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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20장(2)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20장(2)

정인순 2010. 12. 16. 00:28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ansan/ansan060908.mp3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ansan/ansan060908.hwp

 

요한복음강의

(이근호목사. 06. 09. 08. 안산나라장로교회)

20060908 안산강의 - 요한복음 20장(2) : 사랑관

녹취  이름 : 오용익

강의 시작되었습니다. 그냥 들어 보세요. 사랑이란 것은 돌발적입니다. 내가 예측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측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요. 그것은 내가 기대한 사랑이기 때문에 시큰둥해요. 성경에도 그런게 있어요. 해산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주님의 사랑 해산한다는 것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제가 예를 드는 것이 크게 어긋난것은 아니에요. 

여자가 애를 임신할 때까지도 몰라요. 애기를 낳아놓고서야 아는 것은, 애기 낳기 전까지도 자기중심이었다는 겁니다. 애기를 어떻게 낳고, 어떻게 키우고 하는 것도 어디에 근거 하느냐면, 내 중심에 근거해서 이렇게 저렇게 예상한 거고, 애기가 없을 때는 ‘엄마니까 책임져야지’ 자기 책임중심주의 로 나갔던 겁니다. 막상 코앞에 내가 책임져야 될 애기가 나타날 때는, 이제는 좋아서 말릴 수가 없어요.  

‘이제는 내 아기를 건드리면 어느 놈도 가만두지 않겠다’ 정도로 나와 버리면, 갑자기 지금까지의 자기중심의 인생관이 와르르, 다 무너지는데, 그게 슬픔의 무너짐이 아니고, 기쁨의 무너짐이죠. 기존의 나의 인생관이 전부 다 자동적으로 날라가 버려요. 나쁜 냄새가 바람 불면 확 날라 가서 없어지듯이.

처녀때 ‘어떻게 자아실현을 하겠다’는 이것이 사라지고, ‘나는 애만 있으면 죽어도 좋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돌발적인 거예요. 예상을 못한 거예요. 그래서 애를 안고 있는 같은 엄마끼리 대화가 통하지, 똑같은 연배이고, 같은 인생을 살아도, 동창생모임이나 계모임에 나가 보면 대화가 안되요.

그쪽은 여전히 시답지 않은 자기의 과거의 모습이라. 그런데 자기는 애가 새로운 기쁨으로 재등장 했거든요. 사는 보람이 있다고. 아주 활기가 넘쳐요. 내가 살이 찌든 말든, 남들이 어떻게 날 보든 관계없어요. 애만 있으면 돼. 저쪽은 자기 살 뺀다고 다이어트 신경쓰고 있다고요. 완전히 영역이 달라지죠.

저쪽은 여전히 내 사랑, 자기중심이죠. ‘나는 애기 낳아도 너처럼은 안할거야’라고 하죠. 실제로 애기를 낳아보는 것과 상상하는 것하고는 달라요. 그러나 이쪽은 “살쪘다. 아줌마가 다 되었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래! 욕해라. 우리 애만 예쁘면 나는 다 되었어.” 완전히 돌발적인 사랑중심으로 인생관이 재편성됩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자가 애기를 낳을 때는, 기존의 인생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애기를 낳아서 키우나?’ 이런 자기 불안이 있는데, 막상 애를 낳고 난 뒤에는 임신할 때의 고통과 ‘애를 어떻게 키우나?’ 하는 두려움같은 것은 말끔히 없어지고, 새로운 해산의 기쁨에 빠지는데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그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자유.’

‘자유’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에 휩싸일 때 ‘자유’라는 말을 할 자격이 되요. 교도소에 있는 놈들이 탈출해서, ‘자유’, ‘자유’ 하는데 그것은 자유가 아니고. 심지어 남들에게 “너는 애한테 구속이 되었다. 애한테 매였다. 애밖에 모른다. 아줌마 다 되었다.” 이런 소리를 듣더라도 전혀 그것이 나에게 기분 나쁜 소리가 아니고, ‘네가 이걸 몰라’ 하는 식으로 흔쾌히 즐거이 애와 함께 웃고 울고 하는 그러한 상태를 저쪽에서 볼 때 ‘자유’라고 하는 거예요.

그 ‘자유’를 뒷받침 하는 것은 뭐냐? 그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사랑.’ 오늘 요한복음 끝부분 21장의 유명한 대목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오늘 하려고 하는 20장 19절도 마찬가지로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을 가로막는 것이 뭘까요? 그게 ‘자기의’입니다. ‘자기의.’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때 대화가 껄끄럽게 안 될 경우가 있을 거예요.

저쪽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나는 내 이야기를 하고, 대화가 잘 안되고 서먹서먹해. 양쪽 다 뭔가 포크를 들고 있는 것 같아. 뭔가 찌르는 것 같고, 괴로워.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예요. 그것은 왜냐하면 각자 ‘자기의’를 안놓치려고 하다 보니까 그래요. 그런데 애하고 엄마하고 이야기 할 때 엄마가 ‘자기의’를 주장합니까?

희한하죠. 애가 막 치마에 똥을 싸더라도, 그것이 막 좋아가지고 “애구 이놈아! 데끼! 네가 엄마를 부끄럽게 하는구나.” 때리면서도 그게 싫지 않지요. 애를 세명이나 낳아 봤으니 잘 알겠죠? 그렇죠? 다른 애는 용납이 안 되어도 자기가 낳은 애는 용납이 되잖아요. 그때 어린애와 엄마 사이에서 그 엄마가 ‘자기의’를 지키려고 합니까? 안합니까? 애한테 ‘자기의’를 주장해서 어디에 써먹을 겁니까? 안 써먹잖아요.

애가 엄마에게 막 꼬집고 달려들어도, 본인이 귀찮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용납이 되잖아요.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왜 평소에 감사 못합니까? 주님의 사랑을 가위로 뚝 잘라서 현재 있는 ‘나의 의’에다가 추가적인 멋들어진 ‘나의 의’ 남들 보기에 무시 안당하는 ‘자기의’를 따로 구축하려고 예수님의 사랑을 잘라서 가져다가 붙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걸 흔히 교회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거룩한 생활이라고 합니다. ‘거룩되기.’ ‘더 거룩한 완벽한 인간되기.’ 제일 웃기는 것이 이런 애 앞에서 자기 정당성 주장하는것 있잖아요. 말도 안되는거죠. 우리가 주님 앞에서 자기 정당성 주장한다는 것은 이것은 말도 안되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는데, 우리는 그 앞에서 자기의를 가지고 따지면서 “제가 이렇게 되었는데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제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어려움을 줍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 예배 때 들었던 예를 다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기존 교회에서 ‘거룩되기’가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제가 설명해 드릴께요. 방금 말씀드린 아기와의 관계는 알겠지요? 애 앞에서 ‘자기의’를 주장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주님은 애같이 우리를 다루고, d우리를 애같이 보는데 그 앞에서 “주님! 제가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이러는 것이 앞뒤가 안맞다는 겁니다.

자. 여기 딱딱하고 투명한 유리가 있습니다. 유리는 물이 안 스며들어가죠? 유리 위에 물을 흘려 보면 그냥 죽 밀려 내려가지요. 만약에 유리가 스폰지 같으면 유리가 죽 내려가다가 어디에 흡수됩니까? 전부다 스폰지에 흡수되어서 나중에 보면 축축한 스폰지가 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는 딱딱한 유리에요.

