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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2:18-23 / 나의 초상화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2:18-23 / 나의 초상화

정인순 2026. 6. 21. 17:58

음성 동영상 Youtube

 

나의 초상화

 

이근호
2026년 6월 21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2:18-23

(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2:19) 내가 네게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교회는 이미 주님 손에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6:37-39에서 밝힌 것처럼 예수님께서 아버지 일만 하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렇다면 하늘나라에서 아버지와 아들께서 일을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시면 될터인데 왜 굳이 땅에서까지 와서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교회라는 것은 단지 예수님 홀로만 계시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은 주님 홀로 하시지만 천국을 빛내기 위해서 주님의 역량을 드러낼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1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여기서 ‘흰 돌’이 등장합니다.

‘돌’이란 성전의 모퉁이 돌인데 이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어야만 합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시 118:22) 이 원칙이 신약에서 완성이 됩니다. “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인간들은 각자 초상화를 그려나갑니다. 그리고 그 초상화 밑에 자기 이름을 새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성전의 모통이가 되는 돌은 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 이름 뿐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완수하신 건물이기에 그 건물의 모든 돌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지게 됩니다. 버가모 교회를 통해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기능은 이처럼 성전이라는 영역에 주님께 모아주시는 기능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난 주님의 기능은 살피시는 기능입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두아디아 교회를 살폈더니만 이런 평가서가 나옵니다. “내가 네게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 2:19) 이 정도 칭찬받으면 더는 책망받을 리가 없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평하는 행위의 반복으로 점점 자기 세상이 좁아집니다. 자기 철저함과 완벽에 스스로 도취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신앙에 문제점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개인적 완결함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을 다듬는 식으로만 성립합니다.

따라서 두아디라 교회 교인들은 주님의 책망이 언급하는 그 지점에 서 있어야 합니다. 즉 ‘사랑이 아님, 믿음이 아님, 섬김의 아님, 인내의 아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주님의 칭찬이 성도 자신의 행함을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붙잡아 주심에 근거해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성도가 죄를 지으면 그때 하나님의 용서가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투입된 하나님의, 용서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그 용서에 대한 찬양과 고마움과 감사가 터져 나오게 되면서 주님의 고유 기능으로 교회를 붙잡아 주시는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성도는 주님께서 친히 말씀으로 조각해주시는 조각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조각품들이 주님의 성전 내부를 찬란하게 장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업이 아님과 사랑이 아님과 믿음이 아님과 인내의 아님’이 과연 어떤 상황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위해 오늘 본문에 여자 이세벨이 등장합니다.

이세벨은 열왕기상 18장과 21장을 장식하는 인물입니다.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인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왕상 16:19) 이 대목에서 ‘이세벨상’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갈멜산에서 영적 전쟁을 하는데 850:1이 아니라 실은 1:1입니다.

엘리야 선지자 대 이세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한 명을 보내어 모든 것을 바로 잡는데 쓰시고자 합니다. 많은 숫자가 필요치 않습니다. 인간들이 해낼 수 없는 일과 하나님만이 해낼 수 있는 사건을 일으키는데 한명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는 평소에 권력이라는 것이 많은 숫자로 성립한다고 여기는 것을 의도적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처사이십니다.

이세벨은 철저하게 사람의 힘만을 믿는 자입니다. 권력은 집결된 사람의 힘으로 성립한다는 겁니다. 이세벨은 모든 사태로 바로 잡히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이 세상에서는 힘가진 자만이 최고가 된다는 점을 철저하게 밀어붙이는 자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열왕기상 21장에도 나옵니다.

“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포도원을 취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 아합이 나봇의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 갔더라”(왕상 21:15-16)

이세벨의 남편이자 북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왕은 자기 왕궁 옆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그래서 파격적인 조건을 걸고 신사적으로 나봇에게 제안을 합니다. 더좋은 밭으로 바꾸자는 겁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정상적으로 돌리는데 한 사람의 믿음으로만 충분합니다. 나봇은 말합니다. “그 땅은 내가 사고 팔고 한 땅이 아닙니다.”

