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8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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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8강 - A 05,12,03 강의 이근호
◈ 신조(信條)란 무엇인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드디어 개신교가 교리로 정착이 되는데, 이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것이, 즉 종교개혁자들의 주장하던 것들이 교리로서 굳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교리로 정착이 되는데 기여한 것이 바로 '신조(信條)' 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들이 등장하게 되면, 이 신조들은 교리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이 교리 덩어리를 지적(知的)으로 받아들이면 신자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리를 지적으로 수용하면 신자가 되는, 그런 편리함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는고 하면, 만약 이렇게 교리를 지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신자라면, 그런데 신자라는 것은 영적으로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즉 영적으로 거듭나야하는 것이 신자인데, 아니 영적으로 거듭나야하는 사람이 지적인 교리를 자기 지식으로, 즉 합리적으로 수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신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교리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성경 내용을 축약해서 보여주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교백서를 보면 알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성경내용의 개념들과 정신들을 축약해서 굳힌 것이 신조들이고, 그것들이 교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성경내용을 그냥 굳혀서 거기에 지식적으로 동의한다고 해서 과연 신자이겠느냐는 것이다. "성경의 교리가 이렇고, 내용이 이렇습니다" 라고 동의한다고 해서, 그렇게 해서 과연 신자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 경건주의 운동 - 개신교의 교리화에 대한 반동으로 !!
여기에서 경건주의 운동이 벌어지는데, 이 경건주의 운동은 개신교가 교리화되고 스콜라화 해버리니, 여기에 대한 반동으로 18세기에 독일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삶 자체의 획기적인 변화, 즉 "중생된 경험이 없으면 과연 신자라고 볼 수 없다" 라고 여기에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신자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인가? 신조나 교리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영적이고 정신적인 대변혁이 개개인에게 일어나야 하고, 그런 변혁의 결과로서 자기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그것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젠돌프 같은 사람은 나중에 모라비안 교도가 되는데 (그 다음은 별들에게 물어봐?)
(선교에 엄청나게 열정적이었던) 이 모라비안 교도들이 미국으로 왔다가 영국으로 돌아가는 여객선 위에서 존 웨슬레를 만나게 되는데, 웨슬레가 이들의 영향을 받아서 주로 영국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아니, 도대체 그 배 위에서 무슨 일이?) 윗필드는 미국에서 주도했고 말이다.
한편으로는 과학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렇게 과학이 발달하게 된 이유는, 그동안 천주교회의 특징, 즉 '한 하나님 밑에 하나의 감독' 인데, 즉 한 하늘아래 태양이 둘이 될 수 없단 말인데, 영적으로 하나의 지시를 따라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모토인데, 그래서 1870년에 드디어 '교황무류설'이 나오는데, 즉 교황에겐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오류가 말이다.
◈ 아하, 진리에도 반항할 수가 있구나 !!
이렇게 천주교 밑에 완전히 주눅이 들어있던 사람들이, 그런데 소위 개신교가 나오니, "아하, 진리에도 반항할 수가 있구나. 반항이 가능하구나" 라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반항, 바로 그것이 과학이 싹틀 수 있는 하나의 동기를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개신교는 자기 속에 성령이 계셔야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러나 천주교는 개개인 속에 있는 성령이 아니고, 교회의 성만찬을 행할 때 임재하시는 성령이란 것이다. 즉 천주교는 성령이 임하는 모임에 참여해서 성령의 은혜를 받는 것이고, 개신교는 교화가 아닌 자기 속의 성령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 라고 할 때에, 개신교는 자기 속에 있는 성령을 의미하는 것인데, 천주교처럼 교회의 주교나 사제가 대표하는 믿음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 죄로부터 자유를, 개인의 자유로 바꿈 !!
개신교에서의 이러한 자유주의는, "죄로부터 자유이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라고 루터가 그렇게 외쳤지만, 그러나 듣는 사람들은 입장이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이 세상의 모든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로 여기게 되었고, 그래서 개인의 주체의식을 강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칼빈주의 召命論 - 과학기술의 축적과 발전으로 !!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루터주의보다는 오히려 칼빈주의가 온 나라와 유럽에 인기가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칼빈주의 소명론(召命論) 때문인데, 어떤 일을 교회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본인이 소명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비주의 예정론은, "너는 천국가, 너는 지옥가" 라고 교회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미 예정되었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이나 직업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자부심 하나가 하나가 과학기술의 축적과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말이다. 인쇄술의 발달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과학자들이 모여서 뭐라고 하겠는가? "이제는 우리 속에 있는 인간이성의 힘으로 이 대자연의 원리와 원칙을 설명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런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이 천주교를 믿든지 개신교를 믿든지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종교는 이미 하나의 문화가 되었기에 말이다.
◈ 이제는 종교가 인간의 문화활동으로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 이전까지는 종교가 문화가 아니라, 천주교 시대에는 종교는 신이 허락한 자기 운명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복종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종교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문화활동으로 전락했는데, 그러니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고, 또 자기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이 있고 신의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행동 여하에 따라서 밝혀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 되는데, 이전에는 성경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폈는데, 이제는 갈릴레이 갈릴레오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성경이 아닌 실험과 실습과 관찰을 통해서, 즉 망원경을 통해서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주를 바라보고 말이다.
아니 이렇게 달을 관찰하면서, (그 당시에 가능했나?) 즉 성경에 없는 내용을 이렇게 살피면서 그런 관찰력을 어디로 조명하겠는가? 그 이전까지는 교회의 압력이 있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개신교가 나타나서 성경이 교회보다 우위이고 우선이라고 주장하니 말이다. (그러니 교회의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 "성경대로 돌아가자" 라고 할 때에 그 이유가, 지난 시간에 "성경의 내용은 간편하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교회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뭔가가 축적이 되어서, 관행과 관습이 축적되기에, 즉 지킬 것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으로 돌아가면, (간편해지고) 그래서 교리를 지적으로 수용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경건주의 수준이라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변화되면 그만이고 말이다.
그런데 종교 자체를 벗어난 사람들은, 이제는 이성의 눈으로서 성경을 분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말도 듣지 않고서, "나는 이제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믿겠어. 성경대로 믿겠어" 라고 교회에서 뛰쳐나왔는데,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이, "과연 성경이란 무엇인가?" 라고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즉, 성경마저 관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을 부인하는 태도가 아니라, 이제는 신이 있다면, 자기들이 직접 만나겠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자기들이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것을 통해서 신의 명령을 받고, 교회를 통해서 신에게 예배도 드리고 하면서, 신에게 영광을 돌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7가지 성례가 있다는 것이다. 소위 카톨릭의 '7성례'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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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톨릭의 7성례
1. 세례성사 2. 견진성사 3. 성체성사 4. 고해성사 5. 병자성사 6. 성품성사 7. 혼인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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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개신교는 이것을 성경에 있는 것만 한다고 해서, '세례'와 '성만찬', 이렇게 2가지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교리적인 설교를 통해서 하면 되고 말이다. 성경의 내용을 함축한 것이 곧 교리인데, 이 교리에 복종할 때 구원이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 과학주의 - 이제는 내가 직접 신에게 !!
