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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94. 예레미야 26:20-24 / 우리야 선지자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94. 예레미야 26:20-24 / 우리야 선지자

정인순 2011. 1. 12. 22:40

본문 : 예레미야 26:20-24
제목 : 우리야 선지자
듣기 : 음성 ,보기 : 동영상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10/수요예배110112 .MP3


 

 2011년 1월 12일            이근호         

 

본문 말씀: 예레미야 26:20-24

(렘 26:20, 개역) 『또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는데 곧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라 그가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성과 이 땅을 쳐서 예언하매』

(렘 26:21, 개역) 『여호야김 왕과 그 모든 용사와 모든 방백이 그 말을 듣고는 왕이 그를 죽이려 하매 우리야가 이를 듣고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하여 간지라』

(렘 26:22, 개역) 『여호야김 왕이 사람을 애굽으로 보내되 곧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몇 사람을 함께 애굽으로 보내었더니』

(렘 26:23, 개역)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끌어내어 여호야김 왕께로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 시체를 평민의 묘실에 던지게 하였다 하니라』

(렘 26:24, 개역)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보호하여 예레미야를 백성의 손에 내어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의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예레미야요 다른 한 사람은 우리야 선지자입니다. 우리야 선지자가 외친 것은 예레미야 못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 자신의 의견이나 자신의 신학을 피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자기 이름’에 의지해서 예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발생된 예언을 전파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게 되면 일반 사람들에게는 거부감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은 ‘사람의 이름’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이름으로 산다는 말은 곧 자신의 힘으로, 자기만을 사랑하므로서, 자신의 명예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하여, 자기에게 최종 집착하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분위기에 오로지 ‘하나님의 이름’ 말씀이 전달되면 졸지에 ‘사람의 이름’으로 사는 자들에게는 공격하는 의지로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의사소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상호 목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것은 사람의 이름을 기쁘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장차 오실 ‘주의 이름’의 본 모습을 알려주기 위해서 미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언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오로지 장차 오실 메시아를 고대하는 목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면 이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서는 그들을 부담을 느끼고 배척하고 거부하고, 결국에는 죽이고 말 것입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접한 사람은 누구나 ‘나를 공격하시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 왕이나 선지자들은 ‘사람의 이름’을 옹호해주는 거짓 ‘하나님의 이름’의 내용들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탕?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진짜 선지자와는 달리 사람들에게 배척받을 하등 이유가 없었습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는 다같이 인간의 이름일 뿐입니다. 전하는 각 순간에도 자신의 이름을 포지 않으려는 습성을 늘 솟아올라옵니다. 즉 하나님의 복음과 계시를 전한다는 이유로 특혜를 고대하면 안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선지자들은 그 주어진 계시에 목숨을 바치지 아니하면 아니됩니다. 이 또한 계시가 됩니다.

이들 선지자에게는 ‘얼마나 내 편이 많으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옳은가’가 관권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선지자는 많은 사람들이 내 편이다에 목숨을 걸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각자 자신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을 많이 모아봤자 결코 ‘옳은 진리’는 아니요 그것이 장차 오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보면 언약궤를 들여다보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흔히 가볍게 생각하면, 우리를 구원하려 오신 분이 마냥 마음씨가 착한 천사라도 가볍게 대해도 될 것 같지만 실은 우리를 심판하실 분의 입장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기에 감히 그분의 구원말고 다른데 눈 돌릴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따라서 참된 선지자들이 비록 죽음이 찾아든다 할지라도 그런 것을 두려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이름’으로 실행된 일이라면 사람의 이름의 집단 속에서 마땅히 죽는 것이 장차 ‘주의 이름’으로 오실 그분의 생애를 미리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속성을 갖출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비록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슬하게 살아남아 있으나 실은 우리야 선지자 죽었을 때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자로 오시는 분이 왜 이 땅에서 죽으시는 모습으로 와야 되는 겁니까? 그것은 심판받을 자들이 이미 극단적인 무서운 죽음의 세력 속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이미 생명나무는 본래의 가치를 드러내는데 바로 선악과 훼손에 대한 피해자 입장에서 서서 생명나무의 연관성을 알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는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 가차없이 심판에 나서므로서 생명나무 본래의 역할을 다 하게 되는 겁니다. 성도가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이름’으로 살아야 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나오는 생명나무의 기능이 단순히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느냐 못주느냐는 식으로 인간 입장에서 생명 얻겠다는 일념으로 바라보지만 실은 생명나무의 기능은 악에 대한 처벌과 심판의 기능을 행사하는데 있습니다. 즉 악을 악으로 철저하게 규정하는데서 하나님의 본 모습이 등장됩니다. 단호한 심판과 그 심판 속에서 피어나는 구원의 모습으로 생명을 활동하게 됩니다.