당연히 아합왕은 낙담합니다. 하지만 부인 이세벨이 보기에 이런 왕의 움추림은 어쩌구니 없는 일입니다. 그냥 왕의 권력으로 뺏아버리면 그만인 겁니다. 이게 바로 권세의 사용법입니다. 나봇은 이세벨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사태가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것을 바로 잡히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두아디라 교회 교인들이 자칭 신앙 좋다고 자평할 수 없습니다. 과연 이세벨 식의 권력체제에서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위로하거나 허세가 아닌지 돌아보는 데서 제대로 된 주님의 붙잡아 주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대를 지키는 데 있어 여럿 사람이 필요치 않음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12강-요한계시록 2장 18~23절(나의 초상화)26062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18~23절입니다. 신약성경 377페이지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것보다 많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아멘.

이 두아디라 교회 천사한테 주께서 당부하기를, 예수님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이렇게 돼 있습니다. 불꽃 같고 빛난 주석 같다는 것은 이 두아디라 교회를 주님께서 주로 살피고 감시하는, 철저하게 모든 걸 지켜보는 그런 강조점을 두고,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나셨습니다.

반면, 지난번에 했던 그 버가모 교회는 이렇게 돼 있어요. 본문 1장 17절에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라고 돼 있어요. 이거는 뭐냐 하면, ‘보관한다, 또는 모으신다, 한 곳에 집중해서 너는 이 안에 들어있어’라고 하는 기능에 주께서 초점을 모으시고 버가모 교회에 이야기했습니다.

만나를 주고, 만나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언약궤 상자 안에서 유지하는데, 그 안에 들어가서 계속 언약궤가 움직이면서 같이 움직여서, 이게 나중에 언약궤가 완성될 때 그 만나가 하늘에서 주신 생명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만나를 미리 줬거든요. 따라서 만나 있는 곳에 너희들도 이 버가모 교회에 너희들도 함께 있고, 여기 또 흰 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돌이 성전에 있어서, 성전을 짓는 재료가 돼요.

그 돌에 이름을 새겨준다는 것은, 그 돌은 성전에 기초 돌이죠. 기초 돌은 주님이 되시고, 그 기초 돌과 이렇게 본드로 붙을 수 있는 연합되는 그러한 자격을 너에게 주겠다. 성전에 하나의 벽돌로 가담되는 기회를 너희에게 주겠다. 이거는 이제, 주께서 한곳에 이렇게 모아서 보호해 주겠다는 데 치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곱 교회에 등장할 때, 예수님이 갖고 있는 일곱 기능을 일곱 교회로 분산해서 나누어줘요.

그리고 그들에게 나누어줬던 하나님의 기능에 의한 결과물을 다시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져 올리면, 이것이 하나의 그리스도 몸이 돼요. 하나의 몸이 된다고요. 그러니까 이래나 저래나, 책망이 있든 칭찬이 있든 상관없이, 책망이라는 것은 주님이 너와 함께 있다는 하나의 방식이고, 칭찬하는 것도 주님이 너를 떠나지 않고 있다는 하나의 칭찬으로서, 있는 사실 그대로를 보여주는 겁니다.

칭찬을 받았다고 해서 좋아할 것도 아니고, 책망을 받는다고 전혀 좌절할 것도 아닙니다. 아니에요. 항상 나(주님)의 기능 안에서 너희는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를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할 수 있어요. 이렇게 칭찬하나 책망하나, 그거 다 주께서 하신 일 같으면, 굳이 우리 보고 이 말씀을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냥 우리한테는 아예 말씀도 하지 마시고, 주께서 알아서 다 하셔서,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결과 속에 네가 들어오라’라고 이러면 될 터인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에 대해서 제가 잠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좀 어렵게 들리더라도, 여러분이 잘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식당 들어가면 음식 주문하고, 음식을 먹어야지’라는 이런 마음으로 식당에 들어갔는데,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주인이, ‘어서 오세요. 여기 음식 주문했습니다. 음식 여기 테이블에 마련했습니다’라고 할 때, 저는 ‘음식 주문하지도 않았는데요’라고 하면, ‘그래서 다 알아서, 단골이니까 뭐 할지 다 알고, 테이블도 늘 앉던 자리에 셋팅 했습니다’라고 하면, 그 정도까지는 우리가 이해되는데, 제일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앉아서 음식을 먹으려고 하니까 음식이 조금 줄었어요.

