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부터 시작하겠습니다. 21장의 이야기는, 요한복음 1장에서 20장까지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자신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한다면, 여기 21장 마지막장은요 참 재미있어요. 이게 뭐냐하면 [상실]!. 그게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했는데, 요즘 우리 같으면 교회를 한 15년 다녔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죠. 가을철에 길가에 낙엽 떨어지면, 모든 게 우수수 저버리면, 낙엽은 져서 가버리고 남는 것은 나만 남잖아요. 나만 남아요. 그죠? 그러면, 평소에 낙엽이 좋으니 꽃잎이 좋으니 해도 세월따라 다 없어져버리면 결국은 제일 좋고 제일 중요한 게 누굽니까? 나밖에 없잖아요. 나밖에. 그죠? 나밖에 없단 말이죠.
뭐, 예수님이 좋으니, 예수님의 말씀이 좋으니 해도 결국 그거 다 떨어지면 달랑 남는 게 뭡니까? 나 밖에 안남거든요.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잖아요. 이게 21장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고 저렇게 하시고 예수님이 좋은 말씀 하시고 해도, 예수님이 떠났다보다도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이 자기가 떠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 있는 상태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21장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과 늘 같이 있었고 심지어 3년동안 동고동락했고 잠도 같이자고 식사도 같이하고 시험과 고난과 함께 (욕을) 들으면서 살았어요. 요한복음 7장에 보면, 49절에 (요 7: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 즉 예수님과 이 주님을 따르는 집단 그 집단들은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는 이런 욕까지 먹으면서 예수를 따랐지만, 그런다고해서 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그렇게 딱 붙어서 살았느냐 그 말입니다.
예수님이 곁에 있어도 결국 마음은, 세상에 남는 것은 결국 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 밖에 없다. 교회 한 30년 다녔다. 목사님이 좋더라, 장로님이 좋더라, 집사님이 좋더라, 하지만 그 목사님 다른 교회가고 그 장로님 이민가버리고 그 집사님 부도나 사라져버릴 때 결국 뭐 속았다라든지 뭐 배신당했다라든지 그 이야기보다도, 원래 인간이란 그런 것 아니겠어? 이런 느낌입니다. 원래 그 때는 교회에서 재미나게 놀러가기도 하고 성경공부도 하고 좋았는데, 하지만 뿔뿔이 뿔뿔이 헤어지면, 뭔가 손해보았다는 생각은 안들고, 이제 본래 내 자리로 왔네. 그죠? 본래 그래 그래 그거야. 그거 뿐이었어. 이게 인간의 진면목이 아니겠어요?
이것보다 더 확실한 인간의 모습이 있겠습니까? 결국은 나만 제일 중요하고 소중하고 나머지는 하나의 귀걸이나 어느 장식품처럼 왔다가 스쳐가는 (어디 노래 가사 같다^^), 왔다가 스쳐가는, 왔나? 언제 이별할지 모르고. 이별한 사람 또 만나지만, 그 만남이 전부가 아니고 또 그 사람도 훌쩍 떠나버리고. 밀물처럼 밀물썰물이 내 발목을 물이 적셔도 해변가에 서있는 것은 결국 나 밖에 없잖아요. 나. 결국은 나로 돌아간다. 결국은 나. 요한복음 21장에서 인간은 결국 자기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이게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참~ 중요하죠. 예수님께 들었던 그 좋은 말씀도 낙엽과 함께 다 사라져버리고. 예수님 떠나면 다 떠나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하늘나라 권세주겠다고, 천국가겠다고 했던것도 하나의 해픈닝 이었고, 하나의 에피소드였죠. 젊은 날의 오기, 한 때의 열정, 열심. 이런 껍데기 같은 것들. 환영이고 환상이고 망상들. 예수=망상, (오늘 좋은 말 많이 한다) 예수=환상. 남는 것은 나. 물론 내 자식있고 내 남편있지만, 이 사람들이 언제 떠나버리면 역시 떠나고 떠나도 못 떠나는 것은 결국 나. 나는 나를 안떠나잖아요. 나는 나한테 충실한 개(dog) 아닙니까? 그죠?(^^)이 세상에서 가장 충성된 개는 나밖에 없잖아요. 내가 나를 잘 알고, 내가 나를 잘 사랑해 주고, 내 사정 내가 제일 잘 알고... 이런 것들이 옆에 있더라도 언제 훌쩍 떠나면 그만아닙니까? 자식도 나중에 커서 결혼하면 남이고, 죽을 때도 결국 마지만 관속에 함께 하는 것은 [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요한복은 1장에서부터 쭉 나오는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하늘이 갈라지고 세례주고, 2장에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3장에 니고데모가 찾아오고, 4장에 사마리아 여인이 찾아오고, 5장에 베데스타 못가에서 병자가 나았고, 6장에 오병이어 (기적이)일어나고, 7장에 예수님이 샘물떠가지고 성령이 이같이 오리라 했고, 8장에 간음한 여인이 그냥 용서받고, 9장에 날 때부터 소경이 눈을 뜨고 하는 이런 것도 내 추억의 앨범에 들어가는 한 장의 사진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그 사진 라이터(불)로 태워버리면 끝나는 거죠. “과거에 즐거웠다” 가 지금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죠. 교회다니고 성경공부할 때 그 때 참 즐거웠다. 과거에 부곡동에서 성경공부할 때 그 때 참 좋았다. 하지만 그 때 좋으면 뭐합니까? 지금도 계속 좋아야 하는데... 지금 그런 즐거움이 없다면 남는 것은 나라는 덩어리 밖에 없죠. 아무리 나를 풍성하게 만들고 나를 더욱 더 향상시켜도, 나를 거듭나게하기 위해서 온갖 시도를 하고, 나에게 성경말씀을 (물)바께스(양동이)로 뒤집어 씌우듯이 해도 백날해도, 툭툭털고 누구한테 실망 한 번 더 당하고, 주위에 일이 꼬인다든지 가족중에 누구와 사별한다면, 그동안 교회다닌 그것도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 꽂혀있는, 고등학교때 끼워넣었던 다 부스러진 낙엽에 지나지 않는다.
이게 뭐냐? [상실]이예요. 상실. 상실은 사람을 분노하게 합니다. 그리고 굉장히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예수님과 함께 보낸 3년 세월이 그 게 나를 전혀 다른 나로 바꾸지 못하고 3년전에 예수 만나기 전이나 지금 후까지 전혀 똑같이, 오히려 3년동안 세월만 낭비하게 만들었던 그 예수에 대해서는 분노, 분노와 더불어서 억울하죠. 3년의 그 빠진 누락된 것은 누가 보상할 겁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어버리고, 가끔은 나타났다 코빼기도 안 내미는데요. 없는데요.
전에 예수님과 같이 모일 때는, 쉽게 말해서 계모임할 때는 계모임하며 찌짐이(부친개?)지져먹고 잡채 해먹고 좋았지만, 그 같이 찌짐, 잡채 해 먹었던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시고 뭐 어디갔는지 가끔 툭툭 튀어나오고 사라지고 하니까 내 손에 붙잡히지 않지 않습니까? 내 손에. 내 손에 예수가 아니잖아요. 여기서 중요합니다.
[나]라는 것이 영원토록 나가 지워지지 않는다면 이 나가 내 뿜는 모든 것은 뭐냐하면 소유, 획득이예요. 예수가 내 손에 잡히는 예수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떠나는 예수라면 나는 병신되는데요. 나는 아주 바보되는데요. 예수님께서 ‘아 나는 너를 구원한다’ 했으면 나를 구원하는 데 까지만 필요한 게 아니예요. 나를 구원한다는 예수님이 내 손에 딱 잡혀야 되요. 딱 잡혀서 내가 필요할 때마다 부려먹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21장에서 예수님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요. 그렇다면 그동안 소유하리라 여겼던 내가 뭔가 예수님을 소유해가지고 맘대로 부려먹고, 내가 죽을 때도 천당에 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내 소유만든다, 생각했는데, 그 소유가 안 될 때의 상실감. 그 분노와 그 억울함. 그동안 성경공부한 것은 뭐가 되어 버려요? 아무 소용없잖아요. 나만 달랑 남았잖아요.
