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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장- 7장 / 2004년 8월 30일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1장- 7장 / 2004년 8월 30일

정인순 2010. 12. 15. 11:48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ansan/ansan040830.mp3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ansan/ansan040830.hwp

 

 

요한복음강해
이근호 목사
2004년 8월 30일. 오후 8시.
안산나라장로교회

* 이 강의는 우리교회사이트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우리교회(www.woorich.net)홈에 들어가시면 이 강의를 음성으로 들으실수 있습니다.

요한복음1장부터 5장까지 했습니다.

늘 그렇듯이 공부 시작할때는 일장부터 다시 한번 하는 식으로 요한복음의 흐름을 다시 보겠습니다. 흐름을 놓치면 전체적인 관점을 놓치게 되고 오류가 생길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흐름은 하나로 보면 됩니다. 이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인데 말하기도 주저되지만 성경말씀은 주저할수 없죠 믿든지 안믿는지

성도는 일종의 영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다 같은 존재 아닙니까? 잠자고, 밥먹고, 성질나면 화내고, 올림픽 금메달 따면 기뻐하고---, 다 그렇고 그런 인간 그렇고 그런 관계여서 특별한 인간이나 특별한 존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은 없는데, 성령이 들어 있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해버리면 다른 사람은 졸지에 인간값도 못하고, 인간도 아니며, 살아봐야 소용없고, 뭘 해도 저주고, 하나님 보시기에 지옥갈 짓만 하고, 단지 성령이 없다는 이유,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단순히 하나님의 영이 없다는 이유로 인해 자동적으로 지옥사람되는 현상이 일어날 때, 세상 사람이 거기에 대해서 참겠습니까? 울컥 하며 화를 냅니다.못참습니다. 참을 인같들이 아닙니다. 안참습니다.

오늘날의 목사들이 요한복음에 겁을 집어 먹고 외면해 버립니다.
너무 예리하게 상식을 파괴하면서 빛과 어둠을 쪼개니까요. 이것은 상식하고는 다릅니다. 직장 생활 해보면 취미도 같고, 노래방 선곡도 똑같고 다 다른 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만 이렇습니다.  ]

요한복음에 대해서 덮어 버리면 그냥 보편적으로 살아도 별 탈없고 죽어서 천당 가면 그만이지만, 요한복음을 들쳐 버리면 우리가 원하나 안원하나 상관없이 우리 인생은 특별 관리대상입니다. 요한복음이 어려운 이유가 상식에 반하는, 상식과 잘 안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평범하게 사는데, 하나님이 우리는 평범치 않다고 하는 그 내력에 대해서 수긍이 잘 안가는 것입니다.

특별관리 대상과 특별관리 하는 내용물을 연결시키는 이것이 어려운 점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세상에 보통사람으로 살고 싶은데---, 그저 중간쯤 따라 가면서  살면 편합니다. 그런데 특별 관리 대상이 되면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달리 살아야 될 운명을 요청받게 되는 겁니다. 내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직접 관리에 나서심으로 의도하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처럼 행동해야 하는 영체라는 것입니다. 별나고 마치 이세상 사람 아닌 처럼이요. 요한복음을 펼친다. 성도가 나온다. 그런데 그는 마치 이세상에 속하지 아닌것처럼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질문하겠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편하겠습니까? 안편하겠습니까?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하여 방금 한 것, 어려운 대목이기에 다시 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부터 정리하는것인데 --- 다시 한번

요한복음을 들추면, 들추게 되면 우리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그냥 두지 않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덮으면 다 똑같은 인간들인데 펼치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네가 원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것이 아니란 말이다. 네가 원해서 천당가려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빛의 자녀라고 의도적으로 찍어서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인생과 다르게 하나님께서 직접 관리한다고 나서시지까 보통 살아가는 우리의 상식과 맞지 않습니다.

다 특별관리 대상이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냥 밥세끼 먹고, 그냥 살다가 천당가면 그만이지 요란스럽게 살고 싶지 않은데 나복음에 의하면 그냥 두지 않고 빛의 자녀로 살게 합니다. 우리를 왜 그냥 두지 않느냐는 것이다. 왜 그냥 두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교회 다니면 요구하는게 있잖아요. 예배시간에 졸지말고, 가끔식 전도집회 할때 친구데려오고, 제직회 하면 뒷자리에 앉아서 그저 가하시면 예 하세요 하면 그냥 예 하고 집에 가고 그걸로 때우면 일년에 두번씩 떡과 포도주를 주는데 이거 먹는 사람 죽어도 천당간다 하면 그것을 확보하고 교회는 목사에게 맡기고 우리는 회사와 가정에 충실하면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고 싶은 겁니다. 교회충성도 말고, 너무 나태하면 목사가 뭐라 하면 기분 나쁘니까 적당히 조정하면서 헌금도 한달에 만원씩 이만원씩 하고, 요즘 십일조 하는 사람이 뭐 있나? 바보입니까? 설교 수고했는데 보약 먹어라 그렇식으로 일이만원씩 하고 일요일날 한번 참여 해주는 식으로 하면 그만입니다. 집에 가면 골프치자 노래방 가자 바쁜데요.  교회에 한다리 걸쳐놓는 식으로 살면 됩니다.

