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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로마서 4:1-8 /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로마서

로마서 4:1-8 /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

정인순 2013. 2. 13. 10:22

 

 

음성        동영상1     동영상2


이근호

 

로마서 4:1-8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

 

흔히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가축의 수가 늘어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혹은 후손이 많아지고 소유된 땅이 새로 생긴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정작 아브라함이 ‘그래도 죽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죽어도 축복이었다’를 말할 수 있는 근거를 하나님의 약속 속에서 찾아봐야 합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이 인생 중간에 하나님의 언약을 입어서 의인으로 죽었다가 되었다는 것이 축복 스토리입니다. 이럴 경우에 사람들은 흔히 아브라함의 행함과 자신들의 행함을 비교해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행함 대 행함의 비교는 마치 가인이 동생 아벨의 제사와 자기 제사와 비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에게는 비교거리는 실은 없습니다. 인간은 비교하나마나 이미 저주받아 죽기로 작정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가축이 늘어나고 자손이 많고 땅이 넓어지더라도 죽음의 취소되지 않는 한 동일한 팔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행함이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행함 뿐이니 특별하게 비교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란 행함에 차원에 속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함이란 필히 삯을 기대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그 믿음의 보상을 기대하는 겁니다. 보상을 기대하는 행함이 되고 맙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은 믿음으로 인한 보상이 아니라 ‘믿었다’는 그 자체가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즉 믿을 수 없는 가운데 믿게 한다는 그 능력이 따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겁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속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나 일들은 인간의 행함으로 달성할 권역 밖에서 주어지는 일입니다. 일 그 자체가 곧 복 찾아왔음을 말해주는 결과들입니다. 실컷 순종해놓고서는 ‘아무 것도 한 게 없음’이 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013년 2월 10일                          

본문 말씀: 로마서 4:1-8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롬 4:10, 개역)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사도의 편지가 무척 난해합니다. 쉽게 믿게 하지를 않습니다. 특히 어려운 내용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하고 직접 일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나름대로 신을 알고, 본인이 알고 있는 신을 섬기면 그것으로 신을 섬기는 것이 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증거로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과 다윗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는 곧, 누구든지 아브라함과 다윗과 관련지은 그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아니라 누구라도 구원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각자 나름대로 자기 구원을 성사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구원방식과 아닌 특수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방식은 구원받는 모든 자들에게 일반화됩니다. 그 특수성이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이 표현됩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않는 자’ ‘일한 것이 없이’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됨을 분명히 보이기 위해 구원받아야 될 모든 이들은 ‘일을 아니할지라도’와 ‘경건치 않는 자’와 ‘일한 것이 없이’라는 자리로 소집됩니다. 사실 인간들은 모두 나름대로 구원욕구에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삶이 장난이 아닙니다. 너무 힘듭니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무슨 아부나 수작도 부릴 용의가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지만 제발 죽어서는 이런 고생이 보상받기를 원합니다. 죽어서는 이런 생존에 시달림이 없이 마음 편하고 풍요하게 살고 싶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나름대로 내부적으로 법을 창출합니다. 즉 “하나님이 내리시는 말씀과 지시는 충실히 따르자. 그러면 무슨 좋은 날이 있겠지”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구원이라면 구태여 메시아가 출현이 필요치 않습니다. 오히려 메시아가 없다면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메시아가 주어진다면 모든 인간은 구원받지  못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메시아를 위한 구원이 새삼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구원’이 아니라 ‘메시아 구원’입니다.

이 메시아를 위한 구원으로 인하여 인간의 구원욕구는 접어야 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너무 말이 많습니다. 너무 나불댑니다. 로마서 3:19의 말씀처럼 차라리 율법이 주어진 것은 ‘인간의 입을 막음’용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이 지시에 따르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인간이 도저히 부응할 수 없는 것을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취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 요청함이란 딴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하여금 죄를 자백케 하는데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할례’를 하라고 하시면서, 할례를 했다고 여기는 자를 무할례자로 만들어버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 어느 인간도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해서 안했고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인데 스스로 반대의 결과인 자가 자기라고 자백하라면 누가 자백하겠습니까

음행을 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음행한 자라고 고백하라면 어떻게 이 요청에 부응하겠습니까? 아무도 부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자기 의로움으로 입을 나불됐다고 죄인으로 간주해버리십니다. 즉 ‘일을 아니할지라도’와 ‘경건치 않음’과 ‘일한 것도 없이’의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정죄하십니다.

인간은 내부적으로 자신의 행한 것을 자기가 판정을 내립니다. 그렇게 되면 행한 이나 판정내리는 이나 동일인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내부에서 법이 만들어집니다. 자기 의로움을 위한 법 집행자입니다. 이러한 식으로는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인간의 구원욕구를 파괴하고 오직 메시아가 출현해야 될 그 이유를 증거하시는데 주력합니다.

