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8장, 9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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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9장 강해
이근호목사
2004년 9월 20일
안산 나라 장로교회
(지난시간 요약)
우선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지난시간에 한 강의를 요약하겠습니다.
지난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한복음만 안봐버리면 우리는 보통의 다 같은 인간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들추면 거기에 하나님의 목자의 음성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이 나온다.
그 모습가지고, 종교적인 형태를 가지고서 ‘하나님의 자녀다, 아니다’ 를 판정하지 말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곧 ‘목자가 양에게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를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이 신자,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것을 모를것이 뭐 있나, 우리가 알지’ 하고 ‘우리가 안다’고 편하게 생각하는데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 1장 12절 13절에는
오직 하나님께로 난자라고 이야기하는 그것 자체가 과연 ----
요한복음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자 “하나님께로서 난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여기에서 무엇이 빠집니까?
인간의 “육(정)으로나 혈통”하고는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라는 말은 구원받았음에 대해서 ‘육적인 조건과 혈통적인 조건’을 내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 구원받았습니까?
구원받았습니다.
왜 구원받았습니까?
“하나님께로서” 났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그것으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어떤 행위를 보태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께로서 난자” 라는 것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배제 하는가 하면, ‘네가 행동 잘해서 구원받은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시하는 것입니다. 네가 구원받고 싶어서, 또 네 행동 여하에 따라 구원받은게 아니고, 행동여하에 따라서 운명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행동을 이렇게 하면 이렇게 바뀌고, 이렇게 하면 이렇게 바뀐다’는 그런 말이“하나님께로서 난자”에게는 해당이 안되는 사항이라는 겁니다.
그럼 우리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로 난자라니까요! 그걸로 상황이 종결되었습니다.
아파도 상관없고, 나아도 상관없고, 나았다가 또 아파도 괜찮고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 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하나님께로서 난자”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 듣습니까?
“하나님께로서 난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은 왜 주님을 떠납니까?
“하나님께 난자”가 아니기 때문에 떠나는 것입니다.
당신은 왜 안떠납니까?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기에 안떠나는 것입니다.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이므로 그 외에 인간의 행위가 첨가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함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줄거리입니다.
(오늘 강의)
오늘은 요한복음 8장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제일 재미있는 상황이 방금 이야기한 이 상황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바리새인들이 잡아 왔는데 간음한 여인이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 여인이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 무엇만 개입되었습니까? 간음한 여인이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행동을 고쳤습니까?
‘예수님의 용서하심’만 개입되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자”라고 할때
하나님께서 “(하나님께로서) 난자”에게 하나님의 속성을 주시는데
그 속성은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 “하나님께로서 난자”는 ‘용서받는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용서받는자만 있으면 됩니다.
문제는 사람이 까불거리면서 ‘용서받는자’에서 벗어나려 하니까, 이것이 문제라니까요!
‘나, 이제는 완전하게 되었으니 용서 안받아도 됩니다. 내 알아서 할께요’
이게 문제라니까요! 용서받을것이 필요 없어지면 ‘용서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위상이 날아가버립니다.
‘일곱 살 때 죄졌다’, ‘열일곱살 때 죄졌다’, ‘육십살 때 죄졌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그 다음 60-90살까지는 하나님은 용서하는 분이 아니잖아요. 죽을때가지 ‘용서하시는 분’이, ‘용서하시는분’으로 남으려면 우리는 죽을때까지 ‘용서받는자’가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다른것을 첨가하지 마세요!
용서받고 난 뒤에 새사람 되고, 바르게 살고, 그렇게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용서해주시는 하나님’과 ‘용서받는 사람’ 그 외에 다른 노선이 없습니다. 다른 노선은 첨가되지 않습니다. 그게 어디에 나옵니까?
출애굽기 33장 19절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나는 은혜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사람을 누구에게 소개할 때, 남들이 소개하는 것보다 본인이 소개하는 것이 제일 정확합니다. 하나님이 본인이 본인 소개할 때 제일 정확한 것입니다. 남들이 ‘하나님이 자비하다’, ‘하나님이 어떻하다’, 이런소리 듣지 말고요.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소개할때
“나는 은헤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줄자에게 긍휼을 주”는 하나님으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뵈올때는 다른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책받침으로 양문(귀?)을 가려버리세요. 딱 가리고, 뭐만 들으면 됩니까? (좁은 골목처럼 하고서)
주님이 하신 소리만 들으라는 겁니다.
주님은 어떤분이다?
“은혜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줄자에게 긍휼 주”는 그것만 들으라는 겁니다.
그것이 신약에 오면 ‘나는 끝까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고 너는 용서받음으로 구원이 될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의 속성을 심기 위해서 “하나님께로서 난자”라는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봉사를 주고 받는 관계가 아니고, 헌금을 주고 받는 관계 아니고, 그냥 무슨 관계?
‘그분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는 그냥 자비를 받는 존재’
그걸로 그치세요. 더 보태지도 말고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세리, 창기, 십자가의 강도, 문둥병자, 소경은 이해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더 이상 들을것이 없으니까 이해가 되고 또 누가 이해되는가?
사도바울도 이해됩니다.
로마서 11:35
누가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 말은 처음부터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내(사도바울)가 예수님을 핍박하면서 알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가려버리세요.
‘나의 하나님은 나에게 은혜를 퍼부어 주시는 분!’ 끝입니다.
내게 바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는 대로 받는 겁니다.
에덴동산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셨죠.
만약에 우리가 만들었으면 선악과를 만들어 넣겠습니까?
