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도덕론의 발달 본문
이근호
도덕론의 발달
-주요 철학자가 말하는 도덕론 -
1.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의 도덕론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며 이러한 행복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에 좌우된다. 덕의 함양함에 있어 이전의 철학자들인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 비해 영혼의 감정 분야인 욕구와 정서를 다루는데 있어 단순히 통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의 관계맺음에 따라 얼마든지 덕이 될 수도 있고 악덕이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즉 모자라거나 지나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중용이라고 한다. 이러한 중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선택이 필요한데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는 이해력과 판단력 그리고 실천적 지혜와 이성이 필요하다고 봤다. 따라서 도덕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도덕적 덕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적인 덕과 실천적 지혜가 곁들여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게 빠지면 ‘성숙한 자’가 못된다.
지혜가 반복되면 습관화가 이루어지는데 여기서 말하는 ‘반복’이란 단순한 반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귀납’이라고 부르는 지적 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개별적인 상황들을 파악함으로서 보편적인 것에 이른다는 것으로써 이 귀납적 방법을 동원해서 올바른 개별적 행동들을 여러 번 실천함으로써 습관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되면 스스로 어떤 행동이 올바른지, 혹은 그렇지 않는지를 분멸할 수 있는 것이다. 곧 습관화를 통해서 비판적 판단과 그리고 올바른 것에 대한 즐거움도 함께 획득하게 된다는 말이다. 즐거움이란 곧 감정이다. 이는 선을 사랑하는 감정 획득을 의미한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덕이란 선을 행하되 그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즐거움이 빠진 억지스러운 도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사상에 어긋나는 불행스러운 일이다.
2. 데카르트(1596∼1650)의 도덕론
사람들은 도덕을 말하고 있지만 확실한 도덕(덕)에 언급해주지 않고 있다. 따라서 도덕도 일반 학문처럼 확실성을 찾아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생각이다. 데카르트는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하한 방안을 제시하는 데 그 전제는 바로 ‘통일된 진리가 존재한다’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그 진리의 모습이 ‘명석함과 단순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는 이 두 가지의 가정 위에 4가지 규칙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명증성의 규칙’, ‘분해의 규칙’, ‘합성의 규칙’, ‘열거의 규칙’이다. 첫 번째‘ 명증성의 규칙’이란 명증적으로 참이라고 인식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참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두 번째 ‘분해의 규칙’은 검토할 어려움들을 각각 잘 해결 할 수 있도록 가능한 작은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다. 세 번째 ‘합성의 규칙’은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아갈 것, 즉 가장 단순하고 알기 위해 대상에서 출발하여 마치 계단을 올라가듯 조금씩 올라가서 가장 복잡한 것의 인식에 까지 이르는 것이다. 네 번째 ‘열거의 규칙’은 아무 것도 빠트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완벽한 열거와 전반적인 검사는 어디서나 행하는 것이다.
이 원칙에 준해서 도덕적 확실성을 어떻게 규정지을 수 있는가? 우선 지적인 성찰에서 요구되는 확실성과 실제적 행위의 문제에서 기대되는 확실성이 같을 수 없기에 형이상학의 확실성보다 도덕적 행동에 대한 확실성이 도덕적 확실성을 설명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 출발을 ‘잠정적 도덕률’로 정해놓는다. 여기서 말하는 ‘잠정적’이란 항상 지금보다 더 높고 완전한 것을 시도해 나가는 결단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참된 지식이란 인간에게 있어 영원히 발견되지 않는 사항이기에 거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일정한 규칙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는 것이 데카르트의 생각이다. 이것이 ‘잠정적 도덕률’이다.
이 잠정적 도덕률을 뽑아내는데 있어 몇 가지 요령이 있다. 첫째는 극단적인 의견을 멀리하고 가장 온건한 의견을 따르는 것이다. 즉 온건한 의견이 더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실행하기 쉬운 것이기에 온건하게 받아주기 때문이다. 혹시 오류가 발생되더라도 극단적인 의견보다 수정하기가 쉬워진다. 그래서 참된 길에서 벗어날 위험이 그만큼 적은 것이다. 이럴 경우에 인간에게는 침해받지 않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둘째는, 한 번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끈질기게 따라야 한다. 사람을 도덕적이게 하는 것은 이성적 근거가 아니라 행동을 수행하겠다고 결정한 후 일관되게 실천하려는 태도에 있다.