그러면 모든 것이 결국 처음부터 하나의 내 눈을 가렸던, 내 눈을 혼미케 했던, 하나의 꿈덩어리였지요. 여러분, 꿈은 항상 꿈이예요. 꿈은 그냥 꿈일 뿐입니다. 꿈이 현실이 되는 법은 없어요. 그렇지만 꿈 꿀때에는 기분이 좋아요. 피터팬처럼 막 날아다녀요. 하지만 꿈은 끝나면 곧 즐거움도 끝나는 겁니다. 예수님도 좋지만 예수님이 나를 떠난 이상 이제는 예수 좋아하면 안되요. 나는 나를 좋아해야 되요. 왜? 남는 것은 나 밖에 없는데, 나라도 나를 좋아해야 해요. 안그러면 사람 미칠지경인데요.
야고보서 한 번 봅시다. 그런데 이 요한복음 21장이요, 정말 소위 오락으로 놀이로서 예수믿는 것을 완전히 까발립니다. 야고보서 1장 11절 (약 1: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이 말씀이 어느 말씀과 비슷하다고 느껴집니까? 이사야보면 나와 있죠. 인생이란 풀의 꽃같으니 꽃이 떨어지고 풀의 영광도 떨어지지만 무엇은 영원히 서리라? 하나님 말씀은 영원하리란 말씀이 나오죠. 그죠? 자 한 번 물어봅시다. 꽃이 활짝 필 때 그것이 꽃의 전부입니까? 언제 꽃의 진짜 본질은 들어납니까? 꽃이 질 때예요.
성경말씀은, 하나님은 이겁니다. 꽃이 활짝 피게 해 놓고 꽃을 지게 해 버려요. 접히게 하거든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꽃이 활짝 필 때가 진짜 꽃의 진면목이다,라고 생각이 들다가 꽃이 져버리면, 어? 이거 아무것도 아니네 하면서 돌아서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네 인생이란 것이요, 활짝 필 때에 그것이 나의 진면목이 아니고, 내가 질 때, 내가 꼴아박을 때, 완전히 밑바닥에 내려갈 때가 원래부터 우리의 진면목입니다.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안하고 내가 꽃이 활짝 폈는데, 지려고 하니까 나는 꽃을 피우지 못하지만 뭔가 괜찮은 남편 만나서 또는 자식을 잘 키워가지고, 져버린 내 꽃을 대신할 만한 꽃을 피우는데 또 몰두합니다. 특히 여성분들 나이 좀 많아지면 (주름?)땡기고 (코?)세우고 (턱?)갈고 난리 아닙니까? 견적내보면 많이 나오거든요^^. 왜 이러냐하면 지는 꽃이 되기 싫은 거예요. 지는 꽃을 붙잡아 매어서, 나 꽃 안진다. 20대 활짝 피었던 그 모습이 내 진짜 모습니다, 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그거는 발악입니다. (우리 00이 아기? 발악하듯이 발악입니다) 그저 그 때 활짝 폈던 내가 진짜 나다,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서 그 때 사진들고 다니면서 이것이 증거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억지로라도 우리를 지게 만듭니다. 꽃이 지게 만듭니다. 왜 꽃이 지게 만드느냐? 이게 요한복음에는 안나오고 힌트만 나오고 빌립보서에 나옵니다. (빌립보서) 2장에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 동등됨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그 다음 어떻게 되느냐하면 보통사람 정도가 아닙니다. 죽기까지 종노릇을 해서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노예생활, 종노릇, 낙엽 쓰는 사람쯤 되겠죠. 아무튼 사람들이 아버지 직업이 뭐고? 환경미화원이요. (라고) 차마 말 못 할 처참한 직업 있잖아요. 처참한, 제일 처참한 그것보다 더 처참하게 가는데 그게 뭐냐?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자 이제부터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가 뭐냐하면 상실입니다. 상실. 상실입니다. 소유가 아니예요. 소유의 반대말입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십자가에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예수님; 인간들아 이거 갖고 싶지? 인간1; 예, 갖고 싶습니다’ 예수님; 너 직업이 뭔데? 인간1; 저 환경미화원입니다. 부끄러워 미치겠습니다. 더 좋은 직업을 갖고 싶습니다. 좋은 직업이 있으면 이 직업을 버리겠습니다.
예수님; 너 지금 지금 몇 평짜리 집에 사노? 인간2; 지금 20평에 삽니다. 예수님; 뭐하고 싶노? 인간2; 50평짜리에 살고 싶습니다.
소유하고 싶습니다. 획득하고 싶습니다. 모든 인간이,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그 소유가 나에게 활짝 피게하는 꽃을 소유하고 싶은 거예요. 이 풀이 자기의 풀 값이 아니고 꽃을 소유하고 싶은 거예요. 나는 영원한 활짝 핀 꽃이고 싶어하는 거예요.
참 이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합니다. 꽃은 시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왜 시들어야 되는가? 말씀이 영원함을, 말씀이 영원하지 뭔가 소유하려는 너는 시들어야 된다는 거죠. 다시 한번 해봅시다(다시 한다 해 놓고 보면 안 나온 거 한다니까....) 요한복음 21장은 1장부터 20장까지 예수님한테 들었던 것, 같이 경험했던 것, 놀라운 기적들, 심지어 오병이어의 기적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기적들이, 경상도말인지는 모르지만 다 모두 도루목이다. 도루목이라는 것이 말짱 다 헛되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듣고 기적도 동참하고 심지어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는 살아났잖아요, 거기에 제자들도 있었잖아요. 나사로 되살아날 때 제자들을 몰고 갔습니다. 제자들이 나사로 살아난 것도 보고 소경이 눈 뜬것도 보고 물이 포도주된 것도 다 봤지만, 다 그거는 지나간 하나의 앨범 속에 있는 퇴색된, 색깔이 날아가버린 옛날 고등학교 시절의 하나의 사진에 불과합니다. 다 소용없는거예요. 종교라는 거, 신앙이라는 거, 이거 다 소용없는 겁니다. 그 때는 마치 신앙이 철철 넘치는 것 같지만, 그때는 지금 죽어도 천당가는 것 같지만, 그러나 다 지나가면 남는 것은 뭐밖에 없습니까? 나, 나 밖에 없다. 이것이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공부 안하면 교회 백날 다녀도 전부 다 자기 오락이예요. 취미생활이예요. 옆에 큰 교회 있으니까 나니는 거지 옆에 만약 두세명 모이는 교회 있으면 가지도 않을 거예요. 왜? 큰 교회이기 때문에 친구가 많으니까 가는 거지요. 이러한 그 종교라는 허상 허망한 것, 그런 것을 전부다 완전히 폭로시키기 위해서 주님은 제자들 손에 놀아나지를 않습니다. 너의 실상을 알아라. 실상을. 네가 백날 예수님이 좋다, 그 때 예수님이 함께 있었을 때가 그립다 해도, 막상 인간은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죽을 때도 자기만 생각해요. 나머지 외부에 있는 것들은 뭐냐, 소유할 만한 것들이고 소유가 안되면 그냥 포기해야 할 것들이고, 결국은 남는 것은 나라는 이 주인공, 이것만 남고 나머지는 다 장식품입니다. 엑스트라, 장식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그걸 누가 아십니까? 우리 예수님이 아십니다. 베드로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몇 번 회개했다고요? 회개해도 소용없습니다. 장모가 나아지고 자가기 물위를 걸어도 소용없고 한 때 경험했던 거예요. 한 때 경험이지 지금 경험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지금 계속되는 경험이 아니라면 한 때 그냥 추억에 불과하지, 추억이 나를 밥 먹여 살리는 게 아니잖아요. 추억이 지금 나를 살게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러면 추억이라는 것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죠.
