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살전 5:9 / 죽으심 / 120914 본문
녹취:김창길 서울 의존교회120914a (죽으심)―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살전 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살전 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뭔가 깨던지 자든지 하니까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살던지 아니면 죽던지 그런 쪽의 이야기를 사도 바울은 쉽게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힘들다고 느껴지는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복음 툭 던져놓고 죽던지 살든지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셔야 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고 아주 가볍게 이야기 하면서 뭐 믿던지 말든지 니 맘대로 하세요 뭐 아쉬운것도 없고 그런 거예요 이것은 인생에 불안감이 사라진 사람의 특징이에요.
인생의 모든 불안감이 사라진 사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내 불안을 없애려고 한다면 대책이 없어요. 그런 방법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서 투입된 모든 방법도 온전한지 능력이 제대로 작동되는지 불안하니까 예를 들어서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생활이 불안하다 그렇다면 갑자기 로또가 되던지 부자가 됐다 그럼 부자가 된 방법으로 가난을 추방시켰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많은 돈을 관리하는 가운데서 이 돈을 혹시 누가 가져가지 않을까 달라고 하지 않을까 또는 갑자기 집에 불이 나서 다 타지 않을까? 펀드 넣어놔서 폭락하지 않을까? 이것도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투입된 그 방식도 우리 자신을 불안하게 만들어요. 우리 스스로의 방법으로 우리의 인생의 불안을 없앤다는 것은 이것은 대책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계속해서 불안이 남습니다.
그러한 불안이 남는 속에서 걱정근심이 되는 속에서 이 사도 바울의 말을 여기에 끼어 맞춘다는 것은 이것은 전혀 부속이 안 맞아요. 이것은 기계가 작동이 되지를 않습니다. 안 맞는 것을 키어 넣어버리면 사는게 더 힘들어져요.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가볍게 이야기해 버려요. 저들은 하나님의 노하심을 받도록 우리끼리는 날에 속해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얻어서 그렇게 살던지 어떻게 되던지 그리스도와 함께 같이 삽니다. 라는 것을 가볍게, 편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것은 사도 바울 개인이 노력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노력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천국으로 가는 기차에 그냥 올라타서 밖의 풍경을 보는 양, 그렇게 보는 겁니다. 기차 타고 가면서 논밭을 바라보면서 올해도 추수가 되기는 좀 됐네. 그런데 들녘에 있는 사람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추수하면서 애먹고 이것은 창가에 앉아서 벼가 좀 익었군 밤이 벌써 떨어졌나 이런 식으로 관람하는 풍경처럼 그렇게 편하게 지나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그 사도 바울이 탄 열차에 함께 동승할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가 남겠지요.
우리가 사도 바울의 편지, 성경 말씀을 보기 전에 먼저 예수님과 그 일당들, 그리고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때에 어떻게 봤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것을 제가 먼저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볼 때는 주고받는 식으로 봐야 돼요 여기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다고 합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이렇게 듣기는 들었지만 예수님의 명령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는 예수님을 이렇게 생각한다.’가 더 중요한 문제에요 예수님이 나한테 무엇을 해 줬다. 예수님이란 작자를 내가 어떤 식으로 이용해 먹을까?
이게 베드로라면 이 베드로가 예수님께 먼저 마음속으로 요구하는 바가 있었어요. 이게 주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명령이나 약속이 있다면 그 중에서 쓸만한 게 있으면 골라서 자기가 챙기고 하는 이게 주고 그 다음에 받고, 모든 세상은 항상 주고 받고하는 식으로 자기 생활을 따로 구성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했는데요? 하면 귀에 안 들어옵니다. 들어오지를 않고 내가 예수라는 그 분이 멋있게 보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말을 깊게 하는 것 같아서 이것을 마태복음에서는 그의 말 하는 것은 이 세상에 권세자와 같지 않다고 했으니까 그 당시에 사람들로부터 약간은 시비의 대상으로 묘사가 된 모양입니다. 동생들도 예수에 대해서 상당히 기대를 많이 했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선전하면서 세상에 나와서야 팬들이 더 들끓었습니다. 이렇게 촌에 묵혀 가지고는 도저히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잘 안됩니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고 예수님이 또 광야에서 두 번째 시험받을 때 마귀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당신을 메시야로 인정해 주지 않겠느냐 뛰어내려봐라 당신이 얼마나 능력이 많은지 한번 보라 이렇게 했다 말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기존에 이쪽 인간들 속에 이미 하나의 유리구슬처럼 유리 구슬 안에 그림같은게 있으면 아무리 손톱으로 파도 못 파잖아요 이 유리구슬 밖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보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게 유리구슬입니까? 구슬이 단단히 묶여져있으니까 여기서 벗어나서 예수님 쪽으로 갈 수 있습니까? 못갑니까? 갈 수가 없는 거죠. 우리가 탈출이 불가능할 경우에 그 다음의 대안이 뭐냐 하면 현재 있는 것 자체를 긍정하겠다는 식으로 나와요 뭔가 잘 안 될 때는 아이고 이게 내 팔자다 이런 식으로 그냥 그 자체를 좋은 쪽으로 얼버무리고 그냥 넘어가버리는 거죠.
그런데 오늘 본문 5장 9절을 봅시다. 살전 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여기에 노하심이란 말이 나오죠. 또‘살전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노하심에서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지금 우리의 관심사가 하루하루 밥 먹고 사는게 관심입니까? 하나님의 노하심이 시급합니까? 어느 쪽이에요? 밥 먹고 사는게 지금 중요하죠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한테 노하는 것은 나중 문제이고 내가 나한테 노할 판입니다. 나라는 인간은 왜 이 모양이야? 나는 돈도 못 벌고 나라는 인간은 자식도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왜 나는 인기가 없고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지.... 평소에 자기가 자기 한테 노하는 거예요 노해도 아주 너무 노해요 심히 노해요 자기가 자기 인생에 대해서 안 맞고 화딱지 나고 신문지 구기듯이 자기 인생을 손으로 구기고 싶어요 엄마가 애보고 숙제 하라 하니까 6살 먹은 아이가 땅을 치면서 내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되냐 하는 것이 동영상이 떴어요.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냐고? 애가 지가 인생을 안다고 그리고 엄마가 밥을 주면 당연히 먹어야 되는 것처럼 얻어먹습니다.
지금 고민꺼리와 걱정꺼리가 인간들이 엉뚱한데 가 있어요. 노하심까지 챙길 여유가 없어요. 8절에 보면 ‘살전 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이 대목이 나오는데 이 대목과 하나님의 노하심의 관계가 난해 하고 어려워요. 여기에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는 것은 내 몸과 관련 된 문제에요 몸에 관한 문제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실 때 하나님의 노하심이라 하는 것은 내 몸에만 관한 것이 아니고 범 우주적으로 하늘의 유황불이 떨어지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나타나는 그날, 제 말의 취지가 뭐냐 하면 학급에서 있으니 선생님께서 너희들 각자 숙제한 것 봐 숙제했어? 안 했어? 하고 따지는 것은 우리 개인의 문제란 말입니다. 그러면 숙제하라면 숙제하면 되는데 너희들 이번에 우리 학교에 체육관 짓는다는데 너희는 왜 벽돌 안 날라? 어이 16번 학생 너는 설계도 왜 안 그려왔어? 하면 학교체육관 짓는데 어떻게 어린 초등학생이 설교도 그릴 수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권한에 넘어선 이야기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엉뚱한 담임선생님처럼 너희들 학교 체육관 짓는데 왜 설계도 안 내놔? 하고 윽박지르면 말도 안 되고 우리가 감당도 안 되는 그런 억지를 우리한테 요구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노하심이 있는데 너는 뭐했어? 하나님의 노하심이 나한테만 오면 숙제 다 하면 되는데 나한테만 오는 것이 아니고 전부 다 시누이 올케 시동생 가족들 대통령이고 뭐고 전부 다 하나님의 진노 하심이 온다면 그러면 우리는 밖에 나가 미친 사람처럼 ‘지금 하나님의 유황불이 떨어집니다. 주께서 재림하십니다.’ 예수 믿으라고 돌아 다녀야 됩니까? 지금 명동에서 마지막에 불신 판정을 합니다. 하고 있는데 부천에서 여기도 불신자 많습니다. 빨리 오세요. 하면 가만 있어봐요 명동하고 난뒤에 불이나게 부천가서 하고 부천서 하고 있는데 부산에서 성회있는데 빨리 오세요 하면 거기 가야되고 온 세상, 그리스에서 필리핀까지 가야 되는데 ......
