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18:21 / 외부는 없다 120119 본문
요한계시록 18:21 / 외부는 없다 120119
녹취:이한례 가락교회120119-요한계시록18장 (외부는 없다)31강a-이 근호 목사
제 31강a 자, 오늘은 요한계시록 18장 21절부터입니다.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졌다 그랬죠? 몇 가지 정확한 것을 원하고 있는데 정확한 게, 이 내용이 뭐냐, 정확하게 이 뜻이 뭐냐 하는 거죠. 그러려면 여기에 나오는 용어들, (힘센) 천사가 나오고 그 다음에 큰 돌이 나오고 큰 성 바벨론이 나오고 그 다음에 바다가 나오죠.
이러한 단어들, 천사, 돌, 바벨론, 바다, 이 단어들이 모아져서 정확하게 뭘 표현하느냐 하면 ‘이게 진리야. 이게 현실이야. 이게 리얼리티야. 실제야.’라고 표시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 ‘돌은 어떤 것이고 바벨론은 어떤 것이고 바다는 어떤 것이고 천사는 어떤 것이다.’ 라는 것이 인간 중심으로 따로 이렇게 단어가 구비돼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들이 하는 것은 다 이것(천사, 돌, 바벨론, 바다)을 대입해서 조립을 해보면 과연 이 뜻이 나오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안 나옵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어떻게 한 도시를 듭니까? 도시가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데 그걸 들어요? 아무리 천사라 하지만, 그리고 바다에 빠진다는 건데 바다가 왜 나오느냐 하는 문제죠.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나오는 그런 언어, 문자의 연결고리 가지고서는 이쪽에 있는 따로 돼 있는 연결고리를 접근 할 수가 없습니다. 접근이 안 됩니다.
그리고 이 동네, 역사가 아니고 묵시로 통하는 이 용어를 사용하는 몸은 우리 몸이 아니고 어디 몸이냐 하면, 예수님이 몸에서 연결돼 있는 용어로 이렇게 하나로 이해가 비로소 가능해 져요. 우리 몸은 안 돼요. 우리 몸의 일상적 용어 가지고는 이것이 풀리지가 않습니다. 그런 우리 생각에 이게 안 풀려도 ‘나는 나대로 살고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일 하세요.’이러면 그만일 텐데 그렇게 ‘나 뱃장이다.’라고 나오면 될 텐데 예수님에 관계된 이 일이 지금 우리 일을 동떨어지게 할 것 같으면 상관할 필요 없는데,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이것이 모든 것이 ‘망상이고 착각이고 허무다.‘ 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쳐들어온다 이 말이죠.
니가 생각하는 이 세상이란 자체는 니가 만들은 조작된 것이고 니 몸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다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만날 때 그것이 사람이 일한다는 것이 자기 몸이 이해하는 범위 내에서만 이해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이 본 것도 우리는 못 봐요. 안경을 이렇게 놔두고 ‘안경을 어디다 놨더라.’ 이렇게 안경을 놔두고도 만날 안경을 찾거든요. 그럴 때 ‘안경은 당신이 화장실에 놔뒀던데.’ ‘아차, 내가 이거 생각한다고 내 생각 범주에 들어오지 않는 안경이 다른 사람이 볼 때 안경이 화장실에 있다는 걸 발견했을 경우에 우리는 내가 안다는 것이 뭔가 자꾸 누락되고 빠져있다는 걸 알 수 있죠.
그게 유명한 라캉의 ‘잃어버린 편지’라는 하나의 예가 나옵니다. 편지가 책상 위에 있으면서도 편지 찾는다고 난리예요. 그런데 편지가 책상 위에 있다는 것을 왕비도 찾고 경감도 찾고 신하도 찾고 하지만 그런 단편 소설이 있어요. 어떤 편지가 있더라고 편지를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관 가지고 아무리 샅샅이 조사해봐야 그 놓여있는 편지 하나가 눈에 띄지 않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편지 여기 있네.’ ‘어~ 거기 있었는데 왜 몰랐지?’ 왜 모른 이유는 뭐냐 하면 본인은 편지가 절대로 책상 위에 보이는 곳에 있지 않고 숨어있는 곳에 안 띄는 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책상 위에는 안 보고 책상 밑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의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그러니까 사람이 내가 못 보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보고,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내가 볼 수 있고 두 사람이 못 보는 것을 세 번째 사람이 볼 수 있고 열 네 명이 못 보는 것을 열 다섯 번째 사람이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은 못 보는 것도 있지만 안 보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임금님이 옷을 벌거벗었는데 임금님 옷 만든 사람이 속이잖아요. ‘ 임금님, 최고의 임금님입니다.’ 이렇게 할 때 어린애가 뭐라 그랬습니까? ‘얼레리 꼴레리, 임금님 벌거벗었다.’ 하잖아요. 완전히 까발리잖아요.
