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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2강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교회사

2강

정인순 2010. 12. 31. 14:04

http://www.woorich.net/~woorich/신학강의/2005우리교회-교회사강의/교재-교회사2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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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교회사 2강 - A  이름 : 구득영 2007-10-05 22:20:16

교회사 2강 - A
                                                                         05,10,22  강의 이근호


◈ 달라진 교회관, 그 이유는?

시작합시다. 지난 시간에 교회사 자체는 교회가 있음으로써, 즉 교회가 있다는 자체가 기존의 국가가 이미 있으니, 이렇게 기존국가가 있는 상태에서 여기에 교회가 등장했다는 것은, 그 교회가 국가로부터 의식이 될 수밖에 없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즉 견제할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국가에게 복종할래, 아니면 나(교회)한테 죽어 볼래" 라는 식으로, 교회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서 교회의 견제세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가 견제세력이 되었다면, 그렇다면 그 당시 국가관과 견제대상이 되었던 교회관이 지금도 여전히 존재해야될 텐데, (그래서 당연히 충동현상들이 발생해야 하는데) 그런데 요즘은 이슬람국가 외에는 기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교회와 국가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바로 그 이유가, 교회관과 국가관 두 가지가 모두 다 그 당시의 관점과는 달랐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의 예를 들자면, 성경은 영적세계에 관한 것인데 이런 영적세계에 속한 사람이 이 세상의 역사를 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영적인 것에서 육적인 것으로 번역 내지 전환할 때에만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포착된다는 것이다.

영적인 것이 영적으로 그냥 있을 때에는 역사일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영적이란 십자가로 고발하는 예수님의 영적인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묵시적이라는 것이다. 이 묵시라고 하는 것이 하늘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역사를 끊임없이 심판하는 것이기에 말이다.
 
교회가 정말 영적인 세상으로서의 교회라면 묵시적으로만 그냥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교회가 역사적으로 인정받겠다고 나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교회가 영적인 것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역사를 선택해서, 즉 역사라는 몸체를 만들어 그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가지고 이 사회에 나서보자는 의도가 강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이러한 역사를 운운하는 교회관은 기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관과는 분명히 다르고 이미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역사를 말하는 자체부터가 이미 예수님이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운다고 할 때, 그 교회는 예수님의 몸을 두고서 말씀하신 것이지, 예수님의 몸이 따로 있고 교회가 따로 있는 식의 교회상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누구에게도 그런 방식의 교회를 이야기한 적이 없고, 또 그렇게 예수님은 자기 몸과 따로 있는 교회를 두고서 교회라고 간주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 교회가 역사를 말하는 자체가 주님의 몸임을 포기하는 현상 !!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안에 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가 지금도 묵시적 존재로서 하늘에 계시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그리스도의 몸도 묵시적 몸이라는 것이다. 묵시적 몸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묵시적이 아니라 역사적인 옷을 입고 나왔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를 포기했다는 뉘앙스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궁금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 교회가 역사적인 정당성을 부여받고자 시도하고 노력한 작자들, 즉 교부들이나 신학자들이 어떤 묘수를 썼기에 그리스도의 복음 대신에 교회라고 하는 국가사회단체로서 자리를 잡는, 즉 오늘날 교회가 사회단체로서 자리잡게 되었냐는 것이다. 우리는 그 수법을 눈치채야 되고 제대로 빼내어야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교회사를 공부해버리면 어떤 현상들이 일어나겠는가? 교회의 역사 속에서 지금 교회의 뿌리가 되는 그런 멋진 것들만 골라잡아서, "교회는 역사적으로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우리교회는 참으로 정당하다" 라는 식의, 즉 자기 역사를 옹호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왜곡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교회가 역사라는 것에 관심을 두고 역사라는 도구를 취한 그 발상자체가 성경해석을 얼마나 엉터리로 했으면 그러한 발상이 나오겠느냐는 것이다. "우리교회는 교회역사가 50년이다" 라고 해서, 그런 '50년 교회사' 라는 식의 역사집이 나온다는 발상자체가, 즉 "주님이 50년 동안 우리교회와 함께 하셨다" 라는 것인데, 그 얼마나 성경에 대해서 무식하고 그 해석이 엉터리였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런 엉터리 성경해석이 오늘 어제의 일이 아니라 옛날부터 있어 왔는데, 그 옛날에 소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작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 시대 속에서 얼마나 잘못되게 해석했는가를 추적하면, 그것이 바로 제대로 된 교회사라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사가 쉽지요?

다시 말해서, 옛날 그 당시에 그랜드마스터들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도가, 즉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과 얼마나 틀려먹게 알고 있었으면 그들이 교회라는 것에 대해서 집착할 수밖에 없었느냐고 하는, 바로 그러한 고리를 찾아내면 그게 바로 교회사가 된다는 것이다. 교회사가 이렇게 정리되어야 교회사가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다.

◈ 1세기 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가?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은 1세기 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그 때가 언젠가 하면 사도바울이 죽은 후 50년 사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사도바울은 살아있고 요한계시록이 유포되던 시기, 그 이후에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어떤 예수님을 믿었느냐는 것이다.

그 당시 소위 문자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 즉 교회 지도자들이 나름대로 "나는 예수를 이렇게 믿는다, 예수를 이렇게 알고 있다" 라고  전파했을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바로 그들이 전파한 예수에 대해서 알아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교재 5페이지에 나오는데,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다. 지금 사용하는 교재의 틀은, 이상봉 목사님이 쓴 '교회사' 라는 참 잘된 책인데, 그것을 기본적인 틀로 해서 나름대로 첨삭을 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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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부들의 신앙 세계 - 기독론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하여 논쟁다운 논쟁은 없었다. 대체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믿었으나 신성을 더 강조한 편이었다.
클레멘스 (Clemens of Rome)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엄한 홀(笏)이다.
이그나티우스 (Ignatius) : 그리스도는 신이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났다.
헤르마스 (Hermas) : 그리스도의 선재설(先在說)을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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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笏) - 조선 시대에, 벼슬아치가 임금을 만날 때에 손에 쥐던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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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론 - 그리스도 인격에 대해 논쟁다운 논쟁이 없었다. 대체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믿었으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더 강조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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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부분은 기독론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로마의 클레멘스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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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스 (Clemens of Rome)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엄한 홀(笏)이다.

①로마의 클레멘스(90년대) -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어지러운 교회에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직분 계승에 의한 장로에게 복종하기를 요청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다 장군도, 영관도, 위관도 아니라 각자 성실하게 자신의 위치와 사역에 임해야 한다고 했다. 순결과 순종, 그리고 신앙적 겸손을 강조했다. 그는 바울 신앙에서 떠나 윤리적 관심과 율법적 질서를 강조하는 기독교로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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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클레멘스, 이 사람은 교회가 자기가 생각한 안정된 교회, 즉 성경에 나오는 사도바울 당시에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고 성령 안에서 서로 나눠주는 순수한 모습을 지닌 그런 교회가 아닌 것으로 생각해서 강압적으로 교회의 계급을 형성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신성이냐 인성이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즉 예수님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냥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된 관심은, 교회가 군대처럼 계급화 될 때에 비로소 교회가 안정을 취할 수 있고, 그리고 그 당시 국가가 교회를 노려보고 있으니, 즉 국가가 교회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쏘아보고 있을 때, 국가와 제대로 한번 붙어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나름대로 질서체제를 공고히 할 때 국가 체제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은가? 외부에 국가 권력이 있을 때, 그것을 계기로 내부 결속을 강화하여 자기 조직을 강화시키면, 그렇게 하면 소위 참된 교회로 유지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전혀 아니라, 오히려 칼로 선 자는 칼로 망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강력한 힘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가운데 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이런 강력한 국가가 있기에, 이 국가를 교회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데 그 국가를 의식하는 동시에 그것이 적이 아니고 나중에 동지로 변해버린다는 것이다.

1세기 당시의 지도를 살펴보면, [갈리아(프랑스) - 서바나(스페인) - 이태리 - 마케도니야 - 터어키 - 안디옥 - 알렉산드리아 - 이집트 - 카르타고(튀니지)] 인데, 그러면 어디에 성도들이 많이 살았는가?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마케도니아(빌립보, 에베소, 고린도, 아덴) 쪽에, 그리고 서바나(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서바나 교회가 있던 곳으로 상당히 신학적으로 융성했던 곳), 물론 로마에도 있었고 말이다.