성경말씀이 어떤 것이 어려우냐 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역량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그 역량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최저한도로 성의껏 우리가 할 수 있는 역량 것 해 내면 그것이 좀 하나님께 도움, 보탬이 안 되겠냐?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죽으시는 모든 숙제와 업무는 감당이 안돼요. 쫌 했다 싶으면 더 추가적으로 주니까 나중에는 몸이 100개라도 못하는 일을 우리한테 마치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하나님이 노하신다. 어쩌라고?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너는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그러면 우리가 이런 것 투구 쓰는 것을 개인적으로 쓰게 되면 이게 어려운거예요 개인적으로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소망의 투구를 쓰면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노하심이 취소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거든요. 니느웨 성에 지금 범죄해서 하나님의 노하심이 하늘까지 이르렀잖아요. 그런데 이미 심판 받는데 요나가 외친다고 그 사람들이 회개할까요? 심판이 면제되는 것 아니거든요. 왜냐 하면 40일 지나면 반드시 심판받게 되어 있는 문제를 내가 거기 간다고 해서 40일이 취소될 수는 없다 이 말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사전에 요나보고 요나야 네가 만약 니느웨에 가서 40일 만에 니느웨가 멸망한다고 전하면 느니웨 사람들이 그것을 믿으면 멸망 안 당하고 네가 안 전하면 멸망한다는 그런 조건이 있었습니까? 아니죠. 이것은 40일만에는 확정된 거예요 전하는 것과 관계없이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요나 입장에서 뭐가 어려우냐 하면 이미 확정된 결과에 대해서 내가 새삼스럽게 그것을 하나의 개인이잖아요. 개인이 하나님의 전체하는 일에 관여하고 안 하고 간에 이것은 하나님의 문제이지 누구 문제가 아니다? 내 문제는 아닌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고 나는 하나님을 나한테 자꾸 결부 시키지 마시고 내 구원 문제에 관해서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역량 것 해 드릴 용의는 있지만 하나님이 하는 원대한 계획을 나한테 이렇게 알려줄 필요성이나 이유는 없지요. 없는 거예요 그래서 뭐가 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그 일괄적인 원대한 계획을 나는 내 구원만 챙기면 되는데 구원만 신경 쓰면 되는 나에게 그것을 알려주는 이유가 뭐냐? 이 점이 어려워요. 만약에 노하심이라니까 내가 요나가 되어 전하면 아까 이야기했듯이 미친 사람처럼 명동가고 부천가고 부산 가야되고 원주 가야되고 바빠요. 그래 가지고 몸이 10개라도 못 하잖아요. 100개라도 못하는데 지금 원주 가서 복음 전하고 있는데 서산에서 하는 말이 어떤 사람이 암 걸려서 복음 들어야 되는데 복음 못 듣고 죽어 버렸다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호통을 치면서 뭐 하고 있나? 서산에 하나님이 재림한다고 전하라 했더니 뭐하누? 저 원주에 있습니다. 원주에 있더라도 빨리 서산으로 뛰어라!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에요 그 말이 될 수도 없는 이야기를 우리한테 언지를 주기는 왜 주느냐 말이죠. 들어봐야 된 되는 이야기를......
이런 점이 사도 바울의 편지가운데 끼어 있을 때에 이것을 푼다는 것은 굉장히 난해 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됩니까? 그래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나는 흉배 붙이고 구원받으면 되지 하는 이런 식으로 풀랍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노하심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어요. 야, 너 이리와 너는 믿음의 흉배 붙이고 구원받으면 그만이야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 이런 식이라고 이것을 하나님의 노하심을 우리에게 이야기했겠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알려 줬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는 일에 우리 성도가 아버지 하는 일에 예수님 하는 일에 나는 몰라도 돼요 라는 식으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을 안 다고해서 우리가 보탬이 된다든지 도움이 된다든지 주의 일에 협조가 된다든지 하는 그런 일이 또 되지도 않지요. 이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 하면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과 사람들하고 또는 예수님 사이에 어떤 모정의 서로 의견들이 일치되지 않고 어긋나게 지나가는 그 기로를 우리가 한번 생각을 해 봐야 됩니다.
이것은 어렵지 않아요. 왜냐 하면 제자들이나 우리나 마음가짐이 똑같아요. 나만 구원받으면 되는 거예요. 나만 천국가면 되는 거예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날 때 관심사가 뭐였습니까? 예수님, 예수님께서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하실 겁니까? 그것에 관심 둔 게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내가 하늘나라를 볼 수 있습니까? 자기 관심사 때문에 온 거예요. 그런 니고데모나 우리나 다를 바가 없다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라 하는데 이것을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대장간 찾아가서 두상 쟤서 투구를 하나 만들어요. 구리로 하면 무거우니까 가벼운 양철로 하던지 만들어서 쓰면 돼요. 구원의 소망, 또는 구원의 소망의 투구라고 써서 머리에 쓰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구원 받는 거죠. 예수 믿는 것 보다 훨씬 쉽지 않습니까? 의존교회 전속 대장장이 하나 채용해서 개인마다 투구를 다 만드는 거예요. 애들은 작게 만들고 나중에 머리크면 바꾸면 됩니다. 그 다음에 여기에 소가죽으로 가슴에 만들면 됩니다. 믿음과 사랑이라는 글을 써서 흉배를 붙이고 흉배를 붙입니다. 밤에 끼고 자다가 구원이 안될 수도 있으니까 누구 하나 보초를 세워 온다 하면 둘러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것이 이 본문의 뜻입니까?
이게 만약에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 청동으로 하나 뭐 만들고 소가죽 글자 써서 만들어 가슴에 붙이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이 아니라면 우리는 구원받는 방법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어떤 짓을 해도 우리는 제작할 수 있는 우리가 영역껏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법만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것 까지만 할 수 있습니다. 투구 쓰는 것이 요즘 우습다고 생각하십니까? 예를 들어서 투구 쓰지 말고 마음속으로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라고 마면 이것도 우리보고 구원받지 말라는 소리 하고 똑같은 소리에요. 왜? 마음에 믿음과 소망을 붙여 버리면 이것이 오후 2시 17분하고 오후4시 45분하고 붙여 놓은 게 확인이 안돼요. 지금 한 창 흉배 붙이고 있는데 ‘아이고, 우리 아버지가 암에 걸렸다고 하네’ 가다보니까 버스 놓쳤네 하다가 주께서 재림하시면 그 때 아버지 생각한다고 믿음과 소망 흉배 다 날아가버렸네요 이게 안된다니까요
사람이 동시에 두 가지 마음을 품을 수가 없어요. 사람이 여러 가지 것을 다 할 수 있어도 어느 한 가지 일을 할 때는 목사님이 에어컨도 할 수 있고 노래도 할 줄 안다고 할 때에 에어컨 만지러 가면서 노래에 집중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 노래 가사에 집중하면서 음미하면서 일을 못해요. 아내보고 남편이 하는 말이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 물었어요. 언제 사랑해 줄까?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2시에서 4시까지만 사랑해 줘 알았어! 2시에서 4시까지 사랑해 주지. 이래야죠. 그러지 말고 시도 때도 없이 내 생각만 하라고 시도 때도 내 생각 하면 직장에서 일 못합니다.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만약에 어떤 애에게 너 아빠, 엄마 사랑해? 사랑해요. 늘 사랑하지? 늘 사랑해요. 그 아이보고 시험 치라고 하면 시험지에 아빠 엄마 사랑만 쓰면 빵점 맞는 거예요. 성경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역량이 어느 정도 까지 인지를 밝혀 내는 거예요 여기에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투구를 쓰자는 말을 해결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는데 장차 노하심을 발휘할 수 있는 그 분이 특별히 너희에게는 노하심의 차원에서 노하심의 그 마음가짐으로 그 노하심에서 무엇을 끄집어내는가?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만들어 내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뒤집어 쓰는 게 아닙니다. 노하심을 받는 우리가 노하심에서 방비하기 위해서 노하심의 역량과 깊이를 간파해서 지금 노하심의 에너지가 36만 볼트다 그러면 37만 볼트까지 견딜 수 있는 투구를 내가 제작해서 쓰는게 아니고 그 노하심이 36만볼트라면 36만볼트의 노하심을 우리가 견딜 수 있도록 구원의 투구를 뒤집어씌워줘요. 그러니까 물 홍수가 오기 전에 방주를 만드는 것도 누구의 속셈입니까? 노아에서 방주 만드는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안 나왔어요? 안 나오죠. 터무니없지요. 노아 본인이 생각해도 본인이 미쳤어요. 비도 안 오는데 방주를 뚜들겨 만들고 내가 못질하면서 대패 밀면서 자기가 생각해도 완전히 미친놈입니다.