결국은 예수라는 분은 나에게 있으나 마나 한 분이예요.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고. 남는 것은 나. 결국은 나는 나에게만 돌아와요. 하나의 본능같애. 고무줄 아무리 당겨봐야 소용없습니다. 한 순가 고무줄을 놔버리면 당겨진 긴 고무줄이 원위치되어 나를 탁 칩니다. 그래 믿을 놈은 니밖에 없어. 결국 나는 나에게 돌아온다니까요.
아까이야기한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이 다 떠나버리면, 떠나가도 괜찮아요, 왜? 나는 있으니까. 나만 남아있으면 그런대로 또 살아요. 그래서 남자보다 여자가 오래살아요. 남자보다 여성이 더 오래사는 이유가, 수명이 점점 벌어져 10세정도 차이가 나는데, 여자들이 오래사는 이유는요, 남자들은 철이없게도 아내한테 의존하지만, 여자는 결혼한 지 6개월만에 남편을 의존하지 않습니다. 남편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의존하지 않습니다. 이미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앙케이트 조사결과 지금의 남편하고 살사람은 5%도 안된답니다.
남편은 지금의 아내하고 살 사람은 60%가 넘어요. 왜? 잘 부려먹었거든요. 그래서 남자들은 현재 아내하고 헤어질 마음이 없다. 왜? 그동안 부려먹는다고 길들이는데 수십년 보냈는데 왜 또 새 여자만나가지고 길들이는데 또 수십년 걸리는데 왜 그 고생을 하느냐 말이죠. 여성들이 오래 사는 이유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나]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일찍 알았다는 그 놀라운 혜안. 지혜. 그 때문에 오래 살아요. 아예 의지할 생각을 안하니까 오래살고, 남자는 뭐 양말하나도 못 챙기고, 아내가 잘 해 줄 때는 당연히 잘 해주는 줄 알고, 아내가 그만 몸 아파버리면 그 다음부터 아내 아프다고 되게 구박하고, 아내 죽으면 화장실가서 혼자 크게 웃다가 들키고(^^)
성경은 그냥 만화책이 아닙니다. 나를 지적하는 거예요. 철저하게 나를 지적하는 게 성경입니다. 그러면 이 성경을 통해서 왜 하나님을 그렇게 하느냐? 아까 다시 할께요. 꽃 있죠. 꽃은 풀에서 꽃이 자라잖아요. 그런데 풀은 마치 꽃이 피니까 꽃이 풀의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꽃을 어떻게 하십니까? 지게 만들지요. 피었다가 지게 만들므로 말미암아 이 들풀로 하여금 너는 기껏 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그럼 그게 뭐가 중요한데 (하지만), 하나님은 풀의 꽃은 져도 말씀은 영원하다. 말씀은.
오늘 아침에 병원에 갔다왔는데,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사람을, 내가 보호자 불러서 이렇게 말했어요. 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사람이 남보다 죄를 더 지어서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의 계획에 의하면 지금 그 나이에 돌아가셔도 되기 때문에 지금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이 얼마나 살고 싶었겠어요. 본인이 살고 싶다는 것은 풀의 희망사항이고, 풀 위에 풀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이 성경 말씀이예요.
그런데 제자들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이 말씀을 가지고 내가 누구냐를 알아야 될 텐데 이 말씀을 장식품으로 떼가지고 아름다운 여배우 그림 같은 것(처럼), 조사(?)가지고, 나는 예수 안다, 이런 거 성경공부하는데 더덕더덕 붙여놓고, 나중에 이 덕지덕지 붙은 것 다 떼어버리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나 밖에 없어요. 자기 자신은 누구냐를 알려고 하지는 않고 나는 성경공부 많이 했고 예수 잘 알고, 이 예수 알았으니 죽어 천당 갈 거고, 자꾸 자기 자신이 분해되고 해체되고 져야된다는 나는 망해야 된다는 생각은 안하고, 자기를 꾸미는 거예요. 성경공부를 통해서, 목사는 신학을 통해서. 나를 부수는 성경이 아니라 나를 살찌우게 하는 성경이예요. 나를 위대하게 만드는 성경.
그러니까 결국 나중에 어려움이 오면, 예수님 미안합니다. 당분간 쉬겠습니다, 하고 다시 본래의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죠. 그런데 방금 제가 말씀이라고 그랬잖아요. 말씀. 이 말씀이 왜 이렇게 우리를 낮추느냐? 그 이유가 빌립보서 2장 11절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그 모든 영광을 자진해서 영광의 동등됨을 여기지 않으시고, 그걸 두자로 상실.
모든 인간은 소유죠. 예수도 소유하고 성경도 소유하고 삼위일체도 소유하고 소유하려고 하는데, 그 소유하려는 주인공은 소유를 통해서 자신을 살찌우려고 하지, 절대로 소유하는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깨어져서는 안 된다, 이것 아닙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뭐 하나 성경말씀을 배움으로서 괜찮은 나로 바꾸는데 전력을 다하는 것이지, 내가 부서지고 깨어지는 그것은 아니올시다,라는 거지요. 우리는 싫어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냐. 처음부터 그분은 처음부터 하나님인데, 하나님을 상실하고 뭐로 왔다했습니까? 아무것도 소유될 수 없는 소유하지 않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하나님이면서도 아무것도 소유 없이, 심지어 상실했는데 빼앗기었는데... 무엇까지 빼앗겼습니까? 마지막에 인간들이 제일 아끼는 목숨까지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네가 말씀을 알아? 이게 말씀을 다 이루었다. 자기가 죽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말씀을 다 이루어다는 거지요.
이게 소유를 원하는 인간들에게는 정 반대의 길이죠. 인간은 뭐를 가져야 다 이루었다인데 , 예수님은 다 잃어 놓고 다 이루었다예요. 마치 타짜(화투치는사람)가 “오늘 1억을 땄구나 오늘 다 이루었다” 이래야 되는데 “가진 재산 1억을 다 잃어놓고, 다 날려놓고, 주여, 다 이루었군요”. 이거하고 똑 같은 거예요. 다 잃었으면 자살하지 다 이루었다 하겠습니까?
정반대의 길, 하나님은 낮아지려고 애쓰고 인간은 높아지려고 애쓰고, 서로 버스 노선이 반대로 가요. 인간은 천국을 가려고 하니까 그 천국은 지옥이고,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은 지옥이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지옥은 천국이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세주는 마귀였고, 인간들이 악마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우리 구세주였어요. 사람들은 자기 소유를 가지고 자기 소유의 중심에서 선과 악을 규정하려고 하거든요.
자기소유, 나에게 소유가 증가하면 교회에 좀 나가주고, 내 소유를 깎아버리면 교회에 발 끊어버리고. 소유가 증가하면 잘 되는 예수 믿어주고, 안들어주면 믿는 예수 끊어버리고. 자기 중심. 근데 그 자기 중심안에 누가있습니까? 악마가 있습니다. 악마가 인간을 조종하고 있는 거예요. “더 끌어 모아라”. 예를 들어서 떡을 먹고 배불러야지... 하는 것이 악마가 하는 말이고,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어떻게 나에게 실현되느냐... 여기에 예수님이 관심이 있어요.
왜냐? 우리는 풀이니까. 꽃이 져야 풀이 나타나죠. 꽃이 피어있으면 풀이 자꾸 자기가 꽃인 줄 알잖아요. 꽃을 꺾어 버려야돼요. 하나님의 말씀이 와서 우리 꽃을 꺾음으로 말미암아 풀이 착각하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제발 착각 좀 그만하라. 풀이면서도 꽃인 체 착각하는 그 착각을 박살내는데는 말씀 만 한것이 없습니다. 말씀이 최고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부터 20장까지 그 많은 혜택 그 많은 기적 그 많은 축복 그런것들은 아무리 제자들이 3년동안 따라다녔지만, 나라는 것을 모르고(있었기에) 나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꽃들이었죠. 그런데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드디어 이 제자들 11명은 자기의 본색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대로 드러내죠. 그거는 뭐냐? 그것은 바로 [사랑] 문제입니다.
