동을 하는 자가 그만 왔다가 나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뒤를 전경들이 따라와서는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우리를 그만 마구 때려서 일방적으로 얻어터졌다는 것이다. 그 놈은 이미 창문을 열고 저쪽으로 도망을 갔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곧 거룩한 일이라는 것이다.
◈ 헌신이란,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너’의 몸을 !!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두고서 바로 ‘헌신’ 이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너의 몸을 바칠 준비가 되었는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그렇게 되면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라고 하는 소유개념이 그만 모두 깨어지고 마는데, 어차피 우리는 이미 죽은 놈들이니 말이다. 그렇게 소유개념이 깨어지고, 뭔가 ‘쉬익’ 하면서 왔다가 가는데, 사실은 왔다가 가는 것이 아니고 머무르지만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데리고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용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주님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받고 억울함을 당할 때, 바로 그럴 때 복이 있다는 것이다. 선지자들도 그렇게 핍박을 받았고 말이다.
◈ 성도란,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긍정적으로 !!
창세기의 아벨도 그런 경우인데, 이 아벨이 누구 때문에 죽는가? 하나님 때문에 죽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두 글자로 ‘성도’ 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는 ‘거룩한 자들’ 이라는 의미인데, 그것은 성도 본인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거룩한 분에 의해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긍정적으로 자비와 공의를, 즉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 깨끗한 자만이 거룩한 일을 ??
그러니 가롯유다의 경우에 얼마나 불쌍한지 모르는데, 예수님의 12제자로 뽑혀서 활동을 하고도 지옥으로 갔으니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마귀를 선택해서 일을 할 줄은, 그런 메시야는 그들은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고 하니, 하나님은 깨끗하게 자기의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 근거가 구약 레위기 21장에 보면 나오는데, 즉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언제나 시체를 멀리하도록 하고, 그리고 제사장들은 숫처녀와 결혼을 해야지, 이미 결혼의 경험이 있는 과부와는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불알이 터진 자라든지, 소경이라든지, 절뚝발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사람이 제사장이 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레 21: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 21:17) 아론에게 고하여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레 21:18) 무릇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못할지니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레 21:19)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레 21:20) 곱사등이나 난장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불알 상한 자나
(레 21:21)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아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거룩이라는 것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벽한, 즉 흠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악마를 선택해서 일을 할 리가 없고, 일을 항상 깨끗하게 하신다는 말이다.
◈ 누가복음 7장에 유명한(?) 여인이 나오는데 !!
그런 선입관에 의한 유대인의 모습이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데, 즉 행실 나쁜 여자가 와서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서 자기 머리털로 씻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 여자가 신체적인 접촉을 예수님에게 하니, 유대인들이 그것을 보고 뭐라고 하는가? “예수여, 당신이 거룩한 인간이라면 어떻게 더러운 여인이 와서 접촉하는 것을 허용합니까?” 라고 하는데, 그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예수님은 오히려 그렇게 이야기하는 자들을 나쁜 놈들로 보고, 자기에게 눈물로 발을 씻기는 그 여인에게는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라고 하시면서, 그 여인을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위대하고 거룩한 성도라고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메시야 의식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말이다.
(눅 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눅 7: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눅 7: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 를 부으니
(눅 7: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 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눅 7:49)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 가하더라
(눅 7: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 지금부터 본론으로 !!
이렇게 해놓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는데, 지금까지는 서론이었고 말이다. 서론을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말씀만 이루신다는 것인데, 즉 우리 인간들의 의견이나 요구조건이나 간절함은 전혀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말씀대로만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 속에는 무엇이 포함되는고 하니, 속죄, ‘화목, 의롭게 됨 등도 있지만, 특별히 “온전히 헌신하겠다” 라는 것도 들어있는데, 즉 “너를 하나님께 바치는, 하나님께 헌신하는 제물로서 삼겠다” 라는 것도 말이다. 이것이 바로 말씀대로 움직이는 ‘거룩’ 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이고, 그러면 두 번째로 생각해볼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은 본인은 어떻게 살았는가?” 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대로만 움직인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은 어떻게 움직였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움직임 속에서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죄인이 의인이 되는, 즉 죄인이 구원을 받는 것이 예수님의 움직임 속에 포함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도란스 ??
