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77강 / 계18장 11-17 (상인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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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상인들
2007년 9월 9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8:11-17
(계 18:11)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계 18:12)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계 18:13)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계 18:14)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계 18:15)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계 18:16)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계 18:17)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인간은 어릴 적 꿈은 늙을 때까지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꿈이란 현실 속에서 천국같은 생활을 해보는 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눈 앞에 수시로 등장하는 현실을 가지고 어릴 때 꿈을 이룰 수 있는 천국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즉 이미 인간들은 각자 나름대로 종교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현실적인 종교가 있는 입장에서 구태어 기존 종교를 꼭 가질 이유는 없는 겁니다. 기존 종교에서 흔히 언급하는 용어들, 즉 빛이라든지, 생명이라든지, 구원이라든지, 왕같은 제사장 신분 같은 것들도 얼마든지 세상 현실 속에서 묶어낼 수 있는 체제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백화점 같은 곳은 오늘날 ‘빛’입니다. 그 안에서 이 시대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품위있고, 기능상 최우수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에게 있어 구원 같은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서 걸치고 다니면 그것이 곧 ‘왕같은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누군가들이 대성 통곡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역상인들입니다. 이들이 우는 이유는, 자신들이 수집한 값나가는 상품들을 소비할 소비처가 망해버린 것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그 자신이 우는 것을 봐서 평소에 무엇에 최종 관심사를 두고 살고 있느냐가 들통납니다.
상인들은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현실 때문에 웁니다. 이것은 곧 자신이 믿는 ‘돈의 종교’가 자신을 실망시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실에서 본인들이 얻고자 하는 것들을 한데 뭉쳐 그것으로 종교로 삼았는데 그 종교가 자신들을 실망시킨 겁니다. 평소에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울게 됩니까?
예수님도 이 현실 속에 직접 들어오셨습니다. 그 분은 아무도 모르게 홀로 산 속에서 도닦다가 구름타고 승천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의 오심은 그 당시 다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의 빛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유일한 성전이었던 그 성전에 가서 제사에 필요한 각가지 시설들을 뒤엎어버렸습니다.
요즈음 말로 해서 유일하게 제일 큰 예배당에 들어가서 강대성을 뒤엎어시고 하시는 말씀이 “교회가 부활이요 생명이 아니라 나 예수가 부활이고 생명이다”고 외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채려놓은 종교 시설이나 종교 사업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직접 우리 자신과 마주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평소에 사람들이 최종 관심사가 단순히 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절대성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상인이 대성통곡을 하는 것은 “나라는 인간은 결코 망해서는 안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렁차게 대외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자신의 절대성을 위하여 인간은 돈이 필요했고, 그 돈 자체를 얻기 위해 이들 상인들은 장사를 한 것입니다. 즉 자신의 신분을 위대한 신분자로 부각시키고 싶은 겁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란, 상품의 가치를 달리 끄집어내는 사회입니다. 원래 모든 사물은 사용가치를 위하여 만들어집니다. 의자란 앉기 위하여 만들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의자를 구입하는 자는 단지 편히 앉고 싶어서 구입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상품의 가치를 달리 봅니다. 사용가치 말고 다른 가치를 챙기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환가치라는 겁니다. 즉 내가 산 의자는 다른 것들과 교환할 때 얼마만한 가치를 발휘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구입하게 되는 겁니다. 이 교환가치는 당장 파악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물건과 교환이 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텅텅 비워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릴적부터 꿈꾸어온 것, 동화의 세계, 천국같은 세계에서 왕자가 되고 공주가 되고 싶은 욕망이 한껏 담겨있는 가치가 됩니다.
이것을 얻기 위한 용도로 교환에 신경쓰게 됩니다. 여기에 돈이 오고갑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이 필요한 돈 자체가 모으기 위한 교환이 이루어집니다. 즉 물건을 구입하면서 그 물건을 어디에 유용하게 쓸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과 바꾸면 돈이 더 생기겠느냐를 염두에 둔 거래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보이지 않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보이는 쓸모성을 눌러버립니다. 돈이 이것을 실현시켜 줍니다. 이런 가치 외에 더 발전하면 상징 가치와 신분 가치로 이어집니다. 상징 가치란 약혼 반지처럼 자신의 정성이나 품위나 위신 같은 것이 가격으로 환산되어 덧붙여지는 말하고, 신분 가치란 특수한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을 배격하는데 드는 비용이 첨가한 가치를 말합니다.
즉 아주 물건값이 고가로 매겨놓아서 아예 서민들은 그 물건을 구입할 엄두도 나지 않게 만들어서 그 물건을 구입한 자들 끼리의 특별한 신분 상승을 확인받게 하는 가격을 말합니다. 즉 이렇게 보면, 이 자본주의 사회는 뚜렷한 방향성을 지닙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위대한 주인공으로 만들어 놓기 위한 무한한 질주를 시도하는 세계입니다. 이것은 비참함 하고는 정반대의 분위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가치를 알려주려 오셨습니다. 들에 핀 꽃이 솔로몬의 옷보다 더 귀한 가치가 있음을 알리려 오셨습니다. 그저 주시는, 무상으로 베푸시는 가치가 인간의 모든 가치 중에 최고의 가치임을 말해주려 오셨습니다. 인간의 노동에 의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서 나오는 가치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신분자임을 알려주려 오셨습니다.
이럴 위해 모든 인간은 비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십자가란 비참함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출생부터 비참함으로 시작해서 죽으실 때도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이 땅에서 낮아지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곧 비참함을 통해서 인생의 본색을 드러내어주시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낮아졌습니까? 지독스럽게 가난한 보다 더 낮았습니다. 십자가 죽기까지 낮아졌습니다.
사람이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밥먹고 사는 것을 선한 것으로, 가난은 악한 것으로 밀쳐버리기 일수입니다. 성경에서 무슨 말이 나와도 다 이런 식으로 자기 종교에 부합되게 해석해버리게 됩니다. ‘배고픔 앞에 장사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부자되려고 할까요? 그것은 어릴 때의 실현은 부자 상태에서나 실현될 빛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우리에게 늘 비참함에 놓여있는 마땅함을 알려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참함이란 지독스럽게 가난한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하고 있는 자기 직업이 결코 자신을 구원하지 못함을 아는데서 오는 비참함입니다. 구원은 십자가의 능력에만 있음을 익히 알고 상황에서 겪는 세상 삶의 비참함입니다.
이로서 성도는 자기를 위한 종교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당연히 비참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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