이걸 누가 먹었느냐 하면, 내가 먹은 거예요. 내가 오기도 전에 미리 음식이 줄여져 있었다는 말이죠. 여러분 이게 상상이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인간의 시공간 가지고 성경 보는 경향이 있어요. ‘내가 뭘 하면 됩니까?’라고 꼭 출발을 나한테 해요. ‘내가 뭘 안 하면 되고, 뭐를 지키면 되고, 할 건 뭘 해야 하고, 안 하면 뭘 안 하면 됩니까?’라는 이런 관점으로 요한계시록을 보니까, 내가 음식 주문해서 음식 먹어야 하기 이전에 이미 음식이 조금 줄었다는 이 말이죠.

음식이 좀 줄었으면, ‘이거 내가 주문하기 전에 음식인데, 나 기분 나빠서 안 먹습니다’라고 나와버리면 그 사람은 지옥 갑니다. 천국에서 탈락이에요. 그런데 주문하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데, 음식이 조금 줄었다는 이 말은, ‘아, 내가 어떠한 인간이어야 할 것에 대해서 일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일임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주께서 나를 끌고 가시는구나’라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의 화강암 덩어리, 그냥 채석장에서 캔 화강암 덩어리라 하고, 그다음에 어떤 모양새의 조각을 만들까 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한테 맡기면 되는 거예요. 맡기면, 어떻게 맡기느냐 하면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에 나오는 그 설계된 대로 우리를 깎아낼 거예요. 깎아낸다는 이 말이죠. 이발소에 가서 쓸데없이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라고 하면, 그 이발사는 짜증 나요. ‘확 깎아버릴까?’

‘어떻게 해 드릴까요?’라는 이거는 묻는 게 아니에요. ‘내가 알아서 합니다’라는 말을 둘러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알아서 합니다’ ‘예, 알아서 해 주세요’라는 건, 죽이 잘 맞는 거예요. ‘이발 어떻게 해 줄까요?’ 나한테 묻는 거 아니에요. 이발사가 교회의 사자 되신 주님, 천사가 주님 보고 이야기하는 거죠. ‘이 교회, 주님 어떻게 해 줄까요? 이발을 어떻게 해 줄까요?’ “이발을 저렇게 해라” ‘알겠습니다’라고 주님과 사자와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거기에 왜 낍니까?

여러분들이 요한복음 6장 38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도 한번 들어보세요.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그 앞에 “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내가 왔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으면, 예수님께서 그냥 하늘에서 아버지 바로 옆에 있으니까, 하늘나라에 아버지 계시고 아들 계시면, 두 분이 알아서 다 하면 되는데, 왜 이 땅에 와서 아버지 일을 이룹니까?

이 인간들 득실거리는 이곳에. 지금 월급 때문에 신경 쓰고 있는 이 땅에 와서, 왜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요? 우리 대한민국 뜻을 이루지 않고, 왜 아버지 뜻을 이룹니까? 그리고 내 뜻을 왜 안 이루어 주는데요? 성경 자체가 “모든 성경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다”(요5:39) 이게 무슨 뜻입니까? “너, 딱 있어! 일체 너의 뜻은 내가 이루지 않을 거야!”라는 이런 뜻이거든요.

그걸 왜 굳이 우리한테 이야기합니까? 왜? 그걸 왜 굳이 이야기해야 하는 거예요? “너는 말씀 바깥에 있는데, 내가 이제 너희를 말씀, 내 안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다 이루신 말씀 세계로, 내가 강제로 너를 끌어 잡아당길 거야”라는 이런 뜻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성립됩니다.

