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지옥의 하나님 38 - 인간구원을 위한 신학7 본문
09 대구강의 3 - 지옥의 하나님 38 - 인간구원을 위한 신학7
장난감으로서의 교회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090217지옥의하나님p163.mp3
09,02,1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장난감으로서의 교회 ??
교재 ‘지옥의 하나님’ 163페이지에 있는 ‘장난감으로서의 교회’를 살펴보자.
** 그렇다. 어른이라고 해서 장난감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보다 어른에 걸맞는 장난감이 요구된다.
이것을 ‘호모 루덴스’ 라고 하는데, 인간은 오락을 하는, 즉 즐기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사는 즐거움은 오락에 있는데, 그 오락은 경쟁하는 게임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 인간상을 ‘호모 루덴스’ 라고 하는데, 즉 ‘놀이라는 존재’ 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 심각한 것도 필요하지만, 그런 것조차도 자기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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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모 루덴스(homo ludens) - 유희(遊戱)하는 인간이란 뜻.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文化史學者) J.호이징가(1872~1945)가 제창한 개념으로서, 그의 저서 《호모 루덴스─유희에서의 문화의 기원》(1938)은 유희사상사에서 한 시기를 구분지었다. 종래에는 유희가 문화 속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문화 쪽이 상위개념이라고 생각하였으나 호이징가는 이러한 견해를 역전시켜서, 문화는 원초(原初)부터 유희되는 것이며, 유희 속에서 유희로서 발달한다는 획기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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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캉 - 뭔가 모자람이 있기에 !!
그런데 이것을 라캉은 ‘결핍’에서 온다고 보았는데, 즉 모자람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모자람이 어디서 발생이 되는고 하니, 마치 어린아이가 거울을 바라보면서 그런 거울에 있는 자기 모습과 자기 사이에서 모자람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즉 뭔가가 일치가 되는 것 같은데, 그런데 사실은 일치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비슷하기는 하기는 하지만 똑같지는 않는데, 그렇게 되면 인간은 그만 약이 오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나훈아를 흉내내는 가수가 있다고 하면, 그러한 사람들을 모창가수라고 하는데 말이다. 나훈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가수를 보러가지만, 그러나 그가 외모나 노래실력이 제 아무리 비슷하다고 해도, 똑같지 않음에서 오는 약오르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원래의 그를 능가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얕은 생각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자기의 라이벌을 능가해버리면 재미가 없는데, 그래서 다시금 돌아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자기를 구성하고 있던, 그래서 자기 인생에 보람을 주고 의미를 주던 대상이 있는데, 그런데 그 대상을 따라내어 버리면, 그만 자기 자신이 공허해진다는 것이다.
◈ 제 아무리 치고 박고 싸우는 부부라도 !!
그런 의미에서 아내와 남편은 하루가 멀다하고 티격태격 싸워야 하는데, 매일같이 헤어진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쪽이 죽어버리면 그만 허탈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매일같이 욕하던 인간이 사라지고 마니, “내가 왜 살지?”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시부모를 오래 동안 봉양하던 며느리에게, 그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이웃들이 뭐라고 하는가? “아이쿠, 이제 시원하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정작 본인은 시원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한 구석이 떨어져나간 것처럼 허전하다는 말이다. 즉 결핍, 모자람이 생긴다는 것이다. 왜 모자람이 있는고 하니, 일치성이 없기에 말이다. 즉 완전히 일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마음은 자립, 몸은 의존 !!
그리고 또 하나의 모자람은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 이것이 중요하니 잘 들어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경우에 자립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누군가가 모유나 우유를 먹어주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외부에서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균열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은 자립인데,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그렇게 하는데, 그런데 그런 자립이 계속해서 지속이 되려고 하면 밑에서 뒷받침을 해주는 것이 필요한데, 그런데 실제로는 자립이 아니라 의존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를 들어서, 어떤 부인이 법정에 가서 “저는 남편하고 이제 살기 싫어요” 라고 하는데, 그런데 막상 판사가 “그러면 당신은 무엇을 먹과 살 것인가요?” 라고 물으면, 막상 거기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이들과는 헤어지지 싫고, 다같이 데리고 살려면 한 달에 300만원은 드는데 말이다. 아무런 기본적인 생계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는데, 그러면서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이것은 목사도 마찬가지인데, “이 놈의 교회, 더러워서 더 이상 못해먹겠다” 라고 하면, 그러면 사모가 당장에 말리는데, “그러면 앞으로 이 식구가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나이가 들어서 노가다도 못하고, 그렇다고 알바를 하기도 그렇고 말이다.
* 목사 : 이 놈의 교회, 도저히 더 이상 못해먹겠다.
* 사모 : 참아라. 그만두면 우리 식구는 뭐 먹고사는데?
* 목사 : 그래도 내가 노가다라도?
* 사모 : 그 나이에 그런 약골에 무슨 노가다? 젊은 놈들도 일이 없어서 노는데.
* 목사 : 그래도 더러워서 안 되겠다. 복음도 모르고 말이야.
* 사모 : 복음? 아무튼 시끄럽다고 했어.
* 목사 : 설교시간에 졸기만 해. 목사의 권위도 안 먹혀들고 말이야.
* 사모 : 당신, 나를 파출부 시키려고? 나는 죽어도 못해. 그러니 그만해.
* 목사 : 그래도 싫은데?
* 사모 : 시끄럽다니깐, 그만 안 할래. 콱 !!
그렇게 고민고민 하다가 머리를 쓴 것이 바로 서로 잘 아는 목사나 동기끼리 교회를 맞바꾸는 것인데, “야, 너거 교회 어떻노? 우리 함 바꾸자”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하면 몇 동안 년은 또 버티니 말이다. 물론 교단이 조금은 덩치가 있어야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바꾸고, 또 바꾸는, 바로 그런 바꿔치기 하는 인생이라는 것이다.
◈ ‘자아1’과 ‘자아2’ !!
이런 현상들이 바로 결핍이 있어서 그러한데, 그래서 어린아이는 이런 결핍을 메우기 위해서 ‘자아1’ 말고 ‘자아2’를 다시 구성하게 되는데, 이 자아2가 바로 장난감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장난감에 나오는 모든 내용이 다 동화에 나온다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동화가 바로 ‘과자로 만든 집’ 인데(그런 동화가 있나?), 얼마나 평소에 까자(?)가 먹고 싶었으면 그런 동화가 인기를 끌겠느냐는 것이다. 코가 자라는 피노키오의 경우도 그렇고, 물론 멋진 백마를 탄 왕자를 만나는 백설공주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데렐라나 인어공주 등등, 모든 동화들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 결핍을 메우는 것이 곧 인생 !!
그러니 현재 자아의 그 결핍을 메워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분열이 되는데, 즉 정신분열증이, 쉽게 말해서 정신병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신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메워야만 하고, 그렇게 하려면 동화의 세계에 들어가서 이 자아1을 부정하고, 자아2를 자기와 일치시키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알고 보면 인생은 간단한데, 결핍을 메우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업하는 사람이 돈 때문에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가 기대하고 목표한 대로 성공했을 때, 바로 그 목표를 도달한 짜릿함, 바로 그 맛에 사업을 한다는 말이다. 돈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준비하고 자기가 기획한 그것이 적중했을 때, 바로 그 재미에 밤을 지새운다는 것이다.
◈ 그것 봐, 내 말이 맞잖아 !!
그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인데, “그것 봐. 내 예측이 맞았잖아” 라고 하는, 그렇게 해서 느끼는 자기존재에 대한 희열, 그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여자가 하는 사업은 남자와는 좀 다른데,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친다든지 말이다. 그렇게 해서 아이가 피아노를 재능을 보일 때, 존재의 가치에 대한 희열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봐, 내 말이 맞잖아” 라고 하는 그 한방, 바로 그러한 재미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김연아의 모친도 그런 경우인데, 그야말로 자기 딸에서 투자를 잘 해서 완전히 대박이 났다는 것이다. 일년에 광고수입이 또한 무려 40억에 이른다고 하니 말이다. 물론 사업의 목적이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러니 그 성취감 또한 얼마나 짜릿 짜릿하겠냐는 것이다.