주께서 사랑을 베풀면 그 사랑이 더듬어서 죽 훑고 지나간다 이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주님의 사랑이 거룩한 것이 지나갔으니까, 나도 거룩을 일부 흡수해서 나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그런 인식이 있어요. 그 원인이 뭐냐 하면, ‘자기의’가 없으면 주님께서 나를 거부한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자기 새끼가 있으면 그 애는 그 엄마의 배에서 태어났잖아요. 내배에서 태어난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그 애가 태어날 때부터 공부를 잘해서 내 자식입니까? 아니잖아요. 자기가 손수 배 아파서 낳았잖아요. 그럼 끝까지 책임질것 아닙니까? 이사야 1장 2절을 누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뭐예요? 우리의 ‘의’입니까? 우리의 ‘거룩’입니까? 우리가 완벽한 삶을 사는 겁니까? “내가 너를 낳았다”는 말이죠. “너는 자식을 안키워봤나? 내가 너를 낳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송아지만도 못해요. 뒤에 보면 송아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이야기좀 보세요.

(이사야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당나귀만도 못하고 소만도 못한 거예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몰라요. 우리는 자꾸 ‘자기의’를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께서 그 의를 보고 받아 주는지 알고 있다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교회에 출석 잘 하려고 했는데, 한번 빠지고 두 번 빠지다보니 미안해서 못나오겠다’는 거예요.

지금 누구하고 누구하고 경쟁하는 겁니까? 맨날 이 애가 “엄마! 내가 엄마를 엄마라고 불러 보고 싶은데 내가 한번, 두번 안불러 보니까 엄마라고 미안해서 못부르겠다. 미안하니까 이제부터 아줌마 하자.” 이렇게 나오면 엄마가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누가 애 보고 ‘엄마’라는 발음을 똑바로 하라고 요구한 적이 있습니까? 돈을 벌라고 요구한적이 있습니까?

‘너는 내새끼’라는 말이죠. 내 몸에서 태어난 그것을 원하는 거잖아요. 이게 무슨 관계냐 하면, ‘의’와 ‘의’의 관계가 아니고 ‘사랑’과 ‘사랑’의 관계거든요. 이제 사랑을 아시겠습니까? 사랑은 ‘사랑’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뭐라고요? ‘자기의’입니다. ‘자기의.’

사람들이 교회 와서 자기가 술 끊고, 담배 끊고, 목사님 말씀 잘 들어서, 교회 나오기 전에는 의가 한 10%밖에 없었는데 교회 나온 후에 집사 장로 되고 난 뒤에 의가 10% 20% 증가하면 하나님께서 “아이고 착하구나” 하면서 천당 보내주고 보너스까지 보태준다고 그렇게 생각 안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기존교회 다니는 사람들. 그렇게 생각 안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성경을 백독, 천독을 한들 무슨 소용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기본조차도 안되어 있는데. 자기 자식을 낳으면서도 그런 기본조차도 모르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여기 애가 있는데, 애가 엄마 품에서 물병을 들고 잘 놀잖아요. 그런데 애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머니! 이 물병을 제가 가지고 놀아도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만 때리고 싶어요. 예?

“하나님! 제 기도 어때요? 참 바른 기도지요?” 그럴 때는 패버리고 싶다 이말이죠. 이게 로마서 8장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지 잘 들어보세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가요. 기도할줄 몰라요. 마치 어린아이와 같아요. 기도할줄 모른다는 것을 뭐라고 표현해 놓았는지 한번 봅시다.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빌바를 알지 못하나.”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니까 아들 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까? 뭐예요? 기도도 못하는 주제이니까 성령이 떠나겠다는 것입니까? 뭡니까? “빌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너하고 안논다”는 이야기입니까? 뭡니까? 그게 아니지요? 기도를 제대로 해서 믿을것 같으면 메시아가 왜 필요합니까? 성령님이 왜 와요?

어느 인간이 기도를 제대로 합니까? 없지요? 그 이야기 아닙니까? “어머니! 제가 이 물병을 가지고 놀아도 되겠습니까?” 자기 딴에는 엄마 앞에서 아들 노릇 한다고 보지요? 그러나 엄마 보기에는 같잖지요? 저게 또 안하는 짓을. 평소에 안하던 예의를 왜 갑자기 차리고 난리인고? 그냥 성질대로 하지.

그 아들의 책임자는 누구냐면 아들이 아니에요. 우리 인생의 책임자가 우리가 아닙니다.   믿습니까? 이것을 믿어야 그게 그리스도인이에요.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에요. 그분이 우리를 낳았어요. 여호와께서 우리를 자식으로 낳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서 살다 보니까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것’이 버릇되다 보니까, 이 되도 않는 버릇을 그대로 하나님앞에까지 가져가는거예요.

“하나님! 제가 지난 주간에 반듯하게 살았기 때문에 복주시고---” 한다든지 어떤 때에는 “하나님! 제가 많이 잘못했기 때문에 제게 벌을 주신다 해도 제가 참겠습니다” 하는 이런식으로요. 아주 얄밉다고나 할까? 지금 사랑의 관계가 아니고, 흥정의 관계. 사무적이라는 말이 적당해요. 사무적인 인식을 가지고 다가서는 것을 가지고 무슨 의? 그것을 ‘자기의’라고 합니다. ‘자기의’

십자가는 ‘자기의로움’을 부수기 위해서 십자가가 있는 거예요. 너의 의가 아니고, 부모된 나의 의로 네가 구원을 받는데 왜 버릇이 더러운 버릇이 들어가지고 맨날 기도하면, ‘지금 기도가 잘 되었을까?’ 전도하면 ‘이번 전도는 하자가 없겠지?’ 설교하면 ‘이번 설교는 천사가 와도 아마 흠을 못잡을걸?’ 헌금을 해도 ‘이번 헌금은 참 어려운 가운데 했는데 아마 주께서 아마 복줄거야.”

자꾸 측정을 하고, 자기 행동을 분석하고 자꾸 반듯하게 위장하려고 꾸미는. 이것은 정말 남의 자식 노는 것처럼 그렇게 하더라는 말이죠. 그동안 자기의가 사랑을 그렇게 방해했습니다. 자. 이것은 일종의 서론이고 요한복음 본문으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요한복음 20장에서 여러분이 주목해서 봐야 할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과 20절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0:19-20)
19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이상하죠? 예수님의 얼굴을 보면 모릅니까?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못알아봐요. “너 나 몰라? 나하고 3년동안 있었잖아. 몰라?” 이게 아니고 무엇을 보여줍니까? 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죠. 그 의미가 뭡니까? 요한복음 20:27절에도 도마가 지금 눈 똑바로 뜨고 예수님을 보지요?

(요한복음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눈도 있고 코도 있고 다 있지요? 그래서 시력 2.0, 2.0으로 예수님을 보지요? 그렇게 보고서 “아이고 예수님이네” 이렇게 인정했습니까? 택도 없어요. 다른 모습이라니까. 이것은 엉뚱한 분이에요. 저는 전목사님을 압니다. 머리는 시커멓고, 길게 기르고 있고. 이런식으로 제가 전목사님을 알고 있는데, 엉뚱한 아저씨가 와서 제가 전용렬인데요. 이러면 “머리 한번 봅시다. 아~ 머리가 길게 있구나.” 이러겠죠?

이렇게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와 관계한다’는 것을 증거로 내세운것이 손에 있던 못자국과 창자국이 있던 옆구리입니다. 놀랍게도 얼굴, 코, 눈이 아니고, 그냥 손과 발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뒤에 나오지요?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안봐도, 보지 않고 믿는자가 복되다”고 했지요?