아내가 임신을 못하고 자기도 능력이 다 되어 버렸을 때. 여보, 당신 임신 못하지? 네. 임신 못해요. 나도 이제 애 못 낳아. 그런데 여보 애 낳자! 이것은 자기가 말을 해도 웃기는 일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것을 믿음이라 하고 아브라함을 무슨 조상? 믿음의 조상이라 하죠. 그렇다면 우리가 평소에 믿는다 하는 것은 주님께서 만들어 준 주님의 노하심에서 나오는 믿음인지 아니면 노하심을 커버하려고 어설프게 제작된 우리 손으로 제작된 믿음과 소망의 투구를 쓰고 있는 것인지 여러분 한번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해서 분간해 봐야 합니다.
어떻게 분간하느냐? 믿음과 소망은 주님의 노하심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노하심을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죠. 누구한테 화를 낼 때는 화를 낼 때 동참하려면 그 사람이 보는 방향을 확실히 봐줘야 돼요. 부부가 길을 가다가 아내가 화를 막 내는데 남편은 왜 화를 내는데? 저 화 안 나게 됐나 봐라! 화 나잖아! 뭐가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화낼게 없는데? 이렇게 되어 버리면 아내의 진노하심에 남편이 참여가 돼요? 안돼요? 안 돼잖아요. 그러면 주님꺼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혼자 알고 있잖아요. 혼자 알고 있기 때문에 비가 억수같이 올 것이라는 것을 혼자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미리 알고 방주를 만들 라고 했잖아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혼자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진노에서 건져낼 수 있는 구원의 방식도 누구만 알아요? 하나님 혼자 알고 있죠. 왜? 진노하심을 혼자 만들었으니까 그렇습니다. 혼자 만드시는 구원의 방식에 우리 성도가 참여 하려면 바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 하지 못하고 어디를 거쳐 가느냐 하면 하나님의 노하심부터 거쳐서 경유해서 하나님의 거기에 합당한 구원의 방책도 같이 동참해야 됩니다.
3D tv를 볼 때 남편은 안경을 쓰고 야! 실감난다. 멋있다. 하는데 아내는 안경도 안 쓰고 어지러운데 뭐가 실감나? 안경을 써야 보이지 안경을 써야! 싹 쓰니까 보이잖아요.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선물이 얼마나 귀한지를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안경을 싹 써야 세상에, 지옥에서 구원받았구나! 우리가 좋다고 하는 좋은 세상이 지옥이었구나! 여기서 주님께서 살해당한 어느 곳이든지 주님을 살해 하라고 외치는 소리가 안 들리는 곳이 없고 전부 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그런 시장바닥이고 모든 세상이 그렇구나! 그것을 같이 보면서 믿음의 선물이 얼마나 고마운줄 아는 거예요.
제가 만약 하나님이라면, 여러분 하나님 믿습니까? 사람들이 믿습니다. 믿어봤습니다. 우리 아는 이야기를 하네. 구원 받기 쉽다. 다 아는 이야기, 예. 우리는 신을 믿습니다. 인정합니다. 여러분, 신을 사랑합니까? 예. 사랑합니다. 아, 구원받기 쉽네요. 하나님이 참 쉬운 문제 냈다. 이렇게 할 거예요.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나를 영접해야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요한 복음 5장에 이렇게 나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까? 이렇게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라는 작자가 어떤 작자인지 한 번 내 봐라 믿을만한지 사랑할 만한지 미워할 만한지 우리가 한번 판단해 보자! 딱 제시를 했어요. 예수님 당시에 사도 바울이 제시하니까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베드로도 저주했습니다. 아무도 주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좀 있었겠지요. 전적으로 자기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좋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렇다면 그 전에 주께서 나를 사랑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그 말씀은 결국 인간 쪽에서 믿을만한 그 한계, 범주 그 밖에 나와 있는 말씀이에요. 밖에 나와 있으니까 인간은 결국은 어디에 갇혀있다? 주님의 작전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유리구슬 안처럼 진노의 구슬에 갇혀있어서 밖을 손톱을 후벼도 못 나오고 밖에서 후벼도 못 끄집어내는 진노의 수정체, 또는 수정 구슬 속에 땅땅하게 냉동되어서 딱딱하게 같이 옆에서 팔장을 낀것처럼 어느 누구도 못 빠져나오고 전부 다 같이 한꺼번에 진노하심의 대상이 되야 되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2장에 보면 나오죠.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대상이다. 또 로마서 3장에 보면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냉동이에요. 딱딱해서 손톱도 안 들어가요. 빠져 나올 수가 없어요. 여기서 주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 구슬 안에서는 틈도 없고 그것을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왜냐 하면 예수 자체가 싫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싫으냐? 이렇게 인간과 인간을 묶어주는 그 힘이 적그리스도에서 나오는 능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개인적인 역량, 개인적인 불신앙, 교만으로 다루었는데 사도 바울의 편지처럼 사도들의 편지로 와버리면 이것을 한꺼번에 다루어요.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적그리스도적 능력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 사실은 이런 이야기는 마태복음 12장 29절에서 이미 나왔습니다.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이 와서 도둑처럼 담을 타 넘고 들어가서 주인을 묶어놓고서 그 세간을 가져가지 않겠냐, 마찬가지로 내가 와서 성령으로 일할 경우에만 너희들은 현재 주인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지접관여가 되는 겁니다. 하늘나라에 직접관여가 되려면 그전에 우리가 3D 보려고 하려면 3D 안경을 써야 되는 것처럼 그냥 여기 있다가 저 하늘나라 가고 싶어요. 한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경유해야 돼요. 어디를 경유해야 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절대로 현재 기존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네가 잘못이고 내가 잘못이 아니고 어떤 목사가 복음을 잘못 전해서가 아니고 우리가 기도를 적게 해서가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묶어주는 능력이 어떤 능력이다? 악마의 능력, 적그리스도의 능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유를 묻지 마세요. 무조건 그리스도가 싫은 거예요 . 신, 하나님은 무조건 좋고 그리스도는 싫은 거예요. 그리스도가 싫다고 하니까 좋아하는 그리스도로 바꿔놔요. 그게 또 적그리스도적인 그리스도를 만드는 거예요. 그것을 제가 어느 글에서 사람은 그리스도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적인 악마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영웅적인 우리를 긍정해 주고 우리를 의롭게 하지 주고 내가 잘났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봐주는 그런 그리스도를 원하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살전 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나’ 정말 성도라면 이 구슬에서 벗어난 성도라면 뭐를 증거 하느냐 하면 바로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죽었다는 것을 증거 해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 놔두고 더러운 인간에게 믿음 꽃을 피우느냐 말이죠. 다른 똑똑한 사람 많고 신학박사들 많은데 만날 생각하는 것이 나밖에 모르고 돈 밖에 모르는 쓰레기통 같은 여기서 생명의 꽃을 피우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천국백성을 만드느냐 말이죠? 그것은 그 자리만이 주님이 나를 위해서 죽었다는 그 그리스도의 죽음이 거기에서만 꽃피우기 때문에 그래요.
다른 데 가면 나도 예수 믿었습니다. 나는 예수님과 협조했습니다. 전부 다 이렇게 나오는데 이쪽에서 정말 아무 것도 해 줄 것도 없는데서 아무 것도 한 것도 없는데 아무 할 것도 없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천국을 가게 되었다는 말은 오직 천국 들어 가는 이 더러운 나 사이는 예수님의 죽으심만 개입될뿐이고 본인의 어떤 것도 100% 예수님의 피지 거기에 나의 피, 나의 땀, 나의 헌금, 기도는 절대로 거기에 섞일 수 없다는 것이 뚜렷하게 등장하는 겁니다.
이러한 데살로니가 5장 10절의 말씀을 주기 위해서 사람 자체가 뭐냐를 보여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고 대화를 한 겁니다. 그 대화를 제가 뭐라 했느냐 하면 주고받고 예수님이 이야기를 해도 그것은 듣지않고 예수님쪽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한 겁니다.