◈ 너무나도 비참한 ‘자아1’ !!
그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자이1이 너무나 비참하기 때문에, 그렇게 비참한 현실을 대체하는 자아2를, 그것을 ‘상상계’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상상계가 되지 않으니 타협안을 내는데, 그것을 ‘상징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부부의 경우에 “그래, 내가 인간성이 좋아서 참는다” 라고 하는 정도라는 것이다. 이혼을 하고 싶어도 당장 대책이 없어서 말이다.
얼마 전에 서울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남자가 하는 말이 “목사님, 제가 자식 놈 때문에 참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누라가 뒤에 앉아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뭐라고 하겠는가? 그래서 “참 잘했습니다” 라고 했는데, 그것은 상징계로서 잘했다는 말이다. 자기가 상상하는 상상계와 현재 분열이 되어서 깨어진 주체와는 서로 도저히 안 되니, 그래서 “제가 인간성이 좋아서 참습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모든 문제는 교회의 ‘독자성’ !!
이것이 오늘 강의주제와 모두가 관련이 있는데, 지금 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독자성’ 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이단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교회가 자꾸만 독자성을 주장하는데, 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고 하니, 지금 이렇게 자아가 있다고 하면, 그 자아를 크게 확장시킨 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까, 당연히 ‘내 교회’ 라고 하게 되는데, 자아가 확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내 교회’가 아니라 무슨 교회인가? 바로 ‘우리교회(?)’ 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또 하나의 독자성이라고 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나’를 긍정한 상태에서의 ‘우리’가 아니라, ‘나’를 부정한 자리에서 나온 ‘우리’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우리’에 대한 ‘나’의 봉사이고 희생이란 것이다. 키우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이렇게 교회의 독자성이 모든 것의 원인이 되어있는데, 그것은 교회사를 공부해보면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 십자가의 피만 믿는 이단으로 살고 싶어요 !!
우리교회 사이트에 비밀 글로 질문을 한 분이 있는데, 사실은 질문이 아니라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적어놓았는데, 자기가 선교단체에 소속이 되어있으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이야기했더니만 이단이라고 규정을 하더라고 말이다. 결론을 요약하면 “목사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십자가의 피만 믿는 이단이 되겠습니다” 라는 내용인데 말이다.
그런데 성화론이 왜 문제인고 하니, 이 성화론은 인간의 독자성을 뒷받침해주는데, 물론 이 독자성을 독립성이나 자립성이라고 해도 무방한데 말이다. 즉 성화론은 이러한 인간의 독자성을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성화가 얼마나 되었니? 나는 이만큼 성화가 되었는데” 라고 하면서, 그렇게 비교가 되니 말이다.
◈ 교회가 곧 장난감 ??
그렇게 비교가 되면 경쟁이 생기고, 그렇게 되면 어릴 때부터 있었던 자기의 장난감과 같은, 즉 “나의 가치가 이 정도는 된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줄 수가 있다는 것이다. 호모 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이니 말이다. 그러니 교회가 독자성이 되면, 자기만의 세계가 형성되는데, 그러니 그것은 곧 장난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만의 교회가 아니라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교회가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바로 그 교회가 ‘나’로부터 찢어져야만 하고, 또한 굳이 장난감이라고 하면 주님의 장난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장난감이 아니라 주님의 장난감이 말이다.
그렇게 주님의 장난감으로서 교회가 되어버리면, ‘나’는 그만 주님이 다루시는 장난감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버리면 버리는 것이고, 구원하시면 구원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런 모든 권한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 모든 심판은 하나님께 !!
로마서에 보면, “모든 심판은 하나님께 다 맡기라” 라고 하는데, 자기가 하려고 하지를 말고 말이다. 저는 이것이 자기가 과연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확인하는 기준으로 참 멋지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 억울하고 분통하고 절통하다고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억울하고 분통하고 절통하다고 호소하는 것이 모두 다 어디에서 나오는가? 자기의 독자성에 나오는데, 그러니 억울할 것도 없고, 분통할 것도 없고, 또 절통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자꾸만 그런 것이 생기는가?
예를 들어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몇 번씩이나 용서해주어야 하느냐고 할 때,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70번의 7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임을 우리가 머리 속으로, 즉 지적으로는 안다고 해도, 실제로 이런 일이 우리에게 벌어진다고 하면 과연 그렇게 용서가 되겠는가? 전혀 안 된다는 것이다.
◈ 490번을 용서해주는 주님의 장난감으로서 !!
그렇게 용서가 된다고 느껴지는 것과, 예수님이 그렇게 490번을 용서해주라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490번을 용서해주라고 하는 말씀을 자기가 자기 장난감을 쥐고 있듯이 하지 말고, 그것을 주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그렇게 맡기면 자기는 그렇게 490번을 용서해주게 되는 주님의 장난감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저는 바로 그것이 정말 교회라고 보는데, 독자성이 전혀 자기에게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부서지든지 망가지든지 간에, 자기가 절통해하고 분통해하고 억울해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왜 절통해하고 분통해하는가?
◈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직접 복수를 !!
그것은 바로 자기가 직접 복수하겠다는 심보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러한데, 즉 주님의 원하는 복수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복수를 말이다. 그렇지 않고, 믿음이 있는 것처럼 주님이 원하는 복수를 마냥 기다렸다가는 그만 화병이 나서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생각하는 복수, 즉 자기가 당한 만큼 갚아주는, 그런 복수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원하는 복수를 하기 직전의 스텝이 무엇인고 하니, “억울해서 못살겠다. 원통해서 못살겠다” 라는 것이란 말이다.
◈ 남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기 전까지는 !!
그래서 제가 ‘피’ 라는 책에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남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기 이전까지는, 아직 죽음의 의미를 모른다” 라고 했는데, 그야말로 “너는 이제 죽었어” 라고 하는 마음이 들 때에, 바로 그때 “아하, 바로 이런 마음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나는 워낙 사람이 좋아서,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아” 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아직도 주님의 아픔을 모른다는 것이다. 정말로 아픈 것은 얻어맞아서 아픈 것이 아니라, 당장 칼을 들고 죽이고 싶은데, 그런데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일 알게 될 때 오는 자기 내부의 균열, 그것이 바로 진짜 아픔을 맛본 사람이라는 것이다.
◈ 강호순보다 예수님이 더 미워 ??
이번에 잡힌 연쇄 살인범 강호순에게 자기 딸이 죽은 사람이 그 인간이 용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그런 것도 490번을 용서하라고 할 때, 아마 그러면 그 강호순이보다도 차라리 그런 말을 하는 예수님을 죽이고 싶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에 다시 한번 꼽히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결코 신학을 한다고 용서가 되는 문제가 아니라, 일단 본인이 한번 당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분통하고, 절통하고, 또 원통한 일을 말이다. 몇 번을 당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역시 490번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당해보면, 그런 490번 중에서 단 한번도 자기 힘으로 용서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분노는 계속해서 무의식 속에 쌓이고 !!
그렇게 용서는 안 되는데, 그런데 용서를 하는 척은 해야만 되겠고, 그러니 거기서 발생하는 분노가 어디에 깔리게 되는가? 자기 무의식 속에 계속해서 누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누적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한 놈이라도 아다리가 되면 마구 조져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모든 것이 다 자기만의 독자성이고 자기만의 장난감이라는 말이다.
이제 교재 164페이지를 보자.