지금 제가 중요한 대목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보고 믿는 사람은 없어요. 보지 않고도 안봤기 때문에 못믿겠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은 도마를 비롯한 열한제자도 우리와 똑같은 입장이었어요. 그들은 보았어도 예수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무엇을 보고? 손에 있는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았어요.

제가 지금 중요한 대목을 합니다. 우리는 직접 예수님을 만나서 보고 믿겠다고 하거든요. 그것은 열한제자에게는 해당이 안되지요? 봐도 못믿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다가갈 때, ‘내가 바로 너를 사랑하는 구세주’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 관계가 무슨 관계냐 하면, 창자국과 못자국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가지고 세글자로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십자가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알수가 없고, 이 말은 어떤 인간도 모른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십자가를 통해서만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깊숙한 지혜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발견이 안돼요.

인간의 힘으로 땅굴 판다 해도 몰라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아무도 모르게 되어 있는,  ‘오직 십자가로만 구원된다’는 것을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알게 됩니다. 성령을 통해서만 안다는 거예요. 메직을 찾으러 갔으니까 메직이 오면 아까 했던것을 그림으로 다시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키가 몇센티미터 이며, 예수님의 얼굴에 점이 있다든지, 이런것이 특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다. 그 특징을 이야기 해보라’고 할때, “예수님에게 있는 창자국과 못자국은 내 죄를 위해서 지으신 것이다”라고 고백하는 것. 그 다음이 중요해요.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인력으로 될 사항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의 똑똑함으로 될 사항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뭐 별로 감동이 없네. 이것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에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도마가 이것을 알고 난 뒤에 어떻게 했습니까? 20장 28절에 보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했지요. 도마가 알았던 것과 똑같이 예수님관계가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그 예수는, 제가 담대히 이야기 하지만, 참으로 건방지게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가짜 예수입니다. 제가 이것 때문에 욕 많이 얻어먹는데요.

분명히 단언해서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제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야기합니다. 도마가 아는 식으로 예수를 모르면, 그 사람은 여전히 가짜 예수를 믿고 지옥가는 중입니다. 우리 동네에 와 보시면, 동화사 가는 길이 있고 파계사 가는 길이 따로 있어요. 그림으로 그릴께요. 우리집에 여기 있고, 여기가 지묘동이고, 길이 이렇게 나 있는데.

이쪽으로 가면 동화사 가요. 이렇게 가면 파계사 가는 길입니다. 거리가 멀어요. 수십키로는 떨어져 있는데. 여기는(동화사) 101-1번이 가고, 이쪽은(파계사) 401번이 가요. 버스 노선이 다르면 서로 다른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 맞지요? 다른길로 가니까 노선이 다른거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자기는 동화사 갈거라고 생각하고 401번을 타면 어디로 갑니까?

동화사로 가지 못하고 파계사로 가지요. 버스를 잘못타면 자기가 의도하지 않은 다른길로 가버려요. 지금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바로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아시고, 바른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은 예수님이 제시하는 방법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못자국이 있는 손과 창자국이 있는 옆구리, 이것을 통해서만 동화사 가는 길, 진짜 101-1번을 타고 갈수 있는 겁니다.

이것을 증거하지 않으면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이것을 증거하지 않는 다른 것을 전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버스 타고 지옥가고 있는 중이에요. 지옥가는 버스를 타고 있는 겁니다. 물론 대부분이지만. 거의 99.999%입니다. 9자 하나 더붙이고 싶어요. ‘거기 가도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하고, 이웃사랑도 하라고 하고, 좋은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데나 가서 구원받으면 되지.’

아니에요. 101-1번하고 401번하고 갈 때 비슷하게 가요. 노선 대부분이 비슷한 노선이에요. 비슷하게 보이지만 결국은 끝이 하나는 동화사로 가고 하나는 파계사로 간다니까요? 교인수가 세명, 두명으로 줄더라도 십자가만 증거해야 될 이유는 본인이, 목사 자신이 버스 운전사냐 아니냐 그문제에요.

천국으로 인도할 맘이 있느냐는 거예요. 사람을 끌어 모으려고 하면, 파계사 가는 쪽으로 하세요. 민중들이, 대중들이 원하는 그 예수를 증거 하세요. 그러면 큰 교회, 안산동산교회같이 큰 예배당도 짓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버스가 크다고 해서 그 버스가 천당가는 버스가 아니에요. 버스 크고 안락하다고 해서 그 버스가 천당가는 버스가 아닙니다.

버스가 좀 덜컹거리고, 운영이 잘 안되어서 버스가 가는데 전기세도 못내서 전등불이 깜빡거린다고 할지라도, 정말 천국 가는 사람은 ‘예배당에 물이 왜 새느냐? 습기가 차느냐?’ 그런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진짜 천국갈 사람은 ‘우리 목사님은 내 죄 때문에 돌아가신 그 십자가의 피흘리심과 못박히심, 그런 예수만 - 얼굴이 달라서 어떤 예수가 나타날지 모르니까 - 전한다는 그것만 중요하죠.

예수 얼굴 따져서 아는 그런 예수 찾지 마세요. ‘예수가 키가 몇센티나 되는가?’ 그런식으로 찾지 마세요. 예수는 그냥 우리가 모르는 예수인데 다만 진짜 예수의 차이점은 뭐냐? 마귀하고 예수님의 차이점은, 사탄은 우리의 친구로 다가오고, 예수님은 “나는 네 죄 때문에 죽었다”고 그렇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요한복음 20장을 통해서 제가 단단하게 이야기합니다.

다른 예수는 없어요. 십자가진 예수 말고 다른 예수는 없어요. 진짜 예수는 “내가 너 때문에 피 흘려서 죽었다”는 그 예수만 있으면 천국가는데 더 이상 보탤것이 없어요. 어떤 인간의 행함을 추가할 이유 없이 그 차는 어디로 가는 버스입니까? 천국가는 버스입니다. 만약에 교회도 한번도 나온적도 없고, 절에 다니던 사람인에 아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여보! 당신 죄 때문에 누가 돌아가셨는데 그 돌아가신 분이 우리의 구세주래. 그분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대.”

이렇게 할때, “나는 안믿는다”라고 할때 그 사람은 이미 마음속에 뭐가 있다? 아까 처음에 강의할 때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죄? 나, 죄인 아냐. 나도 의인이야.” 아까 처음에 강의 시작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내 의를 포기 못하겠다’는 거죠.

‘단지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내가 지금도 잘났지만 거기에다가 더 잘난 인간으로 포개고 포개서 훌륭한 인간으로 남에게 사람행세 하는것이 내 기쁨이지, 누가 내 죄 때문에 돌아가셔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영 관심없네.’ 그렇게 나오면 우리는 이렇게 봐야 돼요. 그 사람의 발바닥을 봐야 돼요. 그 사람이 지금 버스 노선을 잘못 타고 있는 겁니다. 지옥가는 버스를 타고 있는 중입니다.

지옥 가는 버스에 승객들이 옹기종기 많더라도. 그 승객들, 한사람, 한사람이 갖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뭘 포기 안합니까? 큰교회 특징이 절대로 ‘자기의’를 포기 안해요. “목사님! 제가 헌금 많이 냈지요? 교육관 짓는데 제가 천만원 냈지요? 이번에 전도대회 하는데 제가 다섯명 전도했습니다. 새벽기도까지 다 나왔습니다.” 계속 마일리지 쌓듯이 ‘자기의’를 쌓고 또 쌓는거예요.

