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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35강 / 계7장 9-12 (어린양의 구원)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35강 / 계7장 9-12 (어린양의 구원)

정인순 2010. 12. 30.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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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어린 양의 구원

 

2006년 10월 29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7:9-12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계 7: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 7: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오늘 본문에 ‘어린 양’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어린 양’이란 희생된 양을 의미합니다. 즉 참 하나님은 그냥 인간에게 뜻을 전달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린 양’을 앞장세워서 나타내십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흠없는 분의 대신 희생이나 대신 죽음이 아니면 참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바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린 양의 희생과 죽음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서 구원해 주십니다. 이것은 ‘죽음 속’에서의 교제입니다. 이러한 특별한 참 하나님의 나타내심은 구약 때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나타내셨지만 신약 시대에 와서는 이방인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복음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비켜서 말씀하시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지금도 참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만 자기 백성과 교류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앞장 세워놓고 다가오시게 되면 모든 인간은 그 앞에서 비로소 이미 죽은 자로 살아가게 됨을 압니다.

 

이것은 구원 문제에 있어, 이미 죽은 자가 아무리 힘써도 달성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순전히 어린 양이 친히 완전히 담당해야 될 자신의 과제이며 자신의 업무입니다. 구원 문제에 대해서 인간이 관여하거나 협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어린 양’을 비켜가서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럴 경우에는 인간은 죽은 자가 되지를 않고 독자적인 자기 영역을 인정받겠다고 나서게 됩니다. 독자적인 자기 영역을 갖게 되면 그 때부터, 자기 만의 거룩, 자기 만의 의로음, 자기 만의 ‘하나님의 형상 본받기’ 같은 것이 수립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이라는 것이 인간 본인이 따 내어야 될 과제로 등장합니다. 인간들이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구원이 성사 되느냐 마느냐가 결정지어 버린다는 겁니다. 여기서 성경의 모든 개념들이 왜곡됩니다. 변질될 뿐만아니라 반대로 나아가게 됩니다. 어린 양을 통해서 성경을 봐야 할 것을, 자기 스스로 자기 구원을 책임져야 한다는 식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거꾸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면서 천국으로 가고 있다고 선전하게 되어있고, 하나님께 축복받은 것을 저주받았다고 저주하고, 반대로 저주받은 것을 마치 축복받았다고 거꾸로 증거하게 됩니다. 몇 가지 예를 들게 되면,

 

어떤 여자는 자신이 여자인 이유가 창세기 1:28에 근거해서 자식을 번성케 하는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때부터 이 여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즉 자식을 배태하므로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리고 구원받은 자의 면면을 보이겠다나고 나서게 됩니다. 인위적으로 불임시술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물론이요 더나아가서 시집도 아니가고 산아제한하는 모든 주위의 사람들을 악마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정죄합니다. 그리고 본인은 그저 힘 닿는대로 자식 생산에 박차를 가합니다. 이런 모습은 성경을 어린 양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는, 부모에게 공경하면 사는 날 동안 복을 받는다는 성경을 구절을 중심으로 성경 전체를 해석합니다. 시도 때를 막론하고 부모에게 전화하고 찾아가고 용돈 드리고 하면서 자신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 큰 거부가 될 것이라고 꿈을 꾸고 있습니다. 만약에 자신의 사업에 약간의 차질이 나도 이것은 자신이 평소에 부모에게 죽도록 충성하지 않는데서 나온 벌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것 또한 성경에 나오는 축복이나 구원을 어린양 중심에서 보지 않았기에 나온 발상입니다.

 

또 다른 예는 흔히 교회에서 나오는 모습니다. 교회에 충성하고 교회의 권위자에게 복종해서 교회에 헌금을 많이 바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징계와 저주를 받는다는 주장들입니다. 이것도 성경을 어린 양 중심으로 보지 못했기에 엉뚱한 식으로 자기 욕망을 정당화한 더러운 열매입니다.

 

어린양 중심, 즉 십자가 중심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이미 우리 인간은 죽은 자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곧, 나는 이미 죽은 자라는 겁니다. 단지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는 식이기에 비로소 살게 되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즉 ‘나도 살고 예수님도 내 안에 살고 하는 방식’은 없고,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방식’ 이외에는 진정 산다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죽었고’가 이렇게 십자가 앞에서 확정 되었으면 더 이상 ‘나의 것’이라는 것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죽은 자가 무슨 ‘자기 것’이라는 것을 가질 수가 있더란 말입니까!

 

나의 거룩이나 나의 의로움이나 나이 말씀 지키기나, 나의 사업체, 나의 가정, 나의 교회, 나의 국가. 나의 구원에 대한 소망 같은 것도 허용될 수 없습니다. 나의 의로움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양 되시는 예수님의 의로 구원되는 겁니다. 왜 구원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야 할까요?

 

처음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세상이었습니다. 거기에 그 어떤 인간의 협조나 인간의 도움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 기념물이 에덴동산에 있었는데 그것이 생명나무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기념을 흠집을 내고 말앗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연히 인간이 추방했어야 합니다. 생명나무와 완벽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난 뒤 그 생명나무의 완전함을 이 지상까지 밀고 들어선 겁니다. 이로소 인간은 자기만의 것이라든지, 자기 만의 신앙 같은 것이 허용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단지 집단 죽음과 집단 되살아남 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너온 것을 집단 세례로 보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저 죽음 속으로 들어간 겁니다. 뒤따라온 애굽 군사들은 다 죽었습니다. 여러분 구원은 장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란 실제로 다 죽이고 실제로 자기 백성을 살려내는 식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자신이 이미 죽은 자임을 말하기 위해,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자기 세계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감사와 영광은 오로지 ‘어린 양’이 하신 일로만 돌리는 그런 집단 구원받은 자의 광경이 나옵니다. 그들 사이에 그 어떤 경쟁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즉 인생에서 그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그것으로 감사가 끊어지는 법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주님 안에서 이미 죽어있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불쑥 그리스도로 인하여 출몰하는 식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