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10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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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10강 - A 05,11,12 강의 이근호
◈ 코르넬리우스 밴틸에 대해서 !!
지난 시간에 약간 미진한 것이 남아 있어서 조금 더 언급하자면, 코넬리우스 밴틸에 대해서 말인데, 이 사람이 아직 살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1895~198?년) 이 밴틸이라는 분이 그 주위에서는 오늘날 최고의 정통주의자라고, 그리고 칼빈주의를 그대로 함유하고 있는 사상가라고, 옛날 총신대학 박아론 교수가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분 밑에서 배운 신학교 교수들이 우리나라에 많음)
그래서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과 칼빈의 진면목을 알려면, (소위 변증가로 알려진) 밴틸이 오늘날 무수한 신학자들과 마주치면서 무슨 주장을 했는지를 들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들어보게 되면, 우리가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많은 신학자들을 이야기했는데, 그들은 밴틸이 그런 정통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밴틸은 칼빈이 주장한 것과는 맞지 않다고 말이다.
◈ 밴틸 - 신지식(神知識)을 구원의 접촉점으로 !!
여기서 밴틸의 사상을 잠시동안 이야기하고, 과연 그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맞는가를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잠시 말했듯이, 이 사람은 '접촉점'을 이야기했는데, 모슨 접촉점인가 하면, "모든 인간은 신을 아는 지식이 있다" 라는 것이다. 이 신지식(神知識)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접촉점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선지식(先知識)' 이라 하는데, 즉 미리 갖고 있는 지식이란 말이다.
이 선지식(先知識)을 접촉점으로 해서 출발해서, 즉 신을 아는 지식으로 출발해서, 여기에다 성경을 이야기하면, 신을 아는 지식과 성경내용은 사실 결합이 안 되지만, 그런데 결합되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님이 오시면 성경내용의 지식을 깨닫게 해서 신을 아는 지식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다시 되풀이하자면, 모든 인간은 신을 아는 지식이 있는데 그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신을 아는 지식이 접촉점으로서, 그것이 부정이 되어서는 안 되고, 긍정적으로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말이다.
그 성경적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이방인에게는 양심이 있고 이 양심이 이방인들에게 율법적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기 때문에, 이 이성도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남기신 신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밴틸이 신지식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성경구절은 로마서 1장 19절임)
(롬 1: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물론 이성과 양심이 비록 죄로 인해서 왜곡이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남겨주신 바탕까지 부정하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데, 다만 양심과 이성으로는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에,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령이 오셔서 성경을 제대로 해석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면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다.
◈ 밴틸의 접촉점 - 칼바르트의 超역사주의에 반대하면서 !!
밴틸이 이렇게 접촉점, 즉 '선지식'을 주장하는 이유는, 그에 의하면 칼빈이 그렇게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자신이 이렇게 주장하고 싶어하는 또 다른 이유는 칼바르트 때문인데, 이 칼바르트는 말하기를, "초역사적 계시에 의해서만 구원된다" 라고 했는데, 즉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역사하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만, 그 사건으로 인해서 구원하는 능력이 임할 때, 그때 그 사람이 구원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바르트가 말이다.
그러나 이에 반대해서 밴틸은 말하기를,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 '역사(歷史)' 라는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역사가 되지 못하고, 초자연적 역사만 하나님의 계시가 되기 때문에 이 자체가 하나님의 성경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역사 자체도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인데, 만약에 초역사만 하나님의 계시라고 간주해 버리면 역사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렇게 되면 역사를 이끄시는 주체자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계속해서 밴틸은 주장하기를, 그러니 역사도 하나님의 일반계시로서 인정을 하고, 다만 특별계시로서 성경을 인정하는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성경을 제대로 알도록 역사하시게 되면,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상이 밴틸 자신이 이야기하는 정통주의인데, 그래서 밴틸은 신정통주의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것이다. (밴틸은 자기 제자들 사이에서 칼바르트의 저격수로 불리우고 말이다.) 이러한 신정통주의에는 칼바르트, 고가르텐, 부루너 등이 있고, 신복음주의에는 칼 헨리가 있고, 그리고 복음주의와 근본주의 등이 있고 말이다.
여기서 복음주의와 근본주의는 유사해 보이지만 조금은 다른데, 이 복음주의는 부흥사 냄새가 물씬 나는 것이고, 그리고 근본주의는 메이첸의 주도하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소위 '나이아가라 사경회'를 통해서 말이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을 하는, 즉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세대주의적 성향이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다 아니라고 거부하는, 소위 정통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밴틸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과연 밴틸이 주장하는 것이 타당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밴틸이 칼바르트를 공격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칼바르트는 예수님 자체를 계시로 보았는데, 그러니 하나님이 주신 성경책 그 자체로는 하나님 말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께서 성경을 사용할 때, 그때에 성경은 말씀이 된다고, 즉 계시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곧 계시가 아니라, 성경은 계시로 된다, 변한다" 라는 것이다.
◈ 칼바르트는 왜 "계시는 예수님이다" 라고 했는가?
그렇다면 칼바르트는 왜 "계시는 예수님이다" 라고 이야기했는가? 성경이 아니라 말이다. 여기에서 대해서 밴틸은 언급하기를,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하나님인데, 만약 책을 통해서라든지 해서 역사적으로 나타나버린다면,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분이 아니라, 성경을 우리에게 건네주시고는, "야, 너희들 알아서 공부해라. 열심히 해석해야 되" 라고 하면서 돌아서 버리는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숨어 계신 것이 아니라, 이미 공개된 하나님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루터와 개혁주의사상에 어긋나는 것인데, 이사야 45장에 보면, 분명히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능력에 의해서 포착되는데, 즉 인간의 신지식에 의해서 말이다. 그렇게 되면 숨어 계신 것이 아니라 접촉점에 의해서 포착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숨박꼭질을?)
(사 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러니 이렇게 바르트처럼 숨어 계시는 하나님으로 이야기하지 말고, 이미 계시는 성경으로 말미암아 나타났는데, 다만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나타난 것조차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니, 그때는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합당한 뜻이라는 말이다.
과연 이런 밴틸의 사상이 성경적으로 합당한가? 이것이 그런가하여,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밴틸의 문제는 하나님의 선지식에 대해서, 칼 바르트는 이것을 우상으로 보았는데, 그런데 밴틸은 이 선지식은 원래 우상은 아닌데, 우상으로 그만 활용된다는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서 말이다. 그러니 만약에 성령이 와서 활동하시면, 선지식이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은총, 즉 일반계시의 일종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 신지식 - 과연 하나님이 인정하는 지식인가?
그러니 이런 밴틸의 사상이 성경적으로 무엇이 문제인고 하면, 먼저 그가 주장하는 접촉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면, 이렇게 신을 아는 신지식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는 지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다 알고 있다는 이러한 신지식이, 이것이 과연 하나님이 인정하는 지식이냐는 것이다.
만약에 비록 죄를 지었지만 신지식은 그대로 유효하다고 하면, 즉 로마서 1장에서 "저희가 하나님을 알되" 라고 할 때, 이 '알되' 라고 하는 신지식은 아직까지 건재하다는 것이다. 신을 아는 지식 신지식에 있어서, '신' 부분은 좀 그렇지만, 그러나 지식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버리고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렇다면 예수님과 사도바울이 과연 밴틸과 같이 그런 동일한 생각을 했겠는가? 이러한 점이 문제가 되는데, 예수님이 과연 밴틸과 같은 신학을 가지고 일을 하셨느냐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밴틸의 신학적인 틀에 맞추어서 활동을 하셨느냐는 것이다.
밴틸은 무엇에 관심이 있느냐 하면, 이렇게 희미한 '신지식'이 보다 더 확실하고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바로 그렇게 보다 더 선명하게 하는데 유용(有用)하라고,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그리고 또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칼빈주의 정통신학이라는 것이다.
밴틸에 의하면 말이다.
◈ 밴틸의 문제점 -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 !!
