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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지옥의 하나님 39 - 인간구원을 위한 신학8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지옥의 하나님(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39 - 인간구원을 위한 신학8

정인순 2010. 10. 11. 22:47

09 대구강의 5 - 지옥의 하나님 39 - 인간구원을 위한 신학8 
 교회(인간 신앙과 약속)와 양립 불가인 십자가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090316지옥의하나님p184.mp3 
                                                                               
                                                           09,03,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능선 너머 참한 예배당 !!

오늘은 교재 ‘지옥의 하나님’ 184페이지에 있는 ‘십자가 받아들이기’를 시작으로 해서 이 책을 모두다 끝내도록 하겠는데, 그것을 하기에 앞서서 이 책의 제일 앞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목차 이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는 것이다. 제일 첫 시간에도 언급했지 싶은데 말이다.

능선 너머 참한 예배당
뾰족탑도 아름답던 마당
그 소박한 교회 예배당 지붕에도
유황불이 떨어질 거라고
상상이나 해보았는가
성도가 믿는 것은
교회생활의 경험과 추억이 아니다.

본 글은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인간들의
종교적 아이디어와 실천성에 대해서
소개한 글이다.

그릇된 종교행위가
가장 발달한 형식으로 유통되는
교회의 실상을 알리려 한다.

처음에 “능선 너머 참한 예배당, 뾰족탑도 아름답던 마을, 그 소박한 교회 예배당 지붕에도 유황불이 떨어질 거라고 상상이나 해보았는가”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요즘같이 봄이 되면 따뜻한 남향 양지바른 곳에 그렇게 아름답던 고향마을의 예배당에 지옥의 유황불이 떨어질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아늑한 고향교회의 예배당과 유황불은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 하나님의 약속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오늘은 몸이 아파서 좀 앉아서 하겠는데, 제가 이런 글을 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상당히 낭만적으로 어떻게 보는가?” 라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낭만적인 세상이라는 것이 우리의 약속인데, 그러니 우리가 상상해서 그리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약속인데, 즉 ‘나’의 약속이라는 말이다.

◈ 주님의 약속은 인간들의 약속을 공격해 !!

그런데 여기에 비해서, 이런 우리 인간의 약속을 깨부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주님의 약속은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마지막이 불심판으로 끝이 난다는 것이다. 마지막이 항상 하이라이트인데 말이다.

(벧후 3:6)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그러니 제 아무리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꿈꾸던 동네” 라고 해도, 하지만 마지막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심판이 떨어진다고 하면,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첫째로, 내 약속은 왜 먹히지 않는가?

첫째로, “내 약속은 왜 먹히지 않는가?” 라는 점인데, 이번 WBC 대회에서 일본과 야구게임을 하면서 김광현이라는 투수가 전에는 잘했는데 이번에는 2회 동안 무려 8점인가를 내주었는데 말이다. 슬라이드가 전혀 먹히지를 않았는데, 아무튼 “내 약속은 왜 먹히지 않는가?” 라는 것이다. 물론 야구의 경우에는 일본이 철저하게 연구를 해서 그렇지만 말이다.

◈ 둘째로, 주님의 약속은 왜 나와 상관이 없는가?

그리고 둘째로, “주님의 약속은 왜 나와 상관이 없는가?” 라는 점인데, 이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주님의 약속은 ‘나’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 말이다. 주님의 약속은 오로지 예수님 본인과 관련이 되어獵?것이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와 상관이 없다는 것은, “나의 기도와 헌금과 봉사와 열심과도 상관이 없다” 라는 의미인데, 아무튼지 ‘나’에게서 나오는 것과는 도무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주님의 약속은 왜 나와 상관이 없는가?” 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 당연히 “나의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기도, 나의 헌금이 아니라 주님의 헌금, 나의 봉사가 아니라 주님의 봉사, 나의 열심이 아니라 주님의 열심”이라는 말이다.

◈ 성도가 믿는 것은, 교회생활의 경험과 추억이 아니라 !!

그래서 이 책에 보면 “성도가 믿는 것은 교회생활의 경험과 추억이 아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누적되어있는 경험과 추억이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잘하고 못하는 것을 성경말씀을 가지고 측정을 해야 하는데, 그런데 성경말씀은 갈수록 기피해버리니, 그렇게 되니 남는 것은 축적된 자기의 경험과 추억뿐인데, 그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들이민다는 것이다. 

◈ 지옥에서 당기는 힘이 !!

계속해서 글을 보면 “본 글은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인간들의 종교적 아이디어와 실천성에 대해서 소개한 글이다. 그릇된 종교행위가 가장 발달한 형식으로 유통되는 교회의 실상을 알리려고 한다” 라고 하는데, 인간들이 이렇게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데, 하지만 자기가 자기를 당긴다는 것이다. 마치 용수철과 같은 것이 있어서 말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 자기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의 경험과 추억에서 놓으면 되는데 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에 들어가면 되는데, 그러니 지옥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지옥에서 놓아주지 않으니, 그렇게 다시 용수철처럼 지옥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목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왜냐하면 목사라는 것이 기존교회의 추억과 경험에서 나온 것인데, 즉 목사는 강대상에서 설교하고, 저렇게 인상과 인품이 좋고, 또한 성격이 좋아서 남을 배려하고, 그래서 교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말이다.

바로 그러한 것이 성경말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기존 교회의 경험과 추억에서 나온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나도 앞으로 저런 목사가 되어서 교인들에게 존경을 받으면서 보람된 인생을 살아야지” 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없다는 말이다. 그냥 교회에서 사람들이 “목사님, 목사님” 이라고 하니, 그런 개념에 맞추도록 노력한 것이란 말이다.

◈ 목사는 그냥 ‘쓰레기’ !!

성경에서 말하는 목사는 한 마디로 경상도 말로 하지면 ‘씨레기’ 인데, (그런데 씨레기는 무나 배추를 말린 것이 아닌가? ㅋㅋ) 즉 ‘쓰레기’ 라는 것이다. 즉 세상의 찌끼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보고 뭐라고 하였는가? 다른 말도 필요 없고 그냥 ‘이단’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일단도 아니고 이단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한 마디로 표현을 하면, 저주받은 죄인인데,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 말이다. 그래서 아무도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성경말씀을 보지 않고 한국교회가 만들어낸 추억과 경험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 목회생활 2년이면, 땡 !!

그렇게 되니, 그래도 자기가 목사라고 하면서 처음에는 성경을 가지고 열심히 영업을 하다가, 결국은 목사부터 먼저 성경을 버리는데, 그 기간이 약 2, 3년 정도 걸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목회를 2, 3년만 하게 되면 성경과는 정녕 작별을 고한다는 것이다.

그 정도가 되면, 진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노회나 참석하고 목사들하고 놀면서 돌아다니기에 바쁘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 그만 자기가 어릴 때 가지고 있던 선배 목사들의 됨됨이로 다시 되돌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성경말씀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 성경말씀 속으로 들어가데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오직 지옥불만 이야기하는, 그런 편집증적인, 즉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만을 외치게 된다는 것이다. 지옥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예수를 믿어야만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무슨 목사가 자기 인품을 다스리고, 체면을 유지하고, 도무지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절박함으로 제가 이 ‘지옥의 하나님’ 이라는 책을 쓰게 되었는데, 그런데 아직도 이 책에 대해서 평가한 사람을 한 사람도 보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제가 쓴 책에 대해서는 평가를 잘 해주지 않는데, 일전에 손성식 목사님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는 조금은 과분한 평가를 해준 적은 있었지만 말이다.

◈ 십자가 받아들이기 !!

이제 교재 184페이지에 있는 ‘십자가 받아들이기’를 살펴보겠는데, 이 글에 풍기고 있는 인상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들이 “교회는 좋은데, 예수님은 싫다” 라는 것인데, 즉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 극도의 ‘공포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공포심을 말이다. 제 말이 맞지요?