우리 000목사님 오셨으니까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지금 우리가 강의하는 것이 요한복음 21장인데, 요한복음 1장부터 20장까지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 놓을 것은 다 내 놓은 거예요. 기적도 있었고, 오병이어도 있었고, 포도주가 물되는 것도 있었고,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도 나았고, 간음한 여자도 그 자리에서 용서받았고, 심지어 11장에 보면 죽었던 나사로가 나흘만에 다시 살아났잖아요.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은 아무리 듣고 배워도 인간은 달랑 끝에 남는 것은 [나]로 되돌아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21장입니다. 나로 되돌아온다. 말씀을 바께쓰(물양동이)로 가져다 부어도, 기적을 폭설 내리 듯 머리 어깨에 퍼부어도 인간은 절대로 나를 포기할 자가 아니예요. 어떤 경우라도 인간은 나를 포기할 인간은 없어요. 그게 요한복음 21장이예요.
그러면 그 전에 있었던 것은 무엇이냐? 전부다 위선입니다. 위선. 전부다 위선이예요. 요한복음 1장부터 20장까지의 모든 기적들은 위선에 위선을 더한 것입니다. 위장에 위장을 더한 거예요. 어떤 분이 이렇게 주장했어요. “나는 예수믿고 갈 수록 나의 죄를 더욱 더 깊이 아니까, 나는 갈수록 나의 죄가 얼마나 깊고 더 심각한가를 알기 때문에 나는 갈수록 더욱 거룩해지고 있다”. 맞는 말이예요 틀린 말이예요? 틀린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은 나라는 인간이 갈수록 죄를 아니까 갈수록 더 겸손해지니까 이것은 전에보다도 더 훌륭하게 참 거룩하고 겸손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사는 모습이니까 그만큼 거룩의 양과 질이 깊어지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가는게 아니냐. 다시말해서 자기 죄를 더 많이 아는 식으로 훌륭해 가는 사람. 이것이 자기 자신인 거예요. 자기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걸 가지고 두자로 뭐라고 하냐면, 그걸 [위선]이라고 합니다.
이 요한복음 21장에서 그 걸 위선이라고 합니다. 왜 그게 위선이냐하면 내가 더욱 더 겸손해지고 낮아진다는 자체는 나라는 것이 있는 이상은 이것이 나의 의, 자기 의로 누적이 되요. 축적이 된다고요. 축적이 되면 이 것 가지고 누구하고 비교하냐면 타인하고 비교하게 되요. 타인하고 비교하게 되고 과거의 자신과 비교하게 되요. 과거보다 향상된 면을 모아 모아서 자기의 소유로서 축적 획득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소유가 되려면 소유를 담는 그릇이 있어야 되죠.
그러니까 이 그릇은... 스스로 깨겠습니까? 안 깨겠습니까? 절대로 안깨죠. 왜? 그동안 자기 죄를 안다는 겸손이 가득들어 있는데. 주님 앞에 (자신을) 부인했다는 겸손했다는 좋은 장점들이 가득들어 있는 그 그릇을 깨버리면 자기 장점이 없어지잖아요. 그러니까 그 그릇을 못 깨는 거예요. 그것이 요한복음1장에서 20장까지 계속되어 온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물양동이로 받듯이 엄청나게 받았는데, 그것은 지분이 있는 나를 좀 더 향상시켜 나가고 훌륭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어떤 힘이 되리라 생각한 거예요. 세속적인 축복을 받겠다든지 행운을 따내겠다는 것이 아니지만, 그건 아니더라도 고상한 면에서 적어도 3년동안 배웠으니까 예수님의 수제자로 있었으니까 뭔가 세상사람들하고 내가 그 만큼 월등하게 나아진 상태로서 달라져있을 것이라고 여긴 그것. 그것이 뭐냐? 뭔가 소유한 걸로 내 가치를 채우겠다는 겁니다. 그 소유가 나의 가치가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위선과 허위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고 보니까 비로서 (제자들에게)발각이 된 겁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주님께서 하시는가? 꽃이 활짝 필 때 풀이 착각을 해요. 꽃이 활짝 필때 풀이 이제야 나의 진짜 진가가 나타나는구나. 아닙니다. 꽃을, 핀 꽃을 지게하므로 말미암아 풀의 가치가 나타나요. 풀은 (꽃이)져야 맛이예요. 꽃이 져야 맛입니다. 왜? 도대체 어느 놈이 이 내 꽃을 지게 해,라고 어느 놈이 감히 나의 화려했던 그 꽃을 지게해,하며 살펴보니까 하나님이 계시다가, “말씀이 그런다. 왜? 너는 져야하고 말씀은 영원하다. 왜? 꼽나? 왜 니가 지금 분통을 터뜨려 지금 나한테? 그것이 왜 불만이야? 그 꽃이 아름다울 때는 네가 신났지.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할 때는 신났지. 그런데 거두어 갈 때에는 왜 네가 화를 내는데. 욥의 부인의 (욥에게) 아주 (스스로) 저주하라고 했으니까, 에라이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으니까, 그런식의 하나님은 믿지 말라고 했잖아요.
줄 때 그게 나의 진가죠. “그래 내가 이렇게 겸손하니까 복 주지” “이렇게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응답 안 해줄 리가 있겠어? 하나님이 양심이 있으면” 이렇게 했는데, 그것을 지게 할 때, 갑자기 화가 납니다. 억울한 거예요. 뭔가 속았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사실은 자기가 자기를 속였는데, 자기를 위장했는데, 그 위장술을 모르고, 엉뚱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착각해 놓고, 나를 위대한 인간 만들겠다고 지 혼자 지레짐작 김치국부터 마셔놓고, 나를 완전히 쳐박아 놓으니까 그 때 갑자기 숨어있던 분노같은게 폭발하면서 “왜 나를 이지경으로 만듭니까!” 라고 반발하는 겁니다.
그런데, 원래 인간은 그랬어야만 됩니다. 왜 그러냐하면 말씀이라는 것이 오게되면 피었던 꽃도 져야합니다. 왜 말씀이 그래야 하냐면 말씀의 완성이 뭐냐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갖고 있지만, 빌립보서 2장에 보면 그걸 자진해서 포기를 하시고 종의 형체를 지녀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을 했거든요. 그런데 십자가에 죽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말씀을 다 이루었다, 했잖아요.
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말씀 다 이루심과 평소에 제자들이 성경말씀 다 끌어모으고 기도 다 해가지고 지금보다 나은 나가 점점 더 향상되는 거. 물론 돈 버는 향상도 있겠지만 윤리적 도덕적으로 자기가 옛날에는 개차반이었는데 이제는 인간되었다. 그러한 괜찮은 속성, 성품. 그것 가지고 뭔가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증거, 증명하고픈 증거물로 삼는 이 모습과 그 걸 두자로 뭐라고 했죠? 소유. 나의 그릇을 깨지 싫다는 거예요. 내 그릇을 몽땅 천국에 넣기 위한 괜찮을 것을 소유해서 천국가기위한 이 모든 심보를 비롯해서 계략 계획같은 것이 소유가 상실로 변하니까 거기서 숨어있던 분노가 주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폭발됩니다.