그렇다면 우선 옛날의 조직신학 방식으로 표현을 하자면, 예수님은 전류를 110V에서 220V로 바꾸는, 즉 일종의 트랜스라는 것이다. 즉 죄인이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 안에는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는 장치가 있어서, 그 죄인은 예수님을 통과해서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과거의 신학은 이런 방식을 주장했다는 말이다.
◈ 옛날 신학이 설명하는 구원구조 !!
그런데 여기에는 어떤 것이 포함되어있는고 하니, 예수님은 인간이고 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 이렇게 방이 있는데, 이렇게 옛날 신학에는 이렇게 방안에 인간이고 신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이 예수님 안에 다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일단 인간은 어디로 접촉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에 접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그런 인간적인 면에는 또 방이 있는데, 즉 여기에는 육이 있고 영혼이 있는데, 물론 영과 혼이 있다고 해도 되고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고 하는데, 그것이 로마서 8장 3절에 분명히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의 영혼은 죄를 지었는가? 짓지 않았는가? 영혼은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이 죄를 짓지는 않으니 말이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 예수님의 육신은 일종의 면회소 !!
그러므로 예수님의 내부에서 무엇만 폼을 잡았는고 하니, 예수님의 육신만 죄에 물든 폼만 잡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뺨을 맞아도 참는다는 것이다. 죄인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귀때기를 때리고 맞는 것이 일종의 면회소가 되는데, 즉 인간들이 만만하게 접촉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물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인데, 그리고 예수님의 영혼도 거룩하기에 깨끗하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육신은 먼지 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 인간들과 같이 밥도 먹고 똥도 누고 했으니 덜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덜 거룩하니 만만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공간이 무슨 공간인고 하니, 인간의 죄와 같이 섞일 수 있는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섞이게 되면 여기에 성령님이 합류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조금 더 해보면, 아무튼 우리 인간은 무엇으로 되어있는가? 우리도 육과 영혼으로 되어있는데, 그런데 이 육과 영혼은 모두 죄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은 육도 물론 죄를 짓지만, 영혼도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영혼은 깨끗하고, 육만 죄가 있다는 것이다.
◈ 성령님이 예수님의 육에 작용을 해서 !!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육과 육의 만남에 대해서 성령님이 어디에 작용하는고 하니까, 예수님의 육에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육신이 죄가 없다고 해버리면 안 되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 죄인으로 지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분으로서 십자가를 지게 되니, 그렇게 되면 큰일이 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 때까지 반드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서 남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있는데, 그런데 성령께서는 그때 그때마다 비록 육신은 죄를 졌지만 일은 놀라운 신의 일을 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강의가 재미가 있지요? (ㅋㅋ)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를 질 때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지는데,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육신은 그 일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게세마네 기도를 살펴보면,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천사가 와서 돕는데, “그렇게 하면 구속사가 다 깨어져서 안 되는데” 라고 하면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는 나도 몰라. 그냥 아버지 뜻대로 다 하이소” 라고 하면서 자포자기를 했는데, 그런데 성령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희생을 길을 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물론 죄 있는 육신을 가지고 가도록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레위기에 보면, 제사장이 양에게 안수를 하게 되면, 물론 그 양은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그러나 결국 끌려가서는 제사장에게 제물로서 죽는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양처럼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성령에 이끌려서 십자가를 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게 죽을 때, 평소에 예수님을 존경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무엇까지도 믿는고 하니, 예수님의 그 십자가 효력까지도 믿는다는 것이다.
◈ 여기서 성령님은 바꿔치기를 !!
여기서 십자가의 효력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구의 죄 때문인고 하니,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죽는다” 라는 것을 여기에 포함시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성령님은 이것을 바꿔치기를 하는데, 우리의 육은 그대로 세월이 흐르면 늙어서 죽는데,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그만 예수님의 영혼이 되어서, 그렇게 되면 이제는 죄로부터 끊어지고, 물론 아직 육신은 죄인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영혼은 깨끗한 영혼이 되는데, 이것을 두고서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예수님 안에는 신이 있는데, 그러니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거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였거든” 라고 하시는데, 시편에 있는 말씀인데 말이다.