유아세례받아야 한대, 그럼 받지 뭐, 감사헌금 오만원 내고--- 종교생활의 기교가 간단합니다. 약간의 세금 내듯이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원래 목적은 가정행복과 사업의 번창이죠. 교회, 하나님에 대한 충성, 그것은 나한테 기대하지 마세요. 다 아시잖아요. 충성은 일단 유보시키고 나중에 은퇴하고 하면 되고 자녀들한테 교회 나오라고 해주면 정성을 알아줄 것 아닙니까 그러고 싶은데---(제말이 빠릅니까? 다 아는 이야기니까 빨리 했습니다만)

요한복음 펼치니까, 빛의 자녀래요 천국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작정하사 너를 빛의 자녀로 특별관리 대상으로 삼아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디 나옵니까?

요한복음 15:16,17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사랑이라 할때 요한복음 3장에도 알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죠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안보이는데 하나님의 보이는 형태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그 사랑이 잠자는 데 구름속에서 사랑, 사랑, 그런것입니까? 그것은 환청이고 악마의 시험입니다. 그 사랑은, 사랑의 증거가 있어야지요? 그 사랑이 뭐냐,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셔서 그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담당함으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지은 죄를 담당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 죽게 한것이 이것이 사랑입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하나님 인정합니다. 예수님 십자가 인정합니다. 그거 받을께요’. 상식적으로는 그것이 정상적인 흐름인줄 아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십자가의 사랑을 표준으로 세워놓고 그 사랑이 우리보고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우리 속에 침투해버립니다. 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부부간에 ‘사랑합니다. 여보, 나 당신을 사랑해. 고마워요. 아내가 설거지 하니까 여보, 왜요? 사랑해. 알았다니까요? 애기야, 왜요? 사랑한다니까. 알아요. 네가 아직도 사랑을 모르는구나’.

왜 사랑을 모르냐 하면

사랑한다는 말은

이제는 네가 네 인생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고 이 남편된 내가 이제는 모든 것을 책임지는 쪽으로 아기야 살자. 이게 사랑입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 가운데 헌금, 전도, 그런 얘기 안들어 있지요? 우리가 사랑하는게 아니고, 제일 오해되는 것이 주님 목자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너는 내 관라하에 주님이신 목자가 우리를 양으로 사랑하기에 내 사랑을 듬쁙 주는 대상으로 삼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제대로 아는 신자는 내가 교회에서 뭘 하겠다는 것을 그것을 다 끊어 버립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하겟다는 말은 뭘 이해 못하는 사람입니다. 다 끊어버려야 합니다. 안끊으면 행함의 주체가 내가 됩니다. 귾어버리면 행함의 주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이 됩니다. 그분이 나를 장악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다 끊어버립니다. 다 끊어 버리고 주님에게 다 맡깁니다.

그렇다면 그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육적인 사람, 성령이 없는 사람, 사랑 없는 사람은

목사가 충성하세요 복종하세요 그렇게 설교하면 그 새댁은 설거지 하면서 주님 이것 보고 계시지요? 설거지를 하면서 목사 말대로 열심히 하니까 알아주세요(지금 이 모습을 사진으로 아예 찍으세요)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술먹고 들어와도 저는 이렇게 참습니다. 이런식이 되는데 사랑을 알고 믿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설거지를 저에게 봉사로 시키는 군요. 저를 가만두지 않으시고 이 설거지를 시키는군요. 내가 설거지를 잘하고 목사 말대로 남편 잘 섬깁니다가 아니고 나를 가만두지 않고 설겆이를 시키는 것입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잘 섬기면 잘 한것때문에 복이 오고 잘 못하면 그만큼 징벌이 오는 것이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봉사를 하게 되면

설거지를 하든 말든 관계없이 나는 이미 하나님께서 알아주는 사람이 되어서 일부러 설거지를 시키는 것입니다. 이미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내 친한 식구라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오늘은 설겆이하고 내일은 남편하고 싸우고---

이미 행동 여하에 따를 징벌이나 저주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미 내 행동 여하에 따른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받았기에 그런 행동이 나왔지 행동해서 사랑 받으려고 하면 신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동을 잘못해서 벌받는다 싶으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어느 경우에 두려움이 생깁니까? 사랑이 없을때 생깁니다.

요한일서 4:17.18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쫒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예를 들어 내가 술을 먹으면 단번에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내가 목사인데 술을 먹으니 하나님 보시기에 목사답지 못하다고 책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잘못하면 징벌을 받는데

1번 애 아픔
2번 마누라 바가지
3번 에어컨 고장
4번 전기세 많이 나오는 것

이런 객관식 전체가 사랑을 믿지 않기에 나타나는 악마의 실체입니다
이런 항목자체가 다 마귀가 만들어낸 항목입니다. 사랑을 믿지 않기에 나타나는 악마의 실체입니다. 마귀가 조장해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걸 보고 마귀는 좋아서 춤을 추고 예수님은 징계합니다. 행동과 상관없이 십자가를,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줬는데 믿을것도 못되는 그 감정을 믿는냐 하는 것입니다.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몸, 안아프면 사랑하고 아프면 찡그리는 연약한 너 자신을 믿는냐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특별관리 대상이냐 하는 것입니다.

