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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로마서 4:14-17 / 믿음의 조상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로마서

로마서 4:14-17 / 믿음의 조상

정인순 2013. 2. 24. 14:40

 

 

음성       동영상


이근호

 

로마서 4:14-17    믿음의 조상

 

‘은혜’라는 말의 뒷배경에는 ‘행함은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이러합니다. 세계 돌아가는 역사를 인간의 행함의 결실로 본다면 그 어디에도 은혜를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해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일들이 인간의 행함의 결과로 본다면 이는 전혀 하나님의 은혜됨을 찾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함을 행함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수용하는 안목에서만 붙일 수 있는 단어입니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사건을 체험했다 하더라도 결과는 전혀 딴 판입니다.

 

 한 사람이 지옥에 가 있을 것이요 다른 사람은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은혜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은혜 아닌 인간의 행함의 결과로 볼 것인가를 판정납니다. 바로 이 경계선에서 등장되는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이분은 원래 이 세상에서 ‘아브람’으로 사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의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바뀐 것은 오늘 본문 17절의 말씀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해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로 표현하기 위해서 이 분은 이 세상에 태어나야만 했습니다. 결코 자기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람하고 상대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고 관계해야만 했던 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더 이상 아브라함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는 모델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 되는 코스에는 ‘죽음’에서 ‘살림’으로, ‘없는 것’에서 ‘있는 것’, 전부를 다 거쳐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 누락됨이 없어야 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013년 2월 24일                            본문 말씀: 로마서 4:14-17


(롬 4:14, 개역)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롬 4:15, 개역)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롬 4:16, 개역)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롬 4:17, 개역)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인 동시에 인간의 선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내면화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존에 자신이 기대한 그 하나님의 명령과 너무나 판이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남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없고, 공유할 수도 없고 남들 앞에서 “이게 나의 신앙이다”고 해도 남들은 알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자폭용입니다. 아브라함은, 왜 메시아는 내가 기대한 대로 오지 않아야 하는 면을 보이는 용도로 활용되게 됩니다. 창세기 12:3에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조상은 혈통적인 뿌리를 두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나 유대인들은 이점에 신앙의 토대를 두었습니다. 이방나라에서의 종교란 개인적인 도 닦음과 수행으로 자기 구원을 달성해 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교에서나 이스라엘에서는 신앙의 확실한 근거는 바로 자기 자신의 존재입니다.

즉 자신들이 여기 살고 있음에 하나님도 계시는 겁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빈틈없이 준수하기에 지금의 유대 혈통을 이어오고 있다는 겁니다. 상당히 객관적이고 하자없는 논리입니다. 주관적이고 모호한 신앙 기준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그들은 순수한 제사장 혈통을 고수합니다. 제사장은 모세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독대했던 인물이고 그의 손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을 문서화시켜 주셨다는 겁니다. 이 문서에 의해서 생겨난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고 이 이스라엘을 지탱해주는 케이블은 바로 ‘순수한 혈통’이라고 할 수 있는 제사장 계열이라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전에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율법의 순수함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약속을 전수하는 방식인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신앙의 탄탄한 객관적 증거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신을 향하여, 혹은 신과 접촉하고 자기 세계로 끌어당기면 당길수록 그로 인하여 신은 여전히 죽은 자로서 강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사도는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쪽에서 하나님쪽으로 건너가려고 시도하면 할수록 그것이 더욱 더 하나님을 없는 존재로 혹은 죽여야 될 대상으로 사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일이 인간의 ‘체험 밖’에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창세기 1장과 2장의 경우를 알지 못합니다. 그로 인하여 창세기 3장부터 시작되는 자신들의 역사마저 진실되게 읽어낼 수가 없습니다. 분명 창세기 2장에서 아직 인간이 범죄하기 이전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으로 넘어오면 인간은 벌써 딴 인간이 되어 있습니다. 뭘해도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시키신 그 하나님의 결정이 합법화하고 유효하게 만들 뿐입니다. 진정한 진노는 바로 인간들의 의도적인 생명나무 과실 먹기를 시도하는 그 현장에 떨어집니다. 그래도 인간은 자진해서 그 저주를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있어 ‘체험 밖’에 놓여 있습니다. 인간들은,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약속의 혈통’으로 간주하려 합니다. 마치 옛날 출애굽 당시에 홍해를 사이에 두고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건너오려거든 건너와 바라”는 식의 허세를 부리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비난받아 죽는 죽음으로 인생을 끝내시고 하나님 계신 곳으로 가셨기에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는 ‘죽음’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인간들의 열심과 시도로 말미암아 발생된 죽음의 바다입니다. 따라서 어느 인간치고 스스로 “나, 구원 안받을래요 왜냐하면 저주받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요”라고 진정으로 나설 위인은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저주 안에서’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약속 노선에 인간은 다가설 수가 없는 겁니다. 스스로 자신을 바뀌려는 자는 아무 것도 바꿔지지 않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은 ‘조상’이라는 개념을 성사시키기 위함입니다.

