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54강 / 계12장 7-9 (하늘의 전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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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하늘의 전쟁
2007년 3월 18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2:7-9
(계 12: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계 12: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계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사람대 사람의 관계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펼치면 거기에는 하나님과 사람대 관계로 세상을 봐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약 사람대 사람의 관계가 우선이라고 여기는 사람을 성경은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이어진 것을 성경에서는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대부분의 사람은 죽은 자들입니다.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생활의 중심도 되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들 죽은 자들끼리 모여서 교회라는 것을 만들어 놓으면 그곳은 오락이라든지 유락 단체가 되고 맙니다. 사람은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서는 철저하게 인간의 행함을 배격합니다. 그 안에는 오늘 본문처럼 영적 전쟁만이 담겨 있습니다. 악마가 등장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악마이 이 세상의 주도권을 쥐고 있으면 그 악마를 이기는 자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음을 받아들인다는 말이 됩니다.
이 복음의 안목에서 보면 인간이란 그저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시편 39:6에 보면,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고 헛된 일에 분요한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림자’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에를 들면 이런 겁니다. 10년 전, 어느 장소에 내가 거기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에 와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때 그 장소에 있는 것은 마치 지금의 나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간 공간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 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도 앞 날의 입장에서 보면 그림자만 달잠시 스쳐지나치는 순간인 셈이 됩니다. ‘분요함’ 즉, ‘분주함’이라는 것도 실은 사람들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방어적 소비를 하다보니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즉 사람들은 명예에 죽고 명예에 삽니다. 영적 관계가 아니라 인간대 인간의 관계이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이웃 사람들의 명예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죽으라고 노동하면서 돈을 자기를 위해 투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쏟아부은 돈만큼 행복해지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독자적인 자기들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또 앞서 나가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림자’에 불과한 자들을 마치 ‘살아 있는 중요한 자’들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 명예심을 꼭 돈으로 채우는 것만 아니라 선한 ‘베품의 생활’을 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선행과 선행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생활도 꼭 마약 같아서 거기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와 삶의뿌듯함을 다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런 악마의 세계에서 참으로 어리석은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서로 지혜롭다고 명예를 내세우는 판에 참으로 어리석은 삶의 방식이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의 피의 공로로만 구원받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평생토록 남에게 베풀기는커녕, 혹은 교회에 기여하기는커녕 졸지에 십자가의 피의 능력으로 천국에 도달했다면 이것처럼 황당하고 또 어리석은 방식이 또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어리석음’으로 소위 인간의 모든 지혜를 거부하는 방식으로만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안에만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 없이는 구원받지 못하는 겁니다. 복음 안에는 영적인 전쟁이 담겨 있습니다. 영적 전쟁이 외부에 터져나올 때는 복음으로만 나옵니다.
마치 천장에서 시끄럽게 죄들이 전쟁을 벌리다가 천장이 무너져 방바닥으로 주저앉게 되면 이것은 곧 영적인 세계와 육적인 세계가 혼재되어 있는 양상이 됩니다. 이러한 영적 역사는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는 ‘약속의 땅’이라는 한정되어 있는 땅에서 ‘전쟁 양상’으로 보여주어 있습니다.
시편 8편에 보면, 하나님은 젖먹이 아이가 적들을 이기는 내용이 나옵니다. 과연 인간의 힘으로 이겼겠습니까 아니면 인간의 지혜로 이겨겠습니까? 오로지 참으로 어리석게 보이는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이긴 것입니다. 구약의 약속의 땅에서의 전쟁은 단순히 사람대 사람의 전쟁이 아니라 신과 신의 전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말입니다. 다른 신을 믿으면 저주받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신은 결코 ‘어리석은 복음적 방식’으로 전쟁에 나서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년 다윗이 키가 3m 3cm 나 되는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소년 다윗의 능력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쟁 방식은 이미 하늘나라에서 승리한 바를 그대로 지상에서 확인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사람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악마와 그 사자들을 상대로 벌리시는 전쟁입니다. 이 전쟁통에 우리 성도들이 부름받은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식이 아닌 참으로 어리석은 방식으로 승리를 낳는 하나님의 방식에 감탄하라는 겁니다.
여호수아 10:11-12에 보면,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여 벧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우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렇게 하나님께서 직접 붙이시는 전쟁은 참으로 인간들의 안목에서 볼 때 ‘어리석은 방식’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안목을 가진 ‘살아있는 사람의 세상 보기’입니다. 육적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의 역사란 인간들의 불굴의 의지로 일구어낸 영웅적인 업적들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안목으로 보면, 세상은 양과 염소, 선인과 악인,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 등등으로 매정하게 둘 로 나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영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은 비록 세상적으로 무서운 권세들 앞에서 끌려가는 일이 생기더라도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성령께서 이야기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우리 지혜나 힘으로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늘 망하는 것을 기정 사실로 여겨야 합니다. 자기 유리한 쪽으로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야지만 우리 안에 계신 분을 우리 자신들이 가로막는 격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영적 전쟁을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이 역사 안에서 찾아볼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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