다 끊어 보세요.

성경이든 전도든 다 끊어 보시고 그러고도 성경읽고 싶거든 오늘은 주님의 사랑으로 성경을 읽게 되는구나, 읽으면서 주님의 사랑으로 성경 읽게 되는구나 하면서 감사할때 그게 신앙입니다. 육에 속하면 법에 속하고 영에 속한 사람은 법에서 벗어나서 사랑에 속합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하는 소리는 하나입니다. 네가 사랑을 아느냐? 네가 십자가의 그 큰 희생을 아느냐? 안다면 네가 네 행동에 그렇게 주목 안하고 신경 안쓸거다 그말입니다.  

두려움은 사랑이 없으면 생깁니다.

사랑이 있으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누가 날 사랑한다는 의식이 없으면 행동 잘해야 한다는 의식이 생기고 두려움이 생깁니다. 마귀가 좋아합니다. 오늘도 잘 살았는데 내일도 잘 살아야지 그런식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주님 사랑으로 살았고 내일도 주님 사랑으로 살겠습니다. 그러면 문제없는데오늘도 내 책임으로 살고 내일도 내 책임으로 산다는 것에서 두려움이 생깁니다.

오늘도 내덕으로 아픈애 없이 잘 살았구나. 내일도 입술로 실수하면 무슨 징벌이 올것인데 ---이런 것 자체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사랑했기에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을, 내일도 사랑해주신다는 것을 요한복음 10장에서는 목자라고 합니다. 목자의 주특기는 양떼를 보호하고 지키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을 목자께서 하시도록 제발 맡겨주기를 바랍니다. 목자께서 양을 치도록 여러분은 방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자라도 말안듣는 양이 있잖아요. 그게 바로 전데요.  때리면 아프잖아요. 목자가 사랑하다가도 사랑안할때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가 이것은 요한복음 10장을 찬찬히 안읽어서 그럽니다. 요한복음 10장의 목자는 이미 값을 다 치룬 목자입니다. 연약한줄 아시고 미리 다 땡겨서 십자가에서 다 치뤄버렸습니다. 양을 빼앗아 가려고 악마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지만 이 세상 어떤 것도 목자에게서 내 양을 빼앗을수 없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0:28,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도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수 없느니라

제발 목자를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좀 무시하지 말자고요. 요즘 교인들 마음속에 그까짓거 합니다. 예수 뭔데, 예수님 사랑이야기 하면 속으로 뭐가 중요한대 하고 속으로 내뱉는 그런 심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심성이 그렇습니다. 이상하게 예수 라는 말만 들어도 반발하고 싶고 옆에 있으면 발길로 차고 싶은 겁니다. 10년 믿든 이십년 믿든지간에.

그게 우리 본성인데 그 본성을 미리 다 아시고 그 본성 보다 강한 사랑안에 우리를 집어 넣고 있는 것입니다. 고추 튀김 맛있는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고추로 만들어서 그 안에 사랑을 꼬기꼬기 채웁니다.

사랑은 빛이 언제 나나요?

자기 자신에게 절망할 때 그때만큼 그 사랑이 환하게 빛날수가 없습니다. 좀 가졌다 싶으면 사랑이 별로 안기쁩니다. 그까짓거 나는 예수 없어도 통장만 있으면 살수 있다는 식입이다. 지금 내가 사업 잘되는데 뭐가 아쉬워서 미쳤다고 예수한테 매일까, 이런태도 때문에 예수가 푹 튕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사랑이 우스운 것입니다.

절망적일때 자식이고 친척이고 다 소용없고 나 인생끝낼란다 할 그때 그때 예수의 사랑이 가장 많이 다가옵니다. 너 못난 것 알지 그래서 내가 너를 사랑했잖아. 너는 그래서 특별관리 대상이고, 행동에 관계없이 빛의 자녀라고 주님께서 선포해버립니다.

지금까지 요한복음을 요약했는데 요한복음의 느낌이 어떻습니까? 우리가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작정과 작업을 우리쪽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부터 이미 작정과 작업을 해서 성령주셔서 주님의 사랑을 믿은 다음 깨닫게 하는 것을 일장 이장 삼장 밀어 부치고 있습니다.

4장에서는

왠 여자 하나가 있는데 말을 걸어서 나는 메시야로부터 택함받은 신자구나 확인받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고

5장에서는

베데스다 못가에서 삼십팔년 병자가 있는데 스스로 혹은 다른 사람 도움받아서 고치려고 했던 그가 예수님이 찾아와서 그냥 낫게 하고 그 다음에 그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정신을 심어서 유대인 한복판에 보냅니다.

요한복음 5장 6장을 다 예수님께서 자기일을 하다 보니까 우리가 걸려 든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일이 우리의 구원이 된겁니다. 예수님게서 하신 일이 이루어지도록 그냥 자기를 괴롭히지 말고 한번 방치해보세요. 그러면 아침부터 눈뜨면서부터 저녁때까지 모든 것이 은혜고 모든것이 선물입니다.