** 확실히 보장받지 못하는 미래 자화상, 신선감이 떨어져 가는 우울한 세상, 가족끼리라도 깨어지는 유대감, 닳아 없어져 가는 매혹거리, 흔들거리는 사회체제, 이 모든 것이 어른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의미 없는 손가락 놀림에 하나 둘씩 넘어가는 묵주구슬처럼, 뭔가 쥐고 있으면 미래의 불안이 해소되는 그런 장난감 하나라도 꼭 쥐고 있고 싶어한다.
성숙한 어른들의 미성숙한 놀이장소가 곧 교회 !!
여기에 참 재미있는 표현들이 나오는데, 신선감이 떨어져 가는 우울한 세상, 가족끼리라도 깨어지는 유대감, 닳아 없어져 가는 매혹거리 등등 말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 자녀들을 다 출가를 시키고 나면 가족의 유대감이 깨어지는데, 그것을 교회로서 대체한다는 것이다. 물론 불안해서 말이다.
그리고 나서 손가락은 무엇을 만지는가? 묵주구슬을 넘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냥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말이다. 그렇게 꼭 쥐고 있는 장난감이 곧 ‘자아2’ 인데, 그러니 성숙한 어른들의 미성숙한 놀이장소가 바로 ‘교회’ 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것이 바로 그들의 종교 생활이다. 성숙한 어른들의 미성숙한 놀이 장소가 바로 그들이 이룩한 종교단체들이다. 이 공간에서는 신비감을 한 몸에 풍겨내는 영적 지도자를 원한다. 요상하고 무게가 있는 긴 가운이라도 걸친 채 무대에 등장하기를 바란다. 꿈속의 인형이 자기들 눈앞에서 실제화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정신적으로 자꾸만 미숙아로 되돌아간다.
이 대목은 그야말로 김수환 추기경을 연상케 하는데, 아니 그 양반이 죽으면 선종이 되고 다른 사람이 죽으면 말종(?)이 되는가? 개죽이냐는 것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데, 숭례문에 불지른 인간이 번지를 잘못 골랐는데, 이쪽에다 그냥 싸질러야 했는데 말이다. 그것이 바로 제일 밑바닥에 있는 분통함과 절통함과 원통함이라는 것이다.
◈ 여보, 놀아줘잉 ??
여기 “정신적으로 자꾸만 미숙아로 되돌아간다”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회사에서 간부가 되면 월급은 많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엄청 피곤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미숙아로 되돌아가면 편한데, 모든 것이 말이다.
그래서 남자들이 나이가 50이 넘어가면 그만 알라(아기?)가 되는데, 혀짜른 소리를 하면서 말이다. “여보, 놀아줘잉. 귀를 후벼조잉. 앉아줘잉. 때려줘잉” 라고 말이다. 일본에는 멀쩡한 어른들이 기저귀를 차고 시간을 보내도록 해주는 어른들 전용 놀이방(?)도 있다고 하는데 말이다. 혹시 이용해본 분이 없어요? (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 지도자에게 회초리라도 자진해서 맞고 싶은 심정들이다. 학대를 받고 꾸중을 듣고, 매를 맞는데서 오는 쾌감, 바로 그 달콤한 아픔이 어릴 적 자아의 모습이다. 그때는 부모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도 그분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랑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어른이 되고 나서부터 그런 관심을 받아본 적이 언제 적 일이었던가!
◈ 목샤님, 때려주세요 !!
이것이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나오는데, “누가 너희를 잡아먹고 뺨을 칠지라도 좋아하는구나” 라고 하는데, 소위 영적인 지도자에게 말이다. 그래서 “저는 목샤님에게 얻어맞는 것은 기분이 좋습니다. 좀 더 때려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고후 11:19)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고후 11:20)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이렇게 되니 껍데기는 어른이고 속은 그야말로 여전히 어린아이인데, 그러니 이것도 역시 균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옛날 어린 시절에 부담 없이 마음껏 뛰어 놀던 시절이 그리운데,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면서 말이다. 즉 자기가 무슨 짓을 하든지 마음대로 해도 칭찬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마구 침대에서 굴리고 뛰어 놀아도, “아이쿠 내 새끼, 잘한다. 그렇게 해야 키가 잘 크지” 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나이가 70이 되어서도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런 짓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구 뛰고 굴리면 며느리가 옆에서 “우리 시아버님, 정말로 멋쟁이야. 최고!” 라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싶다는 말이다. 그 무슨 짓을 하더라도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종교단체 안에서 모두가 어린애가 된다. 어른은 당회장밖에 없다. 교주는 특정 교단에만 상주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 같은 교주를, 어머니 같은 교주를 찾아 사람들은 종교단체를 결성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더 잔인하고 폭군처럼 자기 마음대로 행패를 부리는 교주를 만날 때 사람들은 더욱 더 그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 카리스마적인 쾌감에 몸을 맡기려 한다. 마치 철없는 어린애처럼….
그러니 교인들은 어떤 사람을 원하는가? 그야말로 ‘나쁜 남자(?)’를 원한다는 말인데, 그렇지 않은가?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스스로 억지로라도 정신적 미숙아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 옛날에 보호받고, 사랑을 받고, 관심을 받았던 어린 시절을 재생하고 싶은 것이다. 신체는 이미 어른이기에 주위에서는 항상 큰 실력과 업적을 기대하는 책임자처럼 대하는 것이 일상적인 생활에서 너무나 큰 스트레스가 된 것이다.
◈ 아, 인생 자체가 불쌍하구나 !!
이렇게 신체는 실적과 업적에 시달리게 되는데, 목사라면 다음 주에 몇 명이 나와야 되고, 내년에는 얼마나 더 불어야 되고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 어릴 때의 그 어린아이의 마음은 내부에 그대로 있는데, 그러니 겉으로는 어른이 되어야 하고, 속으로는 무조건 누군가가 자기를 예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생 자체가 얼마나 불쌍하냐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일반 교인들은 몸체만 컸다 뿐이지, 그저 기대기를 좋아하는 어린아이들이다. 학식과 학력? 설교 강단에서 날리는 강압적인 한 마디 앞에 소금처럼 녹아져 버린다. 종교계에서는 일반 교인들을 그저 죽아 가고 늙어 가는 어린애로 볼뿐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인들의 실상인데,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정말로 어른으로 살아가는 자들는 종교단체에 등록하지 않는다. 그 시간에 가족들과 건전한 취미활동이나 하고, 동우회나 동창회에 참석하고 정치활동에 나서기도 한다. 참으로 어른인 자는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나름대로 종교를 따로 가지고 있다. 어린이는 종교를 믿는 자들이지만, 그러나 진짜로 어른인 자들은 종교를 창시하는 자들이다. 종교계, 그곳은 욕망과 욕망의 만남이요, 힘과 힘이 대결하는 공간이다.
정말이지 어른으로 사는 자들은,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그냥 쉽게 말해서 우리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 특징이 교회에 등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교회에 와서 예배쇼(?)를 보고, 취미활동이나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슬슬 한국교회나 비판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자기들이 곧 어른이라는 것이다.
이제 교재 166페이지를 보겠는데, 마가복음 7장 말씀을 살펴보자.
(막 7: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 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막 7: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막 7: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막 7: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막 7: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막 7: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막 7:11)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막 7:12)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막 7:13)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 문제는 ‘독자성’ !!
여기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또 ‘독자성’ 이라는 말이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것으로 때운다는 것이다. 그러니 율법을 자기들 내부에서 독자성을 고수하는 쪽으로 자기들 마음대로 처리하고 있다는 말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예수님이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그렇게 490번을 이야기한 것은, 베드로가 지금 자기 독자성만 생각하고 있기에 그렇게 말씀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베드로는 490번을 용서해도 정작 그것이 용서라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가 정말 절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가 닭이 울 때 자기도 울었던 모습인데, 그렇게 운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도 밉다는 말이다. 즉 예쁘고 독자성을 유지하려고 했던 자기 모습이 정말이지 싫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은 ‘피투성이’ !!