즉 “나는 아브라함이다”는 자를 “아브라함은 나다”라고 여기시는 분과 연결시켜주기 위해서 찾아오신 겁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바다’라는 것은 끊임없이 제 신앙 자랑질 하는 자들이 없으면 성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혈통은 곧 계속해서 혈통 자체가 끊어져야 하고 저주받아야 함을 보여주어야 될 혈통입니다.

그래야지만 그 끝에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되지 때문입니다. 약속이란, 신앙인의 달라짐을 말하는 것이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이 약속을 성사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파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안에 장차 오실 진짜 약속된 분을 심어놓으시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수시로 하나님에게 계속 시달려야 할 자입니다. 스스로 세상 사는 것을 후회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약속을 담아놓기 위해 육신의 죄를 파버리고 약속 아닌 것을 사용하셔서 ‘죽음의 바다성’을 새겨 넣으시는 겁니다. 계속 삭제 시키기고 결코 자기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늘 자신의 모든 것이 파괴당하게 되는데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외부에서 “이게 바로 믿음의 조상이다”고 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매개로 하여 하나님과의 접선을 시도합니다만 히브리서 7:16에는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즉 육체가 본성으로 해보려는 모든 시도를 충분히 발휘하게 하시면서도 정작 구원은 인간의 육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궁한 생명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고귀함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아니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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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오용익 

22강-롬4장 14-16(믿음의 조상)1302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4장 14절에서 16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3페이지입니다.

 

로마서 4:14-16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믿는 자의 조상이 있다는 말은 좀 이상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불교나 공자 맹자같은 경우에는 자기만 훌륭하고 자기만 똑똑하면 천국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복음, 기독교의 전통, 토대라 할 수 있는 유대교, 또는 구약에 있어서는 자기가 똑똑하거나 착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조상 잘 만나서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약속이라 합니다. 집안이 좋으면 그 집안의 2세, 3세들은 외제차 그것도 스포츠카 끌고 다닙니다. 그런데 집안이 좋지 않으면 촌에서 경운기 끌고 논두렁에서 자빠지고 넘어지면서 살지요.

 

 

