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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110. 예레미야 31:27-30 / 아버지와 아들 관계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110. 예레미야 31:27-30 / 아버지와 아들 관계

정인순 2011. 5. 11. 21:38

 

 

아버지와 아들 관계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1년 5월 1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27-30

(렘 31:27,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렘 31:28, 개역)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 것 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1:29, 개역)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렘 31:30, 개역)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유다 나라가 포로 잡혀가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인간상을 소개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농사지으시는 분처럼 짐승의 씨와 인간의 씨를 파종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새로운 언약이 지상에 펼쳐지게 됩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언약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인간상을 파종하십니다.

기존의 사람들이 그동안 언약에 대해서 큰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즉 언약으로 인해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가릴 수 있다고 여긴 것입지다. 자기에게 주어진 이 모든 수모와 환란과 어려움들은 다 조상들의 죄가 자기대로 흘러 들어와서 생긴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자신들의 혈통과 민족을 지켜주기 위한 언약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오해로 인하여 그들은 지금 이방나라로 포로잡혀갈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파종되는 인종은 이런 핑계나 변명을 하지 못할 자들이 될 것입니다.

부모 죄 때문에 자신들이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자신의 죄로 인하여 자신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눈 뜨게 되는 상황으로 돌입하게 됩니다. 이는 곧 ‘인간이 죄를 짓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죄가 인간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차원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정체를 모릅니다. 왜 자신이 힘든 것으로 남 탓으로만 돌리려 하는지 그런 본성이 왜 자신의 근원에서 나오고 있는 지를 모릅니다. 그동안 조상들의 죄 탓을 하는 자들이 직접 자신의 죄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지는 시대에 들어오게 되면 결코 한 시도 죄책으로부터 탈피하지 못하는 신세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동안 유다 나라가 그만큼 살아온 것도 조상들이 죄를 덜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죄에 맞서서 개입하시는 언약 때문에 은혜로 유지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성마저 잊게 되면 남은 것은 여전히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냉험한 현실 뿐입니다. 즉 자신의 잘못을 모르겠는데 세상 사는 것은 힘들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행을 맞이한다는 것이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새롭게 주입되는 언약에 의할 것 같으면 그 원인이 밝혀집니다. 인간은 결코 자신의 정신력이나 선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따 낼 수 없는 입장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됩니다. 요한복음 6:44에 보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쪽에서 시도하는 모든 것을 차단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가 인간을 만들어내었다는 사실을 징벌원칙을 통해서 새롭게 알려주시려는 겁니다. 곧 죄없는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종전이 오해같으면 혈통이 우선이고 죄는 자기네들이 하기 나름이지만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입장에서 뒤돌아보면, 혈통이 기본이 아니라 그 깊숙한 곳에 죄가 일관성 있게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새언약 시대에는 그 죄에 접촉해야 합니다. 죄의 자리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구원 중심이 아니라 언약 중심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인간은 자기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마치 물병을 들고 있는 자아가 그 물병속에 자아가 들어가는 식입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해내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예수님에게 나올 수 없는 겁니다. 자신의 죄의 근본을 접촉하지 아니하면 인간은 꼭 남 핑계대로 남 탓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나는 잘해 보려고 했는데 남들이 나로 하여금 선하게 행동 못하도록 강제로 막았고 또 그런 사태를 유발한 책임은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있습니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진정한 죄란 예수님을 미워하고 비난하고 원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새언약 시대에서는 더 이상 이런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 아버지께서 직접 그 인간을 예수님께서 끌고 오시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켜가면서 그 일을 해내십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우리 속으로 들어가기를 해내십니다. 그 자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십자가로 끌고 가십니다. 예수님의 자리인 줄 알았던 그 십자가가 실은 우리의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맨날 나의 의로운 자리에 서서 메가폰 들고 주님쪽으로 향하여 “믿씁니다. 믿씁니다‘만 남발합니다.

