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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교회를 넘어서 17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4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교회를 넘어서

교회를 넘어서 17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4

정인순 2013. 3. 4. 22:03

대구050627교회를넘어서17그리스도의몸으로서의교회4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daegu/daegu050627.mp3

 


[05 대구강의 10] - 교회를 넘어서 17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4

                                                                                 

                                          05,06,2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메시야가 왜 등장해야만 하는가?


오늘은 276페이지 중간부터 하겠는데, 먼저 교재를 살펴보자.


** 그렇다면 이 새 언약의 시절에 있어서, 메시야가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새 언약만을 완성하여 세우는 일이다. 모든 인간의 업적을 쓸어버림으로서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메시야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보이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히 7: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            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일단 이렇게 ‘메시야’ 라고 지칭하는 분이 굳이 왜 등장해야 하는지를, 그것부터 먼저 살펴보겠는데, 이렇게 메시야가 등장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결핍이 있기 때문인데, 즉 우리 인간에게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메시야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 도대체 인간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 인간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것은 바로 메시야가 등장을 해봐야만 아는데, 그러니 메시야가 등장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그것을 아무리 알아봐도 헛수고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그런 문제는 자기 욕망의 결핍에서 나오는 문제이지, 진짜 자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어제 장로님이 교회에서 강의를 하셨는데, 그 강의 도중에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려고 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심리학의 한계이기도 한데, 자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타인에게 알아봤자, 그래봤자 자기 자신이나 그 타인도 영적으로는 역시 아담에 속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그러한 아담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여러 가지 들어오는 감각들 중에서 자기가 선별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선별한다는 것이 문제인데 말이다. 아무튼 인간은 선별을 한다는 것이다.


왜 전에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즉 해변가에 갈매기 소리가 평소에는 잘 들리는데, ‘까악’ 하고 말이다. 이것은 까마귀 소리인가? 그런데 저녁때가 되어서 엄마가 “얘야, 밥 먹어라” 라고 하면, 그 순간에는 그만 갈매기 소리고 뭐고 모두 다 사라지고, 자기 귀에는 엄마의 밥 먹으라는 소리밖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이다.


◈ 칸트 - 인간은 오성으로 선별을  !!


그것이 바로 자기의 배고픔이라는 욕망 때문에 그러한데, 자기가 배가 고프지 않다면 갈매기 소리가 들리는데, 이 배고픔이라는 욕망, 물론 이것을 욕구나 요구로 구분할 수 있는데 말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이러한 욕망에 의해서 자기에게 오는 여러 가지 감각을 오성적으로 선별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사람마다 다른데, 하지만 그렇게 다르지만 이것을 역사적으로 100년이나 200년을 계속해서 이어가면서 확인하는 것을 두고 ‘역사적 지평’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이전에 공부를 했는데, 즉 ‘역사’ 라는 것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한계가 있을 때는 그것을 넓혀보는데, 그렇게 해보면 과거의 역사를 알아서, 이것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이라고 하는데, 즉 옛것을 알아서 새롭게 해서 말이다.


◈ 인간은 결국, 생물학적 본능 - 자손번식 !!


그렇게 해서 인간이란 무엇인지, 그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것을 알기 위해서 인간 개인에게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즉 인류역사의 지혜와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통찰해볼 때, 그렇게 역사적으로 고찰해볼 때, 인간에게 있어서 문제가 무엇인가? 결국은 생물학적으로 적응하는 것,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그러한 생물학적 적응의 본성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자손번식’ 인데, 이것을 다윈이 진화론을 통해서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결국에는 동물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이 자손번식은 대자연이 인간에게 준 본능인데, 그런데 인간은 그런 자손번식의 본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 무엇을 가지고 있는고 하니까, 신을 향한 자아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 자아의식에서 가장 기본은 자기 자신의 가치인데, 이것을 ‘자기 정체성’, 즉 ‘아이덴티티’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나’ 라고 하는 존재가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역사를 공부하고 파헤쳐 봐도 전체적인 인간의 행동은 ‘자기 잘남’ 인데, 즉 자기의 존재가치라는 말이다. 아무리 알아보고 주위에서 뭐라고 해도, 인간에게는 오성이 있어서 그런 여러 가지 자료 가운데서 모두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현재 욕구에 맞도록 필요한 것만 취사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맞아, 이것은 필요 없어”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배척이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은 메시야가 오기 전까지 죄를 전혀 몰라 !!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메시야가 오기 전까지 인간은 자기에게 무엇이 결핍이 되고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사실 그것조차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죄를 이야기하기 전까지 자기가 나름대로 가지고 있던 죄의 개념은, 그야말로 죄의 개념 축에 끼지도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메시야 앞에 설 때 비로소 인간은 죄가 무엇인지를, 즉 그런 죄의 개념을 알게 되는데, 하지만 주님이 이런 혜택을 모두에게 다 주는가? 아니면 택한 민족에게만 주는가? 당연히 택한 민족에게만 주게 되는데, 그렇게 택한 민족에게 주는 역사가 바로 구약이라는 것이다.


◈ 구약은, 거룩과 죽음의 만남 !!


그렇다면 이 구약대로 한번 해보면,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 때, 그것이 곧 시내산인데, 모세가 그렇게 섰다는 말이다. 그렇게 했을 때 인간에게 온 것은 곧 죽음인데, 이것이 바로 구약의 언약이 왔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구약의 언약이 이 세상에 출현했을 때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 바로 거룩과 죽음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이것 이외는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성경을 한 곳 찾겠는데, 출애굽기 19장은 이미 알고 있으니, 출애굽기 30장을 한번 보자.


(출 30: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출 30:18)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출 30:19)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출 30:20)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             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출 30:21)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             라


여기 19절에 보면,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라고 하는데, 그리고 출애굽기 29장 34절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고 말이다.


(출 29:34) 위임식 고기나 떡이 아침까지 남았으면 그것을 불에 사를지니 이는 거룩한즉 먹지 못할지니라


그리고 출애굽기 19장에서 모세가 백성들을 데리고 거대한 시내산 앞에 섰을 때에, 하나님이 계시는 그 시내산을 가까이 하면 안 되는데, 그러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거룩과 죽음의 만남인데,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했고 말이다. 하나님을 만나고도 살아남을 인간은 없으니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부터 이미 “너희들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라는 사망선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가 그대로 있는데, 그러니 아주 단순한 구조라는 말이다. 저쪽은 삶이고, 우리는 죽음이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는 이것을 어떻게 트위스트, 즉 왜곡시킬 수 있는 권한도 없고, 이것 말고 다른 현실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자격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의외로 간단한데, 즉 거룩함 앞에서의 죽음,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메시야가 왔을 때 그 거룩한 메시야 앞에서 우리는 죽는 것이 당연한데, 물론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 앞에서도 우리는 죽음이고 말이다. 


◈ 하나님, 정말 죽어야 합니까?


그러니 굉장히 간단한 구조인데, 다만 우리들 쪽에서 자꾸만 스스로 우리 자신을 속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죽음을 자꾸만 사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거룩한 쪽을 조금 완화시켜달라고 하는 요구조건들이 우리 속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십자가가 없는 종교이고, 또한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라는 말이다.