그러니까 그 버스가 비좁아서 점점 더 큰 버스를 만드는데, 문제는 버스가 크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노선이 어느 쪽입니까? 그 노선이. 지옥 가는 노선이라는 말이죠. 파계사가는 401번 노선이라는 말이죠. 천국갈 버스가 아니고 어디로 간다? 단체로, 그것도 단체로 지옥가는 노선의 버스를 타고 천당간다고 지금 찬양대 만들어서 찬양을 크게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이땅,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사는데, 돈버는데 온통 관심이 다 팔려 있습니다. 우리가 돈을 버는데 정신이 팔려 있든 말든, 그게 우리 주특기이니까 그렇게 하든지 말든지 간에, 주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하심으로, 이미 구원받는 계획은 확정된거예요. 우리가 돈을 벌든, 백수가 되든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까 매직이 없어서 못다한 그림을 이제 그려 볼께요. 강의시간이 이렇게 조용하다는 것이 이렇게 큰 축복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네요. 지금 떠들어 보세요. 강의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참 감사해요. 자. 여기에 유리판이 있습니다. 유리판은 딱딱하지요? 이 유리판이 우리 자신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 여기에다가 주님의 거룩, 주님의 의를 흘려 보내면 이것이 스캔하듯이 지나가면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착각을 하느냐 하면, 주님의 거룩이 유리판 위를 죽 지나가니까 유리판이 이것을 흡수하면, 주님께서 지나가기 전보다 더 나은 착한 유리판, 거룩한 유리판이 된다고 착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죄를 지으면 구원이 덜 되고, 내가 착한일을 하면 구원에 가깝다고 스스로 완전히 착오를 일으킵니다.

주님께서는 원래부터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우리한테 기대를 안해요. 왠줄 알아요? 우리는 돈밖에 몰라요. 우리는 남을 만날 때, ‘저 사람을 만나면 돈이 몇푼이 더 생길까?’ 이렇게 남을 이용만 하는 인간들이에요. 예수를 1년믿고, 2년 믿어도 소용없어요. 죽을때까지 나에게 이익되는 사람이 아니면 우리는 상대를 안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주께서 우리를 버린다는 말입니까? 그런 조건하에 버리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그런 인간인것을 다 아십니다. 지난 8월초에 대구에 있는 세종수련원에서 우리가 ‘선지서’를 강의했거든요. 십자가마을의 노회 수련회죠. 그때 ‘아모스’를 강의 하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지나갔기 때문에, 우리를 다 아신다고 했어요.

그냥 주님께서 우리보고 “야! 좀 착하게 살아라. 바르게 살아라.” 이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아예 우리를 통과해 버려요. 통과하니까 우리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말씀해봐야 못지키는 것을 주님께서 지나가보니 이미 알아요. “안되는 인간이구나. 계속 잔소리 하고 백날 징계해 봐야 될 인간이 아니구나.”

‘호세아’를 보면 그렇게 지나가시면서 사랑관계를 말씀합니다. 뭡니까? “내가 이미 너희를 알고 사랑했다”는 겁니다. 두분 오시기 전에 강의한 것이 그거예요. 엄마가 애를 낳을때, 애한테 엄마가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애를 낳자 마자 그 애가 “충성! 감사합니다.” 이런것을 엄마가 안바랍니다.

애가 똥을 싸든, 뭘 하든 그것은 자기자식이기에 이미 구원하기로 인도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도 모르고 애가 “어머니! 제가 지금 행동이 반듯하지요?” 이렇게 하면 부모님이 슬퍼합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을 주장하기 때문에? ‘자기의’ 사랑해 주신 분에게 ‘고맙습니다’ 하면 될 문제를, 갑자기 “저 어때요?” 생뚱맞게 이 소리가 왜 나옵니까? 예?

“제가 이번에 쉬지 않고 기도를 한 세시간 했는데 어때요?” 이게 생뚱맞게 왜 나오냐는 말이죠. “고맙습니다” 하면 될일을. 지금 불신자가 때려 죽여도 못하는 소리가 뭐냐? “주님! 용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소리 못합니다. 왜냐하면 ‘고맙다’고 하는 것은 기존의 자신을 무엇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됩니까?

“나는 내세울 나의 의가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천 독을 해도 내 ‘의’는 안나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내가 믿는 것은 주님의 피밖에 없습니다.”라고 했죠. 이것을 인정하고 주님께 “고맙습니다” 라고 했기 때문에 이것은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불신에게서는 이런 고백이 나올수가 없어요.

유리판 이야기 다시 할께요. 주님께서 지나가면, 아시고 지나가기 때문에, 지나갈때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게 되는 겁니다. “주여! 저 어때요?” 15센티미터. “주여! 저 착하지요?” 20센티미터. “신앙 생활 한 30년 했기에 제가 훌륭하게 되었지요?” 50센티미터. 이런 쓸데 없는 생각을 왜 합니까?

물론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해서 우리를 지옥보내는 분은 아니지만. 이것은 자기에게 짐이 돼요. 스스로 자기가 좌절하고, 낙담하고 그렇게 된다고요. 까불다가 또 죄짓고서 낙담했다가. - “난 안돼. 지옥에 가야돼”. 이렇게 하고 있다고요. 주님께서는 아예 기대를 안하고 있는데.

“뭐야? 너 지금 뭐하고 있는데!”
“부족하잖아요.”
“원래 부족한 거야. 원래.”

원래 부족한 것이 새삼스럽게 뭘 부족하다는 타령을 하고 있느냐는 말이죠. 지난 수련회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이 꼭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산다는 것 자체가 죄라고 했어요. 사람이 살아 있는것 자체가 그냥 죄에요. 그냥. 살아 있으면 남에게 부담 지우게 되어 있고, 살아 있으면 남에게 불평하게 되어 있고, 하나님을 불평하게 되어 있고요.

죽으면 그런 소리가 안나올것을 괜히 살아가지고, 세상이 내뜻대로 안된다고 한스러워하고. 산다는 것 자체가 죄인데 새삼스럽게 뭘 더 죄를 지었다고 해서 죄인되겠습니까? 다른 이야기 한번 해볼께요. 성경 이사야 53장 10절 한번 찾아 보겠습니다.

(이사야 53:10,11)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그들의 죄악을”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친히 담당하리라” 이것을 믿습니까? 사람이 주님 앞에 쓸데없이 ‘자기의’를, 반대로 이야기하면 자기부족을, 그것을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이미 담당한 사실 가지고 새삼스럽게 “나 나쁜놈입니다” 하고 회개한다고 착한 사람으로 봐줄줄 압니까?

그리고 “나, 이렇게 새사람 되어서, 술 끊고, 담배 끊었습니다.” 그러면 구원 받는 일에 더 원할해질까요? 구원은 버스의 노선으로 결정되는 겁니다. 버스 타가지고 넥타이 반듯하게 맨다고 해서, 구원받는데 더 수월한 것이 아닙니다.

(돌발질문) 
그 반대의 경우가 있을수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죄를 지었는데 맘이 괴롭다는 말이죠. 내가 죄를 지었다는 것은 아는데 그러면서도 ‘아! 하나님께서는 내 죄를 친히 담당했으니까’라는 그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실거야. 나는 이제 괜찮을 거야.’ 그러면서도 그 고민속에서도 여전히 죄성은, ‘나는 죄인인데---’ 하면서 고민하거든요.

