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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뒤에서 본 한국교회] 로마서 2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뒤에서 본 한국교회

[뒤에서 본 한국교회] 로마서 2

정인순 2011. 1. 3. 23:58

로마서 2강

 

05칠곡강의 [뒤에서 본 한국교회] 36 - 로마서 2

05,05,1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어느 칠곡 집사님의 간증 ??

 

제가 인터넷으로 성경에 대해서 어느 양반하고 이야기를 할 시간이 있었는데, 이 인간이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다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앞부분 잘렸음)

 

* 상 대 방 : 선택받은 사람은 절대 그럴 수 없는데, 님(?)의 성경관에 문제가 있습니다.

* 칠곡집사 : 저의 성경관이라니요? 그러면 그 성경구절을 대세요? 저는 증거를 내밀 수 있습니다.

* 상 대 방 : 무슨 증거요?

* 칠곡집사 : (이런 양반들은 라이센스에 약하다 싶어서) 총신대 교수를 지냈고, 지금 대구 동신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권성수 교수가 저하고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 상 대 방 : (움찔하며) 그런데 구원이라는 것은요?

* 칠곡집사 : 전적 구원이라는 것은 자기의 뜻과 아무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입니다.

* 상 대 방 : 그렇다면 비유로 이야기하겠는데, 고아원에서 어느 아이를 어느 가정으로 양자로 입적을 시키려고 해도 본인이 입적을 거부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 칠곡집사 : 그러면 저도 비유로 말하겠는데, 그 아이가 양자로 입적되는 것을 거부할 입장이 전혀 아닌데, 그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비유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 상 대 방 : ? ? ?

* 칠곡집사 : 그렇게 구원을 가지고 평점을 매기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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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그리고 제가 보니 그들이 무엇이 '선'이고 '악'이며, 또한 무엇이 '의' 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는데, 특히 선과 의를 같은 개념으로 여기고 있던데, 이 의는 오직 예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나오는 개념인데, 그런데 자기들이 착한 일을 한 것을 가지고 의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구제하고 또 교회에서 봉사한 것을 두고서 의로 생각하고 말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인가요?

 

◈ 의(義)는 하늘에서 빛처럼 쏟아지는데 !!

 

성경에서 나오는 의는 오직 예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나오고, 또한 의는 오직 언약 안에만 있는데, 그리고 이 언약은 이 지상에서 생산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사야 45장에 보면 나오는데(?), 즉 의는 하늘에서 빛처럼 쏟아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자기가 살아온 그 삶의 경험을 통해서 선과 악을 이야기하는데, 비록 대구라는 동네에서 조금 살았지만 말이다. 거기에서 자기가 부모나 이웃을 통해서 들었던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또 학교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선과 악을 판단하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입장이 바뀌면, 자기가 그런 악을 행세해놓고는 "어쩔 수가 없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핑계를 댄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래도 자기들을 보고 무당이라고 하니 너무 싫어하던데요? 그리고 저를 보고 "님은 구원을 받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해서, 그래서 제가 "저도 저 자신을 제대로 모르는데,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야기를 하다가 상대방이 너무 열을 받아서 그런 것 같은데, 우리는 그런 것에 너무 흥분하지 말고 복음만 전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흥분이 되면, 자기 마누라에게만 흥분하면 되고 말이다.

 

◈ 이제 본론인 로마서를 !!

 

이제 오늘은 로마서 강의를 두 번째로 하겠는데, 오늘이 스승이 날이라고 좀 바쁜 것 같은데, 일단 다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지난번에 로마서 3장까지 했는데, 물론 여러분이 모두 잊어버렸지 싶어서 다시 묻겠는데, 좀 어려운 부분이라서 말이다. 3장 7절과 8절을 다시 보자.

 

(롬 3: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롬 3: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誹謗)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定罪) 받는 것이 옳으니라

 

이 내용은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니 유대인이 그것을 듣고서 빈정거리는(?) 내용인데, 즉 자기들이 거짓말과 같은 것을 해서, 그런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죄에 대해서 용서를 해주니, 그렇다면 자기들이 거짓말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오히려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게 반박이 들어왔을 때 어떻게 답변을 하면 되겠는가? 지난 시간에 했는데, 물론 다 잊어버렸지 싶은데 말이다.

 

◈ 바울아, 죄를 더 지으면 더 영광이 ??

