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89강 / 계21장 1-3 (하늘에서 내려온 신부) 본문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요한계시록-2006/089강-계21장,1-3,(하늘에서,내려온,신부)-rev071202.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요한계시록-2006/089강-계21장,1-3,(하늘에서,내려온,신부)-rev071202.wmv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요한계시록-2006/089강-계21장,1-3,(하늘에서,내려온,신부)-rev071202.hwp
이근호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부
2007년 12월 2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21;1-3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이 세상에는 뭐든지 내가 내 자신에게 가미해야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나에게 아무 것도 하지도 않았는데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는 없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구원받는 것도, 일단 구원받을 당사자인 나에게 내가 뭔가 작업을 가해야 한다는 여깁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구원방식은 참 하나님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인간이 자신에게 아무런 구원의 노력을 시행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이 임해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자들이 등장하곤 했습니다. 이들만큼은 하나님의 선물받아서 구원받았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특이한 자들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개성이 있습니다. 특성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3:19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은혜 줄 자에게만 은혜가 돌아가고 그렇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리 애를 써도 구원될 수 없게끔 일하십니다. 따라서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들은 고백은 이러합니다. “나의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상태입니다.
이런 믿는 자가, 즉 자신의 행함을 일체 이야기가 하지 않는 사람이 실제로 이 세상에 등장한다면 이것처럼 참으로 무서운 일은 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으로 인하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졸지에 ‘구원받지 못한 자’로 폭로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즉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 행함과 열심히 구원을 받고자 시도하는 자들에 불과하며 실제로 전혀 구원된 적이 없는 사람들로 들통 나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신부 만들기’는 위층에서 곧 하늘에서 이루어지지 결코 땅에서, 아래층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신부되기를 아무리 시도해도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신부란 신부의 노력으로 성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먼저 등장되면 그 등장된 남편에 의해 채택된 자만이 신부가 되어 버립니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따라서 참된 신부란 신부 본인의 자질이나 능력이나 의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말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것은 곧 확정된 신분 속으로 신부는 만족하면서 자아를 잊어버리는 상황에 돌입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앞으로 뭘 보여줄거냐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이 자진해서 구원되고자 하는 것은 계속해서 담너머 들여다 보는 허송세월 보내기와 관련있습니다. 1914년 겨울, 카프카 라는 작가는 ‘법 앞에서’라는 짧은 소설을 썼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서 법이란 큰 성 안으로 들어가려는 어떤 아저씨는 문지기로부터 저지 당합니다.
법 안에서 말하기를, ‘아직 들어오지 말라’라는 통보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 시골 아저씨는 법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법 속으로 들어가기를 허락 맡으면서 고대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문지가와 더불어 그 아저씨 둘 다 늙어 죽어갑니다. 법으로 들어가는 성문 앞에서 말입니다.
실은 그 법 안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의 문을 통과하면 또 하나의 문이 가로막으면서 들어가는 것을 허락 맡아야 한다고 주문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인간에게 있어 모든 것이 겹겹이 껍데기 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 해체되어가고 허물어져가는 그런 껍데기를 가지고 천국을 상상하고 구원을 공상해봤자 실제로는 거기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4에 보면, 천국에는 ‘애통하는 것이 없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자신의 구원을 위해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늘 애통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관련된 모든 이들 중에서 여전히 지옥불에서 못 빠져나오고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그 사람을 생각한다면 자기만이 천국에서 편히 쉬는 것이 안스러워 어쩔줄 모르게 됩니다.
이와같이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천국이란 가짜입니다. 참된 천국은 참으로 애통하는 일이 없는 곳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아래층인 이 지상에서 정말 예상못한 천국이 위에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견’과 ‘미래’가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예견, 혹은 예상이란 항상 현재를 고수하고 이 현재를 늘이고 확장시켜서 미래까지 도달되려는 애견을 합니다.
하지만 미래란 이런 것이 아닙니다. 미래란 난데없이 현재를 덮치고 침노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현재 내가 공상한 모든 것이 헛꿈 꾸고 있음이 들통나버리게 됩니다. 이런 경우가 이스라엘에 애굽을 탈출할 때 일어났습니다. 미래에 있을 대규모 심판이 미리 애굽 나라에 일어났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장자들을 죽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엘 집 문턱과 문설주에는 어린양의 피가 묻어있습니다. 그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그냥 넘어갑니다. 이것은 사전에 예수님과 하나님과 협의가 된 사항입니다. 이것을 약속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우리하고 협의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하고 이미 협의가 확정되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의 남편입니다. 집안에서 바깥에서 오는 사람하고 상대할 때는 주로 남편이 나서지 신부가 나서는 법이 아닙니다. 미래가 덮칠 때, 그 미래의 무서움과 용서하심은 오로지 남편되시는 예수님께서 처리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하실 일을 믿습니다. 그리고 남편만을 자랑합니다.
미래에 들이닥칠 일은 감히 우리 인간이 상상치도 못합니다. 우리 인간이란 그저 매일같이 현재에만 몰두하며 삽니다. 그저 자신이 자기에게 계속해서 일을 가미하고 부여해서 거기서 어떤 결과물을 얻어내려고 합니다. 내가 나에게 행동한 그것으로 구원이 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님만 증거할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껍데기 밖에 없는 우리 안에 예수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액체처럼 쏟아들어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 > 요한계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계시록 91강 / 계21장 6-8 (불신자의 운명) (0) | 2010.12.30 |
---|---|
요한계시록 90강 / 계21장 3-5 (하나님의 장막) (0) | 2010.12.30 |
요한계시록 88강 / 계20장 11-15 (최후의 심판) (0) | 2010.12.30 |
요한계시록 87강 / 계20장 7-10 (세상의 축소판) (0) | 2010.12.30 |
요한계시록 86강 / 계20장 5-6 (첫째 부활) (0) | 2010.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