유대인들이 똑똑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렇기에 나를 태어나게 해 준 쪽에서 내 인생에 대해서 뭔가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무슨 책임을 집니까? 어린아이는 낳은 부모가 책임을 지듯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책임을 져야 되는데 어떤 식으로 지느냐하면 우리 선조한테 하나님이 약속을 주셔서 그 약속대로 하나님이 실행에 옮기시면 그 혜택을 후손이 맘껏 맛보고 누림으로서 선조들이 갔던 그 나라에 합세한다는 생각을 유대인들이 갖고 있고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갖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말을 잊지를 못해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잊지를 못합니다. 나 혼자 똑똑하고 잘나고 믿음 좋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나는 천국 가 있는 분과 연줄, 일종의 빽이 있는 거예요. 천국 가 있는 사람과 관련이 있기에 나는 천국가고 구원받는 겁니다. 유대인, 이스라엘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지금도 이스라엘이 주변 이슬람국가들에 포위되어 있으면서 핵무기 만들어서 버티는 이유는 ‘우리는 천국의 하나님과 관련되었다.’고 하는데 그 관련된 것을 무엇이라 하느냐, 약속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약속을 실행해 내면서 그 약속에 의해서 자손들이 태어나게 되어 있고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들만 구원받게 되어 있다, 그 외에는 안 된다는 것이 유대인들, 이스라엘인들이 구약을 해석입니다. 그렇게 구약을 해석했다는 것은 달리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어요. 그 말 그대로 맞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연줄로 이미 천국 가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관련되어 있는데 그 관련된 약속이 그냥 구두로만 한다면 약속이 아니고 실제로 문서화해서 글자로 새긴 것을 가지고 돌판, 또는 율법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서서히 이스라엘의 내막이 풀리지요? 이스라엘은 공자나 맹자나 부처, 자기 혼자 보리수 아래서 갈빗대 나오도록 퀭한 모습으로 도 닦아서 깨달았노라, 이런 종교가 아니에요.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요. 그 증거가 뭐냐, 바로 나 여기 있다, 내가 있고 우리 아버지와 나는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다는 그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지요. 내가 여기 있음은 하나님의 약속이 약속대로 시행된 결과물로서 내가 여기 있다는데 여기에 이의를 달수 없을 만큼 요지부동의 증거를 갖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교라 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에요. 유대교는 그 집안, 혈통 자체가 하나님의 생산물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것은 ‘나는 우리 아버지 없어.’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에요. 세상에 아버지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어요. 아버지가 있으면 그 아버지가 있듯이 내가 있는 것처럼 그런 관계로 하나님이 있기에 내가 생긴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전에 원래 갖고 있던 이름이 뭐냐,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아브람, 하나님이 아버지니 아버지는 자식을 낳게 되어 있고 그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들이 오늘날 아브라함 혈통을 이루는 이스라엘이고 오늘날 유대나라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믿음의 증거를 가진다고 해서 뭘 봤느니, 지진이 일어났느니, 땅이 울렸느니, 그런 증거는 필요치 않아요. ‘나를 봐라. 내가 유대인이고 이스라엘이잖아.’ 그것으로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구약에서는 없던 나라가 생겼으니 그 나라 생겨남 자체, 내가 있음 자체가 바로 하나님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 유대인의 자부심은 대단하지요. 더 이상 이의를 제기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구약을 반영하기에 그렇습니다. 그 이스라엘 내부에서 좀 더 세분화해서 혈통을 고귀한 혈통, 그야말로 거룩한 피가 전수되는 혈통을 따로 율법에 의해서 뽑아냈습니다. 그게 뭐냐, 다윗 자손의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물론 유대전체, 이스라엘 전체가 다 야곱의 열두 아들,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되었기 때문에 다들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증거물들이지만 특별히 정리한 가계가 뭐냐, 제사장이 있다는 거예요. 제사장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다른 사람은 못하고 오직 레위집안만 제사장을 한다는 사실로써 확실함에 더욱 확실함으로 보강된다는 겁니다. 그 제사장을 목숨 걸고 옹립했던 거예요. 로마라는 세속나라에 있으면서도 다른 것은 다 다른 나라에 넘어가도 목숨 걸고 지켰던 것이 뭐냐, 제사장만큼은 민족의 정체성이고 심지 같은 것이니 이것 빠지면 아무것도 아니니 그것만은 보장해 달라고 해서 로마가 제사장직만큼은 보장해 줬던 겁니다.

 

 

제사장들이 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대로 시행하고 제사를 드리고 그 율법대로 시행한 사람 중에 한 사람,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인 그 사람이 바로 지금 편지를 우리에게 썼던 사도바울입니다. 설교 시작부터 지금까지 한 유대의 모든 이야기, 거기에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확신을 가졌던 그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공적을 알고 난 뒤에 그가 내린 결론은 뭐냐, ‘하나님은 없었다!’

 

 

그리고 진짜 하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면 이 땅에 나타날 때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신은 죽었다는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는 식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옛날부터 신은 죽어 있었어요.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구약에서 껍데기는 다 챙겼는데 그 구약에서 하나님이 죽은 하나님으로 나타난다는 그 사실은 왜 볼 수 없었는가, 그 말이지요. 그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그것을 지금 설명하겠습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나, 우리 이스라엘 혈통이 있다는 자체, 이스라엘이 살아 있다는 자체가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증거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씨를 주시고 그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자손을 퍼뜨렸다, 그 퍼뜨려진 자손들이 흐르고 흘러서 사도바울까지 내려왔잖아요.

 

 

그러니 내가 여기 있음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이고 내가 여기 살아 있음에 하나님이 살아 있음도 분명한 거예요. 더 이상 어떤 증거도 이유도 없다는 말이지요. 기존 이방종교는 자기가 섬기고 자기가 어떤 정성을 바쳐야 되는데 이것은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나라자체가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반증해 주거든요.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그것은 애초부터 신이 아니었어요. 그 이유는 뭐냐, 내가 살아 있음에 신이 살아있다고 나의 살아 있음과 신의 살아 있음을 직통으로 연결시킨 겁니다.