(답변)
고민할 때 그 고민이 다시 자기에게로 가는 고민이 아니고, ‘죄지어도 괜찮다든지, 혹은 죄를 더 지어야지’, 이런 고민이 아니고, 그 고민을 거쳐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버스로 관심이 돌려질때만 이것이 성령의 역사고요. 만약에 고민을 하다가, 목사님이 강의한것을 들어 보니, “이사야 53장에서 우리의 죄를 어떻게 했다고? 친히 죄를 담당했다고? 야 신난다. 죄를 더 지어도 되겠네!”

이런식으로 자기에게로 가버리면 내 버스가 되어 버려요. 그런데 내 버스는 없어요. 나의버스로 가는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이름으로 가는 천국가는 버스는 없어요. 오직 천국은 누구 이름으로 가느냐 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갑니다. 다른말로 하면, 예수님 버스 노선으로 가는 것이지, 내가 운전해서 가는 그런 버스는 없습니다.

그런 버스는 천국문에서 다 닫아 버립니다. “이 세상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적이 없다.”(행 4:12) 예수님의 이름외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적이 없다는 것은 내 이름도 무슨 이름은 아니다? 예수이름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할 자격이 없어요. 그래서 마지막 기도할 때 누구 이름으로 기도합니까? 내이름으로 하면 안되고 누구 이름으로 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 이름은 파버려야 돼요. 학생때 말썽꾸러기 명찰이 있잖아요. 학생주임이 못된 학생에게 와서 “네가 명찰이 이게 뭐야?”하면서 확 뜯어 버리잖아요. 명찰 떼어 버리면 나는 졸지에 이름이 없지요. 이름이 없다는 말이 뭐냐 하면, 이름이 없으니까 나는 내 자존심도 없고, 나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된다는 말이죠.

내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임을 느끼고, 거기에 그렇게 하신 분이 바로 주의 이름인것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왜냐하면, 내이름은 후벼져 날라가 버리고, 그 자리에 주님의 이름으로 예속된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구원되는 거예요.

(돌발질문)
자기 이름대신에 예수이름이 들어가는 거네요.

(답변)
붙는 거지요.

(질문)
그럼 그 사람이 예수가 되는 거네요?

(답변)
예수에게 붙잡힌 죄인 되는 거지요. 남들 보기에는 ‘예수안’이라는 거죠. ‘예수안’에 들어갔다는 말은 변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 있지요? 이 안에 휴지를 잡아 넣으면 남들보기에는 없어졌잖아요. 들여다 보니 있네. 어떻게 있는가? 시커멓게 있잖아요. 우리는 시커먼 죄인의 입장에서 하얀 주님안에 들어가 있죠.

휴지통이 멋지네요. 예화 들기에. 이거 이해됩니까? 외부에서 보면 뭐가 있어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나는 죽고, 외부에서 보면 누구 이름만? 그리스도의 이름만 드러나는데, 내 자신은 알죠. 들여다보니까 이것은 내가 아니고, 주님이고 나는 무엇으로 들어 있습니까? 당장 죽어야 될 시커먼 죄인으로 등장하죠.

이것을 언약이라 합니다. 언약! 노아 방주 안에 누가 들어 있어요? 노아가 들어 있죠. 노아 때문에 구원받았습니까? 방주 때문에 구원받았습니까? 방주 때문에 구원받았죠. 노아는 거기서 헤엄안쳤습니다. 그냥 들어가 있었는데 나중에 방주에서 나오고 난 뒤에 자기 죄를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정결한 제물을 잡아서 희생제물을 드리지요?

그것은 뭐냐 하면, 숨어서 구원받은 거예요. 덩치 큰 것 안에서 숨어서 구원받은 겁니다. 그것을 예수 안에서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면 ‘예수 안에서’ 우리가 죄인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꾸 이 안에서 우리가 잘나야 된다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아까 그 유리판에서,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스쳐서 구원받는데 마치 우리가 괜찮은 유리판, 더 착해진 유리판 되는줄 알고 있어요.

그리되어서 우리에게 촉촉하게 물기가 들어가면 큰일나요. 그러면 유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깨져버립니다. 제가 지금 하는 말을 여러분이 믿어 주기를 바랍니다. 제 소원입니다. 다 믿으시겠지요. 그러니까 제 말에 반발하지 않으시는줄 제가 알겠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대체 목사님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이 뭐라고 하는 겁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예수님이 자기를 구원자로 나타낼때는 반드시 19절에 있는대로, “네 죄를 위해서 내가 죽었다는---.” 다시 봅시다. 20절을 다같이 읽어 봅시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그거 아닙니까? 그래요!

예수님의 자기얼굴을 들이대면서 “나, 기억 안나나? 내다!” 그게 아닙니다. 참 이게 어려운데. 무엇으로 보여준다? 뭘 보고? “손과 옆구리”를 통해서 “너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 죽었잖아” 하고 십자가를 통해서만 나타나신다 이말이죠. 누가복음 23장을 봅시다. 거기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있지요. 그 두 제자가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예수님을 알아봤습니까? 못 알아봤습니까?

이상하잖아요. 이상하지요? 3년간 함께 있었는데. 그 두 제자가 어떤 제자냐 하면 열두제자 가운데 두 명입니다. 3년 동안 함께 있었으면 그 얼굴 못 알아보겠습니까? 한 달에 한 번씩 봐도 내가 송 목사님의 얼굴을 아는데. 못 알아보겠어요? 알잖아요. 그런데 못 알아봤어요. 그런데 언제 알아보았는가? 26절입니다.

 (누가복음 24:26-31)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29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 저희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런식으로 성경을 가지고 설명하실 때 31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저희 눈이 밝아져” 비로서 그 분이 예수님인줄 알지요. 그러니까 직접 예수님이 나타나도 우리는 못알아 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보고 알아본다? 예수님의 창자국과 못자국을 보고 “주님은, 바로 진짜 예수님은 내 대신 돌아가신 주님이구나!” 하고 믿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거기 20장 29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그 다음에 뭡니까? “보지 못하고 믿는자가 축복받았다”는 말이 아닙니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앞으로 너희들이 보고도 안 믿었지만 믿게 된것은,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고 그렇게 된 것처럼, 앞으로도 두고두고 오는 모든 사람들이 진짜 택한 백성은 오직 십자가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진짜 예수냐 아니냐가 가름된다 이말입니다. 

그 사실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보지 않고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미리 앞당겨서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자기의’를 주장하는 이것이, 즉 자기의를 추가시키는 예수는 전부다 가짜 예수에요. 노선이 달라요. 동화사로 가는 것이 아니고, 파계사로 가는 겁니다. 우리 동네에서 길이 갈라져요.

우리 지금 몇 명 모였습니까? 열명이 채 안되잖아요. 지금 열명이 채 안되지만 우리가 함께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뿐이잖아요. 십자가! 그 십자가가 바로 401번이라는 말이죠. 십자가외에는 천국을 못봐요. 빌립보서에 나오죠. 십자가외에는 천국이 안보입니다.

(빌립보서 3:4-11)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 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우리 다 같이 ‘자기의’를 쌓고 있어요. 예수 믿어도 우리는 사는 보람을 못느껴요. 그렇게 ‘자기의’를 쌓고 있지만, 단지 우리는 뭘 느끼냐 하면, 내가 쌓은 이 ‘자기의’가 주님 앞에 쓰잘데 없다는 것을 알잖아요. 성경 천독하고, 헌금 1억을 하고, 전도 천명하는 그것이 천당가는데 전혀 보탬이 안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잖아요.