 

그 유대인이 말하기를, "바울 당신의 말대로 하면, 하나님이 죄를 지을 때마다 용서를 해준다고 하니, 그러면 죄를 자꾸 지으면 지을수록 용서를 많이 해주니 은혜의 양이 많아지지 싶은데,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죄를 더욱 더 많이 지으면 되겠네. 그렇지?" 라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그런 유대인을 보고 "당신은 선악과도 모르나?" 라고 하면 되지 않나요?

 

제가 지난 시간에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지 싶은데, 저의 대답은 무엇인고 하니, "선을 행할 필요가 없는데, 아직도 그렇게 거짓말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식으로, 그렇게 선을 행하겠다는 생각을 왜 아직도 가지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답변이라는 것이다.

 

◈ 사도바울, 굳이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 ??

 

다시 말해서, 선을 행하지 않아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선을 행하겠다고 하느냐는 말이다. 즉 "하나님, 제가 이렇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라고, 자꾸만 그렇게 자기의 자기의 행위를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기어이 어디 한 모퉁이라도 자기의 업적을 집어넣으려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 얼마나 못됐는지, 자기가 그렇게 잘못했다고 회개를 했으니, 그런 회개하는 자기 모습이라도 좀 잘한 것으로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 아니,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자기 자랑을 !!

 

그래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당신이 그렇게 해서라도 꼭 니들 자랑을 하고 싶은가?" 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주장하는 모든 복음은 십자가에서 출발하는데, 즉 그렇게 십자가 안에서 출발해서 십자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우리가 논쟁을 하던지 무엇을 하던지 간에 항상 십자가만을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유대인은 뭐라고 하는가? 자기는 죄를 더 지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된다고, 즉 거짓말을 계속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얻는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놈이냐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지금 도대체 피를 흘리고 있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런 말이 나오느냐는 것이다.

 

◈ 그냥, 탱큐 베리 머치, 끝 !!

 

그렇다면 그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뭐라고 해야 하는가? "정말로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모든 것이 다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는데, 그런데 굳이 그렇게 애써서 사고를 치고 말고 할 이유가 뭐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유대인의 행태를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즉 "내가 이렇게 복음을 아니 얼마나 대단한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의 의로움을 결단코 포기하지 못하는데, 그 뒤에 나오는 3장 9절 이하에서 뭐라고 하는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되고자 설치지 않아도 이미 죄인이라는 말이다.

 

(롬 3: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 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그래도 갉아먹는 만큼은 '자기 의' ??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인간은 그렇게 분명히 죄인인 것은 맞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동안 율법을 어떻게 이용했는고 하니까, 하나님의 이렇게 쌓여있으면, 조금이라도 율법을 갉아먹으면(?) 그만큼은 자기 의(義)라는 것이다. 또 조금 더 점령해서 더 갉아먹으면 그만큼 더 자기 의가 된다는 말이다. 물론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갉아먹는 만큼은 그것이 자기 의가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아담을 왜 에덴동산에서 추방했는가?

 

여기에 대해서, 오늘은 조금 더 어려운 것을 해보겠는데,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는 말씀에 대해서, 인간이 선악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에덴동산에서 살아갈 수가 있는가? 물론 없는데, 그러니 이 에덴동산이라는 것은 선악을 모르는 것과 결합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욕심이 있어서, 선악은 선악대로 알고, 또한 에덴동산은 에덴동산대로 챙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두 가지를 모두 다 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를 보존하기 위해서 인간을 추방하는 쪽으로 결정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참 흥미로운 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었으면 거기에 대한 해독제를 주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보다 생명나무를 더 귀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발상이 도저히 인간에게는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잠시, 구원파 '박옥수'에 대해서 !!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인간이 중요하지 생명나무가 중요하지 않다" 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간이 소위 구원파의 '박옥수' 인데, 지금 대구실내 체육관에서 집회를 한다고 난리인데 말이다. 그 사람이 주장하는 내용이,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데, 그 구원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이다" 라는 것이다.

 

들어보면 맞는 말인데, 그러니 한국교회가 여기에 대해서 반박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겨우 한다는 소리가 그들이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한다고, 그것을 가지고 시비나 걸고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은데, 성경은 인간의 구원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지금은 인간이 무죄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말이다.