다윗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생에 상처를 냅니다. 인간을 분질러 버립니다. 그리고서  그 안에 커다란 구멍이 있음을 발각시킵니다. 인간 사회란 실은 자기 안의 구멍을 숨기기 위한 공간입니다. “나는 누구누구와 친하다. 나는 누구와 잘 아는 사이며 나는 이런 면에서 성공했노라”고 하지만 실은 자기 안에는 여전히 큰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상처란 상처가 생긴 그 지점에서나 치료가 됩니다. 그 지점은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시고 구원될 자가 그곳에 몰아서 부어넣습니다. 그곳이 바로 십자가이고 성도는 근원적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죄를 지으므로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결단과 결심과 선택은 본인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된 것만 강요받듯이 선택할 뿐입니다. 다윗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한 것도 하나님께서 그 죄를 짓도록 강요하신 겁니다. 그리고 다윗이 사무엘하 24장에서 인구조사를 사단의 부추김에 의해서 행한 것도 인간과 성도의 진면옥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인구조사를 실시하게끔 하신 하나님께서 벌칙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제시합니다. 7년 동안 이스라엘 나라에 기근이 들게 해줄까 아니면 석달 동안 다윗왕이 적들에게 쫓겨 다니게 해줄까 아니면 3일 동안 이스라엘 전역에 전염병이 돌게 해줄까 이 셋 중의 하나를 골라라 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밀어붙침입니다. 다윗은 거부할 처지가 못됩니다. 다윗은 제일 짧은 기간을 선택했지만 결과는 7 만명의 백성들이 병으로 죽게 됩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제단부지로 구입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므로서 비로소 이스라엘에 내린 재앙을 철회했습니다.

이로서 다윗이 본인이 지은 죄가 본인의 의로만 마감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대신 희생해서 용서해주심’이라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기능에 다윗은 미리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인생이란 마치 유리 표면에 묻어있는 먼지와 같아서 비만 오면 다 쓸려내려가 가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바닷가 모래 위에 손가락에 그린 그림 같아서 파다가 오면 금방 다 지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라는 꼬챙이로 하나로 꿰어지는 인생이어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방식이라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무진 각종 일을 시키진만 그것이 모두 ‘일한 것도 없이’가 되도록 상황을 몰아가서 오직 예수님의 용서하심에만 율법 완성이 있음을 말해주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용하여 십자가를 반복적으로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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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오용익

20강-롬4장 1-8(아브라함이 받은 축복)1302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4장 1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3페이지입니다.

 

로마서 4:1-8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사도바울이 사람을 건지려고 한다면 편지를 한 통 쓰더라도 알아듣게 쉽게 쓰면 사람들이 납득이 되어서 쉽게 구원을 받을 수가 있을 텐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사도바울의 편지가 난해해도 너무 난해해요. 난해하다는 것은 문맥이 복잡해서 난해한 것도 있지만 여기 1절에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나오고 6절에 보면 다윗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님 계시고 우리가 있다면 하나님 알고 우리 알고, 이렇게 두 분만 알면 되는데 여기에 아브라함이 왜 끼어들고 다윗이 왜 끼어드느냐는 말이지요.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이여, 우리가 하나님 잘 섬기는 것을 아시지요? 그러면 되었지요?”라고 하면 간단하게 끝날 문제를 여기에 아브라함 집어넣고 다윗 집어넣는다 그 말이지요. 그래놓고 사도바울은 “아브라함 집어넣고 다윗 집어넣고 아브라함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고 다윗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네가 아느냐? 네가 구원받는 것은 구원받고 싶어서 받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구원하는 방식, 다윗을 구원하는 방식으로만 너를 구원한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아브라함이나 다윗은 남의 나라 사람이고 이 시대 사람이 아니기에 우리가 제켜놓는 경향이 있어요.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렇게 생각한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신경 쓰지도 않는, 우리가 언제 아브라함을 신경 쓰고 다윗을 그리워했는지요, 그런데 우리가 신경 쓰거나 그리워하지도 않는 다윗과 아브라함을 집어넣어 놓고 아브라함처럼 되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고 다윗처럼 되지 않으면 구원 못 받으니까 네가 천국가고 싶다거나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다고 우겨도 그것은 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거지요.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종적, 흔적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그게 아무나의 인간의 아니에요.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은 인간의 주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인간을 추적해보면 하나님의 일을 밝혀낼 수가 있다.’ 얼른 들어보면 맞는 이야기인데 아무나 그런 것이 아니에요. 아무나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적한 사람이 있어요. 아브라함과 다윗, 나중에는 예수님이이죠, 그렇게 지적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특수한 구원의 흔적을 남겼고 그 흔적을 파악하는 사람은 다윗과 아브라함같이 구원받을 사람인 겁니다.

 

 

다윗이 구원받고 아브라함이 구원받았다면 하나님께서 다윗과 아브라함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흔적이 나타난다면 그 특징은 뭐냐, 어떤 독특함으로 나타나는가, 그것이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일하지 않는 자, 5절에 보면 경건치 않은 자, 6절에 보면 일한 것도 없이, 예배당에 이것을 한 번 써 붙였으면 좋겠어요. “일하지 않는 자, 경건치 않은 자 , 일한 것도 없는 자, 올해는 이렇게 살아갑시다.” 이런 것을 좀 붙여 놓았으면 좋겠어요. “열심히 일하자. 충성하자. 봉사하자.” 그런 것 다 떼어버리고 “올해 목표는 어떻게 자신이 어떻게 경건치 못한 자가 되도록 최선을 노력을 다하자.” 혹은 “올해는 아예 일 안하기로 작심을 하자.” 혹은 “올해는 아무 일한 것도 없는 자임을 뚜렷이 드러내자.”