지금 정권을 잡고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는 분명히 자기 눈에 보이면서도 입을 함구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도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경우, 그런 경우 그 사람한테는 자기 잘못은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한 사람이나 한 사건이든 간에 어떤 사람이 있을 때 여기서 빨간 조명을 비추든지 파란 조명을 비추든지 노란 조명을 비추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은 다른 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냐 하면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 어린양 되신 예수님 관점에서 세상을 비춰볼 때 사람들은 망상과 허구에 빠져 있는데 그 이유가 뭐냐, 내 몸 위주로 세상을 보니까 ‘진실을 전혀 모르고 있더라.’ 하는 그런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이야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 몸 구조가 아니고 어디로 가야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가서 세상을 다시 보는 이 절차를 우리가 가져야 되겠죠. 내 몸에서 벗어나서 올라갈 때 그때 필요한 관점은 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를 부정하라. 또 비슷한 말로 자기를 미워하라. 또 자기를 죽여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 따르라. 다 같은 이야깁니다. 이런 이야기를 거쳐서 이렇게 갔다 와야 되는데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성립이 안 되거든요. 왜냐 하면 내가 나를 부정해 버리면 나를 부정한 그 자기를 자기는 부정할 수 없고 인정해야 돼요. ‘하나님, 저는 자기를 부인했습니다.’라고 하는 그렇게 구축된 나는 또 내가 인정해야 되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 선에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에 ‘자기를 부인하라’는 명령, ‘미워하라’는 모든 명령, 그 외의 다른 여러 명령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니가 못하는 것을 내가 이런 식으로 너희를 이끈다는 예수님의 자기 계획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부담 없이 봐야 돼요. 내가 이걸 하려고 하면 전혀 성경을 모릅니다. ‘주께서 이런 식으로 나를 조지는구나, 주님께서 이런 계획표 가지고 여기에 맞추어서 나를 인도하시는구나.‘라고 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뭐냐 하면 생명책에 기록된, 그 앞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앞에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영생을 얻고 마지막 심판 때에 천국 갑니다. 생명책에 명단이 누락돼 버린 사람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그 사람은 마귀가 가는 지옥 불에 가죠.
그렇다면 이 성경 본문이 나와 있으면 이 성경 본문을 우리보고 지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생명책에 기록됐다고 우길 게 뻔하기 때문에 이건 말이 안 되거든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너가 앞으로 나의 성령께서 하시는 것을 보면 무엇이 점점 더 수긍이 가고 점점 더 확신이 오느냐 하면 ‘야! 이거 내가 착해서 구원받은 그런 세상이나 그런 내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그 공로, 피 용서를 알게 된 것은 전부 다 생명책에 명단이 기록된 이유 때문에 내가 이런 축복과 은혜를 받고 있다.’라는 것을 알게 만드는 일을 주님께서 일을 벌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생명책의 일을 벌일 때는 우리가 만약에 내가 교회 가서 구원받고자 한다면 누가 필요하냐 하면 ‘내가 교회 가니까 심심하니까 친구들하고 같이 가고 오고 이런 게 필요한데.’ 만약에 우리가 교회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됐다면 내 옆에 내 친구, 내 친척, 예수 믿는 아버지, 엄마, 이런 분들이 필요한 게 아니라 누가 필요하냐 하면 이 생명책에 대드는 마귀에 속한 사람들이 필요해요. 그래서 핍박을 해줘야 되고 환란을 안겨줘야 됩니다. 믿던 사람에게 사기 당하고 믿던 사람에게 도끼 찍혀야 돼요. 저 사람에게 그렇게 투자하고 잘해줬는데 저 사람이 나중에 복음을 버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야 돼요. 왜냐 하면 그렇게 될 때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내가 골라 가는 사람이 아니고 생명책에 인도하기 위해서 반 생명책, 생명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옆에 배치를 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 믿지 말고 말씀 믿게 하는 그러한 사태를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만들어 나가시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옆의 사람들한테 하나의 사람이고 하나의 여자고 하나의 남자고 하나의 어른이지만 성경 해석할 때 우리는 그렇게 보지 말고 ‘생명책에 기록이 안 되었었구나.’라는 성경적 안목으로 우리가 입에서 표현돼 나온 거예요. 비로소 그때에, ‘저것은 인간적인 능력이 아니다. 저것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을 흐리게 만드는 마귀와 연계된 그러한 작당들의 일부다.’라고 평소에 성경책을 안 보면 ‘저 사람이 왜 나한테 감정이 있나.’ 이렇게 나오는데 성경책을 보고 투입되면서 이것이 성경말씀대로 새롭게 정리되는 겁니다. 깔끔하게 매끄럽게 성경 말씀대로 정리정돈이 돼 가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이해됐다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출발점이 어디냐 하면 바다예요. 성 바벨론 성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바벨론 이예요. 바벨론은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만 워낙 강의를 많이 했기 때문에 잊어버리니까 되풀이하면 바벨론은 최후의 제국이면서도 모든 제국에 통합된 제국, 시간적으로는 최후고, 그리고 공간적으로서는 전부 모든 마지막 때의 모든 인간사회의 전부를 통칭할 때 그걸 성 바벨론이라 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여러 번 설명했지만 다시 말씀드리면 느부갓네살이 넘어져서 느부갓네살이 자기를 위해서 만든 금신상이 넘어지면서 그 코가 땅에 닿고 발이 땅에 닿을 때 한 돌이 날아와서 그걸 부수면서 드디어 세상 인류역사는 끝이 납니다. 끝이 나는 그 신상을 발딱 세우게 되면 전체 인류역사를 대표하는 하나의 신상이 되는데 그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나라가 바벨론이거든요. 바벨론이 엎어지면 세상역사고 바로 세우면 바벨론 되고 바벨론이 세워졌다는 이 말은 엎어졌다는 말이 엎어짐과 동시에 드디어 세상은 gameover,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운명과 뭣과 연관돼 있느냐 하면 세상 멸망과 연관돼 있어요. 그럼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바벨론은 누가 무너뜨리느냐. 바벨론은 자체적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내분이 나도 그 내분 자체를 포함해서 바벨론 안의 일이기 때문에, 뭐냐 하면 ‘제국에는 외부가 없다.’ 외부가 있어야 안과 밖이 구분이 되는데 제국에는 외부가 없어요. 죽어도 그 안에서, 살아도 그 안에서, 그 안에서 북적북적, 그 안에서 북적북적 이예요. 이게 오늘날 인간들이 보는 세계관입니다.