(에덴동산이) 우리가 만든 아파트라면 절대로 선악과를 안만들어 넣겠지요?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인간은 그냥 누리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그냥 누리는 겁니다. 선악과를 심은 것은 ‘네(인간)가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명찰로 분명히 박아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주인 행세를 시도하다가 아파트(에덴동산)에서 쫒겨나서 저주받은 땅에서 살면서 그 다음에부터는 자기 힘으로, 자기선행과 자기양심을 총동원해서 아둥바둥 구원을 받아내기 위한 종교적 인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종교적인 인물이 가인입니다.
가인이 무엇을 바쳤습니까?
제사를 바쳤지요? 하나님이 제사 안받습니다.
누리는 것이 아니고 ‘받으소서’ 이렇게 하니까 제사를 안받습니다.
‘그것은 받으소서’ 하니까 사도바울이 ‘누가 먼저 바쳐서 받아 내겠느냐’는 방식으로 구원을 받을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에 보면 바친것도 없는데 저쪽에서 주심으로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1:35,36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모든 것이 주님께 회수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돌아가는 거죠
요한복음 8장 9장을 오늘 강의 하는데 지금까지 이야기한 서론을 잊지마세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로서 난자”다. 끝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행함은 여기 안보탭니다.
인생을 살면서 어떤 일이 있다든지 이런것은 보태지 않습니다.
무조건 “하나님께로서 난자”입니다.
왜 났는냐? 하나님의 속성을 담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은혜 주시는 자’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담기 위해서입니다. 은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8장에서 이걸 두자로 “용서”하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주일학교 애들한테 물어 보세요.
하나님이 선물을 준단다. 무엇일까요?
1)장난감 2)마징가 젯 3)돈 4)과자 5)죄용서
어른은 돈! 하겠지요? 애들은 과자 혹은 장난감! 하겠지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께로서 난자”에게 ‘하나님은 은혜 주시는 자’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담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간음한 여자, ‘은혜입은자’가 나오지요?
은혜 입은 자의 은혜입은 내용이 무엇입니까? ‘용서하심’
용서받는자가 “하나님께로 난자”라는 것입니다.
용서받는다는 전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신앙생활 하면서 제일 기쁠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제가 죄인인 것을 순간 순간 알 때 그야말로 환희입니다.
못추는 춤이라도 추고 싶어요. 펄쩍 펄쩍 뜁니다.
내가 죄인되었을때는 모든 것이 나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이 은혜가 됩니다.
내가 잘난 사람이 되어 버리면 모든 것이 불만이고 불평덩어리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은 늘 같은 상황입니다. 우리가 상황이 좋아서 은혜가 아니고 상황이 못나서 불만이 아니라, 본인이 죄인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고마워 할 것은 고마워 하고 불만할 것은 불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때입니다.
죄인인 것을 알면 무슨 특별한 죄를 지어야 할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잘못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께로서 난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때 그것이 죄인입니다.
죄는 ‘관계 끊어짐’입니다.
죄가 뭐냐? 사실은 관계 안끊어졌는데 혼자 있고 싶어요.
옛 사람이 있기에 혼자 있고 싶어요. 마누라도 귀찮고, 혼자 있고 싶을때, 혼자 있으면서 세상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고 싶은, 만사가 귀찮고 혼자 있고 싶을때, (그게 무엇인가 하면) 독자적인 행동을 하고,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혼자 있게되면 그 다움에는 자기 가치를 혼자서 결정하고 자기가 자기 측정의 기준이 되어 버립니다.
그것 자체가 함께 있는 분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쫒아내버리고 그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나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서 난자”로 있는데 스tm로 있는 자처럼 여기고 그 순간에 나는 그것을 죄로 여기고 죄를 느끼면서
‘아! 하나님이 은혜로서 모든 것을 인도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상은 서론 이고)
요한복음 8장 보겠습니다.
한 종류의 무리가 나오죠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율법이 있습니다.
이 법은 어디서 왔다고 봅니까? 모세에서 왔으니 하나님의 법이라고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소지하게 됩니다. 사람이 법을 대하고 말씀을 대하면 그것이 뭐든지 그것을 소유화 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실존주의 철학에서 잘 논의하고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이란?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내 앞에 누가 있는가를 통해서 내가 누구냐가 정림된다는 것입니다. 즉 대상이 누구냐를 통해서 그것을 보고 그것과 차이 나는 나를 따로 챙기는 겁니다.
만약에 자기보다 잘난 사람 앞에 있으면 자기는 졸지에 못난자가 되고, 자기보다 못난자가 있으면 졸지에 자신은 갑자기 잘난자가 되는 겁니다. 나를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면 내 앞에 누가 얼쩡거리냐를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하잖아요.
결혼하면 서로 이뻐해주고, 서로에게 잘해주는데 만약에 배우자가 실망스런 행동을 했을때 갑자기 배우자가 달라졌다고 해서 자기도 똑같은 인간이 될 필요는 없지요? 상대방이 좋게 나올때는 좋게 나와 줘야 합니다. 서로 좋을때는 좋다가 상대방이 태도가 돌변하면 나는 안달라져야 할텐데 상대방 보고 거기에 나도 맞추어서 처신을 새롭게 정립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서기관이 두종류의 사람을 만납니다.
한사람은 간음한 여인 또 한사람은 예수님을 만납니다. 방금한 이야기를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간음한 여인 만나서 ‘음매, 기살아’ 했습니다.
왜 기살았습니까? 법에서 의가 나옵니다. 의를 소유했거든요
이게 인간의 문제입니다. 모든 인간의 문제가 소유에 있습니다.
언젠가 (000목사님하고) 삼계탕 먹으면서 한 이야기입니다만(이런소리 하면 안되겠지만)
저 두분께서 과연 뭘 소유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됨됨이는 ‘반드시 뭘 소유했습니다. 나 이거 있어’, 이거 거든요.
그렇다면 뭘 소유했습니까?
000목사님의 답변이 복음입니다. 제 아내는 복음 때문에 결혼했습니다.
