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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91강 예레미야 26:3-7 (재앙 철회)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91강 예레미야 26:3-7 (재앙 철회)

정인순 2010. 12. 27. 09:43

      제목 : 재앙 철회

 

듣기 :음성 , 보기 : 동영상

이근호

2010년 12월 2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6:3-7

(렘 26:3, 개역)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떠나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렘 26:4, 개역)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법을 행치 아니하며』
(렘 26:5, 개역) 『내가 너희에게 보내고 부지런히 보낸 나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이미 듣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가 만일 다시 듣지 아니하면』
(렘 26:6, 개역) 『내가 이 집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으로 세계 열방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렘 26:7, 개역)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집에서 이 말을 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듣더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나라인 유다 백성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기회는 유다 백성들의 성품상 소용없는 기회입니다. 악행을 돌이키면 재앙도 돌이키시겠다는 약조는 유다 백성들에게는 헛말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결코 악행에서 돌아서지 않음을 뻔히 아시면서도 왜 이런 언질을 주시는 겁니까?

여기서 유다 나라의 하나님은 일반적인 신과 차이나는 점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신은 인간들이 당연히 악행할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상정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신은 인간들이 처음부터 오류를 행하는 자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신을 섬기다보면 실수할 때도 있고 때로는 신에 뜻에 부합되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이런 경우를 근거로 해서 볼 때, 인간은 당연히 나쁜 자는 아니라는 것으로 정리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되는 그 인간상이 곧 악행이라는 것이 유다 나라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당연히 유다 사람들도 오류를 갖고 세상에 태어난 인간들이라 이런 취지에 반대할 것이 뻔합니다. 즉 유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서부터 악행이 시작되고 오류가 시작되는 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악행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악행의 결과로 재앙이 떨어진다고 하셨으니 재앙이 떨어져보면 알겠지요. 그러니 미리 재앙을 짐작하는 것으로는 자신의 악행을 모르는 겁니다. 직접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재앙 속에 들어가 봐야 “야, 그래서 우리는 악행한 것이 맞구나”를 알게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유다 나라를 조성하신 하나님은 특수한 하나님이십니다. 일반적인 신과 다릅니다. 일반적인 신은, 인간에게는 신의 말씀을 청종하고 실천에 옮길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치고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자들이 누구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서 3:19-20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오늘 말씀의 내용인 ‘악행→재앙’ 논리는 신약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율법 제공의 취지를 미리 보여준 셈이 됩니다. 즉 재앙을 받기전까지는 어느 인간도 자신이 악행하고 있음을 알 수가 없는 겁니다. 미리 사전에 돌이켜봤자 아직 재앙을 받기 전에 돌이키는 악행은 제대로 된 악행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장래의 재앙을 미리 상상해서 그 재앙을 어떻게든 모면해 보려고 반성하는 척하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시는 겁니까? 유다 백성은 하나님에게 이와같은 질문을 해서는 아니되는 자들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선택받은 민족입니다.