 

 

그러면 교회가 되겠어요? 교회가 안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교회가 주의 일을 방해합니다. 주님이 하시는 구원을 교회가 나서서 막아선 겁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일한 것도 없이, 경건치 않은 사람 되기를, 그리고 일하지 않는 자, 이런 사람의 그 맞은편에 뭐가 있는가 하면 복이란 것, 축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복은 어떤 경우에 가리워지고 망치느냐 하면, 일하는 자, 경건에 경건을 더해서 경건의 극치를 더해서 보여주고자 시도하는 자, 일 했다고 자부하는 사람, 이것은 복을 차버리는 사람입니다. 복을 차버린다는 것은 그냥 저주만 받은 사람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등단시키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등장시키는 이유는 일해서 구원받은 자의 반대편에 서는 사람이라서 그래요. 경건해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그 맞은편에서 하나님께서 내세우는 모델이 뭐냐, 그것이 바로 다윗과 아브라함이라는 말이지요. 작년도 일 많이 했고 올해도 일 많이 해서 복 받을 겁니다, 라고 해서 주장하는 사람들의 맞은편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들이댄 사람이 뭐냐, 아브라함과 다윗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 복을 자기가 차는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을 본인이 꾸겨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생각이 얇은 인간생각과 같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문제가 큽니다. 어떻게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악인, 불의한 사람까지 만든 하나님의 깊은 의도를 짧은 인생 살면서 전체를 파악 못한 인간이 어떻게 파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의 문제는 자기가 하나님하고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을 다 비켜가는 겁니다. 인간의 생각이 문제가 되는 것은 뭐냐 하면, 행동하는 본인과 그 행동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판단하는 본인이 동일한 인물이라는 거예요.

 

 

같은 인물이지요. 자기가 행동해놓고 ‘내가 잘했어, 못했어?’라고 판단하는 그 판단자도 본인이 되는 겁니다. 행동도 자기가 하고 ‘내가 참 훌륭했지?’하고 판단도 자기가 하니까 이것은 자기가 알아서 자기가 구원받는 것 밖에 안돼요. 떡 줄 사람 생각도 않는데 김치 국 마시는 격이 된다 그 말이지요. 자기가 행동하고 자기가 판단하고 ‘그래 잘했어. 나는 구원 받을 거야.’라고 했을 때 거기서 나오는 것이 뭐냐, 법이 나옵니다. 자기 잘난 맛을 드높이는 법이 나와요. 그 법과 정작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제공했던 그 법이 따로 구별된 두 개의 노선이 등장해 버리지요.

 

 

두 개의 노선이 등장하니 사도바울의 편지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법을 주게 되면 인간자체가 자기가 행동하고 자기가 판단자라고 우기는 이 인간들 때문에 율법은 하나인데 그 율법과 상관없이 새로운 율법이 인간 속에서 만들어져 버렸어요. 하나님이 율법을 주니까 그 법에 대해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 법을 지키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지켜서 구원받으라고 준 것이니 말씀을 잘 지키세요. 명령에 순종하세요.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라고 목사 입에서 나오는 순간 그것은 전혀 다른 법이 되어서 내 잘남을 보여주는 법으로 새롭게 만들어져 나오는 거예요.

 

 

그것이 10절에 보면 나옵니다.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이런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는데 쉽게 하면 이런 뜻이에요. 할례를 행해도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행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행할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할례를 행하라고 해서 행했다고 우기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할례 행해라.” “할례 행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할례 행했는데 잘 했지요?” 그러면 “그게 할례 안 한 것이야.” 하나님이 이렇게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쉽게 하면 이런 뜻이에요. 성경에서 음행을 하지 말라고 해서 음행을 안했어요. 음행을 안했기에 “하나님, 저는 음행을 안했어요.” 하니까 “그것을 음행한 자로 간주하겠다.”하는 뜻이에요. 그러면 어쩌라고? 음행을 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에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것은 우리가 지킬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요청하는 겁니다. 뭘 요청하느냐하면, 할례를 행해도 저는 할례를 안 한 것이 됩니다, 라는 것을 우리가 말하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게 율법을 준 이유입니다. 초장부터 어려운 것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네가 음행을 하지 말라.” 했을 때 “예, 저는 간통이나 음행을 안했습니다.”라는 것은 틀린 것이 되고 음행을 하지 말라고 할 때 “제가 음행을 안했는데 안했어도 한 것으로 간주됩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을 주께서 요청한다는 말이지요. 그 말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요청한다 그 말이에요. 음행을 안했는데 음행을 했다고 하면 이것이 스스로 거짓말을 한 것이 되잖아요. 그런데 그 거짓말을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안했는데, 안했는데 하나님께서 한 것으로 간주하니까. 그 차이를 메울 수 있는 방안이 우리에게서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나는 안했으면 죽어도 안한 겁니다.” 하니까 하나님이 “그러니까 네가 음행한 자가 되는 거야.”라고 한다는 말이지요. 결국 율법을 어긴 자가 된다 그 말이지요. 이야기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라고 한 것은 할례를 행한 사람들도 무 할례자로 간주하겠다, 그 말이거든요. 그 말은 네가 살인하지 말라, 할 때 “살인 안했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고 “제가 살인을 안 해도 주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한 그 말씀은 이미 살인자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통고해 준 겁니다.”라는 식으로 그 말씀을 받아야 된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럴 의도가 우리한테는 전혀 없으니까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없으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심판 받아도 마땅하다 그 말이에요.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하고 거래하고 흥정하고 노닥거리는 것이 아니에요. 통고해주는 겁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그 말은 “너는 늘 살인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너는 내 지시를 안 듣고 있는 거야.”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생각이 아니고 새로운 지식을 얻고자 하는 거예요. 전에는 몰랐는데 이것까지 포함시키고 점점 더 많이 채우면 그것이 내 구원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이런 생각 한다는 말이지요.