인간의 세계관은 우주 끝, 안드로메다에 가도 소용없어요. 그것도 인간의 망원경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외부가 없어요. 우주는 자체적으로 외부를 만들어 내지 우주 바깥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주가 커지는 것이 외부의 마지막 한계점을 계속 만들어가기 때문에 외부라는 게 없어요. 그래서 바깥에서 나가자 하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요즘 사람들 보세요. 바깥으로 구원받으러 가자 안 하죠. 그냥 이 땅에서 성공하고 출세하자 이거 아닙니까? 사는 이유가 뭔데요?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삽니까? 이 안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사는 겁니까? 이 안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외부라는 것이 인간머리에는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외부라는 것이 없는데 성경에서는 주님은 뭐라 하시느냐 하면 ‘나는 너희들이 외부가 없는 세계 외부에서 왔다.’ 이러시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니는 니 아버지는 요셉이고 아버지는 목수고 당신 태어난 것은 베들레헴이고 그러니 베들레헴이라는 시골에서 메시야가 날 리가 없다.’ 다시 말해서 항상 사람들이 보는 것은 외부 바깥에서 보는 것이 아니고 외부 안쪽에 있는 통용되는 세계관과 사고방식 가지고 예수님을 이해하려 한 거예요. 내 몸 중심으로 예수님을 이해하려 한 거예요.
예수님을 믿는다. 그런데 내가 몸이 아프다. ‘예수님, 내 몸 건강하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자체가 예수님을 내 안의 세계로 다시 한 번 발목 잡는 거예요. 내 안으로 끌어당겨서 당신이나 나나 우리 외부세계 생각하지 말고 이 안에만 잘 먹고 잘 삽시다.‘하는 식으로 예수님을 붙잡고 안 놓아주려고 시도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합니까? ’나는 떠나야 한다.‘
이번 수련회 하면서 중요한 것을 많이 했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잖아요. 유대인들도 바리새인들도 제자들도 다 가는데, 샛길로 빠지죠. 예수님께서 죽 가다가 샛길로 빠지니까 여기 베드로가 ‘쿼바디스 도미노’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예수님은 외부로 갔기 때문에 이 땅이 아니고 외부로 갔기 때문에 그 외부라면 나도 따라가야지.‘라고 나선 거예요. 베드로가 따라나서려고 ’내가 목숨 바치고 따라나서겠습니다.‘ 할 때 예수님께서 ’못 온다.‘는 거예요.
자, 여기서 어려운 문제 있어요. 예수님은 이 세상 외부, 바깥으로 나가서 예수님 아는 다른 세계(하나님의 세계)에 갈 수 있는데 왜 인간은 자기 세계에서 예수님 따라서 베드로가 왜 가지 못하느냐 말이죠. 베드로란 인간이 예수님 따라 가지 못하는 이유를 베드로는 평소에 알았어요? 몰랐어요? 알지 못했거든요. 이 말은 인간이 생각하는 외부, 내부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하는 외부, 내부예요.
인간들이 외부라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고 착각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살기 더러운 세상 빨리 죽어서 천당 가야지.’ 그게 망상이었다니까요. 그건 인간이 생각하는 아이디어에서 나온 거예요. 그걸 시간적 이미지, 공간적 이미지라 하는데 인간의 이미지는 항상 외부와 내부, 지금과 그리고 미래, 항상 구분돼 있어요. 그걸 합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으로 그 정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말하는 바깥, 거기서 말하는 미래, 거기서 말하는 천국, 이 모든 것도 막상 베드로가 주님을 따라가 보니까 그것도 말짱 조작된 거예요. 그야말로 마귀가 시켜서 조작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외부가 없다’는 말이 맞아요. 외부를 현재 이 세상 말고 바깥세상이라 해도 그 바깥마저도 외부가 아니고 내부에서 언제든지 상상할 수 있는 외부, 내부에서 만들어 낸 외부에 불과합니다. 그게 뭐냐, 바로 신화의 세계라는 거예요. 13세기부터 14세기에 서양에서 나온 게 이태리 피렌체에서 나온 게 뭐냐 하면 르네상스라는 거예요. 르네상스, 재생, 르네상스란 뭐냐 하면 옛날 기독교 오기 전에 그리스 로마의 신화가 풍부했던 풍부한 신화의 세계에서 인간은 신과 인간, 인간과 신이 서로 주고받으면서 대화 하면서 이 세상을 같이 공유했던 겁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세요. 그 신화의 세계, 헬라 로마의 세계의 신은 우주 밖에 있습니까? 우주 안에 있습니까? 우주 안에 있어요. 안을 관리하는 겁니다. 우주 바깥에는 신이고 뭐고 없어요. 우주가 전부예요. 동양철학에도 우주가 자연의 전부예요. 우주 밖이라는 게 성립이 안 됩니다. 자연 밖이라는 게. 자연 밖에 뭐가 있더라도 그것도 자연의 일부가 돼 버려요. 그만큼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서 사는 거예요.