유다 백성의 질문은 악행을 알고 재앙 속에서 다음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재앙을 주심으로서 비로소 드러나는 그 언약의 본 모습은 무엇입니까?”라고 말입니다. 즉 유다 백성은 언약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태어나는 자체가 이미 악행임을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은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 부모 뜻에 의해서나 혹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태어나나 늘 육의 모습으로 태어난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육으로 태어난 것은 저주받을 육일 뿐입니다. 육적으로 태어나서 영적으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럴 권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을 언약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한 기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마치 지구 핵을 탐사하기 위해 탐사선 안에 몇 명의 과학자들이 탑승하여 남들이 감히 접근 못하는 뜨거운 지구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육, 진정한 악행, 진정한 재앙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유다 나라를 탐사선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말씀과 언약의 진정한 실체는 악행이 악행답게 드러나야 하고 재앙이 재앙답게 드러나는 그 순간에 알려집니다. 그 순간이 무슨 순간일까요? 갈라디아서 2:20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즉 모든 사람이란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육적인 존재로 움직입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두 방향으로 갈라섭니다. 지옥가는 것을 “떨어진다”고 하고 천국 가는 것을 “올라간다”고 말압니다. 태어난 것 자체가 이미 악행이요 오류인 인간이 언약에 따른 심판으로 인하여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올라간다”가 성사된다는 것이 참으로 기이한 현상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그냥 육으로 죽으면 안 되고 “올라가는 분의 죽음”에 합류된 죽음을 가져야 합니다. 즉 성도가 바다에 빠져 죽던 혹은 절벽으로 떨어져 죽던 간에 ‘올라가는 죽음’이 되는 경우란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는 죽음 안에서 있으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 안에서 본인은 죽고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이 사신 자로서 재구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자신의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증거하게 됩니다. 이것을 성사시키는 것은 죽을 자가 스스로 자기에게 손을 쓴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찾아들면 이렇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를 보게 되면 그의 죽음은 돌에 맞아 죽을 그 시점이 아니라 그전에 성령 충만함을 받았을 때 이미 그는 죽은 자가 되고 예수님께서 그 안에 산 자가 됩니다. 돌에 맞는 자는 예수님의 몸으로 예수님께서 돌에 맞는 격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사적으로 살고자 하기 위함이 아니라 언약의 위력, 언약의 효과, 언약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한 용도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자신의 예수 믿음을 자랑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바를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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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교회  
091강-렘 26장3-7(재앙철회)-jer10122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6장 3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92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26:3-7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떠나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나를 청종치 하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법을 행치 아니하며 내가 너희에게 보내고 부지런히 보낸 나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이미 듣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가 만일 다시 듣지 아니하면 내가 이 집을 실로같이 되게 하고 이 성으로 세계 열방의 저줏 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집에서 이 말을 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듣더라.”

본문 말씀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내가 선지자들을 통해서 너희에게 이야기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가 지금이라도 듣고 악행에서 돌이키면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하지만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라는 말을 너희가 듣지 않으면 재앙을 내리겠다.’ 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만드신 자기백성 사이인 그들만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제 삼자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과연 악행을 했을까, 안했을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악행을 하면 재앙을 내리고 만약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악행을 하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재앙을 철회하겠다.’라고 하면서 뭔가 기회를 더 준다는 그 약속을 듣고서도 그들이 과연 악행을 돌이켰을까, 돌이키지 않았을까, 라는 점이 궁금하지요.

그러면 그들이 악행을 돌이켰다, 돌이키지 않았다, 그것을 어떻게 판정하느냐하면 그들이 재앙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보면 알게 됩니다. 그들은 재앙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악행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악행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우리의 시선은 하나님께 갑니다. 자기백성들이 악행을 돌이키지 않을 줄을 충분히 아시면서 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본문이 이 말씀을 주셨는가, 그 문제입니다.

‘악행에서 돌이켜라. 그러면 내가 재앙을 안 내릴게.’라는 말을 천 번 만 번 해 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말이죠. 두 번 세 번 잔소리를 많이 한다고 해서 더 먹히는 것은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너희가 악행에서 돌이키면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을게.’라는 말씀을 내린 그 취지가 뭘까, 그게 굉장히 궁금한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악행을 안 돌이킬 줄을 뻔히 아시면서, 달리 말해서 그들이 재앙 받아 마땅한 것을 알면서도 줘도 소용없는 그 말씀을 주셨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재앙내림이 너무나 정당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을까? 그리고 자기 백성이 악행을 할 줄을 아셨으면 그냥 재앙을 내리시면 될 것인데 무엇 때문에 그냥 봐준다는 느낌의 투로 기회를 더 주는 것처럼 느끼게 했느냐는 말이지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존의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오류가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오류를 갖고 태어나고 그래서 악행 할 수밖에 없고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향하여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오류 범하지 말라, 오해하지 말라, 악행하지 말라, 범죄 하지 말라.’ 따라가면서 그래요.

세 살 때, 네 살 때, 다섯 살 때, 따라가면서 계속해서 나무라는 거예요. 두 살 때는 ‘아무데나 오줌 싸면 안 돼.’ 하면 그 애가 엄마 말을 듣고 오줌을 잘 가리거든요. 그러면 그 애가 그 다음부터 잔소리를 안 듣습니까? 세 살이 되니까 ‘너는 네 방에서 따로 자.’ ‘엄마, 나 오줌 안 쌌잖아요.’ ‘그것은 이미 지난 것이고 새로운 과제야.’