결국 인간은 예수님한테 말씀을 3년동안 따라다녀도 그것은 옷만 갈아입었다 뿐이지 자기의 내부는 하나님이라도 내 내부에 대해서는 손도 대지말라는 식이 되었단 말이죠. 쉽게말해서 우리가 성경공부 몇 년 했지만 공부하다가 우리 다음 달부터 못합니다 하면, 못하면 못하지 뭐,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요. 나에게로. 내가 어떻게 깨어지느냐 주님처럼 어떻게 상실되느냐 이게 아니라 역시 그래도 남는 것은 뭡니까? 결국은 나는 남잖아요. 그러면 나만 남으면 됐지 뭐. 뭐 걱정이야. 이게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든 말든 간에. 그거는 한 때 좋았던 추억이었지요. 앨범속에 있는 퇴색된 옛날 지나간 학생때 찍었던 사진. 그 때 참 예뻤다. 그 때 성경 좋았다. 예수님의 오병이어 좋았는데. 야 물이 포도주로 변할 때 그 때 좋았지. 나사로가 나흘만에 살아날 때 멋있었다니까. 옛날 추억이야기하지 자기 진짜 본질은 자기가 손도 안대는 거예요. 괜찮은 예수님의 추억담만 걸치면 그것이 말씀의 성취입니까? 그게? 말씀의 성취가 아니예요. 그거는. 말씀을 이용한 거죠. 말씀을 즐긴거죠. 하나의 오락이었죠. 하나의 ?, 교회라는 통해서 재미나게 논거죠. 그냥. 목사님 좋지, 장로님 좋지, 자기 별로 돈 안내도 잘해주니까. 위로해주지, 기도해주지, 좋았다니까. 하나의 유흥, 즐기는 거예요. 오락이었습니다.
그러면 진짜 신앙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진짜 신앙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한테 들어올 때 그 때 시작되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원래 날카로워요. 뾰쪽하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한테 침투하면 아프죠. 상당히 아프죠. 십자가가 딱 들어오게 되면, 무엇과 무엇이 비교가 되냐하면 뭐든지 소유해야 나의 가치가 향상된다고 여기는 [나]. 그말은 때려죽여도 나는 깨지기 싫다. 있는 것 보존하기도 급급한데 왜 깨져. 내가 미쳤나 왜 깨져. 다만 주님한테 잘 기도해서 있는데다가 더 많이 획득해서 소유하는 거, 그것을 원하는 내 모습과 십자가는 ; 나는 다 버려도 부활되는데... 나는 다 버려도 주께서 사흘만에 부활시켜 주던데... 있는 거 그만 교체하시지. 그거 고물인데 바꿔치기 해야지. 나의 생명으로. 하고 들어올 때는 이게 타협해서 들어올 수가 없어요. 반발입니다. 반발. 반발하게 되어있는거예요. 십자가를 남길려고 하고, 우리는 십자가 말고 십자가는 일단 믿어주고 믿어줘야 죽을 때 천당가니까 십자가피로 공로로 구원받아야 되니까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으니까 일단 믿어주고, 이 십자가는 뭡니까 알약입니다. 알약 먹었잖아요. 이제 서랍에 넣어 둬야죠.
십자가를 사람들이 처음 믿을 때 알약으로 먹어요. 복용하고 나았으면 (약통에) 집어넣는 겁니다. 후시딘연고 있죠. 무릎깨졌을 때 바르고 나으면 계속바르지 안잖아요. 그다음에 약통에 집어 넣어야 되죠. 주님께서 우리를 다룰 때는 뭘 다루냐하면, 우리를 네온사인의 하나의 유리관으로 봅니다. 유리관에 피가 들어오면 우리는, 빈 유리관에 피가 들어오면, 빨간 빛을 발산하게 됩니다. 그 대신 뭐는 빠져야 되요? 내 것은 해체되어야 하고 내 것은 나의 소망 나의 것은 해체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만 들어와서 예수님은 이렇게 돌아가셨단다 라는 예수님의 쓴잔을 마셔야 되고 그렇게 되면 먹든지 마시든지 예수의 뻘건 피만 온통 발산하는 거예요.
47;01우리는 그러기 싫어요. 우리는 이렇게 되면 뭐가 빠지고 해체됩니까? 제일 중요한 뭡니까? 나, 나라는 인간 자체가 의미가 없잖아요. 내가 제일 중요한데 이렇게되면 나는 예수님의 이용물 밖에 안되잖아요. 그러니 이것은 싫고, 어떻게 하느냐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나의 미래를 그리고 나의 과거를 생각해서 과거에는 예수님 십자가 피를 믿었고, 미래에는 천국에 가니까 지금 나는 뭐냐, 거룩한 생활을 하면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걸 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쪽 과거를 도와주셨듯이 이쪽 미래도 도와달라는 거예요. 그러니 여기에 누가 살아있어요? 누가 안 죽었어요? 나, 나는 안죽어요. 계속 살아있는 거예요. 살아있고 예수님은 다만 구원만 해 달라는 거예요. 내가 신앙생활 반듯하게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네온사인처럼 되어버리면 나는 날마다 두더지(잡기) 게임처럼 올라오면 때리고 또 올라오면 때리듯이 나는 맨날 맞는 겁니다. 나라는 인간이 솟아오르면 주님의 십자가가 이게 어딜 튀어나와 또 때리고 때리는 거예요.
자, 방금 제가 2가지의 경향 중에서 어느 것이 사도바울의 모습이냐는 겁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니, 목사님은 다른 유명한 사람들이 있는데 왜 사도바울을 예로 듭니까?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놀랍게도 마귀가 사도로 인정한 사람입니다. 왜냐?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감히 어디 이 가짜가... 이러거든요. 그러니까 마귀가 누구를 안다고요?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과 같이 계신 분으로 인정하잖아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살아가는 모습은 누가 뭐래도 진짜 제대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죠. 이것을 마귀도 인정했으니까.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여러 가지 많지만 대표적인 것이, 자 이제 요한복음 21장의 주제가 나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나는 사랑에 미쳤다. 그래 내 미쳤다. 어데 미쳤나, 사랑에 미쳤다. 사랑에 미친게 무어냐면 네자로... 크게 쓸께요. 사람들이 사랑 그러면 자꾸 추상적으로 생각하는데 사랑은 네자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보. 고. 싶. 다.
사도바울의 소원이 하나 있는데 뭐냐하면 빨리 제대해서 주님 보고 싶습니다, 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누구를 제일 부러워하냐면, 자기가 주도해서 죽인 사람이 있어요. 누굽니까? 스데반. 스데반을 그렇게 부러워하는 거예요. 제가 젊은 목사님과 공부할 때 객관식 문제를 내고 싶어요. 다음 중 당신들이 되고 싶은 사람은? 1번 옥한음, 2번 하용조, 3번 이동원, 4번 조용기 ... 이렇게 해놓고 제일 마지막에 스데반 집사.
신학교 졸업한 후에 소망이 무엇인가요 하면 큰 교회 담임목사, 부목사되어 노후 대책 완비되고 유학, 선교지 매년 보내주고 부교역자 열댓명 거느리고... 우리도 신학교 때 다 희망했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는 아무도 그걸 손에 안가죠. 혹시나 진짜 스데반 집사처럼 돌 맞아 죽을까 싶어서요. 아직 결혼한지 얼마 안되었는데 죽어버리면 안된다. 자기 마누라는 어떻게 살아가나...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그 사람들은 성경을 왜 보느냐? 목사님들이 성경을 왜 보느냐? 옥한음 하용조 되기 위한 하나의 상품으로서 이것 이것 하면 이것이 될 까 싶어서... 왜? 신이 도와주니까.