이런 곳에 있던 사람들이 유대회당에 들어가서 전도를 했고, 그곳에서 유대인들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새로운 유대교의 변종으로, 혹은 유대교의 한 종파로서 인식이 퍼지면서, "메시아가 이미 오셨데. 그리고 다시 오신데" 라는 사도바울이 전한, 즉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이 전체에 퍼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렇게 사도바울과 같은 하나의 유명한 사람이 뜬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 동네에 많은 신자들이, 즉 많은 교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의 집회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전체지역이 로마나라인데, 그 당시 로마는 의회제도가 있는 공화정이었는데, (주로 전쟁을 통해서 얻은) 많은 노예를 통해서 농사를 짓고 귀족들은 흥청망청 노는 나라였다는 것이다. 이런 노예를 통해서 경제활동을 하는 '라티푼디움'(?) 경제제도가 있었는데, 나중에 로마가 멸망한 이유도 이런 노예가 줄어서, 즉 생산 노동력이 감소해서, (요즘 말로 하자면 회사들이 다 부도가 나서) 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예가 적으니 소작농으로 바뀌고, 또 지주가 농노라고 해서 팔아먹기도 하는 장원제도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것이 중세까지 이어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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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의 장원제도 ※ - 네이버 지식에서 
장원을 군사적, 경제적 기본단위로 하는 사회체제를 말합니다. 즉, 영주의 장원을 중심으로 농노가 영주의 직영지와 자신을 땅을 번갈아 경작하고, 영주는 대신에 영주민들을 군사적으로 보호하는 체제입니다. 영주는 국왕과는 별개로 자신의 장원내에서는 절대적인 권력을 쥐는 지방분권적 지배체계도 봉건사회의 특징입니다. 장원제도 (혹은 봉건제도)의 성립은 6~7세기 무렵 메로빙거 왕조가 약화되자, 각지의 농민들이 무력을 지닌 자유민 휘하에 보호를 요청하고 무력을 지닌 자유민은 다시 강력한 영주의 휘하에서 보호를 받으려 한 것이 시초입니다. 영주는 이렇게 무력을 지닌 자유민을 다수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점차 세력을 길러나갔고 더 이상 자신의 재산만으로는 다수의 군대를 유지할 수 없어 일부 자유민에게 일정양의 땅(재산)을 띄어주고 그 보답으로 영주가 필요할 때 군사적 의무(대게 기병으로 참전)를 지게 했습니다. 이 군사적 의무를 진 자유민들이 후에 기사계층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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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보며) 여기는 게르만들이 사는 산림지역으로 개간이 안 되었는데, 이렇게 우랄산맥에서 강이 흐르는데 이러한 강을 따라 만들어진 비옥한 땅에서만 농사를 짓는 인구가 많지 않는 지역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이쪽 아프리카 북쪽지역은 무역을 많이 한 동네로서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이 많이 퍼졌던 곳이란 말이다. 즉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동네에서 집회가 많이 열리고 새로운 사상이 등장하면 로마 정부가 바짝 긴장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정부 데모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귀족체제를 뒤엎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그런 단체들이 많이 있었으니 말이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그 당시 로마의 경제제도란 노예가 땅을 경작하는 체제이기에, 그런데 이러한 노예가 모자라기에 각각 자기 민족들대로 총독을 두어서, 그 나라 경제는 그 나라에 맡겨두고 로마는 세금을 거두는 방식으로 운영했다는 것이다.

다시 교재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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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70-107) - 직분의 삼중직 방식을 최초로 제시했는데, 주님의 교회는 감독들과 장도들과 집사들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감독이 없으면 교회도 없고, 세례도 없고, 애찬과 성찬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물론 성만찬을 불멸에 이르는 의식이라고 여겼다. 성만찬을 수단으로 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얻는다고 보았다. 그는 신비주의적 노선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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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이와 같이 주장했는데, "감독이 없으면 교회도 없고, 세례도 없고, 애찬과 성찬도 불가능하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서바나의 폴리갑은 이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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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서머나의 감독 폴리갑(79-165) -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이그나티우스의 친구요, 이레네우스의 스승이다. 그는 ‘신앙의 주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라고 했다. 십자가의 증거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는 사람들은 마귀에게 속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과 의의 보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고 부동하게 붙잡아야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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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폴리갑을 최초의 조직신학자라고도 하는데, "신앙의 주체는 오직 그리스도다" 라고 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확고부동하게 붙잡아야 된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질서를 유지하고 갑자기 늘어나는 사람들을 한마음으로 잡는데는 정치적 질서로서 붙잡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나 서머나(마케도니아와 터어키사이)의 감독인 폴리갑은 교회질서를 유지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갈 테면 가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시 교재 5페이지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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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일신(3 1 神) 교리 -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명백한 교리는 이 시대에 아직 확립되지 않았지만, 희미하게나마 삼위일체 교리를 믿은 듯 하다.

* 속죄론 - 주님께서 생명의 길을 열고자 피를 흘리셨고, 회개하는 자에게 죄 사함 받게 하는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믿는 자들은 자신의 지식이나 경건한 마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의(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의)를 주신 것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이신득의의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속죄의 의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별로 철저하지 못했고 이신칭의의 근거에 대해서도 구약 말씀들에서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 천년설 - 그리스도의 재림이 멀지 않은 장래에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리스도께서 천년간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신다고 가르쳤으며 파피아스는 상상력을 크게 활용하여 천년 시대의 상태를 묘사하기까지 했다. 전반적으로 주님의 재림과 천년왕국을 매우 기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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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를 보면 참으로 그 당시나 지금이나 너무나 똑같은데, 파피아스처럼 천년설을 주장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말이다. (물론 너무나 정치적이란 이야기이다.) 앞으로 천주교의 공의회 역사를 공부할 텐데, 그것을 공부하면 그야말로 교회사의 맥을 뚫는 것인데,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총회의 회의록을 보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 누가 어떤 관심이 있었으며, 과연 몇 명이나 모였으며, 여기에 대해서 기존의 교회에서 관심이 많았는지 적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특징이, 대부분의 교회에서 그런 교리에 대해서 별로 관심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다. 다만 교회사를 기록하는 자들이 그렇게 만들어서 떠든다는 것이다.

◈ 교회사 - 선후배가 함께 한 교회 정치꾼들의 역사 !!

오늘날 교회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으면 끝나는 문제라는 것이다. 무슨 진리에 관심이 있는가? 옛날도 마찬가지였는데, 무슨 무슨 공의회로 그렇게 모이라고 해도 실망할 정도로 사람들이 적게 온다는 것이다. 소위 전세계교회가 다 모여도 정족수 미달이 허다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면, 교회사라는 것이 소위 교회 정치꾼들이 만들어 가는 정치적 입지의 역사라는 것이다.

제가 이쯤 이야기를 하면, 아마 여러분들은 "그럼 목사님, 교회사를 공부할 필요가 없네요" 라고 할 것이다. 그것이 정답인데,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유명인사의 몇몇 자기 정치적 구호나 선동, 그리고 정치적 입지, 그리고 정치꾼의 후발주자들이 선배의 정치적 구호를 써먹어서, 교회라는 권력단체를 인수 인계하는 하나의 형식으로 취한 것, 그것이 바로 교회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 민중들은 과연 이러한 교회의 교부들의 가르침과 그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는가? 그들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관심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육적인데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먹고사는데 말이다.

역사란 항상 경제구조가 하부구조가 되어서 위의 상부구조를 형성하는데, 이 하부구조인 경제구조를 '내용' 이라고 한다면, 위의 상부구조는 정치와 문화인데 이것을 하나의 '표현' 이라고, 엘름 슬로우나 들뢰즈 같은 철학자는 주장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은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그 살고자 하는 욕망에 대해서 경제가 보장을 해주면, 살고자 하는 욕망의 발산이 종교나 정치적으로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그 당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육적인 욕망을 어떻게 교리라는 이름으로 그 안에 대신 배출시키느냐를 파헤치게 되면, 오늘날의 교인들이, 즉 오늘날 경제구조내의 교인들이, 즉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사회 때에는 어떤 교리들을 호응하고, 어떤 교리들을 배척하는가가 좀더 뚜렷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세 때에는 '라티푼디움'(?) 이라는 노예노동 집약적 농업체제이기에 말이다.

로마 당시의 군대라는 것도, 전쟁이 나면 구약에 나오는 아람군대처럼 수십만이나 동원되고 하는데, 그러나 그런 자들은 요즘처럼 훈련받은 군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농사를 짓다가 불려나온 자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시대나 고려시대도 역시 만찬가지였고 말이다. 왜냐하면 근대의 자본주의 국가체제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군대가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는 어디까지나 농업체제였다는 말이다.

◈ 인간의 몸과 예수님의 몸의 대결 !!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무엇을 공부하려는고 하니, 과거 그 당시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의 신체, 즉 자기 몸을 가지고서 먹고사는 것에 그 얼마나 노력을 하면서, 또한 그렇게 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는가를 공부하자는 것이다.

