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3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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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3강 - A
05,10,29 강의 이근호
◈ 313년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으로 교회는 황제중심으로 !!
초창기에 교회는 주님중심이 아니라 황제중심이었는데,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 갑자기 많은 수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말이다. 주님께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황제에게 잘 보여야 된다는 것이다. 황제가 통치하는 세계이니 말이다. 그래서 황제가 인정하는 황제와 같은 종교를 가짐으로 말미암아서, 자기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들이, 마치 유행처럼 교회에 몰려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치 요즘 연예인들처럼 말이다. 우두머리에게 잘 보여야 한 자리라도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로마제국 통치하기 위해서 백성들의 마음을 어떻게든 하나로 수습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말이다. (그래서 황제는 적극적으로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 지도에서 [스페인, 이태리, 마케도니아, 터어키, 소아시아,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칼타고, 아프리카, 영국, 갈리아, 서바나]가 나오는데, 로마제국이 북쪽 칼타고까지 다 점령해 있었다는 것이다. 북쪽의 게르만 민족은 그냥 그대로 있었고, 또 흑해가 이렇게 있고 말이다.
로마제국에 있어서,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에 그대로 있지 않고 터키의 이스탄불로 옮기는데, 그래서 그 지명이 '콘스탄틴노플'로 고치게 되는데, 그리고 맞은 편에 칼케톤이라는 지역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 두 곳을 합쳐서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로 부르지만 말이다. 나라 전체를 이렇게 동쪽으로 옮긴 것을 '비잔틴 동로마제국'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시작하면서 언급했지만, 313년 황제가 칙령으로 기독교를 승인하게 되니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제의 관심사는 당연히 국가의 질서가 안정되는 원한다는 것이다. 교리가 어떻다는 것은 관심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튼 교회가 서로 단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황제가 공회의 주도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
교재 2페이지에 보면 이것이 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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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의회 시대
역사적으로 성경은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 이미 교회회의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회의 기원은 전통적으로 사도행전 15장과 갈라디아서 2장에 기록된 예루살렘의 사도회의였다. 하지만 이후 약 300년 동안 교회는 공의회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지난 2000년 동안 모두 21번의 공의회가 카톨릭 위주로 모였다.
1회 325년 니케아 회의: 아리우스 정죄
2회 381년 제 1회 콘스탄티노플 회의: 아폴리나리우스주의의 정죄
3회 431년 에베소 회의: 네스토리우스파의 정죄
4회 451년 칼케돈 회의: 유티케스주의의 정죄
5회 553년 2회 콘스탄티노플 회의: 단성론자 정죄
6회 680-681년 제 3회 콘스탄티노플 회의: 단의지설을 지지하는 교황을 파문시킴
7회 787년 제 2회 니케아 회의: 성상파괴 논쟁
8회 869-870년 제 4회 콘스탄니노플 회의: 포티우스 분리문제
9회 1123년 제 1회 라테란 회의: 성직자 서임권 논쟁
10회 1139년 제 2회 라테란 회의: 이중 교황의 분열 종식
11회 1179년 제 3회 라테란 회의: 교황 선거법
12회 1215년 제 4회 라테란 회의: 발도파와 십자군
13회 1245년 제 1회 리용 회의: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
14회 1274년 제 2회 레용 회의: 동서 교회 연합
15회 1311-1312년 빈 회의: 템플 기사단 문제
16회 1414-1418년 콘스탄츠(현 스위스 지역) 회의: 교회의 개혁과 후스의 처형
17회 1438-1439년 펠라라/피렌체 회의: 동방 교회와의 통합 문제
18회 1512-1517년 제 5회 라테란 회의: 교회의 개혁
19회 1545-1563년 트렌트 회의: 신교문제와 교회 개혁
20회 1869-1870년 제 1회 바티칸 회의: 교황무오설
21회 1962-1965년 제 2회 바티칸 회의: 교회와 신앙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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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위일체교리 - 교회의 주도권 다툼으로 발생 !!
제1회 공의회인 니케아 회의 때부터 초반기 칼케톤 회의 등등, 이렇게 계속해서 진행되면서 회의를 누가 주도하는고 하니, 교회가 아니라 황제가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회의를 황제가 주도하는 이유는, (교리문제에 깊은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교리문제로 싸우면 나라꼴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황제가 주도해서 하는 말이, "교회 너희들끼리 교리 싸움 같은 것은 하지 말고 그냥 서로 마음을 합쳐라" 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합칠 때에, 황제는 교리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회의에 참석한 자들이) 자기편에게 유리하도록 회의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황제에게 뇌물을 바치는 등 정치적인 공작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 '삼위일체교리' 라는 것이다.
그 당시에 교회 안에는 여러 종류의 파(派)들이 있었는데, (시장에 내다 파는 대파 말고, 마치 서울에 강남파와 강북파가 있고, 대구에는 근호파가 있듯이 말이다. 실제로 그런 파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당시에는 교회 내에서 주도권 싸움을 하던 파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로마파, 알렉산드리아파, 안디옥파, 콘스탄티노플파, 예루살렘파, 이렇게 5파가 상당히 서로 세력을 장악하면서 대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325년 니케아 공회 이전에 황제의 주도하에 말고도 교회에 회의들이 있었는데, 교회끼리 회의가 있었다 것이다. 그 하나가 "부활절을 언제로 정하는가?" 라는 것이었는데, "부활절을 유대교의 유월절 당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그 다음날로 할 것인가?" 라고 문제였다는 것이다.
◈ 도나투스파 논쟁 - 변절자가 주관하는 성찬식은?
그리고 두 번째는 '도나투스파'와의 문제였는데, "박해를 받던 시절에 변절한 놈들이 박해가 끝나고 난 다음에 윗 선에 아부를 해서 주교가 되어서 주관한 성찬식은 무효인가, 아닌가?" 라는 것이다. 그러니 도나투스와 같은 사람은 화가 나서 주장하기를, 그런 변절자가 주관하는 성찬식은 무효이니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성찬식이 무효라는 말은, 그냥 성찬식 문제가 아니라, 터툴리안의 주장에 따르면, 성찬식에서 천당가는 구원의 능력이 나오니 그러니 결국에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과도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나투스의 주장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성결에 기초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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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나투스 [Donatus] - 카르타고의 주교(?~355). 교의를 엄격히 준수하였으나, 박해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교회를 버린 자파(自派) 사람들에게 재세례(再洗禮)를 받게 하여 로마 교회에서 이단시되었다.
※ 도나투스파 [Donatus派] - 4세기 초기에 북아프리카 기독 교회에 출현한 교파. 교회 문제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반대하고 철저히 종교적이어서 참회의 삶과 순교를 주장하였으며, 7세기까지 존속하다가 이단으로 몰려 쇠퇴하였다. (네이버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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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서로 다투고 했을 때 황제의 입장은 무엇인고 하니, 그 회의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의 옳고 그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즉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왜 내 나라에서 시끄러운가, 같은 예수를 믿으면 그만이지 왜 서로 싸우는가?" 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 1차, 2차, 3차로 계속해서 진행되는 회의의 취지가 무엇인고 하니, "교회 지도자끼리 싸우지 말고 정치적으로 타협을 하라" 라는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는 자리였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공의회와 연관된 그 당시에 유명한 삼위일체를 공부한다는 것은, 어느 파가 정치적인 술수를 멋있게 사용했는가를, 바로 그러한 술책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써먹고 안 먹고는 여러분의 자유겠지만 말이다.)
여기서 재미난 것은, 나중에 황제가 국가내의 소란방지를 위해서 중재안을 내고 타협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주도권을 쥐게 된 주교급들, 즉 막강한 세력을 가진 로마 주교들이 도리어 황제를 압박하고 굴복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리적인 것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그러한데, 자기들 교구에서 주장하는 교리가 무조건 옳다고 인정해달라는 정치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황제의 입장에서는 범을 키운 꼴이 되고 만 것이다.
◈ 삼위일체논리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이용을 당했는가?