 

 

여러분이 애들을 학교에 보내는 이유에 대해서 부모들은 오해를 하고 있어요. 부모들은 애들이 학교 가서 지식 배우라고 보낸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학교는 지식을 더하는 데가 아니고 가만있게 만드는 훈련을 시키는 데가 학교에요. “조용해.” 하면 떠들고 싶어도 가만있는 훈련. 지식 같으면 학교 다니지 말고 그냥 학원 다니면 돼요. 집에서 검정고시 준비하면 돼요. 학교는 그런 곳이 아니고 훈육을 시키는 겁니다. “선생님 앞에서 가만있어.” “저기.” “군소리 하지 말고 가만있어.” 가만있는 그것을 배우는 거예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대로 내가 지켰습니다. 쟤는 못 지켰는데 나는 지켰습니다. 쟤는 충성 못했는데 나는 충성했습니다.” 이렇게 입을 나불거리라는 말이 아니고 입을 막고 가만히 있으라는 거예요. 로마서 3장 21절의 말씀이에요. 율법을 준 것은 입을 틀어막고, 마스크 하나씩 다 줘서 “가만있어!” 살인 하지 마, 이 말은 “살인자야, 가만있어.”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구시렁구시렁 거리지요. “저는 살인한 적이 없는데요.” “걱정하지 마. 가만있어도 내가 다 살인하게 만들 테니까.” 그런 뜻이에요.

 

 

사람이 교회 와서 예수를 믿고 헌금을 하고 전도를 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입니다. “내가 충성하고 봉사하고 예배 참석할 테니까 하나님은 날 죽이지 마세요.”라는 뜻이에요. 나를 힘들게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이것은 하나의 항변이고 하나님 앞에서 시위하는 거예요. “예수 잘 믿는 나 복 안 주면 당신들 잡아 죽일 거야.” 그런 뜻이에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 앞에 주먹질 하는 거예요. 사람은 가만있지를 못해요. 뭔가 자기가 잘난 티를 꼭 내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모델로 뽑아 세운 겁니다.

 

 

다윗 같은 경우는 간음정도가 아니고 살인을 한 사람이에요. 부하의 아내를 탐내서 간음했고 행여나 남편 되는 그 우리야 장군이 눈치 챌까 싶어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전쟁터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 슬쩍 밀어 넣어서 죽게 해서 그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립니다. 전쟁터에서 화살이 사람 가리나, 하는 식으로 해 놓고 맘 놓고 우리끼리 살자고 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다윗이 잘못했다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여러분, 다윗은 잘못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죄인이 아닐 경우에는 그것이 새삼스럽게 잘못한 것이 되는데,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성경 이야기에요, 처음부터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났으면 새삼스레 잘못한 것이 아니고 그냥 자기 티를 낸 것뿐이에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런 살인과 간음을 하게 한 것은 다윗이 원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몰아넣으신 겁니다. 사람은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선택당한 것만 선택하게 되어 있어요. “너는 이것만 선택해”라는 식으로 선택을 하기에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나중에 깨닫고 보면 죄든 의든 내가 내 원대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돼요. 물론 그것도 성령 받아야 알지만. 쉽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 생각은 뭐냐, 하나님의 뜻을 알고 말씀만 지키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인간속에 이미 장착되어 있어요.

 

 

이게 나불나불 거리는 것으로 나와요. “하나님, 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인정합니다. 다른 사람은 인정 안 해도 저는 이렇게 인정합니다. 말씀만 목사님을 통해서 주시면 말씀 지켜서 영광 돌려서 빛과 소금되고 축복받고 이웃사랑도 하면서 살겠습니다.”라고 나불나불 나와요.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방법은 우리 행함을 상대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한다는 소리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지요.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데 인간들은 얼마나 나불나불 거리는 것이 심한지 덥석 예수를 물고 예수를 믿어서 구원 받겠다고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보고 아서라, 말아라, 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영광 돌리고 복 받고 빛과 소금역할 하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믿으라.”라고 하니까 “아, 그렇지. 이것도 저것도 하지만 예수도 믿어야지.”라고 덥석 문 거예요. 그렇게 물어놓고 예수 믿었으니 이제는 구원을 내놓으라, 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 보기에 뭐냐, 인간이 하나님에게 하는 폭력이에요. 나는 예수 믿을 정도로 착하니까 더 이상 하나님은 나를 힘들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믿으라는 것 다 믿어줬고 지키라는 것은 다 지켜줬으니까 날 힘들게 하지 말라는 거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낸 이유는 이렇습니다. 잘 따져보세요. 여러분, 구세주가 없으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습니다.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 구세주만 없으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아요. 왜, 모든 사람은 이 세상이 힘든 것을 알기에, 죽어서 보상이라도 받듯이 이 힘든 세상 마감하고 천국 가고 싶은 생각을 다 갖고 있어요. 처음부터 인간은 누구나 자기자신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다 구원받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구세주가 없으면 모든 사람은 구원받고자 하는 열망이 있기 때문에 가만 놔두면 결국 아무리 독한 놈이라도 죽을 때 되면 하나님 찾고 죽거든요.