교재 5페이지를 계속해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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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는 윤리주의와 율법주의가 교회 내에 만연하였다. 따라서 바울이 크게 강조한 이신칭의의 복음 진리가 별로 잘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고 행함에 대해 강조한 야고보의 사상만 강조되고 있었다. 이것은 지도자 자신들이 바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리주의가 교회 안에서 만연되게 된 데는 당시 크게 세력을 떨치던 이방 철학 사상 특히 스토아주의의 영향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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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는 윤리주의와 율법주의가 만연했고, 바울이 강조한 이신칭의 교리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는데, 사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도바울의 복음은 오직 성령이 임해야 알 수 있지 육적인 사람은 거부하게 되어있으니 말이다.

이 '이신칭의' 교리라는 것은, 사실 지금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믿는 자들이 적은데, 루터나 칼빈의 종교개혁시대에도 적었고, 사실 어느 시대이든지 간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는 자들이 적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든 인간들은 영적이 아니라 육적이기 때문에 말이다.

◈ 영적 - 역사란 있을 수 없고, 묵시밖에 없다 !!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데, 제가 영적이란 것을 무엇이라고 했던가요? 역사란 있을 수 없고 묵시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역사가 있을 수 없다" 라는 말은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남길 이유가 없다는 말인데, 왜냐하면 오직 묵시만 있으니 말이다. 그리스도 자체가 묵시적 존재로 계시니, 그리스도 몸에 속했다는 것은 그 사람도 묵시적 존재라는 것이다. 즉 묵시적 존재가 되어야만 영적인 사람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영적인 사람이라면 과연 행함에 대해서 기대를 걸까요? 행함에 대해서 기대를 걸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행함에 기대를 걸지 않으면 역사를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함을 모은 것이 역사이니 말이다.) 즉 "과거에 이렇게 잘 잘했는데, 뭐 복이라도 좀 안 주시나" 라는 방식으로, 그런 역사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에 관심이 있다는 말은 이미 육적이 되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육적인 흔적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야고보서 사상에 대한 강조는 있었지만, (물론 말씀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 대신 윤리주의가 성행했고, 특히 스토아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이 '스토아주의' 라고 했을 때는 하나만 생각하면 되는데, "참아야 하느니라", 즉 금욕주의라는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금욕주의인데, 인간에게 나오는 욕심을 끊어버리는 것이 참된 행복에 이른다는 것이다. 욕심이 자기를 불행하게 만드니, 이 욕심을 참으면 자기에게 행복이 되고, 그것이 바로 선이 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착함이 된다는 말이다.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 이란 노랫말에 보면,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낸다" 라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스토아 철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1세기 때의 신앙이 어떠한지 알겠지요? (막연히 그들이 믿음이 좋았을 것이란 착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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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의 일생 --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고달픈 인생길에 허덕이면서
아~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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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이렇게 그 당시의 내용들이 풍부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그 당시에 나온 문헌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뒤에 나오는 변증가들을 보면 내용들이 풍부하게 있는데, 그래서 그것을 참고로 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시대적인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6페이지에 나오는 변증가들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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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변증가들 - 로마제국이 정치적 군사적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것과 보조를 같이하여 문서적 사상적으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이 등장하자 기독교 지도자들 역시 기독교의 참 진리됨을 변호하고 변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들을 변증가(apologist)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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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로마제국이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서 박해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 방법이 군사적으로 박해를 가한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서 교회는 군사적인 힘이 없기에, 그래서 사상적으로 변증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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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의 정신과 내용 - 세상에서 신자의 존재는 몸에 있어서 영혼(마음)과 같다. 영혼이 온 육체에 충만한 것 같이 신자는 온 세상에 널리 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머물지만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 육은 영을 미워하여 항상 대적한다. 이것은 영이 육에게 무슨 해를 입혔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영이 육신을 그 정욕대로 쾌락을 추구하고 범죄를 저지르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상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아무런 해를 입은 일이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그들과 함께 세상 쾌락으로 치닫지 않고 그들의 거룩한 삶으로 세상에게 부끄러움을 주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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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가들은 이와 같이 보았는데, 그렇다면 과연 그들의 이런 지적이 옳은가? 아니면 잘못되었는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기 존재가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자신은 점점 더 훌륭해지고 멋있어지고, 적들은 점점 더 나쁜 놈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는고 하니, 이런 변증을 할 때 이웃사랑과 진리에 대한 수호태도가 서로 잘 결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결합이 잘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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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변증서의 내용들은 기독교인이라고 까닭 없이 박해는 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공평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옹호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 못한 채 박해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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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의 내용을 보면, 교인이기에 당하는 이유 없는 박해에 대해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옹호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즉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느냐?" 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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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목적은 세상 나라를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엎으려는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있다. 진리와 믿음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기꺼이 순교하는 것은 그들의 목적이 세상에 나라를 세우려는데 있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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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보면, "신자의 목적은 세상나라를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라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예를 들어서, 요한 계시록과 다니엘을 결부시켜보면, 이 세상나라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는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가 있을 수 있는가? 다니엘의 예언에 의하면, 로마나라가 그 자체가 짐승의 나라이고 로마 그 이후의 모든 새끼나라가 다 짐승의 나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니엘서의 예언을 예수님께서 모두 다 성취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믿는 사람들인가? 물론 예수님을 믿고 오시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적으로 그들이 무엇을 변증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나라의 말이 맞기에 말이다. "너희들은 세상의 나라(마귀의 나라)를 공격한다" 라는 말이 오히려 맞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믿는 성경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최근 일각에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대적하기 위해서 모이자고 했는데,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말이다.
모일 때 다른 종교에서는 "너희들이 우리를 짐승 취급을 하고, 도그마(교리)만 언급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막상 모였을 때는 "어, 우리를 짐승취급하지 않고 사람취급을 해주네. 기분 좋네"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 지도자가 소감을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이 TV에 중계되기도 했고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짐승이라고 알아듣도록 전하는 그 자체가 바로 복음을 제대로 전한 것인데, 그런데 굳이 이것을 완화시키고 다독거릴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사실 전도와 변증은 서로 혼합이 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라고 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은 심판입니다" 라고 하든지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둘 다 어설프게 이야기해놓으면 변증이라는 아부가 나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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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예수님의 도덕적 가르침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탁월함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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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어설프게도 두 가지를 모두 조화시키려고 해서 나온 것이 무엇인고 하니, 교재에도 있듯이 예수님의 도덕적인 가르침을 인용해서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탁월함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 '도덕적 탁월함' 말이다. 아니 언제 다니엘이 도덕적인 탁월함으로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했는가?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한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기 때문에 꿈을 해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분명하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해서 이야기해두지만, 어느 시대이든 간에 그것이 1세기든 2세기든 간에, 성도가 성도된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 임했을 때만 그 사람이 성도라는 것이다. 결코 도덕적 탁월함으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도덕적 탁월함을 주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인간들은 이 도덕적 탁월함을 흉내낸다는 것이다. (무슨 원숭이도 아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영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도덕적 흉내를 내어서 유사 신자로 행세해서 얼른 뚱땅 천국에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침을 튀기면서 해도, 아마 여러분들은 제대로 믿지 못하지 싶은데, 아직도 변증가들이 변증한 내용이 안 나왔기에 말이다. 도대체 변증가들이 어떻게 변증했는지를 것을 알고 나면 수긍이 갈 것이다.

이제 변증가들의 이야기를 살펴보겠는데, 여기서 교재를 한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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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 변증가  (1)유스티누스 (100-165) - 철학은 매우 커다란 재산이며, 신에 의해 최고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철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성스럽다. 철학과 올바른 이해 없이는 어떤 자도 통찰에 이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철학을 하여야 하며, 철학함을 매우 훌륭하고 존중할 만한 작업이다. 철학에도 진리의 흔적이 있다. 그것은 철학자에게도 '로고스의 씨앗'이 뿌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 소크라테스. 헤라클레이토스, 스토아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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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증 - 철학을 기독교가 반대할 이유가 없다 !!

'유스티누스' 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변증하는가? 철학은 매우 커다란 재산이며, 존중되어야할 것이고, 철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성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깜짝 놀랄 소리를 하는가? 즉 이렇게 변증을 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오기 전에 로마를 지배한 사상은 바로 철학사상인데, 그러니 이런 철학을 좋게 말한다는 것은 기독교가 그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하는 것이, 그 철학에서 나온 것이 바로 '다신교' 라는 것이다. 어느 세상이든지 간에 종교가 없었던 그런 사회와 시대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철학이란 게 무엇을 위한 철학인고 하니까, 그런 여러 다신을, 즉 "우상을 섬겨도 그것은 가장 인간다운 고상함입니다" 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철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사도바울은 단호하게 뭐라고 했는가? 우상과 사귀는 것은 귀신하고 사귀는 것이고, 우상은 다 헛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증거하는 예수 믿기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유스티누스의 것과 말이다. 사도바울이라면 결코 이런 소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전 10: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 유스티누스 -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도 그리스도인이다 !!