산상설교에 보면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 나오죠. 분명히 나오죠. 일체 맹세하지 말라! 그런데 모세의 율법에도 분명히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네가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 율법은 모세의 지어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받은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생각이죠. 하나님께서 모세를 앞장세워서 자기 뜻을 펼친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맹세한 것은 반드시 힘들더라도 지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것을 천명이고 만 명이고 모든 목사나 장로나 교인들끼리 내어 보세요. 자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물으면 ‘그거야 맹세를 한번 했으면 어렵더라도 다 지켜야 하나님 영광이 되고 의인이 된다! 그런 내용이네 여기에 딴 것이 있을 수 없어!’ 누구나 다 이야기합니다. 교회에 온 사람들이 다 그렀게 알잖아요. 성경 말씀그대로 보자. 그대로 해석 하자, 빼지도 더하지도 말고 글자 그대로 보자 그러면 믿음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해석할 때 모세한테 준 해석이 그런 뜻이 아니고 우리가 맹세한 것을 지키란 뜻이 아니고 아무도 맹세하면 안된다는 뜻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맞아 죽는 거죠. 모든 사람이 그런 해석이, 예수님의 해석이 안 나오거든요. 안나오는데 예수님 혼자 고집을 부려요. 누가 봐도 어린 애가 봐도 그 뜻이에요. 예수님의 뜻이 안 나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뜻은 맹세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도 사도되기 전에 사람들과 같은 뜻인줄 알았어요.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까 율법의 도사란 자기가 딱 보니까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맹세를 지키라는 이것이 우리 인간보고 지키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님이 혼자 지킨다는 뜻으로 알게 된 겁니다.
모든 율법은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모든 말씀은 누구를 증거하는 거다?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준 말씀인데 인간들은 건방지게 자기가 하나님과 주님사이에 침입한 거예요. 왜? 예수님을 모르니까 왜 모릅니까?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능력으로 완전히 한 통속이 되어 있는데 이 사람한테도 저 사람한테도 다 마찬가지로 엉터리 답을 내는 거예요. 엉터리 답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kbs에 100대1이란 퀴즈가 있어요. 거기에 부활의 김태원이 출연을 했어요. 5단계의 문제에서 추파(秋波)할 때 추자가 무슨 추자냐 하고 나왔어요. 그래서 김태원이 찬스를 써서 맞은편에 100명쯤 되는데 사람들한테 물었어요. 그래서 제일 많은 정답에 자기가 합류하려고 물은 거예요. 추파라하는 것이 추적한다는 그런 뜻으로 사람들이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래서 덩달아서 그래 추파라 하는 것으로 추적한다는 것으로 1번입니다. 하고 번호를 눌렀습니다. 그런데 추파가 뭐냐 하면 가을추자 가을이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거예요. 찬스를 잘못썼었어요.
그러니까 적그리스도 적으로 한 통속된 인간들에게 물어봐야 나올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안 나와요.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물어봐야 ‘맹세한 것 지켜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지’ 전부 다 똑같은 소리를 한 거예요. 건방지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 사이 다들 건방져, 건방져도 너무 건방져! 건방져서 예수님만이 지켜서 우리에게 공짜로 구원하는 그 은총을 모르고 자기가 그 말씀 지켜서 주님앞에 폼낼려고 ‘주여! 내가 딴 것은 못지켜도 이것은 내가 지켰습니다. 아, 내가 이것 지킨다고 애 먹었다’ 이런식으로 자기 종교성을 발휘합니다. 그런 종교성을 발휘해서 모아봤자 그것은 쓰레기 아닙니까?
노아 방주에 몇 명 들어갔어요? 개척교회 목사님한테 제가 늘 위로처럼 이야기하는데 노아 방주에 몇 명 들어갔습니까? 8명 아닙니까? 그것도 달랑 자기 식구들, 지금 교인들 너무 많아요. 달랑 자기 식구들밖에 없어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구원은 가장위주로, 가장하나 잘 만나면 구원된다는 의미를 둬요.
야곱의 12아들이 복 받은 것은 누구 덕분입니까? 요셉에게 꿈이 내린 것이 누구 때문에 꿈이 내려온 거예요? 요셉언약하는 것은 없어요. 무슨 언약입니까? 아버지의 언약, 야곱의 언약 때문에 요셉에게 꿈이 온다는 거예요. 중보자가 한 분인데 그 한 분 때문에 여러 사람이 구원받아요. 이것을 모르는 교인 없어요. 다 알고 있어요. 다 알고 있면서도 그리스도를 기억하지 않고 그것까지도 믿었다는 누구를 믿습니까? 자기 자신을 믿는 겁니다.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그것을 설명을 하는데 제가 처음부터 이야기했어요. 안된다고 했어요. 안 되고 어디를 경유해야 되느냐 하만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경유해야 소망의 투구를 쓴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들어 가버리면 그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있는 곳이 어디 입니까? 용광로입니까?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가장 극단의 모습을 보여 주는 곳이 어디일까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완벽하고 종결자로 보여주는 곳이 어디 일까요? 십자가죠.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갈라디아 사람들아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꽤하더냐? 그 십자가에서만 지옥가도 못 느끼는 그 죽음을 그 십자가 안에서 비로소 결정적으로 최종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왜냐 하면 십자가가 뭐냐 나를 살리는 십자가가 아니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나니 해서 그 십자가는 반복적으로 나를 죽이는 십자가에요
반복적으로 나를 죽인다는 말은 내 성과, 나의 위로, 내가 하나님의 보탬이 되었다는 생각, 그리고 남은 죽어도 나만 생존하고자하는 그 욕망, 이런 것들을 전부 다 무효와 시킵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그 기차안의 분위기가 그래요. 그 기차 분위기가 십자가가 라는 기차가 돼서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로 인하여 죽었고 멸망 받은 자식들은 내가 정한 자리가 아니고 주께서 선택해서 집어넣어준 자리이죠.
그러니까 여자나 남자나 헬라인이냐 유대인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자기 위치가지고 자기 인생을 탓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자 이 뜻입니다. 남은 잘 사는데 나는 못 산다. 이런 것 가지고 원망할 수가 없어요. 부러움이 시작되면 벌써 죄는 시작됩니다. 모든 죄는 부러움에서 생성되는 되는 겁니다. 나는 이런데 저쪽은 저러냐? 부러워하는 것, 저는 학교 다닐 때 많이 부러워했습니다. 나는 수학시험을 보면 점수가 40점밖에 안 나오는데 우리반 수학 도사는 95점 나와요. 학교 복도에 가면 수학 점수 우수자명단이 나와요. 1등 이상덕 90점, 2등 황병기 50점, 3등 48점.... 이래요. 1등하고 2등하고 뚝 떨어여요. 선생님이 문제를 얼마나 어렵게 냈는지 이렇게 차이가 나요. 수학도사가 제 생각에는 선생님보다 똑똑한 것 같아요.
그런데 50점이나 90점이나 그런 것을 자랑하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는 주님 앞에 버림받아도 싸다 하는 죄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내 자랑한다는 거예요. 더불어 구원 받았는데 우리는 나만 구원받은 티를 내고 싶어 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보고 하나님이 선택하라고 하면 나한테 잘해 준 사람은 전부 다 천국에 다 넣어주고 내 돈 떼어 먹고 도망간 인간은 천국에 오면 발로 차버리죠. 어디 내 돈 떼먹고 천국에 와 나랑 섞이려고? 난 너하고 안 섞여 하고 발로 차버려요. 제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은 평소에 살아오는 모습이 저 사람은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고 저 사람은 내 곁에서 떨어져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우리는 이웃 속에서 만남 속에서 늘 느낍니다. 심지어 같은 교인들끼리도 마찬가지에요. 그 사람 오면 말도 안 썩고, 그 사람 오면 밥이라도 퍼주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어요. 그런 것도 모르고 예수 안에서 한 형제라고 어깨동무하고.... 한 형제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리는 주님의 형제를 원치않아요. 내 형제만 원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자기가 죽었다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매일같이 살아가는 나, 매일같이 적그리스도 능력을 주께서는 오직 자기 죽으심의 능력으로 이 능력을 잠재워버립니다.