맞다고 인정합니다. 은혜니까요. 사모님이 이야기 했죠. 복음 때문에 결혼했다고요.
그런데 복음은 소유가 안되고, 복음은 그 뿌리가 예수님이기 때문에 소유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뿌리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므로 복음은 소유 당하게 되어 있어요
복음을 빼놓고 나머지, 즉 돈은 내가 소유하게 되어 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윤리입니다. 윤리는 뿌리는 ‘나’입니다. 주체자가 ‘나’ 아닙니까? 내가 하는 겁니다. ‘내가 얼마전 술끊었다’. ‘내가 담배끊었다’. 그 주체자가 누굽니까? ‘나’니까, 소유가 되지요.
그러나 복음의 십자가는 누가 올라갔습니까?
베드로나 요한 다 도망갔어요.
십자가는 다 탈락되고 누가 (혼자)올라갔습니까?
그러니까 복음으로 구원받는다말에 내 행위가 첨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알겠죠?
복음의 주체자는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복음을 소유했다는 말은 복음의 뿌리가 되는 ‘예수님께 소유당함’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서 난자”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제일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간음한 여인이 (예수님 만나고 난) 그 다음에는 자유롭게 ‘자기 맘대로 살았다’. 자기 맘대로 산게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예수님의 소유가 된겁니다.
바리새인들은 법을 지키고 그것은 그 의를 축적하기 위해서 지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10:2,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서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좆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를 세우기 위해서 축적한다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문제가 무엇입니까?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 오는 목적이 최선을 다 하지만 미진한 것이 있으니 성경을 법으로 봐서 그 법을 하나 하나 준수함으로 나에게는 차곡차곡 은행에 저금통장에 적금 쌓이듯이 나의 의가 쌓이면 그 의만큼 축복하고 보상을 해준다는 자기 일방적인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걸 가지고 옵니다. 만약 자기 교회 다니는 사람이 ‘누가 이혼했다’ 하면 그걸 가지고 손가락질 합니다. 그러면서 ‘나쁜짓 했다’ 하면서 ‘나는 괜찬은데’하는 겁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법을 소유해서 그것을 자기 구원을 확보하려는 시도입니다.
간음한 여인은 여기 왜 등장하냐면,
(재미있는 것이 ---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지만)
왜 잡힙니까?
간음한 여인이 예수님께 와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재료다 재료’, 재료라는 것입니다. 소경으로 난자와 같이 예수님이 누군가를 보여주고 세상이 얼마나 악한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죠.
교육자재, 교육비품이고 시험도구입니다.
법은 (제가 왜이런이야기를 하냐 하면)
요한복음 8장에는 나중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8:32,36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내가,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이것은 법에서부터의 자유죠
법은 죄를 주고(사실은 죄를 주는데), 의를 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리새인 생각입니다. 법이 의를 준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왔을때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뭘 썼습니다.
뭘 쓰시더니만 그 다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찔리는게 있는 모양이죠?
따라서 그 찔리는 것으로 인해서 이제 자기가 손에 쥐고 있던 돌을 본인에게 던져야 할 문제입니다. 도망가고 말아야죠.
법은 의를 준다고 생각했는데, 법은 우리에게 더욱 더 죄인되게 한다는 것을 예수님을 만나게 해줘서 비로서 알게 하는 겁니다. 성경말씀은 죄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교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만들기, 인간만들기 하는 것 아닙니까?
죄를 억제해서 망나니 같은 애들을 양처럼 가르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론은, 좋은 말 많이 하면 그것 듣고 개과천선해서 사람답게 살게 하려고 하는것인데 성경은 정반대입니다. 이것은 ‘설마 죄 아니겠지’ 라고 여기는 것 까지를 죄로 드러내기 위해서 성경이 있습니다. 할말이 없게 만들죠. 할말이---
히브리서에서는 그것을 “골수를 찌른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예를 들면
야고보서 4장에 보면 도시에가서 하루나 이틀을 유하며 장사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야고보서 4:13-17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길르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어늘 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그런 대목 보면 장사하는 사람들은 섬뜩할겁니다. ‘네가 내일을 아냐? 그렇게 아는 식으로 건방을 떠냐?’는 겁니다. ‘어느 도시에 가서 이득을 보면서 장사하리라’ 하는 식으로 하지 말고 차라리 말을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뜻이면 죽고, 사는 문제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살려주니까 산다는 것’을 깔고 가서 장사하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살려 줘서 사는 것이지 내가 살려고 애쓰니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는 것 자체를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 본질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에서 안개의 특징은,
‘있고 없고’가 자기 손에 달려있지 않은 것이 안개입니다. ‘있고 없고’를 자기가 조정할수 없습니다. 안개라는 것은 날씨가 따뜻하면 사라져 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필요치 않으면 사라져 줘야 하는 것입니다. 왜 살아있습니까? 아직도.
붙드시니까 살아 있는 겁니다.
그런데 늘상 붙드니까 이력이 나가지고 살아 있어야 당연한 권리처럼 주장하잖아요
이런 소리를 하면 노인들이 보면 미워 하겠지요.
노인들은 제가 이렇게 설교 하면 죽을라캅니다(죽을맛일 겁니다).
쓸데없이 왜 사냐는 거죠. 아무 일도 없이 왜 사냐? 이렇게 이야기 하죠
그러면 ‘내가 살고 싶어 사는 것이 아니고 안죽고 싶어서 안죽습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소 . 내가 살고 싶어 사는 것이 아니고 안죽으니까 사는 거죠.
사실 어른신네한테 그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아주 예의 없는 이야기인데(이것이 얼마나 건방진 이야기입니까) 왜 삽니까?
답변이 얼마나 좋은지요.
