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19:11 / 전략 / 120216 본문
녹취:이한례 가락교회120216-요한계시록19장 (전략)33강a-이 근호 목사
제 33강a 요한계시록 19장 11절, 몇 절만 제가 읽어 볼게요.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방금 읽었던 이 본문 가운데서 우리 개인의 위치가 여기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가 우리보고 뭘 시키고 ‘자, 이렇게 해, 이렇게 실천에 옮겨.’ 이러면 요한계시록이 어렵지 않죠. 그걸 순종해서 그걸 실천에 옮기면 되니까.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우리보고 ‘야, 너 이리 나와. 이거 해, 저거 해.’ 시키면 쉬운데 시키는 대로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우리보고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보고 시키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 있겠죠. 첫 번째는 우리보고 시켜봤자 소용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죄인이 돼서 죄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보고 시켜서 ‘ 너 잘했어. 잘하면 너 구원해 줄게.’라는 것을 애초부터 기대 안 할 경우 죄인이기 때문에 방금 뭐만 나온다 했습니까? 죄만 나오기 때문에 전혀 우리 구원에 보탬이 안 되기 때문에 시키지 않는 방법.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두 번째가 정답인데 우리가 사라질 존재라는 겁니다. 이게 어려워요.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을 사라질 존재로 절대로 이해 안 합니다. 꿈에도 나타나고 죽어서도 천국에 우리가 나타난다고 생각하지 내가 없어진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사라질 존재 같으면 그냥 안개 같이 해서, 안개의 뜻이 뭡니까? 이렇게 하나를 집어서 ‘야, 너 이리 나와.’ 잡을 수가 없는 게 안개잖아요. 안개는 하나의 물방울로 집합이 되어서 이리 하면 흩어지고 저리해도 흩어지고 햇빛 나면 ‘없네.’ 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없는 존재로 보는 겁니다. 이건 쉽게 말해서 우리는 흙으로 만들었다는 것이고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이런 뜻인데 성경은 우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간다. 우리 이름은 아담이다.’ 이렇게 나오지만 그래도 우리는 ‘나 여기 있습니다. 명령만 하소서. 우리가 순종하겠나이다.’ 이걸 원하는 거예요. 과연 우리가 말씀을 지키나 안 지키나 내가 스스로 측정해 보고 만약에 못하면 반성하고 잘하면 칭찬해 주소서. 이게 일종의 우리의 자존심이라 할까요. 우리가 있다는 것에 대한 마지막 버틸 수 있는 마지막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알 수 있는 유일한 바탕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바탕을 없애 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현실 자체가 사라지기에 우리가 현실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현실이 사라지면 같이 사라지죠. 사막에 신기루가 있는데 갑자기 사막 저쪽에서 폭풍이 분다. 그러면 폭풍이 한번 싹 지나가면 신기루가 어떻게 됩니까? 신기루에 포함이 돼서 날아가 버리죠.
우리가 사는 현실이라는 것이 과연 질문의 초점이 그겁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과연 현실이냐 하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현실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자신이 사라질 존재가 아니라고 우기면서 누구는 죽어도 ‘나는 안 죽을 거야.‘라고 우기면서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여기 있는 나를 이렇게 만들어 내는, 생산해 내는 이것을 하나의 현실이라 하는데 이것이 누구의 현실 이예요? 내가 구성한 현실이죠. 내가 구성한 현실 이것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고집을 부리니까 이것은 ’내가 안 사라질 거야.’라는 그런 근거에 의해서 나의 현실도 안 사라진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현실을 사라지게 날아가 버리면 이걸 현실로 붙들고 있는 우리도 같이 사라져 버리죠. 그러면 우리가 사라지면 성경에 나오는 ‘구원받아라, 죽으면 낙원에 나와 함께 있으리라.‘라는 그 당사자는 누굽니까? 우리가 사라져 버리면 강도보고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든지 엘리야는 뭐고 모세는 뭐고 그 자는 누구냐 이 말이죠.
여기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우리의 주체는 사라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오는 새로운 주체가 우리에게 발생됩니다.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방법은 뭐냐 예수님의 현실을 줘 버리면 우리가 갖는 현실은 사라지면서 크로즈 업 돼서 주님의 몸에서 만든 현실이 이렇게 덮쳐 버리면 그 현실 속의 일부로서 우리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이걸 우리는 그리스도인 몸의 지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그리스도 몸은 영원해요. 하나님이 보장하니까. 그리스도의 몸이 영원하다는 말은 그 밑에 붙어있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몸에 붙어있다는 이유 때문에 같이 영원한 겁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한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이것이 누구한테 했느냐 하면 예수님의 몸에 붙어있는 자에게만 주어진 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우리보고 뭐 하라는 게 없어요. 요한계시록은 우리 현실을 안개처럼 신기루처럼 날라 가 버리고 그 날라 가게 만드는 그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현실이 이렇게 주어지니까 여기 나오는 용어, 단어 하나가 우리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여기 나오는 충실이고 진실이고 공의고 눈이 불꽃같고 많은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백마 탄 사람, 이것은 우리가 시장 바닥에서 우리 인간들 사회에서 통용되는 그 단어와 호칭되는 내용들이 아니다 이 말이죠. 분명히 백마는 알아요. white horse, 우리는 분명히 백마는 아는데 여기 나오는 백마 내놔라 하면 없어요. 왜, 우리가 만든 현실을 없애기 위한 용어 동원이기 때문에 현재 안 없어지는 현실 속에서 끄집어 낸 단어 가지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단어와 동일시시키려고 애쓴다는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아시겠죠.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것을 공식으로 만들어 볼 테니까 공식을 알고 있으면 어려운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공식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하는가, 말씀에서 주체를 만들고 주체에서 다시 말씀으로 갑니다. 이게 공식 이예요. 말씀-> 주체-> 말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육신 입은 주체가 되고 그 주체가 말씀을 다시 완성을 해서 이 세상을 예수님의 나라로 만드는 그것을 천국이라, 또는 아들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죠. 그렇다면 우리는 이 공식을 안다고 치고 이 말씀이 왔을 때 이 말씀의 그림자 격으로 이 주체라는 것을 우리는 뭐로 이걸 대신하고 싶냐 하면, 내 몸이 있잖아요. 이 있는 걸 어떻게 하겠어요. 이거 있는 걸 갖다 버릴 수도 없고 분리수거할 수도 없고 내 몸을 이 주체에다 집어넣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말씀을 볼 때 내가 여기 있음을 근거로 해서 말씀을 보는 거예요.