 

 

요즘 같으면 내가 믿음 있음에 하나님이 믿음을 줬다, 내가 소망 있음에 하나님이 소망을 줬다, 내가 사랑하매 하나님이 이 사랑을 줬다, 라고 자기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하나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엮고자 했던 그 종교적인 행위가 전부 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왜 제사드릴 때, 어린양을 잡을 때 “하나님, 잘 보세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어린양을 잡았습니다. 복 주세요.” 이것만 생각했지 그 죽는 어린양이 “네가 지금 제사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내가 그 제사하는 어린양으로 죽는다.”는 그 생각을 왜 못했는가 말이지요.

 

 

“예수님, 저 십자가 믿어요.”라고 할 때 십자가 믿어요, 라는 그 말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는 그 사실을 왜 미처 생각을 못했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죽은 하나님이고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 맞은 편 쪽에서 우리가 살아 있음에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그 무리 속에서 자기들끼리는 한 편인데 주님은 그 한편에 끼어들지 않았기에 그런 현상이 벌어진 겁니다. 저쪽 편에 가 있는 거예요. 쉽게 해 봅시다.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었습니까? 구약을 우리 있음에 하나님 있다, 이렇게 해석했던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살해당했잖아요.

 

 

그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모든 문제는 정상이 되었다고 여겼는데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해 버렸습니다. 이로써 출애굽 때는 홍해 바다를 가운데 두고 애굽은 저쪽이고 히브리인들은 이쪽에 있다고 해서 “건너와 봐! 건너오면 빠져죽지.”라고 조롱했던 그 이스라엘이 이제는 주님이 홍해를 건너 저쪽으로 가 버렸는데 주님 간 그 쪽으로 갈수가 없는 이유는 이 죽음이라는 것, 이 죽음이라는 것이 가로놓여 있거든요. 베드로는 말하기를 “제가 죽어서라도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죽는다는 뉘앙스를 보이니까 베드로가 말하기를 “그러면 내가 목숨바쳐서라도 주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할 베드로가 지금 뭘 모르고 있느냐 하면 “내가 주님을 위해서 죽겠습니다.”라는 것으로 인해서 생긴 죽음, 그 죽음을 건너갈 수 없다는 말이지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충성 봉사 헌금 전도 교회 다니겠다는 그 발언과 그 멘트로 인하여 주님은 죽어서 저쪽 편에 가 있는데 베드로 생각하기를 자기는 착하고 자기는 믿음 좋기에 예수님 고난 받는 것은 자기 빼놓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그 사람들에 의해서 죽었기에 주님은 나와 한편이기에 자기는 넣어달라는 식으로 나온 거예요.

 

 

주님은 “내가 문제야 네가!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그럴 때 정말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한 겁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한다는 그 이야기는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그 내용 속에 포함이 되어 있는데, 자기들이 아브라함자손이라고 우기는 그 유대인들이 그 본문에서 닭울음소리를 찾아낼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내가 살아 있음에 하나님도 살아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나는 아브라함 자손이다, 또는 나는 아브라함의 식구다, 나는 아브라함이다, 이것이 문제라는 말이지요. 앞에 ‘나는’을 붙여서 ‘나는 신자다, 나는 구원받는다, 나는 기독교신자다, 나는 천국 간다.’ 이렇게 앞에 ‘나’를 붙인 그것이 문제였어요.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이다.’라고 우기라고 복 주신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바로 나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라는 것은 없는 인간입니다. 아브라함족속에서는 아브라함이 안 나와요. 아브람이라는 뜻은 하나님이 아버지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아브라함이라는 뜻은 많은 족속의, 많은 사람들의 조상이라는 뜻으로 아브라함이라는 말이죠.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바뀌니까 사람들이 ‘아,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많은 자식을 낳아서 그 생산된 모든 자식의 조상이 아브라함 되도록 하셨구나.’ 라고 오해를 해서 내가 있음에 하나님도 있다고 여긴 겁니다. 그렇게 하려면 구태여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뀔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아브람이냐? 믿음 좋아라. 복 줄게 구원 받아라.”하면 끝나는 문제에요. 하나님이 아브람이라는 사람을 아브라함으로 구태여 바꾼 이유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 이 모든 말이 사실은 죄짓고 난 뒤에 타락한 입에서 나온, 악마가 배후에서 사주한 거짓말이었다는 말입니다. 신앙 자체가 거짓말이었어요.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창세기 1장, 여러분이 다 알지요.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십니다. 다 알아요. 에덴동산 괜찮았지요. 3장에 오게 되면 뱀이 유혹을 해서 우리 조상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그 다음부터는 죄가 찾아왔고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되는 것은 이거예요. 창세기 1장 2장이 있더라도 체험이 안돼요.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은 3장부터 체험하는 거예요. 창세기 3장은 범죄한 이후지요. 범죄한 이후의 조상의 후손이기에 우리가 어떤 발언, 예수나 성령, 하나님 같은 어떤 발언을 해도 그것은 죄의 일부로 발산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체험한다는 것은 3장부터 일어난 모든 것의 체험이에요. 4장에 보면 가인이 살인을 합니다. 그것도 우리에게 체험이 된다고요. 같은 인간이기에. 하지만 창세기 2장의 죄짓기 이전의 아담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어떠한 능력도 가능성도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체험하는 것은 3장부터 인데 말로는 창세기 1장과 2장을 거론해요. 이것은 반칙이에요. 이것은 속임수입니다. 1장 2장에 관여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은 죄가 없기에. 우리는 3장부터 있기에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을 수 없고 거기서 추방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항상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 나에게서 발설되는 모든 것, 신앙고백의 모든 것은 그것 때문에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하고 저주받아야 합당하다, 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발설을 하고 있는 거예요. 믿음 좋습니다, 이것도 저주요 나는 교회 잘 다닙니다, 하는 것도 심판받을 이유가 됩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것이 다 체험된 것에서 나온다니까요. 꿈에 있는 이야기도 듣도 보도 못한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평소에 다 체험된 것이 나옵니다. 체험된 것이 편집이 잘 못되어서 엉뚱하게 꿈속에서 나오잖아요.