그런데 기존 교인들은 그것을 마치 훈장처럼 주렁 주렁 달고 산다는 말이죠. 그것은 기존 교회 목사들이 마치 양아치처럼 인간의 약점을 노리기 때문에 그래요. “당신 집안 안되지? 사업 안되지? 애 아프지? 하나님을 안섬기니까 그렇잖아. 하나님은 사랑을 줬는데 당신은 하나님께 무엇을 해주었는데? 바쳐야지! 낯짝도 두꺼워. 왜 안바쳐! 주께서 그런 어려움을 준것은 돈바치라고 그렇게 어려움을 준거야. 바쳐봐! 여기 김장로, 최장로, 인색하지 않고 바치고 난뒤에 복 다 받았어. 하나님께서 복주나 안주나 시험해 보라고 했으니 한번 시험해봐.”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런 예수는 파계사 가는 버스안에서 저희들끼리 통하는 예수입니다.   점쟁이하고 목사의 공통점이 뭔지 압니까? 인간의 약점을 파고 드는 거예요.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이고 안풀리는 이유가 뭔가 하나님께 성의를 표시하지 않아서 그렇구나. 그래 나도 정신차리고 성의를 표하면 복주겠지.’

그런데, 사람이 ‘자기의’가 사라지면, 복을 더 줍니까? 그게 아니고 복이라는 것은 사람이 아무리 얻고자 해도 알지 못하는, ‘나는 죄인이며 그 죄를 주께서 친히 담당했다’는 이 사실이, 이것이 사람의 지혜로는 알수 없는 하나님의 깊숙하게 숨겨져 있는 십자가 비밀을 캐내는 능력이고 구원의 복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답변해보세요. 사람이 ‘자기의’를 쌓아서 복받는 것이 기분좋습니까? 자기죄를 알 때 가장 기분 좋습니까? 어느 것이 기분 좋을까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은 죄를 안지은 분들이니까 한번 상상해 보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죄를 완전히 지었을때 그 때 기분이 좋습니까? 아니면 ‘자기의’를 쌓을때 기분이 좋습니까?

(듣는이의 답변). 자기의를 쌓을때 기분좋죠. (강의계속). 자기의를 쌓을 때의 기분좋은 것은 한순간의 기분이고 더 큰 의를 뛰어 넘어 쌓아야 할 숙제로 다가옵니다. 지금 자기 점수가 70점 같으면 다음에는 80점 될 때 기분이 또 좋아요. 이것은 스스로 늪에 빠졌어요. 마귀의 늪에 빠졌어요. 그런데 자기가 빵점 같으면 이것보다 기분좋은 것이 없어요.

왜? 모든 것이 축복이니까. 빵점 같은 나에게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은혜로 다가옵니다. t속된 말로 이것은 기분 째집니다. 기분 째져요. 자, 여기서 강의한다고 시끄럽게 떠든다고 옆집에서 음악 크게 틀어버리고, 또 이 장소가 왔다 갔다 하기도 하면서 산만합니다. ‘내가 먼데서 강의를 하러 왔는데 대접이 이게 뭐냐’ 이러면 제가 강의 힘들어서 못합니다.

‘주여, 조용한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떠드는것이 정상입니다’ 이러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면 조용해도 감사하고, 떠들면 정상이니까 감사하고요. 안떠들면, ‘시끄러워야 정상인데 왜 안시끄럽지? 옆집에서 떠든다고 음악을 크게 틀어놔야 정상인데 왜 안틀지?’ 그것도 감사하고.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냐 하면, “범사에 감사하라”가 되는 거예요.

아까 그 애 이야기를 다시 해보죠. 애가 가지고 놀았던 저 물병. 애가 엄마보고 하는 말. “엄마! 이 물병 가지고 놀아도 됩니까? 충성!” 이렇게 하면 엄마가 싫어요. 애가 좀 애 다우리는 거죠. “엄마! 이거 봐라! 나 물병 갖고 논다!” “그래. 그게 바로 너의 모습이야.” 엄마의 사랑을 아니까 그렇게 물병을 가지고 노는 거예요. 주님은 사랑으로 왔는데, 왜 우리는 사무적으로 나섭니까? ‘사무적’, 무슨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사무적.’

딱딱한 것.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으로 왔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딱딱하게, 절도 있게, 어색하게 나가냐는 말이죠. 어색하게. 어색하게 나간다고 점수 더 줄줄 압니까? 안쳐주거든. 우리 꼬라지를 아시니까. 뻔히 알잖아요. 돈밖에 모르는 것 아는데. 그것을 위장한다고 “주님! 이정도면 제가 착하게 살았지요?” 왜 이렇게 딱딱하게 나오느냐 이말이죠.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살지. 예?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러면 되는데, “저 어때요? 지금쯤 착하지요?” 그런 쓸데없는. “소도 제 주인을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을 알건만은 내 백성이 어미를 몰라보고 아비를 못 알아봐요.”(사 1:3) 사랑관계를 알아야 할텐데, 사랑관계를 모르고 사무적으로 나오니, 이게 얼마나 뻑뻑합니까?

기계 돌아갈 때 뻑뻑하면 불납니다. 불똥 튑니다. 제발 여러분! 인생을 사시면서 뻑뻑하게 살지 마세요. 친히 담당한것을 알고 이미 천국가는 노선의 버스를 탔습니다. 그 버스 타면서 똥쌀수도 있고, 오줌 쌀수도 있어요. ‘엽기적인 그녀’보면 지하철안에서 술먹고 구역질도 해요. 그래도 지하철은 달립니다.

제발 자기 잘난것, 이제 그만 접어 두시고 ‘이 버스 어디로 가지? 피가 묻었구나’ 그것 자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다 보니까 ‘너만 잘났나? 나도 잘났다. 너만 똑똑하나? 나도 똑똑하다.너만 의로우냐? 나도 너못지 않게 의롭다’ 쓸데없는 피곤한 경쟁. 이제 지쳐버렸습니다. 주님! 못난 인간 그대로 왔사오니, 친히 담당하셨다는 그 약속을, 저희들 사랑의 말씀으로 곧이 듣고, 이제는 어리광을 부릴수 있는 그런 자유를 찾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강의후 후속질문

(질문자1)
죄와 의에 대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친히 담당하셨기 때문에, 내가 이제부터 죄를 마구 저질러도 되지 않느냐?’ 라는 쪽이 하나 있고요. 또 다른 쪽에서는 예수가 내 안에 들어와 계시기에 예수와 나의 합일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본인이 뭔가 글을 쓴게 있는데, 그러다 보니까 부처도 예수도 다 동일하다는 논지를 펴는 것 같아서, 그 부분에 대해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이목사님) 이 질문으로 대신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면 본인이 직접 질문을 해보세요. 질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을수 있으니까요.

(이목사님) 부처부터 이야기할께요. 부처는 대자대비하신 ---

(질문자 2) 제가 (직접) 여쭤볼께요. 십자가의 능력이요. 만약에 택자와 불택자가 있다면, 택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요? 아니면 모든 인류에게 똑같이 영향을 미치는 겁니까?

(이목사님) 그게 선택이라는 말이---

(질문자 2) 사람들은 그러더라고요. “십자가는 모든 인류에게 최상의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것을 믿어야 할것이 아니냐?” 이게 기본적인 논리거든요?

(이목사님) 그것은 잘못되었습니다. 그것은 크게 잘못된 거예요. 그것은 성경책이 아니니까 일단 그것은 엉터리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되시고. 로마서 8장 30절에 있는대로 선택이란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이라면 그 논리가 맞아요.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선택을 하고 너희를 찾아 왔다고 한겁니다.