만약 밴틸의 말이 맞다면, 칼빈주의 전통신학은 복음적이 아니고 성경적도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임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데, 그런데 밴틸은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시는데 있어서 인간이 부족하기에, 그래서 이런 인간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말이 되는가? 만약에 밴틸의 주장이 맞다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내쫓지도 않았을 것이고, 처음부터 약속도 주시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그냥 처음부터 모든 인간에게 예수님을 알게 하는 지식을 주셨을 것이다. 선택된 자에게만 아니고 말이다. 사실 이렇게 되면 선택의 의미도 없어지는데, 모든 인간이 다 예수님을 만난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밴틸 사상은,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었으니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하지 않느냐는, 그런 의식이 굉장히 강렬하게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만일 칼빈의 사상이라면 칼빈도 역시 문제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말이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위해서 피조물을 만드셨는데, (즉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을 위한 것인데) 그런데 밴틸은 피조물을 위해서 예수님이 무언가 노력을 해야한다는 식으로, 즉 인간 없이는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방식이 그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 이근호 목사가 말하는 예정론 !!
논리가 상당히 어렵게 되어있는데, 다시 밴틸의 주장을 들어보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창세 전에 이미 구원될 자들을 정해놓았다고 했을 때,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여기서 이근호 목사의 설명을 한번 들어보자.)
◈ 창세 전 예정 - 모든 인간은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
물론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다 구원을 받는다는 뜻은 아닌데, 여기서 바르트가 오해를 좀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에 시간이 나면 다루기로 하고) 아무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정하사 구원하셨다는 것은, 반드시 모든 인간을 다 구원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죠? 하나님께서 이렇게 창세 전에 모든 인간들을 다 구원하기 위해서 예정한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인간 속에서 무엇이 분류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은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라는 기준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밴틸에 의하면, 그의 첫 번째 출발점에서 이런 점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기준이 말이다. 그래서 분명 문제성이 있는데, 왜냐하면 밴틸은 처음부터 "모든 인간이 다 신을 안다" 라는 접촉점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이란 말은 '모두 다(ALL)'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모두' 라고 하면, 굳이 선택이라는 단어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뽑은 후에 "전부는 아니다"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전부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직접 뽑으셔도 말이다. 그것은 선택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선택한 자가 따로 있다 !!
그렇다면 처음부터 선택된 자가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면, 즉 기준을 "인간이 신을 아는 지식이 있다" 라고 해서 출발해서는 안 되고, 그렇게 되면 지옥으로 갈 자와 천국으로 갈 자가 구분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별이 되는 기준을 가지고 출발해야 하는데, 즉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선택한 자가 따로 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출발하면 신학적으로 어떤 점이 부각되는가 하면, "모든 것이 주(主)로부터 시작해서, 주(主)로 말미암고, 주(主)께로 돌아간다" 라는 것이 처음부터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중심이 아니고, 즉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아 주님께 영광을 돌릴까가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영광을 돌릴 자를 어떻게 건져내시고,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영광을 돌리게 했느냐고 하는, 즉 예수님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핵심 포인트가 인간이 아닌 예수님께 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오늘이 교회사 마지막시간인데, 마지막 시간에 제가 굳이 밴틸을 끄집어낸 이유가 다 있다는 것이다. 지금 교회사 자체가 개신교 교회사이기 때문에, 개신교의 정통 칼빈주의 관점에서 교회사를 밴틸과 같은 관점에서 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사를 보게 되면, 밴틸에 의해서 그만 교회사가 긍정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교회사 자체도 계시이니 말이다.
◈ 밴틸 - 역사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가?
칼빈주의 관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면, "세상이 이렇게 타락하고 지옥과 같더라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을 이 어두운 악마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보전하시니, 즉 하나님께서 정통 칼빈주의를 이렇게 보전하시니 그 얼마나 감사한가?" 라는 식으로 교회사가 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밴틸은 역사 자체를 계시로 보기 때문에 말이다. (계시라고 해서 다 긍정적인가?)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교회사 속에서 무엇을 찾는고 하니까,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유일하게 신실한 종으로 남도록 한 원인을 제공한 10년 전, 또 10년 전, 또 1000년 전으로 계속 올라가서, 그렇게 위대한 선조 신앙인들의 전통을 되찾아서 연결시키는 교회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이 바로 천주교가 되는 것이고, 즉 천주교 2탄의 시작이란 것이다. (그러니 개혁은 무슨 놈의 개혁인가? 그냥 '스카이 콩콩'이지 말이다.)
◈ 합동측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장자교단 !!
그러니 합동교단이 장자교단이라는 말이 부담 없이 나온다는 것이다. 장자교단이란 말이 성경에 있으면 이런 말을 하지 않겠는데,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요즘 뜨는 유다복음서에 있는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믿는다고 했는데, 그 안에 성경이 우선이라고 해놓고는, 그렇게 줄줄 외워놓고는, (사실 제대로 외우지도 못하고 공부도 하지 않는데) 막상 모든 사고방식은 전혀 성경중심이 아니고, 그야말로 자기들 마음대로 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 남은 것은, 웨스트민스터 고백서가 너무 완벽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작성되었기 때문인데, 이런 전통을 고수하기 때문에 말이다. 이렇게 자기들은 신실한 종으로 남아있다고 우기면서, 교인들에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가르치면 하나님께 복 받을 일이고, 구원받을 일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니케아 신조나 칼케톤 신조 등을 주장하면서 우겼던 카톨릭과 무엇이 다른가?
여기서 성경을 한번 찾아보자.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또 내가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라고 되어있는데, 분명하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 죽음의 권세, 저주의 권세, 악마의 권세가 분명히 있다는 것인데, 이런 권세가 제 아무리 무지막지하고 다른 것은 다 삼켜도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만큼은 삼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것은 그야말로 영적인 말씀인데, 사실 모든 성경말씀이 다 영적인 말씀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구체적인 실제사물로서 전환하는 그 순간부터는, 그렇게 생각하고 의도하고, 또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서 붙들려고 하는, 그러한 시도 자체가 바로 음부의 권세에 사로잡혀서 꼼짝도 못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 신조(信條) - 장자교단의 출입구 !!
그래서 "우리교회 최고야!" 라고 하는 자체가 음부의 권세 속에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교단이 되고 말이다. (그래서 장자교단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성경이 아니고 말이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그런 "교회가 최고, 교단이 최고야" 라고 했을 때, 또 "나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다" 라고 했을 때, 그러한 출입구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신조'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실제로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분은 도대체 누구인가? 오로지 예수님뿐인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일하시는가? 성령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것뿐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主)로 세우셔서, 예수님이 주의 권리를 행세하신다는 것이다. (다른 그 어떤 인간도 여기에 들어올 틈이 없다는 것이다.)
◈ 여호와 이름이 활동한 결과 - 신약에서 교회가 !!
이러한 권리 권세를 행사하는 모든 내용은 구약에 보면 '여호와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여호와가 바로 주(主)라는 뜻이고 말이다. 이렇게 여호와라는 이름이 등장하면서 예언된 것을,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 주의 자리에 앉아서 모두 다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실행에 옮기다 보니 오늘날 교회가 생긴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교회의 관리는 예수님께서 철저히 성령을 통해서 하시는데, 그런데 이것이 영적인 것이기에 결단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특정기관, 즉 특정 교회로 삼았을 때, 결국 이것은 무엇에 도전하는 것인가?
◈ 교회 지도자들 - 그대 이름은 사탄 !!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영적인 활동을, 소위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 머리에 앉아서 자기들이 한다고 하니, 그들이 바로 사탄이고 사탄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에 나오듯이, 거룩한 자가 자리에 앉아서 예수님의 영적인 권세에 도전하고,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기 위해서 유혹한다는 것이다.
(살후 2: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그런데 영적인 최고의 자리가 교회마다 교단마다 다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높여서 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다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특정 이름도 예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말이다.
◈ 성경에 있는 사건을 고정시키면 계시가 되는가?