교재 167페이지에 보면 에스겔 선지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본질이 무엇인지 나오는데, 한번 살펴보자. 에스겔 16장의 말씀인데 말이다.
(겔 16: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16:2) 인자야 예루살렘으로 그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겔 16:3)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사람이라
(겔 16:4)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에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겔 16:5) 너를 돌아 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긍휼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꺼린바 되어 네가 들에 버리웠었느니라
(겔 16:6) 내가 네 곁으로 지나 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
(겔 16:6) 내가 네 곁으로 지나 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
(겔 16:7) 내가 너로 들의 풀 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오히려 벌거벗은 적신이더라
(겔 16:8)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에 나오는 이 ‘피투성이’ 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구약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주장하기를,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온 그 히브리인들이 아니라고 한다는 말이다.
◈ 요즘 구약 신학자들의 실상 !!
왜냐하면, 여기 본문 3절에 의하면 “그때 너희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아모리 족속의 땅에서 살던 일종의 떠돌이에 지나지 않았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당시에 사실 애굽에서 올라온 사람은 모세 혼자밖에 없는데, 물론 그의 가족들 일부가 말이다. 그렇게 해서 홍해바다가 갈라졌다고 하면서 구라를 치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나타나니 거기에 살던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야, 너희들이 믿는 그 신이 누고?” 라고 하니, “응, 여호와다. 왜?” 라고 하니, “그러면 우리도 그 신을 믿어서 같이 한번 손을 잡고 잘해보자”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떠돌이들과 합쳐서 만든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인데, 그들을 두고 이렇게 버려진 피투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피투성이가 아니라, 버려진 피투성이라는 말이다. 즉 갓난아이라는 이야기인데, 아이를 낳아서 내버려두고 부모는 그만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떠난 부모가 바로 그 당시의 귀족계급인데, 즉 땅을 가진 자들이라는 말이다.
이런 부자들이 땅을 가지고, 그렇게 자기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서 농사를 지을 땅에 특산품을 강제로 생산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수출용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그만 수출단가가 떨어지게 되면, 그들은 자기 땅에서 농산물이 나오지 않으니 굶어죽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모든 수입은 귀족들이, 즉 땅을 가진 영주들이 다 강탈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노예생활을 하든지, 아니면 떠돌아다니든지 해야 하는데, 그러니 그들은 한(限)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즉 땅을 가진 자에 대한 한을 말이다.
◈ 모세와 함께 혁명을 !!
그런데 이때 마치 누가 나타났는고 하니, 모세 일당들이 애굽에서 왔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들은 탈출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가진 것도 없이 쫓겨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쫓겨난 모세와 이들이 힘을 합쳐서 혁명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무슨 혁명인고 하니, 소위 평지에 땅을 가진 자들을 공격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몇 군데는 성공을 하는데, 여리고 성을 비롯해서 말이다.
하지만 나머지는 실패를 하게 되는데, 그래서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는데, 그래서 이스라엘은 산지에서는 싸움을 잘하는데 평지에서는 못한다는 소리가 그때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즉 산지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틈만 나면 내려와서 땅을 빼앗곤 했는데, 그것을 제대로 다 해준 사람이 바로 다윗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 김수환 추기경 덕분에 !!
오늘날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이 다 이렇게 배우는데, 왜 이런 이론이 먹혀 들어가는고 하니까, 김수환 추기경과 같은 양반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이 소위 ‘사회참여’ 라는 것인데, 교회가 사회참여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교회는 사회적으로 존재론적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에 교인들이 몰려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는 뭔가 민중들이 맺힌 한(限)을 풀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 한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자아1’이 ‘자아2’가 되고 싶은데, 그런데 가진 놈들이 집 값을 올리고, 월급은 자기들만 많이 가져가고 없는 자들을 쥐꼬리만큼 주면서 착취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아1’이 ‘자아2’가 되기 위해서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하는데, 소위 자본가들이나 권력자들을 말이다. 박정희나 전두환과 같은 놈들을 말이다.
◈ 역시 데모는 신부가 따봉 !!
그런데 그렇게 제거하는데 누가 도와주는가? 장가도 가지 않고 전혀 걸릴 것이 없는 신부들이 같이 동참하면 최고라는 것이다. 가족들도 없는 이미 버린 몸이니 말이다. 그때부터 명동성당이 그만 성지가 되고 마는데, 그런데 추기경은 바티칸과 연결이 되어있고, 그 바티칸의 뒤에는 돈을 대주는 미국이 있고 유럽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헌금을 다 내고 하니, 바티칸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말이다.
미국이 만약 우리나라의 수출길을 막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든든한 배경이 있으니, 전두환도 추기경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천주교뿐만이 아니라 새문안교회나 영락교회도 마찬가지인데, 즉 통합측이나 감리교가 그러한 쪽이라는 것이다. 보수진영인(?) 김홍도 목사의 경우에는 아예 미국이 메시야라고 하고 말이다.
◈ 그러나 이스라엘만은 아니야 !!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피투성이일 때 그들을 근사(勤仕)했다고 하는데, 즉 하나님은 그들을 부지런히 살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자아1’에서 ‘자아2’로 나갈 권한이 다른 민족들은 몰라도 지금 이스라엘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돌보아주었으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에게는 그러한 것이 용납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아1’도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 것이고, ‘자아2’도 역시 주님의 소유인데, 그러니 자기가 원통, 분통, 절통해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자기의 것은 값을 주고 산 주님의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값을 주고 피투성이가 된 이스라엘을 샀는데, 그러니 이스라엘은 항상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고 하니, 자기들이 피투성이였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아하, 그때 피투성이인 우리들을 주님이 구원해주셨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는가?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했느냐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피투성이 이스라엘’,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피투성이 자아’를 거부해버리고 반대로 나갔다. 형식적 율법준수를 통해서 자이를 높이고 위신을 높이는, 소위 마음을 높이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 하나님과 사람 앞에 칭찬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법을 지키는 것이다. ‘상실’과 ‘박탈’이 아니라, 반대로 ‘축척’과 ‘소유’로 나아갔다.
◈ ‘상실’과 ‘박탈’이 아니라, ‘축척’과 ‘소유’로 !!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기대한 것과는 전혀 반대로 나아가게 되는데, 즉 ‘상실’과 ‘박탈’이 아니라, ‘축척’과 ‘소유’로 말이다. 그래서 이사야 66장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이 나온다는 것이다.
(사 66: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사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사 66: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사 66:4)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
여기 2절에 보면,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라고 되어있는데, 그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떠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들은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시키는 데로 어린양을 드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3절에 보면,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들이 피투성이였음을 놓쳤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이라는 말이다.
제가 이것 때문에 얼마나 욕을 많이 듣는지 모르는데, “이근호 목사는 지금은 바로 부활의 시대인데 왜 자꾸만 십자가를 이야기하는가?”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기가 피투성이였음을 잊어버리게 되면 그 다음에는 축적과 소유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소유로 나가게 되면 “누가 더 세고, 누가 더 높은가?”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168페이지에 있는 미가서 3장의 말씀을 살펴보자.
(미 3:5)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
(미 3:11)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 이스라엘이 피투성이임을 잊고 있기에 !!
선지자가 이런 설교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그야말로 맞아죽으려고 환장을 했지 말이다. 지금 미가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보고 뭐라고 하는가? 입에 뭔가 먹을 것을 주면 그만 헤헤거리고, 그렇지 않으면 화를 낸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에 촌지를 주는지 몰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스라엘의 소위 지도자들이 왜 이런 짓거리를 하는가? 11절에 나오듯이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이다.