그게 굉장히 기분 좋은 말이에요. 그냥 “내가 너를 찾아왔다.” 이것 보다도, 어떤 아가씨가 “오빠! 내가 당신을 좋아해서 왔어요” 이것 보다도, “내가 이 세상에 많은 남자들이 있는데 그 남자들 중에서 당신을 선택해서 왔다”고 선택이란 말을 붙이면 듣는 오빠가 아주 기분 좋은 거예요.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너를 사랑해.”
“저 사람은요? 저 사람은요?”
“그게 아니고 내가 너를 선택해서 사랑했어.”

이러면 사랑을 받은 사람에게는 굉장히 기분이 좋아요. 기분이 굉장히 좋고. 만약에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 줘야,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가만히 계세요. 우리가 알아서 찾아가겠습니다.” 이런식으로 나가면 ‘선택’ 그러면 기분 되게 나빠요. “주님 저를 선택한것은 기분 좋은데요. 저애는 저하고 친구사이고, 저하고 아는 사이인데 왜 저애는 천당 안보내줍니까?” 

그리고 “우리 엄마는 왜 절에 나갑니까? 제가 지금 기분 좋다고 안합니까? 주님께서 저를구원해 준것은 기분 좋은데, 왜 우리 엄마는 절의 부처를 믿다가 죽게 하십니까? 아! 기분 되게 나쁘네. 하나님! 나 기분 나쁩니다.” 이러거든요. 이것은 하나님이 다가와서 구원해주는 구원을 생각안하고, 하나님은 방석깔고 앉아서 저기 계시고, 우리가 알아서 다가 가겠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다가가면서 자꾸 주위를 둘러 보니까 ‘선택’이라는 것이 기분 나쁜거예요.

“아! 주님께서 이것은 공평치 않게 하신다. 물론 나에게는 기분 좋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기분 되게 나쁘네.” 이렇게 나옵니다. 이것은 내가 다가서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창세전에 이미 우리를 버렸기 때문에 다가 설수 있는 입장이 못됩니다.

에스겔 37장에서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해골이라고 합니다. 해골입니다. 해골이 스스로 깨달을수 있습니까? 안되지요? 해골이 깨닫는 경우는 외부에서 능력이 임해야 깨닫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해골이 아니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해골로 봐요. 만약에 해골이 깨어나서 하나님을 안다면, 이미 그 사람은 해골이 아니라 주의 새사람된 사람이에요.

새사람이 된 사람같으면, ‘아, 내가 해골인데 주의 능력이 임해서 구원받았구나’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내가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냥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고, ‘선택해서’라는 말을 집어 넣어서 다가온다는 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내가 다가서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알아서 골라서 믿는 것은 아닙니다. 주께서 믿게 하시니까 믿죠.

(질문자 1) 은혜라는 부분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베풀어 지는 은혜가 과연 무엇인가?” 라는것인데요.    

(질문자 2) 아니 저는 그 말씀이 아니고요. 목사님 말씀은 알겠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정작 제 질문에는 대답을 안하셨어요.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죄를 씻는 능력이잖아요. 죄를 씻는 그 능력이 인류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미치는 것인지? 아니면 흔히 이야기 하는 택자, 불택자에서 오직 하나님이 선택한 택자에게만 미치는 것인지?

(이목사님) 십자가의 속죄는 택자에게만 미치고,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는 이른비와 늦은비처럼, 이땅에 살면서 자기 자력으로 안살고 주께서 주시는 은혜로 사는 그것을 주시죠. 그 은혜를 주십니다. 모든 것을 주시죠. 공중의 참새가요

(질문자 2) 그게 흔히 이야기하는 보편은사, 일반은총이라고.

(이목사님) 예. 일반은총이라고들 하는데.

(질문자 2) 그렇게 신학에서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아는데요. 저는 신학은 한번도 해본적은 없는데, 해본적은 없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이야기될수 있는 것은 아닌것 같거든요? 왜냐하면, 십자가의 능력이 온 우주적이라는 것은 맞잖아요. 그러면 알미니안, 그렇게 어렵게 이야기할것 없이 어떤 입장에서는 (우리쪽에서) “믿어야만 한다”고 하고, 또 칼빈쪽 입장에서는 - 저는 ‘알미니안’이나 ‘칼빈’쪽 책도 읽어본 적도 없지만 사람들이 그렇게들 알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 말이(논리가) 안맞죠? 왜? 십자가의 속죄가 온인류에게 미치니까. 그러니까 논리가 안맞죠? 알마니안쪽에서 보면 그게 말이 맞죠? 요한웨슬레 쪽에서 보면 그게 말이 맞죠?

“분명히 온 인류의 죄를 사했다. 그만큼 십자가의 능력은 파워플하다. 하지만 너희들이 안믿으면 소용없다.”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이목사님) 그게요. 십자가안에 보면 용서함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안에는 심판함이 있습니다. 1차적으로 다 심판하고, 그중에서 건질자만 건지는 거예요. 요한웨슬레는 무엇을 빠뜨렸느냐 하면, 십자가를 생각할 때 용서의 십자가만 생각했지, 전 인류를 심판한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거예요.

불도우저 밑에 있는 오징어가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찌그러져 버려요. 완전히. 어떤 인간도 자기힘으로 구원받을수 없음이 십자가로 밀어 붙임이에요. 십자가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했으니까, 모든 사람이 저주받은 거예요. 십자가가 지나가는 것은 저주받아 마땅함이 지나가는 거예요.

십자가가 지나간 아스팔트에 기록되어 있어요. 저주받아 마땅함. 이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는 모든 사람이 저주받아 마땅한데, 그중에 가끔 택한자만 건짐으로 말미암아, 택한 자는 ‘주의 은혜로만 택함받았다’고 이렇게 고백이 되는 겁니다. 요한웨슬레는 모든 사람이 심판받아 마땅함을 빼버린 거예요.

십자가를 바라 보면서 ‘다 저주받아야 마땅하구나’하는 것을 빼버린 겁니다. 그리고 사람이 예수 안믿고 죽으면 어떻게 될줄 압니까? 예수 안믿고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파내가지고, 예수 안 믿었다고 심판해 버립니다(요 5:28,29).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고 쥐새끼 처럼 빠져가지고, ‘나는 평생토록 교회 안다녔으니까 드디어 나는 성공’ 하고 자기는 안심 푹 하면서 죽었는데, 죽었다고 해서 예수님의 손아귀를 못벗어나요.

죽어도 무덤을 파헤쳐서 예수 안믿는죄로 십자가를 모르는 죄로 저주해 버립니다. 이것은 뭐냐하면, 이미 인간은 십자가를 통해서 모두 다 저주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감리교, 요한 웨슬레 쪽에서는 이야기를 안해요. 왜 안하느냐? 그리되면 사람들이 기분 나빠서 교회를 안나올까 싶어서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모조리 심판하고, 심판하니까 전부 해골된거예요. “아이고! 구원받을 자격 없구나.”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이! 너 이리와. 너 선택받았어” 이게 왠 은혜인지 “주여! 모든 것이 주의 공로입니다”하고 감격하면서, 기뻐하면서, 눈물 흘리면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하고 이렇게 나가는 거예요.