 

◈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가로막는데 !!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막는 것은, 그것은 바로 생명나무인 예수 그리스도를 막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용도가 아닌데, 구원은 예수님에 의해서 선택된 그 관계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상태에서 구원을 받겠다는 것은 주께서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에 그런 상태에서 구원을 해준다고 하면, 도대체 왜 추방을 시켰느냐는 것이다.

 

◈ 살려주세요 !! 메롱 ??

 

예를 들어서, 제가 여기 5층에서 아래로 어떤 사람을 집어던졌는데, "에이, 죽어버려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던졌는데, 저기 밑에서 자기를 살려달라고 외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얼른 내려가서 그 사람을 살려준다고 하면, 그것은 여기서 집어던진 이유가 전혀 없어진다는 것이다. 살려줄 것을 왜 힘을 드려서 집어던지느냐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이 세상으로 집어던졌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을까 싶어서, 즉 그 생명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가떨어진 놈은 그 생명나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 다시 에덴동산에서 살게 해달라고 하니, 그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 아, 내가 그때 실수했다. 미안하다 ??

 

하지만 박옥수는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 인간을 구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던진 분이 다시 내려와서는 "아, 내가 그때 실수했다. 정말 미안하다. 다시 올라가자"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사과하는(?) 의미로서 예수님을 이 땅에서 보내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건지는 행위를 해야한다는 것이니, 그러니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하지만 구원이란 무엇인가? 생명나무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상태에서, 오직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결정된 사항에 의해서 진행된 것으로서, 그 결과로서 아들이 내려가서 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생명나무가 생명나무의 값을 한다는 말이다.

 

◈ 박옥수 - 하나님이 구원에 대해서 책임을 !!

 

그러므로 "야,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을 하셨구나" 라고 할 때, 비로소 그것이 생명나무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옥수의 주장은, 하나님이 실수를(?) 했으니 당연히 책임을 져야한다는 쪽이라는 말이다. 물론 박옥수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설교를 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까놓고 말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박옥수의 구원파는 "나를 누가 구원해주리?" 라는 인간의 종교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방식인데,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그러한 인간을 구원해준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집어던진 하나님과 구원해준 하나님이 그만 충돌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래도 박옥수가 한국교회 무당들보다는 건전해 보이는데요?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그러한데, 한국교회가 신주단지처럼 여기는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공격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율법을 공격했으니 건전하다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생활이 검소해서 건전하다는 차원이 아니고 말이다. 사실상 그 생활은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하고 말이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박옥수를 이단이라고 깐다는 것이다. 주일성수와 십일조와 율법의 문제 때문에 말이다.

 

◈ 박옥수의 공헌(?) - 주일성수, 십일조, 율법 공격 !!

 

박옥수는 이런 것을 다 알고 있는데, 그러니 한국교회가 박옥수를 공격하려면, 십일조와 주일성수가 성경적인지, 율법을 지켜야, 즉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지, 여기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논쟁이 일어나게 되고, 그러면 기존 교회가 불리하기에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박옥수 측은 너무나 간단한데,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말이다.

 

◈ 그래도 박옥수는 침례교 출신 !!

 

그런데 박옥수의 구원파는 침례교의 한 분파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침례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일종의 알미니안주의라는 것이다. 즉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데, 예수님의 피로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믿고 안 믿고는 인간 자신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침례교에서 잘렸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 특징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 박옥수 쪽은 예수를 상품화하는, 즉 일종의 예수산업인데, 즉 역사상 예수보다 더 히트작은 없다는 것이다. 자기들 기업을 확장하는데는 있어서 예수를 팔아먹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것인데, 그래서 원리도 간단하고 말이다. 마치 젤콤(?)처럼, 한 알에 모든 기생충들 다 박멸한다는 것이다.

 

◈ 그러니, 결국 예수를 이용할 뿐 !!

 

그러니 예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구원하는 시다바리(?)인데, 일종의 도구라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인간 중심이고 말이다. 그러니 결국 전혀 건전하다고 볼 수 없는데, 한국교회나 예수를 이용해서 장사하기는 모두 다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좀 더 간결하고 깔끔해 보인다는 것이다.

 

* 질문 -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보면 그렇지 않나요? "램프 거인아, 램프 거인아" 라고 불러서, 거인이 나오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말입니다.

 

물론 그러한데, 그런데 박옥수는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거부하고 예수님의 피만 믿으면 된다고 하니, 그것이 차이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기가 당연히 좋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그 양반이 저처럼 한 인물을 하니 여자들이 많이 모여든다는 것이다.(ㅋㅋ)

 

* 질문 - 그러면 그쪽에는 성경적인 마인드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들겠네요?