내가 살고 싶어 사는 것이 아니고 살려주니 살죠.
왜 사십대, 삽십대는 이렇게 답을 못합니까?
자기가 가치있어 펄펄 사는 것 같이 했죠?
왜 그이야기를 30대, 40대에는 못하냐? 이말입니다.
살려 주니 사는 안개라는 말을 왜 분명하게 못합니까?
야고보서에 박혀 있는것을 안본다니까요? 그걸 치우니까 자기는 죄인이 안되잖아요. 성경말씀이 우리를 더욱더 죄되게 하는 데 그걸 덮어 버리니 자기는 죄인이 안되버리는 것입니다.자기는 잘난 사람 되어 버리고, 자기의 가치는 타자와 비교하면서 자기를 규정하고요.
나는 못난 사람이니까 이사람보다 더 착한 사람 되어서 큰소리 치겠다고 하는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움직임입니다. 너무나 상투적인 성경과 관계없는 인간들의 ‘자기 의’ 집합소이며 ‘자기 의’를 과시하는 복음이 없는곳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이렇게 강의를 하게 되면,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의 주 원인이 있어요.
목사 말이 다 고맙고 이해되는데 단 한가지 ‘내가 왜 죄인인가’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자기가 아는 죄라는 것은 교회 안다니고 망나니처럼 살고 교회로부터 도망치고 하나님을 인정 안하고 이래야 하는데, 항상 찬송부르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애를 쓰고 있잖아요. 이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릅답지 않느냐, 이것을 아름답다고 하지 않고 이것을 왜 죄라고 이야기하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안나오는 사람이 한두사람이 아닙니다(청중의웃음소리)
그 사람의 반박이 이해가 되지요?
제가 요한복음 여러 가지 있지만 딴소리 안합니다.
당신은 성경을 볼때 지킬만한 것만 골라 봤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성경에 상상도 못하게 지킬수도 없는 것을 (붕붕)뛰어 넘은 겁니다. 왜 지킬 만한 것을 골랐을까요? 자기는 죄에서 의를 축적해야 하기 때문에 성경을 보고 지킬만한 것을 골라 잡는 겁니다. 온유하고, 자비하고, 점차 점차 의인되는 성화, 여기에 관심이 있고 이런 목적으로 교회 온겁니다. 자기가 스스로 의인 만들 수 있는 가능성만 골라 한겁니다.
예를 들어 며느리가 ‘시어머니 아프다’고 할때 진짜 성도 같으면,
시어머니 안아플때는 안하다가 아플때 봉양 하게 함으로서, 시어머니가 그렇게 싫고, 밉고, 귀찮고, 시어머니가 내 인생을 망쳐놓고, 시어머니 때문에 애들 간식하나 못만들어 주고, 용돈도 못주고, 애들 과외비도 못내고 하는 그 자체가 시어머니가 아플때야 비로소 알았지요? 뭘요? 자기속에 그런 못된 구석이 있다는 것을요. 안아플대는 좋은 시어머니죠. 자기에게 피해를 안주니까. 그런 경험을 결혼을 해서 몰랐고, 시어머니 안아플때 몰랐고, 연세 들어서 아플때 비로서 알았죠.
며느리가 계속해서 시어머니와 좋은 관계가 유지되었었죠.
그런데 명절때 만나서 이것 저것 해 보니까 비로서 내 속에 이런 나쁜 모습이 있을 줄이야 처음 알았죠.
위와같이 깨닫는 경우는 신자의 경우입니다.
불신자의 경우에는 (반대로) 용기를 냅니다.
‘그렇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내가 의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봉사합니다. ‘아무리 구박해도 나는 이런 기회를 성화의 기회로 잡겠다’는 식으로 열심히 봉양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 자체가 의로워 지려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을 잊어 버리고 나는 시어머니 만나서 전에 못했던 효도까지 하려는 의가 축적이 되겠지요. 이런 사람이 불신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갈수록 내가 의인되는데 나보고 죄인’이라고 하니까, ‘통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죄를 모르죠. 갈수록 모르는 겁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자기가 그 속에서 자기가 할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 내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하신 이런 말씀은 건너 뜁니다.
마태복음 10:34-39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로 온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달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 말씀은 안믿고 건너 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21,22
제자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하고 너는 나를 좆으라 하시니라
이런 말씀은 안믿습니다.
아버지의 장사를 잘 지내고 예수님을 따라 가야지 장사를 안지내서 불효자가 되어 버리면 죄에서 의로 나가다가 도리어 천하에 죄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죄가 뭔지 모르는 게 아니고 죄인 안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처음으로 가보세요.
뭐가 빠집니까? 용서가 빠지고, 용서가 빠지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줄 자에게 은혜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죠. 그 사람에게는 ‘잘하는 놈에게 떡 주는 하나님’이죠.
은혜가 뭐죠? ‘죄용서’
자기가 죄인 안되고 의인되려고 하는 자에게 그런 하나님은 귀찮고 그런 하나님을 거부하죠. 그 거부의 흔적이 뭐냐?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타자를 만나게 되면 항상 자기 잘하는 것을 내세워요.
항상 자기 잘하는 것을 축적을 해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간증거리가 있어야 하잖아요. 부부사이라도 부부가 직접 그냥 되어 버리면 자아가 부각되고 타인이 부각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거치면 뭐가 됩니까? 십자가를 통과해서 보면, ‘너나 내나 다 못난 사람끼리 모았으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자’고 대화가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둘중의 하나가 성도가 아니고 죄에서 벗어나서 의를 축적하려고 한다면, 다른 한 사람은 성도가 되어서 자기를 십자가 앞으로 통과하려고 하면 이게 대화가 됩니까? 안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부부간에)차 몰고 가다가
‘저쪽에서 당신 욕을 하던데 왜 같이 욕을 안하나’
‘당신은 바보인가? 왜 같이 안대드나?’