(요 10: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요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였거든
(요 10: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그렇게 통과가 되면 결국은 하나의 작은 새끼 신으로서, 그렇게 되면 이제 예수님은 자기 역할을 다 했으니 끝이 나고, 즉 예수님은 인간의 죄만 씻겨주고는 아버지에로 보낸다는 것이다. “아버지, 여기에 한 명 더 갑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예수에게 머물러 있으면 안 되는데, 즉 예수 안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십자가에 머물러 있겠느냐는 것이다.
◈ 박용기, 박옥수, 박세리, 박찬호 ??
그렇게 계속해서 십자가를 붙들고 있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양반이 박용기의 말씀운동, 즉 ‘로고스’ 라는 것인데, 무슨 그런 말씀운동이 다 있느냐는 말이다. 즉 “언제까지나 십자가에 머물러 있겠는가? 이제 그만 십자가를 나오너라. 이미 죄를 씻었는데 아직도 십자가인가? 이제는 아버지에게 나아가야 한다” 라는 것이다. (옛날에 이호식도 그랬는데, 갑자기 호식이 치킨이 땡기네. ㅋㅋ)
그런데 어떻게 아버지에게 나아가는고 하니,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기에, 즉 신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드디어 모든 지혜를 다 통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는 신이 노는데 같이 합류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것이 바로 기존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기존의 신학은 마치 로케트를 발사할 때, 일단 발사를 해서 추진력을 얻어서 올라가면 기존 추진력을 제공하던 로켓은 떨어지고 이제는 무중력 상태에서, 즉 더 이상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박용기, 박옥수 등의 주장인데, 그러고 보니 요즘 박씨들이 설치는데, 박세리, 박찬호도 있고 말이다.
그러니 박옥수가 주장하는 것은, 이제 한번 회개를 하고 나면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는데, 즉 피로 거듭났으면 이제 신의 아들이니, 그래서 이제는 아버지의 보좌로 당당하게 나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무슨 회개가 필요하냐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십자가는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그동안 연약해서 지키지 못한 말씀들을 다 지키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생명 운동’ 이라는 것이다. 소위 선교단체에서 많이 하는 짓인데, 아마 성서 유니온도 비슷하지 싶은데 말이다. 이러한 논리는 원래 천주교에서 나온 것인데, 삼위일체 논리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영혼과 육으로 나누어서, 그렇게 주장한다는 말이다.
◈ 구(舊) 신학의 특징 - 십자가가 고맙기는 하지만, 그 다음에는 잊어버리자 !!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과거의 구(舊) 신학인데, 사실은 신(新) 신학이 없어서 그렇게 표현하기도 그렇지만 말이다. 이러한 구 신학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에 대해서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리고 나서 십자가를 잊어버리자는 것이다. 즉 십자가에서 일단 고맙고 감사하게는 생각하지만, 그러나 계속해서 머물러 있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 현대신학의 특징 - 사랑으로 신과 하나가 !!
그런데 여기에 비해서 오늘날의 현대신학은 무엇인고 하니, 이제는 처음부터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그냥 통과하는 방법을 알았다는 것이다. 즉 불교의 고난이 십자가를 대체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십자가가 사랑이니, 그 사랑이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불교의 그런 사랑을 통해서 곧장 신과 합일한다는 말이다. 모두가 같은 사랑이니 말이다. 이렇게 사랑으로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 현대신학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십자가도 거추장스럽고 하니 다 떼서 내어버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것이다. 대한고등학교 교목인 유상태(?) 같은 인간이 이런 주장을 하는데 말이다. 즉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는데, 하지만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지옥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인가? 모든 것이 다 사랑이라는 것인데, 즉 하나님은 사랑이니,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다 지옥으로 보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기존신학은 뭐라고 주장하는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를 거친 사람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겠지만, 그러나 거치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의 신학 - ‘예수 안’ !!