그림으로 그리면 공이 대자연인데 점이 만약에 예를 들면 ‘나’라고 하면 그런데 이 공이 찌그러지면 나는 어디 붙어있습니까? 바깥으로 튀어나옵니까? 안 튀어나오죠. 찌그러진 이 표면에 하나의 점으로 같이 찌부러지죠. 요게 인간들의 위치입니다. 피조물의 위치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멸망할 때 우리도 같이 멸망의 대상 속에 우리가 일부로 포함이 되는 거예요. 이 점이 무슨 자격으로 튀어나옵니까? 우리는 자격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멸망해도 로켓처럼 멸망하는 걸 보면서 지가 따로 튀어나오기를 사람들은 상상해요. 왜, 사는 게 너무 힘드니까.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한번 물어 봅시다. 사는 것이 힘든 게 나 때문입니까? 남 때문입니까? 누구 때문 이예요? 아무도 몰라요. 그냥 힘들어요. 하나의 예를 들면 한적한 곳에 한 사람이 등산을 합니다. 저 멀리 차가 들어옵니다. 차가 들어오는 겁니까? 사람이 들어오는 겁니까? 차가 알아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안에 탔잖아요. 사람이 나타날 때 반드시 사람은 움직임을 몰고 온다고요. 사람이 차를 몰고 오잖아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우주 안에 점이지만 우주 안에 점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아요? 인간이 알죠. 그런데 우주 안의 하나의 점이고 점이라는 생각을 누가 갖고 있다? 내가 갖고 있으니까 우주가 큰 거예요? 내가 큰 거예요? 나보다 우주가 더 크죠. 왜, 안드로메다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아요? 내가 아니까 아무리 우주가 넓고 커도 다 어디 안에 있소이다? 내 머리 속에 있소이다. 내 머리 속에 보다 더 나간 것은 애초부터 없는 거예요.
자, 그럼 사두개인이나 베드로나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믿을 때 어떻게 믿겠습니까? ‘이미 하늘나라가 있고 거기서 메시야가 왔다.’라는 생각을 갖겠죠. 이건 누가 만들어 낸 생각입니까? 인간이라면, 바리새인이라면 유대인이라면 베드로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생각이다 이 말이죠. 지금 우리 정확한 뜻을 압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 하셨느냐 하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할 때에 예수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아이 훌륭하다. 착하다. 공부 많이 했다.’이게 아니죠. ‘이걸 알게 하신 것은 니 혈육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다.’ 했죠. 여기서 베드로가 오해한 거예요. ‘혈육이 아니고.’란 말을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알려 준 것도 뭐로 전환시키느냐 하면 내가 익히 안다는 것은 이미 내 세계관 속에 이 고백도 내 것으로 이미 들어 와버린 거예요. 들어와 버린 상태니까 그 다음부터 자기는 칭찬받은 상태니까 자기는 구원받았다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는 고난 받고 사흘 만에 부활한다.’ 하니까 ‘주여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지키겠습니다.’ 할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뭐라 했습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했죠.
자, 그 소리 들을 때 베드로가 신앙 고백한 것은 뭐며 신앙고백을 듬뿍 담고 있는 자기 보고 사단이라고 지적한 그건 또 뭡니까? 이 문제를 제가 내가 본 책에는 이걸 문제를 풀어낸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어떤 주석가나 어떤 신학자나 어떤 목사도 내가 아는 이상은 없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겠어요? ‘베드로야, 뭐 좀 안다고 우쭐대지 마라.’ 고 정도로 할 텐데,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믿어주셔서 제가 오버했습니다.‘ 이런 것이 아니고, ’사단아 물러가라.‘ 했다고요.
이게 베드로는 뭐냐 하면 뭘 고백해 놓고 고백한 것이 자기의 주체의 소유된 자기 것으로 삼아버린 거예요. 자기 것으로 삼았다는 자기 것, 내 것이라고 삼은 그것, 그것이 사단이 하는 짓이 그래요. 아무리 좋은 고백이고 아무리 훌륭한 고백이라도 일단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사단의 악마의 것이 돼 버려요. 그러면 뭐냐 그 다음부터 주께서 ‘누구든지 날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날 따라 오너라.’ 그 이야기가 사단 이야기 바로 뒤에 나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못 간다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이걸 염두에 두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께 구원받겠다는 그 모든 그림도, 이미지도 이미 어디 안에 들어올 수 있다? 이것이 나의 일부가 돼 버리면 결국 누가 누굴 믿어요? 나는 내가 끌어 모은 좋은 성경구절 멋진 것 다 끌어 모은 그 자체를 내가 믿게 돼 버려요. 이것이 바로 지금 그 인간을 이러한 우주성에서 인간자체에서 끄집어내주려 하는데, 그만 끄집어 낼 것 없이 내가 알면 된다는 거예요. 십자가도 알고 언약도 알고 예수도 알면 되지, 끄집어낼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이미 알면 주께서 알아서 구원해 주겠지.‘하는 거예요.