그런 식으로 위선은 결코 ‘아버지께서 예수님 쪽으로 이끄시는’ 손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위선이요 거짓 믿음일 뿐입니다. 그렇게 믿게 되는 예수는 존재하지 않는 예수입니다. 우리는 아침에 눈만 뜨면 자기 잘난 맛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매일같이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원망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는 식이 됩니다. 차라리 십자가 피에 풍덩 잠겨서 자신의 근본 죄인인 것으로 아는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가짜 “믿씁니다”에 진저리 내시는 주님을 우리가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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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오용익

110강-렘31장27-30(아버지와 아들관계)11051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1장 27절에서 3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02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31:27-3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 것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하나님께서 마치 밭에 씨를 뿌리듯이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린다고 하는 겁니다. 씨를 뿌릴 때 사람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짐승을 그냥 만드셨구나.’ 이렇게 생각이 들기 쉬운데 그 뒤의 말, 뿌리기는 뿌리는데 사람과 짐승과 더불어 무엇이 같이 뿌려지느냐,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이 뿌려지는 겁니다.

 

사람이 아쉬워서 씨를 뿌리고 짐승이 없는 것이 안타까워서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자기 땅에서 뽑아 낼 때도 하나님의 언약기준대로 뽑았듯이 이제 그들을 심는 것도 과거 언약과는 다른 원칙을 그 땅에 세우기 위해서 언약을 심는 방편으로 짐승의 씨와 인간의 씨를 뿌리는 겁니다.

 

새로운 창조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나 여기 있는데 하나님은 저한테 뭘 해줄 겁니까?’라고 자기 위주부터 먼저 출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새롭게 일을 하시는지를 모르고 옛날식으로 자꾸만 생각하는 겁니다.

 

현재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망하는데 망하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께서 언약 때문에 우리를 이 땅에 만들었다는 생각을 안했기에 망했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게 했구나.’ 라는 생각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못하고 ‘우리가 이렇게 살기가 힘든데 너무나 혹독한 시련이 아닙니까? 이것은 다 조상들의 죄 때문인 것 같은데.’ 라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분간도 못하고 남 탓으로 돌리는 그런 사람들이 결국 약속의 땅에서 다 뽑힙니다. 잡초 뽑듯이 뽑히지요.

 

하나님께서 꼭 농사꾼 같아요. 열매 없는 것은 뽑아내고 열매 생길 것을 새로 심어버리는 파종을 하는데 그것이 짐승의 씨와 사람의 씨를 거기에 뿌린다는 말이지요. 뿌릴 때 언약이 같이 뿌려지지요. 전과 같은 실패가 없는, 전처럼 언약을 안 지켜서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그렇게 언약을 위해서 그들을 심어 놓은 겁니다.

 

그런데 그 언약을 심어 놓았는데 본문 31장 29절부터 보면 “그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언약을 위해서 새로운 인간이 심어진다는데 그 언약이 뭐냐, 죄와 관련되어 있고 그 죄와 죽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드러내는 그런 언약이 작용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예를 들었느냐 하면,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아들의 이가 시다.’ 이것이 좀 의아스럽지요. 아버지의 이와 아들의 이가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습니까?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지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는다고 해서 갑자기 저쪽 방에 있는 아들의 이가 ‘갑자기 왜 이가 이렇게 시리지?’라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 경우가 없는데 새삼 하나님께서 ‘얘들아, 아버지가 신포도 먹는다고 해서 아들 이가 신 것이 아니란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듣는 유다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도 당연히 그런 것은 알고 있어요. 왜 하나님은 그것을 자꾸 거론하십니까?’라고 물으면 그 당시 유대백성들이 ‘아버지가 포도를 먹었는데 아버지 때문에 우리의 이가 시다.’ 하는 식으로 핑계를 대는 생활을 해 왔던 겁니다.

 

그게 뭐냐,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게 된 것은 우리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우리 부모의 죄가 우리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조상 잘못만난 탓이다. 조상 잘못 만나서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산다.’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해석해 왔던 겁니다. 그런데 새롭게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리면서 언급하는 것은 그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이제 그것을 제대로 수정합니다.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라는 식으로 언약이 새롭게 해석되어서 그런 현실이 앞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하나님께서 일을 제대로 하신다는 생각이 듭니까, 아니면 뭔가 낌새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어갈까요?

 

옛날에는 내가 뭔가를 잘못해도 ‘이것은 조상이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벌 받는다.’는 식으로 핑계 댈 구석이 따로 있었는데 앞으로는 전혀 그렇게 비빌 언덕이 없다는 냉혹하고 비정한 시대로 접어드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과 관련되어서? 죄와 관련되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하는 이유가 뭐냐, 전에는 아버지 닮은 아들, 아버지가 그러니까 아들도 그렇다, 라고 책임을 아버지에게 지울 수 있는 혈통적인 관계가 기본이 되어 있고 기반이 되어 있었는데 이제 새로운 언약에서 ‘자기가 지은 죄는 자기 때문이다.’라고 했을 때는 결국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 혈통을 받은 것이 아니고 죄를 받은 것이라는 낌새를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ㅏ 언약을 주신 것이 아버지잘못으로 핑계 대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희는 아버지 행세하는 그런 것만 보이지? 그런데 아버지도 껍데기도 너도 껍데기에 불과하고 너와 아버지가 같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같은 종류의 죄의 모종에서 싹이 나오듯이 그 죄는 아버지가 지은 죄와 동일한 죄의 바탕위에 우리가 태어났다.’는 겁니다.