 

 

이것을 가지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 죄에 갇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하세요. 하시는데 그 신앙생활 자체가 죄가 되도록 주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너 신앙생활 잘해?”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죄라니까.” “신앙생활 잘 못해?” “잘 못합니다.” “그게 바로 죄라니까”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잘해도 문제고 못해도 문제고 그 자체가 이미 우리가 할 수 있는 역량, 우리가 체험할 수 있고 우리가 체험한 것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그 역량의 범주가 창세기 3장 이후의 죄악된 데서 부글부글 끓는데서 나온 몸부림들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조상되게 해서 혈통을 만들 때 그 혈통은 없는 겁니다. 없는 혈통이에요. 우리가 붙잡을 수도 없고 끼어들 수도 없고 회원등록해서 가입할 수도 없는 겁니다. 그래놓고 그 없는 족보에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해서 아브라함을 설정해 놓았습니다.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건너 뛸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왜냐, 건너뛰고자 점프를 시도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그런 우리로 인하여 하나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시도를 하면 할수록 그것 때문에 주님과의 거리가 멀어졌다는 것을 확인하는 절차일 뿐 신앙을 하나 안하나 홍해가 갈라진 것은 여전히 갈라진 거예요.

 

 

그래서 방금 길게 한 이 모든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이렇게 짧게 되어 있어요. 14절에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라고 되어 있지요. 언제나 믿음은 헛것이 아니었습니까? 믿음은 항상 헛것이었어요. 입사원서 낼 때 때에 주특기는 믿음, 이러면 사장님이 그것을 반영해 줍니까? 가락교회 사업하는 집사님이 계신데 그 김 중우 집사님이 이야기해요. “우리 회사 직원이 한 4, 50명쯤 되는데 예수 믿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입사원서 낼 때 믿음 좋다든지 기독교 신자라는 것을 일체 반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분은 복음을 알기에, 믿음이 헛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얼마나 똑똑한지 몰라요. 성경 로마서 4장 14절에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은 이미 사도바울도 사람들의 모든 믿음이 헛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거예요. 믿음은 이미 사람의 손을 떠나버린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내가 열심을 내서 신앙을 시도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홍해 바다의 간격은 점점 더 멀어지는 겁니다. 내가 가만있어도 멀어져 있고 뭘 시도해도 멀어진 상태를 점프해서 건너편에 있는 예수님께로 갈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내가 시도하는 이것으로 인하여 대신 죽었던 분이기에 그 죽음을 내 쪽에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모순된 이야기에요. 빨간 볼펜에서 빨간 잉크로 쓰고 있으면서 ‘나는 지금 글씨를 파란 잉크로 쓰고 있다.’고 하면서 아무리 깊숙하게 눌러서 쓴다고 해도 그 색은 빨간 글씨가 되는 겁니다. 창세기 3장 이후에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죄악된 것 밖에 없는데 죄악된 것은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바르게 한다고 할지라도 보편화된 죄악 아래서 빨간 볼펜에서 빨간 잉크만 나오듯이 죄악이라는 잉크만 자꾸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믿음, 믿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헛것이라고 하면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4장 14절, 15절에서 너희들이 근거하는 믿음은 율법에서 나왔기에 믿음이 헛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거기서 율법이라고 할 때는 율법 지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그 율법에 의해서 우리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거예요. 유대인, 이스라엘 나라가,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 내가 여기 있음에 하나님이 있다고 여기는 그것, 그것에 대해서 율법의 다리를 놓고서 그 율법을 타고서 ‘하나님, 약속 맞지요? 약속대로 사인했잖아요. 그러면 약속대로 따라 밟으면 약속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도달됩니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한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은 오늘날 21세기의 한국 사람들보고 “믿음 좋아야 합니다. 교회 열심히 다니세요.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그런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서 구걸하거나 아양을 떨기 위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실제로 하나님이 무슨 일을 벌렸는가,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당신의 존재에서 나온 모든 것은 의미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에 광주를 가는데 요새 88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에요. 고령다리가 있었어요. 그 다리는 상당히 유명한 다리에요.