 

사실은 성경적인 마인드가 아니고 사업적인 마인드가 있는 인간들이, 예수산업으로 성공을 하려고 몰려든다는 것이다. '예수' 라는 상품은 이미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굴려서 돈을 벌지, 거기에 대해서 잔대가리를 굴린다는 것이다.

 

◈ 다시 로마서 3장을 !!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하지만 이 로마서 3장은 박옥수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데, 구원의 문제는 전혀 우리 권한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 3장의 내용인데, 쫓겨난 주제에 무슨 구원을 시켜달라고 뻔뻔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즉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과제이지, 결코 우리 인간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종교는 고통에서의 벗어나는 것인데, 그러니 그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지 하지 못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찾고 부처를 찾는 것은 일종의 함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죽어서 갈 곳에 막연하니 안타까워서 부르짖는 소리라는 것이다.

 

만약에 자기 집안이 기독교 집안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예수를 찾아서 부르짖고, 또한 불교 집안 같으면 부처를 찾고 부르짖을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찾고 부르짖는다고 해서, 즉 몸부림 만부림을 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 인간의 함성이 아닌, 율법 외에 한 의 !!

 

그래서 로마서 3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렇게 제 아무리 우리 인간이 부르짖어도 그것은 마지막 심판 안에서 죽을 몸부림에 결코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서 하나님은 예수님과 약속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 외에 한 의" 라는 것이다. 이 부분을 지난 시간에 강의했는데, 기억이 나지요?

 

그러니 그 '의'는 우리가 찾아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는데 우리에게 그 의가 찾아와서 곧장 꼽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의가 우리를 의인되도록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잘나서 의인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고 말이다.

 

◈ 예수야, 이제 숙제할 시간이다 ??

 

다시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숙제(?)가 있는데, 바로 예수님의 그 숙제에 의해서 자기 백성을 의인되도록 까지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을 살펴보기 위해서 히브리서 10장 5절을 보겠는데,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히 10: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 제사와 예물이 아닌, 오직 한 몸 !!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않는다고 했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오직 '한 몸' 만을 받으시는데, 그런데 그 한 몸은 누가 준비한 것인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한 것인데, 그렇게 예비된 분이 오심으로서, 즉 그분이 등장함으로서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9절에 나온다는 것이다.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 한 몸으로서의 예수님 등장은 새 것이고, 옛 것은 그동안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게 했던 율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옛 것이기에 폐기처분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 16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제가 읽습니다.

 

(히 10: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 새언약은, '한 몸' 플러스 '마음속 기록'까지

 

여기에 보면,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라고 하는데, 이것을 누가 하는가? 우리 마음에 새로운 법을 기록하는 것까지도 역시 한 몸이 되시는 예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두 개를 합쳐서 '새언약'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새언약은 두 개를 합친 것인데, 하나는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한 몸' 인데, 그것은 무엇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고 하니, 제사와 예물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 9절에 나오는 것과 같이 옛 것, 즉 율법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예 우리의 마음속까지 새로운 법을 집어넣는 일까지도 역시 한 몸이신 예수님의 몫이라는 것이다.

 

◈ 로마서 3장 - 내 백성을 의인되게 만든다 !!

 

이것이 바로 새언약인데, 그러니 십자가까지는 예수님이 하시고, 나머지는 우리 인간이 담당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믿도록 하는 것까지도 예수님의 몫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로마서 3장에서는 택한 자기 백성을 "의인되게 만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기존 교인들은 이런 것을 배우지 않아서 모르나요?

 

그것이 참으로 이상하기는 한데, 결국 성령을 받지 않아서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그렇게 "의인되게 만든다" 라고 해도 시비를 걸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러한데, 만약에 예수님이 자기를 의인이 되게 만들지 않으면, 자기는 그냥 지옥에 가야 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자들은, 그러한 것을 요구할 권한이 전혀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 질문 -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를 의인이 되게 주셨으니, 당연히 교회에 가서 충성봉사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그들이 주장을 하지 않습니까?

 

성도의 배를 째게 되면(?), 물론 지방이 먼저 튀어나오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만들지 않은 의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을 로마서 3장에서는 '율법 외의 한 의' 라고 하는데, '율법의 의'가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성도의 특징은, 전혀 율법을 지킬 이유도 없고, 또한 지킬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 제 몸 속에는 우유가 있습니다 ??