이번 시간에는 "삼위일체논리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이용을 당했는가?" 하는 그 과정을 지금부터 살펴보겠는데, 교재 23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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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위일체 논쟁의 시작 - 기원전 1세기부터 1세기 중엽에 걸쳐 필론(Philo)(B.C.20년경)이라는 자가 등장해서 헬라철학과 유대교라는 양대 사상을 연결하려 했다. 즉 헬라철학과 유대교 사상은 동일한 진리의 다른 표현들일 뿐이며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진리명제의 문자적 의미와 우화적 해석을 내세웠다. 여기서 그는 신은 인격적이면서도 동시에 절대적으로 초월하시기에, 제 2신에 해당하는 중재자 개념을 제시했다. 필론은 그런 중재자로서 '로고스'를 말하는데 이는 지성과 같은 것이었다. 물론 신에 의해 창조된 것들 중에서는 로고스가 가장 고귀하고 서열상 최상이지만 여전히 신보다는 열등하게 위치되어진다. 이처럼 플라톤과 그의 후배들에 의해서 신론이 이런 식으로 흘러오는 상황에서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가 철학적으로 딜레마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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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논쟁의 시작은 기원전 1세기부터, 즉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에 유대교의 '필론' 이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예수님이 아닌 (태어나기 이전이니까) 유대교의 신에 대해서 말하기를, "신은 인격적이면서 절대적으로 초월하기에 제 2신에 해당하는 중재자 개념이 필요하다" 라고 말이다.
이 필론은 주장하기를, 유대교에서는 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 구약의 하나님은 인간이 감히 찾을 수가 없고 바라볼 수도 없는 초월적이신 존재이면서도, 또 구약의 하나님은 마치 인간이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본성 - '로고스' 개념이 반드시 결부 !!
그러니 초월적 하나님과 인격적인 하나님이 지상에 오셔서 이 지상에 있는 인간들과 연결이 되어야 하는데, 그 연결하는 중재자로서 아이디어를 낸 것이 바로 '로고스' 라는 것이다. 이 로고스라는 아이디어가 니케아, 콘스탄틴, 에베소 회의 등 계속되는 회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본성을 설명하는데는 이 '로고스' 라는 개념이 반드시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제 2회 콘스탄틴노플 회의(381년) 때에 '아폴리나리우스' 라는 사람을 정죄하게 되는데,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로고스로부터 시작하는데 아폴리나리우스는 이 로고스가 육이 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동방 신학인 콘스탄틴노플에서는 로고스가 육이 아닌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고스가 육이 되었나, 사람이 되었나?" 라는 것을 다룬 것이 바로 제 4차 칼케톤 회의라는 것이다. 이것이 제 3차 에베소 회의에서부터 계속해서 이어졌고 말이다.
다시 정리하면,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사람은 육과 영혼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 로고스가 육이 되면서 영혼을 로고스가 대체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영혼이 없고 로고스가 그 자리를 대신해서 차지한다" 라는 것이다.
◈ 동방신학 - 로고스가 육이 되었다 !! 서방신학 - 로고스가 사람이 되었다 !!
그리고 제 4회 칼케돈 회의(451년)에선 유티케스주의를 정죄하는데, 이 유티케스주의가 무엇인고 하니, 아폴리나리우스가 주장한 것이 더 극단적으로 가서, 예수님의 신성이 인성을 점령해버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성(性), 즉 신성만 있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이 있지만, 두 개의 성이 있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성인 신성으로 귀결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티케스의 주장이고, 아폴리나리우스의 "로고스가 육이 되었다" 라는 사상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알렉산드리아(서방) 신학에 반해서 동방신학에서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둘이 서로 혼합되지 않는다" 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고 신은 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육도 가지고 있고 인간의 영혼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방신학은 로고스가 사람이 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서방신학은 로고스가 육이 되었다고 하고 말이다.
그러니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고 하니까, 로고스가 육이 되든 사람이 되든 항상 그 초점은 "로고스가 무엇인가?" 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리스도 이야기에 로고스가 왜 자꾸 들어오는가? 요한복음 1장에서 나오기는 하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로고스와 저들의 로고스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 하필이면 왜 '로고스' 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계속 로고스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데, 그렇게 된 원인이, 그런 아이디어가 어디에 있는고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유대교 신학 속에 이미 '로고스' 라는 개념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격적인 하나님이 인격적인 인간과 교제하려면 '로고스' 라는 개념이 필요하다는 인간적인 합의의 바탕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 25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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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 학파의 경우, 로고스 사상을 더욱 증폭시킴으로서 신학 초기의 핵심적 주제였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사상을 뼈대를 제공하는 가교로 간주된다.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실재의 보편적 법칙'을 의미하던 로고스가 스토아 학파에서는 '만유에 내재하는 신적 힘'을 뜻하는 데까지 확장됨으로서 신관 구성의 핵심 개념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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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런 필로의 로고스 사상이 최초인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본 대로, 이보다 2,3백년 전에 이미 스토아 학파에 나온 것으로, 이 로고스 사상을 더욱더 증폭시킴으로서 신약초기의 회의주제였든 삼위일체와 기독론 사상의 뼈대를 제공하는 그러한 가교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 스토아 철학은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예수님 훨씬 전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 이미 B.C. 2,300년 전에 스토아 학파에서 '로고스' 이론이 등장 !!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스토아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의 '실제 보편론'에 의하면, "하나밖에 없는 절대적 신이 어떻게 다양한 사물을 만들어내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이것을 로고스 이론으로 설명을 했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영지주의를 하면서 했는데 기억이 좀 나십니까?)
이 스토아 학파에서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들은 로고스를 만유에 내재하는 신적인 힘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고 하면, 인간 하나 하나에 다 로고스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 하나 하나에 다 로고스가 들어 있다는 것인데, 은폐되어 있는 로고스가 비 은폐로 파생이 되면, 그것은 곧 인간 하나 하나의 로고스가 말이 되어, 즉 소리가 되어 우리에게 각자각자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이죠. '말하기 말씀' 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사람은 다른 짐승과 달리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신적이 요소가 있다고 본 것이다. 물론 그런 신적 요소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즉 은폐가 되어있는데, 그 은폐되어 있는 신적 요소가 다른 동물들과 차이가 나게 드러나는데 그것이 바로 '말' 이란 것이다. 그러니 로고스는 나타나면 말씀이 되고, 안 나타나면 로고스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토아주의는 자기 속에 있는 신적인 요소에, 즉 자기 내부에 있는 신적 음성에 순종하고 사는 것이 가장 올바른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마치 오늘날 성령에 이끌려 살아갈 것을 주장하는, 그런 것과도 인식틀이 똑같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전 2,3백년 전에 이미 이런 인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 유스티누스 - 철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다 !!
그래서 유스티누스는 "철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했는데, 그들은 다만 구체적으로 예수를 몰랐을 뿐이지 사실상 그리스도인이란 것이다. 지난 시간에 했는데 기억이 나세요? 오늘날 천주교가 주장하는 칼 라너의 '익명적 그리스도인' 과도 비슷하다고, 또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모든 인간에게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과,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다 부처가 있다는 불교사상과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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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보편적 로고스에 의한 참여 사상에 신론을 통해서 주입이 되어버리면, 스토아주의의 만인평등사상은 자연스럽게 모든 인간은 신의 자녀라는 기독교의 인간관과 혼합되어버린다. 뿐만 아니라 스토아 학파의 운명주의적 신의 섭리론은 나중에 예정론의 내용을 가득 채우게 되는 정신적 토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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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스토아 학파의 만인평등주의가 모든 인간은 신의 자녀라는 기독교 인간관과 혼합이 되어버리고, 또 스토아 학파에서는 모든 것이 로고스에 의해서 발생되었는데, 그런데 문제는 나중에 이런 스토아 학파의 섭리론이 (교회에서 말하는) 예정론과 결합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 교회 안의 걸림돌을 제거하라 !!
그렇다면 이러한 철학에서 나온 것들이 기독교의 교리와 만날 때에 어느 쪽이 걸림돌이 되겠는가? 즉 기존의 로고스 사상을 기독교가 받아들일 때 저쪽 철학이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기독교 안에 있는 어떤 사상들이 걸림돌에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교회가 불교교리를 받아들이려할 때 기독교의 어떤 교리가 걸림돌이 되어있으면, 불교의 교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쪽의 교리를 제거하면 불교인들이 '와' 하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들이 심적인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걸림돌이 날아갔다는 말이다.
이렇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신학자의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하나 더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들이 납득되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고, 그들이 바로 오늘날의 목회자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는 짓들이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걸림돌 - 어떻게 '중재자'가 사람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걸림돌인가? 어떻게 '중재자'가 사람에게 죽임을 당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가 문제라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예수님이 죽을 수가, 어떻게 신이 어떻게 죽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당연히 신은 죽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 서방신학 - 십자가를 도덕적인 죄의 문제로 해결 !!