왜 이스라엘이 이런 짓을 하는가? 시간이 너무 지나가면 녹취하는 양반이 짜증을 내기에, 겉으로는 순수해 보여도 한 성질을 하기에 말이다(ㅋㅋ). 그것을 바로 우리가 이스라엘이라고 했는데, 그 이스라엘이 바로 피투성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나’를 위한 ‘나’를 부인하고, 피투성이 이스라엘에게 들어갈 때만 비로소 합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그 ‘우리’를 ‘나’의 확대로서의 ‘우리’ 라고 보기 때문에, 즉 자기가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우리로 바로 나가버린다는 것이다. ‘나’를 부정하지 않고 말이다. 마치 교회에 오면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잘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나오듯이 말이다. 그렇게 되면 피투성이 이스라엘을 거치지 않으니 상대방은 어떻게 되는가? “너는 내 밥이야!” 라고 된다는 것이다.
◈ 왜 교회보다는 가족인가?
교회가 바로 이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에 다니면서도 교회를 싫어하고 가족을 원한다는 말이다. 가족은 아무리 죄인들이 모였다고 해도, 그 가족에게는 핏줄의 정이 남아있어서 자식을 위해서 무조건 희생을 하고, 그래도 부모의 이름으로 남의 부모보다는 더 섬기는 것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즉 “미우나 고우나 내 새끼!” 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 젊은 부부들이 교회에 나와도 여전히 관심은 어디 가있는가? 자기 새끼들에게 있는데, 즉 자기 아이들이 공부는 어떻게 잘 하고 있는지, 어디 값싸고 잘 가르치는 좋은 영어학원은 없는지, 그리고 그 놈의 아토피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주로 그런 이야기들이 유아실에서 소곤소곤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말씀은 말씀이고, 또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교회라는 것이 자기 가족보다 자기를 더 사랑한다는 느낌은 주지 않더라는 것이다. 교회가 말이다. 때로는 얼마나 차갑고 냉정한지, 또한 이기적이고 자기 잘난척하는 것도 남아있어 보이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 피투성이이고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말은 그렇게 하는데 그것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마치 용서하자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듯이 말이다. 그러게 뭔가가 제대로 안 되니 역시 아직까지 기댈 언덕은 자기 가족이 최고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 결국,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에 !!
특히 젊은 사람들은 여기에는 아주 머리가 발달하는데, 하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없으면 지옥에 가고 죽는 줄로 알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그것이 아니라, 이근호 목사에게 배웠는지 몰라도 “교회가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제대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ㅋㅋ)
그런데 문제는 그 교회가 자기를 부정하는 교회인 줄은 모르고 자기를 긍정해주는 쪽으로 여기는데, 그러니 여전히 피투성이의 방정식을 통과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요약해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의 기도제목이 그것인데, “제발 우리교회 교인들이 주님을 사랑하게 해주소서” 라고 말이다. 결국은 ‘사랑’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사실은 불가능한 것을 기도하게 되는데,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나머지는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 어떠한가?
이제 교재 169페이지를 보자.
** [복음은 무시험 합격] - 복음이란, 하나님의 애통하는 심정을 십자가를 통해서 토해놓은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것이다.
◈ 복음은 무시험 합격 !!
여기에 보면 제목이 ‘복음은 무시험 합격’ 인데,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시험이 있는 대상이 있고, 없는 대상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편애를 하는 분인데, 지옥에 갈 사람들은 시험을 치고 천국에 갈 사람들은 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시험을 치는 것은 하나의 요식 행위에 불과하고, 그 시험은 치나마나 무조건 빵점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나름대로 아무리 준비해도 점수는 무조건 빵점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모르는 문제만 골라서 나오니 말이다.
◈ 인간들은 무조건 빵점 !!
예를 들어서, 어떤 부자청년이 오니 주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너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맨 같은 사람인데, “낙타가 바늘구멍이 어떻게 들어가지?”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사로와 부자의 경우에도, 주님은 그 부자를 물이 한 방울도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 곳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 오후예배시간에 한 설교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갈 때 참으로 재미가 있는 현상이 무엇인고 하니, 그들이 가는 길목에 군데군데 장애가 도사리고 있는데, 그 장애는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만 극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들의 이름으로는 전혀 통과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님의 이름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는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들이 시험을 쳐서 통과를 한번 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전혀 모르는 문제만 골라서 골라서 나오게 되니 모두가 다 불합격 처리가 되는데,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만 하게 된다는 것이다.
◈ 피투성이가 무슨 시험? 그냥 통과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원래 이스라엘이 피투성이니, 그냥 무시험으로 마구 통과를 시켜주시는데, 은혜를 베풀어서 말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날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느껴야 하는데,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교회에 나오면서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를 말고, “오늘은 어떤 무시험을 주님이 준비했을까?”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아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과가 되었구나” 라고. 그런 감격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정말 십자가 사건이 종말 사건의 정점에 있다.
이것이 참 어려운 말인데, 왜 우리가 무시험인고 하니, 하나님은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무시험이 되게 하는 근거를 마련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용서인데, 즉 ‘피’ 라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예수님이 피를 흘리면, 이 십자가가 언덕에 있으니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내려가게 되어있는데, 그렇게 되면 시간적으로 과거의 것도 소급해서 용서가 된다는 말이다.
◈ 회개만 하면 용서를 받는다 ??
예를 들어서,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을 했는데 그렇다면 회개를 하면 용서함을 받는가? 그것이 아니라, 그것은 침례교인데, “회개만 하면 용서를 받는다” 라는, 즉 그 회개한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다. 그것은 아주 위험한 알미니안주의인데, 물론 칼빈주의도 요즘은 똑같지만 말이다.
◈ 인간이 아닌, 인간을 통해서 !!
그러니 회개를 했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협조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통해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죄인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일을 하지만, 그러나 인간과 합작해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을 함에 관심이 있지만, 주님께서는 무시험 합격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노선이 율법의 노선이 아니라 은혜의 노선임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즉 아브라함이 은혜의 노선이 있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행함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구원을 받고 싶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받도록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물론 마귀가 매일같이 이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니 문제가 되는데, 즉 “너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때마다 “아하, 은혜로 구원을 받도록 되어있으니 마귀가 이렇게 시험을 하는구나” 라고 여기면 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복음 앞에서는 어른도 어린애도 없다. 오직 죄인으로 드러날 뿐이다. 복음은 종교가 아니다. 가지고 놀면서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예수님 앞에 세워 부정하기 위해서 던져진다.
아까 어른과 어린아이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가 어른을 버릴 수가 있고, 어린이를 버릴 수가 있는가? 도대체 어떻게 버린다는 말인가? 하지만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왔다고 했던 것이다.
◈ 복음은, 인간의 약함과 외로움과 모자람이 아니라 !!
그러니 인간의 약함과 외로움과 모자람을 보충하기 위해서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닌데, 이 문장 하나가 한국교회 전체를 다 대변해주는 것 같은데, 특히 약함과 모자람의 중간에 ‘외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백 보를 양보해서 약함과 모자람은 몰라도, 이 외로움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정작 주님은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사람은 자기 주위에서 다 떠나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이지 환장하는데, “아하, 무엇이 틀어졌구나” 라고 말이다. 하지만 잘못이 되든 되지 않든 간에 성도는 무조건 무시험 합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169페이지에 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 복음은 청명한 공포이다. 하나님의 눈물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율법적 교회는 예수님의 눈물을 배제시킨 체 다른 토대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선악체제로 다져진 온갖 법제와 규칙과 율법으로 구성한 교회이다. 이 안에 경쟁이 있고, 이 안에는 회원상호 간에 위계체계가 구축되어있다. 누가 더 종교적이며 도덕적인가 하는 사실을 걸고 자존심 대회를 여는 곳이다. 이들이 말하는 고난이란, 자기를 죽이지 못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기를 크게 살리지 못한데서 오는 원통함이다.