집사님이 성경 보고 있으면 제가 만약에 ‘집사님, 성경에 뭐라고 이야기하던가요? 그렇게 물어보면 ’목사님, 본인이 보세요. 왜 자꾸 나보고 이야기하는가요?‘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나는 성경을 봐도 소용없어. 집사님은 신앙이 좋기 때문에 집사님 본 게 진리야.‘라고 하지를 않아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해요. 구원받는 것도 내가 받으려고 하지, 나 빼놓고 남 구원받는 것은 짜증나서 견딜 수 없어요. 남 천국 갈 때 난 지옥 가면 약 오르잖아요. 중요한 것은 나거든요.
그러면 이 말씀을 이렇게 가야 될 화살표가 어디로 옵니까? 나 여기 있음에 여러분 따라갈 것도 없죠. 말씀을 나한테 적용시켜 버립니다. 그러면 말씀이 주체를 만들 때 우리는 말씀 주체를 만들 필요 없어요. 이미 만들어진 주체에다 플러스(+) 말씀을 더 보태면 되죠. 그런데 예수님의 주체는 말씀이 주체가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말씀으로 뭉쳐지고, 뭉쳐지고 사라지고 있어야 되는데 우리가 주인공인양 버티고 있으면 말씀이 이렇게 와 버리면 말씀을 알고 성화되고 착한 일 많이 하고 교회 봉사 하고 십일조 내고 기도 많이 한 나를 이렇게 신앙 좋기는 어려운데 그만큼 얼마나 투자 했습니까? 30년 신앙 경력, 40년 해서 이 멋진 나를 만들어 낸 이걸 도로 도루묵으로 사라지게 만들어요? 미쳤어요? 그동안 나하나 구원받으려고 얼마나 용을 썼고 교회 얼마나 돈을 갖다 바쳤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바친 내가 이제 와서 지금 와서 그걸 전부 다 ‘아!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이 구원받는구나.’ 이런 식으로 우리가 뒤로 물러 설 그런 마음이 생뚱맞죠. 그런 의도는 없죠. 사라져야 되는데 기어이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말씀이 와서 주체가 되고 그 주체가 사라지면서 다시 말씀으로 돌아간다. 그건 로고스, 예수님이죠. 그런데 이 자리에 건방지게 우리가 뛰어 들으니까 말씀이 우리를 가지고 ‘야, 우리를 구원 시키는구나. 고맙습니다.’ 끝나 버렸어요. 그 다음부터는 동네방네 다니면서 ‘나 구원 받았다. 건드리지 마라. 나 구원 받았어. 나 너보다 더 믿음이 좋아.’ 이렇게 돼 버리죠.
그래서 주님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두 가지를 내세웁니다. 이 노선, ①말씀에서 예수님으로 가는 이 노선도 유지시키고 ②말씀으로 인간도 유지시키는 이 노선, ①번 ②번 노선 다 유지시킵니다. 그리고 이것을 ②번 노선에서 사라지게 하면서 예수님의 업무의 완성에 참여시키는 방식을 사용해요. 주님도 일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을 주님의 일하심에 여기 참여시켜서 주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를 구원시키는 방식을 성경 전체가 사용합니다.
자,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요번에는 공식이니까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는데, 이제부터 무척이나 어려워요. 어려운데 조 한주 집사님, 처음 오셨는데 배려해서 쉽게 하려고 애를 쓰겠습니다. 뭐가 어려우냐 하면 말씀이 올 때 하나의 주체로 이렇게 형성 된다는 요 과정을 제가 지금부터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이런 겁니다. 사람이 뭘 하나 행동에 나서게 되면 동일시, 또는 동일성이라고 하는데 성경 말씀에서 엘리야, 세례요한, 사도바울이 있다 합시다. 성경에 사도바울, 엘리야, 모세 있다면 사람의 주체는 어떻게 읽느냐 하면 엘리야, 사도바울 이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은 사람으로 여겨요. 첫 번째 사람 엘리야, 모세, 아브라함, 사도바울은 지금 천국 가서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인데 너희들은 죽은 걸로 여기지만 그분들은 지금 생생하게 살아있다. 마르다 마리아 오빠도 살아있었잖아요. 마리아, 마르다는 죽었다고 여겼지만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나흘 만에 불러냈죠. 불러와서 또 고생했겠지만.