그 다음 7살이 되어서는 ‘공부해. 유치원 가기 전에 한자 다 떼.’ 그거 다 하고 나면 또 영어공부 하라고 하지요. 왜 자꾸 따라다니면서 그렇게 합니까? 꼭 박 태환 선수 수영할 때 카메라 따라가는 것 같지요. 따라가면서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거예요. ‘왜 그랬어? 내가 악행하지 말라고 했지.’ 도대체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대화를 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일방적으로 치겠다는 것인지 굉장히 모호합니다.

 유다나라에게 나타나는 이러한 하나님은 아주 특수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던 하나님하고는 전혀 다른, 색다른, 예상치도 못한, 낯설기까지 한, ‘이런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줄 몰랐다.’ 하는 특이한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이게 바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취지와 연결되어 있어요.

로마서 3장 21절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에 대해서 두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을 지키면 더 이상 저주와 재앙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고 우리가 복을 받는다.’라는 식으로 율법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게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었고 유대인들이었고 사실은 모든 인간들입니다.

율법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인간은 처음부터 재앙받기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동의하는 하나님입니다. 현재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 하나님 생각에 같이 동조해주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것, 이거 가짜입니다.

이게 주보인데 이게 만약 하나님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으로 계시를 주신다. 그 계시는 우리가 지키기만 하면 복을 받고 구원을 받도록 하는 하나님이다.’라는 생각을 말씀이 오게 될 때 우리는 갖게 됩니다. 여기에 구멍을 뚫어버려요. 구멍을 뚫고 들어오면 이것이 찢어지겠지요. 그런 하나님을 반대해서 쫙 찢어버리는 이 능력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한국교회 지옥 간다.’를 알려주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한국교회 몽땅 지옥 간다. 순두부고 순 복음이고 이단이고 삼단이고 할 것이 없이 전부 다!’ 찢고 들어오고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을 체험해야 돼요.

처음부터 인간은 오류를 갖고 있는데 문제는 인간이 자기오류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오류인지를 몰라서 따라다니면서 잔소리 해가면서 ‘너, 악행하면 벌 받는다. 악행에서 돌이키면 내가 재앙 안 내릴게.’라고 인간이 해내지도 못하는 말씀을, 인간이 달성해내지도 못할 조건을 가지고 계속 지적하시는 그 하나님, 결국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본성적으로 잘못된 하나님을 가지고 하나님과 상대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유다나라뿐만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모든 인간이 다 그런데 ‘그게 아니야.’ 하고 오직 모세를 통해서 유다나라에게만 나타나신 그 하나님으로부터만 찢어지고 뚫어지는 혜택을 입는 겁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자기가 개라고 하잖아요. 수로보니게 여인이 만약에 부처를 만났으면 자신을 개라고 하겠습니까?

알라신을 만났으면 개라고 하겠습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에 의하면 믿음이 있는 여인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봤기 때문에 그는 주님 앞에서 자기가 개 같은 존재인 것을 파악한 겁니다. 그렇게 고백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밀고 당기고 했습니다. 다 소용없었습니다. 그거 믿음 아닙니다. 그저 이용해먹으려고 하는 거예요.

‘좋은 하나님 상대하는 나는 좋다. 나는 괜찮은 존재다.’ 그거 확인하려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심사숙고 할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율법을 왜 주셨는가, 율법을 주신 근본 취지에 대해서 언급하신 말씀이 되는 겁니다. 율법의 취지를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이렇다,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봐야 유다나라에서 지적으로만 머릿속에 들어가기에 아무 효과가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는 유다나라 백성을 데리시고 실험실의 재료처럼 직접 그들을 재앙 속에 집어넣습니다. 3절에 보면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떠나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라고 합니다. ‘악행하게 되면 재앙을 내리고 악행에서 돌이키면 재앙을 안 내리겠다.’