이러한 십자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고 하니, 서방신학인 로마의 터툴리안 같은 경우에는, 도덕적인 죄의 문제로 이 십자가를 처리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도덕적으로 죄를 지었기에 로고스인 예수님을 못 알아보았고, 그래서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다.
◈ 동방신학 - 중요한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님 !!
그러나 여기에 비해서 동방신학, 즉 안디옥 신학의 이레니우스와 같은 신학자는 무엇이라 말했는고 하니, 십자가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고, 즉 이 십자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다시 한번 더 정리하면, 동방신학은 "로고스가 사람이 되었다" 라고 주장했고, 서방신학은 "로고스가 육이 되었다"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동방신학에서는 왜 로고스가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했는가?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은 첫째 아담의 불신앙을 극복하기 위해서 둘째이자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그래서 극복을 하셨기에 그까지 것 인간의 죄나 십자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존재론적으로 인간 자체를 바꿔치기 하는 것이지, 사람들이 몰라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이 무엇이 중요하냐는 것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실수였다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 실수이듯이 말이다. 이것이 동방신학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서방신학의 이레니우스나 오리겐 등은 인간회복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회복을 통한 세상회복인데, 마치 윗치만 니의 지방교회 계통이고, 통일교 계통처럼 말이다. 비록 지금은 고통스럽지만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성도는 부족하지만 그 성도 안에 로고스가 들어 있는 이상은 얼마든지 행복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터툴리안은 주장하기를, 인간들이 도덕적으로 잘못을 하고 그래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올바른 생활하도록, 즉 도덕적으로 깨끗한 생활을, 경건한 생활하도록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하는 사람을 성도라고 할 수 있지, 나쁜 짓을 하는 자들을 성도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철학의 로고스 사상을 버리지 못하면 둘 다 꽝 !!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동방이나 서방이나 둘 다 십자가 근처에도 못 간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로고스 사상 때문인데, 그들이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의 그 로고스 사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 헬라철학의 로고스 - 분여(分與)의 임무를 띠고 !!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로고스란 것이 무엇인가? "신은 한 분인데 어떻게 만물은 각양 각색인가?" 라는 것이다. 즉 어떻게 하나에서 다양한 게 나오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무엇인가 다양하게 분배해주는, 이것을 '분여(分與)' 라고 하는데, 뭔가를 집어넣는다는 말이다. 즉 하나로부터 충실하게 임무를 받으면서도, 각 사람에게 다양하게 집어넣을 수 있는, 위에서 내려오는 어떤 요소가 분명하게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로고스' 라는 것인데, 물론 고대 그리스(헬라) 철학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기독교는 아직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이니 이러한 로고스 개념은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해야 신의 하나임과 만물의 다양함이 합리적으로 납득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겁나게 똑똑하지 않은가?)
◈ 다신론(多神論)도 결국에는 하나의 신(神) !!
이런 철학이 있기 전에는 다신론(多神論) 개념이었는데, 그때는 여러 종류의 신들이 있었는데, 바로 그러한 신의 대표가 제우스라는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 이후에는 인간 이성으로 생각을 해보아서 다신론은 다 때려치우게 되었고, 아무튼 신은 하나이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이 많다고 하는 것은 그 신을 누군가 낳던지 해서 만들었다는 것인데, 결국에는 그 신을 만든 것은 하나라는 것이다. 즉 여러 신이 있다고 해도 결국에는 하나라는 말이다. 하나에서 다수가 나왔지 않느냐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영지주의를 공부했는데, 그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밖에 없는 보이지 않는 신이 이 지상에 피조세계를 만들어놓고, 그 피조세계에다가 신에게 올라가는 에이온(계단)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점점 갈수록 마음의 깨달음이, 즉 인간의 지혜가 오면 해탈의 경지가 되는데, 그렇게 한 단계 두 단계 점점 올라가서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초대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이 로고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로고스를 이렇게 설명하니 문제가 무엇인고 하면, 여기서 교재 25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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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전능한 동시에 지선(至善)하다면 이 세계에 도무지 악이란 있을 수 없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신의 두 속성이 양립하는 것은 모순이므로 하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이 전능함에도 악을 허용할 만큼 지선하지 않거나 반대로 지고의 선이기는 하지만 악을 폐기할 만큼의 능력을 지니지 못하는, 그야말로 신의 권위가 결정적으로 도전 받는 상황을 상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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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전능한 동시에 최고의 선이라면 도대체 이 세상에 악이 없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에게 (선과 악의) 두 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이므로 하나를 포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어거스틴 - 악은 선의 결핍 !!
여기서 어거스틴은 악을 포기하는데, 즉 악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악이 있다고, 즉 악과 선이 대립한다고 본 것은 어거스틴이 개종하기 이전에 몸담고 있었던 '마니교' 이고 말이다. 마니교는 선과 악의 대립이고, 어거스틴은 악이 없다고 보는데, 이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것이다. 선이 잠시 빠져나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중에 집어넣으면 언제든지 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악은 없고 선이 있음' 인데, 이렇게 '선이 있음' 인데, 그러다가 '어, 선이 빠져 있네' 라고 하면서, 여기에 선하신 예수님이 들어와 버리면 악도 선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 십자가도 무시하는 맞춤교리 !!
그러나 그렇게 되면 십자가의 의미를 전혀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십자가의 의미는 초대교회가 시작하자마자 날아가 버린 것이다. 사도바울 이야기 후에 곧바로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주위에 깔려있는 로고스 때문에 그렇고, 기존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는 맞춤신학을 하다가 보니 '십자가' 라는 걸림돌은 참으로 그들에게 걸림돌 그 자체라는 것이다. (물론 원래 십자가가 걸림돌이니 그 역할을 제대로 했다고 볼 수도 있고 말이다.)
다시 정리하면, 서방교회는 십자가를 도덕적인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으로 변질시키고, 동방교회는 "그까지 꺼 대충 대충 넘어가지 뭐, 십자가는 어차피 에피소드인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의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원한다" 라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들이 정녕 귀머거리인가?) 그게 아니라 몰려오는 사람들을 챙기기에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교리라고 하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인데, 사람들의 입맛에 맞고 납득이 되는 쪽으로 만들어져 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 22페이지를 보면, 거기 '공의회 순서' 중에서 "제6회 3차 콘스탄티노플 회의(680-681년): 단의지설을 지지하는 교황을 파문시킴" 이라고 되어있는데, 단(單)의지설, 즉 예수님은 의지가 하나밖에 없다고 주장했던 교황이 그만 황제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 공의회의 주도권은 황제에게 !!
그러니 여전히 제1회 니케아 회의부터 중요한 것은 황제의 정치력 때문에 교회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즉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에 전혀 상관없이, 그런 것을 따지지 않고 마구 작살내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회의에 참여하는 주교들도 교리보다는 황제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따라서 아부와 정치적 권모술수를 부리면 된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키릴'은 공의회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진짜로 웃기는(?) 이야기인데,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는 문제로 모인 제3회 에베소회의이지 싶은데, 반대파들이 오기 전에 먼저 회의를 열어서 결정을 다 내었다는 것이다. (이때 막대한 뇌물을 황제에게 바쳐서 그만 알렉산드리아 교회재정이 바닥나고 말았는데, 황제를 꼬드겨서 일부로 회의날짜를 촉박하게 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뇌물까지 주면서까지 승리를 하려고 하는가? 승리를 해야만 5개의 파벌 중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회 니케아 회의는 "주도권을 누가 쥐는가?" 라는, 즉 누가 선점을 하느냐는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주도권을 쥐고 나면 무엇을 하는가? 제1회인 니케아 회의에서 로마교회가 주도권을 쥐고 난 후에 모든 공의회는 "니케아 회의는 무류(無謬)하다" 라고 하는, 즉 오류가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나 에베소 회의, 그리고 칼케돈 회의 등등, 모든 회의들은 이 니케아 회의가 옳았다고 하는, 니케아 회의에 대해서 박수를 치고 그 내용을 다시 확정짓는 회의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동방교회에서도 지지 않으려도 달려들었고 말이다.
그래서 (반대파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키릴이 꼼수를 쓴) 제3차 에베소회의를 '강도회의' 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마치 강도와 같은 짓을 해서라도 회의의 주도권을 강탈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자기들만의 회의였고, 그 반대인 네스토리우는 따로 모여서 서로를 정죄하는 회의를 개최했다.)