그래서 성경을 볼 때 저분들은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 다음에 첫 번째 사람, 저분들은 구원받은 사람이다. 두 번째, 그들의 주체와 나를 어떻게 동일시시키느냐, 두 번째 작업이 문제가 돼요. 모세 믿음 좋다. 사도바울 믿음이 좋아. 그러면 내가 구원받는 방법은 이제는 하나밖에 없겠죠. 그 사도바울의 믿음과 동일한 믿음, 사도바울이 갖고 있는 세계와 내가 일치시키면 사도바울이 간 나라, 예수님이 간 나라, 베드로가 간 나라에 내가 합류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퍼뜩 떠오르죠.
그러면 그 다음 작업은 뭡니까? 그 다음 작업은 바로 모방이고 흉내 내는데 그 모방과 흉내는 무엇을 동원시키느냐 하면 규범을 동원시키죠. 규범은 어려우니까 쉬운 말로 법을 적용시키죠. 그 법을 동원시키는데, 그러니까 교인들이 목사한테 요구하는 게 뭐냐 하면 승리한 사도바울이 있는데 목사님, 제가 목사님 교회 출석했습니다. 이제 목사님은 저한테 뭘 해주느냐 하면 사도바울과 같은 동일한 신앙인으로 거듭 태어나는 작업에 목사님이 나를 도와줘야 되겠습니다.‘ 도와주는데 방금 어떻게 도와준다 했습니까? 규범이나 법으로 도와주는 거예요. 목사님이 저한테 ’성경에 이런 말씀 있으니까 그거 지키시면 당신은 사도바울과 동일한 신앙인 돼서 구원받습니다.’라는 그러한 방법들을 알려 달라고 교인들은 그걸 요구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 좋으라고? 그게 누구 좋으라고 한 짓 이예요? 목사한테 요구한다는 것은 누구 좋으라고? 내 좋으라고. 나는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거예요. 아주 근원적인 자존심이죠. 신앙적인 명예고 체념이고. 그럼 목사 입장에선 편하죠. 굉장히 편한 거예요. 믿으라고 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시키는 대로 행하세요.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명령은 반드시 명령 주는 자는 명령 받은 자가 명령 주는 자에게 예속되게 돼 있습니다. 본인이 원치 않든 원하든 상관없이 예속되게 돼 있어요. 그러면 똘마니가 되죠. 목사의 똘마니가 됩니다. 목사의 똘마니가 되면 목사는 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건 하나밖에 없잖아요. 한 자로 돈이죠. 목사는 돈 빼는 기술밖에 없어요. 돈 빼낼 수 있다면 어떤 짓도 다 해요. 자기 부인도 하고 기도 빡세게 하고 희생도 하고 예수님처럼 십자가로 가는 그러한 모든 멋진 거 있잖아요. 선교하는 업적에 자기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 그런 것을 동원해서라도 기어이 돈을 빼내려는 것이 목사의 수법입니다. 이런 것을 가서 해야 되는데, 2시간만 하면 다 나가는데.ㅎ
그러니까 노골적으로 돈 달라는 것보다 더 미운 것은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하잖아요. 대개 돈 달라는 목사보다도 나는 돈 필요 없다고 하는 목사가 단수가 더 높아요. 그거 아마추어들, 교인들은 몰라요. 한 목사님은 아시지요. 그 고단수를 모른다고요. 한 경진 목사의 고단수를 모른다고요. 그런데 얼마나 잘 속아 넘어가는지.
문제는 이겁니다. 이게 뭡니까? 동일성! 이건 성경에서 한마디로 탐욕! 욕심입니다. 일종의 도 닦기. ‘니가 되는데 내 안 될 게 뭐 있노.‘ 이래요. 사도바울 니가 구원받는데 내가 안 될 이유가 없다는 거죠. 모세 니 하는대로 한다. 니가 한 그대로 하면 되니까. 솔로몬 재판 보고 솔로몬 재판 흉내 내는 사람 한 둘이 아닙니다.ㅎ
지난 주 설교 제목이 나귀새끼였잖아요. 나귀새끼 설교 하면서 제가 예를 하나 들었죠. 나귀새끼 임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가서 임자 새끼 가져가려하니까 임자가 뭐라 합니까? ‘뭐요? 당신 임자 있는데 왜 이럽니까?’ 할 때 제가 예를 들었죠. 벤츠를 정비소에 맡겨놨는데 벤츠 타고 싶어서 시동 거니까 주인이 옆에서 ‘어, 남의 차를, 당신 뭐요?’ 할 때 우리가 시험적으로 당해보란 말이죠.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벤츠를.’ 이러할 때 덜렁 내 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맞아죽죠.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노림수가 있다는 걸 알아요. 흉내 내기를 너무 잘해요. 모든 교육의 시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방입니다. 모방이 어린애일 때는 교육의 시발점입니다. 흉내 내기, 모방하면 그것이 어떻게 그 사람과 일치됩니까? 아니죠.
모방해야 될 대상은 나에 종속돼요. 누가 높으냐 하면 모방하고 싶은 사도바울보다 사도바울을 흉내 낸 내가 결국은 사도바울보다 더 우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논리를 우리가 내뱉게 돼요. 이걸 반드시 발설하게 돼 있습니다.