 

 

애국가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그 다음에 하나님이든 하느님이든 “하느님이 부우하사”라고 나오잖아요.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는 것은 어떤 의미로 하든지 간에 중들도 그렇게 불러요. 일단 자기를 지켜준다고 할 때 기분이 느긋하거든요. 사람은 그냥 가만 놔두면 다 구원받아요. 그런데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를 보냈다는 말은 이제 모든 인간은 구원받기 글렀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끝났다는 뜻이에요. 인간이 구원받고자 하는 열망이 그토록 강렬한데 거기다가 추가적으로 예수님을 보냈다는 말은 인간들의 구원욕구를 완전히 무효 시킨다는 뜻입니다.

 

 

“너 구원받고 싶나?” “예, 구원받고 싶습니다. 천국가고 싶습니다.” “그래 알았다. 다 무효다.” 전부 다 무효가 되는 겁니다. 거기에 예수를 보내셔서 예수를 믿는 자만 구원받게 하겠다는 이 말은 아무도 예수를 믿을 수가 없는 분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나타났다는 뜻이에요.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왜 아무도 믿을 수 없는가? 예수 믿고 구원 받고자하기 때문에 아무도 예수를 믿을 수 없는 겁니다. 예수 믿고 복 받고자하기에 아무도 예수를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한국교회는 뭐냐, 사람들에게 사기를 친 거예요.

 

 

구원도 안 되면서 인간의 본성적인 구원의 욕구와 예수라는 추상적인 개념과 만나서 자기한테 최면을 걸어온 거예요.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으세요.” 그것으로 그냥 방치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의 의미도 모르고 아브라함, 그것도 모르고 그저 아는 상식은 열심히 하고 경건하게 살고 교회일 빡세게 하고 헌금 팍팍 내고 충성봉사하고 선교회비 안 빠지고 내고 성가대와 주일학교봉사 하고 일 열심히 하면 예수 믿는 것으로 기본 구원은 받고 상급은 성과에 따라서 차등적으로 천국에서 받는다는 그 생각만 있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하고 정반대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편지를 보낸 것은 제발 그러지들 좀 말라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네가 그렇게 잘났으면 처음부터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킨 것은 그 따위 사고방식 가지고는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추방시킨 거예요. 추방시키고 난 뒤에 그 사고방식이 안 달라졌어요. 똑 같아요. 예수님이 오시기에 앞서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보낸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 왜 인간들은 자기 본성상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와서야 따진 것이 아니라 그전부터 따져도 될 사람을 보낸 거예요. 그게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에 대해서 사람들은 장차오실 예수님을 못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시 그 시대에 아브라함과 다윗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 일 안해서가 아니라, 경건해서가 아니라, 일한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을 나름대로 했고 나름대로 경건스럽고 여러 가지 일한 것도 많은데 아브라함과 다윗은 고백합니다. 나는 경건치 않으며 나는 일평생 하나님 앞에 살았지만 일한 것은 없으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라는 엉뚱한 고백들을 아브라함과 다윗이 내뱉고 있더라는 겁니다.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아브라함과 다윗이 합류한 천국에 합류한다고 여겼는데 아브라함과 다윗이 내 뱉는 그 고백과 오늘날 교인들이라는 사람들이 내 뱉는 그 고백이 달라도 너무 달라요. 뭔가 연결점이 전혀 없는 것 같아요. 쉽게 말씀드립니다. 아브라함과 다윗, 특히 다윗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 때문에 상처가 난 사람이에요. 하나님 때문에 난 상처. 여러분, 간음하고 살인을 할 때 그것을 다윗이 취미삼아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 인생에 상처를 낸 거예요. 그것은 본인이 원하지 않았는데 자기 인생에, 자기 마음에 상처를 낸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이 땅에 와서 크나큰 상처가 났어요. 상처라 하는 것은 상처를 낸 그 지점에 가야 그 상처가 치료가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상처를 안고 살았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했거든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보여준 그 코스를 그대로 밟아서 가는 거예요. 제가 아까 처음에 했잖아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는가 하는 것을 포함시키고 있는 흔적을 가졌다. 그러나 그 흔적은 아무 인간에게나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 그리고 제가 방금 이야기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흔적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데 그 흔적이라는 말을 두 자로 이야기해서 상처라는 말로 했어요. 상처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내가 원했던 인생을 내 식대로 꾸려 나갈 수 없도록 강제적으로 하나님께서 분질러 버린 겁니다. 내 인생 자체를 완전히 두 동강으로 분질러 버린 거예요. 엿가락을 두 동강 내야 훅 불어서 누가 그 안의 구멍이 크게 뚫렸나 보잖아요. 어릴 때 그런 시합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인생이 막대라면 그 막대를 두 동강 내면 각자 품에 안고 있던 그 구멍 난 상처들이 있어요. 우리는 그 상처를 뭘 로 포장했느냐하면 사회라는 것, 사회생활이란 우리가 감춰놓은 상처를 숨기는 공간으로서의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참 많지. 바쁘니까 오늘도 교회 못 나갔다.” 아는 사람이 많고 일 바쁘고 하는 이 모든 것은 엿가락 속에 있는 구멍 난 상처를 숨기고 싶은 장으로서 사회 활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회라는 것은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더욱 더 망치게 만드는 거지요. 나는 대통령 당선되었다 하는 사람들을 분질러봤으면 좋겠어요. 그 안에 무슨 상처가 있는지.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가인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한다는 것, 이것은 기독교가정에서 하나의 사회죠. 아버지가 교회 가라고 하니 나온 거예요. 아버지가 장로고 집사고 하니 교회 나온 거예요.