일단 교재를 한번 보자.

** 왜 인간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보여준 ‘저주받은 인간상’을 자신의 진실된 인간상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과 일치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멋진 인간상을 찾아 헤맨다. 자기가 흡족할 때까지 … .

◈ 문제는 두려움과 공포심 !!

드디어 제가 일어났는데(ㅋㅋ), 여기에 보면 ‘두려움’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느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공포심을 준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예수님이 너무 완벽하기에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미지가 너무 완벽하고,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수준에서 말씀을 내뱉기 때문에, 공포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공포심을 가장 많이 느낀 것이 가롯유다인데, 결국에 그는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따라가다가 안 되니 팔아먹기도 하고, 베드로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현장에까지는 갔지만, 그러나 그 현장에서 돌아서 버린다는 말이다.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도 베드로와 같은 입장인데, 즉 예수님과 같이 3년 동안 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쪽이라는 말이다.

◈ 인간은 항상 껍데기만 바꿀 뿐 !!

그러니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제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다녀도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그냥 껍데기만 부지런히 갈아입는 것이지, 그 본래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껍데기는 벗어버리면 그만이고, 자기 알몸은 그대로 손도 대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렇게 성령이 온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함께 계신 예수님께서 이제 본격적으로 육체가 아닌 우리 마음속까지 들어오게 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함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성령이 오면 말이다.

그것이 요한일서 3장 24절에 보면 나오는데, 그러니 성령이 없으면 예수님은 하나의 대상이 되지만, 성령이 오시게 되면, 그 성령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예수님 안에 우리가 거하고, 우리 안에 예수님이 거하시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는가?

(요일 3: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 성령은, 마치 상어의 꼬리지느러미와 같아서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가 바닷가라고 하면, 이렇게 해변에 모래가 있고 저기에 바다와 수평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기 바다 한 가운데 삼각형 꼬리가 왔다갔다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죠스인데, 즉 상어의 꼬리지느러미라는 것이다. 상어 지느러미라고 하니, 갑자기 입맛을 다시는 분이 있는데, 이마 꼬리부분은 맛이 없지 싶은데, 물론 상어도 입맛을 다시겠지만 말이다. (ㅋㅋ)

우리의 마음을 이러한 바다에 비유한다면, 성령이 오게 되면, 바로 우리의 마음을 이 바다 속의 상어처럼 마구 헤집고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마치 삼각형처럼 생긴 것이 왔다갔다하면 상어가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성령께서 오시면 “아하, 말씀이 우리 속을 마음껏 헤집고 돌아다니는구나” 라고 하면서,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이 돌아다니면서 우리의 온 몸과 마음을, 그 구석구석을 갈갈이 찢어놓는데, 그것이 바로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나타난 그들의 본심이란 말이다. 그래서 사도들이 매일같이 하는 말이 “내 마음과 내 영혼은 결코 내 소관도 아니고, 내 소유도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와, 죠스가 나타났다 ??

그러므로 우리가 “와, 죠스가 나타났다” 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에 대한 공포심이 여전히 남아있어서 그러하다는 말이다. 사람이 공포심을 느끼게 되면, 두뇌에서 방어시스템이 작동해서 도망을 치게 되고, 거부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동물의 본능상 말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육체 이전에 마음까지 그만 침투를 해버리니, 그 공포심이 우리 내부에서 우리를 마치 자기의 수족관처럼 여겨서, 우리 내부 여기저기를 마구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다니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 사도들은 고백을 하는데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라고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마음을 자기가 주관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서, 그래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 성령이 아예 우리 속에 자리를 잡아서 !!

그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때에 예수님을 육체적으로 보아서 생긴 현상이 아닌데, 즉 “예수님, 우리가 잘할 게요” 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공포를 느끼던 예수님을 좋아하던지 간에, 아예 성령님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안에 살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죽었다고 복창을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것도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바다의 상어처럼 마구 돌아다니기 때문에, 그야말로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전혀 우리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데, 우리 안에 그 별난(?) 상어 한 마리를 키우는 것이니 말이다. 사실은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노릇을 하면서 폼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 너희 몸은 내가 거처하는 사랑방이다 !!

바로 그것을 두고 ‘성전’ 이라고 하는데, 즉 “니 몸은 내가 거처하는 사랑방이다” 라고 말이다. 어려운 것은 다 빼버리고 표현하자면 말이다. 그러니 “니 몸과 마음은 더 이상 니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 알아서 한다” 라고, 그렇게 주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몸은 전혀 본의 아니게 성전이 되고 말았는데, 주님은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제자들도 인간인지라 워낙 예수님을 기피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애시당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혹시 제 안경을 못 보셨나요? 아직 가방에서 꺼내지 않았는가? (혹시나 벌써 치매증상이인가? ㅋㅋ) 아무튼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즉 저주받은 인간상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기피하고 공포스러워하는데, 그래서 그 대신에 자기가 생각하는 멋진 인간상을 거기에 집어넣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오늘 이 책을 다한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그래서 진도를 팍팍 나가보자는 것이다. 먼저 교재 187페이지에 나오는 ‘2. 두 가지의 교회상’을 살펴보자.

** [2.두 가지의 교회상] - 십자가 안에서 이 세상을 봤을 때, 교회는 다음의 두 가지 종류의 교회상 중에서 어느 것 하나가 된다. 하나는 율법적 교회요, 다른 하나는 생명의 교회이다.

◈ 율법적 교회와 생명의 교회 !!

제가 울산에서 다음과 같이 강의했는데, “율법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언약을 준 뒤 430년 이후에 주어진 것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마치 표창이 꽂히듯이 그대로 꽂히게 되었다” 라고 말이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이 율법은 너희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 몸에 박힌 율법을 뽑아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이제 율법은 폐기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율법은 뽑아내는 기능만 하면 되니 말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죄를 깨닫고, 그리고 그 죄를 용서하는 생명이 주어졌을 때, 즉 우리는 죄인이고 그 죄를 용서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서 생명을 얻는, 그런 방식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 율법은 복음과 함께 설명을 !!

그러므로 율법을 단독으로 개념을 잡으면 안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율법은 반드시 복음과 연관해서 생각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마치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을 아내와 남편의 관계로서 설명하듯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로마서 7장에서는 율법을 전 남편으로 보았는데, 그러니 남편은 반드시 아내의 운명과 관련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는데, 그러니 바람이 난 남편은 이미 남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아내의 운명과 관련이 되어있을 때, 바로 그런 관계에다 율법을 집어넣어서 설명을 한다는 말이다.

(롬 7: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롬 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롬 7: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율법은 어떤 관계가 되는 대상이 없이는 설명이 되지 않는데, 즉 “율법이 무엇인가?” 라는 것은, 그 율법만을 가지고는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 과연 어떤 효과를 주는지, 그렇게 효과를 받은 사람과 연결될 때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 율법은, 의인이 되게 하는 기능은 없어 !!

그러한 율법으로 인해서 인간은 죄인이 되는데, 즉 율법의 기능은 우리를 죄인이 되게 하는 것인데, 바꾸어서 말하면, 율법은 의인이 되게 하는 기능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율법으로 의인이 될 것 같으면 예수님이 굳이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가 없는데, 그것이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 나오고 말이다. 즉 율법으로 의인이 될 것 같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헛되이 죽었다는 것이다. .

(갈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의 죽음이 헛것이 되지 않고, 율법의 기능도 헛것이 되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율법에서 우리를 의롭게 하는 기능을 찾지 말고, 즉 율법이 예수님의 십자가에게 양도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율법도 살고 십자가도 산다는 것이다. 바로 그럴 때 율법은 온전해진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자기의 의의 기능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게로 모두 다 양도를 함으로서 율법이 온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태복음 5장에서 율법이 온전하다는 말씀도 맞고, 히브리서 10장에서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말씀도 맞다는 것이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히 10: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 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 율법은 완성도 되고, 폐기도 되었다 !!