‘모든 것을 바로잡을 때, 비로소 우리는 모든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예수님이 오지 않으면 모든 것을 바로 잡지를 못해요. 바로 안 잡히면요, 사람마다 철학자, 종교, 불교, 기독교, 천주교, 목사, 이런 것들이 와글와글 자기가 옳다고 자꾸 주장해요. 그러면 이거 따라가야 하나, 저거 따라가야 하나, 고민된다고요. 누가 하나 잡아줘야 해요. 아버지와 아들의 뜻을 아는 예수님이 딱 잡아줘 버리면, 그때는 시야가 훤히 다 보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구나.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우리는 뭣도 모르고 까불어 댔구나. ‘뭐 인생이 어떠니, 세상이 어떠니, 진리가 어떠니, 종교가 어떠니, 하나님이 어떠니’라고 말하며, 어디서 구라 떨고 거짓말하고 있어요. 인간은 각자 사람 관계를 보면요, 자기 초상화를 자기가 그려요. 그런데 자기 초상화를 그리면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까지 참조해서 그려요.

‘그래, 나는 이렇게 착해야 해. 아, 책망하는구나. 나는 책망받는 짓은 안 해야지’ 그래서 뭘 얻겠다는 겁니까? 자기 초상화를 자기가 그리고 있잖아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초상화가 아니고, 주님의 증명사진이에요. 우리 얼굴에다가 뭘 덮느냐. 아버지와 아들이 다 이루었던 그 사진, 그 사진발이 아니면 우리는 천국에 못 가요. 내 초상화는 결국은 내가 그리면, 마지막 서명 날인에 내 이름이 들어간다고요.

그러나 주님의 이름으로 들어가거든요. 주님의 이름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이 주님의 말씀을 주님이 알아서 다 했다는 그 초상화로, 우리가 주님의 초상화에 일부로 그려져야 하는 겁니다. 그런 뜻에서 좀 어렵지만, 오늘 본문 한번 봅시다. 19절 상당히 어렵습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19절에서 끝! 여기에 사랑, 주께서 했다는 사업이니까 일. 일, 사랑, 믿음, 섬김, 인내, 오케이~ 만점! 19절! 그러면 됐잖아요. 뒤에 말은 들을 필요 없잖아요.

사랑 되지, 믿음 되지, 섬김 되지, 인내 되지, 사업 되지, 그리고 처음보다 나중에 행위가 점점 더 잘해진다. 뭘 더해요? 퍼펙트, 완벽하지 않습니까? 이 정도 믿음 같으면, 이 두아디라의 믿음 같으면, 뒤에 책망할 게 있기, 없기? 없기죠. 이 정도 완벽한데, 이 정도 완전한데, 무슨 책망이, 여기서 더 추가로 책망할 게 뭐가 있습니까? 없지요.

참, 인간들은 자기가 생각하기에 완전하다고 하면, 뭐 더 이상 하나님 필요 없습니다. 이 정도 칭찬받았으면, 수학 100점 받고 빨리 집에 오게 되면, 그다음에 ‘엄마, 나 수학 100점 맞았어’라고, 자기 수학 100점 맞았다고 하고 가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국어 50점이야. 이게, 인간이 자기 초상화를 그리면 항상 자기 세계가 좁아요. 점점 좁아져요.

왜 그러냐면,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자기 의만 챙기다 보니까, 자기 보기에 ‘와, 나는 왜 이렇게 완벽한지 몰라’ 자기한테 도취가 돼 가지고, ‘나 인생이 왜 이렇게 잘 사는 거야. 나를 책망한다면 그것이 나빠’라는 이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기에,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신다고 했죠. 여기서 두아디라가 빠진 게 있습니다. 뭐냐 하면은 사랑의 반대, 믿음의 반대, 섬김의 반대, 인내의 반대를 몰랐어요.

나는 사랑하면 되고, 믿음을 알면 되고, 섬김을 하면 되고, 인내하면 된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뭘 하느냐. 교회에 대해서 사랑의 반대, 인내의 반대, 반대, 반대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나는 너희를 책망한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럼 우리는 뭡니까? ‘그거, 나 아닌데요’라고 하지요. 인간은 반드시 책망과 어두운 그림자가 같이 나올 때, 그게 바로 언약 안에서 다루어지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칭찬이 있으면 책망, 책망이 있으면 칭찬. 이게 언약 안에 인간의 특징이에요. 언약 안에 있는 인간의 특징이에요. 아주 지옥 간 사람 빼두고요. 언약 안에, 하나님의 약속에 뽑힌 사람은, 칭찬만 받는 게 아니고 반드시 책망도 함께 받아서, ‘천국 간다. 지옥은 몰라도 돼’라는 이건 안 돼요. 안 돼요. 천국 가요? 예. 지옥 아세요?