주님것, 주님이 구원한 양 필요에 따라서 알아서 관리하시는데 내가 관리할 필요가 뭐가 있나요? 맡기는 겁니다. 주님이 관리하는 사람같으면 길거리를 가다가 침을 왜 뱉었습니까? 할때에 사실은 내가 길가다가 하루에도 열대벗씩 침을 거리에다 뱉는데 그날은 사랑으로 한번밖에 안뱉었습니다. 그저 주의 하겠습니다. 그러면 뭐합니까? 다음번에 한번 뱉을 것도 두번  뱉게 됩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를 관리 못합니다. 맡겨버리세요. 이오 이사짐 있잖아요. 바보 등신같은 것이 이사짐이 왔는데 자기가 이사짐 풀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짐쪽에서 알아서 다 해주잖아요. 그쪽에서 몽땅 우리를 자기 나라로 데려가려고 짐을 꾸리고 있습니다. 꾸리면서 우리몸만 달랑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데려 가면서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이 이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데려가려고 우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9장에 나오는 소경된자를  누가 먼저 찾아갑니까? 예수님이 먼저 찾아 가십니다.  

실로암에 진흙발라 씻으라 했는데 그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쪽에서 나온 것 입니다. 우리 같으면 눈뜨면 고맙다고 인사하고 집에 가고 싶은데 그게 아니고 이리와! 구원이 전부가 아니고 구원이 네 것이 아니고 너는 내 사랑을 증거해야 할 인간이야 하면서 불러 세우고 그들에게 그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세운겁니다. 안다는 너희가 소경이고 이 사람이 바로 주님을 알았으니 이 사람이 소경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그렇게 증거하기 위해서 세운것입니다.

요한복음 9:39-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여러분이 한번 성경적 이야기 치우고 상식적으로 이야기 해보세요.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어디서 나왔습니까?

요한복음에 의하면 성도는 하늘에서 왔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올라가고 올라가고 아무도 모릅니다. 빛이 된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조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2004년에 안산시에 살도록 작정하시고 그 계획에 잡혀서 살아가게 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난 복음을 같이 생각하도록 하신겁니다

별나게 인간성을 바꾸라는 것이 아니고 옷바꾸라는 것이 아니고 똑 같은데 전에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자기 범칙이 들어 있지만 이제는 내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덕분에 지금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그 내용물이 다릅니다.  

이것은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같으면 이 사실을 정말 받기 힘듭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을 봅시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다음주 주일 오후에 울산 동은교회 설립식에 이 본문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대부분은 여기서 찾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릇된 해석인데 다른 것은 눈에 안보이고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기에 눈독을 들이고 예수 믿기만 하면 사망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여기에 눈독을 들일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 말씀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런 원칙대로 이끌겠다는 것입니다.
(아하, 이해가 잘 안되는 모양이군요)

대부분은 성경 보면서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까에 초점을 맞추고 거기에 합당한 증거를 찾으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자기 편의이고 정말 이기적인 사고방식이고 성경의 본뜻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망과 생명이 결정된다는 식으로 세상은 움직여 가고 있고 덮여져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라는 것입니다.(아하, 이해 안되시네)

보세요! ‘예수님 때문에 사망이냐 생명이냐 하는 것으로 세상은 확연히 갈라진다는 식으로 예수님께서 세상을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을 당신은 믿습니까’ 그런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만 탁구 유승민이 금메달 따는 것 의미 없지요? 내가 회사 다니는 것이 의미없지요? 집에 딸이 있는 것이 의미 없지요? 남편 술처먹고 집에 들어온 것이 의미 없지요?가정행복 의미 없고 수출 잘 되는 것 의미 없고요. 왜냐하면 세상은 예수님 때문에 그 중심 인 예수님 때문에 세상이 결단나는 식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잘되고 못되고가 관심없고, 관계 없지요? 이것은 하나의 파도인데 파도가 밀려오면 해변가에 쓰레기 같은 것들을 확 밀어 부치고 무엇만 남는다? 예수님 때문에 살래 죽을래만 남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맘속에 들어와 버리면 그 동안에 교회부흥, 우리 딸냄이, 회사에 충실 등등 하는 이 쓰레기 같은 것들이 우리 맘속에 밀려 사라져 버리고 나는 예수님 때문에 살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죽는구나! 이것이 세상의 유일한 원리다. 이것만 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뭐가 생깁니까?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이 말씀이 안들어오면 뭐가 생깁니까? 두려움이 생깁니다.

어떻게 살지?
애가 아픈데 병원에 가야 하는데
지갑에 돈떨어 졌는데
어떻게 살지?

하나님이 세상 보는 중심 원리는 없이지고 내가 중심 되는 식의 그것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성경 한귀절을 봐도 다르잖아요.

이런식으로 성경을 다시 읽어 봅시다.

조금만 더 하고 마칩시다.(아니다. 말 잘못했다. 조그만 하면 안되고 많이 해야죠)

쓰레기고 나발이고 행복이고 다 때려치우고 그런 마음 들어온 그것으로 읽어봅시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두려움이 생깁니까? 안생깁니까? 안생긴다니까?

이봉주 금메달 못따도 괜찮다니까?

아침에 그릇깼다. 괜찮다니까요?