◈ 황제가 대통령, 교회가 여당, 야당은 동방교회 !!
하나의 통일된 로마제국 앞에서 하나의 통일된 교회가 있다 보니, 그 교회의 교권을 쥐는 것은 정신적인 로마의 황제가 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도권을 가져야만, 이런 정신적 싸움에서 밀리지 않아야만, 즉 힘이 세야만 전세계에 마치 점 조직처럼 흩어진 교회에 주교급을 파견할 때 권력을, 즉 파문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황제가 대통령이고, 교회가 여당이고, 여당 내의 야당은 동방교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6회 3차 콘스탄틴노플회의를 마치고 나면 '쫙' 분리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서로가 "잘먹고 잘 살아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아리우스 - 예수님이 없던 시절도 있었다 !!
여기에서 처음회의인 제1회 니케아 회의를 살펴보면, 이 니케아 회의는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 라는 사제의 주장 때문에 소집된 것인데, 그의 주장을 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흔히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물론 맞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 되어버리면 하나님이 둘이 된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했듯이) 유대교에서 말하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완성이 바로 기독교인데, 구약에서 약속한 것의 완성이 기독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여호와 한 분이었는데, 그런데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면 신약에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신약의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두 분이 생긴다는 것이다. (기존의 하나님과 예수님인 하나님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그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하나님과는 서로 차별을 두어야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이라면, 신약에서의 하나님은 물론 하나님이지만 약간은 격이 떨어지는 그러한 하나님이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그러니 아버지만 있고 아들이 없었든 때도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이 아버지와 동시에 태어날 수 없기 때문에, 즉 아들이란 아버지가 있고 난 뒤에 있는 것이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없었든 때도 있었는데, 이렇게 없었다고 하는 것은 무(無)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무(無)로부터 유(有)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없는데서 생겨났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분이 오셨는데, 그분은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을 낳은 분이라는 것이다.
이상이 아리우스의 주장인데, 그의 중요한 주장을 3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첫째로, 구약의 하나님이 한 분이듯이 하나님은 둘이 될 수 없다. 둘째로,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닌가?" 라는 문제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맞기는 맞는데, 구약의 하나님을 절대적인 하나님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낮은 단계의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셋째로,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아들인데, 여기 아들이란 말은 아버지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아들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게 아니라면 왜 굳이 아들이란 말을 하겠는가? 이렇게 하나님이 예수님을 낳으셨다고 하면, 낳기 이전 예수님이 없던 시절도 있었다. 물론 낳은 이후에는 예수님이 (계속해서) 계셨고 말이다.
이러한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해서, 그가 옳지 않다고 코르도바의 '오씨우스'가 극렬하게 반대했다는 것이다. 물론 나중에는 인기 있는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를 반대하는 주장을 계속해서 했고 말이다. (그래서 흔히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간의 논쟁으로 보는 것이다.)
◈ 니케아 회의 - 아리우스 Homoiousian : 아타나시우스 Homoousion !!
앞서도 말했지만, 이렇게 논쟁할 때 300여명이 모였는데 관심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성부와 성자를 '유사본질(Homoiousian)' 이라고 이야기했고, 거기에 대해서 아타나시우스는 '동일본질(Homoousion)'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본질이 같다고 말이다. 이렇게 예수님과 하나님은 동일본질이라고 말함으로서, 구약의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즉 본질적으로 한 분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창조된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로부터 그냥 나셨다고 공회의는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니케아 회의 때 성자의 신성에 대해서 논쟁이 되었던 부분이라는 것이다.
◈ 황제의 관심 - 진리가 아닌 오로지 제국의 평안 !!
여기에 대해서 황제는 어느 편인고 하니, 누구 편이 아니라 아리우스든 오씨우스든 둘이 서로 싸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도권이 동방교회(아리우스)에서 서방교회(아타나시우스)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서방교회가 황제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서 서방교회 편을 들도록 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황제는 유사본질이나 동일본질의 뜻도 잘 모르고, 황제에게는 그러한 용어의 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쨌든 같은 제국 안에 있는 종교가 서로 싸우면 안되고 사이좋게 타협해서 잘 지내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타협하는 동시에 주도권은 서방교회가 가져가게 되었고 말이다.
10분 휴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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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
* 답변 - 그것이 바로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인데, 이런 주장이 왜 나오는가 하면, 그것은 다음 시간에 공부하겠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공의회가 개판이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어떻게 황제에게 잘 보이는가?" 라는 것이 중요하지, 교리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정치가들이 그렇게 설쳤다는 말이다. 이 공의회를 주도하는 것은 교황이 아니고 황제인데, 이 황제의 관심은 오직 나라의 안정이지 말씀이나 교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 질문 - ???
* 답변 - 말씀이 곧 예수님인데, 동방에선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 라는 것이다. '육'이 아니라 말이다. 이것이 칼케톤 회의에서 나오는데, "예수님이 곧 사람이다" 라는 것이다. 즉 로고스가 곧 사람이라는 말이다. (좀더 엄밀히 말하면) 로고스가 예수님이 되는 것이 아니고, 왜냐하면 그렇게 '된다' 라고 하면 결합하는 의미가 되는데, 그게 아니라 "로고스가 곧 사람이다", "로고스가 곧 예수님이다" 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 이라고 할 때는 육이 아니란 말인데, 만약에 육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육(육체)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혼이 없어지고 로고스가 그 빈자리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방신학에서는 로고스와 사람이 결합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늘에 그대로 있고, 즉 신성은 그대로 있고 인성이 내려갔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인성은 영혼도 있고 육체도 다 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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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우스주의(Arianism) - 야후 블로그에서
정확한 의미로는, 아리우스주의는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였던 아리우스의 기독론을 말한다. 이 이론은 325년 제1차 니케아회의에서, 또한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정죄되었다. 이 견해와 이어지는 논의들은 반세기 이상 로마제국을 흔들었으며, 더욱 나쁜 것은 교회를 분열시켰다는 것이다.
아리우스의 견해는 얼마 안 되는 그의 저작의 단편들과 그의 반대자들의 저서들을 통하여 재구성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논증을 요약해 보면, 유일하신 아버지 하나님만이 완전하시고, 태어나지 않으시고, 영원한 통일체(Monad)이시기 때문에, "독생하신 아들"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그 통일체에서 나온 종속적이고 열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아들, 혹은 로고스의 이 열등함과 종속성은 "아들이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는 아리안주의의 공식으로 잘 표현될 수 있다. 아리우스는 아들을 다른 피조물과 같은 무상한 한 피조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들이 본질적으로 신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로고스는 완전히 하나님도 아니고 완전히 피조물도 아닌 일종의 중간적 존재로 간주되었다. 반아리안주의자는 이 이론은 구원을 반신, 반피조물에게로 돌린다고 믿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회의를 소집하였다. 대단히 긴, 그리고 때로는 다툼을 동반한 토론 끝에 다수가 동의하는 신조가 만들어졌다. 그 신조는,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 혹은 존재를 가지신(HOMOOUSION)" 분이시며, "참된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된 하나님"이시라고 언명하였다. 엄격한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동일본질(HOMOOUSION)'이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신조에는 "아들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고 말하거나 "영원하신 아들은 피조물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저주(anathema)가 붙어 있었다. 아리우스와 두 동료는 이 신조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므로 출교되었고, 황제에 의하여 추방당하였다. 몇 년 후,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들 때문에 아리안주의의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336년에 이르러는 아리우스는 교회와 교회의 정통적인 지도자들과의 친교를 회복하였으며,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추방당하였다. 아리우스주의자는 자기들의 기독론적 입장을 다음의 세 가지로 발전시켰다: (1) 아노모이안(Anomoean): "비유사"라는 뜻의 헬라어에서 온 말로서 아들이 아버지와 같지않다고 주장, (2) 호모이안(Homoean): "유사하다"는 뜻으로, 아들이 아버지와 유사하다고 주장, (3) 유사본질(Homoiousian): "본질에 있어서 같다"는 뜻으로, 아들이 그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같지만 존재에 있어서는 같지 않다고 주장한다. 아리안주의 황제인 콘스탄티우스가 죽은 후 아타나시우스는 유사본질주의자(Homoiousian)와 동일본질(Homoousion)을 주장하는 정통주의자들을 화해시킬 수 있었고, 이는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한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아리우스주의"라는 말은 역사적 상황에서 생겨난 다른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그 의미가 일반화되어 로고스를 성부에 종속시키는 제 기독론을 가리키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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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3강 - B
05,10,29 강의 이근호
시작합시다. 먼저 교재 28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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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2-3 세기에 벌어졌던 이른 바 '단원설(單元說)', 또는 '유주론(唯主論)'과의 대결은 이 충돌의 첫 조짐이었다. 단원설이란, 예수님의 신성을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결합하려던 신학적 노력들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단원설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되,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힘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 힘은 비위격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는가 하면(여기에 속하는 것이 테오도투스Theodotus of Byzantium(190년 경 사람)의 이른바 동력적 단원설이다),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 하나님이 특별한 출현양식으로 이해하려 했다.(여기에 속하는 것이 노에투스 Noetus, 사벨리우스Sabellius, 프락세아스Praxeas의 이른바 의태적 단원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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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후인 2~3세기에 '단원설(單元說)'과 '유주론(唯主論)' 이란 이론이 등장하게 되는데, 단원설이란 예수님께서 원래 인간인데 성령을 받은 후에 힘이 생겼다는 것이다. 마치 슈퍼맨처럼 말이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동력적 단원설).