그런데 유스티누스는 말하기를, 교회가 자꾸 오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사실은 오해가 아닌데 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철학을 하는 사람은 성스럽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방종교에 종사하는 사람은 아주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란 말이다. 즉 동화사 주지스님께서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는 뜻이란 말이다. 그리고 그는 철학자들에게도 로고스의 씨앗이 뿌려져 있다고 했는데, 즉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도 다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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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체적인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기독교만이 확실하고 유용한 철학이다. 그것은 기독교는 예언의 성취에 따른 증명이기에 철학보다 더 힘있고, 더 신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리스도인의 가르침이 모든 인간적인 철학보다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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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유스티누스는 기독교만이 확실하고 유용한 철학이라고 하는데, (언뜻 들으면 기독교를 제대로 말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고 하니까, 불신자와 신자는 근본적인 차이가 아니라, 지식의 차이만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누가 더 똑똑하냐 덜 똑똑하냐 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와서 더 배운 사람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고, 철학을 하는 사람도 이미 그리스도인인데 제대로 좀 더 공부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당시 철학이 무엇과 연결이 되어 있는가? 다신교 사상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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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단지 스스로 몇 라지 특별한 통찰을 가질 뿐 결정적인 통찰력을 지니지는 않는다. 결정적인 통찰은 이미 지나간 철학에서 되풀이되어 말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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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신앙이라고 해서 전부가 아니고 또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은 단지 처음 믿을 때에만 신앙이 필요하고, 나머지는 철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런 식으로 변증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이것은 유스티누스 뿐만이 아니라, 터툴리안, 오리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드 등, 이들도 한결같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신앙이란 처음 믿을 때 필요하고, 그 다음은 점점 높은데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더 위대한 곳으로 말이다. 사실 이것은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 세상과 이런 타협안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로고스에 관한 것인데,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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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에 의하면, '소리내어지는 것'이다. 그 소리는 인간의 영혼에서 나오는 소리로 이해된다. '영혼적'이라는 말은, 영혼이 자신 안에 갖는 것, 즉 생명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로고스란 어떠한 생명체가 자신이 지닌 본질을 내뱉는 소리로서 표현과 표현된 것의 종합적 진술을 뜻한다. 만일 로고스가 드러내지 않는다면 고유한 생명의 활동을 실행하지 못한다. 따라서 로고스는 스스로 은폐해 있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탈 은폐할 가능성이 있다고, 헤라클레이토스(B.C 540년경 철학자)는 주장한다. 그는 만물의 변화무쌍함을 묘사하면서도 그런 변화를 변화로 겪어내고 읽어낼 기준으로서 '일자(一者)'를 설정했다. 보편이성 또는 만물에 내재하는 보편법칙을 뜻하는 '로고스'라는 일자는, 이전 단계의 우주론에서 근원 탐구가 삼라만상의 다양성을 포괄하기에는 다소 한계를 지녔던 데 비해, 변화의 상극적임 다양성과 안정을 아우르는 풍부한 단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뒤 스토아학파(B.C 4세기)에 속한 학자들은, 우주의 질서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지각이 되는 것은 로고스 덕분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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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고스 - 신은 하나지만 로고스가 다양하게 퍼져있다 !!

로고스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로고스는 소리내어지는 것이고, 그 소리는 인간 영혼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고스는 생명체 안에 숨어있는 무엇인데, 이 생명체를 활동하게 만드는 어떤 원리라는 것이다. 그 특징은 은폐되어 있으면서도 가끔 탈 은폐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로고스 이론이 나오는가? 모든 것이 일자(一者)인데 다양(多樣)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양한데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한 아이디어가 무엇인고 하니, "신은 하나지만 로고스가 다양하게 퍼져있다" 라고 해서, 서로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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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회사는 상당히 설명하기 힘드는데, 그 이유는 먼저 문헌이 적고, 그리고 교부들의 소리가 어쩌면 그렇게 비복음적이냐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런 이상한 소리를 하는 이것을 공부해야하는지 의구심과 회의가 들 정도로 엉망진창이라는 것이다.

질문 - 칼빈의 유형교회란 어떤 의미인가요?

답변 -  교회라는 유형체를 지속시키기 위한 정치적 배려라는 것이다.

질문 - 그렇다면 오늘날 성령론으로 모이는 이유도 다 같은 논리인가요?

답변 - 오늘날 그렇게 모이는 것은 자본주의의 다양성인데, 즉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라는 것이다. 민중들이 납득할만한 교리가 무엇인가를 연구해서, 많은 교리들 가운데서 뽑아내면 된다는 것이다. 민중들이 외롭다고 하면 공동체 운동을 하면 되고, 뭔가 해탈하고 싶다고 하면 새생명 운동을 하면 되고, 자가 자유를 강조하려면 성령운동을 하면 되고, 그래도 교회가 있어야 된다고 하면 교회 직제나 교회 월력을 강조하면 되고 말이다. 물론 교회당 커턴 바꾸는 것도 잊지 말고 말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요구하면 성만찬을 자주 베풀면 되고 말이다. 또 예수님이 너무 신적이니 인간적인 것이 없냐고 하면 마리아를 주장하면 되고, 안 믿고 죽은 친척을 살리고 싶다면 연옥설 주장하면 되고, 이와 비슷한 것이 개신교에도 있는데 중보기도라고 말이다. 이것이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에도 여러 번 계속해서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쟈크 엘룰을 이해하려면 그들이 무엇을 주장했는가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쟈크 엘룰의 책 '뒤틀려진 기독교사'는 한시간만 하면 다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미리 교회사를 공부해서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알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진짜 10분 쉬고, 초창기에 어떤 이단들이 있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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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훈 목사님의 교회사 정리를 참고로 재정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 글을 정리하면서 쟈크엘룰의 '튀틀려진 교회사'를 다시 읽고 있는데, 아마 그 책을 거의 책이 처음 나온 87년엔가 구입했지 싶은데, 지금 보면서 느낌은, "책은 읽는다고 읽는 것이 아니구나"를 새삼 느낍니다. 목회의 꿈에 부풀어있던 시대에 그런 책이 무슨 느낌으로 와 닿았겠습니까? 자기 환경에 항상 사로잡혀 무엇을 해도 하는 것이 인간이니 말입니다. 아마 자크엘룰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라면 우리가 도대체 그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교회 07-10-15 00:10 
woorich051022b
교회사 2강 - B
                                                        05,10,22  강의 이근호

◈ 동지가 아니면 다 이단 !!

교회사에서 '이단' 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소위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우기는 자들, 그들이 상대방을 몰아세운 것인데, 사실 그들도 충분히 이단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 말하는 이단을 말하지 않았고 자기들 집단에 동조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단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들의 기준점에서 이단을 결정하는데, 그런데 그 기준점이 점점 바뀐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A 라는 지점에서 B, C, D를 이단이라 했다가, 자신이 B 지점에 와서는 A가 자기에게 동조하지 않는다고 A를 이단이라고 해버린다는 것이다. 즉 "무조건 날 따라와 !!" 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치적 파워가 센 쪽으로 붙어야만 이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동지가 아니면 다 이단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칼슈미트의 '독재론'에 나오는데, "동지가 아니면 다 이단이지 중간지점은 없다"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부가 다 정치게임이고 파워게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사에서 "이단들이 나타났다" 라는 것은, 이들은 전통 카톨릭에서 규정했던 이단들이라는 것이다. 내용은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의 글을 참고하면 되고 말이다.

이제 교재 9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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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에비온파 - 에비온파는 요단 동편 지방에서 기독교 초기 몇 세기 동안 성행한 이단인데 그들은 사도 바울을 유대교의 반역자로 생각하고 배척하였으며, 따라서 에비온파는 그들이 유대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간주한 마태복음만을 사용하였으며 바울 서신은 인정하지 않았다. 유대인 기독교회 집단이라고 볼 수 있는 에비온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금식을 해야 하며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고 그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승천 등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만을 믿었으며 그리스도는 그의 율법적 경건 때문에 메시아로 자천(自薦)한 사람이며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메시아 자각을 했으며 그의 가르침에 많은 무리가 따르므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에비온파는 사실상 기독교회가 아니고 유대교의 일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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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비온파는 유대교적 이단인데, 마태복음만 간주하고 바울서신을 일체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새 다시 뜨는데, 즉 베드로는 훌륭하고 사도바울은 죽일 놈이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랬다 저랬다가 하는데, 즉 행함을 주장했다가 믿음을 주장했다가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이 못된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주장은 베드로가 한 것으로, 그의 말이 진짜라는 것이다.

◈ 드디어 '신학'의 등장 !!