그러면 베드로가 뭘 알아야 됩니까? 바로 자기가 세 번씩 주님을 모른다 하고 부인하는 가운데서 베드로가 알게 된 것이 뭐죠? 결국 베드로가 끝까지 몰랐던 것은 십자가에 대해서 뭔지 몰랐어요. 죽는다는 그 개념도 지가 죽는 거와 섞일 수 있는 죽음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샛길로 갈 때 예수님이 죽으러 간다 할 때 ‘나도 따라 죽겠습니다.’ 했잖아요. 이(예수님) 죽음과 이(베드로) 죽음이 같은 죽음이 아니에요. 예수님 죽음과 우리 죽음이 같은 죽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죽어도 안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냥 있어라. 그냥 있어. 그냥 있으면서 만날 상상만 하고 있으란 말이죠. 그러나 내가 성령을 보내서 너희에게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뭐를 지식을 소유한다든지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내 자체가 이 세계, 우주전체가 함께 이걸 박살나고 저주받고 심판 받게 하시는 그 힘에 의해서 같이 무너져야 되는 거예요. 이 땅에서 같이 무너지고 주께서 자신의 성령이 임한 사람,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면 누구의 사람이다? 그 다음부터 나는 나의 사람이 아니고 나는 누구의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람 이예요. 성령이 안 오면 나는 누구 것입니까? 성령이 안 오면 나는 내 것이 되어서 내가 열심히 성경도 배워서 십자가도 알아서 내가 내 것이니까 내가 알아서 나를 구원해야 되는 거예요. 왜, 내가 아니면 누가 나를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믿으라 하면 믿고 행하라 하면 행하고, 성령의 열매 맺으라 하면 맺고 은혜 받고 실천에 옮기라 하면 옮기고 뭐든지 누가 해야 돼요? 내가 해야 돼요.
이게 바로 사람들이 복음을 이해를 못하니까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예요.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예요. 얼마나 열심히 행하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게 말짱 소용없는 거예요. 그건 자기 값어치를 높이고 자기 질을 향상시키는 부단한 노력의 일부입니다. 그냥 자기한테 관리해서 자기가 손대서 자기가 구원해 보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그리스도의 영이 오죠. 그리스도의 영이 오게 되면 그때부터 나라는 것은 애초부터 나라는 것은 나한테 나라고 지적할 수 있는 이것도 반칙이었습니다. 이미 소유권이 ‘나는 나다.’라는 소유권 자체가 마귀가 심어준 것이기 때문에 이것 자체를 부정해야 돼요. 이빨 하나, 귀 하나, 다 내 것이 아니고 값을 주고 산 것이니 주의 것이 된 거예요. 주의 것인데 우리는 만날 주의 것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주의 것이라고 붙여놓고 이걸 다시 또 나의 것을 하나 상정해 놓고 주의 것을 몽땅 들어다가 내 것으로 만들어 버려요.
아~주 강력한 뿌리가 인간의 몸에 있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선 삽질을 해버려요.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용어 하나 나왔습니다. 뭐냐 하면 ‘삽’ 일본 말로 수금포, 삽질로 퍼내는. 여기 모종이 하나 있는데 모종이 흙에 심어있죠. 그러면 삽이 모종과 흙을 함께 파내야 살죠. 바로 인간을 자기 백성을 죄가 키운 참한 열매로 보는 겁니다. 요걸 수금포, 삽으로 푸욱 떠요. 떠버리면 요건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 되겠죠. 뜰 때 요 삽이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입을 막고 모두가 저주아래 있게 함이라. 심판아래 있게 함이라. 여러분이 이것만 알아도 말씀 지키라는 말씀이 나올 수가 없어요.
말씀은 우리 인간의 내 중심의 언어 가지고는 말씀을 이해 못합니다. 그건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내 중심으로 하다 보면 말씀도 오해를 하게 돼요. 주님의 몸에서 나온 삽이기 때문에 여기에 피가 묻어있어요. 피는 말씀의 완성이니까, 피 묻은 삽으로 푹 떠올리면 이것은 뭐냐 이 피는 대신죽음인데 피를 왜 흘려야 되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멋진 재료가 되는 겁니다. 이 어두운 세계에 많은 할 일도 많은데 주님이 삽 들고 오셔서 어두운 세계가운데 삽으로 푹 떠서 그걸 어디로 데려가느냐 하면 천국에 데려가요. 자기 나라 데려가면서 그걸 보면서 자기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한 온갖 미와 영광을 다 받는 겁니다.
이것은 뭘 따먹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었죠. 선악과 따먹은 자는 생명나무를 먹으면 돼요? 안 돼요? 안 먹게 돼 있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자가 생명을 얻는다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 와중에 뭐가 바뀌어야 됩니까? 선악과 따먹은 자가 사라져야 되겠죠. 선악과 따먹은 자가 사라지고 선악과 따먹은 죄를 누가 대신 감당을 해서 그 생명을 거저주신 은혜로 영생을 얻는 사람이 돼야 되겠죠. 그러면 선악과 따먹은 그 모든 죄가 대신해서 흘려진 피와 하나님의 저주가 있어야 되고 버림받은 그 분을 누가 살립니까? 아버지가 그 예수님을 살려낼 때 같이 딸려서 같이 생명의 혜택을 입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전구가 이렇게 있으면 전구를 뽑으면 뒤에 뭐가 나오죠? 전선 나오죠. 주님께서는 그냥 전구 알만 따먹으러 오신 게 아니고 전구를 뿌리 채 뽑아버리면 뭐가 올라옵니까? 전선이 나오죠. 그 전선마저 주께서 가져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보고 뭐라 하느냐 하면 ‘니는 나 보지 말고 니 뿌리를 봐라.’
