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레 5:14-19 / 속건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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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속건제(贖愆祭) (레 5:14-19)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인데, "안다" 라고 하는 것은,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알고 여러 가지를 다 한꺼번에 알 수가 있지만, 즉, 이것이 마이크인 것을 알고 또 저것이 꽃인 것도 알 수가 있지만, 그러나 신앙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한꺼번에 두 가지를 다 알고서 믿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여러 가지가 되지만,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만을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 가지를 믿는다면,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믿는 다고 착각하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든, 절에 다니는 사람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것은 하나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만 믿는 것이지, 부처를 함께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에 다니는 사람도 부처만 믿지, 부처하고 다른 것을 함께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라는 아니라, "무엇을 믿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거기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마지막에 내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믿음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없으면 아는 것은 많지만 믿는 것은 없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식을 믿는 사람, 돈을 믿는 사람, 그리고 자기 자존심을 끝까지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그런 것들을 믿지 마시고, 오직 예수님만을 믿기를 바랍니다.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더 중요한 것은, "누구를 믿는가?" 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돈을, 자기 자신을 믿지 마시고, 오직 예수님만을 믿고 의지하고 붙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모습이 있어야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영생의 길을 가는데,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이 이 세상에게 당했던 억울한 일과, 가슴 아픈 일과, 섭섭했던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푸시고, 버리시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날마다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고, 그렇게 해서 새롭게, 새롭게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처럼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방금 말씀드린, 우리가 믿음이 없는 자로서 날마다 변화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새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우리가 일 주일에 몇 번씩이나 교회에 나오는가?" 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변화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교회에 나오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이러한 궁금증이 생길 것입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얼마나 변해가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 "이 정도만 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서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옛날 중국에 진나라에 시황제라고 아주 유명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시죠, "진시황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왕은 유명하기는 유명한데, 좋은 일로 유명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악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진시황제는, 한 마디로 자기 밖에 모르는 깡패 같은 자입니다. 남들은 전혀 생각해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 자신뿐입니다. 얼마나 성질이 고약하고 엉망인지, 요즘 같으면 병원에 가야 할 사람입니다. 사람만 보면 죽이려고 하는 그런 왕입니다. 악한 왕인 것입니다. 자기가 마음먹은 것은 어떤 희생과 대가를 지불해도, 사람이 수백, 수천 명이 죽어도 반드시 하고 마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독재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진시황제보다 더욱 더 심각한 것은, 그런 왕을, 아니 황제를 좋다고 받들고 자기 나라의 최고 황제로 모시고 섬기는 신하들과 그런 나라의 분위기입니다. 그런 왕이 있으면 쫓아내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러한 폭력을, 잔인함을 즐기려고 하는 그때 그 당시의 나라 형편이 더욱더 놀랍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지금도, 전 세계에 퍼져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모습이고, 우리 인간의 잔인성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시황제가 이처럼 잔인하게 했는데, 그런데 "진나라" 라는 국가를 위해서 큰 운하도 만들고, 만리장성도 쌓는 등, 큰 일들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진시황제가 잔인한 면도 있지만 국가를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왕도 아니고, 왕 중의 왕인, 황제라는 칭호를 주었고 말입니다.