그러니 율법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모순이 되어서 안 되고, 율법으로 인해서 그 대상에게 주어지는 효과를 가지고 관련지어서 살펴보면, 둘 다 모두 맞다는 것이다.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말씀과,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말씀이 모두 다 맞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율법의 완성을 로마서 8장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율법이 기대했던 대로 의롭게 살려함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것이 곧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양도된 ‘의’ 라는 것이다.

(롬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 율법적 교회의 특징은?

그러니 율법적 교회라는 것은 무엇을 양도하지 않는가? 율법적 기능이 죄를 지적하는 것에서 머물러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어디에까지 욕심을 내었는고 하니까, 그만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까지도 포함시키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율법적 교회라는 것이다. 즉 율법이 아닌 뒤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취지를 그만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릴 때, 바로 그럴 때 율법적 교회가 유지가 되고 지탱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림으로 그려보자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렇게 교회가 있는데, 율법적 교회가 어떤 교회인고 하니, 교회는 예수님의 신부라고 했는데, 그런데 신부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신랑을 증거하는 의미에서 신부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처럼, 성령이 오면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신랑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그렇게 하고 나서 자기가 자체적으로 잘되겠다고 하면, 즉 말씀을 지키겠다고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율법이 들어와서 죄를 지적으로 하는 기능으로서 끝나버리면, 이런 율법적 교회는 전혀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율법적 교회는, 마치 신랑과 단절된 신부와 같아서 !!

왜냐하면, 이미 신랑과 단절이 되었기 때문에 그러한데, 신부는 신랑이 주는 것으로 혜택을 받는데, 그런데 이 율법은 법이기 때문에 자기 고찰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얼마나 법을 잘 지켰는가? 내가 이 율법을 내 속의 법으로 만드는가?” 라고 말이다. 즉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순수하게 선을 키워내느냐는 것이다. 거기에 몰두하게 되면, 계속해서 자폐증 증세를 드러내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인간으로 보기 위해서 준 것이 아니라, 신랑에 어울리는 신부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손에서 거론되는 것이 곧 율법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율법을 주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 주셔서 율법을 폐기하신다는 것이다.

◈ 율법은, 430년 이후에 왔다가, 다시 되돌아가 !!

그러므로 율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서 다루어지는데, 그 증거가 바로 ‘430년 이후’ 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고 율법을 430년 이후에 주신 이유가 말이다. 즉 아브라함에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복음과, 뒤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실체 사이에 이 율법이 끼어서, 그것이 연착륙을 해서 다시금 되돌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 결국 구원은 복음으로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복음이 430년 이후에 살포시 내려와서 자기 역할을 다 하고 다시 가버리면, 남는 것은 복음에서 복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 때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역시 신약에서도 복음으로 구원을 받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을 생각할 때, 자기에게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라, 그냥 터치만 하고 다시 돌아간다고 여기면 되는데, 그렇게 해서 신랑이신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신랑이 우리에게 해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율법적인 완성으로서의 사랑을 주었다는 것이다.

◈ 사랑이란, 부담스러운 그분과의 합류 !!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어제 오후시간에도 설교를 했지만, 그것은 바로 합류인데, 성경에서는 이것을 ‘연합’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까 우리 안에 마치 죠스처럼 돌아다니는 것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예수님의 자기 바다라는 것이다. 정작 우리는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는데,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주여, 오늘 하루도” 라고 하기도 무서운데, 왜냐하면 워낙 완벽하니 말이다.

그러니 성경대로 하자면, 아무리 우리가 예수님을 10년, 20년을 잘 믿어도 여전히 우리는 미흡한데, 그리고 주님은 여전히 완벽하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을 관계를 한다는 것은 거부반응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그러나 주님은 그런 거부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고 우리를 찾아와서 마구 헤집고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 새언약은, 말씀을 마음 판에 !!

그것이 예레미야 31장에 나오는 새언약의 특징인데, 이 새언약은 문자와 문자의 만남이 아니라, 아예 그 말씀을 우리 속에 새겨버린다는 것이다. 즉 에스겔 37장에 나오듯이, 우리의 마음속에 성신을 부어주어서 그 성신이 우리 안에 법을 만들어버린다는 것인데, 그 법의 완성이 곧 ‘사랑’ 이라는 말이다.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 사랑의 두 가지 기능은?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의 사랑이 다가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예수님의 사랑이 보여주는 것은, 율법으로 인하여 죄인이 된 인간과, 그러한 죄인을 예수님이 그냥 공짜로 용서해준다고 하는, 두 가지 요소로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 언약도 그렇고 이삭 언약도 그렇고, 모든 언약이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특히 야곱 언약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먼저 죄인을 만들고, 즉 “너는 나에게 덤벼들었어” 라고 하면서 죄인을 만들고, 그런 죄인을 야곱의 아들인 요셉을 통해서 사랑을 베푸는 요소가, 그렇게 두 가지가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 주님의 사랑과 연합이 되면 !!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연합이 되면, 우리는 그런 사랑을 보여주는 일종의 연합체가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말씀 앞에서 늘 죄인이 되고, 주님의 사랑은 그런 죄를 용서함으로서, 밖으로 그런 주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죄인 됨을 단독적으로 끄집어내어서 “이근호 목사는 아직도 죄인이라고 하는가? 성경에서 의인이 되었다고 한 것이 언제인데”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렇게 단독적으로 끄집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약은 반드시 그 대상이 있기 마련인데, 그러니 그 대상과 주체를 끊어버리고 그 대상을 따로 끄집어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아니, 탁구대가 그만 절반으로 ??

예를 들어서, 탁구시합을 하려면 탁구 테이블이 있고, 그 중간에 가로막는 것이 거물로허 쳐져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거물망을 걷어내고 또한 탁구 테이블을 톱으로 반으로 잘라버린다고 하면, 도대체 탁구시합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축구시합을 해도, 운동장 반을 그만 잘라내 버리고 골대도 하나만을 가지고서, 거기에서 과연 월드컵 시합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반드시 나머지 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율법만을 달랑 덜어서 그렇게 단독적으로 끄집어내느냐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철학적인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인데,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나’를 주체로 보아서, 그러한 ‘나’를 따로 끄집어내려고 하는데,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그렇게 ‘나’를 따로 끄집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 안에 들어있는 죠스를 무슨 수로 끄집어서 내겠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넣은 것도 아니고, 죠스 자기가 알아서 들어갔는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자기가 알아서 들어갔는데,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끄집어내느냐는 말이다. “나가라, 성령아” 라고 외치면 되는가? 그렇게 해서 나갈 것 같으면 성령이 왜 들어갔겠는가? 그렇게 해서 성령이 나가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 연합이 되면 그것으로 ‘끝’ !!

바로 사랑이 그런 것인데, 이 사랑은 연합이 되어버리면, 그렇게 연합된 상태는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도저히 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는 원리인데, 바로 그러한 사람들 중에서는 자기 자신도 포함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들끼리 결혼한 것에 대해서 이혼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속에 들어온 그 주님을 결코 우리들이 추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우리를 짝지어준 것을, 우리가 그 예수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또한 예수님을 추방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악신은, 불러도 오지 않아 !!

그래서 제가 어제오후예배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아무리 악신을 불러도 악신이 오지 않는다고 말이다. 즉 “악마여, 나에게로 오라” 라고 굿을 해도, 결코 악마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라고 하는 ‘임마누엘’ 이라는 의미의 말씀은, 바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스토커 이상으로 달라붙는 것으로서, 아예 하나로 연합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바로 이 연합이 되는 것을 두고서 성경에서는 로마서 6장에서는 ‘세례’ 라고 한다는 말이다. 세례가 바로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 세례는, 물이 없어도 가능해 !!