셋째는, 언제나 운명보다는 나 자신을 이기고 노력하고, 세상을 바꾸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이를 위하여 사람은 우리가 얻을 수 없는 것에는 아예 포기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는 충분히 만족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즉 사람이란 늘 자신의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과 얻을 수 없는 것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행복과 행운은 다르다는 것이다. 행운이란 우리 밖의 것에 의존되는 것으로서 좋은 태생, 훌륭한 지식, 준수한 용모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수고나 노력 없이 주어지는 것이기에 이런 게 없다고 해서 이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비도덕적 행위가 되고 행복이나 만족을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서 행복이란 ‘정신의 내적 만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가장 행운을 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행복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행운이 좋은 것도 지나치면 행복의 방해가 되기에 현자는 행운이 없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가 있다. 선을 전제로 하는 행복은 그 선이 지닌 결과로 마음이 가지게 만족감을 갖게 된다. 따라서 태어나면서 행운이 없다 해도 덕과 지혜는 누구나 가질 수 있고 그것을 가진 자는 곧 행복한 사람이다.
덕, 곧 도덕이란 최선의 것을 정확하게 실행하겠다는 의지의 결의이며, 최선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관철이다. 여기서 오류를 조심해야 하는데 오류는 어디서 오는가? 오류는 의지의 활동 범위가 오성보다 더 넓기 때문에, 내가 의지의 활동을 오성에 의해 인식된 범위 안에 묶어 놓지 못하고, 오히려 인식하지도 않는 것에 의지를 작동시키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것을 데카르트는 ‘죄’라고 부른다. 따라서 이 죄에 빠져 들지 않으려면 분명치 않는 것에 대해서 판단을 보류하면 된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기다림’이 중요하다. 이 기다림이 ‘관대함’으로 나타난다. 이 관대함을 보여줄 수 있는 자가 강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본다.
3. 흄(1711∼1776)의 도덕론
흄의 도덕론은 흄의 인식론으로부터 도출된 이론이다. 흄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지각은 인상과 관념이라는 두 가지 뿐이라는 것이다. 인상이란 우리가 무엇을 지각할 때 우리 영혼에 최초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며, 관념이란 사유와 추론에 의해서 인상에 떠오르는 희미한 형상을 두고 말한다.
예를 들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동네 근처에서 불이 난 장면을 보았다고 치자. 불이 난 상가건물이나 그 근처에서 걱정하는 구경꾼들의 대화, 그리고 온 몸으로 느껴지는 불의 열기 같은 것이 바로 인상이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가족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면서 재현하는 것이 바로 관념이다. 이것이 영혼의 전부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흄에 의하면 인간 영혼 안에 본래적으로 담겨 있는 것은 없다는 보는 것이다. 귀머거리는 소리의 관념을 가질 수 없고 맹인은 색의 관념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이런 이치에서이다. 그렇다면 경험하지 못한 관념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예를 들면, 황금 산이나 신(God)같은 관념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들인가?
그것은 기존 관념에서 조립한 것이다. 즉 황금 산은 황금+산이다.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다. 이런 상상력에 의해 조립된 관념을 그는 ‘복합 관념’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상상력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 영혼 속에 본래부터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흄은 아니라고 본다. 그저 우연의 결과이며 ‘은근한 힘’이라고 말한다. 곧 자유의 힘이다.
이런 인식론에 준해서 도덕감을 설명한다. 인간의 도덕성은 부단히 변화하는 활동적 감정원리에 의해서 주어지기에 비활동적인 이성이 그 기초로서 설명될 수 없다고 본다. 이성적으로 참과 거짓을 구분 짓는 것이 이미 도덕적 행위가 끝난 뒤에 차후로 판정내리는 작용이기에 처음부터 도덕성을 자아내게 하지는 못한다.
뿐만 아니라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을 우리들의 경험 이상으로 확장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잘못 태어났다”든지 “참새가 착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손 쓸 수 없는 것까지 이성이 참과 거짓으로 추정하는 월권 기능을 행사를 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칫 하면 삼라만상에 대한 우리의 처지와 무관한 죄를 스스로 책임지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념에 의해서 인간의 도덕은 어떻게 확정지어지나? 그것은 거북하고 불쾌하면 부도덕한 것이고 우리에게 쾌락을 주면 도덕적인 것이 된다. 쉽게 말해서 인상이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형벌 가운데 가장 견디기 어려움 형벌은 우리가 미워하고 경멸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가는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도덕감에 있어 보편타당성이라는 것이 성립되는가? 너무 주관적으로 치우치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 대해 흄은 ‘공감’라는 것을 거론하게 된다. 어떤 것이 공감을 이룰까? 유용성이라고 흄은 말한다. 자연적인 덕(개인적인 덕: 분별력이나 근면)이나 인위적인 덕(사회적 차원의 덕:예절, 관습, 약속 법률)이나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간주되는 그것은 그 행동이 사회 전체나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공동이익의 객관성 확보에 열중하는 오늘날 사회에서 진정 사람들이 계산하는 도덕이란 이란 흄의 도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4. 칸트(1724∼1804)의 도덕론
칸트는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을 구분하면서 실천철학에 기초한 도덕론을 펼친다. 하지만 이론철학이나 실천철학을 수립하는데 있어 ‘선험적 종합명제’이라는 그의 인식론이 동원된다. 따라서 그의 도덕론을 따지기 전에 먼저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 종합명제’이라는 것이 어떤 기본적 명제로서 기능을 하는지를 알아봐야 한다.