생명나무의 고유 기능으로 인하여 인간은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지도 못한 채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선악과 때문에만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의 본질에 의해서는 인간은 저주를 받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진정 생명을 제대로 아는 자라면 이 생명나무 앞에서 이 생명나무의 기능을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생명이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늘 다음과 같이 물으십니다. “나는 생명을 지니고 생명을 자랑하는데 너는 무엇을 지니고 무엇을 자랑하느냐”고 말입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너는 무슨 낙으로, 무슨 힘으로, 무엇을 하는 보람으로 사느냐”를 물으시는 겁니다. 이것은 새삼 우리가 행한 것을 인정하고 긍정해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자신의 것만으로 드러내시려는 겁니다.

이것이 사람은 자신의 이름으로 살 권한과 권리가 없음이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제대로 들통이 나야 하는 겁니다. 인간은 ‘생명나무를 못 따먹고 또한 따먹을 수 없는 죄인의 처지“라는 것을 유감없이 드러냅니다. 인간이란 ’생명나무적인 기능을 전혀 행사없고 도리어 악과 한 통속이 된‘ 그 성질을 있는대로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 성질이 노골적으로 나타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따라서 그 현장성을 미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는 자들의 운명 안에서 드러나야 하는 겁니다. 이것은 구약 때뿐만 아니라 신약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0:20에 보면, “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타인들의 따가운 시선보다 우리 주님을 더 경외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우리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음에 놀라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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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6장20절(우리야선지자)20110112

 

하나님 말씀은 예레미야 26장20절에서24절까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20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이 있었는데 곧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라 그가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성과 이 땅에 경고하여 예언하매 21여호야김 왕과 그의 모든 용사와 모든 고관이 그의 말을 듣고서 왕이 그를 죽이려 하매 우리야가 그 말을 듣고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하여 간지라 22여호야김 왕이 사람을 애굽으로 보내되 곧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몇 사람을 함께 애굽으로 보냈더니 23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연행하여 여호야김 왕에게로 그를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평민의 묘지에 던지게 하니라 24사반의 아들 아히감의 손이 예레미야를 도와 주어 그를 백성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

 

 

우리가 예레미야나 우리야를 보면 실패한 인생인 것 같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죽이는데 가담해서 ‘저 인간은 없어지는 게 우리한테는 낫겠습니다.’ ‘저 사람이 없어져야 우리가 사는 것처럼 살겠습니다.’ 하는 전체적으로 미움을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 한 인간의 인생으로서 그처럼 절망적인 것은 없을 거예요.

 

남에게 도움 되지 못하고 남에게 핀잔만 받고, 설움만 받다가 나중에 하나님 도움으로 적들을 이기고 자기가 우뚝 서면 좋겠는데, 오늘의 본문 우리야 선지자는 자기가 이길 수 있는 기능의 세월도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그냥 죽었습니다. 물론 살고자해서 하나님 이름으로 예언해놓고 애굽으로 도망쳤지요. 도망쳤는데 하나님 뜻은 무엇이었냐 하면, 도망친 우리야를, 자기 이름으로가 아닙니다, 하나님 이름으로 예언한 우리야를 기어이 애굽에서 데려와서 왕이 직접 칼로 쳐 죽였습니다.