우리는 세례라고 하니까, 자꾸만 기존교회의 경험이 추억이 떠오르는데, 세례는 물을 뿌리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나 세례는 물이 없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 말이 좀 되는 것 같은데(ㅋㅋ), 아무튼 연합이 되면 굳이 이 물을 뿌리지 않아도 그 사람은 세례를 받은 것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목사가 베푸는 세례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어디 예수님이 부활절에만 교회에 가는가? 세례식을 보통 부활절에 거행하니 말이다. 오히려 주님은 그야말로 더러워서 부활절에는 더 교회에 가지 않지 싶은데 말이다. 왜냐하면, 결코 부활절에만 부활하는 주님이 아니니 말이다. 

세례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추진위원회(?)에서 그냥 밀어 부치는 것인데, 그러니 연합된 것을 밖으로 표시하는 것이 곧 세례식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내가 그들이 성령을 받았으니, 어떻게 세례를 주는 것을 금하리요” 라고 하면서 세례를 준다는 것이다.

(행 10:47)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세례를 !!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세례를 준다는 말이다. 또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오고 말이다. 그러니 약속 가운데 성령을 받았기로 되어있기 때문에 성령을 준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약속대로 그렇게 쳐들어오겠다고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거부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율법이라는 것을, 우리 인간들의 수준에서 따로 뽑아내어서 “율법이란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인간이 어디에 속해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만약에 주님에게 속해있다면 주님과 관련을 지어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즉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단절된 상태라고 한다면, 과연 거기서 인간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이 바로 교재 187페이지 이하에 나오는 교회의 두 가지 모습 가운데서 ‘율법적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제 교재 187페이지를 살펴보자.

** [율법적 교회] - 인간은 특정 장소, 특정 시간대에 감지된 기억을 특화하려는 본능이 있다. 돌발적으로 얻어진 그 기억을 중심축으로 해서 앞뒤를 재해석한다. 물론 이런 기억들이 개성이 있는 사적환상을 유발시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그러나, 공간은 없고 차이만 있어 !!

여기에 ‘특정 장소’ 라는 말이 나오는데, 즉 특정한 공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공부를 그래도 좀 했으니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철학적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공간은 없고 다만 차이만 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원래 공간은 없는데, 다만 ‘A’ 라는 사물과 ‘B’ 라는 사물의 그 차이를 두고서 공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물만 있는 것이지 사실은 공간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시간과 공간이 차후에 생긴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오스카 쿨만’ 이라는 신학자는 이러한 점을 모르고, 창세 이전에도 시간이 있었고 종말 이후에도 시간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 시간이라는 것이 창조가 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항상 있다고 보았기에 말이다. 

◈ 시간이란, 지속과 경과 !!

좀 어렵지요? 사물 ‘A’와 사물과 ‘B’ 라고 할 때, 사물 하나만 있으면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비가 되는 사물과 ‘B’ 라는 것이 있을 때, 그 차이를 가지고 공간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사물 ‘A’와 사물과 ‘B’ 사이에서 ‘A’는 ‘B’를 바라보면서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변화인데, 즉 변화를 느끼는데, 그것이 두 가지라는 것이다.

먼저 하나는 지속성인데, 즉 자기가 20살 때의 모습이 30살까지 가고, 또 계속해서 50살까지도 간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앞에서 지속이 되어서 나가면 뒤에는 자국이 남는데, 그것을 가지고 경과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지속’과 ‘경과’를 합쳐서 ‘시간’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런 것이 있는데, 그냥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바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 계속해서 밀어 부칠 때, 뭔가 뒤에서 뚝뚝 떨어지면서 남겨지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남겨진 것의 경과를 현재를 중심으로 측정할 때, 그것이 바로 시간으로 나온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일을 시작한지 몇 분이 되었다” 라고 할 때, 먼저 ‘나’ 라는 것이 있어야 하고, 또 일을 지속적으로 해야 되고, 그렇게 해야 경과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경과와 현재 사이를 시간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변화를 일으키는 ‘A’ 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이 ‘A’는 가만히 있으면 모르고, 뭔가 ‘B’하고 다를 때 변화를 느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B’를 해와 달과 별이라고 할 때, 그것이 창세기 1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네 번째 날에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서 시간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그 해와 달과 별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측정한다는 것이다. “아하, 오늘은 안식일이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해가 지고 뜨고, 그렇게 6번을 했으니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구조를 우리에게 만들어주셨다는 것이다. 

◈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설정을 위해 공간과 시간이 필요 !!

제가 지금 이것이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즉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아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시간과 공간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을 만들고, 그런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서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마지막 천국에서는 이 인간자리에는 누가 들어가는가? 예수님이 들어가 버리면, 그렇게 예수님이 들어간 자리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 없는, 즉 변화가 없는 영원이기에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 자리에 그리스도가 들어가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있기 때문에, ‘영원’ 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시간만 없어지는 게 아니라 공간도 역시 없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은, 변화가 될 가능성이 있을 때는 항상 모형으로 작용하다가, 그것이 고정이 되게 되면, 지옥은 영원히 지옥이 되고 천국은 영원한 천국이 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 시간과 공간이 율법적일 때는?

그런데 이런 시간과 공간이 율법적일 때는 어떻게 되는가? 예를 들어서, 명절이 되어서 땅콩강정을 만들 때, 제가 그것을 무척 좋아하는데 말이다. 일정한 틀에다가 먼저 땅콩을 넣고, 또한 엿을 부어서 땅콩이 잘 고정이 되고 달라붙어서 굳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작대기를 대어서 자기가 원하는 크기로 자른다는 것이다.

◈ 인간이 자의적으로 구획을 그어서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인간이 법을 만들어서 실행을 하려고 할 때, 어떻게 하는고 하니, 시간과 공간을 작대기를 가지고 구획을 만든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칸을 만드는데, 이것을 스케줄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즉 여기 이 공간에서는 몇 시에 예배를 드리고 말이다. 그렇게 구획을 정리할 때, 바로 그 작대기를 두고서 ‘법’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 위해서, 성경에 있는 기존의 법이라는 판때기를 만들고, 거기에다가 성경에 없는 새로운 법들을, 즉 작대기를 가지고서 구획을 정리해서, 제일 중요한 일등급으로, 즉 자기들을 중심으로 한 성전을 만들고, 그 다음에는 이등급, 삼등급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는 여호와를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순서에 넣어서,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의 경우에는, 여자를 보호한다고 하면서 중간에 적당하게 넣어주고 말이다. 그리고 성전의 경우에도, 또한 구획을 나누어서 제사장의 뜰, 일반 유대인 백성들의 뜰, 여자의 뜰, 그리고 이방인의 뜰로 만들고 말이다.

◈ 법은, 시간과 공간으로 연결이 !!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마치 땅콩 강정을 만들 듯이 판을 만들어서 나누고 자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땅콩이라는 법을 뒤엎어서 쪼개는데, 그것을 조사해보면 땅콩과 엿이 나온다는 것이다. 만약에 땅콩이 법이라고 하면, 엿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말이다. 즉 법은 시간과 공간으로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마치 땅콩이 엿으로 붙어있듯이 말이다.

왜 우리가 누군가와 무슨 약속을 하나 해도 뭐라고 하는가? “어이, 우리 만나자” 라고 말이다. 그러면 그냥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언제 어디에서 만나는지가 따라나온다는 것이다. 즉 ‘만나자’ 라는 법이 있다고 하면, ‘언제’ 라는 시간과 ‘어디서’ 라는 공간이 반드시 함께 등장을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만납시다” 라고 하면,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서 만날까?” 하고 하는데, 물론 예를 들어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요일에 11시에 교회에서 만납시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일종의 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시간에 다른 장소에 간다든지 하면, 그것은 법을 어긴 것이라는 말이다.