동방박사들이 무엇을 따라왔는가? 자기들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라 별을 따라서 왔고, 베드로후서에 보면, 그 별이 우리 마음에 떠올라야 한다고 했는데, 이 말씀이 특정 목사를 따라가라는 이야기인가? 우리 마음속의 별이, 나사에서 발사하는 로케트를 타고 올라가면 되는 별인가? 성경은 모두 영적인 이야기인데, 우리 마음에 별이 떠오른다는 것이, 지금도 북극성(?)을 움직여서 따라가면 동방박사가 되고,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인가?
(벧후 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 마음에 떠오르는 샛별 !!
다시 한번 강조해서 이야기하는데, 분명히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서 갔고, (별 따러 간 것이 아니라) 이렇게 동방박사가 별을 따라간 것은 역사적 사실인데, 즉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을 고정시키면 과연 계시인가? (그래서 그 별이 나타나면 또 따라가면 되는가?) 결코 계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 별은 어디에 있는가? 성령을 받은 베드로 사도가 말하기를, 그 별이 우리 마음에 떠오른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이렇게 영적으로 해석하면 혼이 나는데,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엉터리 해석을 하느냐고 말이다. 그러면 무엇을 따라야 하는가? 역사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교회가 역사적으로 어떤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권위가 있는 신조를 따르는지를 말이다.
이렇게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 별이 떠오는 것을 어느 신조가 막을 수가 있으며, 감히 어느 목사에게 허락을 받아야 되는가? 아니, 주께서 자기 택한 백성을 건지시겠다고 하는데, 어느 신학자가 그것을 이단이라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교회사를 보게 되면, 이렇게 인간중심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은데, 칼바르트도 약간 그런 요소가 있고 말이다. (아니 많은가?) 즉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으로 어떤 신학을 만들어서, 그리고 그런 신학에 기초에서 어떤 조직을 만들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예수님이 구원방식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 예수님의 구원방식은 무엇인가? - 강도처럼 !!
그렇다면 예수님의 구원방식은 무엇인가? 예수님 옆의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와 마찬가지로, 자기는 도무지 신조를 만들 자격도 없고, 신조를 믿을만한 자격도 전혀 안 된다는 것이다. 단지 그 강도에게는 무엇이 크게 보이는고 하면, 그에게는 오직 옆에서 함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만 크게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말이다.
만일에 그 강도가 죽지 않고 구사일생으로 살았다고 하면, 그래서 강도가 십자가에서 다시 내려와서 교회를 만들고, 교단을 만들었다고 하면, 그 교회와 교단이 완전한 것인가? 역시 아니라는 것이다. 그 강도가 분명히 구원받은 것은 맞지만, 구원받은 자가 만들었다고 해서 그게 온전한 교회는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놀랍게도(?) 이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주님이 만들어야 하는데 말이다.
지금 밴틸의 주장을 다시 한번 더 하면, 밴틸은 인간이 납득되는 신학을 만들어서, 그 납득을 접촉점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겠다는 것이다. 납득이 되는 식으로 말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휴가를 떠났던지, 하청을 주었든지 했기에 말이다.
그렇다면 밴틸이 왜 이런 발상을 하게 되는가? 이것은 바로 밴틸이 칼빈주의 사상에 충실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실상 구원론에 너무나 치중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론에 치중한다는 말은, 인간구원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었다는 것이고 말이다.
◈ 밴틸 -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 !!
다시 말해서, 밴틸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과 인간', 이렇게 두 구조의 틀이 그대로 들어있다는 것이다. (아니, 밴틸의 머리 속까지?) 칼바르트는 예수님 중심이고, 루터는 십자가 중심이지만, 그러나 밴틸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이다.
아마 누군가가 밴틸에게 말하기를, "삼위일체론이 나오기 전에 기독교가 없어도, 즉 아무런 성경적인 아이디어나 이미지도 필요가 없이, 인간들이 타고난 자기들만의 이성으로 삼위일체이론을 만들 수가 있다" 라고 하면, 아마 밴틸은 여기에 대해서 거부할 것이 분명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사방을 한번 둘러보라는 것이다. 성경을 보지 않고서 인간의 논리와 철학만으로도 이런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종교가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의 기원이 된 브라만교도 삼위일체적인 구조를 갖고 있고, 심지어 불교에도 살펴보면 그런 게 있다는 것이다.
◈ 밴틸의 신학 - 인간 긍정을 위한 하나님의 긍정 !!
결국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결국 밴틸의 신학은 인간 긍정을 위한 하나님의 긍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밴틸에게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지옥에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어떻게 하다가 보니 제대로 잘 되지 않아서 지옥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인간을 처음부터 지옥으로 보내는 그런 하나님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들 때, 지옥에 갈 사람은 미리 정하지를 않고, 천당에 갈 사람만 정해놓았다는 것이다. 즉 지옥으로 갈 명단은 미리 없다는 것인데,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보면 뭐라고 말씀하는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으면 분명히 지옥으로 간다고 하셨는데 말이다.
◈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하나님께서 언제 아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 이전부터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미리 다 알고 계셨는데, 즉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자들이 유황불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이전부터 이미 다 알고 계신 생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밴틸은 이런 것도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하다가 잘 되지 않으니 지옥으로 보냈다고 하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지옥을 언제 만들었는가? 타락 이전에 만들면 아예 지옥에 보낼 것이라고 작심을 한 것이 되고, 타락 이후에 만들었다면 타락하니 얼른 지옥을 만든 것밖에 안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천국은 처음부터 만들었지만, 지옥은 뒤치다꺼리하기 위해서 마치 쓰레기 하치장을 만든 것과 같다는 것이다.
마치 이것은 자동차 회사에서 자동차를 만들어놓고는 그것이 고장이 날 것이 염려가 되니까, 자동차 서비스센터를 만든 것과 똑 같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모든 전통주의자들의 주장이 다 이렇고, 기독교도 역시 그렇다는 말이다.
◈ 왜 기독교를 날조했는가? 달콤한 권력의 맛 때문에 !!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자크엘룰은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27페이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인간이 계시를 마음대로 날조한 기독교의 실패이다" 라고 말이다. 여기서 '날조' 라고 말하는데, 즉 처음부터 기독교가 날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기독교를 날조한 이유가 무엇인가?
쟈크엘룰은 다 그만한 이유가 다 있다고 했는데, 기독교가 무엇과 결탁했는고 하니, 좋던 싫던 간에 (달콤한) 권력의 맛을 보았기에 권력과 결탁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권력의 맛을 본 이유는,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한 로마권력의 맛을 톡톡히 보았기 때문인데, 즉 자기에게 그렇게 심하게 핍박했던 권력의 맛을 기독교는 핍박을 받으면서 맛을 보았다는 것이다.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사기를 치는 사람들 중에는 한번 호되게 사기를 당해본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시어머니의 경우에도 그렇지 않은가? 시집살이를 호되게 산 사람이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를 눈물나게 시킨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들은 생생한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이 사기를 쳤는데, 원룸과 투룸을 지어놓고는 법보다 더 넓게 지었다고 자기가 직접 신고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벌금은 내야겠지만 소문이, "야, 저 집은 법보다 더 크게 지었다" 라고 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잘 팔리는데, 이 수법을 어디에서 배웠겠는가? 이것은 자신이 당한 것을 그대로 이용해먹는다는 것이다.
◈ 콘스탄티주의 - 권력에의 반발력 !!
그 당시 기독교가 로마의 권력 때문에 몹시 고생했고, 엄청나게 쓰라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렇게 미웠던 권력의 맛에 톡톡히 물들어서, 나중에 기독교가 인정되면 이제는 자신들이 로마황제가 가졌던 그 권력을, 기독교라는 이름의 권력으로 유럽의 온 제국을 통치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관성의 법칙이, 즉 반발성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인데, 그것을 쟈크엘룰은 43페이지에서 '콘스탄티주의' 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쟈크엘룰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나라는 자기 나라가 아니라고 분명히 이야기했건만, 그런 것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사람에게 높은 받으면 하나님께로부터 미움을 받는다" 라는 말씀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로지 남은 것은 복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눅 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그리고 쟈크 엘룰이 잘 지적했듯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권력화 시키는 것을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런 것을 두고 '바리새인의 누룩' 이라고 하셨는데, 즉 오염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누룩은 곰팡이와 같아서 어디든지 침투할 수 있는데, 바리새인들과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썩어서 문드러지게 한다는 것이다.