 

쳐 죽일 때, 쳐 죽이기 직전에 천사가 와서 ‘멈추라!’ 하는 그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보쌈해서 바다에 던져 죽기 일보직전에 정보부에서 데려온 것 같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하나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죠. 예레미야 선지자도 같이 하나님 이름으로 했기 때문에 죽어 마땅한데 오늘 본문 끝에 보니까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보호해서 백성들에게 들키지 않게, 비밀하게 숨겨서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야 선지자 죽을 때, 예레미야도 사실상 죽었다고 보면 됩니다. 개인적 입장에서 보면 한 인간이(남자든 여자든) 평소에 어떤 포부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 이 땅에서 남들에게 어떤 존재가 돼보겠다는 포부가 있는데 그런 자기 계산적인 포부가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는 그 순간부터 글러먹었습니다.

 

자기의 희망을 찾는 기회, 아름다운 전망, 미래상, 그런 것은 완전히 휴지조각이 돼버려요. 스스로 자기가 아름다운 인간, 참한 사람이 되고 싶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계획을 완전히 묵살시켜버렸습니다. 사적인 포부, 사적인 희망이 주님 앞에서는 ‘너 그것 좀 버려줄래?’ 버려라 합니다.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죽고 싶어도 못 죽고, 인기 얻고 싶어도 얻지도 못하고, 우리야 선지자처럼 이미 죽은 목숨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이 덮치게 되면, 쉽게 말해서 성령이 덮치게 되면 그 사람이 제아무리 사적인 희망과 포부가 있다 할지라도 ‘그건 네 맘대로 안 되거든?’ ‘그건 너의 희망사항일 뿐이야’ 하나님의 이름이 그 사람을 지배하고 통치합니다.(주여!) 마태복음 10장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언하시기를,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네가 세상에 나가서 전도할 때 네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네 속에 있는 성령께서 말씀하신다. 라고 돼있어요.

 

이 말씀, 마태복음10장20절「…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는 너희 안의 성령이니라」제게 이 대목이 떠오르면서 20세기의 모든 언어학과 문학, 예술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돼버렸어요. 사람이 어떤 말을 하면 그것을 분석해 ‘이게 무슨 뜻일까’ 하고 찾아내야 할 텐데, 마태복음 10장20절에서는 분석 대상이 안 됩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신 것이 어떻게 분석이 되겠습니까.

 

거기서 어떤 의미를 끄집어낸들, 인간이 성령의 뜻을 성령을 받지 않고, 육적인 상태에서 성령의 뜻을 안다? 이것은 말도 안 되죠. 그러니 성경말씀을 성령께서 아무리 적어놓아도 사람이 도전해 분석하려해도 진짜 하나님 뜻을 아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을 받은 자만이 예수님의 뜻이 이렇다 라고 선포할 뿐이죠. 납득시키거나 설득시킬 수는 없습니다.(아멘) 바로 그것이 하나님 이름으로 벌이는 현장입니다.

 