그러니 신에게 나아가는 것은 결국은 성경을 통해서 나아가는데, 그러나 이제는 신에게 자기가 바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에게 바로 나가기 위해서는, 성경대로 해야하고, 그러면 성경이 무엇이냐를 분석해야 하는데, 그런 자격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성경을 분석할 수 있는 자격 말이다. (그래야 신에게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자신감은 과학의 발달에 기인되어 있는데, 과학의 발달이라는 것은 예상과 예측능력이 있다는 말인데, 즉 어떤 일에 대해서 미리 예상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이란, 미리 예측하고 그것이 달성되면,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진리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될 거야" 라고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되어야 하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몸을 열어서 해부해보니 영혼이 없다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상 눈으로 관찰하고 그것을 되풀이해서 실험하고, 그렇게 해서 똑같은 결과가 나올 때, 그것은 진리가 되는데 말이다. 그리고 쪼개고 분석하면 원인이 나오고, 그 원인을 분석하면 또 원인이 나오고, 즉 동일한 원인에서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콧물이 나고 기침이 난다면 감기에 걸린 것인데, 그런데 옆 사람도 똑같은 감기에 걸렸다면, 그것은 감기가 옮는다는 말이다. 즉 감기 바이러스가 옮긴다는 것인데, 그래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연구하고, 그래서 해결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왜 성경이 굳이 필요한가?
그리고 이러한 감기 바이러스를 신과 직접 연결시켜 버리면, 신에 의해서 창조된 감기 바이러스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성경이라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으로 신에게 나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이것을 두고 '합리주의' 라고 하는데, 무엇이든지 따져서 합리적으로 맞으면 진리가 된다는 것이다.
◈ 진화론 - 이젠 진화의 주체자가 인간 !!
이 합리주의는 지적인 지식의 축적으로 일어나고, 이렇게 지식의 축적이 '발전'과 '발달'로 이어지고, 이것이 나중에 '진화'가 되는데, 그래서 다윈의 진화론이 자신 책 '종의 기원'(1859년)으로 말미암아서 등장하는데, 진화가 된다는 말은, 신이 만든 대자연의 원동력을 과거에는 신의 성령(은총)으로 했지만, 이제는 발전과 발달과 그 진화의 주체자가 인간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이 아니고, 즉 하나님 나라를 앉아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기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 곧 신의 뜻이라고 하는, 그런 새로운 인식들이 자신만만한 과학의 발달로 말미암아서, 사람들에게 역시 자신만만하게 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자기가 하나님 나라를 찾아가면 되고, 자기가 이 땅에서 만들어 가면 되는데, 그렇다면 결국 천국을 자기가 만들어나가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것이 과학적 지식으로만 가능한가?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사회적 불평등도 해소되어야 하고, 이웃사랑도 역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주인공이 바로 인간들이고 말이다.
이 땅에서 만들어지는 하늘나라의 주인공인 인간들의 이러한 성품의 발전은 당연한데, 인간들이 정신적이고 영적으로 발전과 진보를 거듭하면, 곧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발전과 진보란 것은, 죄악으로 물든 이 세계에서 의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란 말이다. 이것이 과학발달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 죄와 대속의 문제는 정중히 사양합니다 !!
이러한 찬란한 미래상과 연관시켜볼 때, 인간 속에 있는 품성이 죄악보다 의로움이 나온다면, 윤리와 도덕이 인간에게 내장되어있고, 신의 뜻에 의해서 인간에게 갖추어져 있다면, 개신교에서 교리적으로 이야기하는 죄라는 문제, 그리고 "대신해서 용서한다" 라는, 즉 대속(代贖)의 문제는 다 버려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합리적이며 고대적 사고방식이고, 그야말로 무지와 무식과 몽매에 푹 잠겨있을 때, 그야말로 지나간 시대의 고색 찬란한 유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지식이 축적되기 이전에 공포와 두려움 속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런 시절의 의식상태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자기 속에 있는 윤리와 도덕성으로서 이 사회를 보다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과학적인 힘으로 스스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여력과 저력을 키우면, 바로 이 땅이 지상낙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천년왕국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내자는 것이다.
◈ 이제는 합리주의 시대이고 理神論의 시대 !!
이런 시대가 바로 유럽에서의 합리주의 시대이고 이신론(理神論)의 시대인데, 이렇게 이성으로 따지는 합리주의로 인해서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시비를 걸고,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을 다 제거해나가는 분위기가 18세기에 영국과 미국에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개척시대에 전국민이 다 세례를 받고 교회에 다 나오다가, 이런 합리주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채 10%도 나오지 않게 되었고, 유럽에 있는 개신교와 카톨릭의 교회들도 텅텅 비게 되었다는 것이다. (20세기도 아닌) 이미 18세기 초반에 말이다.
◈ 카톨릭의 몸부림 - 옥스퍼드 운동 !!
여기에 카톨릭이 위기를 느끼고 전통을 강화하는 '옥스퍼드 운동'을 펼치는데,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옛날 카톨릭의 전통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야말로 교회가 고객을 모으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현상인데) 교회의 예배당은 객장이 되는데, 객장이란 쳐다보고 지적으로 배우면 된다는 것이다. 왜 증권회사의 주식이 오르내리는 전광판을 쳐다보는 그 객장 말이다.
이렇게 하면서 카톨릭은 더욱더 카톨릭화가 되는데, 즉 타협하다가 타협하다가 너무 벗어나니 다시금 옛날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옛날 향수에 다시 젖는데, 즉 다시금 보수적인 경향으로 되돌아가려고 몸부림을 친다는 말이다. 물론 나중에 바티칸 회의에서 이런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리지만 말이다.
◈ 드디어 종교냐, 과학이냐 !!
이러한 분위기가, 이전에는 "천주교로부터 해방이다" 라고 했는데, 그 다음에는 "천주교냐, 개신교냐" 라고 하다가, 이제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쳐서, "종교냐, 과학이냐" 라는 것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1700년대부터 종교와 과학이 대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공동체 운동 - 과학을 해보니 행복하더냐?
그때부터는 과학을 받아들이면 깨어있는 사람이고, 종교에 매인 사람은 미친 사람으로 취급을 받게 되는데, 그래서 과학에 속한 사람이 종교 쪽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종교 쪽은 대꾸할 것이 없고, 그래서 대꾸하지 않고 공동체 운동이 일어나는데, "너거들, 과학을 해보니 행복하더냐?" 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진실로 성경에 나오는 참된 신의 뜻, 즉 참된 공동체를 이루겠다" 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과 공동체의 공통점은, 이 땅에 지상낙원을 이루는 것인데, 그런데 과학은 "날마다 발전을 해야한다" 라는 것이고, 이에 반해 공동체는 "언제까지 발전을 기다릴 것이냐. 지금 이 바닥에서 해버려야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해야지 미래의 행복은 보장되지 않는다. 지금 내가 행복해야 한다" 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공동체 운동으로 인해서 사회주의 운동이 벌어지는데, 사회주의 운동이란, "진짜 성경대로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어서, 과학을 주장하는 너희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해주겠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실험적인 공동체 운동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공동체 운동 - 류터의 책 '메시아 왕국' !!
이런 공동체 운동이 류터의 '메시아 왕국' 이라는 책에 잘 나오는데, 후트파, 메노나이트파, 아비숴파 퀘이크파, 몰몬교, 그리고 몸을 흔드는 쉐이크 교도 등등 말이다. 그리고 '광야의 여인' 이라는 독신공동체가 있었는데, 이것은 1694년에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만들어졌는데,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광야의 여인이 마지막 남은 자가 되어서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과 싸우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본떠온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공동체 운동을 하는 자들이 항상 요한계시록을 해석해서 많이 이용을 하는데, 요한계시록에서 이 세상은 말세라고 하면서, 숫자가 999가 들어가고, 천년왕국을 이야기하고 말이다. 광야의 여인의 경우에, 예수님의 재림을 보기 위해서 지붕 위에서 망원경을 놓고 천사들이 언제 오는지를 살핀다는 것이다. 그리고 독신주의로 살면서 낡은 수도승 옷을 입고 극히 간소한 생활을 하고 말이다. 그리고 지적이고 음악적인 문화를 거부하고, 물론 거부하지 않는 단체도 있었는데, 이것이 1920년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1800년경에 보면, '소알파 집단' 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 부분에서 보면, 롯의 가족이 소알로 피하는 장면이 나온다는 것이다.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아서 소금기둥이 되었고 말이다. 즉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마지막 때이니 피하자" 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나(?)' 공동체라고 있었는데, 이들은 어떠한 실험들을 했느냐 하면, (별들에게 물어봐?) '후트파(?)' 라는 공동체는 주장하기를, 모든 정치권력은, 즉 "교회든 국가든 다 저리로 가라. 우리들 마음대로 살겠다" 라고 하는 무정부주의로서, 사유재산을 모두 없애고,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하고,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소비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4장에도 나오듯이, 즉 서로 믿는 무리가 되어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물건을 필요에 따라서 나눠주고, 서로 자기 것이라 전혀 여기지 않는, 그것을 이상적으로 여기고 펼친 운동이라는 말이다.