사람은 자기 뿌리가 누군지 몰라요. 왜 모르느냐 하면 눈이 바깥에 나와 있기 때문에 자꾸 ‘저 사람일까, 나일까,’ 만날 사람만 보니까 자기 뿌리를 몰라요. 사람은 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이지, 언제 ‘주여 제 뿌리가 뭡니까?’ 언제 물어봐요. 뭐 달라고 기도하지, ‘주여 저의 뿌리를 알려주옵소서.’ 이런 기도 해본 적 있습니까? ‘저의 뿌리가 뭡니까? 제가 고생하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이런 것, 그런에 구약에 뿌리가 왔던 사람이 있습니다. 욥 아닙니까? 욥.
여러분, 우리 뿌리는 우리를 모르게 돼 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세상의 점으로 이 세상을 모르는 거예요. 욥이 모르는 거예요. 욥은 ‘내가 왜 고난 받는지, 왜 나는 고난을 받아야 되는 뿌리를 갖고 있는지,’ 도무지 자기가 아는 지혜와 지식으로서는 알 수가 없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나타나야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나타나 보니까 욥의 뿌리는 욥이 아니었습니다. 욥의 뿌리는 고난 주신 하나님이 욥의 뿌리였던 겁니다. 마귀는 욥을 잘못 건드렸어요. 마귀가 욥을 건드린 것은 누굴 건드린 겁니까? 마귀가 하나님을 건드린 거예요. 하나님을 시비거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내가 너희를 위해서 대신 용서하셨다는데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뿌리가 연결돼 있었어요. 이 전구하고 이 전구하고 연결돼 있단 말이죠. 마귀가 이 전구를 치니까 뿌리가 어디까지 연결돼 있느냐 하면 장차 오실 예수님 십자가와 연결돼 있어요. ‘누구야? 내가 대신 용서한 사람을 누가 정죄해? 누구야? 누가 너를 심판하리요.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데 환란과 핍박과 곤고와 어떤 거라도 너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이 말이죠.
바로 끊어지지 않는 연결고리, 이 연결 고리를 우리가 증거 해야 돼요. 주님과 나의 연결고리, 연결고리는 피와 연결되거든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님이 샛길로 빠졌을 때 베드로는 아무것도 모르고 ‘좋은데 가면 나도 따라 갑시다.’ 하여튼 엄마가 시장가면 어린애가 공부 안하고 따라가려는... 친정엄마가 화장실 가면 따라가는 식으로..., 이렇게 예수님이 빠질 때는 뭐라 그러느냐 하면 ‘니가 지금 죽어도 못 온다. 내가 처소가 마련되면, 전선이 연결되면 니하고 쁘라찌 시켜서 그래서 성령 안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 안에 내가 있는 것처럼 그때 성령이 오게 되면 너희들은 내 안에 너희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아버지 안에 너희가 있는 것을 알리라. 성령 안에서 이렇게 뽑아 올릴 것이다.
그러니 이야기가 이렇게 돼 버리면 도대체 우리가 행한다는 게 무용지물이죠.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되겠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 갇혀 있는 세상에서는 살아봤자 갇혀있지 바깥으로 못 튀어나가는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서 거지 나사로가 바깥으로 튀어나갈 생각 안했습니다. 그냥 거지로 살았어요. 그런데 언약의 위력이 거지 나사로로 하여금 아브라함이 받는 복과 전선이 연결돼서 거지는 죽어서 아브라함 품에 안기고 그 전선이 닿지 않는 부자는 그 땅에서는 출세했는데 세상에 물 한 방울 없는 물 값이 그만큼 비싼지 몰랐지, 이 물을 마음대로 마시니, 천국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지옥가면 국물도 없어요.ㅎ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아이쿠, 그 흔한 물을 사랑의 하나님이 주지.’ 하는데 주님께서는 물조차도 뿌리를 탐색하는 용도로 쓰는 거예요. 지금 주시는 은혜는 안 믿어도 주시는 은혜는 노아의 희생제물 때문에 우리가 이런 물이나 햇빛을 얻고 오늘도 비가 오게 되죠. 노아 은혜 다 철수하고 다 끝나버리면 세상은 같이 망해버리고 자체가 지옥이 돼 버립니다. 옛날에 그렇게 흔하던 햇빛, 흔하던 공기, 흔하던 물도 한 방울도 주지 않고 저주의 불꽃 속에서 고생만 하게 됩니다. 그 전선의 주인공이 이미 2천 년 전에 왔어요. 그 당시 사람도 못 알아봤고 후대 사람도 못 알아봅니다.
예수님의 영을 받게 되면 세상이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면서 ‘내가 이미 주님의 것으로 되었구나,’ 주의 영이 임하면 도대체 내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죠. 항상 우리의 뿌리, 우리의 근본을 보는 쪽으로 살아야 됩니다.
자, 그렇게 되면 바다라는 의미가 나옵니다. 바다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죠. 성령이 임하니까 베드로는 자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 했죠. 지 원하는 길은 없어요.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뭐라 하시느냐 하면 ‘우리가 절망하고 있다.’ 절망이 줄어 희망이 있어요. 절망 속에 들어가야 비로소 희망이 보이지 희망 찾다가는 절망만 남습니다. 꼭 반대가 되죠.