아무튼 인간이 사는 것은 본능 때문에 그러한데, 그렇게 자기 자신의 삶의 가치와 생존본능, 그리고 자손번식 등이 죽음과는 너무나 대비가 되니,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한 분 앞에서의 죽음이라는 것을 버리고, 어떻게 되었든지 살고 싶은데, 하지만 그렇게 살려고 하면 저쪽의 거룩을 포기하고 뭔가 다른 방식의, 즉 다른 모습의 신을 원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마저도 왜곡시키는 인간 !!


다시 말해서, 거룩한 하나님이 아니라, 어리벙벙한 그런 신을 원한다는 말이다. 그런 신과 함께 해야 자기가 마음대로 다룰 수가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언약이 없는 이방민족들의 신은 그야말로 어벙한 신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이 빌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그 요구를 들어주는 신이라는 말이다.  갓바위의 부처나,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믿는 예수가 그렇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이제 그만 죽어라” 라고 하면 ‘아멘’ 하고 죽으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것은 너무 심하니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살기는 사는데 자기가 살아있는 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렇게 두 개를 매치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왜 죽는지 이유나 알고 죽어라 !!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이, 사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물을 자격도 없는데 말이다. 하나님이 죽이면 죽어서 그냥 곱게 지옥으로 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성도인 경우에, 자기를 죽이시는 하나님께 고마워해야 하는 것은, 메시야가 나타남으로 말미암아서 “니가 죽는 것은 니 조상 아담에게 속한 그 죄 때문에, 즉 마귀에 속했기 때문에 죽는다” 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죽이신다는 말이다. 즉 우리가 죽는 이유를 알려주시고 죽이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는 이유를 아는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주님의 은혜를 사모할 수밖에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감사하고 고마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들어있는 복음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이다.


왜 기존교회에서 상담과 같은 것에 관심이 있는고 하니, 일단은 교회의 교인들은 죽고자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살고자 해서 나오기 때문에, 그들의 그런 욕구를 제대로 파악해서 들어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소비자의 취향을 교회가 일방적으로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미국 한인교회에서 있었던 일 !!


제가 아는 분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한국에 잠시 나왔는데, 한 달 뒤에는 미국에 다시 경제분야 박사학위 공부를 하려고 출국한다는데 말이다. 그가 미국에 있는 동안에 한인교회를 가보았는데, 물론 몇 주도 다니지를 못했지만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윤리 이야기를 하다가 결론은 돈을 내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십일조는 기본이고, 십일조만으로는 교회운영이 되지 않으니 그렇게 헌금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 미국은 돈이 없으면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는데, 물론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말이다. 아무튼 미국은 돈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멋진 나라라는 것이다.


이 양반이 순진해서 처음에는 그 한인교회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즉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 어쩌고저쩌고”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상대방에서 당연히 뭐라고 하겠는가? “당신이 목사보다 더 많이 아나? 당신이 목회해라” 라고 나오니, 이 양반이 다시는 한인교회에 나가지 않았다고 하는데 말이다.


제가 평소에 그런 이야기를 해도 듣는 사람들은 “설마 교회가 그럴까?” 라고 하는데, 실제로 경험을 해보면 더 심하면 심했지 약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의 문제점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꾸만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제가 반성할 테니 좀 주세요” 라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반성도 하지 않지만 말이다.


아무튼 인간은 신에게 매달려서 자기가 살아갈 수 있는 방책을 제발이지 좀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정작 하나님은 “니는 죽어야만 돼”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정작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죽는 것은 거부하고, 제발 살려달라고 한다는 말이다.


◈ 메시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


다시 정리해보면, 메시야가 이 세상에 왜 오셨는고 하니, 먼저 우리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그런데 그것이 무슨 문제인지를 인간들은 전혀 모르는데, 그래서 메시야가 와봐야만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 메시야가 출현한 이유가 두 가지인데, 먼저 우리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그 문제를 비록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라고 해도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메시야가 오시는데, 그렇다고 하면 정말 그분이 메시야가 맞는지 맞지 않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그것은 바로 “과연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인가?” 라는 것인데, 물론 이런 이야기를 제가 하도 자주해서 모두가 다 알고 있지만, 정리하는 차원에서 다시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구약의 예언한 것만 지키는 분이냐는 것이다. 구약에 예언도 되지 않았는데 보너스로 더 지켜도 안 된다는 말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렸던 모든 일들이 다 예표이고 모형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구약 때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홍해를 갈랐다고 하면 그 홍해를 우리가 지금 다시 가르고 말고 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모형이기에 말이다. 그렇게 구약에 있었던 것들은 모든 것이 다 모형이라는 말이다.


◈ 구약은 모두가 모형이고, 예표 !!


그러므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 즉 주님의 이름으로 했던 것은 전부다 하나의 예언으로 생각해달라는 말이다. 그것을 ‘예표’ 라고 하는데, 이 예표(豫表)는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때려죽여도 실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그것이 실체는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었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죽어도 그것이 결코 지옥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어려운데, 광야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죽어도 그들이 다 지옥에 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물론 지옥은 실체이고 말이다.


그러니 사울의 경우에도, 사울이 그렇게 다윗을 괴롭히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신이 들려서 마지막에는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으니, 구약성경은 사울은 이제 지옥에 간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지옥으로 간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모형이고 예표라는 것이다.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 궁극적인 것들은 신약성경에서 !!


그러므로 지옥의 궁극적인 것, 법의 궁극적인 것을 알려고 하면, 조금 있다가 율법의 궁극적인 것을 이야기하겠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런 율법과 땅과 천국과 지옥 등의 모든 궁극적인 것들을 구약에서 찾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정말로 천국이 무엇인지, 지옥이 무엇인지, 진짜 메시야가 누구인지, 그런 것을 알려고 하면 구약에서 찾으면 안 되고, 그런 것은 모두 신약성경에서 실체가 다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러니 구약에서 찾으면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아하, 예수님 덕분에 !!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이 행했다, 히스기야가 행했다, 예레미야가 행했다, 또 이사야가 행했다” 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을 일종의 모형이고, 즉 그들이 그런 일을 행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하시는가?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처럼, 또는 이사야처럼 행하고 살아가실 것인데, 바로 그 예수님 덕분에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인데, 그러면 그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약에서 이미 예언한 것이 있는데, 그 예언한 것을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 덜렁 이름만 붙였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 그것을 완수할 기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를 해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먼저 깔아놓고, 그렇게 깔아놓은 모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된 예언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그것을 기능적으로 완수하시고 성취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그분이 바로 메시야이고 말이다.


그런데 구약에 있는 예언을 성취함에 있어서 라이벌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은, 쉽게 말해서 그냥 인간들이라고 보면 되는데, 이것을 두고서 요한복음에서는 ‘육’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신약성경 - 인간의 실천과 예수님의 실천을 대비시키면, 끝 !!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된 것을 육적으로 어떻게 이룰 것인지, 바로 그것과, 두 번째로 메시야가 와서 실제로 성취하는 그 예언의 성취가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그것을 신약에서 살펴보면, 그렇게 되면 신약성경의 해석은 제대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약성경의 해석에서, 같은 본문말씀을 두고도 육적인 것을 강조하는, 즉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을 하는지, 어떻게 실천에 옮기는지 말이다. 그리고 영적으로 해석하는, 즉 예수님이 어떻게 실천에 옮기는지, 그 두 개를 서로 대비하면 신약성경은 해석이 완료된다는 것이다. 물론 구약성경도 해석이 끝나고 말이다.