 

 

왜, 그 다리 맞은편에 경찰이 숨어서 단속을 했거든요. 다리에서 과속이나 추월을 하면 교통법위반이니까 그걸 경찰이 숨어서 단속을 많이 했어요. 추억의 다리죠. 그런데 그 옆에 새로 거창한 다리가 새워졌습니다. 그러면 기존의 그 추억이 서린 다리는 앞으로 쓸모없는 다리가 되어버려요. 율법에 의해서 후손이 되는 것은 드디어 구닥다리 다리가 되는 거예요. 주님은 율법을 고수한 것을 그대로 율법을 주시면서 율법을 쥐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헛것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그 헛것을 새로운 다리로 깔아버린 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는 이것 때문에 ‘그런 것 필요 없어’라고 배격하고 제켜버리는 그것을 하나님은 유일하게 구원의 다리로 깔아버린 거예요. 그게 바로 아브라함은 율법의 조상이 아니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 거예요. 배척받은 자들의 집합이죠. 이러한 방식을 주께서는 사용하시는 것은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라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상당히 어려운 말인데 그 어려운 말을 사도바울도 아시고 그것을 좀 더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15절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을 의지한다, 믿는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의지하는 것이 돼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잖아요. 회사입사원서 낼 때 ‘저는 기독교라는 종교, 하나님을 잘 믿습니다.’ 하는 그것은 실은 아무소용 없는 것을 믿는 셈이 돼요. 왜냐, 이미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는 하나님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믿어요. 행여나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면 고맙지만 하나님을 믿으면서 ‘전적으로 주께서 책임지세요.’ 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믿는 인간이 바보에요.

 

 

왜 그런가,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보고 믿음이 조상이라고 한 것은 ‘네가 받은 믿음은 너에게만 해당되지 다른 사람들, 자식들이나 부인이나 나눠 갖자는 식이 성립 안 된다’는 거예요. 창세기 3장 이후에 인간은 자기가 믿어서 자기만 구원받게 되어 있어요. 자기가 열심히 해서 남이 공유할 수 없는 희생과 사랑 믿음, 이 모든 것을 본인 것으로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을 선택해서 믿음의 조상으로 삼았다는 말은 그 다음부터 아브라함을 시달리게 하는 거예요 .

 

 

죽이는 거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한테 무지무지 시달렸습니다. 하는 족족 거부당했어요. 결제 올리면 거부, 올리면 거부당합니다. 그래놓고 다른 사람한테 뭐라고 하느냐, ‘네가 믿음의 조상을 보고 싶나? 아브라함을 봐라.’ 그런데 정작 본인이 아브라함은 뭔가를 하나님께 해도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하나님이 소용없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을 때 사실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어도 소용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래도 한 번 믿어 봐? 혹시 행운을 줄지.’라고 여전히 믿는 것은 자기 자신만 믿을 뿐이지 그것을 감추는 용도로서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바보 병신입니까? 하나님을 믿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무 쓸데없는 것을 믿는 거예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 보다 차라리 내 손 기능이 더 쓸모 있어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너는 하나님을 안 믿고 너만 믿는 인간’이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간 거예요. 쉽게 말해서 ‘너 자신이 너를 바꿀 생각을 하지 말고 내가 너를 일방적으로 바꿔줄 거야.’라는 거예요. 그게 믿음의 조상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알아서 참고로 믿음 좋은 사람, 한 경직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것을 불러내서 롤 모델 삼아서 ‘나도 저 사람처럼 기도해야지.’라는 식으로 인간은 안 바뀝니다.