 

 

왜, 아버지 말 잘 들어주면 좋은 분위기가 형성 되니까. 명절 되면 집안에 종교싸움이 심하잖아요. 좋은 것이 좋다고 가주는 거예요. 가인이 아버지가 믿어주는 종교를 믿어준 겁니다. 믿어주면 이것이 자기한테 별로 손해된다는 생각은 안하거든요. 하나님이라는 것은 자기 모든 비전의 극치 아닙니까? 자기 모든 환상의 뭉치, 환상의 거대화거든요. 그래서 제사를 드렸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정작 가인은 제사분위기, 종교분위기, 하나님 믿는 분위기에 자기도 모르게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그 가인으로 하여금 동생 아벨을 죽이게 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가인은 가인다웠습니다. 살인자가 된 거예요.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안 받고 동생의 제사를 받을 때 가인은 동생을 죽이지 아니하면 참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꼭 죽여야 살인자가 아니라 저 놈 때문에 내가 하나님한테 버림받았다는 것이 두려워서 죽여 버리고 싶다는 그것도 살인죄에 해당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동생을 죽였거든요. 비로소 가인은 동생을 살해한 자기 자신으로 인해서 진짜 자기 진면목을 본 거예요. 그러면 더 이상 기독교분위기, 교회 분위기에 숨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왜, 사람이 숨는다는 것은 자기는 아는데 남한테 안 들킬 때는 자꾸 숨어 다닙니다. 출세 했습니다, 학교는 어느 정도 나왔습니다, 재산, 연봉은 어느 정도 됩니다, 이것이 다 숨는 방법이거든요. 그러나 정말 자기 자신이 구멍 난 것을 발견한다면 더 이상 남을 의식해서 살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 때부터 스트레스가 없어요. 이 세상에 거리킬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자유입니다. 왜, 자기 자신이 구멍 났으니까, 고장 났으니까, 살인자니까, 이미 하나님한테 들켜버렸을 때는 아무리 남을 속이고 또 속여도 그것이 소용없다는 사실을 본인이 너무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성경은 그 아벨이 바로 예수님 계통이고 가인이 바로 우리 계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겁도 없이 아무 연고도 없이 가인 계통에서 아벨 계통으로 자기 맘대로 등록해서 나는 아벨계통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벨 계통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만 거기에 들어가느냐 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때, 그것도 복음을 위해서 죽임을 당할 때나 아벨 계통에 들어갈 수 있지 아무나 아벨 계통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아벨 계통에 들어갈 수 없고 어느 계통에 서느냐, 가인 계통 나를 우습게 보는 한 다 죽여 버린다는 가인계통에 우리가 서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내용은 아주 간단해요. 우리가 가인인 것을 왜 감추고 교회 왔습니까, 그것이 설교내용입니다. 우리가 가인인데 하나님 섬기면 으레 받는다고 우기는 그 말도 안 되는 고집쟁이인데, 하나님은 받지도 않는데 내가 드리니까 무조건 받으라는 식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했다고 우기는 그 고집은 어디서 나온 고집입니까? 그 말도 안 되는 고집이 어디서 나온 겁니까? 우리는 신앙생활 한 적이 없어요. 우리는 그냥 행함을 했을 뿐이에요. 말씀을 성실하게 지키는 행함, 예배드리는 행함, 헌금 하는 행함을 했을 뿐이지 어떤 경우에도 신앙생활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좀 말도 안 되는 핑계지만 제가 고등학교 때 학교에 가도 공부를 못했어요. 정말 말도 안 되는 핑계지만 학교에 가서 책상에 앉으면 따뜻한 햇볕이 들어와서 도무지 공부가 안돼요. 따뜻한 햇볕이 비춰버리면 그게 그렇게도 행복해요. 지금 행복한데 애써서 영어 단어를 외울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지금 이 자체가 행복한데. 고 3이 되어서 한창 공부를 해야 되는데 나는 대명동 남향집에 앉아 있으니까 햇볕이 따뜻하게 들어오는데 공부할 생각은 안 들어가고 이 따뜻한 햇볕이 최고로 좋아요.

