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37강 / 계8장 1-6 (고요 속의 구원)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37강 / 계8장 1-6 (고요 속의 구원)

정인순 2010. 12. 30. 14:45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요한계시록-2006/037강-계8장,1-6,(고요,속의,구원)-rev061112.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요한계시록-2006/037강-계8장,1-6,(고요,속의,구원)-rev061112.wmv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요한계시록-2006/037강-계8장,1-6,(고요,속의,구원)-rev061112.hwp

 

 

이근호

 

고요 속의 구원

 

2006년 11월 12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8:1-6

 

(계 8:1)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계 8:2)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계 8: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계 8: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계 8: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계 8:6) 『일곱 나팔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예비하더라』

 

교회들은 성도를 쉽게 부르고 가볍게 규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성도란 철저하게 가려짐을 당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도란 그 기도가 어린양의 보좌까지 당도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자를 말합니다. 이처럼 기도가 어린양의 보좌까지 당도되려면 어린양께서 지상에서 하시는 일에 부합되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즉 ‘어린양’의 보좌란, 예수님께서 희생되어야 하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일을 하실 수 밖에 없었음을 지속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원천지가 됩니다. 성도의 기도가 이 어린양의 보좌 안에 합류된다는 것은 그 기도가 일어나게 된 일들이 ‘어린양’이 당하셨던 일과 같은 뜻에서 이루어졌던 일임을 말해주는 것이 됩니다.

 

요한계시록 12:11에 보면,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들의 기도는 이 땅에서 좀 더 살아남기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주님께서 저를 통해 주님만을 드러내기 위해 죽이신 죽음입니다’라는 뜻에서 올리는 고백적 기도였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기도란 자기를 더욱더 대단한 존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이미 주님의 소유가 되었기에 살든지 죽든지 주님이 알아야 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도합니다. 즉 ‘어린양’의 취지에 합당되고 부합되는 기도합니다.

 

여기에 비해서 성도가 아닌 자들의 기도는, ‘자기를 더 살리고, 자신의 가치를 더높이고자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아닌 자의 기도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잘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됩니다. 왜냐하면 다같이 더 살아남겠다고 활동들을 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예를 들면, 갓바위에 올라가서 부처상 앞에서 1천번을 절을 하는 것을 세상사람들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자식이 또 재수한다든지, 병이 들었다든지, 가정에 우환이 생겼다면, 1천번이 아니라 2천번, 3천번이라도 절하려면 할 용의가 되어있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절하는 사람들을 동정하고 격려해줍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기도하면서 주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기 위해 기도한다면 그 누구도 이해를 못하고 욕할 것입니다.

 

바로 이처럼 이 세상에서는 ‘어린양’의 취지에 부합되는 기도가 환영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들만이 구원됩니다. 이들 자만이 어린양이 자신에게 어떤 작용을 하셨기에 본인이 구원되었느냐를 압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즉 ‘어린양’의 구원은 이런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 일도 하지 않더라도 구원이 된다’입니다.

 

왜 ‘사람이 아무 일도 하지 않더라도 구원이 될’까요? 그것은 십자가 자체가 저주의 십자가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를 저주하는 이유와 더불어 심판의 권능이 개시됩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기 행위를 내세우면서 구원을 요청한다면 그 사람은 십자가의 저주에 의해서 저주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기도를 해도 자기를 위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인간들을 향하여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있어야 하는 지’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이름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늘의 뜻이 나에게 무너질 듯이 떨어져 주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를 되어달라고 기도해야 된다는 겁니다.

 

인생이란 자아를 잊는 여행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영광이란 풀의 꽃 같아서 일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비록 풀에서 꽃이 활짝 필 때도 있지만 그 꽃은 곧 져버려야 되는 꽃이어야 합니다. ‘꽃이 져버린 풀’, 바로 이것이 영원한 말씀 앞에서의 우리의 진면목입니다. 꽃이 져야 풀이 풀다운 풀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고요’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고요’란 하나님께서 한참 심판 중이라는 겁니다. 친히 심판하시기에 인간들이 왈가왈부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인간들의 뜻이 개입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주는 표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일하시기 위해 등장하면 인간들은 그 앞에서 잠잠해야 합니다.

 

인간들의 개입이 차단되고, 남은 것은 하나님과 주님 뿐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의 도움으로 혼자만의 기도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셨습니다. 그 기도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에 나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엿보아 보면, 거기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이 세상을 움직이는 모든 권세, 즉 바퀴벌레 하는 움직이는 것과 낙옆에 떨어지는 그 모든 움직일 수 있는 권한에 제게 주신 것은, 이 세상을 위함이 아니라 이 세상 중에 있는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자를 구원코자 하는 일인줄 제가 받습니다.

 

제가 그들을 지금 당장 하늘나라로 데려가지 않고 이 지상에 그냥 남겨두는 것은 그들을 통해 모든 것이 다 나 예수님을 위한 세상 변화임을 알리기 위함인 줄 압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도 거룩하게 되어 지금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어 이 하늘나라에 함께 살게 되는 결과를 위해 제가 이 십자가의 길을 가겠습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좀 더 보충하자면 요한복음 6:37-39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구원받은 자의 협조나 의견이 완전히 배제된 상황을 원천으로 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왜 구원이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만 형성되는 공로로만 구원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순종’ 때문입니다. 진정한 순종은 늘 새롭게 계시주시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상대로 지속적으로 일을 시키시고 또한 그 지시받은 분이 온전히 다 성취되어야 그 결실이 맺어지게 마련입니다.

 

사무엘상 15:22에 보면,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제사와 순종을 놀랍게도 섞일 수 없는 대조되는 개념을 마주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 할 수 있는 일과 참된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대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께서 부리는 존재이지 결코 그 인간의 행함이 구원의 가치로 삽입 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인간들은 비록 하나님께서 무슨 지시를 내려도 그 지시대로 따랐다고 여긴 것이 항상 자신의 업적이나 성과로 곱게 쌓이게 마련입니다. 진정한 순종을 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 낚시대로 건지는 식으로 사람을 건지시는 것이 아니라 직접 죄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참다운 순종으로 보이시고 구원을 근거를 마련하는데 있어 하나의 결함도 없고, 더 추가시킬 필요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다 이루어내셨습니다. 마지막 마무리까지 실수가 없으십니다.

 

바로 이러한 완성된 구원이 있기에 참 성도들은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이 이 성도가 당했던 것이 빌미가 되어 세상에 대한 심판 감행입니다. 고요가 끝나고 난 뒤, 본격적으로 저주의 심판이 지상에 벌어집니다. 세상에서 살고자하는 자는 절망에 빠집니다. 비현실적으로 살아온 대가가 결국 이런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기에 자기 의를 따로 챙지기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