 

예를 들어서, 여기 이렇게 데미소다와 우유가 있는데, 자기는 이제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이 데미소다를 제대로 한번 마셔보려고 했는데, 그런데 그만 이 우유가 자기 몸 속으로 들어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를 째게 되면 데미소다가 아닌 우유가 들어있는데, 그래서 "제 몸 속에는 우유가 있습니다" 라고, 그것만 이야기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 목사님은 아침햇살을 좋아하는데, ㅋㅋ)

 

어떻게 제거 예로 든 것이 좀 이상한가요? 아무튼 그렇게 되니, 우리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건더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러 예수님께서 그런 것을 미리 다 차단을 시킨 것이지만 말이다. 아직까지도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나요?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예를 들어서, "거짓말하지 마라" 라고 하면, 그것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면 결코 안 되는데, 그것이 율법이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배를 갈라보면 "거짓말하지 마라" 라는 것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율법 말고 다른 한 그 무엇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의가 말이다.

 

◈ 그러니, 성도의 특징은 오직 한 가지뿐 !!

 

만약에 우리 속에 그러한 율법 외의 한 의가 들어있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데미소다가 아닌 남양우유가 들어있으면 말이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오직 한 가지뿐인데, 예수님의 공로를 자랑하는 것, 그것밖에 다른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그 의를 증거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한 의를 증거를 사도바울은 어떻게 하는고 하니, 그것이 26절에 나온다는 것이다.

 

(롬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의롭게 하는 그 주체자가 도대체 누구인가? 도대체 누구의 능력이 동원되어서 의롭게 된다는 말인가? 당연히 예수님의 의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말이다. 즉 예수님의 자기 숙제라는 것인데, 우리 숙제가 아니고 말이다. 우리가 의인이 된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사도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했는데, 그것은 어떤가요?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것은 지금 이야기하는 이 의(義)와는 상관이 없는데, 그것은 아까 말한 선과 악의 문제이고 말이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법을 알고 있는데, 그런데 그 법이 "간음하지 마라", 또 "살인하지 마라" 라고 요구하면, 즉 자기에게 그러한 법이 들어오면 그만 그 법을 어기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법을 못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어기고 싶다는 말이다.

 

◈ 듣는 순간 탐심이 발동 !!

 

또한 "탐내지 마라" 라는 것을 듣는 순간에, 그 탐심이 우리 몸에서 일어난다고 로마서 7장에 나오고 말이다. 저의 경험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듣지 않았으면 몰랐을 텐데, 그것을 듣는 순간에 탐심이 들어온다는 말이다.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 인간의 마음은 남의 나라 전쟁터 !!

 

그러니 우리 마음은 그야말로 남의 나라 전쟁터인데, 율법은 율법대로 분주하게 폭발하고, 예수님의 의는 그 의대로 자기 할 일을 하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 몸이 자기 몸이 아닌데, 그것을 두고 피조물이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하나님께서 마음껏 다루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아' 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사고방식에 불과한 개념인데, 그래서 자아는 그때그때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자아는 허구인데, 전혀 만질 수도 없다는 말이다. 즉 "이것이 나다" 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말하기를, "자아는 타인이 나를 지시할 때, 비로소 그때 그때마다 나를 알 수가 있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타인이 바뀌면 또 다른 자아를 상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만큼 인간의 '자아' 라는 것은 허무맹랑하다는 말이다.

 

◈ 예, 이근호 목사는 잘생긴 사람입니다 ??

 

예를 들어서, 이근호 목사가 이렇게 있다고 하면, 그래서 "이근호 목사가 누구인가?" 라고 물으면 뭐라고 하겠는가? "예, 저는 이런 이런 인간입니다" 라고 하는데, 사실은 다른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하고 조정해서, 그렇게 해서 자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곳에 가서도 이근호 목사에게 "이근호 목사는 똑똑하다, 완벽하다, 훌륭하다, 잘생겼다" 라고 한다면, 그래서 누군가가 이근호 목사에게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물으면, 그는 뭐라고 대답을 하겠는가?

 

* A : 이근호 목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 B : 예, 이근호 목사는 잘생긴 사람입니다.

* A : 누가 그렇게 말하든 가요?