전 같으면 아버지가 잘못해도 나는 잘못 안 할 수 있다, 이것이 성립이 되고 변명이 될 수 있는데 지금은 ‘내가 죄를 짓는다.’가 아닙니다. ‘앞으로는 내가 신 포도를 안 먹어야지. 죄를 안 지어야지.’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내가 죄 짓는 차원이 아니고 죄가 나를 만들어낸다는 차원의 시대에 돌입된 거예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이걸 몰라요. 학자들도 모르고 목사들도 몰라요. 하나님의 언약을 모릅니다. 사람들보고 우리 죄짓지 말자는 거예요. 세상에, 죄짓지 말자고 해서 죄를 안 짓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그런 거예요.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우리를 만들어냈다니까요.

전에도 그랬었어요. 죄가 조상을 만들어냈는데 자꾸 조상들이 생각한 것은 뭐냐, ‘내가 죄지은 것은 죄가 나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조상 죄 때문에 내가 대신 벌 받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핑계와 책임을 조상에게 넘겼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핑계가 통하지 않는 시대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이제는 조상핑계 그만 대고 네 자신 속에 들어가 보라는 겁니다.

 

여기서 주께서 원하는 것은 ‘네 속에 네가 들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부모 탓하지 말고 이웃 탓 하지 말고 네 속에 네가 들어가 보라.’ 마치 이것은 자기가 들고 있는 물 병속에 자기가 들어가는 식이예요. 불가능하지요. 자기가 들고 있는 물병 속에 어떻게 자기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결국 불가능한 거예요. 죄 안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줄기차게 따라온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유다나라가 이런 조상 탓을 했던 것은 출애굽기 20장 5절, 6절에 보면 십계명에 이런 것이 있어요.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것을 가지고 혈통이 우선이고 죄는, 죄짓고 안 짓고는 그 다음문제라고 해석해 온 겁니다. 그런데 그런 시험기간은 끝났어요. 과연 우리 조상이 죄를 안지어서 은혜가 우리한테 천대까지 왔었는가, 하는 그 문제에 있어서 인간은 죄를 안 지을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역사가운데서 다 들통이 나서 이미 유대나라가 망하는 입장입니다.

유대나라가 망하고 이스라엘이 망하는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소급해서 출애굽의 십계명을 언급해 보면 결국 이것은 사람이 죄를 다룰 수 있는 입장이 아니고 죄가 처음부터 인간을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동안 우리가 죄 안 지은 적이 없는데 그래도 우리가 조상의 긍휼을 입었던 것은 우리 조상이 착한 일을 한 덕분이 아니라 죄 속에 개입된 하나님의 그 긍휼 덕분으로 그들은 그동안 생존했고 살아온 것입니다.

 

오늘날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해 주느냐, 사람들은 인생살이 하고 또 교인들은 교회 다니지만 늘 잘못되게 생각하는 것이 뭐냐,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는 그 정신력과 우리의 선함으로 생존하는 것처럼 오해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댈게요. 요한복음 6장 44절에 보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나라에 가고, 구원을 받고 긍휼을 받는 것은 아버지께서 자기 사람을 예수님께 보낼 경우, 곧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예수님께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수 없는 거예요. 인간의 정신력? 인간의 선함? 인간의 착함? 이것은 하늘나라와 아무 상관없는 겁니다. 아버지한테 이끌림을 받지 못하면 그 자체로 여전히 죄가 지배하고 죄 아래 있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6장 44절에 따르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그 누구라도 예수님께 올 수 없다.’ 예수님께 올 수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면 저주받는 거예요. 죄 속에 있는 겁니다. 죄 속에 있는 본인이 죄 안 짓고자 한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가고 예수님께 오는 방식은 하나님께서 창세 이후에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창세 이후에 인간 자력으로, 인간의 정신력으로, 착함으로, 구제함으로, 봉사함으로, 헌금함으로, 전도함으로, 구제함으로, 예배드림으로, 성경공부 함으로, 그런 식으로 아버지께 간, 주님께 간 경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 믿는 사람은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어요. 다 가짜들입니다. 그 예수는 만들어낸 예수예요.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오게 해 주지 아니하면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을까, 이러한 원칙이 담겨 있는 채로 예수를 믿게 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는 다 가짜입니다. 그것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가 허수아비 예수 만들어놓고 믿는 겁니다. 그 이유를 대는데 그 이유가 뭐냐, 인간은 죄가 만들어냈기에, 죄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언약 때문에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은 자력으로 그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디서 왔느냐?’ ‘하나님에게서 왔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면 되지.’라고 쉽게 생각하는데 어디서 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왜 이 땅에 태어나야 했는가?’ 어디서 태어났는가가 아니고 ‘왜 태어나야 했는가?’ 그것은 죄를 알아서 언약 알도록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죄를 알아서……, 죄를 모르고 언약을 아는 경우는 없어요.