사람의 언어라는 것도 의사소통이 되려면 공통적인 사고방식 안에서 언어가 만들어지거든요. 주고받고, 주고받고 대하는 가운데서 대화가 성립되려면 내가 이야기하는 것을 저쪽도 알고 있어야 되는데, 만약에 내가 이야기하는 취지를 저쪽에서 모르면 저쪽에서는 공동체에서 추방시키든지 죽이든지 하는 겁니다. 더 쉽게 말씀드려서 거짓선지자가 유다나라 여호야김 시대는 하나님 이름의 선지자 우리야, 예레미야 몇몇 사람 빼놓고 나머지는 누구 이름으로 사느냐면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 자신의 이름으로 산다 이 말이죠. 그러면 자신의 이름으로 산다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를 위하여’ ‘자기로 말미암아’ ‘자신 때문에’ 움직이고 밥 먹고 사는 거예요. 자기 명예와, 체면과 위신과 자기존중과 애착, 자기사랑. 그런데 선지자 예레미야나 우리야도 인간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이름이 덮쳐버리니까, 선지자가 죽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사람의 살고자하는 것은 평소의 자기이름의 열망이잖아요. 내 이름을 남들에게 알려주고 남들만큼 오래 살기 원하고 자기 이름을 못 버리고 사는 것이 인간인데, 주의 이름이 거기에 덮쳐버리면 자기 이름을 갖고자 하는 기회와 소망이 완전 박살되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나서야 되고 일하게 되죠. 그러면 혼자 산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외치면 남에게 맞아 죽는 일은 없어요.

 

그런데 주의 일을 시킬 때 그냥 시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평생 살고 밥 먹고 사는 일반적인 보통사람들에게 주의 이름으로 나가라고 명령하니까 문제가 생기죠. 여기서 의사소통이 될 리가 없습니다. 선지자는 진정한 사랑과 애정으로 불쌍히 여겨 주의 말씀을 전했는데 저쪽, 듣는 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공격하는 걸로 들립니다. 십자가복음 전하는 사람들… 정말 힘듭니다.

 

하나의 예를 들게요. 십자가복음을 가지고 자기 이름으로 나가는 것과 주의 이름으로 나가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자가복음, 십자가의 피 흘림 이야기가 나오면 자기 이름을 버리지 않는 사람의 반응은 ‘날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렸구나, 그러면 내가 믿어야지~’ 이거는 자기 이름입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으로 하는 사람은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죄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도 죄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받고자 해서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약속에 의해서, 약속의 능력에 의해서 주신 분이 주시지 않으면, 요한복음3장27절 세례요한이 얘기한 거예요. 위에서 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가 아무것도 받을 수가 없다! 이래되는 겁니다. 모든 신학과 모든 철학과 모든 과학을 모독하는 겁니다. 철저한 모독이죠.

 

자기 이름으로 신학을 하고 자기 이름으로 철학을 하고 자기 이름으로 예술을 하는 사람이 그 얘기를 들으면 ‘너는 나를 공격하는구나,’ 라고 듣는 겁니다. 더 나아가면 ‘너는 네 애비도 없냐?’ 라고까지 나오죠. ‘이 동네는 선배도 없어!’ 이렇게 나올 거고 윤리 도덕으로 어물쩡 넘어가려하죠. 왜 하나님이 인간을 공격하느냐! 하는 겁니다. 왜 인간을 공격하느냐. 그러면 하나님 이름을 가지고 ‘공격을 해야 그게 사랑입니다.’ 그럼 저쪽에서는 자기이름으로 ‘뭐, 그런 복음이 다 있느냐!’ 그런 부정적인 접근이 어디 있느냐, 하는 거죠.

 

민수기와 출애굽기에 보면, 사무엘상에도 나오죠. 언약궤 뚜껑을 여니까, 언약궤 뚜껑을 여는 것도 무섭지만 언약궤를 만지기만해도 죽었는데, 언약궤 뚜껑을 만지면 왜 죽느냐, 하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천사 같은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저 천사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했다 칩시다. 그때 자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 나는 하나님 사랑을 받았구나, 하나님이 보낸 천사라면 얼마나 착할까, 이웃집 아줌마도 나 좋다하면 착한데 날 죄에서 구원할 천사가 왔으면 그 천사가 착하고 양보심 많고 점잖고 인자하겠는가, 부처보다 더 인자하실 거야, 라고 그 천사를 믿는 순간 그 인간은 저주받습니다. 이게 언약궤의 기능이에요.