하지만 이런 두 가지 주장이 모두 다 사도바울의 신학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신학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예수 안’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 밖’이 아니고 말이다. 바로 이 ‘예수 안’에서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말씀이 나오는데, 즉 말씀의 성취가 나온다는 것이다.
지금 교인들이 왜 이런 것에 대해서 무지한고 하니까, 성경 말씀을 전혀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봐도 그렇지만 말이다. 성경말씀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오직 ‘자기 구원’에만 몰두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구원을 받는데 필요한 구원공식만 요구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라면을 사면 어떻게 요리하는지 그것만 알아서 맛있게 끓여먹으면 되는데, 그런데 그 라면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또 어느 지역의 공장에서 만들었는지, 그런 것은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냉장고를 샀으면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알면 되지, 그 냉장고의 작동원리까지 일일이 모두 다 알 필요는 없듯이 말이다.
아무튼 ‘예수 안’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말씀의 성취인데, 그것은 바로 ‘자기 죽음’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 안에서는 자기 죽음인데, 그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분명히 나오는 말씀인데,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 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 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사도바울 - 나는 죽고, 그리스도는 살고 !!
여기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라고 하면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살았고” 라고 하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자기는 계속해서 그렇게 못 박히고 죽은데, 이제 자기 안에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 사신다는 것이다. 자기는 계속해서 죽어있는 상태이고 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활용하기 나름인데, 자기 안에 살아있는 그리스도께서 말이다. 그래서 더 이상 사도바울은 자기의 것이 없고 오직 주님의 것으로 살아가는데, 바로 그런 활용 때문에 자기가 살아있고, 그것을 두 글자로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말씀성취를 위해서 자기를 그렇게 활용하시고 사용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는데, 즉 날마다 자기는 십자가에 넘겨지고, 그것을 통해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아무튼 사도바울은 한 평생을 십자가를 떠난 적이 없는데, 물론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주장하기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가? 자기는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물론 이 세상은 그리스도 밖에 있겠지만 말이다. 즉 자기는 그 어느 순간이라도 이 십자가를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 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러니 십자가는 결코 개인 구원용이 아니라는 것인데, 아까 말한 그런 도란스처럼,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를 가지고서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 오신 분이지, 결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중요한 것은 말씀성취라는 것이다.
◈ 성령님께서 어떻게 예수님을 다루시는가?
조그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씀성취’에 대해서 알아보겠는데, 이 말씀성취에는 두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처음 단계는, 성령님께서 말씀성취를 누구에게 성취시키는고 하니, 예수님 본인에게 성취시킨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정말로 어려운데, 여기에 대해서 신학자들이 조금 다루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내용들이 없어서 개인적으로 참 아쉬운데 말이다.
우리는 흔히들 “예수님은 말씀을 우리에게 이룬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두 번째의 경우이고 말이다. 그 첫 번째는 말씀전체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물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는가? 즉 “성령님께서 어떻게 예수님을 다루시는가?” 라는 것이 곧 예수님의 공생애라는 것이다.
◈ 예수님의 공생애 !!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예수님의 공생애를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 참 고생하셨다” 라고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의 그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그분의 말씀 하나 하나가 구약성경과 어떻게 연관을 지으면서, 그것을 성취하는 차원에서 하신 말씀이고, 하신 행동인지를, 바로 그것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하나님의 성취는 우리 개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말이다.
그러므로 산상설교는 전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말씀이 아닌데, 물론 다른 말씀도 그렇지만 말이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었다고 해서 우리도 걸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을 흉내낼 수 있는가? 전혀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는데, 그것이 베드로에게서 나온 능력인가? 오히려 베드로는 자기가 물위를 걸었다고 여기는 순간에 그만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참으로 희한한 일인데, 즉 자기가 지금 물위를 걷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 제가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에게 밥을 나누어주는데, 하지만 그렇게 밥을 주면서도 “내가 밥을 준다” 라고 하면서 주면, 그것은 전혀 주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밥을 주면서도 말이다. 자기가 물위를 걸으면서도 “내가 물위를 걷는다” 라고 하면, 그것도 역시 주님의 일이 아니고 말이다. 자기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 나의 심장아 뛰어라 ??