◈ 분을 품지 마라 ??


신약성경에서 아무런 성경구절이라도 다 괜찮은데, 예를 들어서, “분을 품되 해가 지도록 품지 마라” 라고 한다면, 이것을 육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해가 떨어질 때가 되면 이제 분을 거두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예수님이 언제 분을 푼 적이 있는가? 낮뿐만 아니라 밤새도록 푼 적이 없는데, 밤낮으로 원수에 대한 분노를 품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을 품되 해가 지도록 품지 마라” 라고 하는 말씀이 어떻게 완성이 되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 백성에게 자기의 사랑으로, 자기 대속으로, 그렇게 예수님 자신의 희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예수님의 희생을 믿는 것이 바로 그 말씀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 간음하지 말라 ??


또 하나의 예를 들어서, “간음하지 말라” 라고 하면, 바리새인들은 한 평생을 남의 여자를 탐을 내지 않는다고 하는데(정말로?), 그렇게 육체적으로 간통하지 않으면 되는데,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무엇인가? “니가 이웃을 니 몸같이 사랑하는가?” 라는 것을 묻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주 적극적인데, 마음속으로도 간음을 하고 안 하고 간에, 정말로 형제를 사랑하고 또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것을 묻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한 그 사랑 가운데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간음하지 않으면 간음을 안 한 것으로 여기는데, 이렇게 인간들은 아직 메시야를 만나기 이전에는 물론 자기에게 악한 것도 많이 있지만, 여전히 선한 것도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모르는가? 바로 그러한 기대감 자체가 악인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즉 메시야가 오기 이전까지는 그것을 결코 인정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고 난 다음에는 인정하는가?)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바로 다름 아닌 바리새인들이라는 사실을 결코 놓치면 안 되는데, 이 바리새인들은 자기들 자체 안에 선이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양심’, 혹은 ‘율법’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 이번 여름 세미나 - 은혜와 양심 !!


이번에 8월 여름 세미나의 주제가 ‘은혜와 양심’ 인데,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오늘 오후에도 도서관을 가야 되는데, 지금 저 혼자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에는 연옥 문제를 다루려고 하는데, 천주교가 연옥을 주장하는 것이 심심해서 한 것이 아니라, 수천 년을 목회한 결과로서, 사람의 양심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주어야 교회가 부흥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 양심과 자기들이 선한다고 여기는 그 본성을 마구 군화발로 짓밟으면 사람들은 결코 교회에 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먼저 예수님을 전하기는 했는데, 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두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는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도대체 교회를 누가 원하고 요구한 것인가? 민중들이 요구한 것인데, 그들이 교회에 오면서 무엇을 바라는가? 자기들의 양심에 대한 정당함을 요구하는데, 그러니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그냥 배척해버리면 교회에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양심을 자연은총의 개념에 포함시켜서 정당화시켜줄 때, 비로소 그들은 삶의 위로를 받고 소망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인데, 즉 그들이 교회에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는 것도 자기들이 살아가는 보람이고, 또한 성직자의 보람이기도 하다고 그들은 주장하는데, 그러니 교회가 그런 것도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헌금도 나오고 말이다.


◈ 연옥설은 일종의 패자부활전 !!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돌아가신 형제나 부모님에게 제2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물론 본인도 믿지 않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들에게 패자부활전이라도 제공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교회사정을 우리가 좀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지금 한국교회도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노리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이 폭로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간의 양심 앞에서 어떻게 헛수고를 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이 다 드러난다는 말이다.


이러한 연옥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론과 영혼론을 다 공부해야 하고, 또 양심론도 공부해야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의 영혼론을 공부한다는 말은, 신 개념과 구원 개념을 또 다시 다 공부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를 공부하려면 어거스틴을 알아야 되고, 이 어거스틴을 공부하려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누스도 다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제가 나름대로 준비는 하고 있는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모두 아는 것은 아니고, 중요한 주님의 영이 임해서 복음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이 연옥 문제를, 그냥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잘못된 교리정도로 알고 넘어가면 안 되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심과 연결시켜서 생각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양심이 무엇인고 하니, 이방인들이 가지고 이방인들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이방인들의 율법이 양심인데, 그것에 제 이야기가 아니고 로마서 2장에 나오는데, 물론 { }를 해서 나오지만 말이다.


(롬 2: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             이 되나니

(롬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 메시야가 왜 와야만 하는가?


아무튼 이렇게 유대인들의 율법이나 이방인들의 율법이나, 그렇게 율법이 있음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 정당성 확보에 나설 수 없는가 하는, 그런 관계 속에서, 또한 주님의 은혜는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런 문제를 다루어보면 이 십자가의 가치가 상상외로 크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메시야가 왜 와야 하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알아보자는 말이다.


일단 교재 277페이지를 살펴보자.


** 메시야의 기능은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기능이다.


여기에 대한 것이 누가복음 2장에 보면 나오는데, 즉 ‘시므온’ 이란 선지자가 예수님의 속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예언을 했다는 것이다.


(눅 2: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            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눅 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여기에 성경본문에 보면, “이 아이는” 라고 하면서 그 아이가 어떻게 하는가? 즉 아기 예수가 인간의 마음을 칼로 찌르듯이 그렇게 도려낸다는 것이다. 마치 생선회를 치듯이 말이다. 우리들의 건성 말고, 즉 율법을 지키고 양심대로 살았다고 하는 그런 요소는 말고 말이다.


물론 우리 스스로 칼을 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칼을 들고 아무리 해봐야 선별적으로 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자기를 아무리 찔러도 자기에 대해서 봐주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 것은 얼마든지 자기 합리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칼이 자기를 찌를 때는, 우리 자신의 가치를 일체 인정하지 않고 찌르기에 전혀 인정사정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 아니, 교통순경이 왜 그 자리에?


어제도 그런 예를 들었지만, 성경공부를 하고 돌아가는데 교통순경에 걸렸다고 한다면 얼마나 낙담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나쁜 일을 하고 가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성경공부를 하고 가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성경공부를 했다고 해서 자기의 가치가 향상되었다고 착각하도록 만드는 그 원인이 아직도 자기 속에 들어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이 그렇게 경찰을 그 자리에 배치를 시켜놓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자기가 열심히 성경공부도 하고 해서, 돈을 벌려고 더 이상은 장사도 하지 않고 목회를 하겠다고 하는, 그렇게 해서 자기 존재가치가 향상되었다고 여기는, 그렇게 착각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여전히 자기 속에 들어있는데, 주님은 바로 그것을 드러내신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그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 영광을 가리우는 십자가의 원수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이고, 처음부터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원수가 어쩌다가 주의 일을 한번 했다고 해서 원수가 아니라고 반항하고 저항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원수인데, 그런데 주의 일을 한번 했다고 해서 원수가 아니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을 도려낸다는 말이다.