◈ 역시 누가 뭐라고 해도 누룩이 좋아 !!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했던, 바로 그 세상권력과의 결탁의식을, 즉 누룩을 기독교가 대환영을 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누가 핍박을 받겠는가? 과거에는 로마의 세속권력으로부터 핍박받던 기독교가, 이제는 기독교의 적이 로마에서 예수님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쟈크엘룰의 이 얼마나 예리한 통찰력인가?
(눅 12:1) 그 동안에 무리 수만명이 모여 서로 밟힐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제가 쟈크엘룰의 책 '뒤틀려진 기독교'를 교회사 첫 시간에 강의하지 않고, 마지막 시간에 살펴보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기독교가 이렇게 (뒤틀려지게) 된 이유들이 많이 있는데, 그 내용을 미리 좀 알아보고 나서 책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 왜 기독교가 뒤틀렸는가? 물질의 神聖化 !!
쟈크엘룰은 56페이지에서 강조하기를, "결과적으로 사회가 기독교에 의해서 뒤집히기는커녕 오히려 기독교가 사회를 뒤집었다" 라고 했는데, 물론 사람들은 이런 것을 두고서 기독교를 성공이라고 보았는데,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제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그런 성공이 바로 흡수통합, 즉 혼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를 자크엘룰은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까, '물질의 신성화(神聖化)' 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이 자크엘룰의 '튀틀려진 기독교' 라는 책 전체에서 제일 멋진 부분인데, 물질의 신성화, 즉 '거룩하게 됨' 이란 것이다. (물질의 '신성화', 그 표현이 정말로 멋지지 않는가?)
◈ 자연 세계 속에는 그 어떠한 거룩함도 없다 !!
자크 엘룰에 의하면, 원래 이 자연 세계 속에는 어떠한 거룩함도 없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 인간은 자연 세계를 떠나지 않았고, 그리고 그렇게 떠나지 않은 이유는, 자연세계와 그 속의 인간은 함께 후패해져 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로마서 8장에서, "함께 썩어져가고 후패해져 간다" 라고 했는데, 이렇게 함께 썩어지고 후패해진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룩하고 신성한 것들을 자연세계의 요소로서 조립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없다는 말인가? 아니, 어떻게 썩어 문드러진 것을 주워 모아서 다시 거룩한 것으로 만들 수가 있겠는가?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그러니 이미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에는, 이미 어떤 것도 신성하지도 않고, 그렇게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에서 유대인들을 보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율법을 주니까, 옳거니 싶어서 그 율법 자체를 신성시했다는 것이다.
그 예들이 무엇인고 하니, 모세가 홍해를 가른 그 지팡이, 사사기 7장과 8장에서 기드온이 승리 후에 그가 입었던 에봇, 들고나서면 승리할 줄로 홉니와 비느하스가 착각했던 언약궤, 왕의 직분, 제사장 직분, 그리고 선지자 직분 등등, 이런 것들이 신성한 것이 아니라 다 썩어서 문드러졌다는 것이다.
◈ 구약성경 - 인간들이 얼마나 후패한가를 보여줌 !!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인간들이 얼마나 후패한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구약성경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소위 거룩한 이스라엘과 더럽고 속된 이방나라와 전쟁을 붙게 해서, 놀랍게도 이방나라가 승리케 함으로 말미암아서, 소위 자연세계를 가지고 거룩을 시도한 이 이스라엘 나라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는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신성한 것을 만드는데, 그래서 성전을 만들고, 거기에 종사하는 자를 거룩하게 만들고, 또 제사법과 율법에 의해서 그대로 그것을 옮겨다 놓으면, 즉 그렇게 복사하면 그 거룩이 그대로 복사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모세의 돌판이 시내산에서 내려오면 자기들이 죽는데, 그것이 복사되면 과연 거룩한 것인가?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거룩하다고 하면서 주신 것들이, 그것들이 인간 속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그 거룩이 인간 속에서 어떻게 탈색되고 달아나고 사라지는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하늘에서 내려온 맛나가 거룩한데, 그런데 그 거룩한 맛나를 담은 항아리에서 맛나가 오랫동안 보관이 되었는가?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즉 살구나무 꽃이 피었던 그 지팡이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그런데 그 지팡이가 어떻게 되었는가? 그만 날아가 버리고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전혀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이 세상은 하나님의 거룩이 고난받는 현장 !!
결국 하나님께서 자연 속에 신성한 것을 주신 이유는, 그렇게 줘놓고는, 그것이 인간의 더러움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이 그 얼마나 고난받고 얼마나 탈색되고 무가치하게 전락되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물로서, 하나님께서 거룩한 사건들을 제공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약적인 인간의 본성들, 즉 무조건 거룩한 것을 붙들어서 그것을 대중들에게 납득시키려는 종교적 행태는, 그것이 지금도 여전히 기독교 내에 남아있다고 하는 것, 그것을 쟈크엘룰이 '신성화' 부분에서 힘주어 강조하려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 오, 원더풀 !!
10분 휴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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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삼위일체와 성화론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 답변 - 둘은 서로 다른 개념이 아니라 맞물려있다고 보면 되는데, 삼위일체가 아니라 사실상 사위일체인데, 거기에 인간을 집어넣는데, 왜냐하면 성화론에 의하면 인간도 거룩하기에 말이다. 거룩한 인간이기에 거기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 질문 - 선택이란, 창세 전에 예수님을 선택했다는 것인가요?
* 답변 - "예수님을 선택했다" 라는 말은 일종의 바르트주의인데, 그러나 에베소서 1장에서는 "예수님 안에서 선택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선택의 대상이 아닌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선택이라는 말을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오히려 예수님을 위해서 선택했다고 해야하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 안에서' (IN CHRIST) 라고 하고 말이다.
* 질문 - 인간이 법을 지키면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자기가 곧 법이 되듯이, 인간의 믿음도 결국은 자기를 위한 믿음이 되고 마는데, 과연 그런가가요?
* 답변 - 자기 정당성을 위한 것으로, 곧 그것이 자기에게 진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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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10강 - B 05,11,12 강의 이근호
◈ 쟈크엘룰 - 뒤틀려진 기독교 !!
옛날 구약의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법들을 신성화하는 그 의도가 무엇이냐 하면, 곧 자기 자신을 신성한 신적인 존재로 전환하는 기본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즉 "거룩한 것에 접촉하게 되면, 나도 거룩해진다" 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가 거룩해진다는 것은 곧 자기가 신이 된다는 것이고, 즉 신과 한통속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과 한통속이 되려면 신이 내려주신 것을 계속해서 유지하면 되는데, 이것을 자기에게 적용시킬 때, "나는 곧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유지시키는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나' 라는 초라한 존재가 거룩한 하나님 나라에 합류하면 되는데, 그렇게 합류하는 방법은 거룩한 나라에서 제공된 거룩한 물질들을 이용하면 되는데, 그렇게 이용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세례' 라는 것이고, '성만찬 '이라는 것이다.
◈ 성만찬 - opus operatum !!