◈ 여러분, 교회에 좋은 옷을 입고 좀 일찍 나오세요 !!

부산에 있는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니, 그 교회나 우리교회나 교인들이 엄청나게 지각을 하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분의 설교를 들어보면 10시 40분까지 와서 찬양으로 준비도 하지 않고서 어떻게 예배에 참석하느냐고 엄청나게 야단을 치는데, 또 예배시간에 츄리닝에 슬리퍼를 신고 오고 말이다. 도대체 그것이 무슨 짓이냐는 것이다. 그래도 예배는 축제인데, 그러니 제일 좋고 화려한 옷을 입고 와야지 말이다.

제가 그 교회에 두 번이나 가보았는데, 아마 그 목사님이 보기에 교인들이 예배를 너무나 경시하는 것처럼 보인 것 같은데, 그 목사님이 결코 그런 것을 강조하는 분이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교인들의 태도나 너무나 상식이하이니까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다는 것이다.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축제를 즐겨라” 라고 말이다.

◈ 도대체 무슨 변명을 하지?

그런데 저는 그 설교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고 하니, “만약 그 목사님이 우리교회에 와서 그런 설교를 했다면 나는 어떻게 변명을 할 것인가?” 라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 마침 변명거리가 떠올랐는데, 우리교회 교인들도 동창회나 어떤 특별한 모임에 나갈 때는 좋은 옷을 입고 가는데, 왜냐하면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교회에 나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래도 우리교회 교인들은 복음을 아는데, 그러니 어떻게 그런 화려한 옷을 입고 나와서 자기를 감추고 폼을 잡겠느냐는 것이다. 죄인인 주제에 말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기 위해서는, 아주 허름한 옷을 입고서 교회에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일단 옷 문제는 일단 나름대로 그렇게 해결이 되었는데, 그런데 “예배시간에 늦게 오는 것은 어떻게 변명을 해야할까?” 라고,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배시간에 일찍 오게 되면 교회의 입장에서는 어떤 점이 유리한고 하니, 교회에 일찍 오면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늦게 오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해버리기 때문에 없지만 말이다. 물론 본인에게도 할 일이 있으니 좋지 않느냐는 말이다.

부산의 그 목사님도 복음을 아시는 분인데, 아마도 참다가 참다가 그런 설교를 했지 싶은데, 그리고 혼자 사시는 분인데, 그러니 당연히 교회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교회가 신부인데 말이다. (ㅋㅋ) 그런데 교인들은 교회에 무관심하고 자기 집구석만 살피고 있으니 그런 이야기를 했지 싶다는 것이다.

◈ 그래도 광고시간에 했으면 !!

그래도 조금은 아쉬운 점은, 그런 이야기는 광고시간에 하고 설교시간에는 복음을 전하는데 전력을 쏟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만약에 그렇게 설교를 해서, 교인들이 좋은 옷을 입고 일찍 나오게 되면 오히려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우리교회는 아무리 그렇게 해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지만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렇게 되면 교회에 좋은 옷을 입고서 일찍 나오는 것이 그만 법이 되어버리는데, 그러면 여전히 늦게 나오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만 법을 어긴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188페이지를 살펴보자.

** [1.유대교적 종교버릇] - 예를 들면, 소득의 10%를 자기 이름이 등록된 교회당국에 기부했을 때를 “당신은 십일조 법을 준수했습니다” 라고 판정을 내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 유대교적 종교버릇 !!

무슨 말인고 하니, 상대방을 법으로 측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법이 왜 나쁜고 하니, 인간 자체를 측정하는 기구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측정을 하는 사람이 생기고, 측정을 받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이다. 측정을 하는 자가 누구인가? 또 그런 측정자를 누가 측정하느냐는 말이다.

◈ 법이, 그만 인간자체를 측정하는 기구로 !!

그러니 이것이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인데, 즉 측정을 하는 사람이 임의로 자기와 친한 사람과 그렇지 않고 감정이 있는 사람을 임의로 구분하는 경우가 있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원래 인간이 그러한데,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을 구분한다는 말이다. 똑같이 법을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감정이 개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법에 의해서 사람이 측정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는 것을 법으로서 막아버리는 짓이라는 말이다. 로마서 15장인가(?) 나오는데 말이다. 법이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과 규칙이 없는 곳은 없는데, 하지만 규칙과 법을 이야기하더라도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또한 복음이 그것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미리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11시에 오면 11시에 시작하고, 12시에 오면 12시에 합시다” 라고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일요일 11시에 예배를 드립시다” 라고 하면 11시에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문제를 떠나서 상식이니 말이다. 그리고 식사당번을 일주일을 맡았으면 일주일을 해야지, 자기는 더 하고 싶다고 계속해서 한 달을 하고, 또는 하기 싫다고 빠지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교회 안에 쥐가 있습니다. 쥐약을 놓읍시다” 라고 하면, 그것을 가지고서 “지금 당신은 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요구하는가?”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니 말이다. 예배시간에 아이들이 설치고 돌아다니면 “아이들을 좀 조용히 시키세요” 라는 것이 당연한데, 그런데 가지고, “당신이 뭔데 법을 만드는가?”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법에는 반드시 먼저 사랑이 !!

그래서 성경에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반드시 법 앞에 뭔가가 하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 이라는 말이다. 사랑이 없는 법은, 법을 만든 사람에게 복종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가기 위한 법이라고 하면, 이러한 법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회에서 법이나 규칙이 없을 수는 없지만, 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지 않아야만 하는데, 그러니 법을 어겼다고 해서 인간 자체를 측정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예배당 안에 쥐가 마구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 그것을 억지로 법으로 막으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자기 취미이니 말이다. 물론 그런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쥐약을 놓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186페이지를 보자.

** [2.소유의식에서 나오는 보람] - 이 개인별로 차이가 나는 성령의 ‘소유’ 의식이 이러한 율법적 교회의 핵심이다. 뭐든지 소유하게 되면, 그것이 어디까지나 자기의 것, 혹은 자기 능력, 혹은 자기 행함으로 실천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소유의식에서 나오는 보람 !!

왜 율법이 문제가 되는고 하니, 그 율법의 주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여기서 ‘나’ 라는 것은 제가 지금까지 수십 번을 이야기했지만, 이 ‘나’ 라는 것은 그냥 ‘나’가 아니라, 그 안에 응축된 것이 있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한 평생을 끌어 모은 소유가 일종의 창고로서 차곡차곡 쌓여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뭉쳐져서 ‘나’가 된다는 말이다.

◈ ‘내’ 것만 안 돼 !!

그러니 자기가 소유한 것을 자발적으로 남에게 주는 것은 가능하지만, 주고 싶지 않은데 누가 와서 자기 소유를 건드리게 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안 되는고 하니,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주기도문에도 나오는데, ‘용서’가 그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가 되지 않으면 참으로 곤란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들이 빚진 수천 억을 탕감해줄 때는,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 사이에는 있는 수십 원밖에 되지 않는 죄도 용서해주라고, 그렇게 수천 억을 용서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 자기는 정작 용서를 받아놓고는 입을 닦고 상대방을 몰아세우는 진멸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해남군청에 있는 한 인간이 극빈층을 도와주라고 한 돈을 횡령을 했는데, 그만 자기 유흥비로 날리고, 고급 승용차를 구입하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항의도 제대로 못하는데, 그들은 장애인들이고 하니 말이다. 그러니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나의 소유가 나를 만든다 ??