‘아니, 욕해서 뭐해 재수 없다 하고 그냥 가지’
우리 남편의 위신을 내가 챙겨 줘야 한다는 거죠
이말은 우리 가정은 의롭고, 의로서 완전 무장을 시켜서 누가 와도 위신과 체면을 갖출때 사는 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성도의 맛은, ‘이렇게 못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용서 받아서, 은혜받아서 성도가 되었다’는 것이 성도의 맛입니다.
‘용서 받은 맛’이 초코랫보다 더 맛있어요 용서를 받아보세요
‘용서해줄께’ 이것보다 더 신나는 말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없습니다.
하루를 살면서 기도하실 때 주께서 응답하실 때 “용서해 줄게” 하시면 끝난겁니다.
예수님께 의도적으로 글을 쓰시고, 돌을 들고 간음한 여인을 치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이 다 동일한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앞에서 모두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쪽은 용서 받고 한쪽은 그냥 가버렸습니다. 가도 몇발짝 못가요. 나중에 도로 불려 나와서 다 심판받고 지옥갑니다.
자 그런데 방금 제가 한 것은 요한복음 8장의 쉬운 부분이니까 쉽게 했는데
이제 어려운 것 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자”라는 것은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속성을 담는다 했다.
하나님의 속성이 뭐라고요?
“은혜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베풀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그 속성이 담긴자를 “하나님께로서 난자”라 했다.
그가 무슨 역할을 합니까
‘용서받는 역할’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역할’
다른 사람은 해당사항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요한복음 8장23절을 봅시다.
요한복음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질문입니다.
이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같이 섞일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속할수 있습니까?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 아주머니가 ‘나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우겼다.
‘그럼 당신은 어디서 났습니까?’
‘하늘에서 났다’
‘그럼 하늘에서 살지, 왜 여기 왔습니까?’
우리의 상식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태어난 사람은 하늘에서 사시고 이땅에서 난 사람만 땅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고 이게 맞는 이야기입니다. 왜 섞였다 하는 사실이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왜 섞였습니까?
섞임으로 말미암아 그 순간 이 세상은 끝난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로 보내고 이땅은 그냥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만약에 하늘에 속한 분이 여기 왔다고 한다면 이세상은 더 이상 진척될 가치와 의미를 상실한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분이 왔을때 그분을 못알아 봤으면 이세상은 심판의 대상입니다.
제일 중요한 사건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제가 오늘 여기 왔다는 것은 별로 중요한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찾아오신 사건은 어느 손님보다 더 무서운 사건입니다. 대접하기는 무엇을 대접합니까? ‘잘난체 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 종말을 시작했습니다.
다른 종말 생각하지 마세요.
오신겁니다.
또 온대! (미치겠다)
한차례 왔을때 못알아 봤고, 두 번째 오실 때는 알아 보든지, 못알아 보든지 다 알아보도록 오신다는 것입니다. 석유수급이 안된다든지 장사가 잘 안된다든지 이런 문제들은 문제거리가 됩니까? 안됩니까? 추석 앞두고 비상근무 그런 것은 아무 문제거리가 안된다니까요? 이런 것이 다 종말입니다. 큰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났다는 것은 여기 적혀 있지만 그 당시 사람들로서는 충격입니다. 지금 성경 보니가 잠도 잘 오고 ‘그릇 깨졌느니’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입니다. 하늘에서 계신분은 아직까지 안오게 되어 있는데 졸지에 와 버리니까 ‘너희들은 죄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데)
하나님이 오셨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어디에 속했다는 겁니까?
죄의종이라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는 쉽고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이제 보편적으로 확산됩니다.
1) 예수님이 오셨다. 모든 인간은 죄의 종이다
2) 간음한 여인을 누가 용서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용서했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유케 한자만 자유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8장입니다.
서기관 바리새이들은 다 도망쳤잖아요. 다 죄의 종인데.
두 번째로 “하나님께로서 난자”만이!!
예수님께서 자유케 한 경우에만 자유를 얻을수 있습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8장 33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여기에 동의를 안합니다.
요한복음 8: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우리는 ‘죄의종이 된적이 없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하기를,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이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의 종인지를 모르면 마귀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죄의 종인지 모르면 예수님이 필요치 않습니다. 자기가 죄의 종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오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여기 (이미) 왔습니다. 그런데 (이미 오신 분을 두고서)오실 필요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왔는데 뭐가 오실 필요가 없다니 말이 안되잖아요?
문간에서 허락을 받는 것이 아니고요, 허락을 안받고 왔는데 예수님이 필요 없다는 이것이 무슨 현실감 떨어지는 이야기입니까? 자기가 판사되고, 국회의원되고,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님 왜 오신줄도 모르면서 자기가 의사되고 판사되었다고 천국갑니까? 판사되고 의사된들 무슨 소용있습니까?
자기가 ‘죄의 종’인 것을 아는 사람만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건지러 왔다’는 건짐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누구한테만??? 자기가 ‘죄의 종’인 것을 아는 사람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무슨일을 해야 합니까? 위로, 격려, 다 좋아요.
그 위로가 몇시간 안가거든요.
마치 약효떨어지면 또 오는 것 같이 또 온다고요. 위로해 달라고.
이번에 해 주는 위로는 전보다 더 강도가 커야 됩니다. 사랑의 강도가 일점오배 더 보태어져야 하는데, 이것은 끝도 없고 한도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책임 못진다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시키는대로만 움직여 줘야 합니다. 철칙입니다. 내가 저사람을 어떻게 할까요?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예수님 왈 ‘그렇게 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대로 움직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의’가 축적이 안됩니다. 시키는대로 했는데 무익한 종이 무슨 ‘자기의’가 축적이 됩니까?