 

 

사람이 아쉬운 것이 있어야 움직이는데 이 자체로 만족스러운데 뭘 더 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핑계인줄 알고 있습니다. 교실 자리가 안쪽이면 학교 가기 싫어요. 햇볕에서 멀어지니까.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문제가 있어요. 성경에 보니 그게 나와요. 그 햇볕을 쬐고 있는 내가 행복을 느끼는데 그러면서도 그 햇볕을 쬐고 있으면서 행복을 느끼는 내가 죽어가고 있고 늙어가고 있고 파괴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죽는 것은 왜 죽는가? 죄 값으로 죽는 거예요. 아, 내가 일시적인 행복으로 인해서 내 안에 구멍이 뚫렸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외피에 맞닿는 따뜻한 행복감에 젖어 있으면서도 정작 내가 누군지를, 내가 어떤 인간인 것을, 나의 진짜 정체를 숨기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정작 내 정체가 누군지를 몰랐던 겁니다. 우리는 조금만 일해도 그 일한 것을 경험하고 있고 조금만 경건하면 남보다 더 뛰어나게 애를 썼다고 그 일한 것의 공치사를 나에게 했고 우리는 일한 것을 잊지 않고 그것을 끌어 모아서 하나님의 복을 따내는 근거로 사용합니다. 이러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 여기 나오는 아브라함과 다윗, 구원받은 사람은 결국 남의 이야기에요. 남의 동네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정녕 모든 것이 행함밖에 없는가? 믿음은 없는가? 믿음이라고 우겼던 것이 사실은 행함이 연속이었고 행함의 교묘한 속임수였어요. 믿음처럼 보이지만 전부 다 따지고 보면 행함이에요. 왜, 내가 행했다는 것을 내가 잊을 수가 없기에, 내가 일해 놓고 그것을 내가 판단하는 이것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러한 속성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우리는 믿는 자가 아니고 자기 자랑하는 식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가인같이, “내가 예배드렸으니 하나님 당신은 받으란 말이다. 내가 착한일 했으니 하나님 당신은 복을 줘야 돼.”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에게 지시하고 명령하고 시키는 식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이 구멍 뚫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온 겁니다.

 

 

그러면 해결책이 없는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 안하면 설교가 안 되지요. 그냥 우리는 가인이다, 안녕히 가세요, 이러면 곤란합니다. 다윗이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신하가 말리지요. “하시면 안 됩니다. 숫자 헤아리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왕이 할 일이 아닙니다.” “아니야. 나는 해야 되겠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인간이 어떤 결정을 하고 선택을 한다는 것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고 결정된 것만 결정하게 되어 있고 선택된 것만 선택하게 되어 있다고.

 

 

하나님께서 이것 먹어, 했다면 그것을 젓가락으로 먹어야 돼요. 나는 죄 안 짓기 위해서 안 먹겠습니다, 이런 소리 하면 안돼요.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것을 해라, 할 때 나는 나쁜 짓 안하겠습니다, 하는 것은 아직도 자기 자신을 몰라요. 너는 나쁜 사람이야, 라고 해서 한 거예요. 벌써 다 잊었지요? 율법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저는 지금까지 살인 안하고 버텼습니다.” 그 말 하라는 것이 아니고 살인하나 안하나 주님은 저를 살인자로 다루고 있음을 제가 믿습니다, 라는 말을 하라고 살인하지 말라고 한 거예요. 이것 참, 믿을 맘 없으면 믿지 말든지…….

 

 

하나님께서 “인구조사를 해.”라고 하면 그게 나쁜 짓이라도 이것은 하게 되어 있다니까요. 우리의 모든 행동이 그래요. 우리의 모든 행동은 내가 결정해서 했습니다, 하면 행함이 되지만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이것은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믿음에 속한 노선, 믿음의 노선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구조사를 시켜놓고 벌을 내리십니다. 첫 번째, 7년 동안 온 땅에 기근이 오는 것. 두 번째 네가 적에게 세달 동안 쫒기는 것. 세 번째, 3일 동안 이 땅에 전염병이 퍼지는 것.

 

 

세 가지 다 하나님이 정해놓고 셋 중에 하나 고르라는 거예요. 요즘 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연탄가스로 죽을래, 차에 받혀 죽을래, 아니면 물에 빠져 죽을래, 그 셋 중에 고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거예요. 인구조사를 하는 나쁜 짓을 시킨 것도 하나님이고 그 나쁜 짓에 부합하는 그 벌칙도 하나님이 정해 놓은 거예요. 그렇다면 다윗의 입장에서는 인구조사라는 그 노선과 벌칙 사이에서 빠져나갈 곳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라 하는 것은 죽음에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기에 죽음이라는 노선에서 빠져나갈 구석이 없어요.