(행 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행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행 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행 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그렇다면 왜 성경말씀을 연구하는 운동은 없는가? 성경연구는 이미 합리적인 자유주의 쪽에서 모두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말하기를, 성경을 통해서는 개신교가 주장하는 칼빈주의 5교리와 같은 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고, 그렇게 계속해서 밝혀내고 있다는 것이다.
◈ 공동체 운동 - 소유욕을 제거하면 이상사회 건설이 가능 !!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과수원에서 공동생산과 공동소비를 하는데, 공동체 운동에서 왜 이런 공동생산 공동소비를 하는고 하니, 죄악이란 이기심과 소유욕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기심을 제거하고 소유재산을 제거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적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운동들은 대부분 소규모 종교집단들이 벌였고 말이다.
자유주의 쪽에서도 공동체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했는데, 이것은 대규모의 사상운동으로서, 인간이 갖고 있는 양심과 이성으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유명한 로버트 오웰, 프리웨, 쌩시몽, 그리고 부르돔 등이 있다는 말이다.
◈ 오웰 - 노동자들도 인간다움을 부추겨주면 !!
로버트 오웰은 실제로 공장을 경영하면서, 노동자 복지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는데, 그러면서 청교도를 보고 비웃는데, 왜냐하면, 청교도는 사회의 노동문제를 두고서, 노동자가 가난한 것은 죄를 짓고 게을러서 가난하다고 보았기에 말이다. 그러나 오웰은 그렇지 않고, 그들에게 인간다움을 부추겨주면 얼마든지 그들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가가 그들에게 베풀어주게 되면, 그들은 더욱더 신이 나서 일하기 때문에 자본가에게도 유리하고 노동자에게도 역시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청교도들처럼 이 세상을 너무 그렇게 죄악시하지 말고, 인간들의 선한 의지만 잘 부추기면 얼마든지 새로운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루소가 이야기하기를, '일반적 의지' 라고 해서, 즉 인간 속에는 근본적인 자연적인 착함이 있다고 했는데, 이러한 착함을 교회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도 독점하지 말고, 이제는 일반 시민들에게, 이들이 가지고 있는 착함을 개발하면, 이 사회는 교회나 성경이 없어도 인간의 양심으로서 얼마든지 좋은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루소의 정신으로 오웰이 공동체 운동을 펼쳤고 말이다.
쌩시몽은 공상적 사회주의를 주장했는데, 이제는 이 세상 자체가 교회에 갈 필요가 없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착한 심성을 가지고 얼마든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적인 낙원을 지상에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계속해서 문제를 수정보완하고 개선하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이 세상은 신이 원하는 아름다운 곳이 된다는 것이다.
◈ 제1,2차 세계대전 -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는 계기가 !!
그런데 이런 주장이 언제 와장창 박살이 나는고 하니, 인간들이 제1,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인간이란 이렇게 악하다는 것을, 과학이 참된 이성을 주장했지만 (오히려 그러한 과학 때문에) 함께 멸망하는, 즉 공멸하는 결과를 낳았을 때, "인간이 무엇이며, 자연은 무엇이며, 신의 뜻은 무엇이며, 성경의 뜻은 무엇인가?" 라고 하면서, 여기에 대해서 다시 한번 반성하면서 되새기게 된다는 것이다.
◈ 신정통주의 - 현실에 맞는 새로운 정통으로 다시 돌아가자 !!
옛날 개신교들이 주장한 "인간이 죄인이며,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자이다" 라는, 그런 개신교에 있던 죄 관념으로 자신들을 반성하면서, 이제는 현실에 맞는 새로운 정통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신정통주의' 라는 것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재산차이가 점점 더 벌어지는데, 실제로 19세기 미국에서 자본가들은 소득이 600% 늘었는데 노동자들은 소득이 오히려 25%가 줄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라가 자본주의화가 되면서 소득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데도, 그런데 미국 청교도들을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칼빈을 이야기할 때, "인간이 갖고 있는 재산도 하나님의 축복이다" 라고, (소위 소명론으로) 칼빈이 가르쳤다고 했는데, 여기에 반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나눠주는 것이 복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옛날 영토국가일 때는 사제들 대부분이 어설픈 공무원(?)이었는데, 근대국가가 되기 이전에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부자가 되면 될수록 양 사방에서 (주로 교회이겠지만) 압박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어주어라. 그리고 줄 때는 반드시 교회를 통해서 주어라. 그렇게 하면 교회가 배부르다" 라고 말이다.
그 당시에는 모든 진리는 교회가 독점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그렇게 큰 교회당을 짓고 사제들에게 대우를 잘했다는 말은, 그것이 곧 이웃사랑의 수단이 되니, 그래서 부자들에게 가진 것을 다시 교회에 내어놓으라고 헌금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가 그 헌금을 가지고 구제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어디에 얽매이겠는가? 물론 돈은 부자가 내는 것이지만, 그들은 실제로 교회에 매달리게 되니, 교회는 계속해서 정신적으로 그들을 자기들에게 예속되도록 조치하는 방편이 된다는 것이다.
◈ 개혁주의 - 내 안의 성령 !!
◈ 카톨릭 - 교회가 베푸는 성령 !!
그런데 이제는 칼빈주의 등장으로 말미암아서, 교회가 베푸는 성만찬을 통한 성령이 아니라, 이제는 '내 안의 성령' 이기 때문에, 그리고 잘 사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에, 그래서 계속 잘살아야 하니, 계속해서 근검절약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칼빈도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을 두고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는데, 그러나 가난한 자를 구제를 할 때 어떤 한계가 있는고 하면, 자기 재산이 축적되는 그 범위 안에서만 가난한 자를 구제해야지, 그냥 무턱대고 가난한 자에게 무조건 나누어주어서 자기 재산이 줄어들게 되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부자가 되어서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누어주어서 그만 자기마저 가난하게 되면, 그만 본인이 저주받은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어떤 수단이 되는고 하면, 부자를 더욱더 부자가 되게 하는 그런 베풂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본가가 공장을 세우게 되면, 보다 더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임금을 나누어주기 위해서는 임금 단가가 낮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오늘날 기업을 하는 사장과 똑같은데, 임금을 몇 사람에게 많이 주는 것보다 아르바이트를 많이 모아서 하게 되면, 불쌍한 사람들에게 그만큼 베푸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게 비정규직의 시작인가?) 이렇게 되면 누구의 재산이 늘어나는가? 그 당시 미국의 기득권자들이, 즉 자본가들이 누구인가? 청교도들인데, 그들의 재산이 마구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이렇게 자본가들이 돈을 마구 끌어 모아도) 교회가 반발을 하지 않고 호응한 이유는 무엇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교회도 돈이 있어야 제대로 운영되기 때문에, 그래서 돈줄을 놓치면 안 되는데, 그 돈줄이 바로 부자들이라는 것이다.
◈ 구원 문제는 신조(교리)로 해결 !!