시키는대로 해 줘야 용서의 의미가 아직도 녹아 있어요. 주님은 날 용서해주시는 분이고 그것이 유예될때 아직도 ‘자기 증인’이 안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것입니다.
내 입장이 그렇다면 상대방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상대방을 죄되게 하는 방법이 무엇밖에 없는가 하면(녹취자 주, 이부분이 어려워서 토를 달아 봅니다. 이 구절의 의도는 아마도? 인간이 죄를 지어서 죄가 아니라 은혜 곧 용서를 모르고, 예수 안에 있는 용서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죄라는 취지를 설명하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상대방이 과연 은혜를 아느냐를 봐야 합니다.
시편 136편 같은 경우는 노골적으로 나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핫기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주에 뛰어 나신 주께 감사하라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땅을 물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 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아모리 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산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테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온통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니까, 내가 죄인인 것을 아니까 나를 애먹이는 모든 것이 다 은혜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모든 모임, 못된 자식이니 뭐니, 전부다 뭐다?
‘은혜뭉치’
참~!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바울 보세요.
굶기도 하고, 무서워서 광주리 타고 도망치기도 하고, 감옥소에 갖히기도 하고요.
고린도전서 4: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의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구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더라
고린도후서 11:23-27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헐벗었노라
고린도전서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바울이 자기 인생을 원망했으면 ---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 모든 것이 은혜라고 말합니다.
진작 죽어야 되는 인간이 주님의 자기 숙제물로서 버티고 있는 겁니다.
주님의 자기 숙제를 주님께 맡깁시다. 그분이 하도록 맡깁시다.
첫 번째로, 예수님이 오셨다. 모든 인간은 죄의 종이다
두 번째로, 간음한 여인을 누가 용서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용서했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유케 한자만 자유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세 번째는
드디어 참 하나님과 악마과 구분됩니다.
이거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진짜 하나님과 악마의 차이점을 부각하면서 마지막에 나오면서 이 갈등으로 생긴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 ‘십자가’ 하는데 십자가는 어디에서 생겼다? 참 하나님과 악마를 하나님처럼 간주해서 섬기는 하나님과 그 갈등으로 생긴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피 찍어 내면 그냥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그 충돌 현장속에 뛰어 들어야 합니다. 무슨 일 났습니까? 하고 뛰어 들어야 합니다.
악마는 뭘 시키느냐 하면
‘네가 죄인인데, 네가 의인될수 있는 방법이 있다. 너의 가능성으로 할수 있다’고 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합니까? ‘네가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네가 의인될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런 교리, 이런 종교,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악마를 섬기고 있는 사람입니다.말을 끄집어 내고 보니 이렇게 생각 안한느 사람이 드물죠? 이렇게 보니 다 이렇게 하고 있죠? 지금보다 더 나은 나, 지금보다 달라진 ‘나’ - 새로운 피조물 - 되고 싶어서 교회오는 겁니다.
‘내가 봐도 이런식으로는 못살겠다. 딴 사람되어서 살고 싶다. 지긋지긋 하다. 뭔가 새생활 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와서 ‘목사님! 한수 가르쳐 주세요’, 이런 생각을 가지고 교회 옵니다.
어떤 조폭 출신이 시골교회 목사를 찾아 와서는 (약간의 횡포 섞어서) 이런식으로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나는 믿고 싶은데 하나님이 나에게는 믿음을 안줍니까?’이런 식으로 따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말해주기를
왜 그렇게 믿음도 없는데 교회를 다니려고 합니까? 집에 가셔서 믿음 생기거든 그때 교회 나오세요. 믿음은 갖고 싶다고 가지는 것도 아니고 교회 다닌다고 당신 생각대로 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맘이나 편히 갖고 사세요. 없는 믿음 자꾸 가지려고 하지 말고요.
그 조폭 출신의 그 사람이 말하기를 ‘자기가 믿고자 하는데도 믿음을 안줘서 안믿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이해하려면 분석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뭘 꿈꾸고 있습니까?
나는 조폭이었는데 이젠 그 조폭이라는 그 어두운 과거를 깨끗이 씻고 싶은 거죠. 확 달라져서 인간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나’ 남들로부터 비난받지 않고 칭찬받는 나의 미래상을 그리고 싶은 거죠. 교회에서 좋은 소리 하니까 교회에서 도와줄 것 같아요. 내가 믿으면, 믿기만 하면 자기 꿈이 이루어지는 거죠. 믿기만 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더욱 더 죄인되게 하는 피조물인지 모르고, 자기는 근사한 사람 되는 것을 새로운 피조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대충 보고 또 아예 안보고, 자기가 알고 있던 선입관 가지고 지레 짐작하고 차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시골 목사님에게 조언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네 주제 파악부터 해라. ‘난 조폭 아니다’ 하는데, 조폭이라는 게 나쁜게 아니고, 조폭 보다 더 나쁜 인간이라는 사실을 왜 당신은 모르냐? 기껏 조폭인가? 그것보다 더 나쁜 인간이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나? 살려달라고 할수도 없을 정도로. 정말 철저하게 죄인이라는 것을 못느끼냐?
우선 이렇게 주제파악을 시켜주고
그 다음에 해줄 이야기는,
햇빛 받는데 돈 얼마 주고 받았는데, 아침에 비오면 그거 얼마주고 받았는데,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은혜 아니고 무엇인데---하는 은혜를 이야기 해 줘야 합니다. 은혜로 태어났잖아요. 그것에 대한 고마움이 있습니까? 기껏 자아를 뭐하고 비교합니까? 잘난 사람하고 비교해서 나도 그것이 되고 싶은 거죠. 스데반 집사 죽었지요? 야고보 사도 죽었지요? 예수님이 그 사람보다 더 오래살았어요? 서른 몇 살에 죽었지요? 당신보다 잘난 사람들 당신처지보다 훨씬 못하게 살고 훨씬 더 못한 모습으로 많이 죽었습니다. 지금 당신 살아 있는것도 은혜입니다. 당신보다 깨끗하고 좋은 사람도 돌에 맞아 죽었어요. 그것은 생각도 못하고 뭐라고요?