제가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그 일을 했는지, 그런 과정을 살펴보기보다는, 그 사람의 눈에 보이는 업적 위주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어떤 분들은 그래도 5공 전두환 시절이 좋았다고 합니다. 주로 경상도 분들이 많이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때 경제적으로 먹고사는 것이 괜찮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광주사태 때에 자기 자식을 잃은 부모도 그런 마음이 들겠습니까? 자기 딸이 자기 나라 군인에게 무참히 짓밟힌 부모의 심정도 그러하겠습니까?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 두 사람이 고향을 찾고 하면서 T.V에 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오히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더 멋진(?) 사람으로 비추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 세상의 모습을 다시 한번 발견하곤 합니다. 세상이 잔인하다는 것을, 폭력을 오히려 즐긴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오락 게임을 하면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싸워서 이기는 것입니다. 이겨도 그냥 이기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잔인하게 죽이는 수준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오락게임이 아니면 인기가 없습니다. 이런 인간의 잔인성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이유를, 창세기 4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범죄를 하여 낳은 자식인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그 잔인한 살인 사건을 통해서 분명히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너무나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큰일을, 업적을 많이 남긴 사람을 위대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시대에 가장 큰 일을 많이 한, 다윗보다, 솔로몬보다 더욱 업적을 많이 남긴, 여로보암 2세에 대해서 성경을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왕하 14:24, 참고) 라고 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의 하나님을 떠난 인간적인 업적은, 사람들은 좋아할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로보암 2세에 대한 기록이 너무 짧습니다. 불과 다섯 절밖에 없습니다. 그의 업적을 가지고서 기록하자면, 다윗보다도 더 많이 성경에 기록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기준은,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가?"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회개를 하며, 겸손한 삶을 살았는가?" 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죄가 없습니까? 악하지를 않습니까? 그는 악한 왕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회개한 왕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두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라고 최고의 칭찬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도 회개한 한 마리의 양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숫자가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개척교회를 몇 개 세웠는가?" 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얼마나 하나님 은혜를 깨닫고 겸손하게 주의 일을 감당했는가?" 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를 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정신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변화된 삶이란, 성질이 바뀐다든지, 술을 끊는다든지 하는 외면적 모습뿐만 아니라, 변화된 삶이란, 바로 나만 생각하고, 나 밖에 모르던, 할 수만 있다면 진시황제처럼 살아가고 싶어하던 우리가, 이러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새로운 기준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회에 나와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이만큼 일을 많이 했으니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까? 헌금을 많이 했으니 알아달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닌 것입니다. 이런 것을 버리기 위해서 교회에 나옵니다.
교만하고 못된 나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주셔서 인도해 주신 것을 감사하기 위해서, 내가 아니라 나를 인도하신 분이 따로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들은 교회에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직 주님만이 자랑되어야지, 자기 자신은 그 근처에 가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릎 꿇고 손들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매일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읽었던 본문을 이러한 차원에서 한번 다시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레위기 5장의 본문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제사 중에서 마지막 다섯 번째로, "속건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용이 조금 어려운 줄 압니다만, 잘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시간이 지나갑니다만, 복습하는 의미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제사에 대해서 다시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보통 설교를 듣고서 3시간이면 절반을 잊어버리고, 하루가 지나면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고 하니, 다시 반복해도 괜찮은 줄 압니다.
첫째로, 번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몸 전체를 바치기를 원하는데, 그래서 짐승을 잡아서 여러 조각으로 나눕니다만, 모두 다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가 번제입니다. 내 모든 것을 다 바치니까, 목회하라는 줄로 아는 분도 계십니다만, 그것이 아니고, 어떤 직업에 종사하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자는 것입니다.
둘째로, 소제인데, 이 소제라고 하는 것은, 식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인데, 주로 곡식을 바치는데, 바치면서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고생이 뒤따르니, 그것을 각오하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로 무사히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맛있는 빵이 아니라, 맛없는 딱딱한 누룩이 없는 "무교병" 이라는 떡을 바친다고 했습니다. 인생이 이처럼 맛없는 딱딱한 빵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화목제인데, 이 제사는 잔치를 베푸는 것인데,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들으시고 기뻐서 잔치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기쁨의 제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잔치에 참석해서 음식을 먹으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내가 무엇을 많이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을 깨닫고서 감사하는 삶을 제일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잔치를 베풀 정도로 말입니다.