동일성이 된다는 말입니까? 안 된다는 말입니까? 이거는 안 됩니다. 동일성이 되질 안 해요. 성경에 사도바울은 구원받았다. 그런데 제가 방금 결론 내리기는 결코 사도바울처럼 같은 신앙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건 우리에게 뭘 안겨줍니까? 절망을 안겨주는 거죠. 사도바울은 구원받았는데 사도바울처럼 되지 아니하면 나는 결국은 사도바울이 간 천국에 합류를 못하게 되면 나는? 갈 곳은 지옥밖에 없죠. 그래서 이것은 우리한테 절망이 되는 겁니다.
성경 모든 말씀이 마치 우리가 그걸 모방하고 반복적으로 교육받으면 마치 그것처럼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러한 규범적이고 법적인 것을 계속해서 솎아내고 있죠.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 그럼 여기 열 명이 있다고 하면 십계명을 열 명에게 나눠주고 지키라 하면 어떻게 됩니까? 십계명 지켰다고 숙제 해온 숙제가 동일합니까? 열 명이면 열 명 다 다르죠. 왜 다를 수밖에 없느냐 하면 각자, 각자가 각각 다 독자적으로 자기 인생, 자기 모방들을 해놨기 때문에 이건 다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럼 열 명 중에 어느 것이 모델입니까? 그건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죠. 다 그게 가짜죠.
이것을 영어로 Copy라고 합니다. 복사판. 복사판이라는 것은 일종의 유사품, 다른 말로 하면 가짜.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너는 가짜일 수밖에 없다’는 걸 들통 내기 위해서 준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 그럼 사도바울은? 그럼 베드로는 구원받았잖아. 세례요한도 구원받고 엘리야도 구원받았잖아. 그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하는 질문은 그 다음에 툭 튀어나와야 되겠죠. 그 사람들도 우리같이 복사판인데 구원받았잖아. 우리가 복사판 유사품 가짜라서 만약에 지옥 갔다면 그들도 지옥 가야지, 아브라함도 가야 되고 가야되는데 그 사람들은 천국에 갔잖아. 그런데 우리보고 복사 품이라 하면서 우리는 안 된다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러니까 성경을 볼 때에 건성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쉽게, 쉽게 보면 안 된다는 거죠. 요한복음 5장 39절에 말씀 아시죠? 모든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다. 제가 적어볼게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 말을 하신 것은 예수님 단독으로 있을 때 이야기한 게 아니라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둬야 돼요. 많은 사람들, 이 사람들은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이라 봅시다. 이 사람들은 전공이 뭡니까? 성경 말씀을 연구해서 그 다음에 거기서 뭘 끄집어내고? 규범과 법을 끄집어내고 그걸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 그러한 판을 만들어서 그것을 그 당시 세상 , 유대인에게 전파해서 그들로 하여금 말씀을 생활화 되고 말씀을 실천에 옮겨서 뭘 생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생산하기 위해서 한 거죠.
그래서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라고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런 말씀 들어본 적 있습니까? 마태복음 5장 20절에 그런 말씀 있어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이 말은 바리새인이 하는 일, 주특기가 뭐냐 이 말이죠. 하나님의 의에 접근하기 위해서잖아요. 그 방식이 뭘까요? 그 방식은 성경을 뭐로 재조립합니까? 성경을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걸로 다시 재조립하고 정리하고 배열하고 정돈하고 정렬해놓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안식일을 지켜라‘ 하면 이게 안 되니까 세세한 세부조항을 ’안식일을 지켜라’의 부대조항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면 안식일 날 담요를 들고 가게 되면 어긴 것이 되고, 안식일 날 담요를 안 들고 가면 지킨 것이 되고, 왜 부대발생 법칙을 만들어 내느냐 하면 결국 목적이 뭡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셨다. 이 말씀은 의를 만들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의를 만들려면 그 의가 있는 사람에 한에서만 메시야 나라에 참여한다.‘라는 공식이 이미 성립 돼 있는 거예요. 그거 누가 만들었습니까?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거죠? 주님 머립니까? 인간의 머립니까? 인간의 머리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보다 의가 낫지 아니하면‘ 이라고 해서 모든 인간은 기껏 해봐야 바리새인이 하는 그 작당들 아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오늘날 교회는?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이 뭡니까? 교회목사들이 하는 일이 뭐고 교인들이 하는 일이 뭡니까? 목사가 그렇게 이야기해도 교인들이 교회 앞에 나와서 스스로 만들어 내고 정리하는 그 구원받겠다는 원리 원칙이 뭐예요?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그거잖아요. 본인이 얼마나 고상해 보이고 성숙돼 보이는 하나님의 의로 숙성된 푹~ 농익은 포도주처럼 이제는 어지간한 환난과 핍박도 이겨내는 순교하라면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죽으면 죽으리라 할 수 있는 그러한 주님의 믿음에 자생력을 갖춘 기도하면 병도 낫고 어떤 것도 행할 수 있는 기적을 유발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서 똥배 나오듯이 불룩해서 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사람은 기도하면 안 되지만 지는 의인의 기도는 간구하는 능력이 많아서 기도하면 병 낫고 이런 거, 그런 것을 모델을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바울이나 사도들을 모델로 뽑아서 ‘나도 저처럼 나도 될 수 있어, 조금만 기다려, 나도 당신 따라붙을 거야.‘ 이런다고요.