1세기 당시 지도를 다시 살펴보면, [갈리아(프랑스) - 서바나(스페인) - 이태리 - 마케도니야 - 터어키 - 안디옥 - 팔레스타인 - 알렉산드리아 - 이집트 - 카르타고(튀니지)] 인데, 여기 팔레스타인이라는 지역에서 신학을 주도한 것이 누구인고 하니 예수님의 동생이란 것이다. 그래서 드디어 팔레스틴 신학이 등장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바울의 신학이 중심이 된 것은 안디옥 신학이고 말이다. 그리고 또 요한의 신학이 등장하는데, 서바나 지역으로 사도요한의 제자 폴리캅에 의한 요한신학 말이다. 그리고 또 로마에서는 로마신학이 따로 나오고, 알렉산드리아 신학이 따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삼위일체 교리가 바로 안디옥 신학과 로마 신학과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정치적 타협이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말이다.) 물론 초창기에는 팔레스틴 신학, 안디옥 신학, 요한 신학의 정치적 타협이 있었고 말이다. 

◈ 요한신학 - 죽을래 지옥갈래 !!

요한 신학이란 무엇인고 하니, 요한복음과 요한 1,2,3, 요한 계시록이 중심이 되는데, 이 신학의 특징은, "누구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성령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 라는 것이다. 즉 누구도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교회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교회란 무엇인고 하니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고, 이렇게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을 정도이고,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세상의 정욕은 다 없애고, 결코 죄를 짓지 않는 그런 자들이란 것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죄를 짓지 않는 말이다. 이렇게 죄가 없는 상태이니까, 사실 거의 죽기 아니면 지옥 가기(?) 라는 것이다. 즉 "당신, 죽을래 지옥갈래" 라는 타입이란 것이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신령한 쪽이라는 말이다.

◈ 팔레스틴신학 - 12 제자를 떠나면 죽어 !!

팔레스틴 신학은 무엇인고 하니, 야고보서에 나오는 것과, 초기 사도회의에서 결정한 것으로, 즉 "열두 제자를 떠나면 너 죽어" 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가르침 떠나면 죽는다는 것이다. 당연히 베드로 전후서가 여기에 해당하고 말이다.

◈ 안디옥신학 - 믿음으로 구원 !!

안디옥 신학이란 무엇인고 하니,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팔레스틴 신학이 유대교의 연관성을 떠날 수 없다는 것에 비해서 말이다. 예를 들자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가 역사에 있어서 그야말로 돌발적 역사로, 즉 역사가 이렇게 흐르다가 다른 역사로 옮겨져서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서로가 전혀 지층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계기로 해서 '붕' 하고 떠버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팔레스틴 신학에서는 구약과 연관되어 있어서 서로 똑같은 역사라는 것이다. 하지만 안디옥 신학은 아예 이러한 역사가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역사이니 말이다. 성령 안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받으니 새롭게 시작하자는 말이다. 하지만 팔레스틴 신학은 구약의 신학과 연결해서 서로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교회신학의 분류가 이런 식으로 해서, 각자 각자의 경향에 따라서 나누어졌다는 말이다.

◈ 전승(傳乘) - DNA 꼬이듯이 꼬여서 !!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소위 '전승' 이라고 하는데, 이 전승들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에 서로 자기 취향에 맞는 속담이나 전설이나 이야기꺼리, 또는 대담꺼리, 또는 기적을 일으키는 등의 화제꺼리, 이런 것들이 3개가 서로 DNA 꼬이듯이 꼬여 가지고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특색은 유대인 쪽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고, 마가복음은 마태와 누가를 기록하는데 기초가 된 기초적인 복음으로 하고 말이다. 마가복음이 간단하니까 말이다. (간단한 것을 기초로 해서 갈수록 복잡하게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헬라인 쪽으로, 요한복음은 요한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서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신학이 전통적인 공간복음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자체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층들이 모여서 그것이 대상에 따라서 편집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원래의 모습을 되찾으려고 하면 이런 3가지나 4가지 분류로 해서 다시 찾아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삼위일체를 공부해보면 알겠지만, 이 교리는 알렉산드리아 신학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헬라철학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그 당시 이 알렉산드리아에 도서관이 많았으니 말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알렉산드리아는 학자들(피타고라스 등)이 굉장히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팔레스틴이나 안디옥 쪽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또 하나의 새롭고 좋은 것을 취하여 서로 자기들 취향에 맞도록 혼합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종교란 것은, 사람들이 복음이라고 해서 결코 동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취향에 맞다 싶으면 다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인생을 오랫동안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 알게 되는데, 30대 취향이 다르고 40대 취향이 다르다는 것이다. 설교도 30대가 좋아하는 설교가 있고, 40대가 좋아하는 설교가 있고, 50대가 좋아하는 설교가 다 따로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20대를 교회에 모아놓고서 매일 같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예수님만을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말하기를 "아니 목사님, 그렇다면 우리는 결혼도 하지 않고 붕 떠서 무엇을 하란 말입니까? 세상은 다 더럽고 악한 것인데 말입니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80대 할아버지에게 설교하면 "아, 은혜스럽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결혼 같은 것은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이제 곧 이 세상을 떠나니까 말이다.

◈ 언어체계에서는 반드시 명령어가 들어있다 !!

신학도 일종의 언어체계인데, 이 언어체계에서는 반드시 명령어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들뢰즈의 용어를 빌리면 '언어의 잉여' 라고 하는데, 제가 이곳에서 강의를 하다가 춥다고 하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춥다고 하면 얼른 난로를 피우든지 옷을 가져오든지 해야한다는 명령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제가 크로스빌리지 질문답변란에서 말했는데, "오늘 날씨가 참으로 맑다" 라고 하면, 옛날에는 단순히 서술어였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날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요즘은 이 문장 속에는 "날씨가 맑으니 놀러가자" 라는 명령이 들어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명령어는 사람의 대상에 따라서 다 다르다는 것이다.

성경말씀도 마찬가지로 다 명령이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이야기 그 자체가 명령이라는 말이다. 꼭 "하라, 되라" 라고 해야만 명령이 아니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주께서 잡히시든 밤에 떡을 떼사" 라고 해도,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서술형 같지만) 그러나 이것도 명령이라는 것이다. "주께서 잡히시든 밤에 떡을 떼니, 안 먹는 자는 지옥으로 간다. 그러니 알아서 해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명령이 아닌가? 조금 어려운가?

다시 교재로 돌아와서, 교재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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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기독교회 집단이라고 볼 수 있는 에비온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금식을 해야 하며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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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에비온파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는데, 이 에비온 파는 할례를 행하고, 금식을 하고,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한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우리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우리교회는 (나름대로) 복음을 주장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라고 하겠이지만, 그러나 이것대로 한번 해보라는 거이다. 이대로 해서 히트를 친 놈들이 얼마나 많은가? 안상홍 집단, 안식교 계열, 문선명 계열, 고신파 계열 등등 말이다.

고신측에서 이단이라고 해서 잘린 목사들, 아니 박갈현 목사나 이광호 목사가 무엇 때문에 잘렸는가? 주일성수와 십일조, 그것을 반대해서 잘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복음을 아는 사람들은 "아니, 저 고신측은 미친놈들이 아닌가? 저 놈들은 성경을 안 믿나" 라고 할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취향은 성경취향이 아니고, 대대로 내려왔던 "십일조를 하고 주일을 지키면 복 받는다" 라는 것이다. 그 취향에 맞지 않으면 성경이고 무엇이고 다 무시한다는 것이다.

또 재건파는 뭐라고 주장하는가? "우리의 선배들은 옥중에서 순교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취향인데, 그러니 성경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모조리 다 육적이라는 말이다. 사실 종교라는 그 자체가 육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역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즉 자기 교회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그런 것 자체가 모두가 다 육적이라는 말이다. 아니 어떻게 자기 교회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가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지 말이다.

그러니 신학을 나누어서 생각하는 신학자들, 그 사람들도 다 육적이라는 것이다. 신학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베드로파나 바울파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어느 대상이다" 라는 말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여졌다고 하지만, 사실 어떻게 마태복음이 유대인 대상이겠는가? 모든 인간이 다 유대인이고 헬라인인데 말이다. 우리 모두가 다 그런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을 나누고 짜집기를 하는 성서신학자들의 사상이 모두 다 육적이라는 것이다. 아니 분해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 모형비행기를 만들 일이 있는가? 모형 비행기를 접어서 날린다고 해서 천국까지 갈 수 있는가? 다 지옥에서 불 탈 것인데 말이다.