죄를 알아서 언약 아는 거예요. 쉬운 말로 하면 내 죄를 알아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거예요. 아버지가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간추려서 정리하면, ‘인간은 왜 이 땅에 피조물로 태어났는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뭐냐, 내 중심이 아니고 내 구원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입니다.

 

예수님이 죄 용서하신 분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죄 속에 있는 존재로서 태어나야 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전의 사람들은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해석한 거예요. ‘우리 조상이 잘못되어서 내가 복을 못 받는다. 조상이 잘 했으면 내가 복을 받을 텐데, 나는 잘못이 없는데 조상이 죄를 짓고 잘 못해서 그 징벌이 대대로 내려와서 나도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산다.’고들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어떤 생각을 붙이게 되느냐 하면, ‘나도 맘먹고 죄 안 지으면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존재.’라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조상이 죄 안 지었다는 말이 아니에요. 조상 죄 때문에 자기가 고생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조상 죄를 차단시키고 이제는 조상 죄 없이 네가 한 번 살아봐라.’ 하면 조상 탓 하던 본인이 조상 죄를 되풀이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요.

 

그래서 오늘 말씀은 뭐냐, 네 속에 네가 들어가야 되는데 우리 힘으로는 우리 속에 못 들어가요. 우리가 든 병속에 내가 못 들어간다고요. 그 못 들어가는 것을 주께서 이제부터 들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자꾸 우리는 우리 속에는 안 들어가니까, 그러면서 전부 다 조상이 문제고, 남편이 어떻고, 아내가 어떻고, 동창생이 어쩌고, 전부 다 남 탓이에요.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원피스 입고 있는 소녀의 기도의 그림처럼 ‘하나님, 지금 배가 고파요.’ 하면 하나님이 그럽니다. ‘어쩌라고? 어쩌라고! 너 배고픈데 그걸 뭘 어쩌라고?’ 내가 배고프니까 날 배부른 곳으로 데려다 달라는 것이 우리 뜻이라면 주님의 뜻은 네가 네 속에 들어가라는 거예요.

 

그 배고프다는 소리가 어디서 나왔는지, 바로 그 소리가 죄에서 나왔거든요. 과연 배고프다고 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이 있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안 들어갔기 때문에 나 배고픈 것은 하나님이 책임져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조상 탓 하다가 이제는 누구 탓마저 하느냐, 하나님 탓까지 하는 거예요. 다 하나님 탓이라는 겁니다.

이번 오는 토요일에 우리교회 집사님이 개업을 하는데 개업을 하게 되면 ‘그저 이 가게 잘 되게 하옵소서.’ 하면 ‘어쩌라고!’ 장사를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 속에 들어가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부여하는 겁니다. 도대체 내 죄가 어디서 나오는지를 보자는 겁니다. 내 안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교신자고 일반 사람들입니다.

 

내 안에 내가 주인이 아니고 죄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죄가 나의 주인이기에 나는 뭘 해도 입만 벌리면 불평이고 원망입니다. 하나님이 날 배신했다는 이야기고 세상이 날 배신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난 아무 잘못이 없는데, 나는 이런 고생할 입장이 아닌데 하나님이 조치를 잘못하고 일을 잘못해서 내가 당한다는 겁니다.