그러니 예수도 안중에 없고 스데반 집사도 안중에 없고 마귀도 인정하는 사도바울도 귀찮아요. 그리고 베드로도 귀찮아요. 왜? 베드로는 거꾸로 매달려 죽었기 때문에... 그것을 제가 두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소.유. 괜찮은 교회하나 꿰차고 평생동안 생계비 뽑아내는 교회하나 소유. (아직도 이게 아무것도 안되가지고 고민이지만...^^) 소유
그런데 이 십자가는 뭐라고요? 상.실. 너무나 극대극이예요. 마귀는 떡으로 산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산다. 너무나 극대극이요 완전히 정반대예요. 말씀은 이거해가지고 밥먹고 살라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통해서 남을 가르치는 너가 한 번 당해봐라는 거지요. 말씀대로 너에게 덮치더라도, 스데반 집사처럼 아 주님 저기 서 계시네, 아 이제야 제대하는 구나, 이제야 기뻐서 돌 던지는 사람들에게 주여 저들이 이 수준을 모릅니다. 그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용서나 해 주세요. 나야 좋죠. 왜? 죽으니까. 주님 품안에서 나야 좋지만. 왜? 보고 싶은 사람 보았기 때문에. 이것을 두자로 뭐라 했습니까? 사.랑.
그런데 사랑에 미친 사람이 누구라고요? 사도바울. 사도바울이 사랑에 미쳐서 하는 말이 고린도후서 뒤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부터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해 죽으신 그 분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이제부터 산 자는 더 이상, 이게 중요하죠,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 야~ 이거예요.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이거 환장할 이야기 아닙니까. 말씀 보다가 이곳은 붕 건너뛰고 싶어요. 못 본체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 이 말은 곧 나 자신 속에 평소에, 그릇이라 했잖아요, 평소에 그릇안에 뭐가 담기겠습니까? 나 자신 속에 뭐가 담겨있겟습니까? 자존심, 명예, 물론 사랑하는 자식들, 아내도 있겠지만 특이 여기는 남에게 인정받는 것, 자아실현, 이런 것들이 들어있겠죠.
그런데 만약 천명 전도를 해서 다 천국에 갔다고 합시다. 그러면 성경의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죠. 그러면 천명을 전도 해 놓고 그 성과와 업적이 뭐로 돌아와서는 안됩니까? 자신의 명예나 훌륭한 목사라고 인정받은 이런 것으로 돌아와서는 안되죠. 이것을 끊을 위인이 없습니다. 없어요. 어떤 예수 믿는 사람도, 심지어 사도바울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한 업적이 자기 명예나 자기 위신과 자존심으로 누적이 안되는 경우가 없어요. 그 때 안산까지 가서 성경공부한다고 열내고 왔다갔다 했다... 이것이 내 머리 속에 계속 남아가지고 이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나의 우위를 확정해 주는 증거물로 삼을 것이고, 더더구나 이렇게 훌륭한 나에 대해서 하나님은 왜 안도와 주십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반발할 수 밖에 없어요. 나처럼 훌륭한 목사를 왜 주께서는 힘들게 하느냐는 겁니다. 이런 소리가 안 나올 수가 없어요. 왜? 우리 모두는 인간이니까.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여기서 좀 어려워요, 요한복음 1장에서 20장까지 3년동안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토록 많은 것을 제자들이 배웠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의 장식품이었고 베드로가 세 번씩 부인할 만 해요. 심지어 베드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물 위를 걸었던 사람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양심이 없어도 그렇지, 물위를 걸었던 사람이 세 번씩 그것도 그냥 부인한 것이 아니고, 잘 모릅니다 정도가 아니라, 난 저 사람을 저주하노라 했어요. 사람이 양심이 있지 자기 장모까지 살려 주셨는데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까.
그런데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끝까지 내가 너를 놓치지 않겠다. 그럴 때 우리는 “그거야 예수님이 계속 살아계셔서 우리를 안 떠나야 되는 거지...예수님 떠나버리면 소용없는 일이지.” 할 때, 요한 복음 21장에서 “떠난 줄 알았지롱? 안 떠났지롱, 나 살아났지롱” 살아나서 떠나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이제 제대로 본격적으로 3년동안 안 되는 인간 너희들을 이제는 내가 되게 하고야 말겠다는 이것이 21장입니다.
이것을 두 글자로 뭐라 했습니까? 사.랑. 이 사랑은요. 우리가 예수님 사랑한다고 몸 바치는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나의 위신과 자존심으로 추가될 수 있는 사랑이예요. 빠진 분을 위해 다시 할께요. 사도바울이 사랑에 미쳤다 했잖아요. 사랑에 미쳤지만 아무리 인간들이 애를 써도 인간이 자기가 뭔가 움직거리면 그것이 기억이 되게 마련이고, 그 기억은 계속 나에게 나의 소유로 나는 오래 살아야돼, 나는 죽으면 안돼, 왜? 나는 가치있으니까. 자꾸 자신의 가치와 자존심과 위신과 남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그 마음을 명예를 자꾸 증가시키는 쪽으로 과거가 우리에게 작용을 해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하니까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나 그 외에도 다 결국 예수님을 저주했잖아요. 이것은 결국 무엇이냐하면 주님께서 나를 떠나지 않고 계속 전처럼 나를 도와주면 되겠는데, 지금 주님께서 훌쩍 떠난 마당에 지금 우리들끼리 이게 뭐냐 말이죠. 바보들같이. 11명 모여가지고 지금 무슨 짓이냐 말이죠. 한 때 유명했지만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쓸쓸하잖아요. 없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뭐 할 수 없지요. 결국 인간은 나에게 원래 우리가 챙겼던 나에게 돌아오지요. 돌아오는데 그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 곁을 떠난 줄 알았던 내가 떠나지 않고 살아서 이제는 산 정도가 아니고 이제 본격적으로, 하도 말씀이 안되니까 이제 말씀을 이 제자들을 통해서 이제는 주유시키고 성취시키는 내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21장에서 시작합니다.
그 때 들어오실 때 하신 말씀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른 계명이 아니고 사랑만 통하는 계명. 모든 율법이 있지만 모든 그 계명은 사랑에 다 통한다. 그런데 그 사랑은 뭐는 아닙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예요. 왜? 그것은 또다시 나의 명예와 위신을 위한 증거물로 계속 누적(마일리지)으로 쌓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만약에 한 천명을 전도했는데 그런데 그 다음 날부터 내 소득은 줄어드는 반면에 전도할 때 땡땡이 치고 요령부리면서 전도를 한 사람도 안했던 사람이 갑자기 사업이 잘되어서 십일조를 한달에 천만원씩 낸다고 할 때, 나는 전도 천명한 사람인데 수입은 줄어들고 저 쪽은 수입이 늘어날 때 은근히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이 안들겠어요. 들지요.
결국 이것은 뭐냐? 누구를 사랑했다? 주님 사랑은 하나의 빌미였고 핑계였고 주님 사랑하는 그것을 하나의 주특기로 삼아서 결국 내가 근원적으로 처음부터 노렸던 것 나는 나를 포기 못한다. 이것에 뭔가 힘되라고 보템되기 위해서 살~짝 주님 사랑합니다 라는 것을 이용한 것 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감사하게도 그 우리의 은밀한 것을, 사태가 안되게 하므로 우리 예상밖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들추어내는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나 밖에 모르는 인간인가 폭로시키는 것이죠.
이것을 제가 전에 안산 강의할 때 했는데,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를 죽이지 않고서 일하시는 법이 없다>. 하나님의 진짜 일은 반드시 그 일에 동원 된 나를 팍팍 누르고 나의 죄를 들추어 내면서 주께서 일하십니다. 그래야 그 나온 모든 결과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십니다. 중간에 우리 나가 그것을 낚아채질 못하도록 하십니다.