하지만 하나님은 용서가 나오도록 은혜를 주셨는데, 그런데 왜 우리 인간들은 용서가 되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나의 소유가 나를 만든다” 라는 공식 때문에 그러한데, 그래서 전혀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다른 것은 모두 용서가 되지만, 그러나 니가 나의 것을 건드리는 것만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라는 말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쥐도 고양이를 무는 수가 있듯이, 사람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자기의 것을 건드리게 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좋아 보이는 사람은, 아직도 누군가가 자기의 것을 제대로 건드리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결코 좋은 인간은 없는데, 누구라도 건드리면 반드시 물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식도 부모를 문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191페이지를 보자.

** [3.자기 이름 내기] - 인간의 노동에 힘을 실어주는 동기는 사실상 딴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부여된다. 즉 신의 이름과 나란히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함이다.

◈ 자기 이름 내기 !!

지금까지 한 것을 잠시 정리해보면, 첫째가 ‘유대교적 종교버릇’ 인데, 즉 ‘법’ 이라는 말이다. 시간과 공간에서 법을 마치 땅콩강정을 만들 듯이 만든다는 것이다. 특히, 나쁜 것은 이 법을 가지고 사람을 측정한다는 말이다. 둘째가 ‘소유의식에서 나오는 보람’ 인데, 인간은 이 소유의식이 커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교회도 그만 자기 소유라고 하는, 그런 소유의식이 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나오는 세 번째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이름 내기’ 라는 것인데, 인간이 뭔가를 소유할 때는 그냥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명예와 자기 위신과 체면을, 즉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교회가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흥사들이 주로 하는 짓이, 자기 교회에다 자긍심을 심어주는데, 즉 “이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부흥이 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가 무엇인고 하니, 교재 192페이지에 나오는데,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이라고 말이다. 오늘 강의에서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한데, 일단 교재를 살펴보자.

** 멜기세덱, 그는 이름 이외는 아무 것도 없는 자이다.

(히 7: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

여기에 보면, 멜기세덱은 아무 것도 없는 자라고 하는데, 특히 이 지상에서는 말이다. 정말로 어미도 없고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고,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없는데서 있게 하는 것이 여호와의 능력이라면,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멜기세덱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아무 것도 없는 자들이 시조가 되면, 그 후손들도 역시나 아무 것도 없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하신다는 말이다. 아무 것도 없도록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것은, 아까 “소유가 쌓여서 나가 된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결국 자기의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의 것이 없다는 말은, 누군가가 자기의 것을 모두 인수인계를 했다는 의미인데, 그러니 자기의 것이 없다는 말이다.

◈ 나의 모든 것을 인수하신 분이 따로 있기에 !!

다시 말해서, ‘나’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간 분이 있다고 하면, 그분이 ‘나’의 모든 것을 대신하기 때문에, “그분이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나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즉 ‘나’를 대신한 분이 있다고 하면, ‘나’는 그분 앞에 없는 존재로서, 혹은 죽은 존재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사도바울처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지, 나는 이미 죽었다” 라고 하게 되는데, 즉 그냥 자기는 믿음 안에서, 그분과 연결된 그 관계 때문에 살아간다는 것이다. 당연히 성령을 받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고 말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러면 왜 멜기세덱은 아무 것도 없는 자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언약)이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만 맹세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다른 이를 신임하거나 성취력을 인정해야 할 존재자가 따로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히 6: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히 6: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그러니 멜기세덱이 아무 것도 없는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을 다른 누구와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맹세를 하셨다는 것이다. 다른 그 누구를 하나님의 약속의 대상자로서 따로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서 자신의 약속을 담는 매개로 사용하시고, 그 이름에다 성취력을 전부 일임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주의 이름)’이란, 하나님 스스로가 언약의 상대자로 삼고자 해서 설정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 맹세하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름 관계의 증거자로 등장한 것이 멜기세덱이기에 이 이름 이외는 아무 것도 없는 자로 나타났다.

◈ 멜기세덱은 오직 이름만 !!

그런데 이 멜기세덱은 다른 것은 전혀 없는데, 그런데 이름만은 있다는 것이다. 즉 이름 이외는 아무 것도 없는 자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멜기세덱은 장차 오실 예수님과 동일하신 분인데, 즉 예수님도 우리에게 다른 그 어떤 것도 주지 않는데, 돈으로 구원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구원을 하는가? 그것은 자기 아름을 줌으로, 즉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리고 우리가 죽고 난 뒤에 부활을 하는 것도 우리의 힘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이름만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이미 자기 이름을 포기했다는 의미인데, 그렇게 해야만 그분의 이름을 불렀다고 판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냥 자기가 알아서 불렀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자기 이름을 포기한 자만이 주의 이름을 !!

그러니 그냥 “주여, 주여” 라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 이름을 포기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더 이상의 죄인의 이름에 연연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자기에게 매달리는 인생을 살면 파멸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대신한 이름, 즉 ‘이근호’ 라는 이름을 대신한 이름이 바로 주님의 이름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자기의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소유로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도는 주의 이름으로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등산을 하든지, 그 무엇을 하든지 말이다.

이제 교재 193페이지를 보자.

** [5.율법적 교회의 이단성] -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성경적인 원리를 모르고, “하나님도 일하실 때는 인간을 통해서 하시기 때문에, 구원받은 인간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라, ‘죄인을 통해서’ !!

여기에 보면 “하나님도 일하실 때는 인간을 통해서 하시기 때문에” 라고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통해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굳이 ‘인간을 통해서’ 라는 표현을 사용하려고 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악을 전달하신다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악을 보여준다는 말이나, 죄인을 통해서 죄를 드러낸다고 하는 말은 서로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죄인 통해서 일을 한다고 하는 경우에 의미는 있는데, 그러나 죄인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거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 우리가 일하는 것이 의미는 있지만, 그 공로는 주님에게로 !!

그러므로 하나님이 일을 하시기에 우리가 일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지만, 즉 아브라함이 의미가 있고 사도바울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미의 공로가 결코 아브라함이니 사도바울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것에만, 즉 그런 처음 창조 때의 그 행위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 다른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아무리 새로운 발견을 하고 신물질을 만들고 어떻고 해도, 그런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자기 직업에 불과하지 말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닌데, 오히려 할 수 없는 것에 의미를 둔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195페이지를 보자.

** [6.진정한 말씀 준수] - 따라서 ‘순종했음’이란, 십자가 복음의 그 소중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으로 최종관심을 모이게 하지 않는 순종이란 있을 수 없다. 십자가 공로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 진정한 회개와 자기 발견이요 순종이다.

◈ 진정한 말씀 준수 !!

여기서 ‘순종했다’ 라는 것이 왜 십자가와 관련을 지어서 성립되는고 하니, 먼저 율법이 왜 순종하는 것에 해당되지 않는지를 살펴보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율법은 우리의 신랑과, 혹은 하나님과 관련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우리들이 어르신들이 노는데는 도저히 끼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 순종은 오직 십자가에서만 가능 !!

그러니 율법에는 도저히 순종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물론 율법의 완성은 드러낼 수가 있어도, 왜냐하면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니 말이다. 그것이 로마서 13장에 나오는데, 그래서 8절에 보면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 …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 자기의 흐름을 버리고, 주님의 흐름 속에 !!

그런 율법의 정신인 사랑 속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을 ‘흐름’이라고 하는데, 즉 자기의 흐름을 버리고 주님의 흐름에 들어가게 되면, 이미 거기에 율법의 완성도 와있고, 아브라함도 와있고 이삭도 와있고, 아무튼 우리가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두 와있다는 것이다. 이때는 소나 개나 바다나 산이나 전부가 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데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흐름이 아니라, 자기 흐름 속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자기가 자기의 것으로 여기고 쓴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주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의 이름이 영광을 받는 것이고 말이다. 율법에 있어서 순종이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인데, 그것이 다시 ‘나’에게로 오기 때문에 말이다.