‘선험’이라는 말은 ‘경험’ 이전에 인간의 이성의 작용을 말하고 ‘선험적’이라는 말은 인간 이성을 비판의 대상으로 하고 인간 이성의 구조와 체계를 밝히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이성을 비판하려면 이성을 있게 한 궁극적인 대상에서 도출되어야 하는데 칸트는 이것을 ‘영혼’, ‘세계’. ‘신’이라고 말한다.
영혼이란 인간이 생각하는 것 자체이기에 생각이 생각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세계라는 것은 대자연을 말하기를, 인간이 있기 이전부터 이미 상주해 있는 것이다. 신이란 모든 궁극적인 것에 관한 이념이기에 궁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이상, 부정할 길이 없다. 즉 인간 오성에 의해서 파악될 수 없는 대상들이다. 이 세 가지에 대해서는 인간은 월권해서는 아니 된다.
선험론적 이념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다만 이런 선험적 이념들은 대상을 인식하는 이성을 비판하는 판단 잣대로 작용하게 된다. 이 선험적 판단을 칸트는 경험이 필요한 것과 경험이 필요 없는 판단, 두 종류로 나누고 있다. 그것이 곧 종합판단과 분석판단이다. 그렇다면 종합판단은 무엇이며 분석판단은 무엇인가?
명제라는 것은 필히 ‘주어+술어’의 형식을 갖추게 된다. 여기서 분석판단이란 명제 자체 안에서, 그 명제 밖의 존재하는 어떠한 개념의 도움 없이 ,주어의 개념을 분석하는 것으로만 자연히 술어가 도출되는 판단을 뜻한다. 예를 들면, “모든 물체는 연장적이다”는 명제는 ‘물체’라는 것을 분석하기만 하면, ‘연장적이다’라는 술어의 개념은 절로 나온다.
이것과는 달리, 종합판단은, 판단을 명제 밖으로 확장되어져야 한다. 주어와 술어가 같은 종류가 아닌 이종적(異種的)이다. 종합판단은 주어의 개념만을 분석하는 것으로 명제가 성립될 수 없다. 예를 들면, “모든 물체는 무겁다”라는 명제를 놓고 보면, ‘물체’라는 개념과 ‘무겁다’는 개념으로 개념이 명제로 표현되기 이전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개념이 합쳐져서 하나의 진술을 이루었다는 것은, 경험적 요소가 매개가 되어 양자를 종합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즉 ‘물체’라는 개념에 대한 분석이 자동적으로 ‘무겁다’라는 개념을 도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종합판단은 주어와 술어를 연결하는 매개자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칸트는 이 매개자를 ‘경험’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칸트는 감성과 오성의 선험적으로 종합 시켰다. 이 결과로서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는 지식이 산출된 것이다. 이 보편성과 필연성의 기원은 자아 외부의 자연만도 아니요 자아 내부만도 아니다. 왜냐하면 외부는 항상 내부와 결합하고 내부는 항상 외부와 결합하기 때문이다.
이 선험철학은 자연과 자아의 관계에서 본질적으로 자아 자체를 대상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비로소 선험적 종합명제가 윤리적 명제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덕이란 선험적 종합명제에 의하면 경험의 문제가 아니라 준칙과 법칙의 문제이다. 준칙이란 주관적 입장에서 본 적이고, 법칙이란 개별적 주관을 떠나는 객관적 타당성을 지닐 경우를 말한다.
이는 도덕법이라는 것이 인간들이 경험을 산출하는 감성이 필요로 해서 새삼스럽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법을 향한 실천의지만이 필요하다. 즉 실천이성 자신이 수립하는 도덕법칙을, 오로지 도덕법칙에 대한 수립이 자발적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의식한다. 그리고 이 자발성은 실천이성의 의지적 작용이 자발적 원인성으로서의 자유에 의거한다는 사실이 입증한다.
결과적으로 말해 도덕법칙에 대한 의식은 실천이성의 자기반성이다. 실천이성의 자기반성은 자유를 통하여 가능하고 따라서 자유는 도덕법칙의 존재근거가 된다. 도덕법칙이 선험적인 까닭은 도덕법칙에 대한 의식이 선험적이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또한 도덕법에 대한 의식이 선험적인 이유는, 자유 개념의 선험성에 놓여져 있다. 즉 인간의 영혼은 그 자체가 자유로운 이념인 것이다.
칸트는 의지를 크게 두 가지 측면을 말한다. 하나는 ‘실천이상으로서의 의지, 곧 입법적 의지와 그 다음 하나는 선택, 곧 인간의 실행적 능력에서 나오는 의지이다. 실천이성이 온전히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드러내는 것이라면, 객관적 법칙은 곧 주관적인 준칙이 되고, 주관적인 준칙이 곧 객관적인 법칙이 된다.