 

 

인생이라는 것은 유리창에 묻은 먼지와 같아서 빗물 오게 되면 다 쓸려내려 갑니다. 유리창에 아무리 꽃그림 그리고 유리창에 아무리 예쁘게 그리고 비 한 번 오게 되면 언제 그림 그려놓았나 할 정도로 말끔한 유리만 남아요. 바닷가에 손가락으로 눈 그리고 입 그리고 코 그리고 점까지 찍어도 파도 오면 다 쓸려가듯이 우리는 유리병의 표피만 붙들고 시간 때우면서 살아온 거예요. 남한테 자랑하면서, 나 이만큼 가졌다, 나 이만큼 행했다, 해도 마지막 죽음이 오게 되면 다 공평하게 쓸려갑니다. 죽음이란 시커먼 흑판이니 죽음 앞에서는 다 공평하다는 말이지요. 다 쓸려가 버려요.

 

 

다윗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유리표면 말고 유리 안까지 심지를 박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조사 시키는 죄를 짓게 만들고 거기다 벌칙도 자기가 내리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셋 중에 하나를 골라잡아서 선택하라는 거예요. 그럴 때 다윗은 제일 짧은 것을 선택합니다. 7년은 너무 길어요. 세 달도 너무 길어요. 3일, 군대도 3일은 버티잖아요. 그 때 7만 명이 죽었어요.(삼하 24:15) 왜 그렇게 하셨는가? 다윗은 그냥 죄를 보여주기 위한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죄는 다윗이 지었지만 벌은 백성이 받는다는 말은 다윗이 백성과 모두 다 죄인인 것을 알고 모두를 징벌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 다음에 다윗보고 “다윗아!” “예” “네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사서 제단을 쌓아라. 그리고 거기서 제물을 바치면 내가 네 기도를 듣고 이 재앙을 멈추리라.”(삼하 24:21) 여러분, 다윗이 구원 받았습니다. 값없이 구원 받았어요. 오늘 본문 4절부터 보면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롬 4:4-7)

 

 

이 말씀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다윗이라는 인간을 채택해서 처음부터 죄인인 다윗으로 하여금 새삼스럽게 죄짓게 만들어서 벌까지 받게 하셔서 결국 다윗으로 하여금 어디에 동참시키느냐하면, 하나님의 용서시키는 장치에 부품으로 집어넣어 버려요. 그러면 다윗은 죄 지은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의 벌을 멈추고 저주가 영생으로, 지옥이 천국으로 전환되는 그 지점에서 “나 같은 죄인도 구원 받았습니다.”하는 고백을 하게 하는 작업을 하는데 하나님은 무사히 성공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가지고 노는 식으로 놀아나는 거예요. 우리가 나불나불 입을 놀리고 자립적으로 독자적으로 뭔가 하나님 앞에 구원을 따낼 만한 경건, 양심, 도덕, 종교적 열심을 총동원해서 구원받고자 시도하는 그것이 이미 죄라는 것을 주께서는 익히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그것을 실시하는 이유는 죄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알라는 겁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 윤리적인 것들만 죄가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자, 죄를 안 짓고자 노력하는 그것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윗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한 마디로 말해서 이것이 뭐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냥 하나님이 만지작거리는 하나의 장난감, 조각, 그런 것밖에는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이 피조물이 가져야 될 위상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은 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참여됨을 당해서 나 같은 인간도 이렇게 영생 얻고 구원 받았습니다, 하는 그 고백을 가지고 로마서 3장 31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 십자가의 정신을 높이 세우기 위해서 우리가 그냥 도구로 동원된 겁니다. 끝으로 예를 하나 들고 마치겠습니다. 명절 되어서 큰 동서는 전도 굽고 음식준비 다 했는데 둘째 동서가 직장생활 한다고 뒤늦게 와서 “어머니, 미안합니다. 차가 밀려서…….” 이 눈치 없는 시어머니가 큰 며느리가 해놓은 음식을 꺼내서 “먹어봐라. 이것이 참 맛있다.”하고 과일도 깎아줄 때 그 큰며느리는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세상나라에서는 진짜 누가 나쁜 사람인지를 뻔히 알잖아요. 그런데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 비유가 나와요.

 

 

거기 보면 둘째 동서가 구원받고 큰 동서가 지옥 가는 식입니다. 대체 이것을 누가 믿을 수가 있습니까? 평생토록 교회 충성 봉사하고 목사 섬긴다고 과일 보내고 온갖 것 다 했는데 그래서 자기뇌리에 ‘나는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다.’는 식으로 각인이 되어서 이것을 지울 수가 없네요. 일 년에 전도 20명씩 한 이것을 지울 수가 없어요. 그런데 평생 강도질 하다가 마지막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그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 쳐다보고 “주님, 저를 기억 하소서,” 하니까 주님께서 “네가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했어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이게 바로 복의 극치에요. 일한 것도 없이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그냥 다 받은 겁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합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어떤 행함도, 우리가 다 행해요, 그 어떤 행함도 믿음으로 전환되기 위해서 십자가지신 예수님께서 우리보고 일부러 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우리가 자기 의를 자랑하는 죄인인 것을 드러내는 그 방침을 통해서 더욱더 예수님의 십자가 돌아가신 그 공로와 용서만 찬양하라고 우리를 다루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 한다고 남들은 다 속아 넘어가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속아 넘어갈 리가 없는데 인생이라는 것은 죽음에서 왔다가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려주기 위해서 우리 안에 십자가 꽂아놓고 모든 것이 용서를 위한 행함이고 선택이고 결정임을 저희들이 믿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