* B : 예,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 A : 정말이지요?

* B : 예, 확실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대인관계로, 즉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시대에 따라, 시간에 따라 자꾸만 변하고 흐트러진다는 것이다.

 

* 질문 - 왜 그렇게 자꾸만 자신을 정립하려고 하지요?

 

그것은 바로 자기의 구성원리인데, 그렇게 계속해서 자신을 재구성하는 이유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자기가 그만 신이 되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잊어버렸기에(?) 모든 일을 이제는 자기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책임을 지는, 즉 자기가 자기 행동의 주체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 왜 인간은 자기 몸을 가리는가?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워서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몸을 가렸는데, 누가 그렇게 했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는가? 자기들이 스스로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그때는 부부사이라도 부끄러워서 서로가 따로 따로 라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벌거벗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에는 마치 별거하는 부부처럼,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도 처음 결혼할 때는 부부가 서로 한 몸이라고 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끌어 앉고 있다가, 그런데 나중에는 왜 각 방을 쓰고 서로 말도 하지 않고 하는가? 그것은 그만큼 자기 자아성이 점점 더 굳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질문 - 스스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가요?

 

물론 그러한데, 왜냐하면 자기가 신이니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 나머지 모든 것들은 다 자기의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 발에 밟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바로 악마의 얼굴인데, 모든 것이 자기가 '돗대'이기 때문에 말이다.

 

아무튼 이 로마서 3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지금 사도바울이 "우리가 거짓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욱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공로자가 아닌가?" 라는 유대인과의 논쟁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가? "니는 아직도 니 자신이 착한 일을 했다는 것을 남기고 싶은가?" 라고 하는데, 즉 그런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너무나도 헛된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짜 하나님은 우리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외의 한 의, 즉 예수님과 상대를 했는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그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의인으로 만들어내는 작업까지 우리에게 실시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로마서 3장의 내용이라는 말이다.

 

◈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그래서 로마서 3장 마지막 절인 31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율법을 우리가 세운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을 실시한 예수님이 이미 율법을 굳게 세우는 쪽으로 우리를 활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율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은 행함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다.

 

(롬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지금 다들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표정들인데, 제가 너무 빨리 강의를 진행했는가? 행함은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인데, 그러니 행함의 주체자는 누구인가? 우리 자신인데, 그러니 행함으로 신에게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의인이 된 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는 말은, 밑에서 위로 올라가서 의로운 것이 아니고, 위에 계신 어떤 분이 내려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

 

다시 말해서, '율법 외의 한 의'가 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의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 3절에 보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라고 하는데, 그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믿는 그런 우리의 믿음으로서는 율법이 결코 폐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의 믿음으로는 말이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것이 행함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그런 관계를 두고서 믿음이라고 하니까, 그러니 이 믿음 속에는 "이미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미 다 이루어진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을 믿고 난 뒤 율법을 한번 제대로 지켜보겠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들은 율법이 굳게 세우는 것이라 여기니 말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주장하는 것과는 오히려 반대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이런 31절과 같은 구절이 사실은 헷깔리거든요? 주님의 그런 믿음이 아니라, 마치 자기의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바로 그런 것 때문에 로마서 4장에 들어가면 사도바울이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드는데, 그의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말이다. 먼저 4장을 같이 한번 읽어보자.

 

(롬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 아니, 경건치 아니한 자가 의롭다고 ??

 

여기 5절 말씀을 보자면,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경건치 아니한 자가 의롭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전혀 경건치도 않은데 말이다. 아무튼 행함은 전혀 여기에 삽입이 되지 않았는데, 즉 "경건치도 아니한 내가 이렇게 이렇게 열심히 행했더니만 의롭게 되었다" 라고 말이다.

 

그리고 4절 말씀을 보면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라고 하는데, 그것은 곧 은혜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덮어씌우신 은혜가 무엇인고 하니, 즉 경건치 않고 일을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의롭게 된 자체가 완제품이 되어서 성도에게 넘겨졌다는 것이다. 완제품의 상태에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율법을 굳게 세웠다는 말이다.