그렇다면 구원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신조를 통해서, 즉 교리를 가지고 하면 되는데, 가난한 자이든지 부자이든지 간에 교리를 지적으로 배워서, 그렇게 머릿속에 잘 담아 놓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구원론, 성령론, 그리고 교회론을 다 외우면 된다는 것이다. 성례, 치리, 예배 등도 줄줄 암기하면 되고 말이다.
18세기 중반에 웨슬레나 조나단 에드워드 등이 부흥운동을 주도할 때, 사람들의 관심사가 무엇인고 하니, "내가 구원받았는가?" 라는 것인데, 그래서 그 다음부터 성경의 어느 구절이 자기를 구원했는지, 거기에 관심을 두었다는 것이다. (요즘도 그렇고 말이다.)
◈ 자유주의 - 예수가 아닌 성경을 공격하라 !!
흔히들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할 때, 이 자유주의가 무엇을 공격하는고 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아니라 성경을 공격하는데, 즉 "성경이 하나의 책으로서 묶이기 이전에, 이미 성경 내용이 각자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 담겨있다" 라는 것을 증명하고 까발리는 것이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에서 성경을 공격한다고 했으니, 사람들은 성경 자체를 공격할 때, 이것이 나중에 가면 신약신학과 구약신학으로 나누어지는데, 즉 성경신학이 발달하는데, 오늘날에 '신약신학' 혹은 '구약신학' 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런 용어들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그러나 과거 천주교에서는 그런 신학들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자체가 삼위일체 그 자체로 끝나버렸으니 말이다.
신학은 니케아 회의 때,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삼위로 계신다" 라고 하면 이미 다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여기에 대해 지적(知的)으로 수용하면 되고, 그 다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교화가 베푸는 7가지 성례를 행하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내용은 교회가 독점하기 때문에, 즉 성경말씀은 교회가 제대로 알기 때문에 교회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고 말이다.
◈ 스피노자 - 모세가 과연 모세오경을 썼는가?
그런데 신약신학과 구약신학이라는 용어가 튀어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는 내 똑똑한 머리로서 내가 성경을 나름대로 분석해보겠다" 라는 것이고, 그 선두주자가 바로 '스피노자' 이었는데, 이 양반은 그야말로 천재 중에 천재라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구약을 보면서 질문하는 것은, "모세가 과연 모세오경을 썼는가?" 모세가 흔히 모세오경을 썼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하냐는 것이다. 그들은 "아니다" 라고 외치는데, 왜냐하면 신명기 마지막을 보면 모세가 죽은 후에 일어난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아니 어떻게 그가 썼으면 그런 일이 있느냐는 것이다. 모세 자기가 죽고 난 뒤의 일을 자기가 어떻게 기록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과거에는 이것을 교회가 어떻게 해석했는고 하니, 모세가 죽기 이전에 앞당겨 계시를 받아서 썼다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교회가 베푸는 성만찬 없으면 지옥으로 가야하니 말이다.
이 성만찬을 사제가 주관하고, 이 사제는 교황으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았고, 이 교황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았으니, 그러니 사제가 시키는 대로만 지적으로 수용하면 되지, 감히 함부로 어디 성경을 보고 따지느냐는 것이다. 혹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사제나 신부에게 물어보고,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 권위에 고개 숙이고 복종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성만찬이 효과가 있고 말이다. 감히 일반 교인들이 성만찬을 거행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교회가 주도권을 쥐고 마음대로 하는 시대가 지나갔으니 제대로 한번 따져보자는 것이다. 따져보니까 스피노자 같은 경우에, 이것은 성경은 하나 하나를 분석해볼 때, (그 다음은 별들에게 물어봐? 다음 두 번째 강의에 계속해서 나옴)
◈ 라이마루스 - 기독교와 예수님은 아무런 상관없다 !!
'라이마루스' 라는 사람은 신약성경을 건드린 사람인데, "기독교와 예수님은 아무런 상관없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실패한 사람이고, 기독교를 만든 사람은 나중에 따로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라고 하면 사람들이 호응할 줄 알았는데, 물론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 막판에 판돈까지 다 날린 사람이 예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에 대한 영광은 이미 우리 속에 있는 선한 양심으로 충분하니, 옛날 구닥다리 신화의 개념으로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5분 휴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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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강의가 재미(?)가 좀 있나요? 다음시간에는 그들에 의해서 모세, 다윗, 예수, 그리고 사도바울까지도 다 깨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이 하는 짓은, 십자가를 거부하고 그것을 대체할 것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 질문 - ???
* 답변 - 공동체에는 두 가지 스타일이 있는데, 한 쪽은 엄청나게 금욕적이고, 다른 한 쪽은 상당히 자유분방(?) 하다는 것이다. 결혼을 해도 남편이나 아내가 서로 여러 명이 될 수도 있고 말이다. 그것은 객장에 온 손님들의 취향에 따라서 하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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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8강 - B 05,12,03 강의 이근호
◈ 구약 - 특별계시는 아니다 !!
'스피노자' 라는 사람이 구약의 모세율법을 조사하면서 무엇을 느꼈는고 하면, 이것은 인간의 자연적 이성과 양심과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잠언서를 보니, 이것은 특별계시가 필요하지 않는데, 아니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어라" 라는, 여기에 무슨 특별계시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구약성경이란 무엇인가? 그 당시에 이스라엘 국가가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즉 국가의 질서를 잡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인간 속에 자리잡고 있는 법적 양심과 윤리도덕에 호소해서 하늘의 신과 연결시켜 놓은 것이란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특별계시' 라고 하는데, 그런 표현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자연적인 심성은 어느 종교든 다 있는데, 특별계시라고 해서 기독교만 우수한 종교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법적으로 다 주어졌기에 말이다.
◈ 성경전체를 신의 계시로 여기는 것은, 공동체의 음모 !!
스피노자 이후에 여러 가지 다른 종교들이 고고학적으로 많이 연구가 되었는데, 과거에는 기독교에만 있는 줄로 알았던 것들이, 그러나 이제는 그게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기독교와 유사한 요소들이 많이 있음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성경전체를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는 것은, 그 당시에 성경전체를 신의 계시로 받들어 모시도록 만들려는 공동체의 무서운 음모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코드와 같은 것을 밝혀내야 하는데, 그래야만 사람들에게 성경의 참된 뜻을 제대로 전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성경은 분석용이고 그야말로 해부대상이 되어버리는데, 이렇게 성경을 해부할 때에 칼로서 사용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이 이미 기존에 알고 있다는 '양심', 그리고 과학적 인식인 '합리성'이었다는 것이다. 양심과 합리성 말이다.
◈ 아스트럭 - 왜 하나님 이름이 다 틀리는가?
그 다음이 '아스트럭(Jean Astruc)' 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창세기 1장을 보면서, "왜 하나님 이름이 다 틀리는가?" 라는 것에 의문을 품었는데, '엘로힘'이 나왔다가, '여호와(야웨)'가 나왔다가, 왜 이렇게 서로 다르냐는 것이다. 그때부터 틀린 것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앞글자를 따서 엘로힘이니 E문서, 여호와이니 J문서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J문서와 E문서가 서로 섞인 것이 아닌가 하고, 그것도 분석하고 분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왜 구약을 연구하는데 가위와 풀이 필요한가?