◈ 이제는 도망자의 신세를 그만 청산하고 !!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인지 물으신다면, 주의 말씀에 의해서 도려냄을 당하면서 자기가 죄인임이 발각될 때, 그야말로 속이 시원해진다는 것이다. 그동안 그것을 숨기려고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르는데, 그런데 이제는 그런 도망자의 신세를 청산하고 이제 모든 것을 주님에게 다 맡기는 것만큼 편안한 인생은 없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통쾌, 상쾌, 유쾌인데, 물론 지금 이 에어컨 바람도 시원하지만, 하지만 이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주님 앞에서 자기 변명과 자기 변장을 하지 안아도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제 오후설교시간에 “여러분, 제발 착해지려고 하지 마세요” 라고 했는데, 그런 부질없는 노력을 아직도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즉 아직도 자기를 속이고 의로워지려고 하느냐는 말이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주님은 죄인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지, 의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튼 이 메시야의 기능은 인간의 마음을 찌르는 기능인데, 즉 말씀으로 찔러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찌르는데 머리를 찌르는가? 가슴을 찌르는가? 도대체 어디를 찌르느냐는 말이다. 성경말씀에는 우리의 어디를 찌른다고 했는가? 엉덩이를 찌른다고 했는가? 아니면 똥침(?)을 놓는가?


◈ 그러면 무엇을 찌르는가? ‘육’ !!


그것은 바로 ‘육’을 찌른다는 것이다. 무엇이 말인가? 영이 육을 공격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신약에서의 메시야의 기능인데, 영이 오셔서 육을 찌른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육을 죽이는데, 그렇게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죽이려고 덤벼든다는 것이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정말 그런지 아닌지 말이다. 최 간사님은 하나님이 간사님을 죽이려고 하지 않던가요? 계속해서 죽이고 박살을 내는데, 그래서 간사님의 머리가 아픈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즉 ‘이근호’ 라는 이름을 와해시키고 주님의 이름으로 덮어씌운다는 것이다. 일종의 덮밥이라고 할까? 자기 인천에 가면 돈까스 덮밥도 있다고 하는데 말이다.


◈ 왜 ‘나’를 욕하나 !!


그렇게 주님은 주의 이름으로 덮어씌우는데,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이름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근호’ 라는 이름도 전혀 포기하지 않다는 말이다. 바로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까, 누군가가 저기 북한의 김일성을 욕하면 가만히 있어도, 이근호를 욕하면 결코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도 여전히 자기 이름을 걸치고 있다는 의미인데, 그래서 조용기를 욕하면 ‘할렐루야(?)’ 라고 하다가, 이근호를 욕하면 당장 “무엇이 문제인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여전히 ‘이근호’ 라는 이름이 의미가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주님은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그 이름을 공격하고 또한 공격한다는 말이다.


◈ 박탈을 당하면서 주님의 증인으로 !!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날마다 자기는 죽고 그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나온다고 했는데, 그렇게 항상 박탈을 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무장해제’ 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즉 자기 의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마치 마일리지처럼 축적된 자기 의를 말이다. 바로 이렇게 자기 이름이 박탈이 되면서 주님의 증인이 되는데, 그런 사람이 바로 목회자라는 것이다. 주의 증인으로서 말이다.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 박탈인가? 축적인가?


제가 이렇게 공부를 해보면, 목회자들이 제 강의를 들으면서 무엇을 오해하는고 하니, 자기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전혀 박탈이 아니라, 오히려 축적을 하고 누적을 시키려고 하는 짓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은 지식을 쌓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공격을 당하고, 자기가 자기 것조차도 다 빼앗기고 무장해제를 당할 때, 그런 와중에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주님의 증인으로 !!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셨는가? 베드로는 자기가 원치 않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베드로는 자기가 원하지 않은 죽임을 당함으로서 끝까지 주님의 증인으로만 살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베드로에게서 나온 능력은 베드로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으로, 그렇게 주님은 자기 증인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주님의 증인이 되는데, 여기에는 인간의 노력이나 자질은 전혀 끼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망가지고 무너지고 허물어지고 박탈을 당할 때, 바로 그때 우리는 힘이 없는 힘을 믿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힘이 없는 힘이 아니라 당연히 힘이 있는 힘을 원하고 또한 믿으려고 하는데, 하지만 십자가의 특징은 제 아무리 가까이 가더라도 힘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얻을 수 없는 그 힘이 구원한다는 말이다.


◈ 구원은, 힘없는 힘으로 !!


지금 우리가 구약을 지나서 신약성경에 돌입을 했는데,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이 어려운 원리가 어떻게 신약성경 전체에 퍼지고 있는지를 살피려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힘없는 힘이 구원하는데, 그런데 육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힘을 필요로 하는데, 그래서 육이 원하는 구원은 구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육이 원하는 메시야는 메시야도 아니고 예수도 아니라는 말이다. 육은 예수가 아닌 힘을 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힘있는 예수는 진짜 예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힘있는 예수를 원한다는 것은, 일단 힘을 빼먹고 예수를 버리겠다는 말인데, 이런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예수님은 처음부터 힘없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원하는 힘은 그분 안에서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이 무너진다고 하는 힘, 즉 자기가 얻고자 하는 그것마저도 그분 앞에서 와장창하고 무너지고 와해시키는 바로 그 힘 말이다. 그러한 힘을 느낄 때 성도에게서 기쁨과 찬양이 저절로 나오고, 자기가 그 무거운 짐을 스스로 끌고 간다고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도에게는 이제는 자기를 제발 좀 무너지게 달라고 하는 기도가 저절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와해되는 과정을 통해서 주님의 복음과 십자가만이 증거되게 해달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양 사방에 퍼지는 그리스도의 향기인데, 마치 한 알의 밀알이 썩어지듯이 말이다.


◈ 성도의 특징은?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데, 즉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다” 라고 말이다.


(고후 6: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 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              지 아니하고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성도는, 무너지는 자유함을 !!


바로 이와 동일한 고백이 우리들의 입술에서 나오기를 바라는데, 지금 사도바울은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는데, 자기는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것이 얼마나 엄청난 자유냐는 말이다.


바로 이 힘없는 힘이 신약성경을 설계했고(?), 사도바울을 바울되게 했는데, 바로 그 동일한 힘없는 힘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이 신약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 어떤 구절을 해석해도 거기에서는 힘이 없는 힘이 나오게 되고, 바로 그 힘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할 수 있는 기회에 부름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영이 육을 공격하는데, 즉 허물어지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 사수나 자기 반항을 하면 안 되는데,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고 매를 버는 일인데, 징계는 자기가 까불다가 맞는 것인데(?), 그러니 괜히 자기 자아를 지키려고 하다가 징계를 맞지 말라는 말이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으악, 자이드롭 !!


그러니 자기가 허물어지는 청룡열차를 한번 타보라는 말인데, 정점에서 내려갈 때는 그야말로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데, 롯데월드에 있는 ‘자이드롭’이 그 대표적인 것인데 말이다. 그야말로 인정사정없이 밑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바로 그렇게 떨어지고 침몰하는 중인데, 하지만 속이 얼마나 시원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이러한 혜택을 주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모두 다 해놓았는데, 왜 보통 어머니가 불고기 요리를 할 때 보면 물론 고기도 준비하지만, 시금치도 준비하고 설탕도 준비하고, 그렇게 여러가지 양념들을 준비하지 않는가?


◈ 주님은 ‘율법’ 이란 양념으로 !!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한 양념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율법인데, 그러니 율법을 누가 준비했는가? 주님께서 준비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율법을 준비하셨는가? 우리로 하여금 허물게 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아까 말한 표현대로 하자면, 우리의 마음을 찌르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마음을 찔러야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는 전혀 우리 자신의 문제점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에게는 율법을 주어도, 그 율법을 가지고서 자기 자신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 이쪽은 선이고, 저쪽은 악이다 !!