주님의 역사적으로 죽으심이에요. 주님이 살아서 역사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죽으심이 함께 살아나기 때문에 그 죽으심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구원받는 효과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20914b (죽으심)―이 근호 목사 시작 하겠습니다. 사람 믿는 것은 쉬운데 예수 믿는 것은 힘들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죽였던 바리새인 교인들이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했던 것은 나름대로의 성경해석에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께 받았던 성경말씀의 해석은 이거다 할 때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고 그게 아니다 그것은 그의 애비는 마귀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한테 그런 욕을 안 들어 본 사람 같으면 예수님이 점잖은 분으로 여기지만 막상 그 시대에 그 현장에서 예수한테 그런 욕을 얻어버리면 어느 누구, 점잖은 바리새인들도 참을 수 없습니다. 네가 뭐고? 너희는 예수님 보고 이단이라 이야기 했고 나사렛이 이단의 괴수라고 이야기했고 그리고 예수님보고 율법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좋아하는 모세가 너희들을 마지막 때에 심판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그렇게 나와 버렸습니다. 도저히 그 둘 사이에는 타협점이라든지 좋게 한다는 화해 무대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10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내가 알아서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 나의 죽음의 의미를 아는 자가 비로소 나의 양이고 나는 그 양에 대해서 목자가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3D 안경을 써야 입체가 보이는 것처럼 예수님 십자가 중심으로 벌어진 그 모든 조항들을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을 해 줘야 비로소 하나님이 말하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것이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 3D 안경, 십자가라는 안경을 안 껴 버니까 이것을 성경해석 하듯이 성경해석에다 십자가 믿음까지 보태고 부활까지 보태서 성령의 은사도 보태서 구름타고 오신다는 재림도 보태서 완벽하게 성경에 모르는 것 없다 달달 외웠다 이런 식으로 해서 구원을 받으려고 시도를 하는 겁니다.
그런 것이라면 누가 도사냐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인 사도 바울이 거기에 대해서는 도사입니다. 그런 것은 사도 바울이 옛날에 다 했던 겁니다. 해 봤던 거예요. 하지만 성령 받고 난 뒤에 사도 바울이 외치는 것은 나는 죄인중에 괴수라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하지 않았으면 절대로 나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거예요. 노의 어떻게 행동하는 것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선택이 결정적이라는 거예요. 나의 행동이 결론적으로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떻게 살던지 관계없이 창세전에 선택하심이 지금의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디모데전서에 나와 있잖아요.
이 말이 오늘날 우리한테 우리교인들한테 무슨 의미로 다가오느냐 우리한테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이렇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을 쉽게 말하면 행주를 짜면 구정물 나오잖아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반항하고 발악하고 적그리스도적인 이런 것이 있더라도 그것 속에 이미 구원의 씨앗이 구원의 말씀의 영향이 잠복되어 있었던 겁니다. 반항하고 주님한테 욕하고 대들 때 자 한번 짜볼까? 행주를 쭉 짜니까 죄는 죄대로 뚝뚝 떨어지고 남는 것은 영생이고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우리의 손목을 비틀어요. 그러면 우리가 평생 짓게 될 모든 죄들이 행주 짜듯이 구정물이 뚝뚝 떨어지면서 그 죄라는 것과 짜면서 남아있는 주님의 영생, 하나님의 의가 같이 들어 있는 그 말씀을 창세전에 다 설계도를 짜 놓은 겁니다.
우리의 자리가 이렇게 살아야 돼 우리는 이렇게 구원받아야 돼 하는 설계도가 창세전에 이미 장만되고 마련되어 있던 거예요. 그렇게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한다는 게 아니고 예수를 미워하기 위해서 에서로 태어 나야했고 야곱은 사랑받기 위해서, 야곱을 구원하려고 야곱이 있는 게 아니고 야곱에게 준 사랑을 보여기 위해서 야곱이라는 존재가 이 땅에 태어나야만 하는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 그릇의 특징이 뭐냐 하면 ‘비어있음’비어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릇을 만들 때 거기에 뭐를 담을 것인가 하는 것은 그릇이 결정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평생 살아가면서 우리가 다 채워 넣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살면서 보따리 채우듯이 채우는 게 우리의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우리 몸에서 움직이는 대로 발산을 할 뿐이에요. 젊은 사람들을 보면 인생을 왜 사는지 뭐 때문에 사는지 그런 것을 모릅니다. 강남대로를 담력 실험한다고 의자 들고 와서 술값 내기한다고 차량교통을 막는 게 그게 강남 스타일이에요?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되는지 이것이 나쁜지 아닌지를 그것을 몰라요. 모르면서 그 행동이 나온 것은 그 사람의 몸에서 나온 거예요. 그 사람의 비어있는 그릇에서 나온 겁니다.
그릇이라고 하는 것은 안에 내용물을 발산하는 겁니다. 보여 주는 겁니다. 성도의 그릇은 착함을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착함이 아니고 그것은 착함의 그릇이고, 착함의 그릇이란 것은 없습니다. 무슨 그릇입니까? 긍휼의 그릇이라는 겁니다. 긍휼을 소리, 의성어로 한다면 ‘쯔쯔’어이구 ‘자슥아’‘아이고 불쌍한 것’ 아이고 저것도 밥 먹고 산다고 불쌍한 것.... 저것도 교회라고, 저것도 목사라고 아이고 불쌍한 것.... 긍휼히 여겨주는 것을 발산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뭡니까? 이래도 불쌍하고 저래도 불쌍하고 어떻게 해도 불쌍하고…….
이사야에 나오는데 소도 자기 주인을 알고, 워낭소리 영화에서 소도 잡혀간다는 것을 알고 눈물 뚝뚝 흘리잖아요. 조금 연출이 된 거지만.... 소도 제 주인을 알건만 이 백성을 무엇을 모른다? 자기 아비, 부모를 모르는 거죠. 젊은 사람들 자기 아비고 뭐고 없어요. 때려 부수고 술값 달라고 하죠. 자기 밖에 모르고 부모도 또 자식을 그런 식으로 키웠고 키우나 안 키우나 타고 난겁니다. 자식이 내 죄 때문에 태어난 건데 내 죄가 발생되어서 자식이 되었잖아요.
결혼식 주례할 때 이런 것을 했습니다. 아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남편이 만들어 가는 겁니다. 아내라는 이름은 살아가면서 남편이 붙이는 겁니다. 아내 다워라가 아니라 가만있어 내가 너를, 아내에게 다 해 줄게.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 줄게 이것은 남진의 둥지 노래에 나오는 거예요. 내 품에 둥지를 틀어라!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 줄게. 아내라는 것은 아내 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남편이 아내라는 이름을 붙여 줘야 돼요. 아내로 아내답게 만들어 가야돼요. 남편의 하는 일은 그저 웃겨 주기만하고 아내는 그저 웃기만 되는 겁니다. 요새 그런 부부는 아예 없지요.
남편은 웃기기만 하고 아내는 웃기만 하면 되는데 아내가 제일 웃는 일이 뭡니까? 딴것 아닙니다. 돈만 갖다 주면 됩니다. 맞지요? 현찰, 남편 돈만 갖다 주면 최고에요. 아이고, 수고 했다고 주물러 줄 때도 돈 벌어줄 때만 가능하지 돈도 안 갖다 주면 미쳤나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 이러죠. 유머가 어떻고 성격이 어떻고 하는 것은 돈부터 챙겨 놓고 그 다음 문제입니다. 돈도 없는 상태에서 아내 구합니다. 할 때 구혼해 봐야 소용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선이 아니고 말씀이 우선입니다. 말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자신의 피를 담아서 건져낼 사랑을 받아야 될 사람들을 따로 만들기를 시작했습니다. 창세전에 그것을 계획했고 그것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될 때 나타나는 것이 생명이란 죽음과 죽음, 그 틈에서 생명이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가지고 우리를 죽으라고 뒤트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못 박혀 죽었나니, 십자가가 예수님의 죽음이잖아요. 그 죽음이 우리를 죽으라고 뒤 트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죽으려고 고함지르고 비명지르죠. 그 비명 지르는 가운데서 내 자랑 하지 않고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 자랑하지 않고 나는 죄인중에 괴수라는 평생동안 신앙 생활하고 교회오는 것 그것마저도 죄라는 것을 고백하는 그 틈에서 생명이 삐져 나오는 겁니다.
마치 순두부처럼 콩가루를 갈면 국물 나오듯이 생명이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주의 긍휼하심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불쌍히 여겼다는 겁니다. 내가 이 만큼 말씀 지켰다가 아니라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면 나는 지옥갈 수밖에 없습니다를 고백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소리 듣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이 네가 뭐가 불쌍한 데? 너는 이것도 잘하지 저것도 잘 하지 다 잘하는데 바둑도 5단이지 너는 달리기도 우사인 볼트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잘 달리지 공부도 잘하지 하면 나는 우사인볼트보다 못하고 수입도 재벌처럼 못 벌거든 무엇보다도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지 않거든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하리라 생각이 아예 애초에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 말씀은 그런 사람이 없다고 보여 주면서 하면서 성경말씀을 보여준 거예요. 주께서 긍휼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아는 사람으로 쥐어짜서 만든 거예요. 어떤 경우만?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죽일 때 죽음과 죽음의 만남 속에서 튀어나온 것이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는 이 고백이 튀어 나온 거예요. 그 고백은 그 순두부 가루는 주님이 솜씨이지 우리의 솜씨가 아닙니다. 콩가루 자기한테 발라서 나도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다가 안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오른쪽 천국에 가게 된 사람이 고백하는 것을 들어보세요. 너희는 내가 배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하니까 뭐라 합니까? 그때 제가 준 거 어떻게 알았죠? 이렇게 나왔습니까? 뭐라 합니까? 제가 언제 주님이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줬습니까? 주님이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 제가 언제 주님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줬어요? 경상도 말로 하면 제가 어데에? 아닌 데에 저는 그런 일을 한적이 없는 데요.