그런데 여기에 반해 유주론이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누구인고 하니 하나님이 사람이 된 것이다" 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단 것이다. 사벨리우스, 프락세아스 등이 이렇게 주장했는데,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아버지도 되었다가 아들도 되었다가 하니 몹시 바쁘게(?) 되는데, 터툴리안이 이러한 양태론적 단원설에 대해서 '성부수난설' 이라고 별명을 붙였는데,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아들의 탈을 쓰고 수난을 당한 것이 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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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주론(Monarchianismus) - 네이버에서
유일신론이라고도 하는데, adoptism(입양론)과 modalism(양태론)으로 구별된다.
ⅰ) 입양론 : 테오도토스 주장 - 하나님은 예수라는 인간을 그리스도로 입양했다.
ⅱ) 양태론 : 그리스도와 성부는 동일하다. 세 가지 주창자가 있다.
① Noetus : 성부와 성자는 같다(성부 수난설).
② Praxeas : 인간 예수와 하나님 아버지가 결합하여 성자 그리스도를 낳았다.
③ Sabellius :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의 서로 다른 상태변화일 뿐이다(가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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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론에 반대해서 아리우스가 등장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한 분이어야 하기에, 그래서 격이 떨어지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유사본질' 이라고 하는데, 즉 비슷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교재 29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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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 해결을 위해 아리우스에게 도움을 준 것은 '로고스' 개념이었다. 여기서 로고스는 일종의 제2급 신으로서 피조물 중에 첫째요, 가장 탁월한 피조물인 동시에 창조사업의 중개자로 파악되어있다. 따라서 로고스는 시간에서 무(無)로부터 지음을 받았으며 가변적으로 그르칠 수 있는 존재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여진 것은 순전히 시련을 극복한 그의 도덕적 자질과 그 실적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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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아리우스의 주장이 나오는데, 그의 주장한 개념들을 긴장해서 생각해야 하는데, 이 아리우스에게 도움을 준 것이 바로 고대헬라철학의 로고스개념인데, 여기에서 로고스는 일종의 제2급 신으로서 피조물 중에 첫째 가장 탁월한 피조물인 동시에 창조사역의 중개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누가 이것을 주장하는가? 바로 여호와 증인인데, 뭐 이단이라고 해서 특별히 새로운 것이 없는데, 과거에도 그런 종류들이 다 있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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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만 유스티누스와 같은 호교론자들은 기독교만을 옳고 다른 종교들은 거짓이라는 배타주의적 방식을 취한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로고스가 궁극적 기준일진대 그 로고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육화했다고 선언하다 다소 포괄적인 방식을 취했다. 신론으로 말하지만, 일찍이 플라톤의 신개념의 원형이 되었던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라는 개념이 하나의 축을 이루고 구약성경에서 유래한 창조성과 전능성을 포함하는 인격성을 지닌 유일신 사상이 또 다른 축을 이룬다. 그런데 문제는 고정,영원, 불변, 부동, 필연 등의 속성을 지닌 존재와 인격적으로 행동하는 신 사이의 긴장이다. 로고스의 보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전자의 요소, 즉 플라톤의 신개념의 요소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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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스티누스 - 로고스 종교의 신봉자 !!
2세기 중엽의 순교자로 일컬어지는 유스티누스는 소위 로고스 종교(?)를 퍼뜨린 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그는 "로고스의 육화(肉化)가 바로 예수님이다" 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되어버리면 고정, 영원, 불멸, 부동, 필연 등의 속성을 존재와 인격적 행동하는 존재가 서로 맞지를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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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당시 유스티누스를 포함한 호교론자들이 해결책은 무엇이었는가? …… 예수님의 정체를 설명하기 위해 신의 영이 인간 예수님과 결합했다는 양자론으로써가 아니라 로고스가 친히 인간화했다는 변화론을 택함으로서 보편성과 인격성 사이의 긴장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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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유스티누스를 포함한 호교론자들, 즉 기독교를 보호하려는 자들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신의 영이 인간 예수와 결합했다" 라는 양자론이 아니라, "로고스가 친히 인간으로 변화했다" 라는 변화론을 택하여 긴장을 해소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삼위일체 이전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그분의 하나님되심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론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교재를 보자. 30페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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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에 교회 밖 이교도들의 공격에 대한 호교론이 로고스 개념의 적극적 수용과 변형을 통해서라면 2세기의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이단인 영지주의의 혼란에 대해 교부들은 그런 호교론을 더욱 체계화적으로 사용하여 신학 사상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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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신론(三神論) - 삼신 속에 인간을 포함 !!
원래 삼신론(三神論)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고 하니, 이 삼신론이 제법 재미가 있는데 한번 들어보자. 교재에는 없는데,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누메니우스' 라는 헬라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에 의하면 헬라에는 삼신이 있다는 것이다. 절대적 신이 있고, 그 다음에는 인간이 있는데 그 인간이 곧 신이고, 그리고 신과 신을 연결하는 신이 또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이 삼신 속에는 인간이 포함되어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신에 인간이 포함되어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천지만물 가운데서 인간이야말로 가장 신과 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즉 신의 형상을 유일하게 보여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인식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가 있고, 이런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아이디어에다가 "예수 그리스도인 로고스가 말씀되었다" 라는 것을 합쳐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이 철학자는 인간을 신으로 보는 것이 특징인데, 그렇다면 인간을 이렇게 신으로 본다는 것이 과연 기분 좋은 일인가, 아니면 나쁜 일인가?
요한복음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신이다" 라고 했는데, 그 대목을 가지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악마에게 속했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인간도 신이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우리를 신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오셨다 !!
이렇게 예수님이 오기 전에도 인간의 근본 심성 속에는 이런 아이디어가 다 있는데, 이런 아이디어에다가 "예수님이 하나님인데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 라는 것과, 이미 삼신론적인 특징인 인간을 이미 신에다 집어넣은 개념과 서로 결합해보면, "예수님은 좋은 분이다. 우리를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불변한 존재인 신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사랑의 하나님께서 평화의 사도인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다" 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것으로 기독교는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은가? 이러한 인식이 모든 인간에게서 설득이 되고 납득이 될만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지요? 좋지 않은가? 그러니 골치 아프게 더 이상 성경을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그냥 한가지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인데, 즉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이면서도 살아가는 생존자체가 힘들지 않느냐는 것이다. 앞에서 플라톤이 "모든 인간은 신의 자녀이다" 라고 했는데, 즉 개나 돼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신이면서도 우리는 전혀 신의 값을 하지 못하는데,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서 우리를 구원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골치 아프게 성경을 안 보아도 이것만 제대로 알면 신의 뜻에 충분히 합당하다고 간주해도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 박해 이유 - 황제가 신인데 왜 너희들끼리 노는가?
물론 그 이전에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기독교가 인간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즉 예수님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황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해서 기독교를 박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로마가 박해한 이유는, "황제가 바로 신인데 왜 황제의 말을 듣지 않고 너희들끼리 노느냐?" 라고 하는 것이다.
콘스탄틴 황제도 마찬가지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십자가로 인해서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잠시 황제라는 생각을 벗어버리고 무슨 생각에 잠겼는고 하니, 사람은 심리적으로 누구를 박해하면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말이다.