이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다시 한번 더 리바이벌을 하자면, 아주 간단한 것인데 말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선을 긋는데, 왜 선을 긋는고 하니, 즉 “저쪽은 선이고, 이쪽은 악이다” 라는 것이다. 물론 반대로 해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선을 긋는다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선을 그어놓고는 물론 자기는 선에 속하는데, 왜냐하면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선을 긋는데, 물론 악과 선을 자기 임의로 그렇게 선을 긋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을 그어놓고는, 자기는 그 선 근처에서 깔짝깔짝 거리면서 그 선을 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악의 영역을 넘지 않았다는데 대해서 자기 존재가치의 정당성을, 즉 자기가 살아야 되는 이유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깔짝깔짝하다가 기어이 넘고 마는데, 왜 넘는고 하니, 그 악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해도 거기서는 쾌감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몰래먹는 사과가 맛있고,

몰래 마시는 물이 달다고 했는데, 이것이 잠언서에 나온다는 말이다.


◈ 선(線)을 넘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예를 들어서, 자기가 담배를 끊은 지가 20년이나 다 되었는데, 그런데 그만 드라마나 영화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만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꿈속에서도 담배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하다가, 이제는 마음속으로 일단 발을 넣었다가 얼른 뺀다는 것이다. 바로 그럴 때에 이 세상이 주는 쾌감과는 비교도 안 되는 놀라운 쾌감을 느낀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이 언제 가장 짜릿한 쾌감을 느끼는고 하니까, 그 선을 넘을 때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주는 그 어떤 쾌감과도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소매치기를 하는 사람에게 “이제 돈을 줄 테니 하지 마세요” 라고 하면, 물론 처음에는 좀 참고 안 하겠지만, 그러나 돈을 받고 소매치기를 하지 않는 것보다 자기 힘으로 소매치기를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훨씬 더 짜릿하다는 것이다.


◈ 날마다 선을 다시 긋는 인간들 !!


그래서 드디어 얼마가지 못해서 그 선을 다시 넘어서게 되는데, 물론 선을 넘어선다기보다는 그 선을 다시 긋는데, 즉 선을 뒤로 후퇴를 시켜서 말이다. 즉 다시 구획조정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까 20년을 참았던 담배의 경우에 “나는 마음속으로 담배를 피웠지만, 육체적으로는 피우지 않았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선을 다시 긋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선이 그렇게 오래 가겠는가? 그런 쾌감은 얼마 가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이 사람마다 모두 다른데, 즉 사람마다 다들 선과 악을 구분하는 선을 그어놓는데, 그런데 그 선이 계속해서 이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동을 하면서 자기가 과거에는 악이라고 여겼던 그 악의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는데, 그렇다고 해서 악의 영역이 좁아지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악의 영역이 넓어야만 그만큼 자기가 그런 넓은 악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 정당화가 되니 말이다.


그렇게 악의 영역을 넓히는데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김정일이고, 후세인과 인물들인데, 그런 인물들이 등장해야만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그런 놈들만큼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정당성이 보장된다는 말이다. 마약을 하고 동성애를 하는 놈들도 역시 그런 대상이고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하리수가 자기 먼 친척이라도 되면 그런 성전환자들은 그 범위에서 빼버리고, 그리고 목사가 술을 마시면 되느냐고 하다가, 어떻게 하다가 보니 그만 자기가 술을 한잔 먹게 되면, “술은 음료수 아이가? 예수님도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마시지 말라고 언제 그랬는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을 계속해서 옮기에 되는데, 신학교에 다닐 때부터 계속해서 그렇게 이동을 한다는 말이다. 


◈ 물론 연옥도 있을 수 있지 ??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는 ‘연옥설’에 이르게 되는데, 즉 “그렇지, 양심을 주신 분이 하나님인데, 그러니 성경을 모르는 사람도 그런 양심으로 인해서 아마 연옥과 같은 것이 있을 거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곧 천주교의 연옥설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해보니 실제로 목회에도 엄청나게 도움이 되고 말이다.


그래서 루터가 여기에 엄청나게 열을 받아서 그만 깽판을 치고 말았는데(?), 그런데 이 루터의 후계자들은 어떠한가? 또 다시 그런 천주교의 연옥설과 비슷한 주장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런 모든 것들은 다 자기의 존재가치인데, 즉 “나는 존재할 가치가 있다” 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의에 접근하려고 하는데, 즉 자기의 의를 힘있게 바치면 그것이 나중에 하나님의 의에 마주치게 될 때 자기는 구원이 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인간의 자기 종교, 즉 이방종교라는 말이다.


◈ 지옥이 곧 교회 !!

지금 제가 이야기는 이렇게 부드럽게(?) 했지만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내용인지 모르는데, 그야말로 지옥 이야기인데 말이다. 그러니 지옥이 곧 교회라는 것이다. 지금 책이 곧 새로 하나 나오지 싶은데, ‘지옥의 하나님’ 이라고 말이다. 거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오는데, “교회마저 지옥일 줄이야” 라고 말이다. 그렇게 제가 광고카피를 하나 제안했는데, 그러니까 “이 책을 살래, 말래?” 라고 하는, 일종의 협박이라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우리가 의인이 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의를 뚝 떼어서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를 파악할 때 자기 소유를 가지고 파악하려고 하는 인간의 심성으로 인해서 생긴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우리를 향한 주님의 손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의’ 이기 때문에, 그래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다시 정리해보면, 우리와 같은 죄인을 붙든 주님의 손길 자체가 ‘하나님의 의’ 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 손길에서 손가락 하나를 뚝 떼어서 자기 품고 있음으로 인해서, 그래서 자기가 천당에 가려고 하면 그 손가락을 꺼내어서, 자기에게는 이러한 주님의 의가 있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그렇게 자기 소유를 뭔가 제시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 믿음은, 탈취를 당하고 박탈을 당하는 관계 !!


하지만 그것은 전혀 아닌데,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자기 존재의 가치가 또 다시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의를 믿어주는 그 믿음이 그만 자기 행위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행위가 아닌 자기의 소유된 행위가 되고 만다는 말이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우리가 가질 수가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주님에게 가짐을 당하게 되고 탈취를 당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탈취를 당하고 박탈을 당하는, 바로 그런 관계를 두고서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총신 교수들의 경우에 !!


그런데 이것을 지금 총신 교수들이 전혀 모르는데, 물론 불신자의 상태에서 유학을 갔다 왔기 때문에 그러한데 말이다. 그래서 그들이 기껏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조금 전에 말한, 즉 주님으로부터 의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의를 뚝 떼어서 가지고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주님의 손가락을 소유하고 있으면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것도 역시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그러한 예수님을 믿어서 괜찮게 된 자아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물론 처음에는 그들이 약간의 충격은 받으면서도,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게 되면 지금까지 자기들이 쌓아놓고 축적해놓은 그 존재의 가치가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런 행태를 보면, 정말이지 예수님의 죽으심을 근거로 해서 보게 되면, 그런 놈들은 지옥에 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다. 즉 조금도 불쌍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의 - 내 백성은 내가 책임진다 !!