사랑이 오면 뭐가 없어진다? “두려움이 없나니”

문제는 두려움입니다. 돈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돈이 없는 것 그 자체를 두려움으로 보는 것이 그것이 문제입니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머리둘곳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어서 장사하러 가겠다는데 죽은 자는 죽은 사람한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라오라고 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게 어떤 경우에 가능합니까? 그런것들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것을 알 때입니다. 주님의 확고한 사랑이 들어오면 그런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것을 큰 문제로 여기니까 마귀에게 시험 들어서 벌벌떱니다.

“자유케 하리라”(요 8: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했는데 우리는 자유가 어디 있나요, 매이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봉사하고 사랑으로 설거지 하면 되는데 은혜로 하지 않고 지금 뭐 하고 있습니까? 이런식으로 보상을 기대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속에 두려움으로 무장되어 있고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고 믿음 과시하고 성경 두장 읽던 것 석장 보고 기도 두시간 반 하던 것 세시간 네시간 하고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것이 다 두려움을 자기 선에서 해결해보려는 자구책인데 그것은 주님께서 인정 안하십니다. 주님께서 놀고 있네, 그럽니다.

요한복음을 같이 봐도 정신머리가, 사고방식이 영적으로 보면 보는 족족 기분 좋은데 만약 육적으로 보게 되면 보는 족족 짐이 됩니다. 이것도 지켜야지, 이것도 지켜야지 아이고 차라리 덮어 버립니다.

6장을 다시 요약하면 구원은 하나님쪽에서 시작했다. 그 증거는 내가 원해가 믿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이 내 속에 밀려와서 내 속에 있는 생각은 차버리고 예수님의 사랑만 넘치도록 한다. 영원토록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나를 사랑하는 구나 하는 것을 증거로 보신다면

여러분은 오늘밤이라도 주와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놓고 6장 들어갑니다.

제가 이렇게 신신당부 했는데도 강의 끝나고 내일되면 또 아침에 은혜로 눈을 떴구나 그렇게 생각 안하고 걱정거리, 오늘 세금 내야지 뭐해야지 하는 두려움속에서 내가 걱정거리를 만듭니다.

주님이 숙제를 내줬습니다. 은혜로 은행에서 돈찾는 숙제 애기 보는 숙제 애오면 숙제 봐주는 숙제 주께서 살아있는 이유로써 내 일을 시키심으로 오늘도 숙제를 받는데 뭘 해야 적게 받지 라는 식은 이것은 말릴수가 없는데 말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자 6장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일단 받았다 치고, 치면 안되고 이것은 정말 받아야 합니다. 마귀가 노리고 있는데 마귀가 바울도 알고 예수도 알고 도사입니다. 마귀가 사랑을 싫어합니다. 공짜로 은혜 받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걸 이겨야 합니다.

6장에서

누가 미운가 하면 떡먹고 또 달라고 또 달라고 오는 놈들이 미워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가지고 오천명 먹였는데 먹고 배부르니까 배부른다는 그것을 의식하면서 예수님께 또 떡 달라고 오는 그 인간이 미워요. 현재 우리 맘속에 사랑이 없고 옛날 육만 들어 있으면 여기 나오는 떡 달라는 인간에 동참하고 싶을 겁니다. 우리도 주님께 이렇게 항의하고 싶어요. 옛날에는 떡도 잘 주시고 고기도 잘 주시더니 왜 요새는 기도하는데 응답을 안해주십니까? 밉습니다. 미워요! 무엇을 나쁘게 보고 왜 기적을저에게는 안줍니까? 특히 제가 밉나요? 전에 헌금 천원짜리 그거 안했다고 삐져서 이런 식으로 대하십니까?

같은 상태에서 성경을 봐도 이미 사랑받은 마음가짐으로 구원받은 상태에서 보면 떡달라고 오는 인간이 밉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보 아닌가? 이렇게 무식한가?

요한복음 6: 2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나를 왜 찾았는냐? 내가 이야기 해줄게. 너희들 떡먹고 배부른 까닭이지? 예! 그런데 그 떡은 썩을 것 아닌가? 내가 온 것은 썩은 떡 주려고 온줄 아느냐? 그렇다면 너희들은 완벽하게 떡먹고도 사랑이라는 기적을 못받은 인간이다. 내가 온 것은 썩지 않는 그 생명을 주기 위해서 왔단다. 먹고 싶냐 안먹고 싶냐?

제가 묻고 싶어요? 여러분은 그떡 먹고 싶어습니까? 안먹고 싶습니까요? 안먹고 싶어요. 이것은 먹고 싶다 아니다가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먹게 해주십니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항상 제 강의 초점이 뭔가 내 행동 여하에 달라지는 것은 없지요? 주님께서 이렇게 조치를 해 주니까 그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위대함을 좀 믿어달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 믿고 천당가자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 속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가 걱정할 필요도 없이 다 조치해주신다는 것이 들어 있는데 그걸 믿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을 아는 사람이고 사랑을 알기에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요한복음좀 알아요? 할때

6장에 보니까 생명의 떡된다는 이야기 있는데 목사님이 고함질러가면서 이야기 합디다. 그런데 왜 예배 나오고 교회 다니면서 예수 믿는다 해놓고 떡달라고 기도합니까? 그게 아니라고 합디다.