주께서 하게 하십니다. 언제? 우리 몰래. 왼손이 한 것을 오른손이 몰래.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몰래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행동해서, 착한 일을 해서 우리 의존교회 교인들이 너무 착해서 여름 지나고 가을이 왔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이 선선한 가을을 여러분 그동안 착한 일 많이 했고, 덥지요? 내가 가을 줄게 해서 가을이 왔습니까? 햇빛과 공기를 태풍진로 바꾸는 것이 여러분이 착한 일을 해서 태풍진로가 바뀌었습니까? 주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신다는 이유는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설계도 밖으로 벗어나는 일이 없이 주께서 온전히 100%, 주님의 손수 만든 수제품으로 직접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만드셨습니다.
머리 어깨 무릎 발 어떤 대목이던 내가 만든 것은 전혀 없어요. 심지어 성형외과 가서 눈 수술을 했다 할지라도 쌍꺼풀하고 코 높이고 양악수술을 하든지 뭘 하던지 관계없이 모든 것을 주께서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뭐라고?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겁니다.
우리는 내가 나된 것을 가지고 내가 마땅히 이렇게 돼야한다는 가운데 무엇이 감추어졌느냐 하면 진짜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그 반도체 칩이 우리한테 감춰져 있는 거예요. 그것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소위 잘난 체 하는 우리를 행주 짜듯이 쥐어짜는 겁니다. 그냥 짜는 것이 아니라 쥐어짭니다. 쥐어 짜버리면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하나도 안돼요. 사모님이 참석하면 좋겠는데 내 뜻대로 안 되잖아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되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무엇을 이룬다고 했습니까? 합력하여 그냥 선을 이루지 내 뜻은 안 이룹니다. 내 뜻을 밟아야 그게 선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 뜻이 밟히는 것이 감사하고 축복인줄 아는 것, 그것이 우리의 감추어 놓은 말씀이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고개를 쳐 미는 그런 순간입니다.
여러분 안에 잘 보세요. 여러분 안에 주님의 말씀의 칩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의 창세전 계획서가 다 들어 있어요. 그거 안 들어 있으면 지옥 갑니다. 다 들어 있습니다. 지옥갈 사람도 들어 있어요. 지옥 가야 된다고 들어 있습니다. 미움 받아야 돼요. 따라서 주님을 사랑한다하는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내가 바로 내가 밉습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자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살 것이고 자기 생명을 사랑한 자는 잃어버릴 것이다.
이 말은 살고 자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이유가 뭡니까? 죽으려고 오는 사람이 아니고 다 살려고 온 사람입니다. 살려고 온 사람이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크게 만드셔서 단체로 지옥 보내는 겁니다.
어떤 사이트를 보니까 신천지 사이트인데 카페 제목이 ‘창원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린다.’제목이 그렇게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뒤에 ‘대구 우리교회 보아라’이렇게 써놨어요. 내용이 우리교회 보아라가 아니고 카페 제목이 그렇습니다. 그것도 그냥 우리교회가 아니고 대구 우리교회 보아라. 뭐 어쩌라고? 주님이 보신다! 뭐 이러면 이해가 되는데 대구 우리교회가 구세주입니까? 대구 우리교가 뭔데? 아무 것도 아닌데 그것을 대구 우리교회를 신경을 씁니까?
오늘 아침에 전화가 왔는데 수화기 잡자마자 하는 말이 경주에 있는 접니다. 경주요? 내 동생이 목사님 찾아 갈 건데 장로님 집에 가라고 일러 주지 마세요. 우리 장로님 조용하게 일처로 보내야 되지 않습니까?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한 참 해석을 했어요. 성경만 해석이 어려운줄 알았는데 이렇게 해석이 어려운지 몰라요. 그분이 나한테 압력을 가해서 지금 내 동생이 목사님을 찾아 가는데 목사님은 그 장로님이 어디 사는지 어디 있는지 전에 한번 다닌 적은 있지만 모른다고 해 주세요. 왜? 내 동생이 그 장로님을 괴롭히지 않도록 편하게 살도록 목사님이 해 주셔야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목사님 역할이 뭡니까? 목사의 역할이 교통 정리하는 겁니까? 아니면 복음 전하는 거예요? 목사의 역할은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입니다. 그 진노함에서 사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뿐입니다. 라는 그 이야기를 해 달라고 전화를 했으면 제가 이렇게 기분 나쁘지 않지요. 그것도 기분 나빠할 것도 없지만 그것도 주의 뜻이니까 기분 나쁘지 않지요. 주의 죽으심도 관심 없고 하나님의 진노 하심도 관심없고 노하심도 관심없고 오직 내 동생 관리하고 장로님관리 하는 것만 그 내막이 복잡해요. 돈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생각하면 골치 아파요. 사랑과 전쟁과 버슷한 것 같아요.
성경은 이렇게 사도 바울이 편하게 주께서, 하나님께서 노하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이 죽으심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주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믿든 안 믿든 너 마음대로 살아라! 이런 뜻이에요. 바쁜데 언제 노하심을 챙기고 구원의 투구를 씁니까? 우리가 평생 24시간 생각하는 게 뭐에요? 하나님 노하심과 예수님의 죽으심 아니잖아요. 아까 전화한 사람처럼 그런 전화, 당신 때문에 손해보고 이익보고, 손해 이익 만날 그거만 생각 하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소망과 구원의 믿음의 투구를 어떻게 쓰느냐? 그것부터 관심있는 거예요.
소망과 믿음의 투구, 이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나온 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소망과 믿음의 투구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안 죽고 우리한테 좋게 말만 해도 우리는 소망과 믿음의 투구를 쓸 수 있는데 예수님이 죽어야 소망과 믿음의 투구를 쓰느냐?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우리가 말도 안 되는 소망과 믿음의 투구를 미리 우리가 알아서 써버렸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을 해도 우리는 바로 예수님을 죽여버린겁니다. 예수님을 죽여야 내가 살거든요.
예수님이 살아있으면 누는 죽게 되잖아요. 예수님이 살고 나도 죽으면 나도 손해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도움 달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축복하시면 나도 축복 받아 돈 잘 벌면 십일조 해서 주님 드리면 주님은 십일조 받아 챙겨 좋고 나는 십의 구를 챙겨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영감 왜 불러? 이래 가지고 다같이 좋잖아요. 교회 자금 많아서 선교회비 많이 내서 좋고 우리는 헌금해서 복 받아서 부자 돼서 좋고 도 더 바쳐야 목사는 더 좋은 차를 타서 좋고 서로 서로 윈윈 서로 승리하는 단체를 그것도 교회라고 다니고 있다 말입니다. 긍정적 사고방식, 희망을 품고 소망이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에서 노아가 홍수가 온다는 것을 노아는 몰라요. 하나님은 아시고 노아 보고 방주를 만들라고 한 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심판의 방식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대처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방주밖에 없기 때문에 방주를 만들라고 한 거예요. 우리가 우리에게 소망과 믿음의 투구를 쓰라는 말은 우리보고 구원을 챙기라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소망과 믿음의 투구를 봉사하는 존재로서 새롭게 만들어 지기 위해서 짜 맞추기 위해서 우리가 주의 사도인겁니다. 소망과 믿음의 투구를 써서 내가 구원받아 헤헤 거리고 까부는 게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 소망의 투구가 우리보다 더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왜냐 하면 주님의 죽으심에서 나온 것이 소망과 믿음인데 우리는 항상 내 구원만 받아 챙기고 죽어서 천당만 간다고 이익만 챙기고 우리는 내 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말입니다.