칼빈교, 감리교, 나는 둘다 별로 안좋아하기 때문에 둘다 성경적이 아니니까 빼버립시다. 둘다 성경적이 아니니까. 성경적으로 이야기해서 십자가는 모든 것을 심판해버리고, 그렇게 심판하고 지나간 뒤에, “자. 이제 자력으로 구원받을 사람없지? 자격 없지?” 조용하죠. 다 죽어 버렸으니까. 이때 “자! 내가 여기서 깨워준 사람만 일어나서 구원된다”해서 구원됩니다.

(질문자 2) 제가 생각하기에 십자가는요. 두가지에요. 한가지는 십자가밑에 모든 이들을 죄인으로 보는 거예요. 아담이래로 모든 사람을 십자가밑에 죄인으로 보는 거예요. 이게 목사님이 말씀하신 십자가죠.

(이목사님) 맞아요. 맞고---

(질문자 2) 거기서 죄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발견됨과 동시에, 그 십자가의 능력이 죄를 없이 했다는 것이죠.

(이목사님) 예. 몽땅 다!

(질문자 2) 몽땅 다! 제가 그것을 발견해 놓고도, 어떤 나의 잘못이 있다고 할때---

(이목사님) 그게, 그 이유가 신약성경만 보니까 그런 현상이 나올수 있는데, 이해는 합니다. 구약에 보니까, 언약 밖에 있는 사람과,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이고,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이 이방인인데, 이방인은 저주를 받게 해요. 저주를 받아야 될 사람입니다.

신약에도 나오죠. 하나는 진노의 그릇이고, 하나는 긍휼의 그릇이고(로마서 9:19-23). 저주 받도록 작정된 자는 저주를 받아야 돼요. 이것이 여호수아에 나오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저주 받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일을 하십니다. 뭐냐하면, 그림을 그리는데 나무를 이렇게 그리잖아요. 그러면 나무 말고 초가집도 있어야 된다는 말이죠. 

초가집에 해당되는 것도 그려야 돼요. 이것이 지옥이라면, 지옥갈 사람은 지옥으로 그려내고, 나무는 천국으로 그려주고. 천국과 지옥이 함께 다 있을때 “그림 조오타!”하는 겁니다. 천사가 하나님께 하는 말,

“왜 저 그림이 좋습니까”
“봐라. 저 사람은 지옥에 있잖아. 저 사람은 천국에 있잖아.”
“그림 좋으네요.”
“그림 좋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 입장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천국가 지옥이 둘다 있을때, 그것이 그림이 좋아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너나 할것없이 다 구원받아야 기분이 좋다고 하는게 그것은 피조물이 자기 욕심을 낸 것이고, 실제로 성경에서는 ‘지옥갈 사람은 지옥으로, 천국갈 사람은 천국으로’ 갈 때, “다 이루었다. 멋지다. 그림 진짜 좋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질문자 2) 제가 하나 더 여쭤 보고 싶은데요? 십자가를 정리한다면 두가지인데, 한가지는 저주의 십자가. 또 한가지는 구원의 십자가. 어느쪽입니까?

(이목사님) 안에 같이 들어 있어요. 그게 구약에 보면 ‘언약’이거든요. 언약. 언약안에 보면 둘로 되어 있어요.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 있고 맞은 편에 죄가 들어 있어요. 이게 언약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 언약은 우리를 위함이 아니고, 언약을 만드신 하나님을 위함이거든요.

언약은 두쪽으로 나뉘어져 있어요. 하나는 죄를 용서하는 것과, 무엇이 죄라는 것을 밝히느 거죠. 십자가를 뭐라고 하냐면, ‘새언약’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새언약’이라고 한다는 것. ‘새언약’은 이 언약이 모형이 아니고, 흔적이 아니라 실체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지옥갈 사람은 반드시 지옥을 가야되고, 천국 갈 사람은 천국으로 갈 때, 그때 언약이 완성되는 거예요.

(질문자 2) 그럼 무게중심은 두 개에 가야 하는 거네요?

(이목사님) 다 같이 가야되죠. 다 같이. 

(질문자 2) 저주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

(이목사님) 다 같이 있어요. 다 같이.

(질문자 2) 제가 생각하기는요. 저주는 예수께서 받으셨고요. 모든 저주는 예수께로 돌아가요. 사람이 아니라요. 그런데 구원은 모든 인간에게 돌아가요.

(이목사님) 그런데 그 저주받은 것이 우리를 위함이 아니고, 그것은 아버지하고 이야기 한것이기에 우리는 배제합니다. 우리는 상대 안해요. 예수님께서 ‘새언약’을 이룰때는 성부와 관련되어 있지 우리는 거기 개입을 못해요. 우리는 구원해주면 좋고---

(질문자 2) 그런데 그 언약의 동참자가 아닌가요?

(이목사님)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질문자 2) 그게 동참자가 아니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우린 아무 소용도 없잖아요.

(이목사님) 그게 피조물입니다.

(질문자 2) 그러면 우리는 구원의 대상일뿐입니다. 구원의 주체가 아니고요.

(이목사님) 짝짝짝(박수소리).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거예요. 그게 피조물이에요. 그게 피조물이라니까. 피조물은 도구에요. 로봇이라니까!

(질문자 2) 테레사 수녀가 “나는 하나님이 쓰는 연필입니다” 할때, 그 도구 말씀하시는 거죠?

(이목사님) 그 도구는 좀 수상해요. 테레사 수녀의 그 도구는 좀 수상해요.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에요.

(질문자 2) 저는 그사람이 쓴 책도 못읽어 보고 그 문구만 알지만.

(이목사님) 예. 그것은 믿을만 한것이 못되고요. 피조물은 주님께서 뭘로 쓰시던간에 자기주장이나 자기요구사항이 있으면 안됩니다. 있기는 있지만 그것은 범죄한 것이기 때문에. 그게 로마서 9장에 나와요. 어떤 사람을 천히 쓰고, 어떤 사람을 귀히 쓰더라도 그 소관은 토기장이에게 있는 것이지, 토기가 “저를 좀 귀하게 써 주세요” 라고 요구할 입장이 못됩니다.

왜냐?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은 주님의 영광을 위한 일종의 엑스트라인데, 엑스트라가 “나는 총맞고 쓰러지는 저 역할 싫어. 나는 주연급할래.” “이게 어디서 까불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는 엑스트라에요. 다만 우리가 도구가 되어가지고 합쳐서 영광돌리면 되는 겁니다. 지옥간 사람이 지금 뭐하는지 알아요? 주께 영광을 돌립니다. “주여! 나는 지옥가야 마땅합니다.”

(질문자 2) 결국 우리는 언약의 동참자가 될수는 없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간에 맺은 언약에 대상이 되는 거죠. 객체가 되고요.

(이목사님) 그렇죠.

(질문자 2) 그리고 우리는 --- 뭐지요???
   
(질문자 1) 그 주님으로부터 파생된 구원과 축복을 주시면 감사할뿐이고, 안주면 그냥.

(이목사님) 안주면? 안주면 지옥가는 것이 당연하고. 당연히 지옥가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로마서 9장의 경우를 우리가 지울수가 없어요. “이 구절 매직으로 지워버릴란다.” 그렇게 지울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소설을 쓴다고 치면 그렇게 할수 있는데요.

(질문자 2) 로마서 9장에 뭐라고 써 있는데요?

(이목사님) 로마서 9장을 한번 봅시다. 로마서 9장 21절-23절까지 우리 청년이 한번 읽어 보세요.

(로마서 9:21-23)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무슨 말 하리요? 입을 다물라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시는 것에 대해서 입을 다물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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