이 성만찬에 대해서 쟈크엘룰이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데(109페이지), 중세 때 성찬식을 거행할 때에 살과 피가, 다른 말로 하자면 떡과 잔인데, 이것을 '오푸스 오페라툼(opus operatum)' 이라고 했는데, 번역하면 '활동하는 일' 이란 말이다.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활동하는데, 무엇이 말인가? 떡과 포도주가 스스로 활동하고 돌아다니면서, 성만식에 참여한 사람들을 거룩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성만찬 교리가 지금까지도 천주교와 기독교에서 그대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세례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세례라는 것은, 물을 담은 욕조에 담기던지 어떻게 하던지, 그런 방법에 의해서 그 물에 담긴 사람은 거룩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즉 거듭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성립이 되려면 거룩한 물질, 즉 물이 거룩한 물질일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더러운 자연세계를 어떤 신성한 영역으로 구별되게 나누어서, 즉 신성한 물질로 따로 구별하고 그것을 활용하여 자신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즉 거듭 태어나서 영생을 얻고자 하는 이방 종교적인 발상을 보여 주는 것인데, 바로 교회사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가? 사람들의 본성 자체가 이미 구약성경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자신이 신의 세계에 진입하고자 하는 본성이 충만하고 충만한 입장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도록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줌으로써, 교회 자체가 하나의 제국이 될 수 있고, 즉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책 3번째 단락인 '신성화, 비신성화' 대목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저자의 대단한 통찰력이지 않는가?)
◈ 도덕주의 - '영적'을 오해한 결과 !!
쟈크엘룰이 지금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초대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날조한 이유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4번째 단락에는 '도덕주의' 라는 것이 나오는데, 도덕주의가 침투함으로 말미암아서 또 하나의 복음으로 날조했다는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쟈크엘룰이 왜 도덕이 복음을 날조했다고 보았는가? 아니, 이 도덕이란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데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쟈크엘룰은 말하기를, 영(靈)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을 어떻게 오해했는고 하면, "도덕적으로 사는 것을 영에 따라 사는 것으로 오해했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에 따라 사는 것은, 자기가 착한 사람으로,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간조차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무엇인가 자기 자신에게 집착을 갖고 있을 때는, "내가 이왕 인간이 된 이상 짐승처럼 살지 말고 도적적으로 살자"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즉 이왕 '나' 라는 존재가 있다면, '나' 라는 존재는 참하고, 착하고, 선하고, 멋있고, 훌륭하고, 아름답고, 선하고, 진리대로 산다면, 그 다음에 자기 자신을 꾸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포기할 때에는 꾸밀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덕을 요구한다는 말은, 이미 어떤 경우에라도 자기는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의식이 단단해진 그 바탕이 만들어진 것이고, 그 바탕 위에다가 도덕을 입힘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발상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이 선과 악을 나누는 그 자체가 바로 죄, 악 !!
그렇다면 이 도덕적인 문제가 무엇이 그리 큰 문제인가? 여기에 대해서 쟈크엘룰이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들은 선과 악에 대해서 큰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선과 악을 나누는 자체가 바로 그것이 죄, 즉 악이라고 보는데, 이렇게 인간이 선악과 따먹은 후에 그 다음부터는 선과 악을 구분해서, 악한 것은 버리고 선한 것을 채택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 죄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야 안다 !!
이것이 쟈크엘룰의 책 뒷부분에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이 죄를 안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선과 악을 지식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받아야 죄를 안다는 것이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하는 것은, 은혜를 받아볼 때만 비로소 발생되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되면 어떤 의식이 되는가 하면, 도덕적으로 선과 악을 나누는 의식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이 모든 인간들의 타고난 본성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받기 전에는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면, 이전에 그런 식으로 선과 악을 나눈 자체가 악한 것이며, 그것이 교만이며, 그것이 바로 자기의 의로운 의지로 살려고 하는 욕심에서 나온 타락한 증거라는 것이다.
◈ 요한복음 9장 - 소경된 자 !!
그 한 예로서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소경된 자가 나오는데, 소경된 자에 대해서 주위에 있는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네 눈을 누가 고쳐 주었는가, 똑바로 대 똑 바로 대란 말이야" 라고 했을 때,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 아이가 다 컸으니 직접 아이에게 물어보아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을 고침 받은 아이는 말하기를, 기존의 바리새인들은 "이거냐, 저거냐?" 라고 하는데 반해서, 그 아이는 "예수님이 낫게 하셨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셨는가? "누구든지 소경된 자가 보는 자이다" 라는 것이다. 그 소경이 누구인가? 예수님 때문에 병이 다 나은 그 청년을 보고서 하는 말인데, 그러나 "제대로 본다고 하는 자는 다 소경이다" 라고 했던 것이다.
(요 9: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요 9: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 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요 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병원에 가지 말고 기도원에 가라는 것인가?) 교회가 스스로의 존립을 위해서 이성과 윤리를 총동원해도 결코 교회가 될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교회는 천국에 가는 기관이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인데, 자유주의나 감리교, 요새 장로교도 마찬가지이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은 자기의 죄와 선과 악에 대해서 심판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러나 인간이 책임져야 될 선과 악은 없다는 것이다.
◈ 죄인의 특징 - 책임을 질 수 없다 !!
왜 그런가? 이미 모든 것이 다 악인데, 도대체 자기가 무엇을 책임진단 말인가? "아, 내가 죄인이구나. 내 죄를 내가 책임져야지" 라는, 이것 자체가 자기 처지를 모르는 사고 방식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데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한 반응 자체가 말이다.
아니, 도대체 무엇을 책임지라는 말인가? 구원이란, 생명책에 이미 기록된 자만 구원받는데, 즉 무엇을 책임지는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도덕주의가 인간에게 들어온 것은, 이것은 바로 자신의 모든 것을 육적으로 보아서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즉 사람들을 꼬시려고 하는 작전이라는 것이다. 쟈크 엘룰이 그렇게 주장했다는 말이다.
◈ 쟈크엘룰의 독특한 주장 - 이슬람의 영향 !!
그 다음은 쟈크엘룰이 독특하게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남들이 그렇게 이야기하지를 않고 쟈크엘룰의 이 책에만 있는 것인데, 그가 '이슬람의 영향'을 말한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가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어느 종교이든지 간에 그 시대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작품인데, 따라서 기독교라는 것도 그 당시 그 시대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거부한 것도 영향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쟈크엘룰이 이슬람의 영향이라고 말할 때는, "아니, 이슬람에 의해서 기독교 신자가 처형되고 알라신을 부르게 한 것도 아닌데 무슨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가?" 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먼저 이슬람 종교의 내막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슬람은 계시를 신의 계시와 자연계시 둘로 나누는데, 신의 계시와 자연계시, 이렇게 완전히 갈라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연결고리가 없는데, 이렇게 연결고리가 없다는 말은, 신과 인간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디에 속하는가? 인간은 자연에 속하는데, 그러니 결국은 신과 자연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은 신에게 무조건 굴복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제가 이렇게 말하니, 여러분이 혹시 이것을 기독교의 복음주의적 관점이라고 오해하지 싶은데, 그러나 여기에는 무엇이 없는고 하면, '죄' 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죄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는데, 아담의 죄를 묻지를 말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냥 인간 자신은 피조물이고, 그러한 피조물이기에 당연히 창조자에게 그냥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이, 그냥 간단하다는 말이다.
◈ 이슬람과 기독교의 차이점 - 成肉身 !!
그런데 쟈크 엘룰은 말하기를, 이슬람은 이런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이미 여기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성육신(成肉身)'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는데,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내미는 영역이 오직 예수님만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 성육신이 빠져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자연이 전적으로 신에게 복종하기 위해서 이슬람은 어떤 철학을 갖고 왔는고 하면, 기독교가 생각하지 않았던 고대헬라철학을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인데, 이들은 원래 유럽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이슬람이 먼저 번역해서 연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슬람이 먼저 연구했는데, 나중에 십자가 운동과 물론 그 이전에도 들어 왔지만, 그 이후 십자가 운동 때 마구 유럽 쪽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1100년 경 이후로 말이다.
그래서 중세에 수많은 철학자들이 등장한 것은, 즉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사람이 등장한 것은, 이슬람에서 이미 연구해놓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번역되어서 마구 쏟아져 오니까, 자기들이 생각하던 기독교와 옛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했던 것과 똑 같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똑같으니까 어떤 아이디어가 드는고 하면, "야, 이것은 성경만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고, 성경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이런 종교적 아이디어를 들여오면, 이것이 하나의 접촉점, 즉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접촉점 역할을 할 수 있겠구나" 라고 해서 마구 들여왔다는 것이다.