 

어디서 함부로 내 몸을 만져! 라는 의미가 되는 거예요. 결국은 우리를 구원하러온 천사가 어느 정도 무서우냐 하면, 접근해서는 결코 안 되는 무서움, 그 무서움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거예요. 무서운 저주, 무서운 지옥, 무서운 심판… 그 앞에서 우리는 벌벌 떨면서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도 없구나!’ 처음에 그걸 몰랐을 때는 시시껄렁하게 보고 ‘역시 착하니까 보내주셨구나, 역시 좋은 하나님이야’ 라고 다가서는데 막상 하나님의 구원의 지점과 가 닿는 순간 언약궤를 들여다본다든지 만지면 너는 저주 받는다, 할 때 우리가 스스로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고 다가선 모든 것이 오해였습니다.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정녕 죽으리라」했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심판을 누가 내립니까? 바로 생명나무가 선악과 따먹은 자를 심판해버리죠. 생명나무가 없었으면 에덴동산의 추방이라는 저주를 받을 이유가 없어요. ‘선악과 따먹었다, 어쩔래!’ ‘너, 이리와!’ ‘어디로 가는데?’ ‘생명나무 앞에 서 있어!’ 딱 서니까 선악과 따먹은 자는 결코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다는 판결을 받고 에덴동산에서 내 보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혹독한 저주를 받게 하는 겁니다.

 

제가 예배 때 얘기한 것처럼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세상에 있을 때는 내 이름과 네 이름 누가 더 센 이름이냐고 우쭐대다가 결국 죽어서 흙으로 돌아갔고 한 줌의 재로 돌아갈 때 재의 때깔가지고 소급해서 훌륭한 사람이라 할 수가 이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둘러싸인 것은 전부 인간들이 자기이름, 자기이름 가지고 비교하는 세상에 살다보니까 우리가 언약궤가 얼마나 무섭고 주님의 십자가가 얼마나 무서운 십자가라는 것을 전 우주를 심판하고 악마를 심판하는, 그것도 오류 없이, 티끌 없이 완벽하게 심판하신다는 그 무서움을 같은 인간들끼리 비교하다보니 다 잊어버렸어요.

 

요새는 사법고시가 문제가 아니라 사법연수원에서 성적이 어떻게 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예요. 사법연수원 나오면 반 이상이 취직 안 되는데, 이번 사법연수원 우수졸업생이 26살 먹은 어떤 여자 분이에요. 그래서 신문에 났죠. 그 여자 분이 인사를 하는데 ‘어떻게 수석을 하게 됐습니까? 사법연수원 힘들다는데 힘들지 않았습니까?’ 기자 질문에 ‘공부하는 게 재밌어요.’ 했던 그 여자의 이름이 하나님 영광이 될까요? 아니면 예수님 십자가 앞에 죄인 된 자세가 하나님께 영광일까요?

 

저는 분명히 얘기합니다. 사법연수원1등은 매년 한 명씩은 반드시 나오게 돼있어요. 그러나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의 죄인이라는 것은 1년에 한 번 나온다? 안 나온다?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희귀종이고 세상사람 보기에 비정상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태어나면서 자기 이름만을 사법고시 패스한 자기 이름만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한 게 인간적으로 소통하고 서로 납득이 되는, 이해가 되는, 그래서 한 마을을 이루는, 한 국가를 이루는 단결의 힘인데 왜 거기서 빠져나왔냐 이 말이죠.

 

일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너는 네 명예를 위해서, 나는 내 이름의 자존심을 위해서 살자, 이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왜 자꾸 하나님의 이름으로 환영받지 못할 ‘그따위 소리’를 왜 하느냐 이 말이죠. ‘하나님 이름으로!’라는 말을 왜 하느냐 이 말이죠. 그러니까 너 같은 인간은 맞아죽어도 싸지, 그렇게 죽었잖아요. 예레미야도 죽은 상태로 보면 되고, 보호받고 있으니까 안 죽었지 안 그러면 죽었어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외치는 사람이 왜 죽어야 됩니까! 자기 이름으로 사는 일반적인 사람들 앞에서는 무서운 죽음이 되는 거예요.