아무튼 중요한 것은 주님의 손길이 닿았다는 것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무엇이라 하는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간단명료한 것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구약에서는 이것이 안 되는데, 그래서 구약의 사울의 경우에는 악신이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는데, 그렇게 되면 사울은 그만 자기 가 한 짓을 후회했다가 또 다시 하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이 구약은 모형인데, 하지만 신약에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장악하는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메시야인데, 그 메시야의 기능 가운데 주의 이름으로 하시는 기능이 있는데, 바로 그 기능 가운데 하나가 택한 백성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것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백성을 놓치지 않는 관계를 두고서 ‘하나님의 의’ 라고 한다는 말이다.

◈ 목사님, 박영선 목사님의 성화론은 어떤가요?


십자가마을 사이트에 어느 분이 “박영선 목사님의 성화론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라고 질문을 해서, 제가 뭐라고 답변을 했는고 하니, 그분은 로마서 8장 30절의 말씀을 모른다고 했는데(?), 거기에 보면 분명히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말이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            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            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 이 본문말씀에 거룩하게 한다는, 소위 그들이 말하는 성화론이 들어있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도바울이 보는 구원론에는 그것이 없는데, 그런데 박영선 목사님은 집어넣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감스럽게도(?) 구원론을 바라보는 틀 자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분은 성화론이 들어가지 않으면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러나 사도바울은 무엇인가?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더 이상 여기에 무엇을 첨가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박영선 목사님과 사도바울의 생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박영선 목사님은 자기 이야기가 아니고 루터가 어떻고 칼빈이 어떻고 하겠지만, 그런 것은 일종의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자기가 그런 것을 믿지 않으면 그만인데 말이다.


아무튼 여기 사도바울의 주장에는 박영선 목사가 이야기하는 성화가 없는데, 즉 “거룩하게 한다” 라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이렇게 없으면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나와야 하는데, 즉 “우리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성화가 들어가야 하는데, 왜 없지?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고 명령을 했는데” 라고 해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벧전 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여기 이렇게 분명히 베드로전서 1장에는 있는 이 말씀이 왜 로마서에 없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라고 하면 당연히 여기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연구를 해야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제가 그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하면서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 논리를 잘 한번 살펴보라는 것이다. 김대식 씨의 질문도 제가 답변을 해놓았는데, 한번 읽어보라는 것이다.


◈ 아하, 그게 내 모습이구나 !!


그러니 지금 기존 교회가 문제이고 기독교가 문제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은 신학을 핑계를 대고 하는데, 하지만 기존 신학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인간이고 그들도 인간이라면, 그렇게 같은 인간이라고 하면 공통점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들이 미처 우리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그렇게 까발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문제점들을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주장이 어쩌면 자기에게 잠복되어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러니 그들의 사고방식을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취지와 의도를 잘 분석해서, “아하, 나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있구나” 라고 하는 계기로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사건들이 터지게 했음을 깨닫는 방향으로 우리가 그렇게 받아들인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나 감사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제 교재 277페이지를 보자.


** 율법이 가입된 것을 모든 이로 하여금 죄인되게 하여 심판 아래에서 군말을 못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즉 기존의 있는 죄를 더욱 더 폭로하기 위함이다.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            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내가 죄인이 되게 하는 것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의 관계는?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미 수천 번을 더 이야기했기 때문에 더 이상 토를 달수도 없고 너무나도 분명하다는 것이다. 즉 율법은 기존의 있는 죄를 더욱 더 폭로하기 위해서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일단 거기에 대해서는 동의를 한다고 해도, 도대체 이렇게 모든 사람을 죄인이 되게 하는 것과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전체적인 틀에서 본다고 했을 때, 자기가 위치에서 부속품으로 끼어 들어가는지, 그러한 부속품의 위치까지도 제대로 다 알려고 하면 아직도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은 당연히 우리를 죄인이 되게 하는 것이고 심판 아래에 두려는 것인데, 이미 그것은 로마서 3장에도 나오는 우리가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하고 어제 밤에 심방을 갔을 때에 설교한 아모스서와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관계가 없다고 해버리면 곤란한데, 즉 율법은 죄인이 되게 한다는 것이 성경 그 어느 구절을 펼치더라도 다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연관성을 이어가는 것이 바로 설교라는 것이다.


◈ 설교란, 만남의 광장 ??


그러니 목사가 설교를 할 때, 그 본문이 깊이 판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설교라는 것은 교인들로 하여금 여기에 있는 말씀이나 저기에 있는 생뚱맞게 보이는 말씀이 내부적으로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기에,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모두 다 하셨다고 하는 것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떻게 하나님의 의로 만남이 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므로 설교는 바로 그런 만남의 연결고리를 찾아주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체질이 시원찮아서 종기가 자꾸만 생긴다고 하면, 물론 종기가 생가면 그 부분에 고약을 바르면 되기는 되는데, 하지만 그것은 율법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우리의 죄인 됨을 더욱 더 죄인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은 차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를 낫게 하고 나니 다른 곳에 그만 또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고약을 바르면 되는가? 물론 되기는 되는데, 그렇게 되면 온 몸에 고약으로 떡칠을 할 것인데 말이다.


구약의 욥이 온 몸에 무엇이 생겼는가? 종기가 나서 기왓장으로 긁곤 했는데, 그때 욥의 친구들이 뭐라고 했는가? 고약을 바르라고 했는가? 그것이 아니라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지적을 했는데, 그처럼 설교를 할 때는 교인들이 자기 주제를 파악할 수 있도록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친구들의 지적처럼?).


다시 말해서, 설교시간 30분 동안에 “아하, ‘나’ 라고 하는 인간이 결국 이런 인간이구나” 라고 하는 것을,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줌으로, 다시는 교인들이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개선하려고 하는 짓을 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아하, 나는 그런 인간이구나” 라고 해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야, 앞으로 내가 이것을 고치고 또 저것을 고치면 되겠네” 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물론 기존 교회에서는 이렇게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더라도 복음을 아는 목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하, 또 내가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고 까불었구나. 주께서는 박탈을 시키고 있는데, 나는 박탈이 되지 않으려고 또 이렇게 노력을 했구나”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알고 기뻐하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한 점에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 율법은 노동조합이 결성되어서(?), 어느 한 쪽을 건드리면 모두 다 건드리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야고보서에 나오는데, 율법에서 하나라도 어기면 전부를 다 어긴다고 말이다.


(약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자가 되나니


◈ 율법은, 괴물 불가사리 ??


그런 면에서 율법은 마치 불가사리와 같은 괴물인데, 옛날에 ‘불가사리’ 라는 돌연변이 괴물을 다룬 영화가 있었는데, 혹시 기억이 납니까? 그 괴물이 자기 몸 일부를 땅에 보이도록 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그만 건드리게 되면 몸 전체가 다 튀어나와서 “누가 나를 건드렸지?” 라고 하면서 마구 공격을 한다는 말이다.


그와 같이 율법은 일종의 괴물인데, 그런데 우리는 조그마한 것을 붙잡고 여기 밑에서 붙어서 깔짝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율법의 아주 조그마한 것을 가지고 서로 지켰느니 못 지켰느니 하면서 말이다. 예를 들어서, “너희는 온유하라” 라고 했다면,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어제 밤에 부부싸움도 하지 않고, 그래서 ‘온유하라’ 라고 한 것은 지켰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율법은 뭐라고 하는가? 우리의 뒤통수를 때리면서 “니는 돈을 사랑하잖아?”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온유하라’ 라는 것을 지켜도, 사실은 그것도 못 지키지만, 하지만 돈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것은 모두가 같은 하나의 덩치인데, 어디서 깔짝거리면서 건드리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어떻게 율법과 대결을 하겠는가? 당연히 패배를 당하지 말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뭐라고 하는가? 여기 율법에서 몇 가지 튀어나온 것을 가지고 건드리면서 “니는 5개를 지켰나? 나를 7개를 지켰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시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 죄의 진원지는 아담이다. 그 계통을 따라서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이제 새로운 아담, 마지막 아담의 몸       을 통해서 의가 들어올 차례이다. 이 의에 기존 아담의 몸을 가진 자는 감히 관여하거나, 변화를 주거나, 영      향력을 행사할 수 있거나, 도움을 주는 그런 입장에 있지 않다.