과거 총신의 배재민 교수는 말하기를, "요즘 구약은 가위와 풀만 있으면 된다" 라고 했는데, 성경을 펴놓고 '엘로힘' 나오는 문단과 '여호와' 나오는 따로 구분해서, 서로 자르고 다시 붙이고 해서 새로이 만들어 내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스트럭으로 시작해서, 그 다음이 비트의 문헌가설이 있는데, 그리고 쿰펠트도 있고 말이다. 쿰펠트는 주장하기를, 창세기는 엘로힘 시대와 야웨 시대의 원전(原典)과 욥의 시대에서 나온 작품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두 문서설이 나오고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엘로힘 문서를 따로 모아놓고, 또 여호와 문서를 따로 모아놓고 보니, 각각의 문서에 나름대로 스토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 나름대로의 스토리가 맞을까, 맞지 않을까? 그런데 문제는 이야기가 서로 맞지 않다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맞지 않을 때는, "둘 다 하나님의 뜻이니, 에라 모르겠다 둘 다 엎쳐버리자" 라는 식으로 그냥 붙여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그게 통하겠는가? 성경은 보는 사람이 이해하라고 해놓고는, 그런데 이 둘을 붙어놓고 보니 스토리가 연결되지 않는데, 흔히 논문을 쓸 때 남의 책을 짜깁기하면 줄거리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듯이 말이다. 목사도 설교를 하면서 남의 설교를 짜집기를 하다보니, 본인도 헛갈려서 하나의 설교에서 두 가지 상반되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양반은 설교를 한편 베끼는데 7시간 걸렸다고 하던데, 그러면 몰라도 말이다.)
문서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문제제기를 하는데,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즉 "왜 신의 이름이 서로 다른가?" 라는 것에 대해서, 다른 합리적인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누가 거기에 대해서 "E니까 어떻고, J니까 어떻고" 라고 하는,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는 자들이 없다는 것이다.
히브리 언어가 점점 더 발전하고 유대인들 학자들이 등장하면서, 유대인들은 자기 언어인 히브리어로 구약성경을 해석하고, 그리고 유대교의 신비적인 해석법들이 학문적으로 많이 연구되어서 나오면서, 이제는 교리라는 껍데기에게 시중을 들듯이 성경구절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자체가 그 어떤 문맥이 있으며, 그 문맥에서 어떤 뜻인가를 찾는다는 것이다.
◈ 교리를 버리고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가? - NO !!
그렇게 해서 원래의 참뜻을 찾으면, 지금까지 배운 교리들은 잠시 잊어버리고, 아니 모두 다 버리고 성경자체에서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지, 즉 이제는 성경자체의 분석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들어보면 말이 되는 것 같은데) 그런데 이렇게 교리를 버리고 성경자체를 분석한다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가?
아무튼 이렇게 해서 그들은 교리를 버렸다고 하는데, 물론 천주교나 개신교의 교리는 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과연 인간의 이성적인 선입관까지도 버릴 수 있겠는가? 결코 못 버린다는 것이다. "신이란 착한 사람에게 복 주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에게 벌을 내린다" 라고, 그렇게 전제하고 성경을 보게되면, 그 자체가 조직신학이고 자기에게 또 하나의 교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선입관이 없이, 즉 교리도 없이 그냥 성경만 연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교회에서 가르친 교리를 다 버리고, 삼위일체도 다 버리고서, 이제 제대로 성경을 연구하겠다는 것이다.
◈ 볼테르 - 교회가 부귀영화가 탐이 나서 교리를 만들었다 !!
'볼테르' 라는 사람은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 사람은 그야말로 볼때리는(?) 사람인데, 교회가 왜 삼위일체와 같은 교리를 만들어 냈는고 하니, 교회가 세속적인 부귀영화가 탐나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즉 "맛있는 것을 너희들만 먹냐?" 라는 말이다.
그리고 교회가 이미 그 사회에서 주도권들 쥐고 권력의 맛을 보았기에, 그런 권력을 맛을 계속해서 보려면 민중들을 휘어잡아야 되는데, 이렇게 민중들을 휘어잡기 위해서 그동안 철저하게 민중들에게 세례를 주고 성만찬을 베풀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깨어나야(계몽) 하는데, 교회라는 영적권위나 정치적인 절대권력을 모두 벗어버리고, 이제는 계약에 의해서, 인민에 의해서, 스스로 자기 권리는 자기가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근대사상이고, 이것이 의회제도인데, 요즘말로 국회제도라는 것이다.
1681년에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났는데, 이제는 왕이란 상징적 존재이고 실제로 나라를 지탱하는 것은 누구인고 하니, 이것을 프랑스에서는 '브로조아' 라고 하고, 영국에서는 '젠틀맨' 이라고 하는데, 차를 양보하고 어쩌고 하는 신사도도 여기서 나왔고 말이다. 이런 중산층에 의해서 국가의 모든 것을 유지하는데, 이렇게 중산층에 의해 국가를 유지한다는 말은, 국가의 모든 진리와 복음을 그들이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 자본주의 - 얼마나 남기는가?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자본주의란, 자본에 의해서 모든 가치가 결정되는 것인데, 이 '가치' 라는 것은, 있는 것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남기느냐?" 라는 것인데, 이렇게 남기는 것을 말하니, 흔히 말하는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가 생각나는데, 잉여(剩餘), 즉 얼마나 남기느냐가, 이것을 스톡???? 이라고 하는데, 현재 가지고 있는 축적된 재산가치를 측정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남기지 못하는 재산은 재산도 아니라는 것이다.
칼빈주의에 의하면, 소위 '달란트 비유'에 의하면 (물론 성경에는 그런 엉터리 비유가 없지만) 이 자본주의가 그야말로 멋지지 않는가? 많이 남기면 남길수록, 재산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자본이 축적되면 축적될수록,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공인들과 귀족들이 모여서 중산층을 이루는데, 그러면 귀족들은 왜 넣어주는가? 그 당시의 귀족들은 여전히 엄청난 토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주역들인 상공인들은 도시를 형성했지만, 그렇게 도시만 형성되어서는 자본주의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시는 '길드' 라고 해서 자기들끼리만 주고받으면서 놀게 되는데,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물류가 유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인간의 노동가치는 시장에서 결판 !!
그래서 많은 토지를 갖고 있는 기존 귀족들을 자본화시켜서, 도시에만 시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농촌까지도 확대되면서, 온 나라전체가 그렇게 자본주의화가 되면, 그리고 이 자본주의가 국가를 넘어서 세계시장이 형성되면, 아담 스미스가 자기의 저서인 '국부론'에서 언급한, 즉 이 시장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서, 이것에 의해서 가격이 결정되고, 그 가격에 따라서 자기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남기느냐가 측정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강원도 시골 할머니가 감자를 땅에서 캤는데 맛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맛이 있을까? 그것은 전라도나 다른 지역에서 캔 감자와 서로 비교를 해야 되는데, 이렇게 전라도 감자와 강원도 감자를 비교하려면, 시장이라는 곳에 내놓아서 소비자가 비교할 때, 비로소 어느 것이 최고인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시 감자는 강원도가 최고야!" 라고 소비자가 결정을 해버리면, 전라도 사람은 5만원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고, 강원도의 할머니는 5만원 생각했는데, 강원도는 예상외로 8만원을 받았고, 전라도 감자는 3만원, 2만원, 이렇게 내려오다가 졸지에 단돈 만원에 팔리게 된다는 것이다. 즉 5만원이 그만 만원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이 노동가치는 과연 어디에서 결판이 나는가? 강원도 할머니와 전라도 할머니의 노동가치는 시장에서 결판이 난다는 것이다. 그 결판나는 곳이 시장이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비극이라면 비극인데, 과연 웃어야 할까, 아니면 울어야 할까?