자기가 평소 박해하던 그 하나님이 도와주어서 전쟁에서 승리했는지도 모르는데, 오히려 그들을 박해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기독교를 인정했다는 설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풀어놓아 버리면, 사실 기독교란 것이 자기 마음에 흡족한 면도 있었고 말이다. 물론 기독교에는 (황제와는 어울리지 않는) 평등사상도 있었지만 말이다.
◈ 공회의 - 모든 것이 다 주도권을 쥐기 위한 술책들 !!
그러니 복음적인 관점에서 볼 때, 회의를 천날 만날 해보아도 기존의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웃기는 것은 이것은 자기들끼리의 축하공연이고, 자축파티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주도권을 쥐기 위한 술책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니케아 회의 이후, 즉 콘스탄틴 황제 이후에 기독교 박해하는 황제가 등장했는데, 왜 그런고 하니, 황제 세력보다 오히려 기독교 세력이 막강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 세력을 박살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기독교 세력을 깨부수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니케아 회의 때에 축출을 당한 아리우스파와 다시 싸움을 붙이면 된다는 것이다. (아주 똑똑한 황제이지요?)
이렇게 싸움을 붙인 것이 바로 2차인 콘스탄틴노플 회의인데, 즉 세어진 기독교의 힘을 와해시키기 위한 회의라는 것이다. 이런 황제라는 인간들도 재2차 에베소 공의회를 두고 소위 '강도회의' 라고 부르니 얼마나 기가 찬 노릇인가? 물론 '강도회의' 라는 말은 서방측에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제 교재 30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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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로고스론의 뿌리였던 헬라의 삼신론과 같은 다신교 사상은 헬레니즘의 신비주의가 강조하는 신의 초월성에 힘입어 기독교 신학 안으로 온전히 채택될 만큼 일신론으로 변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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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이제 로고스론에 뿌리를 두었던 삼신론 같은 다신론 사상은 일신론으로 변형이 되었는데, 즉 헬라철학의 삼신론은 그대로 유지된 상태에서 교회 안으로 일신론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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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이레네우스와 이에 쌍벽을 이루는 터툴리안은 위대한 신학적 공헌을 이룩한 인물들로 기록될 수 있었다. 그런데 영지주의의 혼란에 대해 교부들은 사도들의 권위에 의존하게 되었고 여기서 정경채택의 필요성이 절실히 대두되었다. 정통파가 '한 하나님'을 옹호한 2세기 후반에 이르러 교부들은 일제히 '한 감독'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교회의 정치 제도를 합법화하였다. 그리고 나서 일신론의 영지파적 수정론을 그 교회제도에 대한 공격이라고 자의적인 해석을 하였다. 그러므로 영지파와 정통파 크리스챤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변론할 때에 그들은 그때마다 영적권위에 관한 문제점을 거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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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툴리안 같은 경우에 어떻게 되는고 하니, 정통파가 '한 하나님'을 옹호한 2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교부들은 일제히 '한 감독'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교회의 정치제도를 합법화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했는고 하니, 영지주의자의 등장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한 분이니 하나님 밑에 있는 교회도 하나이어야 하고, 그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교회의 수장도 역시 하나이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새끼를 친 모든 교회도 지도자도 하나이어야 하고, 또 그 교회와 교회가 뭉쳐진 감독들도 하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교회의 질서가 잡힌다는 것이다.
교재 31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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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같은 지명 받은 통치자들은 누구인가? 클레멘트는 감독들과 사제들과 집사들이라고 대답한다. 어떤 사람이거나 머리를 숙여 교회의 지도자들을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주인이신 하나님 자신에게 불복종하는 죄를 짓는다. 이와 같은 이론에 말려들어 클레멘트는 어떤 사람이거나 하나님의 권위를 통하여 임명을 받은 교권자들을 불순종하는 자는 '사형을 받는다'고 경고하였다. 이 서신은 기독교의 역사상 극적인 순간을 표시한다는 뜻이 있다. 여기서 처음으로 기독교 공동체를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두 계층으로 나누는 이론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따라 교회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는 엄격한 질서에 따라 조직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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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멘트 - 성직자와 평신도 !!
클레멘트는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지명을 받은 하나밖에 없는 통치자들을 1계급, 2계급, 3계급이라고 해서, 그들을 '감독들'과 '사제들'과 '집사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인 교권자에게 불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에게 불복종하는 것이기에 사형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처음으로 '성직자'와 '평신도' 라는 용어가 생기게 되는데, 즉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갈라진다는 것이다. 마치 하늘에서 주인인 임금에 대해서 충성하듯이, 이 땅에서도 사령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아무나 장군이나 장교를 하는 것은 아니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의 클레멘트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교재 32페이지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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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티우스(70-107년 동안 안디옥 감독으로 있었던 사람)는 그것과 동일한 원칙을 열렬하게 옹호한 바 있다. 그러나 이그나티우스는 클레멘트보다 한술 더 떴다. 그는 감독, 사제, 및 집사 등 세 직위가 하늘에 있는 신적 성직계층을 반영하는 교회 성직 계급의 질서라고 옹호하였다. 이그나티우스는 선언하기를 하늘에는 한 분의 하나님이 계심 같이 교회 안에는 한 감독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한 하나님, 한 감독'이라는 표현은 정통파교회의 표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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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그나티우스 - 한 하나님, 한 감독 !!
클레멘트보다도 1세기 이후의 사람인 이그나티우스는 한술 더 떠서 주장하기를, '한 하나님, 한 감독' 이라고 했는데, 다시 말해서, 평신도는 감독을 하나님처럼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감독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는가?
이제 교회가 윗사람과 아랫사람으로 나누어졌으니, 아랫사람인 평신도는 안수도 못하고 하니 아무런 힘도 없으니 문제는 윗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윗사람끼리 서로 싸움이 붙는다는 것이다. 평신도들이야 그냥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니 말이다. 즉 '한 하나님, 한 감독' 이란 것이다.
이때부터 교회정치는 그야말로 윗사람들끼리의 정치판이 되고 마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윗사람들끼리 만나는데, "니만 잘났나, 나도 잘났다" 라고 하는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신앙의 기준이 되는 '신조(信條)' 라는 것이고 말이다.
◈ 신조의 무오류성(無誤謬性) !!
제1차 공회인 니케아 회의 때 니케아 신조를 만든 것이 그 시작이 되는데, 이렇게 니케아 신조를 만들게 되면, 소위 윗사람들, 즉 감독들과 지도자급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 것이니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신조의 무오류성(無誤謬性)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니케아 신조와 같은 신조의 무오류성은 무엇과 충돌이 되는가? 자연적으로 성경의 무오류성과 충돌이 되는데, 만약에 웨스트민스트 신조가 오류가 없다면 이 신조가 성경을 대신하는 하나님의 계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신조나 신경 등, 소위 개혁주의 전통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고 하면, 초대교회의 '한 하나님, 한 감독' 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평신도와 높은 계급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 전통이 되어서, 그것이 이어져서 신조란 형태로, 즉 "꼼짝 마라. 모든 성경해석은 우리가 쥐고 있다" 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카톨릭과 개신교의 전통이 되어버렸고 말이다. 하나의 신조가 있기 때문에 말이다.
◈ 모든 교회사는 윗사람들의 정치적 쟁투의 현장 !!
그러니까 초대교회나 사실상 모든 교회사의 연속 그 자체가 바로 윗사람들의 정치적 쟁투의 현장이란 말이다. 아래쪽인 평신도는 아무 것도 아니고 말이다. 소위 '한 교회 한 감독'의 말을 들어야만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교회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 감독의 지시를 받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데, 그런데 문제는 한 교회의 한 감독이란 것이, 각 교회마다 다 감독이 있으니, 두 교회가 서로 만나게 되면 두 감독 중에서 누가 힘이 더 센가 해서, 그렇게 해서 싸움이 붙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자기들끼리 싸움이 붙어서 둘로 분리가 되고, 또 안디옥 교회도 서로 둘로 분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분리되는 모습을 살펴보면, 교재 36페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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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오리겐의 신론은 호교론자들이 채택한 로고스론을 수용하여 로고스의 영원을 근거로 성부 신과 성자 신이 영원성을 본질로 하는 신성을 공유한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 성자 신을 성부 신에게 났으니 이보다 낮은 단계이며 성령 신도 그렇다고 한다. 말하자면 본질적 실체에서는 동일하지만 기능적 실체에서는 위계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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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교회인 오리겐의 신론을 살펴보면, 그는 호교론자들이 채택한 로고스를 수용해서 로고스의 영원을 근거로 성부 신과 성자 신의 영원성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즉 성자 신은 성부 신보다도 더 낮은 단계이고, 성령 신도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본질적 실체에서 동일하겠지만 기능적 실체에선 각각의 단계가 다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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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신의 로고스와 인간의 육체가 혼에 의해 매개되는데, 예수님 안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두 본성이 결합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일체성보다 삼위성에 주목하는 위계론적 관점에서는 로고스가 엄연한 상위의 자체로서 하위의 육체를 취한 것으로 모사됨으로써 양자성로 기울어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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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구원의 대변자로 !!