그러니 원통, 절통, 분통, 이 3가지의 삼통(?) 때문에 자기는 고난을 받았다고, 그렇게 한이 맺혔다고 하나님께 따지려고 교회에 나오는데, 그러니 그것은 바로 이방인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2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는 말이다.
(요 15: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나님의 계시이동은 철저하게 봉쇄된 체로 인간으로부터 침범을 당하거나 손상이 되지 않는 보호막에 둘러싸여 인간세계에 안착한다. 이것은 철저하게 숨어 계시는 하나님의 속성이(사45:15) 인간의 모든 신 관념을 우상으로 간주해버린다. … 그 사람이 믿고 있는 신이 그 사람의 운명과 같이 한다. 구약에서 공격대상은 오직 우상일 경우이다.
(사 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철저하게 보호막을 치고서 이 세상에 오시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래서 기존의 인간들이 주장하는, 즉 인간의 눈에 보이도록 드러나 있는 신 관념을 전부 우상으로 간주해버리신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71페이지를 살펴보자.
(출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하나님은 어떠한 분인가? 그야말로 일방적인 분이신데, 즉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오직 은혜를 받은 자에게만 이 사실이 믿어진다. 이렇게 되면 교회라는 것도 우발적으로 나타났다가 우발적으로 사라지게 되어있다. 이러한 우발성은 필연적으로 교회를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종교성과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특히 차별적으로 제공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필히 반발하게 되는 것이다.
◈ 우발적인 교회를 소유하려는 인간 !!
여기에 ‘우발적’ 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발생론적 교회’ 라는 것이다. 즉 다음 번에 모이게 되면 교회이지만, 그러나 흩어지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바람과 같이 잡을 수 없는 교회를 소유하고자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발적인 것을 인간이 잡게 되면, 그렇게 소유하게 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그 ‘소유자’가 누구냐는 것이다. 물론 인간들은 주님이라고 핑계를 대겠지만, 그러나 사실은 자기 자신이 그 소유주라는 말이다.
◈ 인간은 일단 윤곽을 잡아서 !!
여기서 조금 어려운데, 인간이 자기가 어떤 것을 우발적으로 소유하게 될 때, 그냥 무턱대고 소유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가? 이 우발적인 것에 대해서 대충이나마 윤곽을 잡아서 자기 것이라고 소유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예를 들어서, 물 속에 들어있는 도토리묵을 잡을 때, 다 잡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손에 잡히는 것만 잡아서 건져낸다는 것이다. 윤곽을 잡아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윤곽을 잡는 작업을 할 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안에 집어넣고 싫어하는 사람은 그만 빼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우발적인 것을 보면서 “야, 저것은 내 것이다” 라고 할 때, 그것은 그냥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여기서 판단한 것을 가지고 시스템을 만들고, 그 시스템이 거물망과 같은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과 들지 않는 사람을 구별해서 건지게 된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처음에 기대했던 것만 자기의 소유로 삼게 된다는 말이다.
◈ 교회는 내 것도 니 것도 아닌, 피투성이 !!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그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러면 서로 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가 다 놓치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러니 교회를 무엇으로 만드는고 하니, 그냥 말로만 주님의 교회라고 하지 말고, 물론 교회가 주님의 것은 맞지만 말이다.
그런데 교회가 지상에 나타날 때는 “내 것도 아니고, 니 것도 아니다” 라는 상태로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것을 모두 다 부정해버리는 우발적인 것으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피투성이 이스라엘로 되돌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 교회에서 장로의 역할은?
여기서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면, 이전에도 여러 번 했는데, 이렇게 교회가 자기 소유가 되면 이것이 또한 자기 역사가 개입되는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교회에서 장로투표를 할 때 종종 나타나는 현상인데, “당신은 이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봉사를 했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봉사가 연수가 한 사람은 15년이고 다른 사람은 20년이라고 하면, 그러면 연수가 짧은 사람은 뭐라고 하겠는가? “물론 기간을 짧지만, 그래도 나는 헌금을 더욱 많이 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각자 자기의 개인적인 역사가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교회는 무엇인가? “내 것도 니 것도 아니다” 라는 것인데, 즉 우발적인 것인데, 그렇다면 교회에서 장로는 왜 뽑는가? 장로는 주님의 장난감인데, 즉 주님의 도구이고 일군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해서 장로가 있는가? 당연히 교인들을 섬기지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즉 봉사하고 희생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큰소리치라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신학교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는가요?
신학교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여러분, 이렇게 신학을 공부해도 역시 중요한 것은 목회학입니다. 그런데 목회를 제대로 하려면 교인들을 알아야 하는데, 교인들은 법을 좋아합니다. 그러니 법적으로 잘 가르치면, 교인들은 ‘이런 교회에 오면 구원을 받겠다’ 라고 여기고 안심하고 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을 큰 교회 목사들이 가르치는데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기존교회에서는 지배체제로서 장로는 희생하고 봉사하라고 가르치지 않나요?
신학교에서는 그런 질문을 하는 신학생들이 없는데, 왜 장로가 희생과 봉사는 하는가?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교회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은 전혀 봉사가 아닌데, 오히려 자기 자신을 구축하는 것이지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끄집어내어서 들추는 학생들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사도 역시 큰 교회의 당회장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시간강사로 온 목사에게 “어떻게 하면 목사님처럼 큰 교회를 할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하면, “섬기세요. 섬기면 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일반회사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섬기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 목사는 성경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는데, 그냥 자기 교회를 키우는 것만 알지 말이다.
어떤 사람은 이 우발적인 교회를 이야기하다가 그만 삐쳐서 나갔는데, 자기는 생전 처?들어본다는 것이다. 성경으로 문제는 없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처음 듣는다고 삐치면 그것이 말이 되는가? 제가 입장이 얼마나 난처하든지, 그래도 할 수 없고 말이다.
죽죽 넘어가서, 교재 176페이지를 보자.
** 근로자가 최악의 근로조건 안에서 차마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은 그것보다 더한 차마 견디기가 힘든 자존심 상실을 염두에 두고서 실시된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심지어 성도 스스로가 미리 짐작하는 자기 부인의 경우와는 전혀 엉뚱하게 창피스런 일이 생기더라도, 이것도 역시 하나님이 만드신 상황이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예수님은 악덕 기업주 ??
기업체 사장이 근로자에게 일을 시킬 때도 어느 정도 환경을 만들어놓고 시키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을 시킬 때, 즉 약속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고 할 때는 최악의 근로조건을 구비해놓고 일을 시킨다는 것이다. 거기서 말씀대로 살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편안하게 일을 하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성도라고 해도 미리 스스로 짐작하는 것과는 전혀 딴 판이 되고 마는데, 그러한 중의 하나가 ‘용서’이고 말이다. 우리가 용서를 해 줄만 것 같으면 왜 용서가 되지를 안 되겠는가? 그런데 주님은 도저히 용서를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그렇게 용서하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7번에 70번이라고 용서하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우리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의미와도 같은데,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이근호 목사는 매사에 부정적이다 ??
이렇게 마치게 되면 이 책을 보고는 엄청나가 씹어대지 싶은데, “이근호 목사는 매사에 부정적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인 3장에 ‘생명을 얻는 길’ 이라고 해서 긍정적인(?) 것이 나오는데, 사장님이 부탁을 해서 이렇게 하나 적어놓고 보니 마치 동양철학 책 같은데 말이다. 앞에서는 “인간에게는 이렇게 번뇌가 있습니다” 라고 하고는, 그 뒤에 해탈을 길을 제시하는 것 같은데, 물론 내용은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교재를 181페이지를 살펴보자.