그래서 이 에비온파를 공부하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 이 에비온파를 보면서, "아하, 에비온파가 이렇게 (개판으로) 해도 교회가 되는구나"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만 되면 그만이지" 라고 하는 사고가 옛날에 있었다는 것이다. (요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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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고 그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승천 등을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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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리스도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부정했는데, 이것까지도 공부해버리면 진도가 안 나가니 그 다음 '엘카이파'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인정하기는 하는데, 그리스도의 신성이 아니라 인성에 대해서 대단히 강조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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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엘카이파 - 엘카이파는 접신적(接神的) 신앙을 가지며 금욕주의와 고행주의를 주장하는 기독교회 내의 유대인 집단이다. 그들은 에비온파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며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출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주 세척(洗滌) 의식을 행했는데 그것은 그 행위를 통해 신을 만날 수 있고 또한 신과 화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그들 사이에는 접신적 행위와 점성술이 성행했고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심신의 수양을 쌓고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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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왜 에비온파나 엘카이파를 공부해야 하는고 하니, 이들을 공부해놓으면 우리와 같은 교인 가운데서, "이 사람은 에비온적이고, 저 사람은 엘카이쪽이네" 라고, 그렇게 다 나온다는 것이다. 지금 살펴보는 이들이 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지 않는가? 그들의 그런 잠재성에 우리에게도 다 들어 있다는 것이다. 친구에게 성경을 읽어보라 해놓고, 한 달 뒤에 물어보면, "예수님은 이렇다" 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아하, 에비온파네, 혹은 엘카이파네" 라고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에서 '영지주의'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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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그노시스파(영지주의) 130년-165년(발렌티우스) - 그때까지 나타났던 어떤 이단보다도 간교하고 위험한 이단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3세기초에는 로마제국전역의 대부분의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이 크게든 작게든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영지주의라는 용어의 어원은 '지식'이란 뜻의 '그노시스'(gnosis)에서 나왔다. 이 지식은 보통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지식, 지혜로서 특수 계층에 속하는 영적인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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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는 '그노시스파' 라고도 하는데, '그노' 라고 하니 마치 제 이름(근호)을 부르는 것 같은데,  (사실 근호도 너무 영적인(?) 것을 강조한다고 해서 영지주의자라고 곡해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면 영지주의자 발렌티우스(130-165) 라는 사람의 주장이 무엇인가 한번 살펴보자.

◈ 영지주의 아이디어 - 신학자들의 아이디어에 다 채용 !!

왜 영지주의를 공부해야하는고 하니, 이 영지주의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그 뒤에 나오는 모든 신학자들의 아이디어에 다 채용된다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을 이단이라고 해놓고는 이단들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이다. 특히 오리겐, 이런 사람은 철저하게 영지주의인데, 알렉산드리아의 클리멘트도 그렇고 말이다. 알렉산드리아 아프리카 학파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단이 아니지 않는가?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단이고 아니고는 성경이 기준이 아니라, "왜 우리말을 안 듣는가" 라는 것이 이단이란 것이다. 담고 있는 그 내용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단적인 내용이 들어있어도 고개만 숙이면 동지이고, 다 같은 대한예수교 정통 합동측이란 것이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으면 무조건 이단이라는 말이다. '설마!' 라고 하겠지만,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초창기에 소위 기독교가 많다는 동네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데, 그들이 나중에 자기들끼리 협력해서 '천주교' 라는 하나의 교회로서, 그것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말이다. 그것을 다음 시간에 공부할 것인데, 어거스틴, 삼위일체, 니케아 회의까지 말이다.

영지주의자들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면,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신은 보이지 않는 신이다" 라는 부정(不定) 신학인데, 이 신학은 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 무엇은 신이 아니다" 라는 식으로, 즉 부정적인 방법으로 신을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은 나타나지 않고, 신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영지주의가 바로 이런 부정신학이란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신과 세상 사이에는 30개의 에이온, 즉 계급이 있다는 것이다. 30개의 제일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지혜'가 있는데, 바로 이 지혜를 깨닫는 것이 '영지(靈知)' 라는 것이다. 영지버섯 말고 말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란, 이 세상적인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영적인 깨달음 말이다.

◈ 믿음으로 영지(구원)얻고, 행함으로 올라가고 !!

그런데 나중에 교부들은 이 지혜를 성령으로 거듭난 지혜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새롭게 알게된 지혜로부터 신까지 올라간다는 것이다. 물론 정통 교리기에 그들처럼 30계단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올라가는 것은 맞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영지얻고 행함으로 올라가고,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신학의 전부가 아닌가? 놀랍게도 그 토대가 바로 영지주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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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주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급에 속하는 아이온인 데미우르고스(Demiurgos; 조물주)가 만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는 불완전하며 결점(罪)이 있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조물주인 하급 아이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최고의 아이온이다. 그는 인류 구원의 목적으로 세상에 내려와서 지식을 주고 구원을 이루었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실제하지 않으며 가현(假現)이다. 인간의 구원은 물질의 구속(拘束)을 벗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속죄는 참 지식(gnosis)을 가지고 금욕생활을 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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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지만, 그런데 이들은 신은 창조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창조의 신은 하급신인 '데미우르고스' 라는 조물주 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구약의 하나님은 조물주인 하급 '아이온'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최고의 '아이온' 이라 하는데, 구원을 목적으로 오셔서 구원을 제공했기 때문에 최고라는 것이다.

왜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고 하니, 구약의 하나님은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사랑에 가깝고,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의 신은 하급신이고, 예수님은 최고의 상급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 당시 민중들에게 납득이 되고 먹혀들었는데 참으로 쉬우니 말이다. (사실 우리가 들어도 솔깃하지 않은가) 그 당시 민중들에게 이렇게 쉬울 뿐만 아니라, 너무 기분 좋은 것은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지혜를 깨달아야만 이 출입구에 설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의 자존심을 팍팍 세워준다는 것이다. "깨달았습니까?-깨달았습니다" 라고 하면 되니 말이다. 그야말로 요즘 유행하는 "믿습니까?-믿습니다. 할렐루야, 구원받았습니다" 라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 쟈크엘룰 - 민중들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나온다 !!
 
"이렇게 깨달음을 통해서 영적지식(영지)을 확보하고, 본격적으로 이제는 폭력적인 것에서부터 사랑으로 상승해갈 때 그 사람은 신의 경지로 올라갈 수 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지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영지주의가 아닌 교회가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이 영지주의가 왜 그 당시 대 히트를 쳤는가? 왜 히트를 쳤지요? 쟈크엘룰에 의하면, 그 민중들이 전부가 다 빵이든 무엇이든 그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나온 사람들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 로고스론 - 영지주의를 물리치기 위해서 !!
 
(이렇게 해서 이들의 무리가 점점 늘어나자) 교회의 지도자들이 위협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런데 이러한 영지주의에 반대해서 나온 자들도 역시나 영지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들은 이때까지 희미하게 주장했던 '로고스론'을 크게 부각시켜서 영지주의를 물리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로고스론도 역시 헬라철학에 다 나온다는 것이다. 앞서 공부했는데, 헤라클레이토스(B.C. 4세기경)와 아리스토텔레스(B.C. 6세기경)가 주장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이 로고스론이 무엇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이론이라고 했던가요? 로고스 이론은 일자(一者), 즉 천지를 만드신 신과 온갖 다양함을 연결시키는 고리가 바로 이 '로고스' 라고 것이다. 일자는 하나이지만, 이 로고스는 다양한 색깔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오리겐이나 다른 변증가들이 이들 고대헬라철학의 로고스 이론에서 힌트를 얻어서 주장하기를, 구약 속에 로고스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영지주의와는 다르게 되는데, 영지주의는 구약의 하나님은 하급신이고 신약의 예수님은 상급신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영지주의에서는 구약과 신약은 서로 같은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 구약의 희미한(?) 로고스가 육체를 입었는데, 그분이 바로 신약의 예수님 !!

그러나 이에 반대해서 교회는(변증가들은) 구약 속에 로고스의 씨앗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 속에 말이다. 이렇게 로고스 이론으로 연결시켜서 어디까지 나가는고 하니, 그 로고스가 육체를 입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라는 말씀을 인용해서 영지주의를 물리치게 된다는 것이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문제가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하지 않으면 백날 사람을 끌어 모으고 꼬드겨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놓아도, 영지주의자들이 와서 다 데려가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볼 때 답답한 것은, 아니 "믿으려면 남고, 안 믿으려면 나가!" 라고 하면 될텐데 무엇을 그렇게 붙들려고 안타까워서 몸부림을 치는지 말이다. (그러니 여전히 그들의 관심은 성경말씀이 아니라 다른데 있다는 것이다)

◈ 영지주의 - 교회의 무식함이 까밝혀짐 !!

그리고 이런 영지주의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정신을 차리게 되고, "도대체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게 무엇인가?" 라고 하면서 스스로 자기들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영지주의자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자기들은 다 안다고 건방을 떨었다는 것이다.

신학교를 막 졸업한 신학생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들은 다 안다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성부성자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다 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문제가 발생해서 답변해보라고 하면 엉뚱한 소리가 막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건방지게 다 알기는 뭘 다 안다고, 주제파악을 해야지 말이다.

이제 교재 12페이지 '마르키온'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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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마르키온(130-160년) - 구약의 하나님은 단지 정의만 추구하나 새 언약의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이 충만한 존재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악의 창조주로서 오직 이스라엘들만 사랑하고 다른 인류를 파괴시키는 하나님이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탄생 기사를 제외한 누가복음 일부와 바울의 10개 서신들만을 인정했다. 그에게는 바울만이 영웅적인 사도로서, 예수님의 복음을 오염시키지 않은 유일한 사도로 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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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키온 - 바울만이, 바울만이 !!