이렇게 성경을 떠나서, 물론 인간이 신을 떠나지는 않았겠지만 (아니 못 떠나겠지만), 이렇게 교리를 떠나서 신앙생활을 하나의 문화활동이나 여가선용으로 여기는데, 즉 과거처럼 성경의 교리가 아니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가 착한 일을 하면, 죽어서 가는 천국은 나중 문제이고, 지금은 자기 마음이 천국이고, 이 땅에서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고 그야말로 천국같이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살면 나중에 그 공적이 쌓여서 죽어도 좋은데 가고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성경을 심사하고 있는데, 성경에 무엇을 빼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가? 기존에 있던 교리들을 모두 빼버리고, 그 빈자리에 이미 자신들이 알고 있는 자본주의의 윤리와 도덕을 다시 집어넣기 위해서, 거기에 맞는 새로운 맞춤 성경, 즉 새로운 교리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성경을 완전히 분해하고 재조립한다는 것이다.
◈ 벨하우젠의 문서설 - J, E, P, D !!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벨하우젠' 이란 유명한 사람이 주장한 문서설인데, J문서란 여호와 문서인데, 누군가에 의해서 편집되었다는 것이다. 엘로힘 문서인 E문서도 편집되었고, 제사장 문서인 P문서도 그렇고, 신명기 문서인 D문서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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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 하우젠(Julius Wellhausen) (1844.5.17.~1918.1.7.) - 독일의 신학자. 19세기 성서비평 연구의 최고권위자이다. 괴팅겐대학을 나와 1870년 그 대학의 구약신학사 강사가 된 뒤 할레대학 셈어강사를 거쳐, 마르부르크대학 교수, 1882~1913년 모교의 교수를 지냈다. 1878년 《이스라엘사 서설(序說)》을 발표, 구약의 모세5경에 쓰여진 역사는 세계 고대사나 헤브라이 민족의 기원을 기록한 게 아니라, 뒤에 발달한 유대교의 이상이 과거에 흡수된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은 스승인 H.그라프의 설을 재확인한 것으로서 '그라프-벨하우젠설'이라 불린다. 그는 오리엔트의 고대 유적 조사·발굴의 성과에 대해서 아주 회의적이었다. 또 신약성서의 복음서도 같은 문헌비판적 방법으로 연구하는 등 성서기록의 역사적 위상을 정립하는 데 힘썼다. 저서에 《원시 이슬람의 종교적·정치적 반당(反黨)들》 등이 있다. - 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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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설 [文書假說, documentary hypothesis] - 구약의 오경이 네 개의 문서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가설. 구약의 오경은 연대순으로 보면 J(여호와 혹은 야웨)문서, E(엘로힘)문서, D(신명기)문서, P(제사)문서로 구성되어 있다는 설이다. 이 가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왔다. J문서는 오경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BC10~9세기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 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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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이렇게 편집을 했는가? 편집이란 반드시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기 마련인데, 이 편집자가 누구인고 하면, 고대국가에는 왕이 있고 사제계급이 있었는데, 명목상 사제계급이 왕보다는 낮지만, 왕은 힘과 권력(폭력)이 있고, 사제에게는 신의 법이 있다는 것이다. 옛날 왕들은 신의 아들, 즉 천자(天子)인데, 이방국가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그래서 힘은 왕에게 주고, 법은 사제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여기 왕 밑에는 많은 추장들(호족들, 부족들)이 있었는데, 이런 부족들도 합치지 않으면 왕에게 언제 어디서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데, 그러니 많은 부족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세 유럽이라면 영주들인데, 이 영주들 밑에 백성들이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부족을 이루는가? 이 부족은 처음에는 자기 식구들로서 시작한, 즉 혈연구조인데, 이렇게 혈연사회로서 같은 성씨들이 모여서 살기 때문에, 그래서 나중에는 김씨, 박씨, 최씨가 서로 힘을 합치지 않으면 (잡아먹든, 먹히든 간에) 강력한 국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물론 전쟁에서 지면 포로로 사로잡히고 말이다.
이렇게 민족과 민족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 구약성경에 나오는데, 민족과 민족끼리 서로 싸우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면 "너는 무슨 종족이야?" 라고 하는 것이 나오는데, 그렇게 민족이 민족을 친다는 것이다.
◈ J문서 - 유다나라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 !!
(다시 문서설로 돌아와서) J문서의 편집이 이루어진 것은 다윗시대인데, 이 다윗시대 이후에 12지파 가운데 유다지파가 독보적이었는데, 거기에 "형님, 좀 봐 주세요" 라고 해서 나온 지파가 베냐민 지파이고 말이다. 그래서 두 지파가 합쳐서 강력한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 그들이 출애굽에서 나올 때 어느 우월한 지파가 있었는가?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지파와 지파간에 계급이 없었고, 모세가 준 법에 의해서 다같이 지배를 받아야 하는데, 그런데 다윗이 왕이 되고 설쳐대니까(?), "아니, 다윗 니가 무엇인데?" 라고 하면서, 다른 지파들이 반발하여 나온 것이 북쪽 나라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다윗시대 이후에 남쪽 유다나라에서는 무엇을 해야만 통치가 안정되는고 하면, "하나님께서 원래부터 우리 유대지파를 선택했는데, 너희들이 몰라서 그렇다" 라는 것을, 그것을 정신적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새겨줄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J문서는 다윗시대에 편집이 되었는데, 그 이후에 유다나라를 결속시키고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말이다.
◈ E문서 - 유다지파가 왕이 되는 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 !!
엘로힘 문서인 E문서는 그 편집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엘로힘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에 국한된 하나님이 아니고, 온 천지를 창조를 하신 하나님임을 보여주는 것이 'E문서' 라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엘로힘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이 같이 등장하는 것은, 다윗 왕이 자기 백성들을 지배하면서, 유다지파가 왕이 되는 것은 천지창조 때부터, 즉 하나님의 처음부터 작정된 뜻이었음을 알려주어서, 백성들을 다독거리기 위한 조치로서 그렇게 편집을 했다는 것이다.
◈ D문서 - 유다판 팔만대장경 !!
나중에 밝혀진 것을 보면, 이 E문서에서 P문서(제사장 문서)가 나오고, 또 D문서(신명기 문서)가 나온다는 것이다. 요시아 왕 때에 제사와 유월절을 어떻게 지내게 되는가? 성전을 청소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하는데, 이 율법책은 율법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D문서' 라는 것이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모세오경인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스라엘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만약에 이 신명기를 모세가 기록했다고 하면, 어떻게 모세가 장래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하게 알고 기록했느냐는 것이다. 어떻게 알게 되었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계시로 가르쳐준 것인가?)
신명기 28장을 보면,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1절에서 14절까지만 복을 받는다는 말씀이고, 나머지 뒷부분은 '주~욱' 저주로 도배를 해놓았다는 것이다. 32장은 아예 저주를 받는다고 작정을 하고 써놓았는데,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 너희들 백날 해봐라. 너희들 쫓겨나지. 너희는 여호와를 안 믿고 다른 신을 쫓게 되어있어" 라고 말이다. 이런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신 32:15)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신 32: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지금 모세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갔는가? 분명히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들어가서 이렇게 이렇게 해서 망한다는 것까지 자세하게 이야기한 것이 바로 신명기라는 말이다. (이게 어떻게 납득이 되는 이야기인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지금 나라가 큰 어려움이 처해서, 즉 나라의 운명이 이방나라인 바벨론에게 망하기 직전이기 때문에, 옛날에 흘러 내려온 전승들을, 책들이 아니고, 이러한 전승들(전설들) 중에서 필요한 것만 모아서 편집을 했다는 것이다. 언제 했는가? 요시아 왕 때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자신들이 처한 '삶의 정황'에 비추어 보아서, (즉 이방나라인 바벨론에 멸망하기 직전이니) 성경의 여러 내용들 가운데서 필요한 것들을 뽑아내서 백성들에게 다시금 힘을 내도록, 즉 그들의 신앙을 북돋아주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 편집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모세의 이름을 들먹인 것은, 모세가 아니면 백성들에게 질 먹혀들지를 않는데, 모세가 이스라엘의 영웅이고, 하나님을 직접 만난 사람은 모세밖에 없기에 말이다. 그래서 모세의 말은 무조건 하나님의 뜻과 같이 여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는다고 했으니, 모세의 말이라고 하면 백성들이 무조건 순종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요시아 왕 때에 이방 바벨론의 침략으로 나라가 어려움에 쳐하니, 종교적인 힘으로 나라의 결속이 가능하도록, 그런 역할을 한 그때의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서적이 바로 성경이라는 것이다. (마치 고려시대의 몽골의 침임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팔만 대장경을 만든 것처럼 말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니 그런 성경책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 되고 말이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말대로, "구약성경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고, '신의 뜻이 이것이다' 라는, 그런 구약성경에 나오는 율법적 요소는 이미 우리들 속에 다 들어있다. 그래서 로마서 2장에 보면, 이방인에게 양심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구약이 더 이상 필요가 없고, 신약도 마찬가지이다" 라는 것이다.