그것이 나쁘다는 데 아니면 뭡니까?

그게 떡달라는게 아니고 (아하 그거구나) 이렇게 하세요
예수님은 썩어질 떡(돈)벌게 해주는 예수가 아니고 돈으로 살수 없는 영생을 주려고 오셨습니다.(아 맞다. 그게 기억나네). 정리할게요.

예수님 오신 목적이 썩어질 떡을 준 것이 아니고 돈으로, 떡으로 살수 없는 영생주려고 준 떡인데 예수님 보고 떡 달라고 온사람 나쁜 사람입니다. 나쁜 사람이라고 책망받았을걸요

그러면 듣는 사람이 모른다고 해놓고 많이 하네 하고 감동 받을 겁니다.(감동받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강의를 듣는 것이 이것이 자기 일인 동시에 주님께서 누구를 붙여 줍니다. 그때 요한복음 6장의 이 강의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요구하는 것은 안주고 주님께서 요구하는 사랑을 주십니다.

6장 7장도 마찬가지인데 인간이 요구하는 것은 안들어주고 주께서 요구하는 영생과 사랑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속에 반복이 되면 이제는 사랑으로 감을 잡습니다. 흔들림이 없이 이럴때는 이렇게 약 처방을 본인이 내릴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부터 20장가지 다 알아버립니다. 그 식대로 마태복음도 알고 뭐 그런식으로 그런식으로 다 뚫립니다. 이것이 목사의 임무입니다. 스스로 성경을 볼수 있는 눈을 열어 주는 것이 목사의 임무입니다. 스스로 성경보고 은혜받도록 해주는 겁니다. 난 이렇게 은혜받았다는 것을 시범 모델로 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6장에서 이야기 안한 것이 있습니다. 할 것이 있습니다. 그냥 넘어가면 안됩니다.

1. 썩어질 떡은 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2. 왜 오셨다?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영생은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와서 예수님 믿으면 영생 얻는다고요? 난 철학 하는데 몰라서 그런데 물어 봅시다. 예수님이 어떻게 영생 주는 겁니까?

앗, 그건 모르겠네.

그것봐, 헛배웠잖아. 잘 모르잖아. 아는줄 알았네.

안다고? 그러면 썩어질 것이 아니라면 영생은 어떻게 오는지도 알아야 하는데---

영생은 어떻게 옵니까?

광야의 만나처럼 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지고 “너희를 살게 하는 생명의 떡(만나)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이 어렵기에 만나부터 이야기 합니다.

만나가 하늘에서 왔나요? 아니면 공장에서 왔나요? 사람이 만들었나요? 하늘에서 그냥 왔나요?

하늘에서 왔습니다.

만나의 특징은? 사람손에서 만들어진다고요? 안만들어진다고요?
이걸 오늘날 목사들이 모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만나로 봤습니다. 예수님이 만나입니다. 만나는 생산자, 공장 주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사람입니까? 하나님이라니깐요! 유치부도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기본중의 기본인데 기본조차 우리가 빼놓고 있다고요. (나 미치겠어 정말)

내(가) 목사(들)한테 이야기 하고 싶어요.
목사님들! 생명 누가 만들었어요 대번 찔릴것입니다. 묻는 의도를 알고서.

예수님이 만들었지요? 그것만 증거하세요
예수님이 만들어서 이렇게 주시고 있다는 것만 증거하세요
사람 꼬셔서 만들어내려고 하지 말고 제발 부탁하는데 만들어 낸것만 증거하세요.
생명은 예수님만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그런차원에서 예수님을 만나 또는 생명의 떡이라고 본겁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어려운게 나오는데

그래서 너무 어려워서 요한복음 6장 56절 해석이 어려운데 손뗀 사람이 많습니다.

만나가 사람손에서 안만들었다. 인정
하나님쪽에서 만들었다. 인정

만들때 어떻게 만드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으로 만듭니다.

약속이 어려우면 맹세라고 합시다하나님의 맹세로 만듭니다. 하나님은 언약대로 언약에 의해서 만나를 주는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언약을 성취하기 때문에 언약의 하나님인데 그 언약으로 만들어서 주시는데 언약에서 생명이 나와서 그 생명을 줘서 영생얻는데 그 언약을 누가 이루나 “다 이루었다”고 큰소리 친 분이 누구입니까? 저도 여러분도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다 이루었다. 누가 외쳤어요? 예수님이 외쳤습니다. 이루기는 누가요? 예수님이 혼자서. 둘이 아니고 예수님 혼자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룬 것을 만나처럼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주시는데

다 이룬 것이 뭐냐? 하나님의 언약이다.

언약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에 우리 행함으로 구원못받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우리는 언약을 못이루기에 이룰수 없기에 우리 행함으로는 구원 못받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라는 말씀 못 이룹니다. 십일조도 못합니다. 의와 인과 신을 포함시켜야 십일조인데 십일조의 목적이 음흉합니다. 돈놓고 돈먹기 하기에 안됩니다. 다 이루신 분이 예수님 뿐이고 예수님이 만나 이기에 받아 먹기만 하면 됩니다.