그게 베드로전서 4장에 11절(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그게 참 이상하죠. 잘 생각해보세요. 누가 만일 봉사하려거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함과 같이 하라 했죠. 자 이 말씀이 왜 이상한지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나가 여기 있습니다. 교회 청소를 하려는데 다른 사람은 다 가버리고 나 혼자 교회 청소하려고 남았습니다. 기분은 나쁘지만 성경공부하다 들은 것이 있어서 그래 다 도망갔지만 하나님 뜻이다. 난 청소해야겠다. 해서 하니까 청소가 잘 되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교회 청소를 말끔하게 그것도 기쁜마음으로 하니까 그러면 영광은 어떻게 되요? 하나님께서 영광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열심히 한 나를 통해서 영광을 받잖아요. 이게 우리가 아는 영광돌리는 공식이 아닙니까? 흔히 교회에서 그렇게 알고 있죠. 그런데 성경보니까 난데없이 여기 예수 그리스도는 왜 등장합니까? 예수그리도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할 상황이 아니잖아요. 지금 내가 내 잘난척 하는게 아니잖아요. 지금. 순전히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즐겁게 청소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는 너도 인간이야 너도 할 수 있어 네가 겸손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령주시면 성령주시는 힘으로 너도 할 수 있어.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이제 제 힘으로 독자적으로 영광돌릴 수 있겠군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하나님 주신 힘으로 독자적으로 힘받아서 영광 돌리겠다는 이 공식이 무슨 하자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더란 말이죠. 이렇게 생각하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 영광돌리는 방식은 아니라는 겁니다. 결국 이것 조차도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그러냐하면 진짜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오게 되면 나를 도와주느냐가 아니라, 본인이 생각하기를 MBC기자가 와서 “지금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하시는데 하나님의 힘으로 하시죠?” 할때 진짜 성도 같으면 “제가 지금 제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친히 주의 힘이 나보고 일을 시켰습니다”. 하겠지요. 내가 청소하는데 힘주세요가 아니라, 안하고 싶은데 힘이 와서 청소를 하게 된 거예요.
어떤 코메디에 늙은 노파가 물에 빠지니까 아무도 안들어가는데 어떤 용감한 청년이 들어가서 건져냈단 말이죠. 그래서 인터뷰하면서 용감하다고 하니까 누가 떠밀어서 했다는 겁니다. 아 이거 이해가 잘 안되시는 모양인데 디모데후서를 2장 26절을 봅시다. (딤후 2:26)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하나님의 뜻을 좇으려면 어떤 경우가 되어야만 가능합니까?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의 힘을 얻었다고, 또는 소유했다고 할 수 없잖아요. 반대로 얘기해야죠. 하나님이 나를 소유해서 이번 청소를 다 시켰다. 하나님이 사로잡지 않을 때는 또 도망갈 거야, 하지만 사로잡힐 때 나는 할 수 밖에 없어. 나는 할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 해야 되요. 그것을 나는 사랑에 미쳤다.
사도사울이 하는 말이 “여러분들이여 내가 준 사랑이라고 보지말라”는 거지요. 지금 주님은 나(바울)를 사로잡고 있는데, 사람들은 “사도바울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니까 반대로 하니까 사도바울은 미치는 거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남보다 수고는 많이 했지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라고 그린도전서 15장에 나오잖아요. 사람들이 자꾸 반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세상에 저렇게 겸손하니 저런 말도 나오는 구나. 성화되었구나. 본인(사도바울)은 미치겠는데...
예수님 당시에 과부가 많았어요.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과부마다 다 도와줬습니까? 아니죠. 많은 과부가 있으되 사렙다 과부에게만 찾아가는 겁니다. 이게 뭐냐? 선택입니다. 누가 죽어서 천국가기 싫은 사람있습니까? 그런데 진짜 천국가는 사람은 사로잡혀서 천국가게 되었지, 내가 천국 연구했더니 주께서 힘주셔서 천국갔다.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임해서 소경이 눈뜨듯이 눈을 떠보니까 주께서 이미 나를 붙잡고 있더라 말이죠. 이미 용서가 되있고. 창세전부터 계획된 일을 지금 실행한다는 거예요.
이 사랑에 대해서 요한복음 21장을 설명하고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랑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교체에 들어갑니다. 아까 제자들은 뭐에서 뭐로 되돌아간다구요? 처음부터 무엇에서 무엇으로 되돌아간다? 나에서부터 나로. 왜? 이 세상에 끝까지 죽을 때가지 나를 지켜주는 것은 나 밖에 없어요. 예수도 한때 추억이었고, 교회 열심히 다닌 것도 추억이고 목사님 참 좋았다 그것도 추억이고 낙엽처럼 다 떨어지면 뭐 나만 남았네. 결국은 나한테 돌아와요. 자식, 마누라, 남편도 그렇고 다 떨어지면 남는 것은 결국은 진솔하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해요. 교인들보다 내가 더 중요해. 나는 내 사랑은 포기를 못해. 내가 나를 사랑해 주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해주느냐. 오랜만에 좋은 말 합니다. 다시 할께요. 내가 나를 사랑해 주기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해 주나. 관속에 끝가지 가는 것도 내가 가요. 관속에 가면서 나라는 것도 내가 느껴요.
그러니까 나에서 나온 사랑 그 사랑과 교체, 바꿔치지 않으면 이 베드로가 사도바울처럼 되질 못합니다. 이제 바꿔치기에 들어가요. 묻습니다. 먼저 과거에 해당시켜요. 과거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 뭘라고 불렀습니까? 고기 억수로 많이 잡아 주었지요. 그 때 베드로가 아주 철없는 짓을 했어요. 고기 많이 잡아주니까 베드로가 뭐라 했습니까? 고맙습니다. 노량진 시장에 가져다 팔면되겠습니다. 했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그 다음에 뭐예요? 그 다음에 중요한 말. 나는 죄인입니다. 십자가가 들어와 버리면 아 이제 죽어 천당가겠네, 이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아요. 나는 죄인입니다. 왜 죄인이라는 말을 했냐면 고기를 소유해야 내가 살아요. 고기 잡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예수가 되었던 누가 도와주던 자기가 짜 놓은 틀이 있어요. 뭐냐? 고기 많이 잡게 해서 이 나, 나에게 중요한 나, 내가 제일 사랑하는 나, 내 가족과 나를 먹여 살려 주니까. 도와주면 고맙습니다 하겠다는 틀을 짜 놓았는데,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고기가 잡히니까 주님앞에 이 틀 자체가 위대하신 당신 앞에서 이 틀 자체가 죄 그 자체입니다.
이렇게 하면 살 수 있습니다 하고 짜놓은 틀, 금요철야기도할 때 우리 첫째 애는 법대가게 해 주시고 둘째는 의대가게 해 주세요. 틀 짜 놓았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임해버리면 그 자체가 뭐라고요? 주여 제가 헛짓하고 있군요. 내가 나 밖에 모르는군요. 죄를 느끼는 거예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시킵니다. 시키는 이유가 우리 기도 응답받으라고 시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 기도와 예수님 기도가 얼마나 격차가 나는 가를 뚜렷하게 부각시키기 위해서 기도를 시켜요.
우리가 지금 구원받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우리 기도 열심히 안 쉬고 했기 때문에, 우리 덕인 줄 알고 있는데, 로마서8장에 보면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기도하시는 분의 기도 덕분으로 우리가 미리 아신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하시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식으로 지금 인도함을 받고 있어요. 기도를 해야되요. 하는가운데서 내 기도와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위해 기도했는가? 예수님은 이 쓴 잔을 내게 돌리지 마시고... 내가 이 쓴 잔을 마시게 하옵소서.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우리는 때려 죽여도 그런 기도 못해요. 왜? 자기가 해체되고 부서지기 때문에.
현재 있는 소유를 증가하게 해 달라고, 그걸 축복이라고 하죠. 축복해달라고 기도하지. 있는 것도 망하게 해 달라, 함부로 입을 내기가 무서워요. 진짜 응답받으면 망하게요. 기도하지 마소. 안되요. ^^ 아까 얘기했죠. 신학생들 스데반 집사되게 해달라고 그래 기도 안합니다. 주여, 옥한음 목사되게 해주세요. 이렇게 하지. 스데반집사 되게 해달라는 기도 못합니다. 기도 응답받으면 자기 망하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처음에 고기 잡을 때 그 때 아~ 뭔가 내가 짜 놓은 틀은 깨어져야 되는구나, 그 깨어져야 하는 것도 하나의 일시적인 것이었어요. 안 깨진 거였어요.