◈ 이슬람의 영향 - ① 법 !! ② 신비주의 !!
이것은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진짜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 (조금 전에 하려다가 곁길로 갔는데) 중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하나는, 자연세계인 피조세계가 전적으로 신에게 복종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법적'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율법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법적이라는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 법이라는 것은, 권력이 개입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속도제한을 시속 80KM 해놓고 과속을 단속하지 않으면 시속 80KM이하로 다닐 사람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정말로?) 자기가 달리고 싶은 대로 달리지 말이다. 그런데 교통경찰이 과속 카메라로 찍으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 80이죠. 죄송합니다. 못 보았습니다. 바빠서 그렇습니다" 라고 하면서, 벌금이든 뇌물이든 내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법이라는 것은, 제지하는 사람이 있고, 법을 안 지켰을 때는 추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제지하는 사람이나 추궁하는 사람이나 다 권력이란 말이다. 즉 법을 시행하는 사람이 있어야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삼권분립인데, 이 민주주의 삼권분립의 사상이 기독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바로 헬라철학을 가져온 이슬람의 영향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삼권분립이 있다는 말은, 곧 법이 있다는 말은 무엇을 할 수 있는고 하면, 신앙을 계속 복사해서 그대로 찍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법적으로 하겠다는 것은, 즉 법을 제시한다는 말은, 그 법에 딱 적합하면 자동적으로 '딩동댕'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세철학이 법전을 말하는 것인데, 토마스 아퀴나스의 글들도 모든 게 법전이라는 것이다. 천주교의 모든 것이 다 교회법이라고 해서, 모세법, 무슨법, 무슨법, 이렇게 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서, "하루에 성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라고 하는 아침부터 스케줄이 다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기독교가 먼저 이런 법적인 것도 영향을 받았고, 또 하나는 쟈크엘룰이 잘 지적하였듯이 '신비주의'가 이슬람의 영향으로 왔다는 것이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법이 있을 때, 이 법은 선을 긋는 역할을 하는데, 법이란 "하라, 하지 말라" 라는, 허용과 금지라는 것이다. 사람이란, 하지 말라고 정해지면 그때부터 사람의 욕구는 어떻게 작용하는고 하니, 그 선을 넘어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영화에 '19세 이상' 이라고 하면 반드시 보고 싶고, 물론 19세가 넘은 사람은 시시하게 보지만 말이다. 그런데 청소년들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유혹인데, 몰래 훔쳐먹는 사과가 맛있듯이 말이다. 하지 말라고 하면 넘어서고 싶은데, 이렇게 법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법을 뛰어 넘으면, 그것은 법이 없는 영역인데, 이렇게 법이 없는 영역을 두고 '신비영역'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법에 대한 쾌감과 더불어 신비주의가 퍼짐 !!
그래서 이슬람에 있어서, 신과 직접 접촉하려는 신비주의가 법이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법을 뛰어넘는다는 그러한 쾌감과 더불어 신비주의가 퍼졌는데, 그 신비주의가 그대로 기독교에다 다 투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내부에는 무엇과 무엇이 갈라지는가? '법파'가 있고 '신비파'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쟈크엘룰은 말하기를, "이것이 과연 복음인가?" 라는 것이다.
◈ 무당짓거리도 이슬람의 영향 !!
이슬람교 영향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176페이지에 나오는데,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 이슬람을 따라 어떤 짓을 했는고 하면, 근신, 진을 빼는 춤(나이트클럽?), 절대적 침묵 등을 이야기했는데, 아마 쟈크엘룰이 티벳 불교를 알았으면, "세상에, 여기도 있네" 라고 했을 것이다. 절대 침묵이라고 해서, 벽에다가 점 하나 찍어놓고 삼일동안 밥도 먹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면 무엇인가 트여도 트인다는 것이다. (벽에 빵구를 내서라도 말이다.)
부흥사들이 와서 방언기도를 해야 성령은사를 받는다고 하니까, 방언기도를 하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나름대로의 방법을 구사하는데, 그러나 기도란 것이 마음속에 담긴 것이 언어가 되어서 입을 통해서 튀어 나와야하지 않는가? 마치 달리는 말의 엉덩이를 차듯이 뭔가를 쳐야하는데, 하다 못해 때려야 '아야!' 라는 소리라도 나올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래서 손바닥을 치던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진을 다 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은 언어를 조립하려고 하는데서인데, 즉 이성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감정의 기가 다 죽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이성만 치워버리면, 그때에는 신나게 한바탕 놀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나게 놀 때는 무슨 소리든 다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신나게 노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고지식하고 고상하게 놀려고 하는 이성의 틀을 깨부수는 것인데, 그것을 부수는 방법은 지가 스스로 미치는 것인데, 그래서 박수치고 열광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란다면 인도 대마초인 하시시 같은 마약을 하고 말이다. 이런 것이 하나님 안에 용해되기가 쉽다는 것이다. 자기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주님 안에서 녹아 없어지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쟈크엘룰은 이야기하기를, 언제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가기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고, 언제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 그렇게 금식하면서 스스로 진을 빼는 기도를 하고, 또 자기 육체를 때려서 신비적인 것을 추구했느냐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빌립 집사가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나려고 스스로 자기를 때리니, 성령님이 오셔서 광야로 보냈는가? 그리고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자기를 스스로 때려서 성령에 충만했는가? 그래서 죽을 때 날아오는 돌멩이를 맞으면서, "주여, 저들이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라고 기도했는가? 베드로가 성령을 받을 때, 자기 열심으로 각오할 때였는가? 제자들이 모여서 오순절에 한 기도도 성령님이 오시기를 구하는 기도를 했지, 모여서 이렇게 하면 성령님이 오신다고 요청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운명과 필연도 이슬람의 영향 !!
이 부분은 상당히 어려운데, 179페이지에 보면, 하나님의 '운명'과 '필연'이 나오는데, 이것은 예정과는 다른데, 운명과 필연은 다 이슬람의 영향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칼빈의 이중 예정론은 원하든 아니든 간에 성경의 하나님을 운명이나 필연으로 변형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정에 대한 확신은 기독교 국가를 지배하게 되는데, 즉 이방종교가 확신을 운명의 신에 대한 신앙에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 지금도 하나님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신다 !!
쟈크엘룰은 이 책에서 말하기를, "지금도 하나님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신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 부분인데,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경우에도 교회사 강의가 거의 다 끝나가데, 이렇게 되면 우리도 우리들 나름대로는 뭔가 좀 공부를 한 것 같고 이룬 것 같은데,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일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아, 그때 교회사를 열심히 공부했는데" 라는 것은 일체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쟈크엘룰은 이 책 255페이지에서 "절대로 소유하지 말라" 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어떤 경우든지 간에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처음부터 너에게 새로이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너는 왜 자꾸만 교회의 업적과 신성함을 소유하려고 하느냐?" 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교회 자신이 성령의 소유주로 간주해서, 즉 성령의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소유주는 주님이지 결단코 이 지상의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은 마치 바람과도 같은데 그 어느 누가 바람을 잡을 수 있고, 아니 바람을 소유하려는 인간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바람은 일종의 흐름인데 말이다.
◈ 우리의 하나님은 시작의 하나님 !!
그리고 256페이지에서 계속해서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질서는 결코 조직이나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는 끊임없이 새롭게 시작하시고, 그래서 우리의 하나님은 시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도 결코 조직화될 수 없고, 제도화될 수 없고, 같은 상태로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희생이 하나님의 은총을 요구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는데, 인간이 희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이 온다고 하는, 그런 주고받는 거래형식으로 생각하지 마라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희생해도 그것을 은총을 받아내는 근거로서 작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니 순교도 죄가 된다는 말이다.