이 선험성에 의해서 도덕법칙은 인간이 선하게 지켜낼 때, 비로소 도덕으로서 성립 가능한 것이 아니라 선과 악 개념 자체가 도덕법칙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거짓말이 보편적으로 타당하게 된다면, 약속이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기에 거짓말하는 약속을 개인적 준칙으로 삼았을 경우, 이는 개인적 수준의 준칙에는 머물 수 있는 있어도 결코 보편적으로 법칙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도덕법칙은 개인적인 선과 악에 의해서 휘둘리지 않는다. 이것을 칸트는 ‘정언적 명령 定言的 命令)’이라고 한다. 정언적 명령은 무조건적이다. 조건을 허락하지 않는 명령이다. 예를 들면, “만약 행복해지려면 …하라!”라는 조건이 붙는 명령 (이것을 ‘가언 명령假言命令’이라고 함)이 아니라 지금 내가 행복한가 어떤가에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반드시 이러해야 한다는 명령을 말한다. 도덕법칙은 그 자체가 최고의 가치를 지니며, 어떤 수단이 되지는 않는다.
이처럼 도덕법칙은 정언적 명령으로서 다른 어떤 것보다 앞서서 존재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 대상은 이에 대한 합치 여부에 따라 규정될 뿐이다. 도덕법칙을 마주한 인격적 존재는 도덕법칙에 비해 자기 자신의 심성이 초라함을 느끼고, 따라서 도덕법칙에 대해 겸허한 감정을 갖게 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도덕법칙에 대한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인즉, 유한한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그 유한성을 인정하는 감정이다. 하지만 이는 곧 도덕적 주체자자인 인간이 자신의 주관적 심성의 상태에 주목하지 보다는 도덕법칙 그 자체에 대해서 느끼는 경이로움이요 존경심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에만 머문다면 도덕법칙은 전혀 가능치 않다. 여기에 실천이성이 자율적으로 가동되어야 한다. 이성의 소임은 세상 유혹으로 조건 지워진 인간의 심성에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완전한 도덕법칙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실천이성은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에게 완전한 인간성을 이상으로 제시하는 한편 이 세상 현상계의 존재자로서의 인간에게 이에 상응하는 행복의 추구 또한 목적으로 삼게 한다.
인간의 덕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선한 심성이라고 해서 덕 그 자체가 바로 이상적인 선의지와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선의지 역시 인간심성의 선한 마음씨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덕과 구분된다. 즉 덕은 선한 본성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선을 실행하기 위한 “의지의 도덕적 굳셈을 의미한다.”
‘의지의 굳셈’은 인간이 내적인 도덕적 투쟁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이상적인 예지계의 원리인 도덕법칙과 개인적 용구 혹은 현상계에 대한 경향성 사이에는 끊임없이 갈등하는데, 이러한 자기모순적인 갈등상황 안에서 도덕성의 추구를 위해 “굳은 의지”는 요구된다. 역설적우로 말해 인간에게 덕이 있다는 것은 완전한 도덕성의 부재를 의미한다.
덕은 갈림길 위에 서 있는 인간의 의지를 순수한 덕성, 즉 도덕법칙에 합치하는 준칙에 까지 끌어 올리는 의지의 굳은 의지다. 도덕적 실천에 있어 덕의 도야를 의무로 하는 것이다. 실천이성은 덕에 대한 의무까지 단적으로 명령한다고 할 수 있다.
5. 헤겔(1770∼1831)의 도덕론
헤겔의 도덕론은 자유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핵심이다. 진정한 자유란 그 어떤 절대적으로 외적인 법으로 침해받는 바가 없는 상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헤겔의 이러한 주장은 칸트의 도덕론을 의식한데서 비롯된다. 그의 자유론을 반박하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도덕법칙의 내용을 ‘자아의 준칙’이라는 특정한 규정들에게 차용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도덕법칙의 무한성과 내용의 무한성이라는 내적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언명령의 보편화 원칙 때문에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도덕규칙도 똑같은 도덕법칙으로 사용될 경우에 그 정언명령이라는 것도 곧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문제가 되면서 어느 것을 우선해야 하는지 딜레마에 빠져 버린다. 뿐만 아니라 칸트의 도덕론은 개별적 주체의 도덕성과 관련된 덕론과 보편적 법칙의 합법성과 관련된 법론, 이 둘로 분열되어 그 합일이 원칙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것으로 포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주장하기를, 인간의 자유의지는 자신의 내적인 계기에 따라서 현실적인 법으로 나타나며, 현실적인 법을 거쳐 완전한 자유에 도달하게 된다고 보았다. 즉 법적 주체가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본인들의 자유의지를 통해 법은 실증성과 보편성을 담보하게 되며, 동시에 법적 제도와 법적 주체의 모순은 사라지게 된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자연적 의지, 반성하는 의지, 즉자·대자적이라는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자유란 사회적 현상의 하나로서 이해되어져야만 하며, 또 공동체의 도덕적인 발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회체계의 한 속성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인간의 자연적 의지는 개념을 만드는데 이 개념들이 모여 사회가 도출된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발생되는 개념은 보편성, 특수성, 개별성이라는 계기를 갖는다. 보편성이란 자신을 제한하는 모든 구체적인 내용을 부정하고, 단순히 추상적인 이해되는 의지다. 이러한 자유의지는 공허한 자유며 이론적인 자유다. 종교적인 모습을 띨 경우에는 순수 명상에 빠지는 공허함을 보이고, 현실에 대한 정치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때는 모든 기존의 사회적 질서를 파괴하는 광신이 된다.