그렇다면 유다나라가 언제 악행을, ‘내가 악하다.’ 하는 것을 아느냐하면, 재앙을 받아봐야 악행을 아는 겁니다. 재앙받기 전에 ‘너 악행하면 재앙 받는다.’는 그냥 말로서는 여전히 ‘하나님 제가 뭐가 잘못되었는데요? 제가 뭐가 문제입니까? 하나님 사랑하고 악행이 떨어질까 사전에 미리 조치하는 이 멋진 모습이 얼마나 대견스럽습니까? 뭐가 문제입니까? 벌 받을 줄 알고 미리 벌벌 기면서 고개 숙이는 이 모습이 얼마나 겸비한 모습입니까? 이것이 얼마나 굴욕적일정도로 겸비한데 이게 뭐가 문제입니까?’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는 그래요. ‘네가 재앙받기 전에는 꼭 그 따위 소리를 하더라.’ 재앙을 받아볼 때 ‘아, 이게 바로 악행이었구나.’하면서 그 전부터 전부 다 악행이 되는 거예요. 심지어 태어난 것 자체가 악행이 돼요. 태어난 것 자체가 악행이 되는 이유, 보통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반발심이 일어날 거예요.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부모가 태어나게 해서 태어났는데 내 부모에게서 내가 태어났는데 이게 뭐가 잘못인가, 이게 왜 악행인가?’ 하는데 부모 자체가 악행이에요. 이것을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이라고 합니다. 육 자체가 악행이에요. 육으로 난 것은 하늘나라 못가는 이유가 육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태어나는 것이든, 사고팔고 시집가는 것이든 죽든 살든 무슨 짓을 하든지 그것이 악행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묻지요. 악행인줄 알면서도 왜 만들어 놓았느냐, 하지요. 여기서 한 번 봅시다. ‘내가 왜 재앙을 받아야 됩니까, 내가 왜 악행의 주체자가 되어야 합니까?’하고 항상 물음을 나로부터 출발하는데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특수한 관계입니다. 이게 뭐냐, 더 이상 나로부터 출발하지 말고 왜 우리는 언약 안에서 재앙을 받는 역할을 해야 됩니까, 라고 물으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중요하지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코어>라는 과학영화가 있어요. 지구내부의 구조를 탐색하는 모험가들을 다룬 영화에요. 압력과 열에 견디는 기구를 만들어서 갱도를 만들어서 지구 내부의 맨틀이라는 마그마가 있는 깊은 곳까지 탐험을 해 들어가는 겁니다.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지구 내부가 5천도, 6천도가 됩니다.

지부내부가 그렇게 뜨거우니까 아직도 지진이 나고 화산폭발이 일어나는 거예요. 현재 우리가 딛고 있는 지표 위는 춥지요. 그렇지만 땅 속은 뜨겁지요. 그래서 온천도 나오는 거잖아요. 지구 내부 탐사 팀이 박사와 비행사하고 여덟 명이 들어갑니다. 지구 내부에 들어가기 위해서 특수금속으로 만든 아주 견고하게 제작된 기구를 유다백성이라고 봅시다.

언약백성, 하나님께서는 유다백성들과 언약을 맺어서 인간들의 오류의 지점이 어디인가를 탐색하는 하나의 기구로 사용하시는 것이 구약 이스라엘입니다. 오늘날 우리 신약의 성도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아니면 아무도 이것을 이야기해 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덮어버리면 누가 남느냐, 내가 남고 내 밖의 무엇이든, 그게 예수든 부처든 하나님이든 내가 나 유리하라고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내 것을 누가 욕하거나 깨거나 오류 있다고 이야기하면 강력하게 반발하고 도전해버려요. 그래서 성경이든 기독교든 어떤 종교든 뭐든지 날 위해서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믿는 것도 날 천당보내기 위해서 있다고 보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날 가리고 쓸 줄을 몰랐지요. 한국교회 개혁주의신학은 이것까지는 이야기해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용해서 세상에서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합니다. 그걸 이야기 해줘야 교회에 돈 내라는 이야기가 정당화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당신은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들어 쓰셔서 일을 시킵니다.’ 할 때 ‘당신을 들어 쓰신다.’는 그 일의 목적이 뭐냐, ‘너는 왜 오류가 있으며 지금까지 태어나서 살아온 인생전체가 악행일 수밖에 없는가.’ 그 지구의 뜨거운 지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차마 들어가기 싫어하는, 차라리 안 들어가고 마는, 그 재앙의 한 복판, 저주의 구심점 속에 주께서는 성도를 가지고 집어넣는 겁니다.

이걸 이야기해줘야 돼요. 한국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주께서 우리를 훌륭하게 쓰신다.’ 하는 것은 세상 모든 종교가 다 그런 소리합니다. 이슬람교나 심지어 불교도 그런 소리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 이것은 철학자들이 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에요. 그게 바로 구멍이 뚫어져야 돼요.

