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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50강 / 계11장 15-18 (그리스도의 나라)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50강 / 계11장 15-18 (그리스도의 나라)

정인순 2010. 12. 30.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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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그리스도의 나라

 

2007년 2월 18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1:15-18

 

(계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계 11:16)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 11:17)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계 11: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백은 이미 천국에 도달해서 들어가 사시는 분들의 고백입니다. 따라서 이 고백과 일치되는 고백을 내놓지 못한다면 천국에 합류되지 못할 자인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고백을 분석하면서, 이 지상에서 전혀 쓸모없고 인정받지 못하는 사고방식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고백은 핵심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공로로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지상에서의 삶이란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가치를 축적시키느냐에 따라 빛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즉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은 다름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인간 되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을 이야기할 때 이렇게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신의 속성이 인간들마다 다 들어있는데, 신의 속성을 많이 품고 있는 자는 점점 더 천사에 가까운 사람이고, 신의 속성을 적게 품고 있는 사람은 점차 악마에 접근하는 자들이라고 분류합니다. 그래서 결국 천국과 지옥이란 그 사람이 품고 있는 신의 가치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땅의 삶을 살면서 사람들은 자신만이 가치 챙기기에 여념이 없게 됩니다. 자기 만의 가치란 자기가 행하는 ‘유용한 노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유용노동’이란 다른 사람들이 탐을 낼만한 쓸모있는 가치를 뜻합니다. 예를 들면, 영어해독 능력이 뛰어난 사원은 회사에서 탐을 냅니다.

 

그 사람의 가치를 얻고자하고 그 대신 돈을 월급으로 주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본인이 갖고 있는 가치와 돈과 맞교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돈으로 그 사람은 양식을 사서 먹고 살게 됩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땅에서 진리로 통하는 안목입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이런 사고방식 밖에 아는 게 없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교회를 찾고 신을 찾고 예수를 찾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윤리적 노력으로 신으로부터 따낼 것은 따내겠다는 심보로 교회를 찾게 됩니다. 목적인 순전히 이 땅에서 자신의 가치를 축적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자의 입에서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24장로들의 고백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24장로들의 고백과 오늘날 땅의 사람들의 신앙고백과의 현격한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24장로들의 신앙고백 안에는 ‘땅에 대한 간절한 멸망 요청’이 담겨 있다는 겁니다. 즉 24장로들이 믿는 예수님은 ‘땅을 멸망시키는 주님’으로서의 신앙입니다. 땅을 용납한다든지, 그냥 못 본척 넘어가주는 그런 그리스도가 아니라, 땅의 멸망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인 것을 아울러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24장로님들의 고백과 일치되는 고백을 하는 자들 고백 속에는 반드시 ‘이 세상멸망에 대한 타당성 있는 이유’가 내포되어 있는 고백이어야 하는 겁니다. 땅을 멸망시켜 달라는 것은 남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과 반성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이만하면 됐다’하는 안일함이 찾아오게 되면 그 사람의 입에서는 ‘땅의 멸망을 반기는’ 그런 신앙고백은 중지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땅의 멸망을 반기도 기정 사실화 할 수 있으려면, 평소에 땅의 인간들이 무엇이 쫓기듯이 살아가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 전체의 이야기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즉 윳놀이에서 말하는 ‘또’ 아니면 ‘모’입니다. 결코 착하고 선한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천국에 입성 할 사람이지 아니면 못할 사람인지는 그 사람의 자질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그를 책임지느냐로 판가름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왕 노릇’이라고 하는 겁니다. ‘왕초’ 노릇 하실 분에 의해서만 천국에 입성이 된다는 선언입니다. 천국이란 인간을 위한 나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왕되심을 증명하기 위해 구성되는 나라이기에 거기에 입성하는 자들은 오로지 ‘예수님이 왕되심의 흔적과 증거물’로서만 입성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왕노릇을 우리를 상대로해서 전쟁을 벌이시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 인간은 알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늘 쫓기다시피하면서 매일매일을 살아갑니다. ‘나는 꼭 이런 식으로 밖에 살 수 없었는가? 다른 가능성 있는 삶을 내가 선택할 수 없었는가?’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매일같이 인간은 자신을 후들겨 팹니다. 계속 독려하고 격려해야만 하는 겁니다. “너 그것밖에 못해! 그래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남겠어”라는 식으로 자기가 자신에게 매섭게 매질을 해가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후회없는 인생, 작품같은 멋진 인생을 꾸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혹독하게 다룹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다보니 현재 자신이 쥐고 있는 모든 것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이런 자기 노동의 생산물을 스스로 멸망시켜 달라고 하나님께서 요청하는 신앙고백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귀하고 아깝고 소중하게 여겨질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개인적인 자질과 수완을 따져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2:2-3에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가름은, 직접 우리 인간의 행함을 따지시는 것으로 결정지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따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내세워놓으시고서는 그 분의 하시는 일과 공로에 대해서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가지고 판정내리십니다. 그 분이 하시는 일이란 바로,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도 믿게 하시는 일입니다.

 

새로운 왕으로서 오시어서 우리는 자신의 의로움 속으로 집어넣으시고서는 악마나 그 누구로부터 우리 자신들이 정죄당하지 않도록 조치하시는 일도 하십니다. 이 일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는 이처럼 예수님의 공적을 놓고서 악마와 한판 승부를 벌리시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런 현실에서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반대한다면 당연히 저주받는 것이 지극한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미 천국에 입성한 24장로들의 신앙고백입니다. 과연 우리의 신앙고백이 이 분들과 일치됩니까?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우리의 의로움과 가치가 깨어지는 죽음을 겪에 하옵소서. 그것조차 주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