('말시온' 이라고도 하는데) 이 사람은 아주 은혜스러운(?) 주장을 많이 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사랑하고 다른 인류는 다 파괴시키는 하나님이라고 말이다. 이런 소리를 누가 주로 말하는고 하면, 도올 김용옥과 같이 나름대로 성경을 공부한 사람들이 이렇게 다들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사람에게는 바울만이 영웅인데, 나머지는 다 '꽝!'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구원이란, 신비의 경지에 도달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복음을 믿었든 것에 대한 단순한 신앙으로 얻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복음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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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은밀한 지식체를 가졌다는 영지주의와는 달리 인간구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즉 구원이란 신비의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복음이라고 믿었던 것에 대한 단순한 신앙에 의한다. 교회가 복음을 유대교와 결부시키려 했기 때문에 오히려 복음을 모호하고 만들었고, 또한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은 데미우르고스 인데, 그 신은 반역의 악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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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마지막에 보면, 악(惡)에 관한 문제가 나오는데,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은 '데미우르고스' 라는 신으로, 이 신은 악과 함께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바로 악의 문제에 대해서 제일 많이 고민을 했는데, 도대체 악을 누가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나중에 어거스틴은 이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엉망으로 만들고 말았지만 말이다.

만약에 악을 하나님이 만들었다면 하나님은 악한 분이고, 이 악을 하나님이 만들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만들지 않은 것이 세상에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악에 대한 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그래도 살면서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착하게 살았는데 그만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악한 자를 하나님이 왜주셨느냐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근원적인 물음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을 교회가 해답을 제시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악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 교회가 해답을 만족스럽게 제시하지 못하니, (교회 꼴이 말이 아니라) 더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 마르키온 - 하나님은 악을 만들지 않으셨다 !!

여기에 반해서 마르키온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악을 만들지 않았고 악마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인 데미우르고스가 악을 만들었지 진짜 하나님은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 하나님은 인간구원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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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데미우르고스에게 아무런 부채도 지지 않았기 때문에, 데미우르고스의 피조물인 인간들이 태어나듯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다만 육체를 가진 듯이 나타난 것뿐이다(가현설). 그래서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이 악한세계와 그 율법에서 그와 그의 형제를 피신시키기 위해 십자가 사랑으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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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키온 - 가현설 !!

이렇게 예수님은 데미우르고스에 대해서 아무런 부채를 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한참 후대에 나타나는 안셀무스의 마귀에게 값을 주고 뺏어온다(보상론)는 구원론과도 반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고 나타났지만, 실제로 육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만져보면 허빵이라는 것이다. 즉 실제는 육체가 아니라 임시적인 가상의 육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주장을 하는데,)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율법에서 형제를 피신시키기 위해서 십자가 사랑으로 활약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십자가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여기 십자가 마을에 들어와도 받아줄 뻔한(?) 그런 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즉 구약의 율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그것이 바로 십자가로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반해서 기존 교회신학은 어떠했는가? 야고보서를 주장했고, 기존 율법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폴리캅, 이그나티우스, 로마의 클레멘트 등은 교회에는 계급이 있다고 했는데, 즉 감독이 없으면 교회가 없다는 것이다. 또 감독이 없으면 성만찬도 없는데, 이 성만찬 없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것이다. 성만찬이 영생을 주기 때문에 말이다. 이렇게 그야말로 교회가 완전히 이단이니까 마르키온 같은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교회가 전부 다 이단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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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두 번 하강하셨는데, 한 번은 고난 당하고 죽기 위해서이고, 다른 한 번은 사도 바울을 부르시고 그에게 진정한 그의 죽음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마르키온은 영지주의자와 같이 이원론에 입각하여 물질을 죄악시하여 금욕주의로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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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는 사도바울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두 번 오셨는데 한번은 고난을 당하고 죽기 위해서 오셨고, 또 한번은 사도바울을 부르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진정한 죽음의 의미를 부여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이제 헬라파 신학자들을 살펴보자. 그 당시 '헬라' 라고 하는 것은, 현재 그리스 나라만 헬라가 아니라 아프리카 북쪽도 다 헬라라는 것이다. 즉 로마를 제외하고는 다 헬라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팔레스틴은 유대이지만 말이다. 그 당시 신학을 지역적으로 나누자면, 헬라신학과 동방신학, 그리고 라틴신학으로 보면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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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헬라파의 신학자들
이들이 활동한 시기는 대략 170년경으로서 변증가 시대의 끝에 해당한다. …… 헬라파도 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소아시아파이며 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리아파이다. 소아시아파는 사도 요한의 뒤를 이른 사람들로서 성경의 해석에 중점을 두고 사상과 신앙의 온건함이 이들의 장점이었다. 이들은 이단에 대해서는 강한 대항적 자세를 취했다. 이 파의 지도자는 이레네우스와 히폴리투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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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살펴본 유스티누스는 변증가에 해당하고, 이 헬라파 신학자들이 활동한 시대는 그런 변증가들의 마지막 시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물론 터툴리안도 변증가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라틴 신학자로 보자는 것이다. (사실 구분이 애매함) 그리고 이 헬라파는 둘로 나뉘어지는데, '소아시아파'와 '알렉산드리아파'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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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이레네우스(130-202) - 최초의 조직신학자 - 소아시아 서머나 출신으로, 그는 영지주의에 맞서서 구약과 신약을 언약적으로 통일시키려고 했다. 공간적으로 교회는 동일한 말씀을 가르치게 되어 있고, 시간적으로는 동일한 사도의 저술의 하나의 경전으로 채택될 것이라고 말한다. 구약의 많은 사건들은 신약의 메시야를 언급하는 것이다. 그는 '총괄갱신'을 말하고 있는데, 즉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자신 안에 총괄하는 것은 인류를 회복하는 일이며 갱신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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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소아시아파(지금 터키)에 보면 '이레니우스' 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최초의 조직신학자로서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역사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십자가 사건은 역사 속에서의 또 하나의 사건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즉 흘러간 역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끊어 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즉 십자가 사건은 전혀 다른 역사를 만들어 버린 사건이었고, 돌발적인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역사는 전혀 다른 지대를, 다른 속성의 역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 이레니우스 - 최초의 구속사 신학자 ??

그러니 이레니우스는 일종의 구속사를 이야기한 최초의 구속사 신학자라는 것이다. 또 그가 주장한 '총괄갱신' 이라는 것은, 에베소서 1장에 기록되어있는 바와 같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되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말이다.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말해서, 구약에서도 그리스도가 살아서 역사하는데, 구약과 신약이 다른 신이 아니라 동일하게 그리스도에 의해서 되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영지주의를 의식해서 한 말인데, 그들은 구약과 신약의 신이 다르다고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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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에 관해 그는,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신 필연성을 인간의 신격화라는 구원론에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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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육신 - 육신을 가진 인간이 신이 되도록 !!

그가 주장한 이 '성육신' 문제는 문장은 간단해도 상당히 어려운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시간이 가도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이레니우스는 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인간이 어떻게 한계를 벗어나 신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회복시켰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어떤 죄를 지었든 신경일랑 쓰지 말라는 것이다. 죄의 문제는 심각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예수님께서 완전한 새사람이 되게 하셨는가가 중요하니, 바로 이렇게 새사람이 되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것은 육신을 가진 인간이 신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교재 13페이지를 계속해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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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네우스 신학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 부분은 예수님께서 단순한 선생이 아니라 구주이심을 밝힌 부분이다. 즉 주님은 이방 종교의 교조들처럼 단지 선한 가르침을 베푼 분이 아니라 그 자신이 거룩한 가르침을 낼 수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셨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주님은 그의 가르침을 뒷받침할 수 있는 놀라운 인격과 권능을 소유한 분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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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니우스의 특징은, 예수님은 그냥 스승이 아니라 구세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신학의 중심은 로고스가 아니라 성육신과 속죄에 있다는 말이다. 이 로고스에 대해서는 나중에 나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많이 주장했고 말이다.