이것을 가지고 푸크란 철학자는 ‘전략’이라 했습니다. 전략이란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이 세상에는 주체가 있는 게 아니고 전략만 있다고 어려운 말을 했어요. 이걸 풀이하면 내가 이렇게 확정돼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수작을 부린 게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은 지가 목표한 게 있으면 목표 앞에서 자기는 해체돼 버립니다. 내가 요걸 반드시 해 내겠다 하면 지난 과거의 지가 구축한 것까지 다 과감하게 부술 용의가 있습니다. 결혼할 총각이 너무나 좋아하는 여자 친구를 만났다. 그런데 그 여자 친구가 담배 냄새를 너무 싫어한다. ‘까짓 거 내가 저 여자를 얻을 수 있다면 내가 뭔들 못해.’ 담배 당장 끊어요. 그렇게 끊어라, 끊어라한 담배를 여자 친구 말 한마디 ‘나 담배 안 끊으면 자기와 안 만날 거야.’ 요 지나가는 한마디 했는데 담배 확 끊어버린 거예요.
뭡니까? 전략이죠. 그럼 주체는 어디 있습니까? 주체가 있었는데 있으니까 저 여자를 꼬인다든지 하는데 주체는 있었는데 그 여자에게서 뿜어 나온 힘이 나로 하여금 나라는 주체를 해체시키면서 그 전략 안에서 재조립되는 거예요. 여자 안에서. 마징거제트입니다. 변신의 변신을 거듭하는 거죠. 그래서 푸크는 이 세상에는 전략밖에 없다. 전략이 없으면 사람은 살아있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목표가 없고 희망이 없고 계획이 없으면 그 사람은 살아도 죽은 사람이라 말이죠. 새로운 목표가 나로 하여금 전략을 위해서 해체됐다가 분해됐다가 다시 조립하는 새로운 내가 미처 나도 모르는 새로운 능력이 ‘나한테 이런 능력이 있었나?’ 하고 깜짝 놀랄만한 새로운 제2, 제3의 자아를 전략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유도시킨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교육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표도 마찬가지인데 평소에는 건성으로 기도하다가 갑자기 교회에 어려움이 생기면 목사가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고 오겠습니다.‘ 하고 교인들 보기에 믿음 되게 좋아 보이게 유도하는 것도 그게 뭡니까? 전략이죠. 그 다음부터 만약에 목사가 자진해서 이렇게 기도하면 찬바람 부는데, ’당신들은 교회 생각하나? 나만 교회 생각하나?‘라고 강단에서 꾸중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확보할 수 있는 전략이죠. 그렇죠? ’당신들 뭐 하느냐?‘ 그런데 듣는 장로나 집사는 기분 나쁜 게, ’니는 노는 인간이니까 기도나 하지, 우리는 지금 바쁘잖아.‘
그 말은 목사가 그 말을 알고 있어요. 내가 이런 소리 하면 그들이 ‘당신은 목회가 당신 전공이고 우리는 사업이 전공이기 때문에 당신같이 시간이 남으면 몰라도 그렇잖아서 우리는 못한다.’라는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어요. 프로는 생리적으로 이걸 감을 잡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나처럼 기도하라. 나처럼 성경보라.’ 이런 뜻이 아니고 회사 나가면 당신이 오야붕이고 돛대지만 교회 앞에서는 나한테 입 다물라 그 뜻입니다.
회사에 질서 있듯이 교회에서는 이미 질서가 내 중심으로 한 척추처럼, 뒤 척추, 쫙 고속도로 뻗었으니까, 나이 어리다고 목사가 젊다고 함부로 까불지 마라. 하나의 전략이라니까요. ‘니 입 다물라.’ 나오잖아요. 해를 품은 달에서.ㅎ
사실 이러한 수법들이 모든 처소에 다 있는 거예요. 그것을 제가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으로 설명을 했잖아요. 천개의 고원 그림 한번 그려 볼까요? 말미잘 같이 생겼는데 밑바닥에서 다 올라오죠. 산이 뾰족한 산이 아니고 산이 올라오고 평평하고 요걸 개마고원 같이 고원이죠. 정상이 편편한데. 이게 뭐냐 하면 전부 다 각자, 각자가 하나의 무슨 노릇을 하느냐 하면 주체 노릇을 한다는 겁니다. 가락시장 협의회, 이쪽에선 전국 미용사, 여기는 KTX 여 승무원 단체, 요거는 대성 초등학교 23회 동창회, 모든 인간은 이 사회 자체가 마치 피부에 두드러기 나듯이 각자, 각자가 나름대로의 자기 고유의 주체성을 성립하고 있으면서 주체성에서 뭘 뿜어낸다? 전략을 뿜어낸다 이 말이죠.
이런 것들을 합치면 현실인 거예요. 그럼 교회가 있다는 말은 뭡니까? 교회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게 교회 가면 좋으니까 중요하죠. 그런데 여기 초등학교 학부모 모임에는 뭐가 중요합니까? 그것도 모임이니까 중요하죠. 자기 애 깡패한데 맞으면 안 되니까 중요하잖아요. 그러면 오후 6시에 성경공부 있고 초등학교 학부모 모임 있다면 어디 가야 돼요? 요거 30분 듣고 빨리 뛰어가든지 아니면 임원회 회의 참석하고 가든지, 아니면 미안하지만 요거만 참석하고 못 가고 하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하나, 하나가 나로 하여금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나는 안 죽었어, 나는 이 땅에 안 죽었단 말이야. 나는 이렇게 살아간단 말이야.’를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전략적 주체로서 성립되는 거예요. 여기고 가담도 못하고 저기도 가담도 못하면 그 사람은 따로 모여야 됩니다. 전국 백수협회 회장해서 다시 만들어서 모여야 되죠. 진짜 있어요.