언약속에 제사가 있고 제사는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희생을 해야 하는데 그 희생을 완전하게 이루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에(목다 쉰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왜 같은 말을 해도 얘들아 너희가 인자의 피를 먹어라 이렇게 이야기 하면 될텐데 그렇게 말하지 않으시고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먹지 아니하면 너희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고 하십니까? 이말은 너희들 끼리 생명얻기 위한 모든 수고는 말짱 도루묵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충격이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영생 얻기 위해서 율법지키는데 그것은 백날 죽음뿐이고 멸망뿐이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이지 행함으로서는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었겠습니까? 다 떠나겠습니까?

요한복음 6장 66절에 에 보니
“이러므로 제자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합니다.

저는 안산모임이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습니같다. 왜냐하면 그당시 예수님 한테 떡먹고 고기 얻어 먹은 사람들도 결국 떠나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어렵습니다. 왜 어려운가요? 하나도 안 어려워요. 왜 이려운가요?
내쪽에서 시작한게 있기에 어려운 것입니다. 내쪽에서 뭔가 이루어 보려고 한 것이 있기에 어려운 것입니다.  김목사, 이목사, 다 있어도 묻고 싶어요. 주님이 해놓은 떡 먹습니다. 이런 대답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믿지도 않는 사람 왜 끌어 모르려고 야단입니까? 예수님은 다 떠나갔다는데.

비겁한 인간! 주님도 모르면서 종으로 행세하는 인간들! 뭔가 노리는 겁니다. 돈을 노립니다. 절대로 우리가 못 만드는 겁니다. 이거 하나 기억하세요. 주님이 주시는 생명은 절대로 우리가 못 만듭니다. 이게 만납니다. 오늘 강의 이거 하나 기억하세요

오죽했으면 만나 였겠나. 사람이 못만듭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허옇게 깔렸더라’ 이게 만나입니다.
도데체 여러분 뭐 생각합니까? 저는 이생각합니다. 뭐 생각합니까? 기껏 교회 다닙니까? 뭐합니까? 글쎄 요즘 신앙생활 하려는데 회사에서 바빠서요. 몸이 좀 아파서요. 이상한 소리 하네---알기는 뭘 아는데요? 다 알지요.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다 압니다. 그러면 왜 성경이 시키는데로 안하고 자기가 자꾸 잘나보려고 하는겁니까? 성질납니다 지금, 제발 그러지 마세요. 오죽 못났으면 만나이겠습니까? 우리가 칼가지고 안찔렀으면 오죽 저쪽에서 피를 흘렸고 살을 찢겼습니까? 주는 대로 드시고 살아가는 것은 봉사로 여기세요. 주님께서 시킨다고 안한다고 벌주는 것 아닙니다. 구원받았기에 시키는 일입니다. 어렵기는 개뿔이 뭐가어려워요. 세상 이렇게 쉬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줘도 못먹나!!

되도 안하는 자존심, 위신, 너도 믿나 나도 믿는다. 기도 한시간 하나 난 두시간 한다. 한달에 네 번 나간다고? 난 두 번밖에 못나가는데 옴마 기죽어. 그런 짓거리 하지 마세요. 그것은 십자가앞에서 예수님 뺨때리는 것 하고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목사님 전도가 잘 안되는데요 내가 이런소리 해도 안먹히는데요 이렇게 하고 싶을 겁니다.

본인이 복음이라고 안다고, 만나는 사람에게 전해보세요. 본인이 이렇게 전도 하면서 이렇게 했으니 난데없는 행운이 굴러 올거라는 생각이 약간은(아주 약간이라고 해두죠) 있을수 있어요. 아주 없다면 말이 안되지만. 보세요. 좀 봐주세요 주님! 이런식으로 약간 있을수 있는데 다 부질없는 것이고 만나거든 그 사람에게 복음 전하고 손빼고 결과를 맡기세요.

전도 하나 안하나 구원될자는 잘난 목사보다 천당 먼저 간다. 주님의 피로써 살로서. 창기, 깡패 다 천당간다. 내가 아는 복음이 이것이다.

이것 목터져라고 외쳐도 외칠만 합니다. 너무나 쉽고 너무나 귀하기에
만나거든 주께서 그냥 주시는데 피로서 살로서 찟긴 살로서 주신다!!!
이거 목터져라 외쳐도 너무나 쉽고 너무나 귀한 말씀이기에 외쳐도 보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있죠? 하실거죠!

어떤 경우라도 실패를 두려워 말라는 겁니다.
다이루었기에 실패는 없습니다.
봉사하는 정신으로 해 나가면 됩니다.

(7장 조금만 하고요 다들 피곤하시니까)
6장은 알겠는데 고함을 지르시니---

요한복음 7장내용은 6장과결부해서 무엇입니까

6장 다시
뭐는 아니다?

썩을 떡은 아니다. 썩을 자 빼고 떡은 아니다.

뭐다?

생명주실려고 왔다.

방법은 뭐냐?
그냥 주신다.

1. 떡은 아니다. 예수 믿고 돈을 달라고 하면 그것은 아니다.
2. 생명이다.
3. 거저 주신다.