결국 ‘하나님이 나를 들어 쓰신다.’는 그 노림수가 뭐냐, 나는 가치 있고 고귀하다는 마지막 것을 챙기기 위한 수작에 불과한 거예요. 한국교회만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 2천년 교회사 신학이 다 그래요. 인간의 가치가 뭐냐, 여기서부터 출발한 거예요. 인간의 가치자체, 가치가 있다는 정도가 아니고 없는 정도도 아니고, 악행을 해야 될, 저주 받아야만 될 그 이유를 본인들이 아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도달했을 때 나오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다백성을 가지고 악행이라는 것을 모르기에 미리 악행을 알려주기 위해서 어디로 데려가느냐, 미리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네가 악행을 돌이키면 재앙이 오지 않는다. 그러나 악행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재앙이 온다.’고 해서 유다나라가 하나님과 짐짓 동행해서 가야될 곳은 결국은 재앙이며 그 재앙에서 진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알아야 될 것은 ‘아, 이래서 우리는 악행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구나.’를 아는 지점까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미리 당겨서 이야기를 한 거예요.

‘너희가 재앙을 받을 때 너희가 땡잡은 줄 알아라. 비로소 너희는 죄가 뭔지를 유일하게 아는 민족이 되었어.’라고 지적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냥 위에 살면 되는데 조그만 기구를 만들어서 그 위험한 불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 뜨겁고 위험천만한 지구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들어갈 때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동행자가 계신다는 겁니다. 재앙을 내려주시는 하나님께서 재앙만 내리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그 재앙을 받을 백성과 함께 받는다는 겁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죽을 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텐데 돌에 맞아 죽었나니.’ 이러면 안돼요.

성도의 죽음은 물에 빠져죽든 절벽에 떨어져서 죽든지 간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죽음이 되어야 되지 그냥 내 죽음 내가 죽어버리면 그것은 불신자들이 저주받아 죽는 죽음과 똑같습니다. 악행을 행하는 육적인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언약 따라서 죽음이 결정되는 겁니다. 성경에만 나오고 다른 데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모든 인간은 죽으면 갈라서게 되어 있습니다.

한쪽은 떨어지게 되어 있고 한쪽은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헤어지는 거지요. 지옥은 불구덩이에 떨어진다고 표현하고 하늘나라는 올라간다고 되어 있어요. 그 두 개, 떨어지는 것과 올라가는 것을 합쳐 놓으면 그것이 언약,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 떨어지는 역할을 해야 될 자가 있고 올라가는 역할을 해야 될 자가 있는데 올라가는 것이 바로 양이고 천국백성들이고 떨어지는 역할을 하는 것이 진노의 그릇들입니다.

악행을 하니까 떨어지는 것이 마땅한데 올라가는 자들은 예외적이에요.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천사도 아닌 주제니까요. 보통사람들의 죽음은 살다가 죽으면 떨어지는 죽음이에요. 이 동네 아파트에 사는 조깅하는 주민들처럼, 아침마다 담배피우면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조깅하면서 살다가 죽으면 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라가는 사람은 죽을 때 그냥 자기죽음을 죽으면 안돼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죽어야 올라갈 수 있어요. 그래서 매일같이 어떻게 잘 죽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언제까지 살지 모르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늘 죽을 때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죽음이어야 된다 그 말이에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죽음이어야 되는데 그러면 연탄가스에 죽는 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죽음입니까, 안 그러면 집에서 십자가 만들어서 매달리는 것이 십자가죽음입니까?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는 인간이 목수한테 부탁해서 형틀을 만들어서 매달린다고 해서 십자가죽음이 아니고 성령, 하나님의 영이 오게 되면 십자가의 영이 온 것이 되어서 성령과 함께 있는 것이 그 사람이 살아 있어도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으로 쳐주는 겁니다.

죽고 그 안에 누가 사느냐, 본인이 살면 안돼요.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예수 믿고 네가 살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을 하는 거예요. 예수 믿고 ‘내가 살았다.’ 하는 소리를 하지 말란 말이지요. 내가 산 게 아니면 누가 살았는데? ‘네 안에 그리스도가 살았다.’는 거예요.