** [1.멈출 수 없는 자기 의(義)] [두려움] - 인간들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무슨 행동을 하든지 상관없이 방울토마토처럼 달라붙게 된다. 왜 두려워할까? 야심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 멈출 수 없는 자기 의(義) !!
이것이 이번 토요일에 울산서 하게 되는 특강시간에도 나오겠지만, 먼저 그 일부를 여기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유혹’ 이라는 것인데, 도대체 이 유혹이 어디서 오는고 하니까, 이 유혹은 결핍에서 온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바로 그런 빈칸이 있기 때문에 유혹이 온다는 말이다. 비어있는 칸이 말이다.
과거 아담이 에덴동산에 있을 때 몰랐던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냥 가만히 있으면 자기가 도대체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모르고 있어야만 인간다운 것인데, 그런데 마귀라는 놈이 다가와서 가만히 있는 아담을 어떻게 유혹했는가? 아담이 그냥 모르고 있도록 놓아두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도 선악과를 따먹으면 안 된다는 것까지는 아는데, 하지만 하나님이 왜 따먹지 말라고 했는지는, 즉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하는 것은 아직 아담이 모르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물론 따먹으면 죽는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들었지만, 그러나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자기가 아직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기에 말이다.
◈ 조카와의 에피소드 하나 !!
저에게 조카가 한 놈 있는데, 물론 지금은 다 컸지만 말이다. 어릴 때 형편상 잠시 같이 산 적이 있었는데,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고 하니, 그 조카가 고추장을 먹는데, 저는 그것을 보면서 “아하, 저 놈이 먹고 매우면 앞으로 먹지 않겠지” 라고 해서 가만히 두었다는 것이다. 먹지 말라고 두 번 세 번 잔소리를 할 필요도 없이 말이다.
그런데 그 조카의 엄마인 숙모가 그것 때문에 그만 한이 맺히게 되었는데(ㅋㅋ), 왜 그 아이가 먹는 것을 말리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삼촌이 되어서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고 말이다. 물론 저는 조카 놈이 먹고 고생을 실컷 하라고, 골탕을 먹이려고 그냥 내버려둔 것이 전혀 아닌데 말이다.
물론 그 당시에 저는 할 말이 없었는데, 제가 조금 잘못한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남이 말을 한다고 해서 들을 인간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안 돼. 하지마” 라고 한다고 말이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다음에는 그야말로 청개구리 심보가 되었는데, 청개구리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말이다. 이것이 바로 ‘멈출 수 없는 자기 의’ 라는 것인데,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의 행동에는 반드시 방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뭔가 끌려서 가게 되는데, 그런 지향성에는 반드시 ‘유혹’이 기다리는 곳에만 가게 된다는 것이다.
◈ 결핍은 악마가 제공하기에 !!
아까도 말했지만, 이 부분이 어려운데, 이 유혹은 결핍으로 인해서 생겨나는데, 그런데 그런 결핍은 바로 악마가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만족하는데, 그런데 “니는 그 옷을 입어봤나? 강남에 가면 천 만원 짜리 코트가 있다고 하던데” 라고 하면, 그때부터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시어니가 될 여자가 단골 보석상에 가서는, 자기는 결혼 예물로서 약 오백 정도의 반지를 사려고 했는데, 그런데 주인이 있다가 “사모님, 저기 물방울 다이아가 하나 있는데, 정말이지 귀한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구입을 한번 하시죠? 가격은 삼천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여자는 무슨 생각이 드는고 하니, “그래도 나는 예물로서 보석을 5상자나 받았는데, 하나 정도는 그렇게 해주면 어때?” 라고 하면서 덥석 사는데, 그렇게 현장에 가서 욕심을 낸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자의 유혹’ 이라는 저질(?) 드라마에 나오는 장면인데, 정작 자기는 가짜로 5상자를 받고는 그렇게 진짜를 사준다는 것이다.
◈ 그렇지, 의롭게 살아야지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그냥 아무 것도 모르고 잘 살아가는데, 그런데 악마라는 놈이 와서 가만히 있도록 놓아두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악마가 유혹하기를 “이렇게 하면 더 의롭게 되어서 신이 되는데, 저렇게 하면 그것은 악이야. 그러니 너는 어느 쪽으로 할거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더 의로운 쪽으로 나아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등산을 하나 해도 하면 할수록 더 어려운 코스를 찾게 되는데, 에베레스트에 올라가는 사람들이나 여기 팔공산에 올라가는 사람들이나 다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성화론인데, 쉽게 하는 것보다는 더욱 어렵게 하면 점수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난이도가 높은 만큼 어드벤디지가 더 있다는 말이다.
◈ 우리도 연아처럼 !!
김연아의 피겨 스케이팅을 보아도 그러한데, 점프를 해도 더 높게, 더 많이, 더 빠르게 하면 할수록 점수가 더 높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도 마치 하나의 게임처럼 만들고 말았데, 물론 악마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멈출 수 없는 자기 의’ 라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제가 이야기를 하고 듣는다고 해서, 인간의 힘으로 결코 멈출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저 자신도 그렇고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온 몸에 골고루 다 퍼져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도무지 이 선악과가 퍼지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 우리 신체 가운데 믿음은 어디서 생기는가?
다음은 유익한 상식이니 알아놓으면 좋은데, 우선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답변을 먼저 해보라는 것이다. “우리 신체 가운데 믿음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라는 것이다. 그것이 두뇌인가? 발가락인가? 그런데 만약에 발가락을 자른 사람에게서 그런 믿음이 있다고 하면 일단 발가락은 아니라는 것이다. 두뇌를 자르면 그런 믿음이 없으니, 그러니 일단 두뇌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두뇌의 어느 부분에 있느냐는 말이다.
일단 이 두뇌를 쪼개보면, 작은골이 있고, 척수가 있고, 앞에 튀어나온 전두엽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두뇌의 어느 부분에 믿음이 있는가? 작은골은 운동신경과 관련이 있는데, 이 부분은 없어도 믿음이 있는데, 그런데 이 앞에 있는 전두엽을 자르게 되면 믿음이고 뭐고 모두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믿음은 이 전두엽의 어디에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두뇌를 보면 겉으로 허옇게 보이는 회백질이 있는데 그것을 조사해보면, 그것은 신경세포를 둘러싸고 있는 아교와 같은 것이 있어서 그러한데, 그것은 일단 떼버리고 안에 보면 마치 괴물같이 생긴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수상돌기, 또한 축색돌기라고 부르고, 그 돌기 끝에는 ‘시넵스’ 라는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넵스가 옆에 있는 다른 뇌세포와 연결이 되도록 해주는데, 그것을 ‘뉴런’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바로 이런 뉴런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가운데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과연 어디에 들어있느냐는 말이다.
* 답변 - 그것을 ‘유기체’ 라고 하면 안 되나요?
그것을 ‘유기체’ 라고 해버리면 온 몸에 다 퍼졌다는 의미인데, 그런데 아까 발가락을 잘라내었다고 했는데, 그런데 발가락을 잘라내어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손가락을 잘라도 그대로 있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치매가 걸리게 되면 믿음이고 뭐고 간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기체라는 말로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믿음은 아주 국소적이고 어떤 특정한 곳에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러한 질문과 답변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되면 무슨 믿음에 손상이 되는 것처럼 여기고 쉬쉬하면서 넘어가고 만다는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겁을 내지 말고, 그리고 무시험 통과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몰라도 되지만, 그러나 무시험으로 통과가 되었기에 자신만만하게 파헤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뉴런’ 이야기를 좀 더 해보면 !!