그 예수님에 대한 원망과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 호리병 같은 거기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주님께서 조상 탓을 하는 이런 사람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기에 내 이가 시리다고 이런 소리 하지 말고 이제는 네가 직접 신 포도를 씹어 봐라. 얼마나 신지. 이제는 네가 행동을 하게 되면 그 말씀과 분명히 다를 것인데…….’

 

우리의 모든 행동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다릅니다.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가 됩니다. 우리는 핑계 대기를 ‘마음속으로 했는데요.’라고 나옵니다. ‘오른 뺨 때리거든 왼 뺨을 내놓아라.’ 하면 ‘미쳤습니까? 왜 내가 왼뺨을 내놓습니까?’ ‘오리를 가지고 하거든 십리를 동행해라.’ ‘돌았어요? 내가 왜 그렇게 해야 되는데요? 내가 뭐가 답답해서.’

평소에 소위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이것이 자연스럽게 죄가 나오는 생활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거기에 하나 붙여야 돼요. ‘죄는 죄요.’ 자연스럽게 살면 자연스럽게 죄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유별나게 살면 유별나게 죄가 나오고. 죄 안 짓고 자연스럽게 살면 자연스럽게 죄가 나오지요. 독한 방구도 있지만 그냥 뀌어도 방구는 다 방구지요.

걸레는 빨아봐야 걸레입니다.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빨아봐야 걸레밖에 안 되는 그 걸레를 웨딩드레스로 만들어주는 작업을 이제 하시는 거예요. 그 작업을 하기 위해서 유다와 이스라엘은 새로운 하나님의 언약에 접촉되는 겁니다. 철저하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원칙에 따라서 그들은 쓰이게 되는 겁니다.

 

개업을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뭘 하든 그 현장에서 그 동안 한 번도 자기 내면에 들어가지 보지 않은, 늘 자기에게 그런 척 하고 아닌 척 하고 남에게 비추는 용도, 남에게 전시하는 용도의 자아를 다듬고 주님 앞에 비추기 위한, 내놓기 위한 위선적인 자아에 몰두하고 다듬으면서 생활하다가 이제는 그것도 지쳤어요.

‘주여,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내팽개칠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들어가지 못한 우리 자아의 본 자리에 집어넣습니다. 거기가 십자가자리예요.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만이 졌다고 생각하지요? 우리가 자석처럼 끌려들어갈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자리만이 아니고 구원받을 성도의 모든 성도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 십자가의 자리가 내 자리는 아니고 예수님만의 자리라고 얼마나 우겼습니까?

 

우리는 그 십자가의 자리가 내 자리가 예수님의 자리기 때문에 그냥 옆에 서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멀찍이 바라보기만 하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세 번씩 붙여가면서 ‘믿습니다.’를 남발했어요. 주께서 ‘믿지 말고 이리 오너라. 안 믿어도 되거든. 믿지 말고 이리 와. 그 자리, 네 자리에 서서 믿는다고 하지 말고……, 그 믿는다고 소리할 때 튀는 침 맞는 것도 이제 너무 싫다. 그 소리는 싫고 믿지 말고 여기 와서 합류해라.’