나는 성령이 임할 때 이미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또 묻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했는지 안 임했는지는 어떻게 아느냐?’ 바로 방금한 그 소리를 하면 성령이 임한 사람이에요. 왜 그것으로 성령이 임한지를 아느냐 하면 그게 성경대로 이거든요. 성경에 있는 실존이 그대로 나의 실존임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사람 앞에서는 밥 먹고 목욕하고 운동하고 이렇게 살아있지만 언약 안에서는 이미 우리는 죽은 자가 돼버려요. 죽은 자가 되어버리고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언약 때문에 새롭게 재구성한 예수님의 몸으로서 살아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으로 살아 있게 되면 그 사람의 하루하루의 삶이라는 것이 뭐냐, ‘나는 천국 간다.’가 아니라 ‘언약이 이러한 기능을 한다. 새 언약이 이런 효과를 주더라. 예수님의 공로가 이런 능력이 있더라.’라는 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과의 동행하는 삶이죠. 방금 신약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을 미리 당겨서 구약 유다나라 마지막 때에 미리 장착한 것이 뭐냐,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유다백성아, 너 악행 모르지?’ ‘모릅니다.’ “재앙을 받아봐야 아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재앙을 주게 되면 그때 네가 재앙 받은 것을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 말고 ‘아, 정말 하나님의 약속은 빈틈이 없구나. 진짜 악행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재앙을 주는 것이 맞구나.’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계심, 주의 말씀의 살아계심을 재앙을 통해서 알아라.”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을 인간의 지식으로 알아버리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재앙 안 받으려고 수작을 부립니다. ‘하나님, 이거 안할 테니까 재앙 내리지 마세요.’ 하고 삐지는 수가 있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지적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게 되기에 진짜 자기 악행을 모르게 되는 겁니다. 약간 어려운 이야기지만 대표적인 사람이 이런 경우에요.

예수 믿으라고 하니까 예수도 안 믿고 ‘나 예수 믿는다.’를 자꾸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예수를 믿게 되면 반드시 ‘나는 못 믿었는데 주께서 믿게 하셨습니다.’ 이게 나와야 될 텐데 ‘내가 믿습니다.’ 해요.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쌍시옷이 들어가요. ‘여러분, 믿쑵니까, 믿쑵니까?’ 이것은 신념이거든요. ‘믿으씨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으씨기 바랍니다.’

조 용기 목사가 ‘그러므로’를 중간 중간 반복하는 것은 그 다음 말이 생각 안 나니까 말을 이어 붙이려고 하는 수법이거든요. 일종의 화술이죠.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나는 믿습니다.’를 자꾸 반복해서 이야기를 합니까? 그것이 거짓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목사님은 예수 믿습니까?’라고 묻기에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니까 그쪽에서 ‘거봐, 안 믿잖아.’

언약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몰라요. 내가 예수 믿어서 내가 천당 가려고 해요. 그거 자체가 악행이에요. 그게 악행이에요. 그게 자기가 안 죽은 거예요. 예수님 만나본적도 없습니다. 예수 믿고 고상한 사람 되어서 장사해서 목사해서 밥 먹고 살려고 하는 거예요. ‘이 근호 목사는 법 먹고 사는데 왜 나는 밥벌이도 안 되나?’ 한 대요.

죽었거든요. 죽은 자는 밥 먹고 사느냐, 마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성령 충만함을 받으니까 ‘주께서 조치를 하셔서 드디어 저를 죽게 하셨군요.’ 감사히 주님 앞에 갔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군요. 이미 죽은 자를 적당할 때 죽게 하셨군요.’ 이미 죽은 자를 적당할 때 적당하게, 돌에 맞아 죽게 하셨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날마다 죽노라.’ 그것은 뭐냐, 세상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악행을 하기 때문에 언약이 안 느껴져요.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새 언약의 영을 받게 되면, 내가 살아온 처음부터 주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성령 주셔서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를 천국 보내주시는 예수님의 공로가 너의 생존이나 너의 존재보다 더 월등하게 소중하다.’ 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 성경말씀 이 책으로 그대로 다가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결국은 죽을 사람, 문제는 죽고 난 뒤에 떨어지느냐, 올라가느냐의 문제인데 살아 있으면서 십자가를 알게 하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날마다 살게 하시는 이 원리가,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람인줄 아는 그것이 올라가는 사람의 특징인 줄 알고 그것을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저희들입니다. 이제 이 원리가 앞으로 계속 우리를 살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