◈ 죄란 무엇인가?


그런데 여기 교재에 보면, 아담이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아담이 죄를 짓기는 했지만,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는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온 것이 바로 우리의 실정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는데, 그때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죄 안에 있는 명백한 현실인데, 그렇다면 그 죄가 도대체 무엇인가? 지금부터 그것을 설명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즉 아담 이후에 나온 죄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죄가 맞는지 아닌지를 스스로 자기 중심으로 판단하는, 그러한 것 자체가 바로 죄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아담 이후에 죄라는 것을, 죄가 우리는 지배한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죄가 있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 잘못된 생각이 바로 죄인데, 즉 인간은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는 “나는 크고 율법은 작다” 라고 하는, 그런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뱀은, 선악과의 기재가 없이는 아담을 유혹할 수 없어 !!


그러므로 율법, 즉 죄는 더 크고, 왜냐하면 죄가 율법을 가지고 작용하니 말이다. 그러한 면에서 죄를 율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악마가 율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죄를 더욱 더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즉 죄라는 율법을 가지고 말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악마는, 즉 뱀은 선악과가 없이는 아담을 유혹할 수 있는 기재(器材)가 없다는 말이다. 즉 중심기재가 말이다. 그것을 ‘메커니즘’ 이라고 하는데, 즉 악마가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하는 것이 없었다고 하면 아담을 유혹할 일이 없었듯이, 지금 악마는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불교신자에게는 양심이 있는데, 즉 ‘측은지심(惻隱之心)’ 이라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양심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말이다. 예를 지킬 줄 알고, 또 의로운 일에 나설 수 있는 것이 다 양심 때문에 그러한데, 그런데 악마는 그 양심을 가지고서 더욱 더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이다.


◈ 이래도 소경이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형국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담 이후의 인간들은 도무지 거부하는데,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소경이 하는 짓이냐는 말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데, 그러니 그 얼마나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분수를 모르고 설치는 어리석은 짓이냐는 것이다.


(요 9: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요 9: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요 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 제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


그런데 우리가 만약 이것을 안다고 하면, 즉 성경말씀인 율법이 자기를 죽인다고 하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사도바울처럼 자기를 빨리 죽여 달라고 할 것인데, 즉 “저는 죽어도 너무 당연합니다.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제가 바로 살인자입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한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 성경을 들여다보면 그 말씀이 바로 자기를 죽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라고 하신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하늘의 해를 보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하는데, 즉 해를 보고 감사하지 않으면 죽을 놈이라는 것이다. 또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라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우리에게 해당사항이 없고 말이다. 그러니 성경말씀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우리에게는 전혀 해당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뭐라고 하시는가? 우리가 어디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할지 염려하지 말라고 해도, 과연 우리는 그런 염려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 당연히 한다는 것이다.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시는 말씀도 역시나 그러한데, 아니 우리가 미쳤다고 좁은 길로 가는가? 날씨도 이렇게 덥고 환장을 하겠는데 말이다.


◈ 성도는 성경말씀을 실컷 보고, 또한 실컷 얻어터지고 !!


그러므로 그 모든 말씀이 다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즉 지금도 마귀는 율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쏘는데, 그럴 때 우리는 쏘임을 당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되는데, 그것을 피한다고 설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마귀가 노리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 인간이 반항을 하면 마귀는 더 재미가 있어 하는데, 그러니 우리는 성경말씀을 실컷 보고 또한 실컷 얻어터지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하는데, 성도는 그러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가면 갈수록 더 죄인이 되어야 하고, 또한 권리는 더욱 더 박탈을 당하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전혀 살아갈 권리가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 드디어 ‘새언약’이 !!


이제 교재 278페이지를 보겠는데, 여기에 보면 드디어 ‘새언약’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쏘는 것은 옛언약에서 그러한데, 하지만 새언약이 와도 옛언약은 그대로 남아있으니 말이다. 마귀는 지금도 우리의 육을 향하여 계속해서 율법을 쏘아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니가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했지? 이 나쁜 놈아! 또 니가 맹세를 했지? 그렇게 맹세를 하지 말라고 했는데, 예는 그냥 ‘예’ 라고 하고, 또한 아닌 것은 ‘아니오’ 라고 하면 되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웃에게 돈을 그냥 빌려주라고 했는데 왜 이자를 받았지?” 라고 하면서 온갖 것들이 다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새언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여기 교재 278페이지를 보면, 히브리서 10장 16절에서 18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한번 읽어보자.


(히 10: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히 10: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히 10: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 인간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복수를 !!


여기 17절에 보면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는데,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그렇게 기억하지 않는 분이 하나님인가? 아니면 우리 인간인가? 분명히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비해서 우리 인간은 어떠한가? 자기 과거의 잘못을 잊을 수가 없는데, 즉 어제의 잘못도 결코 잊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실수한 것을 어떻게 하는가? 자기 선행을 가지고서 자기가 자기에게 복수를 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참 중요한 부분인데, 남에게 복수하는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인간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복수를 한다는 것이다. 선한 행동과 희생정신으로 말이다. 왜 그렇게 복수를 하는가? 그것은 자기가 과거에 잘못한 행동으로 인해서, 바로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과거에 자존심이 상하고 명예가 추락한 것에 대해서 복수를 하는데, 바로 선한 행동, 즉 자기의 착함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 여보, 여기 핸드백이 사왔어 ??


예를 들어서, 마누라를 때려놓고 그 다음날에 고개를 뻣뻣이 들고 들어오는 남편이 얼마나 있겠는가? 손에 마누라 핸드백이라도 하나 사들고 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하다못해 붕어빵이라도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남편은 자기의 가치가 계속해서 높게 유지된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러한 짓거리를 계속해서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히브리서 10장에 나오는 새언약은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데, 우리의 죄와 불법을 누가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곧 성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의 과거 잘못을 기억하는데, 죽을 때까지 기억한다는 말이다.


◈ 그러면 성도는 무엇을 믿는가?


하지만 성도는 무엇을 믿는고 하니, “나는 이 꼬라지이지만, 즉 내 육은 나를 용서하지 않지만, 이렇게 나도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데, 그러나 제 3자인(?) 주님은 내 죄까지도 이미 모두 용서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그것을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곧 십자가의 대신 죽으심인데, 즉 우리의 모든 죄는 다 없어졌음을 온 몸으로 보여주셨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그런 주님만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지으면 괴로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정작 본인이 본인을 용서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월이 지나가서 기억이 희미해지면 이상하게도 잊혀지고 용서가 되는데, 그러니 용서라는 것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고 하니, 즉 ‘용서=기억하지 않음’ 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세월이 보약 ??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언제 용서할 수 있는고 하니, 그렇게 세월이 많이 지나서 희미해지면 과거에 한 자기의 잘못이 마치 모기약을 뿌리면 다 날아가듯, 그렇게 사라지면서 남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때 내가 그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아주 얄미운 짓인데, 왜 그런가? 예를 들어서, 전두환에게 “니가 명령을 해서 사람들이 수백 명이나 죽였잖아?” 라고 하면, 전두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이것은 부부사이도 그렇고 목사와 교인들의 사이도 마찬가지인데, 순간적인 감정을 가지고서 “이제 헤어집시다” 라는 소리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부모와 자식 사이도 그렇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헤어진다고 하는 것은 어디에 해당되는가? “맹세하지 말라” 라는 죄에 해당된다는 말이다.