넷째로, 속죄제인데, 이 속죄제는, 죄를 짓고는 하나님께 못 나아오니까, 저기 성밖의 쓰레기 하치장이 있는데, 가서 자기 몸을 타 태워 버리고, 버리고 나서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놓고서 무슨 염치로 하나님께 나아오느냐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죄를 가지고서는 못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다섯 째로, 이 속건제에 대해서 오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속건제라고 하니까 말이 참 어렵지 않습니까? 여기서 속(贖)이란 것은 "바꾼다" 라는 의미이고, 건(愆)이라고 하는 것은 "실수", "허물" 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허물을 바꾸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허물을 바꾸는, 있었던 이 허물이 없었던 것으로 되는 제사가 "속건제" 라는 것입니다. 실수한 것을 용서함 받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허물이 죄가 없어져서,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나오는 제사가 바로 속건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에, 속죄제와 같다고 여기실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같습니다. 죄를 용서함 받는 것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습니다. 무엇이 다른고 하니, 속죄제는 무조건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비는 것입니다.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천당 갈 놈이 못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속건제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잘못했으니 보상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보상을 하겠습니까만, 제사를 드렸다고 해서 입닦고 모른 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못한 자에게 보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속건제는 주로 살면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서, 우리 집 둘째 놈이 옆집에 가서 놀다가 T.V를 그만 박살을 내어버렸습니다. 도저히 수리가 안 되도록 박살을 낸 것입니다. 요즘은 T.V들이 좋아서 다 백 만원쯤 하는 것이 많습니다. T.V가 박살이 났는데, 살 때는 백 만원을 주고서 샀더라도, 몇 년이 지나서 그 가치가 한 오십 만원쯤 밖에 안 된다고 합시다.
그러면 당연히 오십 만원을 물려주는 것인데, 이 속건제의 경우는 그것이 아닙니다. 살 때의 백 만원하고, 거기에다가,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나오는데, 5분의 1을 더 얹어 주는 것입니다. 20%를 더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T.V값을 오십 만원이 아니고, 120 만원을 물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생각에는 뭔가 합리적이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백 만원도 아니고, 어떻게 120 만원을 주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중요합니다. 왜 20%를 더 내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백 만원은 원래대로 해 주는 것이고, 이 나머지 20만원은, 이제부터 우리는 이웃끼리 서로 사이좋게, 친하게 지내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가 T.V를 부순 것 때문에 사이가 서먹서먹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20 만원이 부순 집의 성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20%를 더 지불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원상 복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친하게, 사이좋게 잘 지내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흘러 넘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우리가 이웃과도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돈이 좀 덜어서 문제이지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서, 누군가 이웃집의 물건을 실수로 깨거든, 20% 더 얹어서 보상을 한번 해줘 보십시오.
아마 그 이웃 사람은 두고 두고 그 일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얼마나 고마워하겠습니까? 물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다음부터 하루가 멀다하고, 찌짐에다, 나물에다, 미역에다, 마구 갖다 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에 이 "속건제" 라고 하는 제사가 우리들에게, 우리 교회에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쉽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우리 서로가 화목하게 사랑하는 모습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보상을 해도 세상 삶들처럼 깍지를 말고 20% 더 얹어서 해 주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마워하겠습니까? 서로에게 사랑이 넘쳐나라는 것입니다.
오늘처럼 각박한 사회에서, 한 푼이라도 자기 돈을 더 손해보지 않으려고 이리 빼고, 저리 빼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보상하라! 보상을 하되, 듬뿍 하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돈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모세와 함께 애굽을 나올 때에, 집도 살림살이도 다 애굽에 두고 빈 털털이로 나왔습니다. 손에 들 수 있는 것만 대강 꾸려서 들고, 패물 몇 가지만 제외하고 말입니다. 물질이 넉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웠습니다. 정말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사정을 아시면서, 이들에게 보상을 하되 넉넉히 하라는 것입니다. 없지만, 어렵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이웃을 돌아보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너희들은 서로 하나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속건제를 온전히 이루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지금도 남의 물건을 이렇게 20% 더해서 배상해야 할 책임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율법입니다. 그리고 20% 더 배상을 해도, 이런 속건제를 온전히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제사의 정신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남에게 더 보상을 해 주기는커녕, 본의 아니게 손해를 입힐 수도 있는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손해배상은 엄두도 못 내고 말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손해를 봐도, 본의 아니게 손해를 끼쳐도,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우리들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살아간다면, 그래서 그리스도의 살을 느끼고 전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참사랑은 오직 주님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로만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랑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직접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사랑이 아니라,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모습이 있어야만 합니다. 물질이 있든지, 없든지 말입니다. 너무 내 것만 챙기고, 내 가족만 아는, 그런 사람들이 되지를 마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몸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신 그 주님을 사랑 앞에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억지가 아니고 기쁨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은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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