그럴 때 ‘아버지가 이끌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내 자리에 올 수 없다.’가 말이 되는 겁니다. 우리 속에 우리를 집어넣는 이 방식은 이미 에스겔서 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바퀴 안의 바퀴’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퀴 안의 바퀴, 타이어 안의 타이어. 유대인들이 언약은 우리 밖에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십계명 돌 판은 밖에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새 언약이 되면 우리 밖에 있는 언약이 우리 안에 들어와 버려요. 밖에 있는 십자가가 우리 속에 침투해 버린 십자가가 되어버리면 이제는 밖에서부터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내 안에서부터 구원하기 때문에 주께서 멱살을 쥐고 내 안에 있는 십자가 자리에 나를 당겨버리면 ‘내가 이정도로 죄인이었나.’ 하고 날마다 뭔가를 ‘주시옵소서.’할 입장이 못 될 만큼 엄청나게 나밖에 모르는 나를, 도무지 몰랐던 낯선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안쪽에 들어가면 아침에 눈만 뜨면 마귀한테 지시를 받고 예수님 원망하려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요. 온갖 무기들, 전투비행기, 미사일, 기관포, 다 쌓아놓고 ‘오늘은 미사일을 주님께 쏘아볼까? 바주카포를 쏠까?’ 하는 식으로 주님을 저격해서 죽이고 싶은 것이 가득 쌓이고 한데 모여서 그게 ‘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 ‘나’가 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에요. 각각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가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을 보고 ‘당신은 1미터, 1킬로’라는 식으로 하면 기분 나쁘잖아요. 단위로 붙여서 말하면 기분 나쁘다고요. ‘내가 무슨 1 미터냐.’ 한다고요. 사람도 단위가 되는 거예요. ‘나는 한 사람이다.’ 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주님 앞에서 아담 안에 복합된 것은 하나가 되는 거예요. 주님 하나, 우리 하나, 그것뿐입니다. 주님 하나, 우리는 둘, 이런 것은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 앞에서 우리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주께서 새 언약으로 새로운 인간을 파종해 버립니다. 그 새로운 사람의 특징이 뭐냐, 그 사람 속에 남 탓 할 수 없는 이유가 이미 내 안에 담겨 있음을 새 언약의 완성인 십자가 앞에서 고백하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아침에 눈만 뜨면 ‘주여, 집에 돈 떨어졌습니다.’ 주께서는 ‘어쩌라고!’ 돈 떨어졌다고 해놓고 차마 말은 못하지만 뒤에 붙는 것이 있어요. ‘주님께서 저에게 한 조치는 잘못한 조치입니다.’ 그 원망이 뒤에 딱 붙어 있지요. 속에 그게 붙어 있다고요. ‘주님이여, 자비로우신 하나님 같으면 내가 원망을 안 하도록 해 주셔야지. 내가 그래도 교회하고 목사인데 자꾸 저한테 걱정을 끼칩니까? 주님은 언제 정신을 차리시겠습니까?’라는 이것이 우리의 근성이 되어 있어요. 이게 바로 죄 아닙니까?

언약을 모르고 자기가 언약이고 자기를 위한 언약인줄 알고 아직도 그런 행세를 하고 있어요. 주께서는 경상도 말로 ‘우짜라꼬! 네가 배가 고프다고? 그래 우짜라꼬! 배고픈 너 배부르라고 태어난 것이 아니고 인간 자체가 이 혈통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 죄가 인간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증인으로서 너는 이 땅에 태어나야 했다.’ 그 말이지요.

 

죄를 아는 즐거움, 죄를 아는 행복이 곧 성도의 행복이고 존재의 가벼움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인생이란 더불어 사는 것이 그야말로 열심히 수고해도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무익한 종’에 불과한 거예요. ‘주여, 할 도리를 했을 뿐이지 제가 뭘 했다고 저를 내세웁니까? 오늘까지 살고 내일 죽여도 저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내일 딸 시집 못 보내도 할 수 없습니다. 손잡고 식장에 들어갈 사람 없어도 할 수 없습니다. 원래 인간이란 주께서 다 써먹었으면 손 털어도 그것은 주님의 소관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게 되어 있어요. 자기 위주로 살면서 예수를 믿는다? 그것은 십자가 자리에 오지도 않고 저 멀찍이 서서 메가폰 들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데 이것은 교회 와서 ‘계란이 왔어요!’ 하는 것과 같아요. 완전히 광고를 해요.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믿는데 하나님은 내게 복 줄 거요, 말거요.’ 그거하고 똑같은 소리 아닙니까?

 

얼마나 우리는 우리 위주입니까? 그래놓고 뭐가 안 되면 다 남 탓이고 부모 탓이고 하나님 탓이고, ‘나는 괜찮은데 다들 더러워서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산다.’고……. 부산저축은행, 앉아서 데모하는 것, ‘주님이여, 돈 떼었습니다.’ ‘어쩌라고! 내가 네 돈이나 보상해주는 하나님인줄 아느냐?’ 아마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굉장히 비난하겠지요. 막상 우리 자신이 돈 떼이면 데모하겠다고 나와서 앉아 있을 수도 있어요.

인생이라는 것은 이처럼 목적이 뚜렷해야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죄인의 역할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만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사실은 너나 할 것 없이 하나가 된 죄인인데 우리가 성경을 봐야 알 수 있는 이 진리를, 성령 받아야 알 수 있는 이 진리를 마치 안다고 우기다가 얼마나 낭패를 보았습니까?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주님께 갈수 없는데 마치 자기가 마음씨 고와서 예수 믿어준다고 여겼던 이 잘못된 생각, 복달라고 손 내미는 그 더러운 손길, 이제는 예수 믿는 그 자체가, 아버지가 이끄시는 그 자체가 복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