 

이 죽음은, 장차 주의 이름으로 오실 분이 사람들 앞에 무서운 죽음으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한 그것을 앞당겨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십자가라 하니까 너나 나나 다 십자가죠? 그 십자가가 네 이름으로 산다는, 네 이름을 포기하지 않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하는 겁니다. 많은 목사님들이나 신학생들, 교인들에게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입니다.’ 하니까 무슨 뜻인지 몰라요. ‘내가 언제 예수님을 죽였느냐!’

 

우리가「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승의 자랑과…」이 모든 것이 나의 이름을 위하여 예수님을 이용하고 나의 이름을 위해서 교회 나오고 나, 내가 잘되기 위해서 내 자리를 위해서 하나님 믿는 그것이 바로, 가짜 예수를 만들어서 ‘진짜 예수님을 거절하는 짓거리의 되풀이’에 불과한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 아까운 사람, 사법고시 연수원 수석은 일 년에 한 명은 나오게 마련이지만 예레미야나 우리야 선지자가 1년에 한 명씩 나오겠습니까?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440년 간 단 한 명도 배출되지 않았어요! 헐... 말라기 이후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세례요한밖에 없었습니다. 1년에 한 명이 아닙니다. 400년 만에 한 명 나왔어요. 이렇게 귀한 사람을 왜 그렇게 단칼에 나무 베듯이 죽여 버렸냐 이 말이죠!!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적인, 하나님 앞에서 여호야김 왕이 우리야 선지자를 죽였다, 우리가 볼 때 개인이 개인을 죽인 게 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의 개인이나 인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야 선지자가 죽으므로 말미암아, 그 죽음으로 인하여 배후에 있는 권력의 성질의 마주침을 통해서 규명을 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사람의 모든 사적인 행동은 개인이 마음 다잡아서, 각오해서 결심해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그 배후에 더러운 영적 세력이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영적 권력이. 권력 대 권력의 싸움으로 주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보내는 겁니다. 이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 편이 몇 명이냐? 가 아니라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 자기 목숨을 걸었습니다.

 

바른 소리 하면 내 편이 많아질 것이다, 라는 것에(노림수에) 관심 없어요. 내 동기가 몇 명이냐가 아니라 ‘이것이 과연 옳은가!?’ ‘바른 소리인가?!’ 하는 겁니다. 진짜 외치고 싶은 하나님 말씀인가? 하는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 선지자 본인도 예외로 두지 않습니다. 선지자가 말씀을 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 저는 그 말씀에 대해서 안 지켜도 봐주죠?’ 노우! 봐주는 게 없습니다. 선지자마저 자기가 전한 계시의, 판정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왜냐면 그 계시는 권력이 노리고 있고 선지자는 한 개인이기 때문에. 사적인 개인의 포부나 존재의 가치 같은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는 이런 성질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라고 내 놓아야 되요. 그 성질이 뭐냐! ‘내 편이 몇 명이냐’가 아니라, 계시의 말씀이 옳습니다! 옳다고 얘기해야 되는 겁니다. 그것이 과연 옳다고 해도 남들은 판정 못하고 옳다고 판정하면 할수록 점점 죽음으로,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면, 설사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죽음이 두려워 나쁜 것을 전했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 이 말이죠.

 

-말이 어려웠죠?- 반대로 내가 이 말을 전했는데 남들에게 배척 받았기 때문에 ‘내가 실수한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지도 말고 반대로 -더 중요한 문제는- 수많은 사람이 동조했다고 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옳은 소리를 했구나, 라고 전도 삼지는 말아라 이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한 목사를 예로 들어봅시다. 어떤 목사가 설교하는데 이렇게 했다 칩시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어서 인간이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예언도 있고 저런 예언도 있습니다. 어느 것을 하던 여러분 자유입니다.’ 라고 할 때 그 목사는 사람들에게 한 수 가르치려고 하는 거예요.