 

◈ 성도에게는, 새로운 숙제가 없어 !!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제대로 율법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라는 것은 틀린 말인데, 왜 그런고 하니, 새롭게 추가해야 할 숙제가 없다는 것이다. 즉 경건치 않은 자를 경건하도록 해서 일을 시켜서 의롭게 한 것이 아니라, 전혀 경건치 않은 자를 이미 의롭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또 다시 무슨 할 일이 남아있느냐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기존 교회에서는 그렇게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하면서, 가인과 아벨까지 들먹이면서 십일조를 강조하면서 율법을 계속해서 이야기하던데요?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이미 신이 되었기에, 자기의 행함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면 상당히 기분 나빠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자기도 뭔가 좀 곱사리라도 끼어 들고 싶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을 모두 다 이루면 그것이 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의가 이미 경건치 않은 자에게 선물로서 모두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대체 더 이상 무엇을 행하고 말고 할 것이 남아있다는 말인가? 이미 율법을 굳게 세운 것까지도 선물로서 모두 다 받았는데 말이다.

 

* 질문 - 목사님, 이제 감을 좀 잡은 것 같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또 한방 터트려야 하겠는데, 그렇게 해도 되지요? 그냥 참을까요?

 

그건 알아서 터트리시면 되는데, 물론 욕먹을 각오는 하고 말이다. 아무튼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4장 8절에 보면 '복' 이라고 하는데, 즉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죄'가 나오는데, 이 죄는 무엇이 있을 때 드러나는가? 로마서 3장에서 했는데, 율법이 있을 때 드러난다는 말이다.

 

(롬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 야, 이래도 복이 아닌가?

 

다시 말해서, 율법이 있고 죄는 드러나고, 또한 '율법 외의 한 의'로 의인이 되고 말이다. 그러니 바로 이것이 복이 아니냐고 사도바울이 힘차게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율법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인데, 그런데 그 죄를 주님께서 모두 가리워주시고 용서해주신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율법을 굳게 세운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예수님의 공로를 증거하면 되지 더 이상 무슨 할 일이 남아있느냐는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 덕분입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이 모든 것이 예수님 덕분입니다" 라는 것은 행함이라고 할 수 없는데, 물론 그것을 가지고 자기 의를 내세우려고 하면 문제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 그런데 목사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함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묻는 것은, 이러한 율법 외의 한 의를 거부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데, "예수님, 제가 이 피를 찍어 발라서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피는 한 평생동안 짓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는 피인데, 그러니 성도는 80 평생을 살아도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사물놀이를 하든지, 품바타령을 하든지 간에 말이다. 오로지 십자가만을 쳐다보면 된다는 것이다.

 

◈ 예수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셔요 ??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자꾸만 떠나려고 하는데, "야야, 이제 피를 발랐다. 얼른 가자. 예수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셔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십자가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밑에 있으면 되는데, 목회를 하든지, 노가다를 하든지, 결혼을 두 번하든지, 또한 매일같이 낚시를 하든지 간에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십자가 밑에서 계속해서 용서함을 받는데,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셔요" 라고 해놓고 떠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평생을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새 천국의 어린양 보좌 앞에 도착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4장 14절과 15절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롬 4: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 율법에 속하지 않는 인간이 있는가?

 

여기에 보면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라고 하는데, 아니 율법에 속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는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율법에 속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율법이 없는 곳에 범함도 없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어디에서 할 수 있겠는가? 일반 상식적인 선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제가 아까 율법을 이야기할 때 율법을 어떻게 보았는가? 율법을 갉아먹은 만큼은 의가 된다고 했는데, 그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율법을 갉아먹으려고 달려들면 율법 전체가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좀 어려운 것 같아서 다시 이야기해보겠는데, 아까 법이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 법을 지킨 만큼은 의가 되는데, 즉 그렇게 갉아먹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은 전체가 우리에게 달려들어서 "너희들은 죄인이야" 라고 해버린다는 말이다. 우리는 한참 갉아먹으려고 하는데, 우리 머리 위에 쇠뭉치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야, 이런 쥐새끼 같은 놈들아"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이런 쥐새끼 같은 놈들아 !!

 

다시 말해서, "나는 오늘 성경 3장을 읽었어", "드디어 전도한 사람이 교회에 나왔어", "내가 기도한 대로 우리 신랑이 승진했어"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때 다른 법이 와서 그만 내리쳐버린다는 것이다. "니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임을 모르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 앞에서 의롭다 할 것이 없는데, 오히려 우리는 율법이 있음으로 범법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한 범법 중의 하나가 로마서 4장에 나오는데, 즉 아브라함이 아기를 낳지 못한다는 말이다. 사실은 그것이 당연한데,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아기는 약속에 의해서 태어나야만 하는데, 그러니 아브라함이 자기 능력으로 낳은 아기가 태어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은 아기를 낳지 못해야 !!