이 절망이라 하는 것은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다.’할 때 외양간을 지을 때는 뭐를 희망 삼습니까? 외양간에 소가 가득 차는 희망이죠. 그러면 외양간을 만들 때 이렇게 소가 가득 차는 걸 상상한다면 그 외양간에서 나온 희망과 일치되려면 여기 소가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그러면 인간의 희망이라는 것은 현재 자기가 소속해 있는 기존에 존재하고 있는 이 시점과 같은 동질의 것이 나타날 때 그걸 희망이라고 본다 이 말이죠. 내가 지금 원하는 것과 같은 동질의 것, 외양간을 지어놨으면 소가 있을 게 아닙니까? 소가 없는데 외양간을 왜 짓겠어요. 그러니까 이 외양간 지을 때 기대했던 그 내용의 질과 진짜 자기한테 주어질 거라 예상되는 그 질과 같은 질일 때는 그걸 희망이라 한다 말이죠. 어느 인간이 외양간 지으면서 ‘소가 하나도 없게 하옵소서.’ 그런 인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박국 3장에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뭐한다? 나는 기뻐한다. 이게 바로 희망이거든요. 외양간에 소가 없다는 말은 외양간을 지을 때 절망입니다. 나의 기대를 절망케 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가려 졌던 하나님의 숨겨놓은 진짜 세계, reality, 진짜 현실, 그것은 하나의 기쁨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나는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한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임하고 일하실 때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 절망이죠. ‘참새는 집이 있지만 나는 참새보다 더 못해.‘ 이건 하나의 절망으로 보이거든요. ’그리고 나는 고난 받고 죽는다.‘ 죽으면 절망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로 되받았습니까? 이 모든 일이 표적인데 나라는 존재가 니하고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거죠. 나는 이 세상에 제대로 현실을 보여주려고 왔는데 그것은 바로 소위 인간들이 ’희망, ’희망, ’희망, 때문에 정작 희망이 마귀로 인해 가려 졌던 거예요. 희망 없는 인간은 없어요. 인생이란 게 뭡니까? 희망을 먹고 살아요. 희망은 나의 희망을 포기할 수 없어요. 인간은 눈만 뜨면 희망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희망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따라서 항상 모든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는 만반의 준비만 하면 돼요. 지가 알아서 절망하지 마세요. 괜히 그것도 트릭 쓰는 것이고, 맘껏 희망을 가지세요. 손자 키우면 나중에 대통령 되는 줄 아시고...ㅎ그 절망이 절망으로 인하여 정작 주님께서 우리가 기대해서 얻은 게 아니라 주께서 기대하는 건 따로 존재한다는 것, 따로 우리에게 마련해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월등하게 더 좋고 더 기쁘고 더 행복한 것을 지금 다 준비해 놓으신 거예요. 그것을 우리는 미처 알지 못하고 현재 내가 생각하는 동질의 것을 내놓으라고 자꾸 윽박지릅니다.
내가 지금 행하는 것도 다 노리고 하는데 ‘그 노리는 것을 달란 말이야, 이 예수님이야.’ 이런 식으로 윽박지르죠. 그러면 주님께서 ‘뭐, 또 죄 지을 것 없나, 마음껏 또 윽박 질러봐. 그 윽박 안 지른다 해서 우리가 의인되는 것 아니니까 원 없이 윽박 질려봐.’ 그리고 실제로 주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비교해봐라. 그것은 바로 나의 절망, 나의 희망이 좌절되는 가운데서 비로소 빼꼼이 얼굴을 내미는 희망 같은 것이 주님께서 준비된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목 베인 영혼들이 기쁨으로 구원을 받는다 하죠. 참, 이게 얼마나 역설입니까?
이 목 베인다는 것, 세례 요한이 죽으면서 세례 요한 본인은 좋을지 모르지만 일가친척 보세요. 참담합니다. 일가친척, 아는 사람, 세례 요한 부인, 부인은 없었죠. 세계 요한 동생들, 심정이 어떻겠어요? 지는 혼자 종교에 탐닉해서, 종교에 빠져서 처자식도 팔아버리고 혼자 까불다가 죽는구나. 이렇게 해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절망한 본인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어요. 성령에 의해서 이것이 내 몸 같으면 걱정 하겠는데 내 몸이 아니고 이미 주님의 몸으로 넘겨진 이상은 그런 걱정을 내가 할 자격이 못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할 때에 뭐를 요청하느냐 하면 짐승이 올라와야 돼요.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인간에게 죽은 것이 아니고 짐승에 의해서 죽어간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땅에 계시죠. 땅에 있는데 이 바다는 땅을 위협합니다. 바다에서 드디어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오는 것을 허락을 해요. 그러면 이 땅은 누구의 세력 속에 들어가느냐 하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세력 속에 들어가요.