이 뉴런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면, 목사가 설교를 하는데, 즉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세요” 라고 하면 교인들은 “아멘. 믿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목사의 설교소리가 어떻게 나는가? 목사의 주둥이(?)를 통해서 나오는데, 그렇게 뭔가 하나라도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하면, 그 목사가 아침에 밥을 먹고서 힘을 내어서 밖으로 내질러야만 그 주둥이 앞에 있는 공기가 흔들리면서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침에 먹은 양식이 화학에너지로 바뀌어서 힘이 되는데, 그것을 파동 에너지라고 하는데, 그것이 상대방의 귀에 들어가는데, 그 귀에는 청각신경이 있는데, 그 신경이 두뇌에까지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험을 해보면 알 수 있는데, 즉 청신경이 없으면 듣지 못하고, 시신경이 없으면 보아도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완전히 요한복음 9장인데 말이다.
그 에너지가 수상돌기에 도착이 되는데, 그 세포 안에는 (+)와 (-)가 있어서 (-)가 문을 열게 되면, (+) 이온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안에서는 마치 미꾸라지가 움직이듯이 (+)와 (-)가 서로 전기운동을 하면서 초속 10m나 20m정도의 속도로 내려오는데, 물론 엄청 더 빠른 놈도 있고 말이다. 그것을 흥분한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해서 시넵스에 도착하게 되면, 이 시넵스에서는 신경전달 물질인 도파민이 있어서 터트리게 되면 옆에 있는 것에 약을 올리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두뇌전체에 ‘댕~’ 하고 종을 치게 되면, 두뇌가 ‘믿음~’, ‘소망~’, ‘사랑~’ 이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과연 그 실체가 있는가? 물론 과학적으로 보면 실체는 전혀 없고, 오직 두뇌신경의 그 세포만이 만들어지는 실체가 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왜 각자의 반응이 다른가?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뇌 과학자들이 그만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교인들이 동일한 설교를 들었는데도, 한쪽은 ‘아멘’을 하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런데 다른 쪽에서는 그만 꾸벅꾸벅 졸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어느 유명한 뇌 과학자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놓은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다시 플라톤으로 돌아가고 말았는데, 그것이 곧 ‘통찰력’ 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똑같은 조건하에서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통찰력이, 즉 성경으로 이야기하자면 ‘계시’ 라는 것이고 말이다.
만약에 컴퓨터를 가지고서 이런 인간의 두뇌와 동일한 구조를 만들었다고 하면, 그러한 컴퓨터에다 대고 설교를 하면 컴퓨터는 그냥 그 내용을 그대로 출력할 뿐이지, 컴퓨터가 은혜를 받고 말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에게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이 참으로 이상스러운데, 하지만 그것이 바로 과학의 한계라는 말이다.
◈ 사도바울 - 이 놈들아 그것도 몰라?
그런데 사도바울이 받은 계시에 의하면, 그것은 창세 전부터 이미 은혜를 줄 자이기 때문에 주께서 그 인간을 특별히 다루고 계신다는 것이다. 주께서 하마를 다르고, 코끼리를 다루고, 하마를 다루듯이, 그리고 하늘의 비를 다루듯이 다룬다는 말이다. 그것이 욥기에 나오는데, 그렇게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참새와 들풀처럼 인간을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다루고 계신다는 것이다.
(욥 40:15)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하마를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 인간의 통찰력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 !!
이런 계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의 계시가 계시로서 고백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계시를 받아놓고는 “아, 나의 뛰어난 통찰력이다” 라고 하면 안 되고, 그것은 철학자들이나 하는 짓이고 말이다. 성도는 주의 은혜를 받았다면 그 받은 대로 토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 I don't know !!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제 나는 신학을 그만두고 뇌 과학을 하겠다” 라고 하는데, 그러나 백 날을 한번 해보라는 것이다. 결국 남는 것은 “I don't know” 라는 것인데, 그래서 뛰어난 철학자는 어떻게 하는고 하니까, 뇌 과학자에게 하는 말이 “당신이 이것을 가지고 그렇게 흐르고 있음을 어떻게 알았지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뇌 과학자는 “제가 관찰을 했지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철학자는 다시 “관찰을 한다고 알 수 있나요? 그러니 그것은 당신의 판단이 아닌가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전에도 그런 설교를 했던 것 같은데, 그러니 이런 과학이라는 것은 많은 전체가 아닌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해명하는 식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 부분에서는 바로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고 말이다. 그러니 결국 과학이라는 것은 자기가 바라보는 식으로 볼 수밖에 없고, 그것이 바로 인간이고, 또한 과학의 한계라는 것이다.
◈ 목사님,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말까요?
어떤 엄마는 이런 강의를 들으면, “목사님,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말까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런 뇌세포가 움직이려고 하면 영양분을 공급해야 하고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에서는 뭐니뭐니해도 돈 버는 기술이 있어야 하는데, 돈을 벌어서 양식을 보태야지, 거기에서 진리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노동의 기술을 가질 수 있도록, 마땅히 부모가 기술을 습득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노동의 대가로 돈을 벌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사회에서는 고품위 기술은 돈이 되고 저품위 기술은 돈이 되지 않는데, 그냥 공사장에서 노가다나 하다가 건물에 깔려서 죽고 하지 말이다. 그것이 바로 현실인데, 그러니 남들이 하기 어려운 고품위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식당에서 배달이나 할 수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물론 중국집 배달은 그래도 200만원이나 받는다고 하니 꽤 짭짤하지만 말이다.
◈ 폭력을 베푸시는 하나님 ??
아무튼 교재 181페이지에 보면 ‘두려움’ 이라고 나오는데, 오늘은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일단은 시편 51편의 말씀을 살펴보자. 22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시 50:22)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한 마디로 말해서 이것은 ‘폭력’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여기에서 하나님은 ‘폭력’의 하나님으로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폭력이 있는데, 먼저 하나는 인간이 저지른 폭력이 있고, 또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폭력이 있다는 말이다.
◈ 부끄러움과 두려움 !!
바로 그 폭력으로 인해서,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는 그만 숨어서 지내야만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말이다. 물론 그 이유는 자기도 전혀 모르는데, 왠지 모르는 부끄러움이 그만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부끄러움은 공개가 되면 어떻게 되는가? 반드시 두려움을 유발시킨다는 말이다. 두려움을 말이다.
예를 들어서,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면 벗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밖에서 누군가가 벨을 눌리면 옷을 얼른 입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즉 전혀 알 수 없는 자기의 수치심으로 인한 두려움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모른다는 것이다.
◈ 목사님, 부끄러우면 하필이면 왜 하체를 가립니까?
어떤 분이 질문하기를, “사람이 부끄러우면 다른 곳을 가리지 않고 하체를 가립니까?” 라고 하는데, 수영장을 가든 어디를 가든 아무리 불편해도 다 하체를 가리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생명의 원천이 거기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라고 했는데, 즉 다른 곳은 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퇴화가 되지만 거기만은 뭔가 새로운 것이 창조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이다.
우리가 자기 어깨를 내어놓으면 부끄럽지 않은데, 왜 하체를 내어놓으면 부끄러움이 부풀어오르느냐는 것이다. 굳이 정답이라고 하자면 “주께서 부끄럽게 했으니 부끄럽지. 그러니 쓸데없이 까불지 마”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생각을 한번 해보자면,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죽음과 생식 중에서 이 생식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즉 새로운 번식하는 분야가 다른 분야보다 특별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데, 즉 모두가 동일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남자의 특수성과 여자의 특수성을 구별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듯 인간이 번식하는 특수한 자리가 하체에 정해져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래서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아니고 그곳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여기에서 말하는 ‘두려움’ 이라는 것은, 인간이 알 수 없는 폭력이 저주로서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목사와 집사 이야기는 아는 것이니 더 하지를 않고, 다음 주에는 184페이지부터 하고 이 책을 마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독자성을 버리고 피투성이의 이스라엘로 되돌아오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은 하나님께서 근사해주지 않으면 도저히 스스로 일어날 수도 없고, 살아갈 수도 없고, 구원될 수도 없음을 잊지 말게 하시고, 항상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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