자, 이렇게 죽 이야기해보니까 결국 이 현실이라 하는 것은 누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현실입니까? 내 몸이죠. 내 몸! 그런데 성경은 어떤 현실입니까? 내 몸이 아니고 누구 몸?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이 전체를 현실로 보는 것이 아니고 이 전체를 어떻게 한다? 사라지게 만든다. 사라지게 만들기 때문에 여기에는 특수한 용어들이 등장합니다. 여기(인간들 세계)에서 통용되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도저히 내가 나의 전략을 포기 못하고 나의 주체를 포기 못하기 때문에 납득이 안 되는 식으로 주께서는 그 용어들을 섞어서 사용해 버려요.
한번 봅시다.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하늘이 열린 경우에 우리가 인간 사회에서 하늘이 열린 경우는 어떤 경우에 하늘이 열리죠? 나이트클럽. 나이트클럽에 지붕이 열리잖아요. 우리가 아는 하늘이 열리는 경우는 어떤 겁니까? 영화에 보면 UFO 떴을 때 그런 경우죠.
그런데 성경에 무식한 사람들은 하늘이 열렸다는 것을 내가 만들어 놓은 현실을 그걸 유지하면서 거기서 하늘이 열린 경우를 찾는다고 난리예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하늘이 열린 경우는 나의 현실이 날라 갔을 때 그때만 하늘이 열려요. 현재 나라는 것을 기초로 해서 이걸 부수지 않고 이걸 꼭 잡고 유지하면서 거기다가 성경 말씀을 일치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벌써 강의 시간이 됐으니까 다 잊어버렸을 테니까 다시 할게요. 말씀이 주체를 드러내고 주체는 말씀대로 가죠. 그런데 여기에 우리의 주체가 안 죽고 있단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말씀을 내 주체가 납득이 되도록 만들겠죠. 이걸 뭐라 했습니까? 동일시, 또는 동일성이죠. 내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을 유지하면서 내 현실에 납득이 되는 말씀으로 이렇게 해석하고자 한단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했습니까? 모든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증거 합니까? 모든 성경은 바리새인 너 말고 서기관 너 말고 너희가 실천에 옮기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직접 누구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한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서 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봅시다. 12절을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다른 말로 하면 모든 말씀은 이 예수 내게 대해서 증거한 것이다. 이걸 모든 인간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따로 뭘 챙기고 있습니까? ‘성경 말씀은 내가 납득이 돼야 내가 그걸 지켜서 행동에 옮겨서 의를 이루어서 그래서 내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는 자기 구원 욕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심지어 엘리야도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이삭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집니다. 이스라엘 왕들도 마찬가지고 여호사밧 아사 왕 여호람 다 마찬가지고 그들도 한 때는 잘했다고 칭찬받지만 끝에 가면 자기 본색을 드러냅니다.
왕들이 그렇게 변변치 못한 것은 이 세상에 말씀을 지킬 왕은 누구 밖에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거예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예요. 아브라함이 순종하고 자식 죽이긴 했지만 아브라함이 지가 그렇게 제대로 의를 만들었으면 자기와 하나님과 직접 거래하면 될 문제기 때문에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누가 끼어들 이유가 없습니다. 메시야 예수님을 기다릴 이유가 없죠. 그렇잖아요. 자기가 이삭 바치는 훌륭한 일을 했으면 그걸로 믿음 있다고 인정받았으면 그 믿음이 하나님의 의가 되어서 그걸로 자기 구원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고 여기고 누굴 기다릴 필요 없이 이미 천국에 합격했으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누굴 기다리고 누굴 보기를 원했습니까? 예수님 보기를 원했죠. 그 이유에 대해서 아는 사람 있습니까? 우리에게 성령 오기 전에 그걸 알 수 있어요? 없어요? 없죠.
이상하다. 아브라함과 하나님과 거래했으면 그걸로 끝인데 지 구원받으면 됐지 왜 새삼스럽게 예수님을 자꾸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집어넣으려고 하는가? 자기 본인으로서 훌륭한 믿음의 조상이 됐다고 칭찬받았으면 그걸로 됐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뭘 믿었느냐 하는 겁니다. ①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 ②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죠. 약속을 믿음으로 의인이 된 거예요.
그러면 그 약속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계명, 지시, 규범, 법입니까? 아니면 그 말씀이 그 약속이 하나의 그리스도라는 인물로 집약되는 겁니까? 그 인물로 집약되는 거예요. 우리도 그렇게 믿읍시다.