이것은 무슨 이론인고 하면, 제2차 공회의인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이란 것이다. 예수님에겐 신성이 있는데 이 신성이 인성을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인간이지만 신처럼 행동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고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란 것인데, 즉 예수님에게는 신성과 인성이 함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그야말로 십자가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이, 인간존재가 어떻게 구원되는가를 설명하는 합법적인 신학적 구조로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진 이론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구원의 대변자로 내세우기 위해서 나온 것으로, 예수님의 본질적 구조를 구원론적 구조로 만든 합리적 발상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콘스탄틴의 313년 기독교 공인이후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왔으니, 그들을 그냥 보내지 말고 구원시켜주어야 하니까,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심성과 욕구를 파악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교회는 계속해서 소멸되지 않고 부흥된다는 것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말이다.)
그러니 요즘 교회는 기존 교리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뭘 원하느냐에 따라서 교리를 맞추어 설명해준다는 것이다. 이미 기존의 정통적 교리가 사람의 입맛에 맞는 납득할 만한 교리를 미리 다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말이다. (그것이 교리에 충실한 것 아닌가?)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이 납득할 만 것들만 모아서 소위 '삼위일체' 라는 이름으로 만들었기에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여기서 다 끄집어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납득이 안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을 다 구원해야 하기 때문에 말이다. 사람들마다 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인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간도 되고 신도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의 인성보다 신성이 강하다고 하면 인간을 강조하는 동방신학이 삐치고, 또 (그 뒤를 봐주는) 황제가 삐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될 수 있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나라가 둘로 쪼개질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황제가 또 싫어한다는 말이다.
◈ 황제 - 기독교는 무조건 하나가 되어야 !!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삼위일체 등을 주장하는 모든 공의회의 주체자는 교회나 교황이 아니라 황제라는 것이다. 황제가 그렇게 해주어야 자기 수하에 있는 신하들이나 백성들이 충성을 다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란 매체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 기독교가 무조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리가 어떻든 그 어떤 교리든 간에 서로 하나만 된다면 괜찮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황제의 요구조건과 비슷하게 일반 평신도들, 즉 아랫사람들에게, 한 하나님의 한 감독이니까, 다양한 그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중간급들, 즉 주교나 감독들이 서로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황제를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리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케아 회의 이후 아리우스파가 쫓겨나니까 황제가 화가 나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가 기독교를 통해서 오히려 황제를 복종토록 하려는 느낌을 주니까, 과거에 쫓겨난 아리우스파를 데려와서 기독교를 부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방교회에서 가만히 있지 않는데, 오류가 없는 니케아 회의에서 결정한 것을 황제가 뒤엎으려고 하니 말이다. 높은 사람들의 회의는 이렇게 오류가 없는데, 그런데 황제의 의도대로 되면 동방의 아리우스파가 올라서고 서방교회 쪽이 밀리게 된다는 것이다.
◈ 가이샤라의 바질,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누스의 그레고리 !!
여기에서 유명한 3명의 신학자가 등장하는데, (갑바도기아의 세 학자들인데, 가이샤라의 바질,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누스의 그레고리가 그들인데) 이렇게 동일본질이 되어버리면 예수님이 따로(다른?)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한 하나님 안에 속해야지 '따로 하나님' 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동일본질, 즉 본질이 동일하니 말이다.
그렇게 따로 하나님이라고 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예를 들어서, 여기 수제비 한 덩어리가 있다면, 한 덩어리에 붙어있는 3종류의 수제비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같이 물려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따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한 하나님의 부속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이 되고 말이다. 한 하나님이 어떤 때는 아버지가 되었다가, 어떤 때는 아들이 되었다가, 또 어떤 때는 성령님이 된다는 것이다.
◈ 본질은 하나인데 위격은 셋이다 !!
이에 반해서 동방의 아리우스는 "예수님은 참 인간이고 참 하나님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아리우스의 주장에 답변을 하기 위해서 위에서 말한 갑바도기아의 세 사람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위격'을 주장했는데, 한 본질(우시아, ουσια)에 삼중의 위격(후포스타시스, υποστασιs)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질은 하나인데 위격은 셋이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제6회 공의회인 3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 나오는데, 그리고 예수님은 참 인간이고 참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4회 칼케돈 회의에서 결정이 되는데, 이렇게 예수님이 참 인간이고 참 하나님이라면 예수님의 의지가 몇 개인가? 당연히 2개라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사람이 의지가 2개가 될 수 있는가? 예수님도 참 인간이니 말이다. 그래서 교회가 상당히 고민에 빠졌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놓으니까 계속해서 그런 소리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라는 자체가 사실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은 상당히 바쁘다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로고스가 있고, 신성이 있고, 인성이 있고, 영혼이 있고, 그리고 육체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에게서 이렇게 5가지 요소를 다 설명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왜 자꾸 설명을 해야하는가?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한데, 사람들이 납득되게 해야 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마구 쪼개서 설명해야 한다는 말이다.
◈ 제1회 니케아 회의 - 로고스 문제 !!
◈ 제2회 콘스탄틴노플 회의 - 예수님의 영혼과 육체 문제 !!
◈ 제3회 에베소 회의 -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인가 문제 !!
◈ 제4회 칼케톤 회의 -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문제 !!
다시 정리해서 말하자면, 예수님의 이 로고스 문제를 가지고 니케아 회의가 열렸고,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문제로 칼케톤 회의가 열렸고, 그리고 예수님의 영혼과 육체 문제로 아폴리나리우스의 콘스탄틴노플 회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 라는 것은 알렉산드리아 동네의 주장이고, 그러면 안디옥 쪽에서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인간이 어떻게 신이 될 수 있는가?" 라는 것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말씀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 팬들이 좋아하는 것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완전 정치판이 개판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하나의 본질에 세 위격이 있다 - 말장난 아닌가 !!
갑바도기아의 세 신학자가 주장하기를, "한 본질의 세 위격이다" 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 '위격(후포스타시스)' 이란 무엇인가? 위격은 무대에 가면을 덮어쓰는 것을 말한다는 등 여러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렇게 가면을 쓰게 되면 양태론이기 되기에 안 된다는 것이다. 이 후포스타시스는 무대에서 배우가 가면을 쓰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가 맞기는 한데, 그 용어만 빌려왔을 뿐이지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세 분의 완전히 다른 인격체를 말한다는 것이다.
◈ 일단 교리를 만들어 놓아야 황제에게 어필이 됨 !!
그렇다면 삼신인가? 삼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삼신이 되면 하나가 아닌 세 가지의 본질(우시아)가 되는 것인데, 그것이 아니고 우시아는 하나인데 후포시스타시는 셋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실체도 없는 것을 말을 따와서 만들어낸 것이 되고 마는데, 그러면 왜 만들었는가? 일단 교리를 만들어 놓아야 황제에게 우리 기독교가 교리적으로 완전하다고 해서 설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불러놓고 이런 논쟁을 했는가? 정말이지 제자들을 불러놓고 이런 논쟁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요한아, 베드로야, 위격이 어떻고, 본질이 어떻고, 실체가 어떻고" 라고 말입니다. 초대교회가 주도권 싸움을 하는 것이 어느 정동인고 하니, 사도들이 죽은 곳이 어디인지, 무덤이 어디인지,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한 곳이 어디인지, 이런 것을 놓고서 싸웠다는 것이다. 부활한 곳 지명이 정치적 파워를 가진다는 말이다.
"하나의 본질에 세 위격이 있다" 라는 것은, 사실상 아무 실체도 없는데 그냥 말로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말장난이란 것이다.) 즉 한 분이어도 안 되고 세 분이어도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세 분이면서도 한 분입니다" 라는 것을 말을 뒤바꾸어, 한 본질에 세 위격이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본질이라는 것도 한 분이고, 위격이라는 것도 한 분인데 말이다. 그러니까 "한 분 세 분, 세 분 한 분" 이라는 것이다.