첫째는 주제파악을 하게 하고
두 번째는 은혜를 알아서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것이 아니고, 이 자체가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라 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보면서
다 아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그냥 넘어가지 마시고요.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참 하나님과 악마 - 악마는 뭐냐 죄인을 의인되게 하기 위해서 가능성을 주는 -의 충돌현장입니다.
참 하나님은 나중에 십자가를 질 것 아닙니까 이것이 어려운데
어렵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잠이 오셔도 좀 참으세요
참 하나님을 예수님께서 이야기를 하잖아요. 예수님의 이야기를 그냥 풀이하면 틀립니다. 어디를 거쳐와야 하면 십자가를 거치고 해석을 해줘야 정답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성전을 헐고 다시 짓는다고 하니까 제자들이 못알아 들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난 뒤에 비로서 그것이 돌성전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의 몸에 대한 것인줄 알았잖아요
요한복음 2:19-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성전을 사십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모든 사람은 죄인이야 할때, ‘죄의 종이’야 할때,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이렇게 자기 죄 지은 것을 찾습니다. 그래서 해석이 엉터리가 됩니다. 모든 말씀이 십자가를 거쳐서 나와야 할 것인데. 십자가에서 뭡測途꼈?“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합니다.
마태복음 27:46
제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이 자기 아버지께 버린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택한 백성이 지은 죄 때문에 버림받잖아요. 그러면 이걸 거치고 와 보세요. 그러면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이 이해가 됩니다. 이 안에 십자가가 미리 앞당겨 있다고 하고 보세요. 십자가를 걸치고 보면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이땅에 오신 것은 죄인을 더욱 더 죄인되게 하고, 은혜를 주고 용서를 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 이해가 될 때, 그것이 참 하나님이고 십자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는 사람같으면 묻지요?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았습니다.
예, 그것은 다 아는 것이고요. 당신은 무슨 행동을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그냥 예수님의 공로로 영원히 구원받았습니다.
영원히? 아니 그것은 다 아는 이야기고,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된다는 것은 알고, 당신은 무슨 행동을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당신, 이제는 나이트클럽도 안간다면서요? 갈수록 착한 사람 되어가고 있지요?
그게 아니고 날이 갈수록 내가 왜 죄인인지를, 내 대신 예수님게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가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이걸 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제는, 내가 누구를 도와주고, 도와줘서 내가 이만큼 착한 놈인지 몰랐다는 자기의가 또 생기고요. 그래서 날이 갈수록 자기 죄인됨을 알죠 날이 갈수록. 이런 사람이 비로서 용서의 의미를 날이 갈수록 더욱더 많이 알게 되고 바로 그 용서를 증거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나처럼 주님만 믿으면, 제대로 예수의 공로만 믿으면 나처럼 구원됩니다’.
라고 제대로 예수를 전하게 됩니다.
성경대로 ‘오직 자랑할것이 나는 오직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것이 자기의 것이 되어서, 자기를 담아서 제대로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뿐이라는 것을.
이것이 요한복음 8장의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아직 멀었어요
52절 봅시다
요한복음 8:52,53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 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조금만 참으세요 이것이 어려운데,
“네 말은 사람이 내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아브라함보다 크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태어났습니까? 예수님입니까?
아브라함이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뒤에 태어난 예수님이 아브라함을 볼 리가 없습니다. 제가 이순신을 볼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왜 예수님이 봤다고 합니까? 사람들의 상식이 그 정도인줄 알면서도 예수님께서 “왜 나는 아브라함을 봤다”는 이야기를 합니까? 그것과 우리가 구원받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왜 꼭 그 이야기를 하셔야 합니까? 이런 이야기가 어려운데요.
그당시 유대인들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거죠
그런데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것이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고, ‘아브라함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혈통에게만 해당이 됩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보면 유대인들이 딱 맞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을 믿는자는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에 참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우리가 유대인 보고 잘못되었다고 욕하면 안됩니다. 우리라도 그 본문 창세기를 보면 그렇게 보도록 되어 있습니다(창세기 17:7,8 참고).
이점을 익히 아시는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을 내가 봤다’고 되어 버리면 예수님은 뭡니까? 아브라함이 약속을 하나님에게 받았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을 먼저 본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만 해당되지 사람에게는 해당 안됩니다. 아브라함보다 먼저 노아가 있지 않나요? 아닙니다. 약속은 노아가 준 것이 하나님이 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준 약속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노아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고 그 약속을 보고 믿으니까 그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에 해당되는 그 빈자리에 자기 자신을 집어 넣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나를 보고, 약속을 받았기에 기뻐한 것’이라고 한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내용은 받았지만 성취는 아직 안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누굴 보고 기뻐했다?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잖아요. 이 말은 무엇입니까?
진짜 하나님의 약속대로 구원할자는 마지막 나타난 하나님, 곧 예수님만이 아브라함의 모든 약속한 축복의 내용인데 그 내용이 예수님께서 해주시는 용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나를 보고 기뻐했는데 왜 너희들을 기뻐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나를 보고 박수치면서 좋아 했는데 왜 너희들은 같이 박수치면서 나를 보고 기뻐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아브라함과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뭘 느낌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이 중요하고 나머지는 안 중요하네요? 딩동댕---!!! 정답입니다. 다른 것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는 거예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다?