모든 성경 말씀은 나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이 모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한테 가서 그 예수님이 홀로 다 지켜서 그분의 공로와 성령이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내 안의 그리스도의 의로만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나의 실천의 의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럼 교회 역할은 뭡니까? 교회 역할은 그걸 철저하게 가리는 역할을 해야 돼요. 교회가 없으면 안 돼요. 교회 다니셔야 됩니다. 왜, 이 교회가 우리를 복음을 가리고 망하게 하는 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 그리고 진짜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 능력에 함몰될 것이고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교회가 아니고 십자가가 구원하는 것을 교회 다니면서 다시 깨닫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교회 다니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복음 아는 사람한테는 무리한 요구인데요.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교회 다니시라고 강요는 안 하겠는데 자기 집안을 잘 돌보시기 바랍니다. 요거는 아까 교회 다니시라와 같은 차원의 이야깁니다. ‘가정을 잘 돌보시기 바랍니다.’ 돌보다 보면 자기 딸자식이 예수님보다 더 좋아질 때가 있을 거예요. 자기 아내나, 처나 자식이나 남편이 예수님보다 더 사랑스럽고 좋아질 때가 있을 겁니다. 우리 김 집사님은 그럴 경우가 없겠지만, 그런 일이 있을 거예요. 그럴 때 뭘 느낍니까?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그 다음에 뭐죠? 어디에 합당치 않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이거는 요 포기하세요. 이건 뭐 거기서 그걸 꺾고..심지어 그보다 더 심한 말 할까요?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너를 네가 미워하면 너는 구원받을 것이다. 그거 됩니까?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그 예수님을 사랑하는 내가 이뻐보이는데 그걸 이뻐하지 말고 어떻게 하라? 미워하라. 그러면 니가 구원받는다.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래서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자는 살 것이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도리어 잃어버린다는 것, 이 모든 말씀들이 우리보고 실천에 옮기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지금 말씀이 어디로 쏠리고 있다는 말입니까? 너를 거쳐서 딴 데로 쏠리고 있는데 거치면서 나라는 주체는 해체돼야 돼요. 누구 전략 때문에? 내가 만들 전략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 때문에 벌리는 전략으로 인하여 나는 그 앞에서 해체되고 사라져야 됩니다.
그 전략의 하나가 뭐냐 하면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전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략에 말려든 사람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신 일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어떻다가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안 되는 것을 주께서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나의 전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전략으로서 휘말리게 됐습니다. 쉽게 합시다. 나는 주의 일을 하기 싫은데 주님의 힘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그걸 성경에서 사도바울은 부득불이라 하는데, 부득불 나는 주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으로 그렇게 조져놨습니다. 만들어 놨습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너는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누구의 증인이 된다? 니 증인이 되리라? 아니죠.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 볼찌어다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 모든 말씀은 우리가 지키란 말이 아니고 그렇게 사태가 이미 그렇게 꼬일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해체되면 우리의 해체와 더불어서 제일 먼저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해체될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꾸며 놓은 나의 현실이 와르르 무너지죠. 그 무너지는 방법이 죽음의 장막이 찾아올 때죠.
프랑크시나트라가 부른 노래가 있어요. My Way라는 곡인데 마지막에 나의 갈길 다 가는데 마지막에 죽음의 커튼이 드리워지죠. 그러면 나, 나, 나 하다가 죽음의 커튼을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우리가 생생하게 여기 있다 합시다. 참, 인간이라 하는 것은 영물이라서 어려워요. 내가 여기 있죠. 이걸 누가 지켜봅니까? 내가 지켜보죠. 곤란한 질문이죠. 지켜 보여 지는 내가 납니까? 지켜보는 내가 납니까? 이 둘 다 보고 있는 이게 납니까? 셋 중에 어느 게 나예요?
내가 착한 일 하고 있고 기도하고 있는 나를 머릿속에 집어넣는 그 머리는 누구 안에 들어있는 두뇌입니까?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내가 그리고 있는 그 이미지는 지금 이쪽에 들어있는 머리에 있는 겁니까? 그걸 지켜보고 내 두뇌에 있는 거예요? 그 둘 다를 지켜보는 이 머리에 있는 거예요?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내 안에 또 다른 법이 있어 나는 절망한다. 나는 착해보려고 애쓰는데 내 안에 다른 법이 있는데 그 법은 그건 내가 죄라는 거예요. 그것이 죄란 말은 나는 죄가 아닌 거예요. 죄가 아닌데 내가 아닌 죄가 내 속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나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죄인 돼 버렸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은 영물이기 때문에 인간은 육적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영으로 판단하게 되면 인간은 내가 아닌 이질적인 요소가 들어온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죽기를 무서워서 종노릇한다고 히브리서 2장15절, 사람은 죽기를 무서워서 누구한테 종노릇한다? 마귀한테 종노릇하는 그러한 모습은 성경이 아니면 누가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 유명한 철학가들 대단한 석가모니 ‘당신 안에 죄 들어있어. 당신 마귀 들어있어.’라고 석가모니보고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제자들이 하겠어요. 누가 하겠어요. ‘한 경직 목사 당신 안에 마귀 들었어.’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영락교회 교인 중에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안철수 당신 안에 마귀 들었어.’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나 철수가 이야기하겠어요.ㅎ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교회에서 이야기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 이루었다는 이야기만 해야지, 딴 소리 할 수가 없어요. 다 이루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교회 나와서는 절대로 교회 믿지 마세요. 교회가 말아먹든 교회를 떠나든 뭉개지든 목사가 퇴직금을 가지고 수십억을 가지고 가든 그런 것 가지고 의롭니 정의니 성경에 나오는 바른 뜻이니 그런 기도 제목, 그건 기도 제목도 아니에요. 그건 뭐냐 하면 결국 자꾸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 있잖아요.