요 점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이 성경 말고 여러분들이 아는 정치적 용어를 동원해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정치라 하는 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가, 내부에서 주어지는가, 이 두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부에서 주어진다는 말이 많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내가 대통령이 있기 때문에 내가 복종합니까? 내가 내 마음 안에 대통령을 원하고 있느냐, 내 마음 안에 ‘나를 위해주고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월등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하는 내부의 정치적인 야심이 결국은 외부에 정치인들을 요청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정치용을 뭐라 그러느냐 하면 존재용이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는 거예요. 정치가 있다는 것은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 나를 주관이라 하고 정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한 객체, 또는 객관으로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정치라 하는 것은 결국 정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정치라도 누구를 위해서 정치를 할 때 가장 기분 좋다? 바로 옆 사람이 아니고 저 사람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내가 직업 바꾸면 직업 바꾸는 직업마다 정치법이 달라져서 내가 바꾸는 직업에 유리하도록 그렇게 모든 법조항이 달라지기를 원하는 겁니다. 나라에서 어떤 법을 시행할 때 전에 가졌던 직업 같으면 시위를 하고 데모를 하겠는데 지금 직업을 바꾼 상태에서 보면 얼마나 좋은 대통령인지, 옛날에 목축업을 할 때는 대통령을 죽이라고 서울 시청에서 데모하다가 지금 말 타고 난 뒤에는 소고기를 폭리를 해도 아무소리 못하는 대통령이 얼마나 좋은 대통령인지, ‘역시 대통령은 훌륭해.’
결국 정치라 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위해서 항상 편리하다 말이죠. 결국 이것은 그런데서 사람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잘 들어 보세요. 내 야심에 합한 내가 꾸며낸 정치이면서도 정치를 뭐로 표현하느냐 하면 나 말고 나보다 더 넓은 세계에서 나한테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데아 세계, 초월 세계에서 이 세상에는 도덕법이 있고 도덕법을 위해서 여러 가지의 변화되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초월 세계, 오직 신만 사는 세계, 완벽한 세계가 이 땅의 변화하는 인간의 세상과 만날 때는 중간에 하나님이 있을 거라 하는 것이 도덕이죠. 도덕이라 하는 것은 정의롭고 평등하고, ‘평등을 통해서 본다.’라고 사람들은 이걸 객관화 시켜요. 객관이라 하는 것은 눈에 띄게, 눈에 보이게, 내가 만약에 내 딸이 집에 가는데 누가 악한에게 돈을 빼앗겼다. 또는 내 아들이 고등학교에 갔는데 얻어맞았다. 그럴 때 갑자가 뭐를 요구합니까? 나라에 뭘 요구해요? 정의와 사랑과 복지를 요구하겠죠. 이렇게 집에 불이 났을 때 그걸 전부다 나라가 보상해준다든지, 복지를 요구하겠죠.
인간의 모든 정치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누가 요청한다? 내가 요청해 놓고 막상 정치에 대해서 필요한 것이 있거든 ‘외부에 나보다 먼저 있었던 너희들이 나에게 먼저 해 줘야 돼.‘라고 그걸 객관화 시키는 거예요. 뭔 뜻인지 이해되겠습니까? 그러면서 이 정치가 훌륭한 대통령, 훌륭한 정치가이기를 바라죠. 그거 앞, 뒤가 안 맞는 이야기예요.
자기가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봐 놓고 마치 거짓말하기를 ‘ 나보다 더 넓은 세상이 내 바깥에 있다.’라고 우기는 겁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공기업 하나 인사이동 있으면 뭐라 합니까? ‘어이그, 대통령 저희끼리 다 해먹어라.’ 욕하잖아요. 그런데 다 해먹는데 그 중에 우리 삼촌 하나 있으면 ‘역시 대통령은 좋은 대통령이야,’ 이렇게 생각한다? 생각 안 한다? 만약에 농협장이 부정선거라 해놓고 그 농협이 어느 날 와서 ‘농협에서 보상금 많이 나왔습니다.’하면 지 보상금 나왔다고 좋아하죠.
그래서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결론부터 이야기할게요. 이스라엘은 성경에서 뭐죠? 군대죠. 이스라엘=군대 이스라엘이 군대라 하는 것은 성경 말씀에 분명히 있죠.(출 7:4) 그러면 이스라엘이 군대 되기 위해서 세상은 움직이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군대라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우리의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이스라엘 군대와 전쟁하기 위해서 군대로 조직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작용합니다.
그러면 말씀 때문에 세상도 말씀을 따라가 줘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군대로 조직되려면 이스라엘 왕이 누굽니까? 보이지 않는 왕이 누구예요? 여호와 하나님이죠. 이쪽의 군대는 왕이 누가돼요? 역시 보이지 않아야 돼요. 그러면 땅에서는 인간이 해봐야 보이는 왕들, 땅에서 나온 인물이죠. 그러면 땅에서 안 나오는 인물은 어디서 나와야 돼요? 바다에서 나와요. 왜, 땅에서 나오는 것은 전부 다 객관화되기 때문에, 내가 요청하게 되기 때문에, 인간의 왕은 인간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러면 이스라엘이 군대가 아니라면 그 말은 맞아요. 어느 대통령도 다 누구 집 아들 아닙니까? 이명박, 이 씨 집 아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 집 아들입니까? 멜기세덱의 반차예요. 다시 말해서 이 땅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어요. 그러니 여기에 맞서는 땅의 세계, 악마의 세계는 임금, 왕은 누가 돼야 돼요? 이 땅의 혈육과 관계없는 인물이 돼야 돼요. 그 인물이 어디서 올라옵니까? 바다에서 올라오게 되는 거예요. 바다에서! 그러니 이런 안목으로 세상을 보려면 성경을 통으로 쫙 읽고 있어야 돼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어야 됩니다. 10분 쉽시다.
가락교회120119-요한계시록18장 (외부는 없다)31강b-이 근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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