 

이런 이론도 있고 저런 이론도 있습니다. 할 때 뭘 감추느냐 하면, ‘나의 배후 세력은 이런 성질의 세력입니다,’ 라는 것을 교묘하게 교회라는 이름으로, 양이라는 이름으로, 목회라는 이름으로 앞에 세우고 자기는 싹 빠져버려요. 진짜 성령 받고 진짜 복음을 아는 교인들은 ‘목사 당신에게 한 수 배우려는 게 아니야! 당신 신학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현재 당신은 무엇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지, 그걸 내 놓으라!’ 라고 외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그 목사가, ‘에이, 그거는 안 가르쳐 주지요, 이런 이론도 있고 저런 이론도 있는데 어느 것이 옳다고 저는 말 못하겠습니다. 여러분 필요할 대로 가져가세요.’ 장사합니까?! 만약에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그 목사는) ‘목숨’ 잃을 염려가 없어요! 자기 배후의 진짜 세력은 감춰놓았기 때문에. ‘성경에 여러 가지 이론이 있는데 딱 짚어서 얘기하면 그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습니다.’ <ㅡ 라고 하는 것. 그 사람은 증언자가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각자 자기 살 것 챙깁시다, 라는 꼼수밖에 되지 않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야 선지자와 예레미야 선지자는 ‘너무 솔직해서’ ‘너무 눈치코치가 없어서’(찌질하게) 외부의 시선도 좀 의식하고 얘기를 하면 저 사람이 자기를 미워하는지 싫어하는지 감안해야 할 텐데 너무 솔직했어요! 왜 그랬습니까? 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가!? 만약에 예레미야나 우리야가 무서워서 의식했다면 사람들이 죽이는 것보다 더 무서운 죽음이 있어요. 그게 누굽니까? 언약궤에서 뿜어져 나온, 말씀과 더불어서 자기에게 주어진 것. ‘너는 이 말씀 전하지 않으면 죽어!’ 자기 앞의 수천명이 겁나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주신 주님의 이름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을 두렵고 벌벌 떠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복음을 알게 해준 그 놀라운 사실 앞에 내가 죽고 살고, 배고프고 아프고 어떻고 저떻고, 남들에게 인기 있든 말든, 그거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에요.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 만났을 때 죽을 뻔했습니다.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을 때, 야곱이 뭐가 두렵겠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하나님 봤음에도 생명이 보존됐는데 그 생명은 바로 선악과 따먹은 인간이 감히 생명나무 앞에서 살아남았다는 거.

 

그런 무서움 속에서 살아남은 그것보다 더 큰 놀라운 축복된 길이 또 있겠습니까? 그 기적을 어떻게 인간의 눈치와 맞바꾸겠어요? 어림없는(택도 없는) 소리죠. 내편이 몇 명인가가 아니에요! 무엇이 옳은가!?입니다. 그 옳은가를 안 가르쳐준 거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고, 그 옳은 것 때문에 목숨을 걸고 사는 것이 저의 진면목입니다. 죽이든 살리든 여러분 마음대로 하시고, 저는 그것뿐입니다. 제가 외치고 싶은 것은 ■십자가 복음■입니다. 그게 신약시대의 사도들이 갔던 길입니다!

 

보이지 않는 권력과 권력의 투쟁 속에서 우리는 왜소하지만, 숫자 얼마 안 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푸근하게 믿을 수 있는 저희들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이름으로 산다는 것, 아무리 주를 외쳐도 결국은 자기 가꾸기, 챙기기, 자기가족만 살면 이 세상은 좋은 세상이라고 여기는 인간의 본성, 하지만 주께서 성령께서 오시면, 주의 이름으로 오시면 그게 다 무산된다는, 그 축복과 그 기쁨을 저희들이 영원히 간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