이것은 그렇게 생각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상황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지난밤에 자기가 자기 심장에게 “나의 심장아 뛰어라” 라고 해서 뛰었다고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상상에 불과한데, 어디까지나 주님께서 뛰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밤에만 그렇게 하시는가? 낮에는 하지 않는가? 밤낮으로 햇볕이 쏟아지고, 비가 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 모든 것이 주님의 말씀성취 차원에서 하신 것이란 말이다.
그런 혜택으로 이단도 먹고서 살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주님은 이단을 통해서도 일을 하시니 말이다. 즉 이단도 살아야 거룩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인과 악인에게도 골고루 주님이 먹이고 살리신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주님이 입히시는데, 자기 백성들은 오죽하겠느냐는 것이다.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러한 것이 자기 자신이 죽었을 때에 눈에 보이는데, 즉 “나는 진작 죽어도 너무나 당연하다” 라는 것이다. 사실 어릴 때 죽을 위험을 넘기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한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이고 도우심인데, 물론 천국에 가라고 도와주는 경우도 있고, 또 지옥에 가라고 도와주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 어느 한 순간이라도 성령님이 없이 일이 진행된 적이 있던가?
바로 그것을 우리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서 찾아보아야 하는데, 오늘 강의는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말이다. 그것을 어떻게 찾는고 하니까, 예수님이 어릴 때부터 클 때까지를 조사를 해보는데, 그렇게 조사를 해보면 “어느 한 순간이라도 성령님이 없이 일이 진행된 적이 있던가?”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의 찬가, 세례요한의 탄생, 시므이의 예언, 베드로의 뽑힘, 베드로의 세 번 부인, 그리고 가롯유다의 마귀 들림 등등, 그 어느 것이라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이 된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세 번 부인도, 가롯유다의 배신도 이미 다 예언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느 한 순간이라도 예수님의 손아귀를 떠나서 일이 진행이 된 적이 있느냐는 말이다. 성경말씀에 있어서 말이다. 그런 적이 전혀 없는데, 그것이 바로 현실이라는 것이다.
◈ 그것은 바로 감사함이 없기에 !!
이제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이 그런 모든 것이 마음이 들지 않고, 자기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바로 감사가 나오지 않아서 그러한데, 즉 “내가 무엇을 할까요?” 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이 순간에 무엇을 가지고 감사해야 하지요?”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감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결코 주님의 일이라고 할 수가 없는데, 그것은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해도 자기에게 너무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감사해야 한다고 하면 또 감사거리를 찾는 사람이 있는데, 하지만 감사거리를 찾아서 감사를 하게 되면, 처음 한두 번은 어떻게 될지 몰라도, 하지만 없는데도 자꾸만 찾게 되면 나중에는 짜증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결국은 감사할 거리가 없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가 감사하겠다는 그 자체가 뭔가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비해서 성령께서 감사토록 하는 감사가 있는데, 그런데 본인이 감사거리를 찾아서 감사를 하려고 하니,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 아나니야와 삽비라의 경우에 !!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야와 삽비라가 헌금을 하고 그만 죽임을 당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억지로 감사거리를 찾았기에 그런 일이 생기고 말았다는 것이다. 성령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데, 자기가 억지로 “나는 헌금을 하고 있다” 라고 하다가 그런 참변을 당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감사가 나오는 게 아니라 “내가 했잖아요” 라는 것이 나오고 만다는 것이다. “어서 빨리 사진을 찍어야지” 라고 말이다.
(행 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행 5: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행 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 추었느냐
(행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 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 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 강물에 떠내려가는 갓난 모세처럼 !!
그러니 우리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갓난아이 모세처럼 살면 되는데, 그때 모세는 너무 어리기 때문에 자기가 바다로 흘러가는지 공주에게로 가는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주께서는 공주를 미리 대기시켜서 건지신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 성도의 삶이라는 말이다. 미진한 것은 다음 주에 하도록 하고 이만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능성이나 기대를 버리고,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음이 우리들의 일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일임을 다시 한번 더 깨닫고 감사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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