지옥을 알아야 한다고요! 천국 가는데, 지옥은 왜 알아야 해? 내가 가지도 않는 나라를 왜 알아야 하는가.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 지옥 갈 인간이, 지옥 갈 존재가 어떻게 천국을 가느냐는 거기에, 예수님만 행할 수 있는 것이 개입되기 때문에, 그걸 빠뜨려 버리면 결국 천국 간다는 게 뭐냐. 자기 자랑이 되고 자기 의가 돼 버려요.

이거는 잘못입니다. 지난 오전 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기생 라합은 참으로 믿음이 좋았다’ 끝! 이러면 안 되죠. 기생 라합이 믿음 좋았다는 증거물이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의 고향 사람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거. 거짓말이 등장하는 거. 자기 고향 사람한테는 뭐냐? 배신자가 되죠. 이거는 책망받을 짓이죠. 책망받을 짓이라고요.

따라서 여기 두아디라 교회 교인들에게 책망할 것이 있다고 할 때, 두아디라 교회에서 칭찬받은 것을 잊으시길 바랍니다. 어디로 가느냐? 책망받는 자리에 후딱 그 자리에 서서, ‘주여, 저한테 책망해 주세요’라는 그 자신감, 그 당당함, 그것이 바로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이에요. 책망에 대해서 싫어한다든지 회피해 버리면, 그거는 주님과 함께 있는 교회다움이 아니에요.

아침에도 용서에 대해 언급했지만, 용서는 이미 투입됐어요. 죄짓고 난 뒤에 용서받는 것이 아니고, 용서가 투입되었기에 비로소 우리는 죄를 짓게 되고, 죄를 지으면서 투입된 용서와 만남에서, ‘우리는 어떤 죄도 용서받았구나’라는 것에, 감사가 할렐루야 찬양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찬양이 나올 때는 반드시 우리로하여금 책망받는, 성경의 책망받는 그 현장을 경유해야 하는 겁니다.

그 예가 오늘 본문에 이세벨이 나옵니다. 열왕기상 18장~21장에 걸쳐서 많이 나오는데, 찾아보면 시간 많이 가기 때문에, 내가 18장에 예를 들겠습니다. 그 당시 북이스라엘이 두 패로 나뉘었어요. 뭐냐 하면은 이세벨 파가 있고 여호와 파가 있는 거예요. 여호와 파는 거의 없어요. 거의 없고, 이세벨 파가 있는데 이세벨 파가 몇 명이냐? 850명이에요.

그게 19절에 나옵니다. 열왕기상 18장 19절에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그러면 여호와 편은 누구밖에 없느냐. 엘리야의 말을 들으면, 자기밖에 없다고 했어요. 자기밖에. 사실은 엘리야가 남은 7천 명이 있었는데, 남은 7천 명 생각은 없고, 오직 자기밖에 없어요.

그래서 엘리야 입장에서 보면, 1대 850에 영적 전쟁을 이제 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1대 850, 현저하게 숫자가 비교도 안 되는 시합을 한 이유가, ‘모든 걸 바로잡을 때,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이 한꺼번에 확 다 보인다’라는 아까 제가 말한 그 원칙대로, 엘리야가 한 명이잖아요. 이게 두 명이 될 이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한 명이냐, 2명이냐가 아니라, 숫자 쪽수 싸움이 아니고, 현재 북이스라엘의 이세벨이 단순히 권력만 지닌 게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공격 성향으로 이세벨 한 사람만 해도 충분한 거예요. 그래서 850대 1이 아니고, 사실은 엘리야와 이세벨 두 사람의 전쟁이며, 이 전쟁이 두아디라 교회까지 현재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이세벨이 추구하는 것은 뭐냐? 그게 열왕기상 21장 15절과 23절에 보면 나옵니다. 이세벨이라는 이분이 하는 일은, 남편이 나봇의 포도원이 탐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왕이 합당한 거래 조건을 제시합니다. ‘저 포도원만 넘겨준다면, 그보다 훨씬 좋고 넓은 밭을 내가 지불할 용의가 되어 있다. 이 거래는 나봇 너한테 전혀 손해가 아니다’라는 거예요.