◈ 당신은, 정말 율법을 지켰습니까?

그래서 저는 정말 묻고 싶은 것이,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 소위 성화론자들에게 말이다. 즉 “저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거듭나서 성경말씀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정말로 말씀을 지키면서 기도를 했는지를 묻고 싶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왜 죽었는가? 자꾸만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는데, 사람들이 자기들은 행복하다고 하니, 정말로 행복한지를 말이다. 즉 “당신은 왜 행복합니까?” 라고 하면 상대방은 “돈 때문에 행복합니다” 라고 하면, 다시 “정말로 돈이 행복입니까?” 라고 하니, 그래서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자꾸만 귀찮고 묻고 시비를 거니 말이다. 

궁극적인 진리는 인간에게 없는 것인데, 그런데 그런 없는 것을 소크라테스는 계속해서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진리는 그냥 묻는 것, 바로 그 자체라는 것이다. 석가모니에게 있어서 진리도 그냥 살아가는 것인데, 즉 ‘절대자아’ 라는 말이다. 자기가 있음에, 자기가 곧 진리라는 것이다.

교인들이 목사에게 따질 때 “목사님, 그것이 과연 성경적으로 옳습니까?” 라고 하면, 목사는 뭐라고 하는가? “제가 옳다고 하면 옳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자기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말씀이 아니고 말이다. 주로 원로목사들이 이런 짓을 노골적으로 하는데, 물론 치매증상에 가깝지만 말이다. 무조건 자기가 옳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말씀이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목회를 2년이나 3년 정도를 하다보면 드디어 말씀을 던지게 되는데, 그때부터는 자기가 하는 것이 무조건 옳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의 말에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교인들을 협박하고 말이다.

◈ 주님의 순종이 덮쳐와야만 !!

하지만 순종은 오직 예수님만이 아버지에게 순종을 하셨고, 바로 그 순종을 그대로 우리가 받을 때는, 우리 자신이 결코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그 순종을, 즉 그분의 의를 받는 것 그 자체를 두고서 순종, 영광, 거룩이라고 쳐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그것보다 더 위대한 순종은 없는데, 물론 그분이 일방적으로 쳐들어온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 자기 아름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것은 인간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불가능한 것을 성령이 오셔서 하게 했을 때, “저는 이제 주님의 것입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보다 더 큰 순종은 없다는 것이다.

바로 거기서 온유, 자비, 양선과 같은 성령의 열매가 마구 튀어나오는데,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때는, 거기서 당파가 생기고, 욕심이 생기고, 시기와 질투가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즉 성령의 열매가 아닌 육신의 열매가 생긴다는 말이다.

이제 197페이지를 보자.

** [7.인간들의 잘못된 선입견] - 인간들은 자신의 출생을 시작으로 모든 자연변화와 우주의 움직임을 자기 존재성을 기준으로 맞춘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보조가 전혀 맞을 리가 없다. 자신이 무의미하게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전적으로 외면해버린다.

◈ 인간들의 잘못된 선입견 !!

이것은 아까 이야기한 것인데, 인간은 자기 경험과 추억 속에서 살아간다고 말이다. 그런 경험과 추억은 상상이니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3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그런데 절에 간 사람은 바로 이런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즉 석가모니도 예수님이 없이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성철스님은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주님에게 무엇을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없이는 우리가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남편이 핍박한다고 교회에 안 나오고, 자식 때문에 어떻고 하는 것은, 그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어떤 분이 “목사님은 제 사정을 압니까?” 라고 하는데,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당신은 주님의 사정을 압니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짜증을 부리는 사람도 주님이 없이는 결코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심지어 죽어도 호출을 당하는데,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두 주님 앞에 불려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보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제 197페이지에 나오는 ‘생명의 교회’를 살펴보자.

** [생명의 교회] - 율법적 교회가 인간 긍정에서 출발하는 교회라고 하면, 생명의 교회는 ‘죽은 자’로부터 출발한다. 죽게 된 이유가 죄 때문이었다. 따라서 생명의 교회는 죄를 이긴 능력이 어디서부터 쏟아지느냐에 관심을 둔다. 예수님의 이름이 지닌 의미가 그러하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 예수는, 죄에서 구원할 자 !!

여기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 예수는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되어있는데,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가 바로 이 ‘죄 사함’의 문제라는 것이다. 마치 박옥수와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죄 사함은 “내 피도 아니고 당신 피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피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면 더 이상 다른 것을 요구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그야말로 횡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죄 사함을 받았으면 이미 받을 것은 다 받았는데, 그러니 아무리 힘들어도 짜증을 낼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죄 사함을 받았으면, 계약금 중도금이고 간에 전부를 다 낸 것으로 간주가 되는데, 그러니 아파트가 완전히 자기 앞으로 등기가 되었다는 말이다. 즉 놀랍게도 천국이 자기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 죄가 없으면 지옥에도 가지 못해 !!

그렇게 되면 죄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지옥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는 말이다. 지옥에서 받아주지를 않으니 말이다. “어디서 죄도 없으면서 기웃거리는가? 여기는 죄가 있어야만 돼. 저리가” 라고 말이다. 그러니 할 수 없이 천당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죄가 없는 팔자가 되었는데, 그러니 죄를 지어도 죄가 없다는 말이다. 무슨 그런 팔자가 다 있는지 말이다.

그런데 얼마나 죄 용서를 모르고 받지 않았으면, 자기 죄를 씻어낸다고 하면서 종교생활을 하느냐는 것이다. 종교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아직도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인데, 그러니 종교생활을 하지 말고 그냥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다.

목사의 경우에, 목회를 신앙생활로 착각을 하는데, 그러나 목회는 기능직이고 봉사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하늘나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진짜 구원을 받는 것은 본인이 죄 사함을 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비록 목회는 실패해도 죄 사함을 받으면 천국에 가는 것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비록 기능적으로는 실패를 해도 말이다.

여기서 ‘자기 백성’은 오직 주님만 아시는데, 그러니 우리가 자기 구원에 대해서 너무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주님이 자기 백성을 몰라보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비록 자기 새끼를 몰라보는 부모는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버지, 아버지” 라고 부른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다 알아서 구원을 해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아하, 우리의 아버지가 이렇게 빈틈이 없는 분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 생명의 교회의 특징은?

그렇다면 ‘생명의 교회’가 무엇인가? 첫째로, “죽은 해골들이 일어난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자기가 잘난 척을 하면 안 되는데, 자기는 해골에 불과하니 말이다. 죽은 해골에 불과한데, 예수님의 죄 용서 때문에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을 떠나면 해골이고, 그야말로 좀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돌아다니는 시체 말이다.

◈ 먼저, 인간은 죽은 해골에 불과 !!

그러니 사람이 무서워서 교회에 못 나온다는 것이 정말이지 말이 안 되는데, 그냥 좀비인데 말이다. (영화를 보면, 좀비는 무서운데??)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우습게 보아서 그러한데, 왜냐하면 마지막에 우리가 서야 되는 곳은 사람 앞에 아니라 주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바람과 같은 존재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남편을 무서워하고, 자식을 무서워하고 하면 안 되는데, 특히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을 보면 자식을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자식을 학원에 데려다 준다고 하면서 교회에도 나오지 않고 말이다. 말을 하고 보니 좀 이상한데,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니니 말이다.

◈ 차등이 없기에 받은 은사를 자랑 !!