이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클레멘트에 대해서 살펴보자. 교재 15페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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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알렉산드리아 학파(클레멘트와 오리RPS)
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 - 철학이란 덕이 있는 인간이 만들며, '악덕의 작품'일 수가 없다. 철학은 진리에 도달하는데 적합하지만 진리엔 단지 부분적으로 도달할 뿐이다. 완전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철학을 넘어서야 한다. 여기에 신앙이 역할을 맡게 된다. 신앙은 진리의 힘이며 신앙을 통해서만 모든 것의 근원에 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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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학파에는 클레멘트와 오르겐이 있는데, 둘 다 로고스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아프리카 북쪽에 있음을 먼저 기억하고, 이 클레멘트는 주장하기를, 철학이란 덕이 있는 인간이 만들며 철학이 악덕일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 터툴리안 -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데 이와 반대로 이야기하는 곳이 라틴신학이라는 것이다. 터툴리안이 말하기를,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는 것이다. 매우 유명한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사람은 철학으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철학이란 하나의 호기심에 불과하며, 모두 비성경적이며, 마귀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 파스칼 -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지, 철학의 하나님이 아니다 !!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지 철학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중세 때 그 유명한 파스칼이 말한 것인데, 그래서 그를 터툴리안 계통으로 보는데, 이 터툴리안은 바울 사상의 전수자라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터툴리안이라는 사람이 문제가 있는데, 그가 '금욕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례 이후의 범죄는 한 번은 봐주는데 두 번은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즉 '투 아웃제도' 라는 것이다. 삼진제도가 아니고 말이다. 아무튼 희한한 주장들이 다 나온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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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예비 교육이다. 철학은 헬라인들은 그리스도에게로 교육시킨다. 야생 올리브유와 좋은 올리브유의 차이와 같다. 그러나 신앙은 '통찰의 시초'일 뿐이다. 신앙은 신을 탐구하지 않으며 단지 신이 존재한다고 고백하는 것뿐이다. 영적인 지혜(영지)를 통해서 비로소 신앙은 완성된다. 그리스도교의 신은, 인식될 수 없는 신이 스스로를 자신의 아들 안에서 계시하였고 그 안에서 항상 보이기를 원한다는데 있다. 로고스는 '아버지의 얼굴'이며 '신에 대한 올바른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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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멘트 - 철학은 헬라인들은 그리스도에게로 교육시킨다 !!

그는 주장하기를, 철학은 헬라인들을 그리스도인에게로 교육시킨다는 것이다. 클레멘트는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율법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라는 말을, 일단 율법을 잘 배우고 나면 자연적으로 그리스도를 안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데, 결코 안 되는데 그렇게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율법에 해당하는 것이 철학이라는 것이다.

(갈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다시 말해서, 철학을 알아야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 양심(이성)이 있는데, 이 인간의 양심은 이방인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이고, 그리고 철학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철학을 공격하느냐는 것이다. 당연히 철학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결코 철학은 악덕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철학과 율법을 야생 올리브유와 좋은 올리브유로 비유해서, 서로 차이점은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 다 올리브유는 맞다는 것이다.)

신앙이란 초반의 통찰의 시초일 뿐이고, 신앙다음에는 영지로 통해서 신앙이 더욱더 완성된다고 했는데, 그래서 새로운 지혜로 통해 점점 더 높아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얼굴이고 올바른 선생이라고 했고 말이다.

이제 '오리겐'에 대해서 살펴보겠는데, 거의 이단수준에 이른 사람인데, 교재 16페이지 중간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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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오리겐(185-254) - 185년경에 알렉산드리아서 출생한 오리겐은 총명하고 부지런한 대 학자였다. 18세 때 스승의 클레멘스의 뒤를 이어 신학 교수가 되었고 암모니우스 삭카스에게 철학을 배웠다. …

그는 말하기를 "보통 사람은 성경에서 육신의 유익을 찾고, 깨친 자들은 정신적 유익을 찾으며, 완전한 이들은 영적 유익을 찾는다. 사람이 영과 혼과 육으로 된 것 같이 성경도 그러하여 성경 안에는 문자적, 도적적, 영적 뜻이 함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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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보면, "보통사람은 성경에서 육신의 유익을 찾고, 깨친 사람은 정신적 유익을 찾고" 라고 했는데, 이 오리겐은 모든 성경해석을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분설, 즉 사람을 육과 영과 혼으로 분리해서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끼워 맞추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오리겐의 설교를 잘 활용한 자들이 누구인고 하니까, 한국의 초창기 부흥사들이라는 것이다. 오리겐의 성경해석을 읽어보니 (제대로 읽어나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말장난이더라는 것이다. 그런 장난은 자기도 할 수 있고 말이다. 무조건 끼워 맞추면 되니 말이다. (소위 이런 것을 영해, 혹은 알레고리 해석이라고 하는데), 기차는 길고 긴 것은 바나나..., 라는 식으로 말이다. 아무튼 무조건 좋은 것, 은혜로운 것, 이런 것을 다 모아서 말장난으로 다 끼워 맞추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리겐의 성경해석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이 말씀연구의 '박용기' 라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모두 3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그야말로 3에 환장한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자기가 사는 아파트도 3층이란 말이 있는데, 무엇이든지 다 3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로 시작하는 어설픈 오리겐들이 많이 있는데, 이 삼위일체가 진짜인줄 여기고 이 삼위일체에 끼워 맞추면 주님이 보시기에 책망 받지 않는 해석인 줄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오리겐은 주장하기를, "사람이 영과 혼과 육으로 된 것 같이 성경도 그러하여 성경 안에는 문자적, 도적적, 영적 뜻이 함께 있다" 라고 했는데, 이런 문자적, 도적적, 영적으로 나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옳고 그르냐가 문제가 아니라, 무조건 3과 연결시켜서 성경전체를 해석해야 옳은 해석이라고 여기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깨친 자를 영적으로 지혜 있는 자로 여기고 말이다. 아무튼 문제투성이라는 것이다.

이제 라틴 교부들을 살펴보겠는데, 먼저 교재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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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라틴 교부들
①터툴리안 (160년-225년) - 신학을 라틴신학으로 개편하였고 라틴역 성경도 마련하였다. 이런 점에서 라틴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에게서 형성된 라틴신학은 키프리안과 암브로시우스로 계승 발전되었다.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은 헬라철학에 정통함에 비해 라틴 교부들은 법률, 정치 등의 사회과학적인 교양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 그는 당시 로마사회에 만연된 부도덕성으로 인해 자신부터 매우 금욕적이었으며 도덕성을 강조했으며 극장 관람조차 강력하게 정죄했다. 이교철학을 모두 비성경적이며 이단적으로 취급했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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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터툴리안' 이라는 교부는 조금 전에 살펴본 대로, 철학과 신앙을 완전히 반대로 보았다는 것이다. 즉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는 것이다.

이제 '키프리안'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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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키프리안 (200-258) - 그의 신학의 중심은 교회론에 있었다. …… 그가 말한 교회는 오직 카톨릭 교회 하나였다. 그는 감독에 의해 다스려지는 카톨릭 교회 외에는 다른 교회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감독은 교회에 있다. 교회는 감독에 있다. 감독과 함께 있지 않은 자는 교회와 함께 있지 않은 자이다" 라고 하여 분리된 교회 또는 이단에 가담한 사람이 받은 세례를 무효로 보았다. 이와 같이 키프리안은 교회의 통일성과 감독(교황, 성직자)에 대해 크게 강조함으로써 중세 카톨릭 교회의 근본이 될 사상 체계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교회의 중요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교회 외의 일상 생활과 자연 만물의 신성과 가치를 인정치 않았다. …… 카톨릭교회 곧 가시적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고, 감독 없이는 신앙도 없다는 강경한 주장을 한 키프리안은 아마도 카톨릭의 성직 제도를 확고히 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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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현재 천주교의 기초를 놓은 사람으로서, 사제제도가 그에 의해서 등장했으며, 교회의 감독체제를 수립했는데, 그리고 사람들은 일상 모든 것을 성령을 받은 성직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야 구원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20페이지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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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사죄(고해) 제도의 등장
초대 교회는 일반적으로 모든 죄가 고백(悔改)만 하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다 사해질 것으로 믿었지만 예외가 있었다. 하나님께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교회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세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신앙의 부정(否定)-背敎-과 성적 불륜(姦淫), 자살이었다.

터툴리안은 세례 받은 후에 한 번 회개하는 것은 허용했으나 배교, 음행, 살인의 죄는 제외했다. 그는 두 번째(세례 후)의 회개에는 공중 앞에서 금식하며 통곡하고 장로들 앞에서 굴복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문제는 죄인이 얼마 동안 회개해야 회복되며 누가 회복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죄의 사유권을 교회에, 나중에는 베드로와 교권(성직자)에게 맡겼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감독들은 사유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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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보면 터툴리안은 성령 받은 후에 한번 회개는 허용되었으나, 굉장히 엄한 살인죄는 제외되고, 두 번째 회개는 금식하고 통곡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 말한 투 아웃 제도라는 것이다. 이것을 볼 때 그야말로 참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요.

◈ 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 !!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은 순교했다는 사실인데, 이렇게 순교했다는 그 자체 때문에 그들이 무슨 주장을 했는지 상관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순교자의 피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누가 이런 주장을 했더라? 예수님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없고 말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들이 순교했다는 것이고, 그들의 피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한 내용이 아니고 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시간에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는데, 그 삼위일체 논쟁이 교회사에서 어떻게 꼬이고 꼬여서 나타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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