누가 봐도 이 거래 잘하면, 잘 거래를 붙들면, 대대손손 이거는 떼돈 벌고 재벌 됩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줍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씀에, 나봇과 아합왕의 거래가 왜 등장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은 숫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버리면, 그 뜻을 아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만 있어도 하나님의 일은 차질 없이 진행된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나봇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적으로 참 좋은 조건인데, 제가 각색해서 쉽게 말씀드리면, ‘임금님 문제는 이 땅이, 이게 내 땅이 아니라는 거예요. 임금님, 지금 형편이 그렇습니다. 내 땅 같으면 당신에게 좋은 조건에 팔아서, 우리 대대손손 잘 먹고 잘살겠는데, 이 땅이 내 땅이 아니고, 여호와의 땅이네요’라고 이렇게 나오니까, 그 소리 듣고, 임금이 풀이 죽어서, ‘참, 아직도 여호와 믿는, 여호와의 말씀을 믿는 그런 인간이 있구나. 아, 미치겠다. 정말’

우리 인간 대 인간 레벨로 이야기해야 하는데, 여호와 거론하는 자가 아직도 있는 거예요. 잠실 투표장에, 거기 가서 펜싱 선수들이 자기 펜싱 갖고 오려고 하는데, 마지막 남은 아가씨 하나 때문에 자기 펜싱을 못 갖고 왔다는 거예요. 이건 미칠 일이죠. 말이 안 통해, 말이. 그럴 때 이세벨이 등장합니다. 이세벨이 같잖아서, 이 남편이 왕이잖아요. 왕. ‘저거 지금 왕 맞아?’

아내가 남편 앉혀 놓고 얘기합니다. ‘당신 왕이야. 이 나라의 최고 말발이야. 당신 지금 누구한테 밀린 거야? 나봇, 이거 포도원 농장 주인에게 밀렸잖아. 비켜.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하면서 이세벨이 나서서, 소위 여호와 믿는 나봇을 작살냈습니다. 그리고 모함해서 죽여버리고 포도원 가뿐하게 데려왔어요. 그게 바로 두아디라 교회가 처한 형편입니다.

개인적으로 진짜 믿음 좋고, 신앙 좋고, 다 좋아요. 그런데 반대편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믿음 좋고, 신앙 좋고, 인내 있는 거, 이거 혹시 내가 밥 먹고 살 만하니까, 지금 내가 스스로 믿음 좋다고 자칭하고 있지는 않은지. 사실은 이 세상은 모두 이세벨 파인데. 이세벨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만약에 사랑을 안다면 이거는 기적이에요.

‘주여, 어찌 내가 주의 사랑을 압니까?’라고 이렇게 되는데, 이세벨도 모르고, ‘난 천국 가는데, 뭐 주께서 믿음 좋으니까 믿음 좋은 줄 알지’라는 이거는 아니에요. 우리가 이 세상의 권력에서 우리 힘으로 어떻게 세상에 대항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주께서 믿음 주시고, 인내해 주시고, 성경에 보니까 “너는 사랑이 대단하다”라고 이렇게 했다면 이거는 우리한테, 우리 개인적으로 우리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우리는 세상 권력에서 발을 못 빼요. 그 정도로 우리 욕심이 많아요. 신앙도 좋지만 잘 먹고 잘살고 싶고, 우리는 애매하게 맞아 죽는 거 싫어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하나님 교회는 하나님의 인내가 있고 사랑이 있다는 것은, 주께서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앙 허세 떨지 말게 하옵소서. 자기가 노력하고 마음 단단히 먹어서 믿음 좋은 줄 알고 있었던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일인지, 지금도 일하시고 자기 백성을 기어이 건져내시는 주님께서,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는 것인지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에 더욱더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