◈ 궁켈의 '양식사' - 성경은 하나의 문학적 양식(mode) !!
이러한 'J.E.P.D' 라는 4 문서설을 벨하우젠이 주장했고, 그 이후에 양식학파가 나오는데, 이 양식은 먹는 양식이 아니고 양식(樣式), 즉 모드(mode) 라는 것이다. 성경은 소설, 시, 희곡, 고백 등이 나오는 하나의 문학적인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양식들이 되기 위해서는, 그 양식을 만들어내는 그 당시 사회적 형편이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모빙켈과 궁켈이 그렇게 주장했다는 것이다.
궁켈은 시편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니, 이미 그때 원주민들이 매해 정월, 즉 연초가 되면 현재 왕을 중심으로 그 토착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계약을 갱신하는데, 요즘말로 하면 일종의 공동의회를 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올해도 당회장 목사님으로 모시겠습니까?" 라고 물어서, 교인들이 "예" 라고 대답하면 계약이 갱신된 것이란 말이다. 위임목사라면 계속해서 줄기차게 가지만, 임시목사라면 계약을 갱신해야 한다는 말이다.
옛날에 왕이 이렇게 계약을 갱신해야 할 이유는, 고대인들은 왕이 신의 호응을 받지 못하면 그 해악이 백성에게 온다고 믿었는데, 그런 의미에서는 사실상 왕도 불쌍한데, 왕은 백성들에게 이용당하고 말이다. 왕이 좋아 보이지만, 그게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왕은 백성들을 배려해야하는데, 옛날부터 말이다. 어떤 집에 재앙이 오든지, 가뭄이나 홍수나 기근이 발생하면 왕이 잘 알아서 신에게 빌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연 재앙이 백성에게 미치지 않도록 중간에서 잘 처리해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진짜 신의 아들답다는 말이다.
◈ 왕은 신의 아들이 된 흉내라도 !!
따라서 왕의 입장에서 보면, 백성들이 자기를 신의 아들이라고 하니, 그 흉내라도 내야한다는 것이다. 그 흉내가 바로, "신께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라는 것인데, 즉 그때부터 자기 스스로 신의 아들 행세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막대한 재물은 자기가 챙기고 말이다. 신의 아들이니 말이다.
이런 '신의 아들' 이라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질문하는데도 나타나는데, 바리새인들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인데, 그러니 신의 아들답게 무엇인가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광야에서 백성들이 예수님께 "만나를 내릴 줄 아는가?" 라고 물으니, 예수님은 "만나보다 더 귀한 생명의 떡을 너희들에게 주겠다" 라고 하셨고 말이다. 또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할 때 피하셨는데, 이게 의미하는 것은, 왕이라면 신과 서로 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궁켈 - 시편은 '삶의 자리(Sits In Leben)'를 파악하는 역할 !!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경우도 시편에 보면, 왕이 정기적으로 계약을 갱신할 때 흘러온 구약시대의 전승들을 모아서, "지금 유대왕은 계약이 갱신된 진짜 하나님이다" 라는 양식을 통해서 인간의 '삶의 자리(Sits In Leben)'를 파악하도록 하는데, 시편이 그런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궁켈과 모빙켈이 주장하는 것은, 가나안(원주민) 양식과 애굽에서 들어왔던 이스라엘 양식이 구약성경에서 이렇게 부자연스럽게 섞여져 있기에 골라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이렇게 혼합되기 이전의 사상들을 (양식을 통해서) 밝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양식사 학파라는 것이다.
◈ 폰라드의 '전승사' - 구약은 하늘이 아니라,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진 것 !!
양식사 학파가 지나고, 그 다름이 '전승사' 학파인데, 여기서 중요한 '폰라드' 라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폰라드는 주장하기를, 성경에 나오는 신앙고백서들은 왕이나 집권자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시대 합당한 신앙고백을 그때 그 당시 백성들이 자기 신앙으로 고백한 것들인데, 그것을 연결하고 또 연결해서 지금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바꾸어서 말하면, 성경내용이 일관성이 없다는 말이다.
폰라드는 주장하기를, "서로 다른 잡스런 글들이 마구 얽혀있는 것을 마치 하나의 책처럼 인정하는데, 똑똑한 인간들이 왜 모르겠는가? 하나님이 성경을 그렇게 만드신 게 아니고, 하나님을 믿던 사람들의 글인데, 왜 지금까지 사람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하나님의 글로 보는지 답답해서 미치겠다. 아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옛 구닥다리 신앙으로 되돌아가는가? 지금은 이 시대에 맞는 것을 믿어야한다" 라는 것이다. 자기들은 그런 답답함과 안타까움으로 구약성경을 보았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상황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고) 신약성경 쪽을 살펴보면 더욱 가관인데, 라이마루스, 파울로스, 스트라우스, 부셋트, 리츨, C.H. 다드, 슈바이쳐, 그리고 바이스 등등이 신학자 행세를 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이들을 한번 살펴보자.
◈ 라이마루스 - 아, 예수에게 속았다 !!
17세기 사람인 라이마루스는 주장하기를, 예수님은 자신이 정치적인 메시야라고 허풍을 떠니까, 제자들이 그런 줄로만 알고 따라다니다가 죽어버리니, "아, 아니네. 속았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가 죽은 후에 너무 허전하니 조작해서 만들었는데, 그래서 시체를 훔쳐놓고서 부활했다고 우기고 말이다.
◈ 파울로스 - 다시 쓰는 오병이어 !!
파울로스와 같은 사람들은 (아예 소설을 쓰는데),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떡을 뗀 기적을 나름대로는 합리적으로 해석하는데,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이 나누어주어서 떡을 뗀 것이 아니라, 무리들 중에 부자가 있었는데, 그도 강의를 듣다가 보니 점심때가 되는 줄도 몰랐는데, 그때 예수님이 먹을 것을 나누어준다고 하는 소리에 감동을 받아서, "맞아, 내가 떡을 가지고 있지. 나누어주어야지" 라고 해서 부자가 나누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부자가 아무리 해도 5000명을 다 감당하지 못했는데, 사실은 그때는 각자가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다는 것이다. 강의시간이 한 두 시간이 아니었기에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강의에 너무 도취되다보니 도시락을 먹는 것을 잊어버렸는데, 물론 몇 명은 난로(?) 위에 올려다 놓고 미리 까먹었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예수님의 그런 소리를 듣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도시락을 꺼내먹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기록한 자들이 예수님이 혼자 그렇게 기적으로 했다고 사기를 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물위를 걸은 사건은, 실제로 물위를 걸은 것이 아니고, 물결치는 바닷가를 제자들이 먼 곳에서 바라보다가, 한 놈이(?) 예수님께 너무나 충성을 한 나머지, "야, 우리 주인이 뜬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들 스승에게 뭔가 신기한 것이 있으면 곧장 오버되어 퍼지기 마련인데, "우리 예수님이 물위를 걸었다. 우리 선생님이 최고!" 라고 하면서, 그렇게 주장했다는 것이다.