의존 교회만 그런 건지 우리교회는 모르겠습니다만 뭐 복음 알고 십자가 알고 구원 받았다고 하는데 그 다음부터는 교회 코빼기도 안보입니다. 너무나도 교회 오면서 자기의 이익을 챙기면서 오기 때문에 주앞에 사로잡히지 않고 받아 챙겨 내뺄 생각만 합니다. 나는 복음 아는데 더 이상 관여할게 뭐있나? 그렇게 되면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믿고 도망치는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요나가 하는 짓하고 똑같은 거예요. 내가 안가도 멸망받을 건데 내가 뭐하러 전하노 해서 요나가 배타고 도망갔잖아요. 그런데 거기서 배 선장을 만나죠. 그런데 뱃사람들이 요나 때문에 배가 뒤집어질 것 같잖아요. 그러면 믿음좋은 우리같으면 요나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당신의 하나님을 위해서 같이 죽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요나를 덜렁 물속에 빠뜨리고 자기들은 폭풍에서만 벗어나면 어우 살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결국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기회는 뱃사람들은 놓치고 누구만 알게 되었어요? 누구만 주님의 죽으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까? 고기 뱃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죽음에 있을 때 비로소 산다는 게 생명이라는 것은 아 주님의 죽으심에 같이 동참하니까 생명이라 하는 것은 내가 전에 원했던 생명은 생명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생명이 아닙니다. 그 종교 단체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다 가짜입니다.
이번 대구 성령이라는 녹취를 구득영 목사님이 올려놨어요. 거기에 보니까 회심곡 가사를 올려놨어요. 거기에 보니까 회심곡 가사를 올려놨어요. 제가 회심곡 가사를 읽어 봤어요. 역시 마찬가지로 효도하게 되면 극락가고 안하면 지옥 간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가사를 구구절절이 해 놨어요. 부모가 그동안 나를 어떻게 키웠고 몇 살 때 어떻게 키웠고 그게 쭉 나오는 거예요.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불교 관심도 없었는데 불교가 뭐냐? 반야심경이 뭐냐? 그리고 회심곡이 뭐냐? 어쩌면 우리가 기독교라는 이름에 불교신자로서 살아오고 있다는 것을 같이 찾아보면서 발견 할 수 있는 거예요. 내가 편하면 끝난거예요. 주여! 뭐 주실겁니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자기 편하면 끝난거예요. 소망과 믿음의 투구가 더 중요한데 우리는 투구만 쓰고 안에 투구를 쓴 내가 더 중요하다 여기는 겁니다. 이 안에 주님의 피가 묻어있습니다. 방주가 노아의 가족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방주가 더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방주는 누구를 증거하는 겁니까? 예수그리스도죠. 예수님이 구원받은 우리보다 더 중요한 나라, 아들의 나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 두자로 하면 천국입니다. 살아있을 때부터 이미 천국이 있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에요. 천국에 들어 가는 사람은 내 위주의 세상이 아니라 주님의 위주의 세상이 있고 그것만이 천국이고 그 외에는 어떤 아름다운 세상을 그려낸다 할지라도 그것은 백날해도 천국이 아니라 말입니다. 이스람교 가면 그렇잖아요. 이스람교 가면 분수가 있고 잔디밭 있고 거기에 벗은 여자들이 벨리댄스 한다고 하는데 그 마호매트는 사기꾼 맞습니다. 마호매트보면 그런게 있어요. 그것은 사막지역에서 오아시스를 그리는 자기 이미지를 극대화시키면 그것을 천국으로 본거예요.
그들만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민족만 그렇고 우리 대한민국은 안 그래요? 우리가 교회 올 때 자기가 이미 천국을 예상하고 오잖아요. 사자가 풀을 뜯고 토끼가 사자가 굴에 들어가고 내가 천국가면 다 죽여버려요. 어디 쓸데없이 사람 살기도 힘든데 개가 사람같이 놀라고 합니까? 귀찮아요. 천국은 내 위주, 우리 위주를 철저히 막습니다. 우리의 꿈, 우리의 비전, 철저히 막아버려요. 그리고 너는 마음대로 무슨 짓을 해도 그것을 뭐가 더 세다? 긍휼하심이 예수님의 피가 이쪽은 긍휼하심의 그릇에 쏟아지고 이쪽은 같이 죽어도 진노하심이 진노의 그릇에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진노의 그릇에 있는 사람은 모든지 십일조를 하든 헌금이든 전도든 선교를 하든 어떤 일을 하던 하나님께서 화내는 일만 하게 되어 있어요. 본인이 나빠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부러 그 일을 시켜요. 욥의 친구는 아무리 좋은 소리를 해도 그게 하나님을 화나게 만드는 이야기만 한 거예요. 그중에 대표적인 이야기가 뭐냐하면 바로 욥기 8장에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그것을 듣고 하나님이 얼마나 화를 냈겠습니까? 하나님이 다단계 하는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이런 짓을 다했나 이 말입니다. 완전히 마귀 말이에요.
그런데 욥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을 그렇게 원망해도 욥보다 믿음이 대단한 사람이 없다. 그것은 욥이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욥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는 작업에 욥이 말려들어서 그래요. 울산에 가면 현대 자동차가 있어요. 그 제가 금요일에 강의가면 퇴근시간에 보면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차가 부둣가에 굉장히 많아요. 그 많은 사람들을 공장에서 보면 거기서 자기 존재는 중요하지 않고 차가 중요해요. 신차가 중요해요. 그것을 성경으로 말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중요해요. 한국교회는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해도 우리 자신을 중요시 여기고 새로운 피조물들을 우리를 붙이는 형용사처럼 그렇게 사용하는데 성경은 반대에요. 새로운 피조물이 중요하고 그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의 현대중공업의 직원처럼 거기에 가담이 된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얘, 이리와봐! 예, 예수님 왜 불렀습니까? 너 새로운 피조물이다. 야! 신난다. 이제는 해방이다. 이제는 무슨 짓을 해도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로운 피조물을 믿는 것이 아니고 지가 새로운 피조물이란 그것을 자기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낮이나 밤이나 순 자기 밖에 모르는 거예요.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몰라요. 자기가 좋은 것 챙기면 끝나는 거예요.
살전 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뭐와 함께 살게 한다? ‘자기와 함께’아마 시어머니가 이런 소리 했으면 며느리 기겁을 할 겁니다. 낮이나 밤이나 내가 오늘 올라왔다. 보따리 쌌다. 낮이나 밤이나 우리 같이 살자 하면 그 다음부터 사랑과 전쟁에 나와서 난리날겁니다.
살전 5: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것 같이 하라 살전 5: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살전 5:13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할 때 모든 로마 군병들이 쓰는 투구나 흉배 같은 것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우리가 제작하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이 너희에게 와서 나온 거예요. 일종의 로보캅이 되는 겁니다. 우리를 위해서 로보캅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짜 맞춰서 우리가 기어 들어 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이미 장착 되어 있고 거기에 우리가 안 맞으면 때려서라도 맞도록 그렇게 딱 짜 맞쳐지는 은 거예요. 그것을 보고 아이고 이쁜 것 이것은 나의 기뻐 하는 바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예수님 자신의 공로를 보고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겁니다. 왜? 그것이 하늘나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늘나라 우리 면류관 어떻게 됩니까? 하늘나라 가서 주님 앞에 서서 주님의 면류관쓰고 예수님 보좌앞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주님 저 면류관 없데요. 어때요? 발로 차버릴까? 이렇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면류관 다 벗었는데 이것은 면류관 자기가 쓰고 주님 앞에 얼쩡되면서 어떻습니까? 어울리죠. 면류관 내가 쓸만해 쓸만하지! 하면서 돌아다니는 것, 그이것은 천국 가서 용납 안 됩니다. 용납이 안되는데 한국교회는 용납이 돼요. 그러니 한국교회는 이상한 동네입니다. 천국 안 가려고 작정을 했어요. 천국 안 갈사람 다 모이라 하면 한국교회 다 모여요. 천국이 뭔지 몰라요.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포도원 이야기 나오잖아요.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 하면서 포도원 이야기 나 오잖아요. 포도원 이야기 나올 때 아침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오후 3시에 온 사람, 마지막에 오후 5시에 온 사람 나오지요. 그럴 때 주님께서 묻습니다. 천국이 무엇이냐? 오후 5시에 온 사람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천국은 뭐라 합니까? 천국은 거저 주는 곳이죠. 라고 하잖아요. 아침 10시에 온 사람에게 물어 보세요. 천국이 뭐냐 하면 노동한 만큼 대가 받는 곳이요. 그러니까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주시면 고맙게 여기고 내빼면 되는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천국이 무엇이냐고 이야기하고 10시 12시 3시 5시 하는 것은 우리보고 내빼지 말라 말입니다. 천국 챙기고 내 빼지 말라 말이죠. 이미 우리는 포섭당한 거예요.