결국 이러한 추상화된 ‘부정적 자유’ 또는 ‘오성의 자유’가 갖는 한계는 모든 구별과 차이를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 파악하며 이를 파괴하고 거부하려는 데 있기 때문에 이런 자유는 각 개별자들이 갖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현실이나 내용들을 포함할 수 없는 한계를 갖는다.
자유의지의 두 번째 계기는 특수성의 계기다. 이것은 욕구에 통해 매개된다. 구체적인 내용과 대상을 욕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의지를 구체적인 대상에 규정시키고 제한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의지의 보편성의 측면을 자신 안에 포함시킬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즉 “나는 저것 말고 이것을 원합니다”고 하는 순간, 제외시킨 대상에 대해서는 스스로 자유를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보편성과 특수성을 통일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의 ‘개별성’이라는 계기다. 보편성과 특수성의 계기에 참여한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와서 다시금 보편성을 획득하는데 이것이 자유의지의 개별성 계기다. 이런 반성이 깃든 자유의지는 타인을 낯선 존재로 여기지 않고 우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기꺼이 자신을 제한 할 줄 알고 그러한 자아가 곧 자신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상호승인’이다. 이렇게 되면 각 개별자들은 서로의 자유를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의지의 발휘는 자유 실현에 발전을 보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추상법→도덕성→가족→시민사회→국가 순으로 진행된다. 가족→시민사회→국가는 곧 인류성을 성취하는 과정이다.
추상법이란 스스로 구체적인 법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추상적 자유만 누리는 양상을 말한다. 추상적 보편성인 인격은 자신의 외적인 사물에 대한 소유를 통해 자신의 자유에 현실성을 부여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헤겔은 추상법을 소유, 계약, 불법의 형식으로 구분한다. 소유를 통해 자신의 인격을 보장받으려고 시도하지만 이때의 인격은 추상적인 권리의 주체일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격적 자유는 특수한 의지를 가진 권력을 통해 여지없이 파괴당할 위험이 있고 자신들의 자유를 실현해준다고 믿은 그 법에 도리어 절대적으로 복종당하는 낯선 힘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래서 자유의지의 현실적 전개과정에서는 도덕성이라는 두 번째 단계가 나타난다. 여기에서의 자유의지의 주체자는 도덕적 주체다. 도덕적 주체는 자신의 자유가 형성한 법은 사물이나 재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적인 의지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추상법에서의 자유의지는 자신의 직접성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도덕성에서 자유의지는 자신 안에서 보편적인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 보편적이라는 것은 바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권리를 갖는 것이다. 시도하고 책임지고 복지를 염두에 두고 선과 양심의 모습을 한 법을 스스로 지켜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헤겔에 의하면 도덕성의 단계에서의 선과 양심은 여전히 추상적 이념으로만 남는다. 이렇게 되면 추상적 선과 의무는 대립되게 된다. 즉 도덕성 단계에서의 양심은 아직도 객관적 내용을 지니지 못한 채 무한한 자기 확신에 머물러 있을 뿐이며, 이는 곧 자기 양심 외에 다른 양심 모두를 무시하고 자기 욕망만을 절대적으로 정당화시킬 수 있는 악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자유의지의 현실적 전개에서 그 진정한 실현은 인류성에서 이루어진다. 추상법 단계에서 자유의지는 법적 주체로서 자신의 자유를 단순히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게 하며, 또한 도덕성의 단계에서는 자유는 단지 외면적 제도와는 분리된 내면적인 만족의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인류성의 단계에서 자유의지는 자신의 자유를 외적인 제도로 실현되는데 그 형태가 가족, 시민사회 그리고 최종 모습은 국가이다.