◈ 스트라우스 - 헤겔의 정반합(正反合)을 이용 !!
'스트라우스' 라는 사람도 만만치 않은데, 이 양반은 헤겔의 정반합(正反合)을 이용해서 자기 주장을 펼쳤는데, 예수님이 정(正)이라면, 제자들이 조작한 기독교는 반(反)이고, 그래서 자기가 다시 정리해서 합(合)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이 사람도 다른 사람들의 주장과 거의 대동소이한데, 믿을 만한 것은 마가복음이고, 그 나머지인 마태, 누가, 요한복음은 다 엉터리라는 말이다. 뒤에 뭔가 추가해서 붙인 것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의 공통점은, "왜 주기도문이 서로 틀리는가?" 라고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주기도문의 내용을, 즉 4복음서를 서로 대조해보니, 공통점은 고사하고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주변의 이야기들을 한곳에 끌어 모아서, 각자 전도하는데 유용하도록 써먹었다는 것이다.
◈ 바우어 - 따로 국밥 !!
'바우어' 라는 사람은 주장하기를, 팔레스틴 기독교가 따로 있고, 헬라(안디옥) 기독교도 따로 있는데, 이 두개의 기독교가 서로 다투어 종합적으로 나온 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기독교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쉽게 말해서, 세 가지가 다 틀렸다는 것이다. 베드로 사상과 바울의 사상이 서로 맞지 않으니 말이다.
◈ 부세트 - 조작에 조작을 거듭 !!
그리고 '부세트' 라는 사람은 주장하기를, 예수님은 인자(人子)를 주장했고, 이것을 제자들은 주(主)로 만들어내었고,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러한 예수를 전파하기 위해서 예수를 영(靈, 프뉴마)으로 다시금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조작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팔레스틴 기독교에서는 인자(人子)를 주장했는데,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는 팔레스타인 지역이고, 그리고 땅 끝까지는 안디옥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기독교는 예수님을 인자, 즉 메시야로 만들었고, 이것이 제자들에게는 주(主)가 되는데, 즉 제자들은 이방나라의 주(큐리오스)의 개념으로 조작했고, 사도바울은 여기서 기독교를 영(靈)으로 다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 슈바이처 - 예수는 도박에 실패한 인물 !!
소위 아프리카 성자(?)로 유명한 슈바이처는 종말론적으로 보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곧 임할 줄 알았던 과대망상증 환자라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임한다, 임한다, 임한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 과대망상이 그만 실패했다는 것이다. 진짜 기독교는 사도바울이 만들었고 말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고 하니, 신약성경이란, 그 안에 있는 내용들이 서로 충돌되고, 도저히 서로 융합이 될 수 없는 각각의 사상들이 한 곳에 혼합되어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모두 다 그러하다는 것이다.
◈ 바이스 - 두 문서설, 'Q문서' !!
'바이스' 라는 인물은 최초로 '두 문서설'을 주장했는데, 즉 마가문서와 Q문서를 이야기했는데, 여기서 'Q문서' 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없는 기본적인 문서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에 없는 것이 마태복음에 있고, 마가복음에 없는 것이 누가복음에 있고 말이다. 아무튼 이런 방식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 하르낙 - 교회사의 껍데기를 벗겨라 !!
'하르락' 이란 사람이 있는데, 자신의 '교회사' 라는 유명한 책에서, "지금까지 교회사는 헬라철학으로 각색되었기에, 그 껍데기를 깡그리 다 제거하면 참된 원래의 예수님이 나온다. 그러니 기독교를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자" 라고 했는데, 상당히 무언가 복음적인 것도 같은데, 전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르낙은 에베소서와 같은 것도 사도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진짜로 예수님의 정신은 오로지 '산상설교' 밖에 없는데, 산상설교란 이 지상에서의 천국 만들기이고, 그리고 윤리와 도덕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리츨도 그렇게 이야기했고 말이다.
◈ 불트만 - 중요한 것은 역사적 의미 !!
'불트만' 이란 신학자는 양식(樣式)을 신약에 적용시킨 사람인데, 신약성경은 여러 가지 양식들이 섞여있어서 그것을 다시 분석해야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 있는 기적의 경우에는, 그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는가가 중요하지 않고, 기적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른 것도 그렇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실제 역사의 사건으로 무엇이 일어났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즉 역사가 아닌 '역사적(歷史的)' 사건이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HISTORY'가 아니라, 'GESCHICHTE' 라는 것인데, 이렇게 역사적인 사건이 될 때, 그 의미가 오늘날 신자의 마음에 동일하게 역사(役事)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불트만에 있어서, '역사'와 '역사적' 이라는 것은 서로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의 내용이 진짜인가를 묻지 말고, 현대인에게 맞도록 각색해야 하고,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적이나 십자가, 부활 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즉 부활신앙이 중요하지 부활사건은 개뿔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마음속에 예수님이 살았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지, 실제로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 브뢰메 - 메시야 은닉사상 !!
(우뢰메가 아닌) '브뢰메' 라는 사람는 메시아적 '은닉사상'을 주장했는데,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라는 것을 자꾸만 숨기고 쉬쉬했는데, 이렇게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임을 숨긴(은닉) 것을 두고, 다른 사람들이 메시야라고 했다고, 후대 사람들이 곡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 시간에 할 내용인데, 바로 이런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것이 바로 근본주의인데, 칼빈주의 교리를 가지고 그들이 어떻게 대항했는가를, 다음시간에 알미니안주의, 아브라함 카이퍼, 신정통주의를 통해서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 폴 틸리히 - 하나님이 아닌 존재의 기반 !!
'폴 틸리히' 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를 생각지 말자고 했는데, 만약에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하면 하나님을 존재케 하는 존재가 있어야 된다고 하는데,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고, 즉 신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고 그냥 '존재의 기반' 이라 보자는 것이다. (칼 바르트는 자기 친구인 틸리히를 신학자가 아닌 철학자라고 평가절하(?)함)
그리고 또 '세속화 신학' 이라는 것이 있는데, "신은 죽었다" 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현대에는 신은 의미가 없다" 라는 것이다. (실제로 신이 살았느냐 죽었느냐 하는 것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라, 그런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 본 회퍼 - 새로운 시대에 합당한 기독교를 !!
독일의 '본 회퍼' 라는 신학자는 주장하기를, 지금 이 시대는 성숙된 시대이니 옛날 사람들이나 어린아이들에게 같이 가르치지 말고, 성숙된 성인들에게 합당한 새로운 기독교가 필요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성숙된 새로운 것이 과연 무엇인가?
◈ 라이센푸스 - 사회복음 !!
그것이 바로 '사회복음' 이라고 해서, '라이센푸스' 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이 사회 속에 하나님 나라가 점점 더 커나가고 성장해나간다고 했는데, 마치 씨앗이 커지고, 그리고 씨앗이 열매는 맺는 것처럼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겨자씨 비유처럼 말이다. 이 사회 속에 하나님의 이웃사랑이 퍼지면 점점 사회가 발전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 칼 바르트 - 위기의 신학 !!
그런데 이런 환상(?)이 제1,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서 허망하게 다 깨어져버렸는데, 이런 허망한 분위기에서 드디어 칼바르트가 말하는 '위기의 신학'이 등장하는데,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위기를 주신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위기를 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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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시간에는 보수주의가 자유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살펴보겠는데, 어디 오늘 강의가 재미가 좀 있었는가? 지금 교회 밖에서 젊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공부하는 것들은, 과거에 선배들이 모두 다 배운 것들이고, 이미 다 나온 것들이라는 말이다. (해 아래 무슨 새로운 것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