우리 현실은 아까 뭐라 했습니까? 항상 전략적으로 움직이면서 나는 이런 바른 교회되기를 위해서 이런 전략을 위해서 난 이 몸 하나 바치겠다는 이 전략에 말려든 채로 주체로서 자기가 재조립된 거예요. 그래서 전략 자체가 문제가 있다면 이 전략을 목 따고 있는 나도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전체가 문제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은 그보다 더 큰 전략 누구로부터 나온 전략? 예수 그리스도 몸으로부터 나온 전략이 이거 전체를 비현실로 간주하고 이걸 비현실로 간주하게 까발리는 그 힘이 현실입니다. 그게 현실 이예요. 그러면 나는 일 하겠다 안 하겠다. 내가 결정권이 없고 내가 이 일을 하면서 해체돼야 되고 남들은 판사 돼서 사라지고 의사돼서 사라지는데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인생을 종쳐야 돼요. 마감해야 돼요. 그래서 스데반 집사는 돌 맞고 사라졌잖아요. 열두제자가 다 뭔가 고난 받고 사라졌어요. 사라지면서 좋아서 ‘나의 갈길 다 달렸으니 나를 위해서 생명의 면류관이 있고.’ 죽는 게 좋아서, 미쳤어요. 나한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빨리 내가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 이상한 소리 하고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들은 잘되어라. 나는 세상의 찌꺼기가 되겠다.’ 이걸 놓고 함석헌이라는 사람 알죠? ‘나는 즐겨 하수구가 되겠다.’ 하수구란 뭔 뜻이냐 하면 하수구가 있어야 앞에서 깨끗한 상수도가 성립되는 거예요. 하수구가 설치 안 됐으면 수돗물을 틀어야 그것은 전부다 역류돼서 넘치잖아요. ‘너희들은 깨끗한 물 돼라. 내가 시커먼 물은 나를 관통하도록 내가 허용할게.’ 이 뜻 이예요. 하수구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 일을 참여시켜야 되는 거죠. 하수구라 하는 것은 자기가 주인공 될 수가 없다는 다른 표현을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다. 내가 지금 내가 기대 목적 기획 그것을 내가 만들어 놓고 거기에 나를 동일시, 몇 번 나옵니다.
동일시하는 이유가 뭐라 했습니까? 다 잊어버렸죠. 동일시하는 이유는 동일시 할 때마다 내가 주체가 돼요. 그러니까 내가 나답기 위해서 우리는 전략을 해야 되고 전략에 내 몸 바침으로 말미암아 그걸 하나님 일로 간주해서 결국 노리는 것은 ‘역시 나는 괜찮은 존재야.’ 결국 자기 이득과 자기 주체 확인, 동일성, 그래서 ‘이 현실은 내가 생각한 현실 그대로네.‘라고 자기가 만든 현실을 현실이라고 우기고 싶어 하는 그러한 충동들이 이런 것들을 유발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성경 말씀 하면 ‘오늘도 성경 말씀 주시옵소서. 내가 큐티 해서 이걸 지키겠습니다.’ 이런다 말이죠. 그런데 그러한 수고와 무거운 짐을 여러분 다 내려놓으세요. 이 성경 말씀은 우리가 주체가 아니고 누가 주체라 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한테 구원해 주려고 이러한 전략과 이러한 구조, 요러한 방침을 가지고 우리에게 그냥 주는데 그게 뭐냐, ‘백마 내가 탈게. 그리고 타는 것도 내가 탈게. 그 이름을 쓰는 것도 너보고 쓰라고 하지 않고 내가 진실과 충신으로 그렇게 내가 심판할게. 그리고 이것은 너희들은 모르는데 너희들은 몰라도 내가 일방적으로 너희는 모르는 채 내가 이루어서 반드시 너희들을 구원 시켜줄게.’하는 주님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첫 시간 마지막으로 이것만 하고 쉽시다. 그렇다면 모든 게 전략인데 전략에서 나오는 게 뭐냐, 전략에서 주체가 나온다고 했죠. 요 과정이 있어요. 과정에 뭐가 나오느냐, 요거 중요하니까 이것만 이야기하고 쉽시다. 전략에서 주체가 될 때 그 과정에서 뭐가 나오느냐 지식과 진리가 나옵니다. 상당히 재밌죠? 뭐냐 하면 ‘그래 이게 진리야. 그래 이게 진짜 하나님의 참된 지식이야.’라는 것이 뽀송뽀송 막 튀어나와요. 그러니까 이거는 결국은 인간은 자기의 잘남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경을 통해서 뭘 끄집어낸다? 결국은 나는 지식을 알고 있고 나는 진리를 알고 있다는 걸 자기의 소유로 삼기 위해서 전략을 만들어 놓고 그걸 현실로 간주하고 현실 속에서 나라고 진리와 지식을 내 것으로 끌어 모아서 한껏 축적하는 방식으로 이 세상의 현실을 그렇게 구성해 나가는 겁니다. 바로 그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어떤 대안과 대책이 있어요. 그건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 > 요한계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계시록 20:1-6 / 계시의 단면 / 120315 (0) | 2012.03.16 |
---|---|
요한계시록 19:18 / 짐승과 인간 / 120308 (0) | 2012.03.10 |
요한계시록 19장 / 할렐루야 / 120202 (0) | 2012.02.03 |
요한계시록 18:21 / 외부는 없다 120119 (0) | 2012.01.20 |
요한계시록 18장 / 경제판 / 120105 (0) | 2012.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