그냥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희생 제물이 되신다. 예수님께서 이 길을 가야 됩니다.

인정하고 동의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냥 주시면 되지 왜 고생길을 가십니까?

7장에는 율법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거저 주시면서 거저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게 무슨 낭설?
하나님은 줄때는 거저 주는데 그전에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어떤 분이 있어야 합니다.
신명이 28장처럼 율법을 다 이루면 들어가도 복받고 나가도 복받는다고 하지요?

신명기 28:1-6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여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주님은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차원에서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 차이를 고함 안질러도 아시겠지요? 그 생명되는 예수님이 법을 다 지켜서 그래서 다 지킨 차원에서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대가가 의로움으로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해 되는데 7장에 뭐가 들었나요?

그 당시 율법지키는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기 딴에 지킨다고 하는데 사실은 하나도 못지킵니다. 그 이야기를 해 줘야 합니다.
(마지막 어려운 것입니다. 피곤하더라도 조그만 더 참으세요)

요한복음 7장 19절 보세요.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중에 율법을 지키는자가 없도다”

갑자기 예수님께서 먼저 율법을 꺼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율법을 생명같이 여깁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율법 받았고, 하나님을 만난자는 모세뿐이기에 율법을 강조합니다. 그 율법을 지키면 축복이고 안지키면 저주 받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믿으면 구원이고 안믿으면 저주라는 것과 같이 그들에게는 율법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시비를 겁니다.
‘너희들 중에 율법지키는 이 하나도 없다’.

왜 이 시비를 겁니까? 이 시비를 걸어 주면 거기서 만약에 그 예수님 말을 받아 드리면 저희들은(유대인들) 지옥가고, 자기들이 천당가기 위해서는 그 말한 당사자를 없애야 합니까? “안”없애야 합니까? 없애야 되죠? 없애야 그들은(율법지키면 축복이라고 믿고 그렇게 하고 있다고 믿는 유대인들) 천당갑니다.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요7:20)

이런말을 해버려야, 예수님말을 무시해 줘야 여전히 율법지켜서 구원받는다는 것(자신들의 종교적인 신념)이 남습니다.

19절을 보세요(요한복음 7장)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 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참, 재미있어요! 지금 유대인들은 너무 과격하다는 것만 있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사가 없습니다. ‘미쳤나 언제 너를 죽이려 했는가’(요 7:20)

예수님께서 하는 모든 행동은 율법을 포기 못하는 놈(들)으로 예수님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율법지키서 구원얻는 사람은 없고 오직 예수를 믿는 사람만 영생 얻는다는 그 코스를 밟아가기 위해서 요한복음 7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8장에 가면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고 율법에서 자유케 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네가 귀신들렸다” 합니다(요 8:48). 예수님이 ‘너의 애비는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다’(요 8:44) 하십니다. 이로써 대충돌이 격화되면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하기 까지 그들이(율법에 매인 유대인들) 예수纛?죽이도록 유도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스스로 죽는다’. ‘내가 스스로 죽는다’고 하십니다. 율법을 다 이루어서 생명을 공짜로 주기 위해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어렵습니까?

요한복음 10: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이제 마지막으로 정리합니다)

사랑을 던져 줌으로 사랑받은 사람은 특별관리 대상이 된다.
(특별관리 대상이 된)그의 특징이 뭡니까?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으로만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이 믿어 지는 사람만 속속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붙잡아서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도구로 삼게 하신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런 도구를 쓰게 할수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예수님한테서 썩어질 떡을 원해서 메시야를 원했다.

예수님은 아예 떡을 줘놓고 따라오게 해놓고 ‘너희들이 나를 따라 오는 것은 썩어질 떡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나는 만나다. 그냥 주는데 내 살과 피의 형식으로 제공될것이다 그 이유는 어떤 인간도 율법 지키는 인간 없기에 나만이 십자가에서 죽어서 이룬다.

소위 잘난 율법지킨 너희들이 나를 죽게 해서 덕분에 죽지만 요한복음 19장에 있는대로 나는 죽기에 죽어서 오히려 공짜로 영생 얻도록 그렇게 조치한다. 이것이 확실한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준 변함없는 목자의 양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다.

여러분 제가 가시더라도 (다음에는 추석이니까 9월 20일날 한 주 당겨서 하는데)

그때까지 여러분이 행함의 삶이 아니라 봉사의 삶을 부담없이 자유롭게 해도 안해도 벌 안받는, 삶 그 자체가, 내가 남편을위해서 설것이를 할수 있다니 하는 그 일 자체가 감사한 마음으로 설거지 하시고 특별히 사랑하시기에 나한테 이런일을 맡겼구나 하는 부담없이 고맙다는 마음으로 한달동안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마귀가 얼마나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지 정말 감당하기 힘듭니다. 이래도 두려움 저래도 두려움, 돈을 가져도 두려움, 없어서 없다고 두려움, 잘나도 두려움, 못났다고 두려움, 죄져도 두려움, 두려움으로 점철된 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니 항상 감사함으로, 항상 기뻐함으로, 은혜로서 주앞에 감사와 영광돌릴수 있는 남은 세월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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