약속을 이루고 천국 보낼자 천국 보내버리고 지옥 갈자 지옥 보내버리고 자기 일 마무리 하고 자기집에 가버리십니다. 나머지는 멸망입니다.
사우나는 한번 들어가면 오분후에 나오면 되잖아요. 지옥은 못나옵니다. 십년살고 봐주고 그런 것 없습니다. 구더기도 안죽는 곳입니다. 백년을 살아도 죽지도 않아요. 이것은 지옥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지옥 보낼자 보내고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줘서 천국 보내고, 그 작업하고 손털고 가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아니야’ 하는 뜻입니다. 간음한 여인은 되지만 ‘너는 안돼!’ 그런뜻입니다.
한쪽에는 용서가 임했고 다른 한쪽에는 용서가 임하지 않은 것입니다. 죄를 덜짓고 안짓고가 문제가 아니고, 한쪽은 아브라함의 약속의 성취자가 예수라는 것을 믿었고 한쪽은 예수라는 것을 거부했죠.
이것은 판검사, 국회의원, 장관, 다 소용 없습니다.
예수 믿는 이것이 최고입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약속의 성취라는 이것이 최고입니다.
일반사람들은 이것을 현실로 보지 않고 종교의 일종으로 봅니다.
불신자 학자들은 이 세상에 종교가 많다. 신이 있고 인간이 있는데 그중에 예수라는 중보자가 있다. 불교는 부처가 있고, 이슬람교는 마호멧이 있는 이것 뿐이다. 종교란 다 착하게 살고 죽어서 좋은데 간다는 것으로서 동일한 것일뿐, 이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보거든요.
이런 것이 다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를 가짐으로서 죄를 의인되게 하는 방편이죠.
그것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것입니다. 교인되기, 목사되기, 장로되기, 이런 것이 다 소용없습니다. 진짜 예수믿는 사람은 예수님께 용서받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뭐합니까 예수님을 증거하면 되는 것이고 다른 경쟁하면 안됩니다. 그것이 자기도 살고 남도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58절을 봅시다.
요한복음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이제야 아브라함이 나기전에 예수님께서 계신다고 하면서 아브라함을 끄집어 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브람의 약속이, 아브라함의 축복이 주어진다고 유대인들이 지금 학수고대하는데 그 날자, 그 때가 바로 지금 네 코앞에 나타났잖아!!! ‘뭘 또 기다리냐’는 말입니까 아브라함조차 나를 보고 기뻐했는데 왜 나를 기뻐하지 않는냐!!!
‘너희들은 악마의 종이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8장은 이렇게 하고, 9장 마지막에
요한복음 9: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어려워지는데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속성이 무엇입니까?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죠" 동의하시죠?
그 은혜는 용서지요?
인간들은 비품이라 했고 재료라 했죠?
무슨 재료? 용서함을 보여주는 재료
그러면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기 때문에 인간은 두쪽이 나죠.
은혜 받을 비품이 있고, 은혜없는 사람이 나오죠.
요한복음 9장 39절 의 뜻은
예수님은 마지막때에 할일 하기 위해서 오셨죠? 무슨 일?
구원될 사람은 예수님이 알아서 예수를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해야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야 용서 됩니다. 인간들은 (개코도)보지도 못하면서 율법을 지켜서 본다는것입니다. 본다는 인간들은 억지로 못보게 소경되게 해줄때 비로서 은혜가 “은혜줄자에게 은혜주”는 것이 성립되죠!!! 딩동댕---!!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진짜로 은혜 받은 사람은 고맙죠. 하필이면 납니까?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필이면 납니까?
‘내가 너를 택하였다. 내가 너를 택하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약속의 성취자’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의 성취자가 예수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강의를 마치면서
예를 들어서 철저하게 불신자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하고,
오늘 강의를 다 들었다 치고, 만일 내가 불신자라면 어떤 느낌이 들겠어요?
이목사! 당신 말에 의하면 무조건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부터 깔고 들어가는데.
내가 알고 있기는 사람이 착한 사람도 있고 아침에 일어나서 인사 잘하고 빗자루 들고 쓰는 사람도 있고, 비록 교회는 안다녀도 이사람 저사람 훌륭한 수많은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럼데도 불구하고
이근호 목사 당신은
‘몽땅 다 죄인이다’ 라고 주장할거 뭐 있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다 죽는다’는 겁니다.
아까 유대인들 뭐라고 합니까? 아브라함이 죽고 우리도 죽는데 네가 어떻게 보느냐?고 했습니다. 죽는 놈은 세상을 모릅니다. 죽어가는 놈은 죽어가는 놈일뿐 자기가 체험 해봤자,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그저 부분만 알뿐 전체를 모릅니다. 안죽는 분, 하늘에 계신분은 전체를 다 압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니 ‘다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으니 다 죄의 종이 되어서 ‘다 죽는다’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 없고 남이 경험한 것을 들을 필요 없고 동일하게 죽는 것은 예수 안믿어서 죄값으로 죽는것인데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을 들어야죠
우리가 짧은 인생에 뭘 압니까?
전체를 다 아는 예수님말 듣고, 예수님이 ‘죄인이라’ 하면 죄인인줄 알고 예수님이 용서하러 오셔서 ‘십자가의 피로 용서한다’고 하면, 그 피로 ‘대신 죽은 피’로 용서받는 줄을 아시면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은 햇빛도, 공기도, 내 목숨도 공짜로 주신 은총이고, 공짜로 온선물이며,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이땅에 증거하기 위해서 두신 증거물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뭘 알겠습니까? 우리가 백년을 산들 남의 사정 알고 이웃의 인생을 알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을 통해서 죄 때문에 죽는 것을 알았으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자기 아들을 보내심으로, 믿는자에게는 영생을 얻는 축복을 저의 것인줄 알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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