 

아브라함의 육의 자녀는 이미 있는 이스마엘인데, 사실 그런 자녀는 태어나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태어나봐야 얼마 있지 않다가 죽는데 말이다. 살아봐야 겨우 100년 동안이고 말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에게서 자식이 태어나는데 있어서, 그것이 아브라함의 솜씨가 되면 안 되고, 하나님의 약속의 솜씨로서 태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장차 오실 예수님의 솜씨인 것이지, 아브라함의 솜씨가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태(胎)가 죽음으로 인해서, 전적으로 자기가 어떤 몸부림이라도 쳐서 자식을 낳을 소지가 전혀 없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멍청하게 가만히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약속이 고지되는데, "내년 이때에 너에게 자식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조금은 역설적이지만, 아브라함이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는 이미 끝났다는 것을 너무나도 알기 때문에 말이다. 즉 아기를 낳게 되면 "제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낳았습니다" 라는 수작을 전혀 할 수더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하등의 그런 권리도 자기에게 없고 말이다.

 

◈ 십자가는 정작 믿을 방법이 없어 !!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말들은 하는데, 그러나 정작 그런 십자가의 피를 믿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아는 사람이 신앙인인데, 그러니 우리가 십자가의 피를 믿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성령님의 축복이라는 말이다. 자기가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그런 발상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 교인들의 99%가 뭐라고 하는가? 십자가를 자기의 힘으로 믿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언제 믿었습니까?" 라고 하면, "지난 번 기도원에서 기도할 때던가?" 라고 하면서 말끝을 흐린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바로 이단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의 태가 문을 닫았기에 더 이상 자기에게는 후손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그야말로 온 몸으로 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인간인지라 자식이 그리워서 자기의 종인 하갈과 합방을 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상태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자식을 주셨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십자가를 믿게 된 이유도 무엇인가? "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었습니다" 라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십자가는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믿지 못하는 십자가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 중요한데,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 십자가는 나도 모르고 너도 몰라 !!

 

아마 제가 글을 이런 식으로 쓰니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쉽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는가? "십자가는 우리가 모른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성령이 임해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아하, 이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씻어주기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사랑의 전부였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므로 십자가를 인식하는 사람은 자기 붕괴를 확인한 사람인데,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결국 그런 붕괴조차도 당신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라고, 즉 그런 붕괴를 아는 것도 자기 자신이 아니냐는 것인데, 만약에 그렇게 질문하면 뭐라고 해야 되나요?

 

그때는 이렇게 답변하면 되는데, 언약은 두 가지의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과, 또한 이러한 죄인을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즉 예수님을 믿는 그런 능력이 아니라, 아까 말한 오직 '율법 외의 한 의'로서, 그러한 예수님의 자기 숙제를 위해서 자기 백성을 택하셨다고 말이다.

 

◈ 예수님이 자기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

 

그러므로 택함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구원받은 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과 더불어서, 즉 예수님이 자기에게 맡겨진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구원을 받았음도 함께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있음을, 그것을 동반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주제파악도 되면서, 또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도 자기 행함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진 과업을 감당하다보니까,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아다리(?) 되어서 구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예수님의 공로이고 예수님의 은총입니다. 어떻게 제가 제 힘으로 기도하고 믿으려고 한다고 해서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겠습니까? 먼저 제에게 먼저 십자가의 능력이 임하니, 그래서 제가 십자가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이다.

 

오늘은 저녁식사 예약 때문에 여기까지만 하겠는데, 아무튼 교회에서 자꾸만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꼬드겨도 그런데 넘어가면 안 되는데, 마치 구원의 문제를 교회가 모두 다 책임져줄 것처럼 말이다. 물론 교회는 그렇게 해야 장사가 되는데, 하지만 그런 것들이 다 예수님의 공로를 무시하고 십자가의 피를 모독하는 짓들이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이것이 왠 은혜인지 기적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몰랐던 시절로 돌아가서, 그래도 십자가만으로 구원받는 사실이 알 수 있지는 궁금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구원되었고 모든 것이 다 완료되었음을 깨달았사오니, 이 모든 것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공로임을 알고, 그것만을 자랑하고 증거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