이 제도에 나타나는 개인적인 의식은 가족과 시민사회와 국가에 상응하여 사랑, 교양 있는 성실함과 애국심으로 나타난다. 인류성에서는 주관적인 심정과 객관적인 제도라는 두 측면이 통일되어 있으며, 이러한 통일에서 법적 주체는 자신들의 고유한 이성적인 의지가 발현되어 있기에 객관적인 제도들을 바라보면서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6. 하버마스(1929∼ )의 도덕론
하버마스는 체계에 대해서 ‘생활세계’의 우위를 주장하는 가운데 도덕론을 펼친다. 생활세계란 주체에게 아무런 의무 없이 그저 주어져 있는 세계를 말한다. 의문 없이 체험되는 세계, 그리고 현재로서는 앞으로도 문제가 되지 않을 듯 한 세계다. 이 생활 세계를 이루는 것은 초월적인 이념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생활세계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상호 작용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성원들의 의사소통으로 인하여 그때그때마다 구성되어지기에 이 생활 세계는 늘 불확정적으로 머물고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이 안에서는 늘 ‘비축지식’이 발생한다. 이 비축지식에 대해서 구성원들은 공통의 관심사를 보이고 참여하게 되며 그들의 삶의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의사소통을 보증하는 배후 확신으로 상정된다. 여기서 협동적인 해석과정이 나오게 되는데 이로 인해 의심할 여지없는 신념들의 저장고가 장만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이 생활세계와 대비가 되는 다른 질서를 소개한다. 그것은 바로 ‘체계’라는 질서이다. 체계의 특징은 의도적이고 합리적인 사회 통합적 선택이 가미된다는 점에 있다. 곧 생활세계는 의사소통행위의 연결망인데 비해서 체계는 전략적 행위의 연결망이다. 이러한 체계의 복잡한 구조 분화는 생활세계의 구조 변화, 즉 생활세계의 합리화에 의존해서 발생되기 때문이다.
즉 생활세계의 합리화는 체계복잡성의 증가를 가능하게 하는데, 체계복잡성이 과도하게 증가하면서, 고삐 풀린 체계명령은 생활세계를 도구화하고 생활세계의 수용능력을 폭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 서구 자본주의 사외의 제반 병리적, 위기적 사회 현상이 바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이런 사회가 이루기까지 어떤 변전을 겪여왔나? 여기서 하버마스는 뒤르켐과 콜베르그의 이론을 가져 온다.
뒤르켐의 이론에 의할 것 같으면, 처음 사회는 신성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이 세상은 온통 신성한 존재들이 지배했던 사회다. 그러던 것이 이 신성한 존재들이 이 자연과 인간 세상에서 물러가면서 결국 초월적 신으로 추상화되어 버린다. 처음에는 종교적 힘들이 이 세상의 자연 현상과 사물에 깃들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분리되어 스스로를 물화(物化)한다. 이렇게 신성이 이 세상을 떠나 초월적이 되는 대가로 이 세상은 탈 신화된 자연을 남겨 놓았고 축소된 신성함의 영역은 바야흐로 완전히 세속화된 과학의 발달과 경쟁해야 했다. 전통 일반에 대한 성찰적 태도가 발생한다. 전승은 근본적으로 의문에 부쳐지고 비판을 매개로 해서만 계승될 수 있었다. 동시에 전통을 회고하는 데 치중했던 시간 의식은 미래지향적으로 전환된다.
신의 표상이 추상화된 것에 상응하여 법과 도덕의 보편화가 진행되고, 이것은 동시에 신성한 법의 탈주술화, 법절차의 탈형식화를 가져온다. 즉 법과 도덕의 규칙들이 처음에는 지역적 상황과 인종, 기후 등의 특수성에 구속되었지만 그것들로부터 점차로 벗어나고 그와 함께 좀 더 일반성을 띠게 된다.
이런 일반화의 증가는 형식주의의 부단한 몰락에서 실감된다. 규범의 적용범위가 확대되면서 동시에 해석의 여지와 합리적 정당화의 압박이 증대된다. 뒤르켐은 근대적 개인주의의 현상들을 개인의 가치가 거의 종교적으로 격상된 것에 대한 표시로 개별 인격체와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숭배라고 간주한다.
하지만 자의적 결정의 자유가 자율성의 전부는 아니다. 자율성은 ‘선택이 자유’가 아니라 우리가 ‘성찰적 자기 이해’라고 부르는 것에 놓여 있다. 급증하는 개인화와 함께 증거하는 각 개인의 자율성은 새로운 형식의 연대를 특징짓는 것이다. 개인들의 노력에 의해 협동적으로 이룩되어야 하는 연대다.
즉 신앙에 의한 사회 통합의 자리에 협동을 통한 사회통합이 들어선다. 뒤르켐은 이 변화를 기계적 연대에서 유기적 연대로의 이행이라고 표현한다. 이 이행에서 합리적인 것으로 가는 경향성을 본다. 이 경향성은 개인들이 책임 있게 행위할 줄 아는 정도에 비례해서 실현된다.