왜 그렇게 주장을 하느냐 하면, 바로 성육신 중심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시고 고난받으시고 승천하고 난 뒤에, 그냥 하늘로 철수해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성육신이 계속해서 새롭게 십자가를 발생시키신다는 것이다. 성도의 인생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 성육신은 십자가에 포함이 되는데, 왜냐하면 이 십자가가 바로 죄 있는 모습이고, 성육신은 죄 있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니 말이다.
◈ 정치적 왜곡 - 로마제국 따라하기 !!
이제 여섯 번째가 '정치적 왜곡' 이라는 것이다. 지금 초대교회의 날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런데 교회가 이런 것들도 전혀 모르고, 끊임없이 교회가 로마제국의 흉내를 내서 이 땅을 정복하고 제국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정치적 왜곡은 우리가 어느 정도는 상식적으로 아는 것인데, 교회가 정치적으로 운영되고 정당으로 운영되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쟈크엘룰은 이 정치적 왜곡을 이야기하면서 무엇을 성경적 근거로 했는고 하니, 그 유명한 예수님과 사단이 광야에서 만나서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대목을 이야기하면서, 여기서 마귀가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이 세상권력을 예수님께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 마귀의 007작전 - 예수 말고 교회를 유혹하라 !!
그렇다면 이 마귀가 주겠다고 그렇게 큰소리치는 이 세상권력의 체제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기존 인간들의 정치를 하는 정치적인 모든 제도와 기능과 행정력을 그대로 모두 다 교회에다 실어주겠다는 것이다. 즉 "이런 식대로 하면 무 준다는(먹혀든다는)" 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교회가 정치적 조직으로 버티어낼 수 있다고, 악마가 그렇게 사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리더쉽 밑에 모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란 힘의 질서체제이고, 힘의 질서 운동이란 것이다. 정치란 힘을 어떻게 분배하고 어떻게 모으는가?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어떤 조직에서 정치를 한다는 것은, 과연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는 다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줄기세포에서 보여주는 것은 "황우석인가, 노성일인가?" 라는 주도권 싸움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돈이 되기 때문에 말이다. 노성일씨는 사업가이기 때문에 그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위대한 과학적 발견을 앞두고 악마가 인간들에게 심어준 것은, 정치적 힘을 누가 갖느냐는 것이다. (사실상 한바탕 소동으로 끝났지만 말이다.)
인간들은 이러한 정치적 속성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 힘에 고개를 숙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고 하니, 주님께 고개를 숙이기 위해서 먼저 교회 지도자에게 머리를 숙이는 방법에 대해서 미리 설명해준다는 것이다. (무조건 교회에 고개를 숙이라고 억지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교회에게 머리를 숙이는 방법 - 권위의 합법화 !!
그렇다면 교회에게 머리를 숙이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정치술' 인데, 쟈크엘룰은 이것을 '권위의 합법화' 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권위의 세습제'로 이어지는데, 큰 교회 목사가 있고 그에게 아들이 있으면, 아들에게 목사를 시켜서 대를 이어 충성케 하고, 만약 딸이 있으면 사위가 그 교회를 잇게 하는, 그것이 권위의 세습화이고, 그것이 바로 악마가 심어준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중세 때에 한 영주가 대대로 교회를 물려주는 것과도 똑같다는 것이다.
◈ 허무주의 - 도망가기는 어딜 도망가 !!
그 다음 일곱 번째가 '허무주의' 인데, 이 허무주의로 인하여 교회가 또 날조되었다는 것이다. 허무주의란 일종의 도피주의인데, 이 세상이 더럽다고 하면서 떠나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사막에 수도원을 세웠던 사막 수도원에서 시작한 것으로, 이전에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조금 살폈는데, 여기서 조금 더 살펴보자.
이들은 세상 권력이 비복음적이라 해서 따로 나와서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그것이 처음으로 수도원이 되었고, 그 수도원이 자체적으로 농산물을 개간하니 자본이 생겼다는 것이다. 여기 자본이라는 뜻은, 그냥 돈을 버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돈이 축적이 될 때 자본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돈이 축적이 되어서, 이 축적된 돈 자체가 인간을 배제하고서 돈 자체가 새로운 어떤 가치를 만드는 시발점이 될 때, 이것을 두고서 자본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돈을 만든 것은 인간이지만, 그러나 이제부터는 돈이 인간의 가치를 구분하는데, 높은 것도 나누고 말이다. 이럴 때 돈이 자본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안경 값이 만원이라고 하면, 그런데 갑자기 안경이 많이 생산되면서 그 값이 오천원, 그리고 나중에는 이천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안경자체는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런데 왜 가격이 만원에서 이천원이 되었는가? 그것은 안경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경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자본에서 나왔기 때문인데, 그렇게 가격을 결정하는 힘을 자본이라 하고, 이러한 자본이 수도원에서 처음 생겼다는 말이다.
◈ 성경의 핵심 - 언약이고 선택 !!
그렇다면 쟈크 엘룰은 또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책 86페이지에 보면, "성경적 핵심은 인간의 선택, 그리고 언약사상이고, 조건 없는 주권의 위임이다" 라고 했는데, 그리고 책 뒤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디에 있더라?) 성경의 핵심은 언약이고 선택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그냥 "언약을 믿어라, 선택을 믿어라" 라고 강조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주께서 언약과 선택으로 일하심을 믿어라" 라는 것이다. 그렇게 일하심을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허무주의나 도피주의로 나간다면, 이것 자체가 자기가 자기을 구원하는 또 하나의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무엇을 뜻하는고 하면, 기존의 교회가 썩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따로 나가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되는 줄 알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것도 전혀 복음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직업도 없이 아무 것도 안하고, 오직 산에서 중처럼 도피해서 기도만 하고 최소한의 먹을 것만 먹는다고 해서, 그것이 기독교의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으로 당신이, 당신을 통해서 주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당신이 이 세상에 어떤 구석에 가든지, 탄광이든 경찰서이든 그 어느 구석이 가든지 간에, 거기에 대해서 놀라지 말라" 라는 것이다. 지금 그런 것 때문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 무엇도 포함되는가? 결혼 문제, 즉 "신자와 해야 하는가, 불신자와 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신자와 결혼을 하든 누구와 결혼을 하든 간에 무엇인가 끊고자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허무주의이고 도피주의의 비겁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성만찬 - 저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
그 다음이 202페이지인데(?), 성만찬은 결국 무엇을 말하는고 하면, "저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인정하는 모습이란 것이다. 그러니 성만찬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나는 정말 구원받을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다" 라는 것을 또 다시 재확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만찬의 의미라는 것이다.
그 다음 241페이지를 보면, "여호와의 언약이 성취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역사는 가치를 얻는다" 라고 했는데, 아까 제가 언약 이야기를 끄집어냈는데, 그것과 일맥 상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은 모든 약속이 응답되었음을 경험을 통해 볼 줄 아는 자들이 소망을 가진다고 했고 말이다.)
◈ 악마는 인간이 있는 곳에서만 본색을 !!
아홉 번째로 '권력과 세력' 이라는 대목을 보면, 283페이지에서 말하기를, "악마는 인간이 있는데서만 자기를 드러낸다" 라고 했는데,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 같은데, 이렇게 악마는 인간이 있는데서 자기를 드러낸다면, 그러면 악마가 드러내지 않는 인간이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있는 곳에 항상 악마는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데, 무슨 말인고 하면, "그러니 나는 도피했다. 나는 산 속에 갔다. 그렇게 한다고 악마가 안 따라 오는가? 라는 말이다. 악마는 인간이 있는 곳에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악마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악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어떤 식으로든 훼방하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이 곧 악마라는 것이다.
◈ 악마는 지금도 성도를 고소하고, 하늘에다 고발한다 !!