그러니 성령으로 영원히 거하시면서, 나오면 깨고 나오면 깨고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예수의 죽음이 나에게 죽음이 임하고 생명이 너희에게 임한다. 예수의 죽으심이 나에게 임하므로 말미암아 나는 죽고 너희는 산다고 했거든요. 그게 성령의 능력이라 했어요. 그러니까 맨날 하나님은 일을 하시면서 일 한 당사자를 죽여요. 꼼짝마라 죽여요.
그걸 깨우치게 해 놓고 그 다음에 묻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지요. 이 틀은 깨고. 나는 살아야 돼, 예수도 내가 살기위한 이용물이야 하는 그 틀이 있잖아요. 예수는 하나이 추억이야 다 지나간거야 했는 데, 다시 등장하셨습니다. 등장한 의미를 이게 좀 어려운데 한 번 봅시다. 예수님께서 가끔 등장하셨습니까 늘 등장하셨습니까 늘 십자가 지기 전처럼 늘 같이 붙어다니지는 않았죠. 그러면 안 붙어다닌 겁니까? 오늘 날 교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해서, 없는 분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많아요. 예수님을.
살아있는데... 마치 우리가운데 없는 분같이 느껴서, 예수님이 없다고 여기면... 그 대신 그 자리를 누가 채웁니까? 소위 사람들로 채워져요. 그래서 목사가 되어서 설교를 할 때에 무엇부터 찾아야 되냐하면 주님을 찾아서 주님이 계시다를 것을 느껴서 설교를 해야 되는데, 주님이 안 느껴지면 누가 눈에 들어오냐 하면 물주되는 장로 표정이 어떠냐 그게 눈에 들어와요. 돈 많은 헌금 많이 하는 집사가 어떤 표정을 짓느냐? 새로나온 교인이 삐지고 있느냐 아니냐 그것이 눈에 들어와요. 그게 사람들을 의식해요.
주님을 의식하면 복음의 광채가 되어서 사람들이 안보이고, 주님 계심을 생각 안하면 사람들이 의식되어서 설교를 잘 했나 못했나, 잘 했으면 한 2명 더 불고 못했으면 4명 교회 나갈텐데 이래가지고 교회 운영이 되겠나. 이러한 자기의 존재 문제. 삶과 죽음의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나요. 그럴 때 설교하면 설교가 뭐가 되겠어요. 위선적인 설교가 되죠. 매끄럽게 설교해서 사람 끌어 모으자는 그런 공식. 영업 정책이죠. 하나의 장사 수단에 불과하죠.
주여 지금 스데반 집사 되게 해달라는 그런 마음으로. 지금 데려가시면 안되겠습니까? 왜? 네자로 보고싶어. 이걸 두자로 뭐라 했습니까? 사랑. 사랑은 보고 싶은 거예요.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면 그 때는 얼굴을 얼굴로 맞대고 본다. 그 때 십자가의 죽으신 못자국 보고 이것 때문에 살았구나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랑이 없을 때는 뭐로 바뀌느냐? 소유로 바뀌어요. 내 교회 있어야되고. 교인들 많아야 되고 돈 많은 사람 우리교회 많이 와야 되고 우리 아이 공부 잘 해야되고 내 마누라 이뻐야 되고. 소유. 그런 거 다 떠나도 뭐 나만 있으면 되지. 제가 아까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사는 이유가 뭐라 했습니까? 일찌감치 남편을 포기했기 때문에. 남자들은 계속 아내를 의지하죠. 그런데 여자는 자식을 낳으면 자식이 전부지 남편은 자식을 돌보는 하나의 기계죠.
내 배에서 난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자식 사랑이 아닙니다. 내 사랑 이어주기입니다. 사랑 물려주기입니다. 이거 듣기 어렵겠지만 진짭니다. 내가 피운 꽃이 지더라고, 네가 꽃을 피워서 진 내 꽃을 대체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전부 다 십자가와 관계없는 내 소유성과 관계있어요. 여기에 성령님이 십자가를 들이대게 되면 이 바보야, 너는 처음부터 네 것이 아니야. 내 것인데 자꾸 선악과 따 먹고 난 다음부터 왜 자꾸 내 것인데 키워보자, 내 것인데 키워보자, 내것인데 키워보자. 자꾸 내것을... 내 교회를... 한다고요.
사도바울이 무슨 자기 교회가 있었습니까? 교회가 필요 없었어요, 보고 싶은 주님만 있으면 되었어요. 자격증 있어서 뭐하려고. 내 것이 누구냐가 아니라, 주님이 (너는) 내 것이다에 만족한 거예요. 주님이 나의 것으로 된 것 만으로. 심지어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비록 주님에서 끊어질지라도 내 형제들이 구원받는다면 난 지옥가는 것도 좋습니다. 내가 주님께 떨어지는 것도 좋습니다. 이런 말을 대범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정도로 주께서 부르면 부르는대로, 까라면 까는 거지 뭐 말이 많노. 그게 나라는 거죠.
내 소유가 어디 있어요. 내 소유가. 만약에 내가 있고 성경공부 해 버리면, 이것은 뭐나 요한복음 1장에서 20장까지 모든 얘기를 백날 들어도,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참 그때 성경공부할 때 좋았는데, 그래도 역시 중요한 건 나야. 다시 나로 돌아와 머물러 버려요. 그런데 지금 우리도 그렇습니다. 역시 이렇게 이야기 하는게 납니다. 그런데 감사하기는 그런 나를 주께서 지금 살아계신 주께서 부활하셔서 배후에서 그냥 두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5장에보면 징계가 없으면 남의 자식입니다. 징계가 없으면 나의 아들도 아니요 사생자다. 내 아들 취급을 안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뭘 증거해야 합니까? 내가 잘 났다는 것을 증거하면 안되고 나는 이렇게 얻어 터졌다는 것을 증거해야돼요. 목사라고 까불다가 이렇게 얻어 터졌고, 교인 좀 있다고 까불다고 4명 빠져버리고 이레 망했고. 주님은 살아계셔서 주님의 십가가 공로만 들어내는데 비해서 나는 철저히 나를 때리고 갈거다.
어디까지? 베드로같은 경우 죽는 것도 자기 맘대로 못해요. 네가 원치 않는 죽음의 길을 가기까지 주께서는 자기 사랑을 일방적으로 집어 넣어버립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좋아요. 베드로를 또 화나게 만드는 겁니다. 베드로가 저 사도요한은요? 이렇게 하거든요. 예수님도 좀 말씀을 사셔도 위로도 좀 해주고 하면 좋은데 약을 올려요. 저 인간이 살아있더라도 네가 무슨 상관이냐. 왜 네가 아직도 사랑 사랑하면서 왜 저 사람의 것과 나의 것을 왜 또 비교하느냐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이 공부를 했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안변합니다. 역시 우리는 늙어 죽을 때까지 나밖에 몰라요. 주여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 밖에 안나온다니까. 최선 다 한게 무슨 자랑이라고. 최선을 다 한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최선을 다하는 나를 주께서 못 살게 굴어서 기어이 천국에 집어 넣는 군요. 그것도 내 열심과 공로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피로서 내 옷을 하얗게 희게 하시고, 강도가 십자가 위에서 한 것처럼 오늘 밤 낙원에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십자가만 크게 보이는 쪽으로 몰아가시는 주님의 은혜가 정말 이렇게 주님의 사랑이 이렇게 큽니다. 정말 보고 싶습니다. 주님이여. 곧 만납시다. 여러분의 기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요한복음 21장을, 요한복음 전체를 끝내면서 우리가 나 자신 밖에 몰랐음을 알았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한 번 선택한 사람, 창세전부터 작정했기에 아버지께서 보낸 자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살리신다는 그 약속이 우리 자신을 통해서 실현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