 

 

그것은 다 헛되고 헛된 것 믿는 것이고 자기 신앙이나 믿지 사실은 자기 외에는 아무도 안 믿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삼으면서 계속 아브라함을 밟습니다. ‘가만있어.’ 하고 군화발로 지근지근 밟아요. ‘입 다물어’ 계속 밟아요. 그런데 반대로 진짜 규약을 그렇게 해석 못하고 내가 있음에 하나님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맨 날 고귀한 핏줄, 훌륭한 핏줄, 그 핏줄이 언약대로 살아 있으면 우리는 구원받는 것이다, 그렇게 했잖아요. 예수님은 그들 보고 “너희 아비가 마귀다.” 했고 “너희 혈통이 악마의 혈통이다.”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교인들보고 하는 이야기와 똑같은 거예요.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렇잖아요. 정치하는 사람들이 당 만들어놓고 국민들에게 인지도가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갑니다. 오대산이나 백담사에 가 있으면 “어르신네! 이제 정계복귀 하셔야지요.” “더럽다. 나는 복귀 안 한다.” “어르신! 마음 한 번만 돌려주세요. 국민들이 어르신의 정계복귀를 기다립니다.” 하잖아요. 그러니 세상 권력이라는 것은 자꾸 찾아가고 붙들고 내가 빌고 애걸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 그것이 원리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다룰 때는 빌고 애걸하고 어떤 선택을 해도 그 모든 것을 묵살하시고 뭉개시고 무시하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한테는 다른 소리 하시는 거예요. “봐라! 아브라함 같은 훌륭한 믿음이 있느냐.”

 

 

정작 당사자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도대체 입도 못 뗄 정도로 완전히 부서진 인생이거든요. 아브라함에다 죽음의 바다, 홍해바다를 삽입시키는 작업에 나섭니다. ‘너의 너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인간들의 잘못된 약속 개념으로 인하여 죽었던 그 분이 바로 진짜 약속이었다. 따라서 진짜 약속이 네 속에 안착되기 위해서는 네 모든 기존의 약속개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계속 포크레인 가지고 파 헤쳐야 되는 겁니다. 사람이 관을 묻으려 해도 땅을 파야 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내부를 파서 예수님 자신을 거기에 안착시킵니다.

 

 