그것은 제가 한 말인데, "악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어떤 식으로든 훼방한다" 라는 것 말이다. 이것을 쟈크엘룰은 말하기를, "악마는 지금도 성도를 끊임없이 고소하고, 하늘에다가 고발한다" 라고, 진짜 중요한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신학자들은 무슨 말을 했는가? 기존의 신학자들은 성화론을 주장하면서, 성화론과 삼위일체와 결합되면, 인간을 삼위일체 속에 인간을 집어넣어서, 즉 사위일체로 만드는 작업의 일환이 성화론이란 말이다. "신, 당신들끼리만 노는가, 나도 좀 끼워도" 라는 것이다. 이렇게 삼위일체론에서 사위일체로 전환하는 방법론이 바로 성화론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성화론을 주장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악마가 지금도 끊임없이 하늘에다가 성도를 고소하고 고발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좀 어려운 것은, 그러면 악마가 성도를 고소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고소해도 상관없다고 믿어야 되는가? 어느 쪽인가? 악마가 성도를 고소하지 말라고 하나님께 당부해야 하는가? 상관없다고 해야하는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미 성도의 신분됨은 성도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품어준 분이 계시는데, 이미 베풀어진 긍휼과 자비는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긍휼이 무엇이냐 하면, 긍휼은 불쌍히 여김인데, 이 불쌍히 여김은, 처음부터 불쌍해서 불쌍히 여긴 것이기 때문에 계속 그대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다 불쌍히 여김을 받아서 구원된 자를 누가 고발하는가? 계속해서 마귀가 고발한다는 것이다.
◈ 마귀의 고소고발 효과 - 내가 이렇게 훌륭해졌구나 !!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것은 바로 성화론자들이 스스로 양심이라는 것을 통해서, 계속해서 고쳐나가면 성화가 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전보다 더 나아졌구나. 지금 이렇게 훌륭해졌구나" 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무엇이냐 하면, 마귀의 고소고발이 먹혀드는 모습이 된다는 것이다. (마귀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끝이 조금 어려운데 다시 한번 더 해보면, 악마가 지금 성도를 고소하고 고발하는데, 이것이 누구의 뜻인가? 놀랍게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성화론자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면, 악마가 성도를 고소고발하게 되면, 성도는 악마를 이기기 위해서 반듯하게 살게 되고, 그것은 성도도 신처럼 될 수 있고 악마도 이긴다고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양수겹장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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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수겹장 - 양수겸장(兩手兼將)의 잘못 ㅋㅋㅋ, 장기에서 두 개의 말이 한꺼번에 장을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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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것 자체가 바로 악마의 술책에 넘어간 것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악마는 무엇만 훼방하면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부셔버리면 되니 말이다. (성도가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악마도 전혀 말리지 않는데) 그러니 악마는 좋아서 만세를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라면 당연히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오는데, "누가 너를 송사하리요. 누가 너를 고소하리요"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를 위해서 죽으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이렇게 주님께서 성도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아니 어떻게 성도가 자기의 실수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겠느냐는 것이다. 결코 환난이나 핍박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것을 믿는 것은 전혀 인간의 능력이 아닌데, 왜냐하면, 인간은 타고난 본성으로 인해 자기가 착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능력을 믿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오셔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죄의식은 갈수록 또렷해짐 !!
토요일에 성경공부를 하면서 누군가가 참 좋은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을 믿고 난 뒤부터 자기 속에 있는 죄를 짓는다고 하는 그 의식이 사라집니까? 아니면 그대로 남아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는데, "갈수록 둘 다 또렷해집니다" 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들을 보면, 그들은 어른들이 사탕을 주면 착한 일을 한 줄로 알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짓을 한 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릴 땐 희미한데 커가면서, 즉 자립심이 강해질수록 둘 다 또렷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둘 다 또렷해지기 때문에, 악마가 계속해서 성도를 공격하도록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 말이 아니라 스가랴서에 나오는데, 여호수아의 옷이 허름하고 엉망진창이니 악마나 '얼래리꼴래리(?)' 하면서 놀리는데, 그래서 주께서 악마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옷을 벗기고 거룩한 옷으로 갈아 입히니 악마가 그만 할말이 없어지는데, 하나님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구원한다는 것이다.
(슥 3: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슥 3: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때에
(슥 3: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슥 3: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슥 3: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계속해서 쟈크엘룰은 말하기를, 지금도 교회에서 교인을 고소하고 고발하는데, 도대체 교회가 이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되면 악마의 전당밖에 더 되는가? 이것이 바로 또 하나의 날조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 그래도 지구는 돈다 ??? - 아, 돌아부겠네 !!
마지막으로 열 번째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 (Eppur si muove)' 라는, 갈릴레오의 주장을 원용한 대목인데, 사실상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쟈크엘룰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데, 물론 앞에도 동의하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동의한 것만 언급했고 말이다. 물론 좋게 생각하면 되겠지만, 그래도 남는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 쟈크엘룰의 책 말고 (제가 만든) 교재를 보면, "교회는 개혁대상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하지만 쟈크엘룰은 갈릴레오의 주장을 통해 조그만 낙관론를 끄집어내는데,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교회는 개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개혁해야할 교회 같으면 이미 교회가 아니란 말이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교회를 억지로 주님의 교회로 끼어 맞추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고 하는 것은, 성도들 본인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항이기 때문에, 그러한 성도들에게는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 자체가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아니, 제 주장에 문제가 있어요? 문제가 있냐고요?
◈ 성도 -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
이제 여기서 마지막으로 요약하면, "왜 성도에게 문제가 없는가?"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당하신 그 수난과 모욕과 무시와 멸시를 지금도 같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이게 좀 어려운 말인데, "그리스도의 몸 자체는 역사를 초월한다" 라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같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유로 말미암아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당했던 십자가의 고난을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당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오는데, "너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하면 오히려 기뻐하라" 라는 것이다. 왜 기뻐해야 하는가? 성령이 성도의 머리 위에 있기 때문인데, 즉 이미 성령께서의 목표점, 즉 성령께서 하고자 하는 일이 확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뻐하라는 말이다.
(벧전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 아하, 주님께서 이런 엄청난 수모를 당했구나 !!
그렇다면 무엇이 확정되었다는 것인가? 예수님의 공로를 증거하기 위해서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하신 고난과 수모에 함께 자꾸만 집어넣는데, 하지만 이렇게 집어넣는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다만 "아하, 주님께서 이런 엄청난 수모를 당했구나" 라는 것을 깨닫도록 해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교회사 전체강의를 마치겠습니다. Thank you very mu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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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그렇다면 결국은 성도 모두를 십자가에 달린 강도로 만들기 위해서 입니까?
* 답변 - 당연히 '아멘' 인데, 강도가 우리와는 다른 별난 인간인 줄로 아는데,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강도로만 아니라 창녀로도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새로운 피조물' 이라 하고 말이다.
2007,10,23 오후 5시 30분, 10,24,새벽 2시, 11,06 오후 8시에 마침
--- 아들자랑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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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15시간 강의를 끝내면서
이근호 2005-12-18
이번 교회사 15시간 강좌는 다음과 같은 점에 유념하여 진행했습니다.
첫째, 기존의 교회역사가 나오게 된 정치적 배경을 공격했습니다. 즉 세속 정치권력을 그대로 흉내내어서 진행된 '교회 제국 경영'을 위해 교회사가 어떤 식으로 협조했고 조작되었는가 하는 점을 공격했습니다.
둘째, 교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소위 신학전문가들이 복음을 계속 날조해서 그 신학으로 자체 방어를 나서야만했던 교회의 답답한 형편을 규명하고자 했습니다.
셋째, 이러한 점을 반성해서 바른 진리를 외쳤던 개신교가 불과 2-30년을 못 넘기고 가톨릭의 전철을 똑같이 밟을 수밖에 없게 된 원인을 규명하고자 했습니다. 소위 '신조'라는 것을 각자 만들어 가지고 그 '신조'를 기초로 새로운 전통과 역사로 무장하여 '제2의 가톨릭'으로 행세하면서 인위적 천국을 만드는 실험은 지금도 주저하지 않고 있음을 밝히려고 했습니다. 이로서 역사를 앞장세우는 쪽과 십자가만 쳐다보는 쪽이 확연히 차이짐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신학이나 신조나 교회 역사가 얼마나 위험한 악마의 목소리인지 같이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