◈ 결국은, 서로가 사랑하지 않으니 !!


오히려 “이렇게 하면 안 돼. 이것은 선이고 이것은 악이야” 라고 하면 몰라도, 그런데 이렇게 헤어지자고 하는 것은 선인지 악인지, 거기에는 관심이 없고, 그러면 무엇인가?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데, 그 정당성을 보장해다오” 라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니가 이러한 짓을 하니까, 내가 니하고 살기 싫은 것이 정당하다” 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헤어지자고 하는데, 즉 마누라하고 헤어지고 싶어도 핑계거리가 없었는데, 마침 잘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누라의 입장에서 그렇게 헤어지자는 말을 듣더라도, “그래, 홧김에 그렇겠지” 라고 하면서 참으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래, 잘 되었다. 헤어지자” 라고 하는 것은, 평소에 마누라가 신랑의 입에서 헤어지자고 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그것을 오히려 기다렸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둘 다 전혀 사랑이 없는 관계인데, 헤어져도 진작 헤어져야 하는 사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부부관계만이 아니라, 목사와 교인과의 관계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즉 장로가 헤어지자고 하더라도 참으면 되는데, “장로님, 그렇게 성급하게 내릴 결정이 아니고 며칠만 더 생각을 해봅시다” 라고 말이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도 여전히 그런 소리를 한다면, 진심이라고 여기고 헤어지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여유를 두는 것이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고 사랑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헤어졌는데, 나중에 그 장로님의 덕을 많이 보았다고 하면 얼마나 미안스러운지, 즉 사이가 좋지 않아서 헤어졌는데 도움은 많이 받고 말이다. 그럴 때는 과거에 자기가 한 말이 부끄러운데, 그러니 사람이 가지고 있는 원한관계는 세월이 흘러감으로서 날아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아하, 바람 따라, 구름 따라 !!


그러니 인간이 아무리 악해도 그 악한 것도 세월 따라 희석이 되고 날아가고, 그러니 남는 것은 무엇인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결정한 사항만이 남고,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가 결단을 내리고 한 것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세월 따라, 그렇게 모두가 다 무가치한 의미가 되어서 흘러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자기가 나름대로 아무리 정확하게 판단을 했더라도, 그것은 정확한 판단이 아니라는 말이다. 많이도 말고 세월이 5년만 지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모두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미처 5년도 가지 못해서 우리가 잘못된 판단으로 후회하는 것이 얼마나 많으냐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박찬호가 야구를 좀 못하니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쪽팔린다고 야구를 그만 하라고 난리인데, 그냥 한국에 들어오라고 하다가, 그러다가 좀 잘 던지니 부활을 했니 어쩌니 한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못하면 또 난리고, 잘하면 또 그렇게 하고, 그러니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 인생, 그것은 꿈 ??


그것을 두고 ‘꿈’ 이라고 하는데, 이 ‘꿈’ 이라는 한 글자가 진리가 될 때가 많다는 말이다. 즉 우리의 이 모든 인생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장자도 그런 말을 했지 싶은데 말이다. 아무튼 자기가 마음대로 꾸는 꿈, 그것이 바로 육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은 율법밖에 없는데, 이 율법이 뭐라고 하는가? 우리가 꿈을 꾸든 말든, 착한 일을 하든 말든, 우리는 그냥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묻지 말라고 하는데, 즉 이유 없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짓지 않았다고 우겨도, 그 율법을 우리에게 들이대게 되면, 죄인임이 단방에 드러나고 만다는 것이다.


◈ 새언약의 가치 때문에 !!


그렇게 억지로(?) 죄인을 만들기 위해서 자꾸만 율법을 갖다 대는데,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새언약의 가치 때문에 그러한데, 이것이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오늘은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아무튼 새언약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새언약’ 이라는 것은 히브리서 10장에도 나오지만, 죄와 불법을 기억하지 않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절대로 죄를 잊지 않고, 그렇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용서하는 그런 우리 본래의 모습이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 라는 인간은 항상 죄를 짓고 후회하고, 또한 죄를 짓고 후회하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그렇게 하면서 선과 악의 경계선을 자기 마음대로 옮기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 우리의 죄와 불법을 기억하지 않는 분으로 인해서 !!


그런데 놀랍게도 자기가 자기 죄를 용서하지 않는 판국에, 우리의 죄와 불법을 기억하지 않는 분이 나타나셔서 모든 것을 다 용서해줄 때, 그 사람은 오로지 주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주님의 은총만을 드러내고 높인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일에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 성도를 피조물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다는 말이다.


◈ 다음 시간에는 !!


다음 시간에 우리가 살펴볼 것은, 계속해서 ‘교회를 넘어서’를 공부하겠는데, 여기서 조금 더 어렵게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무엇을 하는고 하니, 제가 어제 설교시간에 좀 어려운 내용을 이야기했는데,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 두 종류의 생명이 나온다는 것이다. 하나는 죄 있는 생명이 나오고, 다른 하나는 죄가 없는 생명이 나온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죄 있는 생명이 십자가에서 죽고 난 뒤에 어떤 과정을 겪어서 어떻게 죄 없는 생명이 부활에 들어가는지, 그것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로마서에 보면 예수님은 분명하게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는데 말이다.


◈ 예수님의 몸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이것이 왜 어려운고 하니, 우리의 이런 죄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몸 안에서는 어떻게 섭취가 되고, 그것이 예수님의 몸에서 어떻게 죄 있는 결과로 드러나게 되는지, 그것을 한번 추적해보자는 말이다. 이것이 제대로 추적이 되어야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것이, 즉 새로운 생명의 부활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상당히 어렵다는 표정들인데, 무슨 의미인고 하니, 우리의 죄 있는 목숨이 예수님 안에 흡수가 되면, 예수님의 어떤 기능 때문에, 그것이 영적인 몸으로 변화가 되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전환이 되는 기재, 즉 메커니즘 말이다. 즉 어떤 장치로 인해서 육의 몸이 영적인 몸이 되느냐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말이다.


◈ 왜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가?


다음 시간에 바로 그것을 알아보자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게 되면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나는 죄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 그래서 그 피로 용서를 받았다” 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렇게 되면 무엇이 빠지는가? 예수님 자체 내에서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기능은 그만 빠져버리고,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 그 행위로 말미암아서, 즉 자기 믿음 덕택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안에 어떤 기능이 있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도대체 그 장치가 어떤 장치냐는 말이다. 그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결국 자기 자랑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 점에 대해서 다음시간에 한번 해보자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의인이 된 것은 단독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 사랑의 손길이 여전히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러한 줄 압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전혀 우리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자랑거리임이 드러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