둘째로 이 ‘생명의 교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차등이 없다는 것인데, 그렇게 차등이 없다는 것이 바로 은사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 번째의 ‘은사의 세계’ 인데 말이다. 자기들이 서로 받은 선물을 끄집어 내어놓고 그 선물을 교환하면서 파티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까 이야기한 그 목사님의 말씀이 맞는데, “예배시간은 파티이다” 라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옷을 깔끔하게 잘 차려입고 하는 파티가 아니라, 서로 받은 선물을 가지고 와서 벌리는 파티라는 것이다. 비록 츄리닝에 슬리퍼를 신어도 말이다.

이제 교재 103페이지를 보자.

** 그러나 참으로 은사를 받은 자는 오직 하나만 자랑하게 된다. 그것은 은사가 곧바로 지향하는 그분의 몸뿐이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 부끄, 부끄, 부끄 ??

참으로 중요한 부분인데, 27절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라고 말이다. 이것과 비슷한 내용의 노래가 나왔는데, “부끄, 부끄, 부끄” 라고 말이다. 쌍둥이 자매가 부르는 노래인데, 혹시 들어보셨나요?

무슨 말인고 하니, 교회는 이 세상을 부끄럽게 하기 위한 것인데, 즉 못난 우리를 구원함으로 말미암아서 잘난 그들을 부끄럽게 한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이름을 의지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는 것인데, 그리고 주의 이름을 의지하는 자들은 수치를 면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죄라고 해도 그 수치를 덮어주는 것이 교회이고, 아무리 귀한 일을 해도 부끄럽게 만든 것이, 그것이 바로 교회가 있음으로서 그것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수치를 면한 자들은 당연히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 소위 ‘달란트 비유’ - 있음과 없음의 차이 !!

그리고 204페이지에 나오는 네 번째인 ‘은사와 하나님의 전쟁’은 무슨 내용인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홀로 전쟁을 모두 다 하셔서 선물로 받았다는 것이고, 그리고 205페이지에 나오는 다섯 번째인 ‘소위 달란트 비유’ 라는 것은, 중위도 아닌 소위인데 말이다. (ㅋㅋ)

이 달란트 비유는 세 부분으로 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두 부분인데, 즉 “있음과 없음” 이라는 것이다. 즉 은사가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결국 주님이 빼앗아 가버리니, 그 사람은 결국 은사가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있는 자는 더 받겠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라는 것인데, 사실 이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있는 것을 빼앗긴다는 말인가? 그러니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니가 받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니 것이 아니었다” 라는 것이다. 비록 주인이 타국에 가고 없어도,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님의 것으로 여길 때, 바로 그런 사람이 주님이 칭찬하는 충실한 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소위 달란트 비유’ 라는 것이 엄청 간단한데, 그러니 한 푼이든 두 푼이든 간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알면 되는데, 마지막에는 그러한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무슨 경쟁이 있겠는가? ‘있음’과 ‘없음’의 차이이지, 결코 ‘적게 있음’과 ‘많이 있음’의 차이가 아니란 말이다. 

이제 교재 207페이지의 ‘지옥에 관한 궁금증’을 살펴보자.

** 사람들은 지옥이 어떻게 생겼는지 몹시 궁금해한다. 누가복음 19장 27절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눅 19:27)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 지옥에 관한 궁금증 !!

그러니 예수님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 자들이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란 말인데, 예수님이 왕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왕이라는 말인가? 자기가 바로 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가 왕이라고 하는 자들을 다 죽이라고 하시는데, 그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지옥에 간 사람의 특징은 따로 ‘주’가 없는데, 즉 자기가 바로 ‘주’ 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자기의 것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수님의 왕 되심에 관심이 없는 곳이 지옥이다. 마음은 콩밭에 가있듯이 자신의 가치와 의미에 정신이 팔려있는 교회는 바로 지옥의 현장이다. 이런 교회에 출석하는 자는 지옥보험에 가입한 자와 같다. 

◈ 목사님, 지금 그 인간이 장기집권을 하려고 합니다 !!

한번은 어떤 분이 저를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대구에 있는 어느 교회를 다니는 분인데 말이다. 자기가 수십 년을 그 교회에 다녔는데, 그런데 지금 목사가 장기집권을 하려고 하고 너무 개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어서 나오세요. 버스노선이 다른데 타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지 않는 교회를 왜 다닙니까?” 라고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분은 나오기를 싫어하는데, 그러니 사실 그 양반이 마음속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가 장기집권을 하고 주가 되려고 했는데, 그런데 목사가 먼저 그렇게 하는 바람에, 즉 자기가 주가 되는 것을 방해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왕이 되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자기는 그 정도의 돈을 그 교회에 투자를 했으니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데, 그런데 교회가 자기에게 그런 대우를 해주지 않으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 돈이 누구 돈인가? 자기 돈이 아니라 주님의 돈인데, 그런데 그 양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엉터리 목사가 있다고 하면, 그 목사는 도대체 누가 보내었는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보면, 주님이 보내었는데, “진리를 쫓지 않는 자는 마귀에 속한 자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전체가 모두가 다 지옥의 교회라는 것이다.

(살후 2: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살후 2: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제 교재 207페이지의 ‘멈출 수 없는 회개’를 살펴보자.

** [3. 멈출 수 없는 회개] - 순수하냐 아니하냐는 것은 성경에 비추어보아서 판단해야지, 자기 기분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 의롭다고 나서는 일은 십자가 사건이 용납하지 않는다. 소위 순수한 마음에서 뭔가 일을 시작한다고 여기지만, 여기서도 욕심과 개인주의가 이미 담겨있다.
 
◈ 멈출 수 없는 회개 !!

인간은 회개를 함에 있어서도 자기는 나름대로 회개를 했다고 여기지만, 그러나 막상 자기가 생각을 했던 그 기준에 비해서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비교경쟁을 한다는 것은 결코 회개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목사의 경우에 자기보다도 복음적인 설교를 더 잘하는 부교역자가 있다고 한다면, 아낌없이 그분을 위해서 강대상을 비워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교인들이 말린다고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목사가 아니라 반드시 복음이 있어야만 하니 말이다. 그리고 그 누구라도 대장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의 합당한 열매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즉 그 어떤 사람이 오더라도 비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님의 은혜로 왔다고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것은 없으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회개의 합당한 열매이고, 또한 자비이고, 온유이고, 화평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아주 간단하다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글을 거두기 전에’ 라는 부분을 살펴보자.

[ 글을 거두기 전에 ]

그냥 주어진 것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워서
아무 것도 원치 않아야 한다.
그러나 ‘자아의 구원’만 생각하면
그때부터 모든 것은 욕심으로 변한다.

걷잡을 수 없다.
악마가 노린다.
스스로 구원되라고

그러나 참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만 은혜를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에게만
영생을 주실 뿐이다.

그동안 인간들은 지옥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아무리 그 안에서
무수한 변화를 일으켜 왔어도
달라진 것은 없다.

십자가는 현실을 깨웠다.
지옥도 덩달아 깨어났다.

인간들은 자기들을 구원시키기 위해
교회를 세우고 ‘천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애초부터 이단의 모습이었다.
인간은 타락되어진 것이 아니다.

신은 묵묵히 인간들에게 들을 맡겼고
인간들은 채찍으로 보답했다.

오늘도 눈 먼 삼손은 맷돌을 돌려야 한다.
집회 때마다 돌려야 한다.
금식 철야기도회 때도 돌려야 한다.
인간들이 부르짖을 때마다
맷돌을 돌려야 한다.
채찍을 맞아가며 돌려야 한다.

그런데 사방에서
지옥에서 내려오는
마지막 커튼이 쳐지기 시작했다.

갇혔다 !
이로서 지옥은
사방에서 떠오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지옥에서 살고 있는 성도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지옥의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도록 여건을 허락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이 중요하고, 말씀이 중요하오니, 이 책은 잊어버리고 항상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 안에서 마치 상어와 같이 돌아다니는 것을 복으로 여기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