그래서 “나는 아브라함이다, 라는 소리를 하지 말라. 아브라함이 바로 나다, 라는 이야기를 해라.” 아브라함이 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약속대로 만들어지게 한 것이지 내가 약속을 감안해서 약속을 지키려고 애쓴 종교적인, 신앙적인 결과로 나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하면, 이미 창세기 3장 이후에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죄뿐이거든요. 죄를 긁어내서 그 안에 생명을 담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히브리서 7장 16절에 나와 있어요.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율법이라는 것이 분명히 거룩한 법이지만 그것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하면 인간의 육체와 육신,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된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된 계명의 법을 좆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좆아 된 것이라, 해서 우리가 받은 생명이라 하는 것은 우리 육신의 행함과 전혀 별개의 족보를 따라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내가 여기 있음에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나 때문에 돌아가셨으니까.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은 우리가 수긍해야 되고 수용해야 됩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믿음이 있습니다. 제가 소망이 있습니다. 제가 사랑도 있습니다.” 분명히 그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자랑질 밖에 할 것이 없어요. 그런데 그 자랑질은 계속 되어야 돼요. 왜, 그래야 우리가 받은 영생과 구원은 이런 자랑질과 별개로 주어졌음을 보여줄 수 있는 증거로서의 용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발 좀 자랑질 좀 하세요. 믿음 좋습니다! 믿음 좋으면 뭐하나 좋다고 소고기나 사먹겠지, 아무 짝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믿음 좋다고 자랑질 좀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기에. 그런데 우리 교인들은 그 자랑질을 안하고 있어요. 안하면 뭐 믿음 좋다고 칭찬 해 줄줄 알고? 다른 교인들은 기도원에 가서 은혜 받았다는 이야기, 기적 체험했다는 그런 이야기도 많이 하던데 우리 교인들은 하지도 않고. 그런 이야기 많이 하시면서 그것이 아무 소용없는, 구원과 아무 상관없는 짓을 이토록 계속 하고 있다고 고백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15절에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창세기 1장 2장은 우리가 모르거든요. 3장 이후에 태어난 우리는 이것이 체험이 안됩니다. 왜냐,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절대로 나만은 진노에서 빠진다고 여기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이룬다는 것이 내 몸에 생생하게 체험되지를 않아요. 그런데 언제 체험되는가? 나는 믿음 좋고, 사랑 좋고, 복음도 알고 설교도 잘하고, 어쩌고 저쩌고 할 때 옆에 어린애가 “아무 소용없는 기라.”할 때 갑자기 진노와 분통이 일어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분노가 있기 전에 우리부터 먼저 하나님께 분노를 일으키는 상황이 유발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 자손이 그렇게 다루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다루어질 때 닭은 울어야 되고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해야 되는데 닭은 울고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하는 그것이 바로 베드로가 아브라함 자손에게 속했다는 증거입니다. 아무한테나 ‘닭이 운다.’는 이런 소리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보고 땅 파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관 묻을 자리는 주님이 이미 알고 계셔요. 지금도 포크레인 가지고 우리를 계속 팝니다. 우리는 그렇게 파들어 오니까 재수 없다고 해서 ‘이렇게 재수 없는데 신앙이 잘못되었습니까?’ 이러고 있는데 원래부터 잘못되었어요.

 

 

달리 해 보았자 좋아질 가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우리 자신이 이 땅에 오래 살려고 한다는 자체를 후회하게 만드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보고 마귀를 이기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한테 우리를 삼키라고 요구합니다. “제발 마귀한테 삼키움을 당해버려라.” 왜 예수님도 마귀에게 삼키움을 당했거든요. 삼키워야 그 삼키움을 이기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 확인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귀야! 나오너라. 한 판 붙자.” 이렇게 나오지 말고 “마귀야! 나오너라. 내가 져줄게.” 이렇게 해야 돼요.

 

 

날마다 마귀에게 지세요. 주의 종의 명령입니다. 마귀한테 매일 지는데 이것은 우리가 지라고 요청할 필요도 없어요. 사람들이 돌이 떡 되게 하는 것, 인기 얻는 것, 눈만 뜨면 세상 권력 다 가지는 것, 이것은 제가 말 하나 안하나 그대로 진행되고 있잖아요.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그것 때문에 살잖아요. 맨 날 마귀에게 지고 돌아서면 또 유혹받고,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그 굴레, 동굴 같은 세계 속에서 가끔은 아브라함 자손을 만날 때 우리는 기적을 느낍니다. ‘저 사람은 귀신 아닌가? 어떻게 홍해바다 건너간 사람을 이렇게 미리 만나나.’ 할 정도로 신기하지요.

 

 

사는 것이 후회될 정도로, 내가 괜히 살았어, 할 정도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경유한 그 경유가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예수님의 관속에서 계속 발휘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걱정하지 말라. 너 대신 내가 죽었잖아.”라는 이야기, “그러니까 너는 ‘내가 예수를 계속 죽이는 자이며 죽이는 자를 오히려 살려내는 능력은 창세기 3장 이후의 체험이 아니고 창세기 1장 2장을 이미 장악하시고 주관하신 예수님의 효과”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혈통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랑했지만 오늘날 교회가 교회등록하고 세례 받으면 같은 집안이라고 하는데 믿을 것을 믿으세요.

 

 

뭔가 증거가 있어야 자꾸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증거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증거입니다. 바로 진노를 이루게 한 하나의 죄인으로 살아 있다는 것,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죽었다는 것, 십자가에 돌아가신 증거, 예수의 증거, 이 흔적을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깁시다. 우리의 가치는 주님의 희생에 우리가 참여되었다는 그것, 그래서 우리의 자리는 비록 죄인이나 고귀한 자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을 믿으면서 행여냐 행운이 찾아올까 로또 복권 사는 심정으로 주님의 교회를 찾아 나왔습니다. 바로 그 짓을 하도록 한 하나님께서 그 죄인 속에 자신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심어놓았습니다. 이제는 그 사랑이 귀한 것을 우리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