오늘날의 국가가 내세우는 법적 강제력은 국가의 권위나 제재기구에 근거하기 보다는 국가의 제재기구들이 속한 정치질서의 정당성이라는 도덕적 권위에 근거한다. 근대적 법공동체 구원이 보이는 복종도 어떤 도덕적 핵심을 가져야 한다. 근대에 와서 법체계는 정치질서의 일부로서 정치질서가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을 경우 그것과 함께 몰락하게 될 성질의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 권위의 근거가 되고 법의 근거도 되는 이 정당성이 무엇인가? 뒤르켐은 ‘일반 이익’이라는 개념으로 답한다. 이 ‘일반 이익’ 개념은 결코 수많은 개별 이익의 총합도 아니고 그것들 사이의 타협도 아니다. 일반 이익이 도덕적 의무 부여의 힘을 갖는 것은 오히려 그것의 비개인적이고 공정한 성격 때문이다.
이 공정함은 고대 사회의 신성함으로부터 이제는 정치적 공론장에서 의사소통적으로 형성되고 토의적으로 밝혀지는 일반 의지로 전환되어 있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런 발달 과정을 생활세계의 구조적 분화 과정으로 본다. 여기서 그는 콜베르그의 도덕의식의 세 가지 수준을 도입해서 설명한다.
Kolberg (콜베르그)의 도덕발달 이론은 딜레마를 주어서 거기에 대한 반응을 통해 도덕 수준을 파악하는 방식이다.
(1)인습 이전 수준
가. 벌/복종
나. 욕구충족 수단
(2)인습 수준
다. 대인관계 수단: 남들이 뭐라고 그러겠느냐를 고려함
라. 법과 질서: 여기서는 형법 위주
(3)탈(脫)인습 수준
마. 사회계약법 인지: 민사관계법
바. 보편적인 도덕 원리 인지
하버마스는 탈관습적 단계로 진화는 생활세계의 구성요소인 ‘사회’의 제도체계가 문화와 인성에 대하여 자립화하는 것을, 또 정당한 질서가 점점 더 강하게 규범 제정과 규범 정당화의 형식적 절차에 의존적이 되는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즉 전-관습적 사회에서의 범법자에 대한 처벌은 개인에게 귀책되는 규범 일반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협하는 해악을 처벌한다는 뜻을 갖는다.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 아간에 대한 처벌이 그런 예이다.
또한 근친혼 금지를 위반하는 것은 그 위반 행위의 결과로 공동체에 정신적 오염이 초래되기 때문에 범죄라는 식이다. 만약에 범법적 처벌에 관하여 공동체 원로들이 모여 합의를 도출하는데 불가능하다면 세력이 열세인 부족이 떠나고 범법자가 속한 부족의 모든 남은 이들과 관계를 끊는 식이 최종 분쟁 해결 방식이었다.
근대 이전에 국가 조직화가 나타나는 사회, 곧 관습적 단계의 사회는 어떠한가? 국가적 조직화의 뚜렷한 핵은 중앙 집중화 된 제재수단이다. 이것이 공직자의 결정에 구속력을 부여하는 정치적 권위의 토대이다. 사법제도에서 왕권에 복속하는 사법관직이 등장한다. 이런 사법제도를 뒷받침하는 도덕의식은 어떤 범죄가 개인에게 귀책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규범의 위반 여부는 행위자의 의도에 초점을 두어 평가한다. 처벌은 죄가 되는 행위에 가해지는 것이지 단순히 행위 결과가 초래한 손해에 보상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다. 이 단계의 도덕의식에서 합의에 의한 분쟁의 해결은 손상된 이전 상태의 회복이 아니라 저질러진 잘못에 대해 응보를 한다는 규범의 손상을 치유한다는 목적에 따른다. 즉 법질서 자체의 정당성에 의지한다.
근대 자본주의 국가 사회는 탈-관습적 단계다. 근대적 사회에서는 부르조아 사법(私法)의 형식으로 제도화되고 윤리적으로는 중립화된 행위체계가 생겨난다. 행위가 화폐와 같은 탈언어화된 조절매체를 통해 조정되면 규범에 기초했던 상호작용은 사법 주체들 사이의 성공지향적으로 행해지는 거로로 바뀐다. 전통에 구속되었던 법이 목적합리적으로 투입될 수 있는 조직수단으로, 외부적으로 부과되며 윤리적 동기에 분리된 강제법으로, 정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영역을 경계 짓는 도구로 변환된다.
즉 의사소통상으로는 여전히 갈등상황이면서도 제도적 행위상으로는 조절매체와 법에 의해 갈등이 봉합된 것으로 나타나는 메커니즘이 발달해 가는 것이다. 이처럼 애초에는 공동체 의식을 보호하는 신성한 규범과 직결되어 있던 도덕과 법이 근대적 도덕의식으로 이행해 감에 따라 점점 더 세속화의 길을 가는 것이다. 시장, 행정이라는 하부 체계를 조직하는 수단이 되면서 법체계 자신이 권력과 되어 그동안 권위의 근거로 의존해 왔던 전통, 윤리적 가치로부터 벗어난다. 법이 행정, 경제 하부 체계에 목적합리적 조직수단으로 투입되면서 그 기능성은 한층 강화되고, 형식주의도 강화된다.