◈ 아폴리나리우스 - 예수님은 인간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다 !!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끝난 후 나다니안 그레고리에게 (결정권이) 넘어가서 아폴리나리우스를 단죄했다는 것이다.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그리스도가 인간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로고스가 영혼이 없는 육체만을 취했다는 것으로, 즉 예수님의 영혼은 로고스가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로고스는 따로 있고, 예수님의 영혼도 따로 있다는 것이다.
◈ 네스토리우스 -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혼합불가 !!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네스토리우스인데, 사실 이 사람은 대단히 억울한 경우인데, 이 사람은 별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는데도 졸지에 이단이 되고 만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네스토리우스는 동방교회에 속한 대주교인데, 그가 주장한 것은 예수님에 관련된 마리아 문제로서,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마리아가 낳은 것은 인간 예수님이지, 어떻게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을 수 있는가?" 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사실 다 맞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키릴이라는 사람이 황제에게 뇌물을 주어서, 이 네스토리우스 주장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이미 니케아 회의를 통해서 로마 교회가 주도권을 쥐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 교회, 한 감독' 이니, 한 교회의 주도권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최고 높은 교구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 로마교회 - 감히 하나의 교회인 우리에게 덤벼 !!
그 당시에는 로마교회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에, 즉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유일한 바로 그 한 교회인데) 그래서 주도권을 우리가 쥐고 있는데, 네스토리우스 당신은 그러한 주장을 해서 감히 우리에게 덤벼드느냐?"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는 '한 제국 아래, 한 감독 아래'에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그 수장 자리를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로마가 주도권을 쥐고서 그렇게 차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냥 가만히 따라 오면 되는데, 왜 건방지게 감히 나서서 개기냐(무시하느냐)는 것이다. 그의 말이 옳고 틀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왜 까부느냐는 것이다.
네스토리우스는 말하기를,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면 안 된다. 그런데 혼합된 증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리아 문제이다.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았다고 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하면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았다고 해도 되겠지만, 그러나 이것이 말이 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버지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와 결혼했는가? 사실상 지금 보면 누가 보아도 말이 안 되는데, 그러나 그때는 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왜 개기냐?" 라는 것으로 말이다.
여러 번 강조해서 말하지만, 그 뒤의 모든 공의회는 니케아 회의의 오류 없음을 인정하고 박수를 치는 것뿐이었는데, 바꾸어 말하면 로마교회의 주도권에 무조건 박자를 맞추어 주어야하는데, 그런데 왜 건방지게 엇박자를 놓느냐는 것이다.
사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일치하는 것은 부인하지 않았는데, 일치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서,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았다고 하면 안 되고,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다고 해야된다는 것이다. (신성과 인성이 일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말이다.) 네스토리우스는 바로 이 마리아 문제를 가지고 서방교회로부터 미움을 쌌다는 것이다.
◈ 키릴 - 예수님의 육신이 하나님의 육신 !!
여기에 반해서 키릴은 주장하기를, "예수님의 육신이 하나님의 육신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 육신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하나님의 죽음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할 수 없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면, 그림으로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고, 하나님이 먼저 로고스를 보냈는데, 이 로고스가 인간과 결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예수님이라는 인간과 결합하면서, 그의 영혼과 육체, 그리고 예수님 안에 로고스라는 신성이 있으니, 인간은 예수님이라는 인간 속에 들어가서 신성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이 육신이, 원래 육신이란 인간을 의미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육신이 하나님의 육신이 아니라면, 우리가 여기로 들어가도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님의 육신 사이에 다리를 놓아야만, 우리가 육신으로 출발해서 신성에 도달하기에, 그래서 하나님에게 도달해서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어휴, 어려워!!)
이것으로 키릴은 엄청 히트를 쳤고, 네스토리우스는 졸지에 이단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변명도 제대로 못하고 말이다. 물론 그게 정치이고 역사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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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차 에베소 공의회 - 이 공의회는 431년 6월 22일부터 에페소스의 테오토코스 성당에서 열렸다. 당시 교회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대주교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 네스토리우스 주교간의 그리스도론에 대한 입장차이로 논쟁이 뜨거웠다. 이들이 논쟁을 벌인 이유는 성모 마리아를 테오토코스(Theotoskos) 즉,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느냐, 없는가로 논쟁이 붙었기 때문이었다. 키릴루스 주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여 성모 마리아에 대한 호칭에 찬성했고, 네스토리우스 주교는 인성을 강조하여 반대했다. 결국 교회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자, 비잔티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문제는 공의회에 친 네스토리우스 파의 주교들이 늦게 오는 바람에 논쟁의 중심이 키릴루스주교 파에 기울었다는 것이었고,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교리논쟁에서 패한다. 이단으로 몰린 그는 파문을 당했다. 에페소공의회의 이러한 판결은 '도적들의 공의회'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논란이 있었다. 435년 네스토리우스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아라비아의 페트라로 추방당했고 451년 수도원에서 한을 풀지도 못하고 죽었다. 그의 신학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중국, 중동 등 동방지역에서 선교활동과 신학교육을 하였다. 중국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를 경교(景敎)라고 하였다. - 위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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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회 칼케돈 공의회 - 삼위일체 !!
이제 제4회 칼케돈 공의회(451년)를 살펴보자. 키릴은 니케아 회의 때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신이고 인간이다" 라고 했는데, 즉 두개의 성(性)이 있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티케스는 뭐라고 주장했는고 하니, "하나님은 두 본성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의 속성을 갖고 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티케스가 "하나님은 인간이고 신이다" 라는 것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는 신성과 인성이 있는데, 그것이 움직일 때는 하나의 본성으로 움직인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 그러니 이렇게 두개의 본성이 일치하면, 결국에 나타나는 것은 하나의 본성이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칼케톤 회의는 말하기를, "왜 니케아 회의 때 결정한 것을 네가 덤벼드느냐?" 라는 것이다. 칼케돈 회의에서 결정하기를,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고 참 인간이면서도 두 본성이 혼합되지 않고 나누어지지 않는다" 하고 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혼합되지 않고 나누어지지 않는다" 라는 것을 누가 한번 해석해보라는 것이다. 나누어지지 않으면 혼합이 되는 것이고, 혼합이 되지 않는다면 나누어져야하지 않겠는가?
좀 쉽게 말해보자면, 기름하고 물은 나누어지는데 이것을 두고 혼합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밀가루의 경우에는 혼합이 되고 말이다. 이것을 두고서 나누어진다고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바로 '삼위일체' 이론이라는 것이다. 칼케톤 신조의 내용이고 말이다.
그래서 황제가 기독교 교황에게 말하기를, "너희들, 말장난을 계속해서 할거냐. 내가 회의를 주제한 것은 잘해보자는 것이지 말장난이나 하자는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황제가 하도 답답해서 말이다. 이런 삼위일체를 총신이나 장신에서 모두 다 배우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예수님의 의지가 두 개라고 했는데, 이것이 제6회 회의에 나오는데, 그래서 예수님의 의지가 하나라고 하는 단의지설을 지지하는 교황을 파문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황이 정치적 황제 때문에 잘리는 것인데, 어디 교황이 까부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황제가 다른 주교들을 부추겨서 교황을 파문시켰다는 것이다.
이렇게 파문 당한 이유도 역시, "왜 니케아 회의를 개기냐?" 라는 것 때문인데, 즉 모든 회의는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니케아 회의로 모든 주도권은 로마교회가 쥐었고, 그러니 이 로마제국에서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것이다. 그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미 기존에 들어 왔든 로고스 사상에서 출발한 것으로, 인간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잡다한 교리를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사건인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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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기가 찰 노릇인데, 소위 교회 지도자들이란 자들이 윗사람 아랫사람으로 나누어서 자기들 마음대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개판이고, 그야말로 사기꾼들이 하는 짓을 마구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것도 교회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뒤틀려진 기독교' 라는 책을 보면, 이런 교리들이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크엘룰이 이러한 것들을 다 알고 있었고, 그는 언약을 주장한 사람인데, 그런데 소위 이 삼위일체 논쟁을 보면 이러한 언약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제 교회사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지나갔는데, 다음 시간에는 긴장을 좀 푸시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오세요. 그럼 다음 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