우리는 북한에서 남한으로 파견된 스파이에요. 정보원이에요. 우리한테 공작금주고 무전기 주는 것은 우리가 갖고 놀라고 준게 아니고 세상정보를 탐색해서 공작금 준 북한에 보고 하는 것처럼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잖아요. 하늘에 있는 우리가 아직 안 죽고 있는 이유는 우리는 무전기가 있어서 지금 여기는 지옥, 거기만 지옥이 아니고 여기도 지옥이다. 온 교회고 절이고 지옥이라는 것을 보고하기 위해서 그리고 나도 지옥이라는 것을 나도 그렇고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이 땅 자체에서 예수님이 피흘려야했던 이유를 우리가 보여줌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얼마나 좋은 것이냐를 우리가 증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34편에 보면 어떤 신앙인이 말하기를 참새가 나보다 팔자가 좋고 제비가 나보다 훨씬 좋다 했잖아요. 왜? 참새와 제비는 성진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사는데 나는 이 꼴이 뭐냐? 우리의 소망이 있다면 천날 보다도 하나님의 성전에 문지기로 있는 게 좋사오니 문지기가 일당을 얼마나 받겠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에 문지기가 됐으면 자기는 일당 받는 문지기가 아니고 성전 안에 포함된 사람이겠지요. 그러면 포함된 자기가 전부가 아니고 누가 전부 입니까? 하나님의 성진이 주님이 자기를 감싼 전부가 되고 자기는 일부가 되는 것을 그렇게 소망한 거예요. 이게 바로 믿음과 소망의 흉배잖아요.
그리스도의 세계, 피 흘린 세계에 합류되었다는 그 자체만으로 좋고 거기서 내 쫓겨 단독적으로 살까봐 오히려 겁을 내버립니다. 나 혼자 독립해서 사는 게 겁나는 거예요. 부부 사이에서 남자와 여자가 다른 점이 있어요. 아내는 결혼을 하면 가정을 생각하는데 남자는 결혼을 해도 총각 때하고 다름없이 자기만 생각해요. 자기만 생각하고 여자는 하인 다루듯이 해요. 그래서 여자가 하는데 말을 남자가 이해를 못해요. ‘어이, 내가 친구하고 낚시 좀 갈게’ 여자가 ‘나는 왜 안 데리고 가는데?’ ‘너는 너 취미생활해라! 이상한 여자 봤나, 너는 너 좋은 취미생활하고 난 나좋은 취미하면 될 것 아니냐!’ 그러면 여자가 하는 말이 ‘그럼 나는 너한테 뭐고?’ ‘아내지’ ‘아내인데 아내를 떼어놓고 가나?’ ‘우리 떼놓으나 안 떼어놓으나 우리는 부부 아니냐?’ 여자들은 남자들의 말에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함께 하는 것이 부부이지 자기만 즐기는 것이 총각하고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똑같잖아요. 물론 복음으로 믿지 않고는 백날 해도 할 수 없지만 복음 말고 딴데 갈때는 같이 가 주세요.
그래서 여자한테는 사랑한다는 그런 말보다도 같이 있어 주는 게 좋아요. 모든 아내가 다 그런 것은 아닌데 성격상 가끔 보면 반대로 나가는 사람이 있어요. 산에 가자고 해도 귀찮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특이한 경우 이고 대부분 딱 붙어 다녀요. 성경에 있잖아요. 각방 쓰지 말라고 마귀가 틈탄다고 하여튼 세밀하게 다 써놨어요. 그래서 바로 천국이라는 것을 위해서 집단 구원을 위해서 상태구원이라 하는데 집단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뽑혔지 나 혼자 구원받으려고 주께서 죽으신게 아니란 사실을 이제 분명히 아셨죠? 주님의 죽음심을 증거하라고 우리가 그 사랑을 보여주라고 주앞에 뽑힌겁니다.
우리의 일상이라 하는 것은 내가 독단적으로 내 힘으로 사는 것, 나 홀로 살기에 급급합니다. 따라서 우리한테 하나님의 진노하심이나 예수의 죽으심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나 홀로 지금 밥 먹고 사는 게 우선 문제이지 주님의 진노하심과 주님의 죽으심은 우리한테 잊혀진 문제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노하심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오고 그 죽으심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우리의 새로운 새 피조물이 나왔습니다. 이 노선에 설 때에 우리는 노하심을 참석 못하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게 되면 바로 거기서 노하심 때문에 죽었고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라는 것을 이 안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한꺼번에 알게 되는 거예요. 안에 딱 들어서니까 위로부터 아래로 관통해서 모든 것을 우리가 알게 되어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처럼 편하게 생각하세요. 노하심이라는 것도 당연한 현실이고 죽으심도 명백한 현실이고 그 현실 때문에 내가 지금 이 모양 이꼴이지만 내가 영원히 새로운 피조물이란 사실도 아주 어렵지 않게 뭐 가벼운 마음으로 당연한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 그거 마땅하지 뭐 아주 쉽게 확 다가오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자유입니다.
자유를 위해서 봉사하는 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봉사란 말을 했어요. 이 봉사란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로마서 1장에 보면 나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로마에서 사도 바울이 했지요. 나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자라는 말은 이것을 알기쉽게 풀이를 하면 여러분 모두 에게 저는 엉터리를 가르쳐왔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내가 만난 모든 사람에게 나는 사기꾼으로서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른척하고 복음도 모르면서 아는 척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엉터리로 다 증거했는데 뒤 늦게 예수님을 만나고 난뒤에 가만히 따지고 보니까 이제 보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사기를 친 사기꾼이라는 사실이 발각된 이상 여러분한테 그게 아니었습니다. 라고 외치는 될 빚진자로서 다시 여러분앞에 나섭니다.
이 과정이 뭐냐 하면 3d 안경 쓴 거예요. 자기가 3D 안경을 써보니까 내가 어떤 것도 다 제대로 모르고 그저 내 영광, 내 자존심을 위해서 펄떡 꺼리면서 까불면서 그렇게 살아온거예요. 사도 바울의 이런 고백은 오늘날 우리가 사실 우리의 고백을 대표해서 우리를 위해서 계속해서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행복이라는 것은 우선 자기 세계부터 우선되잖아요. 자기 세계부터 우선된 입장에서 복음을 전한다던지 설교를 한다든지 강의를 해도 사실 일종의 사기가 되지요.
겔 13:17 너 인자야 너의 백성 중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부녀들을 대면하여 쳐서 예언하여 겔 12:24 이스라엘 족속 중에 허탄한 묵시나 아첨하는 복술이 다시 있지 못하리라 하라
그 당시에 선지자 예언자라고 자칭한 사람들이 뭘 했느냐 하면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그냥 예언 해 놓고 이게 주의 말씀이라고 사기를 쳐 왔던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이 아 그렇구나! 할 문제가 아니고 그러면 자기 마음에 내키지 않고 주께서 계시 주는 대로 예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가운데 누가 있어요? 없지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입을 담아서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우리 중에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우리는 마음 내키는 대로 억지로 성령의 역사라고 우기면서 내가 당신을 성령에 의해서 갈급합니다. 하는 핑계를 대면서 하지만 사실은 내가 어느 정도 좋아하고 호감이 가는 사람에게만 이바구를 하고 있는 셈이 되는 거죠. 꼴도 보기 싫은 사람에게는 성령이 역사할 까봐 걱정되잖아요. 저 사람한테는 안 갈랍니다. 나는 거룩한 백성이라 더러운 것은 안 먹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우리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뭐냐 하면 성령께서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어느 누구도 주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우리는 사는 거예요 바로 이것을 전하는 것,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고 예수님이 죽으심이 스스로 알아서 우리를 사용해서 정한다! 라고 고백하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 다 죄뿐입니다. 라는 사람보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없어요. 다 예수님 십자가 죽을 일입니다. 내 이런 식으로는 구원 못 받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야만 될 일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것이 바로 이 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분명히 죽었는데 우리는 관심도 없고 노하심이 온다는데 여전히 우리는 관심이 없습니다. 남들처럼 돼야 성공한 인생이라 여겼고 그게 행복이라 봤는데 이제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에게 피를 흘려 주셨사오니 십자가 생각할 때 마다 고마움과 감사가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 > 데살로니가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전 5:18 / 물질과 영의 만남 / 121109 (0) | 2012.11.10 |
---|---|
살전 5:12 / 관계성 / 121012 (0) | 2012.10.13 |
살전 5:1 / 빛과 어두움 / 120810 (0) | 2012.08.11 |
살전 4:9 / 몸 120713 (0) | 2012.07.16 |
살전 4:7 / 구조적 거룩 / 120608 (0) | 2012.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