이처럼 하버마스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체계 분화가 가속화되어 마침내 자립화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평등한 부족 사회의 체계 분화의 특징은 교환 관계를 통한 부족 사회의 파편적 분화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접어들면서 경제가 국가적 질서로부터 분리되고 자립된다. 그리고 그 결정적 원인은 ‘화폐’라는 조절매체 덕분이다. 국가는 행정, 군사, 사법과 함께 구속력 있는 결정을 통해 집합적 목표를 실현하는 일에 전문화하고, 전체적 경제를 조정하는 기능은 넘겨주게 되는데 화폐매체가 그 기능을 전문적으로 넘겨받아 맡게 되면서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국가기구가 취업자들로부터 조세수입을 통해 생산과 다시 연결됨으로서 형성된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할수록 국가는 조절매체에 의해 구조형성적 효과를 받는 경제에 의존적이 되어 간다. 그렇다면 생활세계와 체계는 어떤 식으로 관련되나? 하버마스는 체계 분화의 메커니즘을 생활세계에 정착시키는 ‘제도복합체(制度複合體)’ 역할을 말한다.
제도복합체란 사회구성체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복잡성 증가의 가능범위를 정하는 토대로서 작용하는 것으로서, 성(性), 및 세대(世代), 혈통 집단, 정치적 공직(公職), 부르주아적 사법을 예로 들 수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그동안 정치 체계로서는 행정 조직을 갖춘 국가, 경제 체계로서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제도복합체가 기존 사회에 통합되기에 성공하고 정착하기까지 도덕과 법이 제도복합체의 재구조화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하버마스는 근대 법체계의 형식적 특질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근대적 법은 실증적으로 제정된 법이다. 신성한 전통은 사라졌다. 또한 근대적 법은 법적 인격체에게 법에 대한 일반적 복종 외에는 어떤 윤리적 동시도 부과하지 않는다. 그것은 승인된 한계 내에 있는 한, 사람들의 사적 경향을 보호한다. 제재를 받은 것은 나쁜 양심이 아니라 규범에 어긋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시행도 적극적 규제가 아니라 그동안 인정된 권리를 잠시 제한하는 방식의 소극적 규제에 머문다.
따라서 현대 국가에서의 도덕이란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과 인민주권의 원리가 법적 정당성이 확보된 하부 체계 바탕 위에서 끊임없이 비축되는 지식 재생산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의사소통을 통한 공론의 장을 훼방하지 않는 것이다.
(평) 오늘날 생활세계는 날이 갈수록 마음은 잊게 되고 피곤한 몸만 강렬하게 느껴지는 세계다. 그러다보니 수시로 분노한다. 산다는 것이 원래 짜증스러운 것인가? 돌멩이처럼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어디에선가 부딪히게 되면 아파서 울고 집에 와서는 서러워서 운다. 왜 질문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지, 왜 자꾸 ‘왜’라는 질문 외에 다른 질문이 이어지지를 않는지?
철학자들은, 인간 세상에서는 질문조차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질문을 받아 줄 이도 없고 질문을 만들 위인도 없다. 그저 각자 자신의 울분만 토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 이유가 뭘까? 그것은 이 세상에 ‘갇혀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저주받을 대상으로서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
흔들림이 없는 하나님의 옹고집은 이 세상에서 기어이 저주의 이유를 밝혀내시겠다는 집념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말씀대로, 약속대로 진척될 뿐이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2-3)
그래, ‘진노의 자녀’들이 모인 곳, 그러하기에 진노가 당연히 작렬해야 하는 곳이기에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는 소리로 가득 찬 세상의 진동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이란 악마가 내쉬는 숨결이다. 피 복음를 증거하면 즉시 발작한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4-5)
도덕이 필요 없는 세계는 이 ‘그리스도 안’의 세계 뿐이다.
참고 논문
김기현,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도덕과 법의 지위”,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철학석사 논문』, 2009.
박민철, “헤겔 「법철학」에서 ‘철학적 법학’의 의미연구”, 『건국대학교 대학원 철학석사학위 논문』, 2008.
김형주, “칸트의 도덕철학과 선험적 종합명제”, 『중앙대학교 대학원 철학석사 학위논문 』, 2009.
신소혜, “흄의 도덕감 이론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학위논문』, 2007.
설삼열, “데카르트 도덕론 연구”, 『한양대학교 대학원 철학석사 학위논문』, 2010.
김미정, “정서의 도덕교육적 의의”,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석사학위 논문』, 2009.
'저서 & 기타(이근호) > 성경 신학 ·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신학의 세계 / 2001 (0) | 2011.01.13 |
---|---|
욥의 사명과 비전 (0) | 2011.01.13 |
욥의 세 친구의 신론(神論) (0) | 2011.01.13 |
과학적 창조론의 허구성 (0) | 2011.01.01 |
구원에 있어 시간과의 연관성 문제 3 (0) | 2011.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