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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9강 / 아브라함 자손 / 260525 본문

복음이냐 교회냐(26대전,24광주)

9강 / 아브라함 자손 / 260525

정인순 2026. 5. 25. 17:48

음성2

 

녹취:이하림

대전-복음이냐 교회냐(9강) 창15:5(아브라함 자손)20260525b(강의: 이근호 목사)


『복음이냐 교회냐』 93페이지 하겠습니다. 위에서 7번째 줄, […이삭을 죽임으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이 되는 겁니다. (롬4:16)]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이 된다.’는 말은 아브라함 자손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 자손은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나와요. 거기 보면 여럿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이라 했어요. 3장 16절,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어렵죠. 아브라함 자손들이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다수를 말하는 게 아니고 굳이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하나를 딱 집어야 될 이유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여러 명이 아니고 ‘다른 사람은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라는 말을 해야 될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그걸 빼먹어버리면 믿음에 대해서 지금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약속을 줍니다. 15장 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아브람을 이끌고 밖에 나갑니다. 밖에 나가는데 그때가 낮일까요, 밤일까요? 밤입니다.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땅을 보는 게 아니고 밤하늘의 별을 봤어요. 하늘을 보니까 거기에 뭐가 있습니까? 별이 있죠.

밤중에 아브라함이 땅 위에 서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개를 쳐들고 위를 봐요. 아브라함이 위를 본 거예요. 땅이 아니고 하늘을 보죠. 하늘을 보니까 하늘에 뭐가 있어요? 별이 있죠, 별. 별이 있으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이 있어요, 없어요? 있죠. 많아요, 적어요? 무수한 별처럼 아브라함의 자손이 많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미 박혀 있어요. 어두운 하늘의 별로서 박혀 있단 말이죠. 이미 있어요. 그런데 시선을 지상으로 돌리면 아브람의 자손은, 없어요. 왜? 아기를 못 낳으니까 없다 이 말이죠.

믿음이 뭡니까? 하나님은 있다고 이야기하고, 아브라함의 눈으로 볼 때는, 아브라함이 알고 있는 과거 경험이나 인생 경험으로 볼 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죠.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어요. 인간에게는 없는데, 믿음이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오게 되면 새삼스럽게 별이 생기는 게 아니고, 전에부터 하늘의 별이 박혀있었던 것처럼 전에부터 하나님의 자손은 ‘있었다’가 돼요. 있었다.

‘있을 것이다’가 아니고 ‘있었다’가 돼요. ‘있을 것이다’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따지는 이 지상에서 통하는 시간 개념이고요. 그렇게 되면 믿음이라는 것은 ‘앞으로 잘할게요’가 아니라, 과거부터, 내가 뭐를 잘하기 전부터 이미 나는 어떤 존재고 나의 팔자와 운명은 애초부터 결정되었다가 받아들여지고 이해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따라서 내가 뭘 해서 새로운 성과를 이룰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참 어리석은 거예요. 인간은 계획세울 자격과 권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계획을 세운다는 말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가? 자기의 행함과 거기에 대한 노동과 내가 정했던 목표가 성취될 것을 내가 믿는 거죠. 그래서 인간의 믿음은 자기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이것은 가짜 믿음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에게 나오는 것은 가짜 믿음이라는 것을 미리 또 하나님이 아셨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에게는 자손이 없습니다. 자식 갖고 싶더라도 자식이 없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어떤 아브라함이냐? ‘자식 없는 아비’가 돼요. 자식 없는 아비. 그런데 아비 자체가 성립 안돼요. 자식이 없는데 성립이 안 되죠.

그런데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니까 자기 믿음밖에 없는, 엉터리 믿음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주게 되면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 행함이 거부당하는 채로 100% 오롯이 주님의 믿음, 내 믿음 말고, 내가 하나님 믿는 믿음 말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많은 하늘의 별들이 이미 있었다,가 드러나겠죠.

그러면 이 별들이 존재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믿음 없는 아브라함을 철저하게 이용했다고 보는 거예요. 활용했다고 보면 됩니다. 오늘날 우리와 똑같은 거예요. 눈 떠서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보니까 내가 뭘 하나 안하나 관계없이 우리의 운명과 팔자는 이미 끝났어요.

점쟁이 찾아가고 굿할 필요 없습니다. 사주 같은 거 볼 이유가 없어요. 그런 것은 뭔가 노리겠다 이 말 아닙니까. 팔자 한번 고쳐볼까, 이런 거란 말이죠. 아들이 여자 사귀니까 아들 엄마가 “잠깐 기다려 봐라. 내가 누구한테 말 한번 들어볼게.”하고 점집 가서 궁합 맞는지 보는 거. 그거 안 맞으면 어떻게 할 건데요?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일을 벌일 때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끽소리 못하게 만드는 그러한 상황부터 시작이 됩니다. “별 봐라. 이미 있잖아. 너는 자식 없지? 그러나 이미 있어. ‘없음’과 ‘있음’의 차이에 내가 개입할 거야. 내 약속이 개입할 거야.” 그게 아브라함이에요.

갈라디아서 3장 다시 보겠습니다. 이것은 몇 번을 해도 참 어려워요. 갈라디아서 3장 9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이 대목 딱 보면 확 땡기죠. ‘와, 나도 믿어서 복 받겠다. 나는 행함으로 아니고 믿음으로 복 받겠다.’

그 다음에 6절을 보게 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래, 나 믿어야지.’ 이렇게 확 땡긴단 말이죠. 땡기는데, 그러나 아까 이야기한 3장 16절, ‘이것은 여럿을 말한 게 아니고’라 했죠. 그럼 아브라함과 예수님 올 때까지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후손들이 생겼겠습니까. 그 여럿이 ‘여럿이 아니오’가 되려면 그 여럿을 제키는 것, 그들의 믿음을 다 믿음이 아니라고 제켜버리는 그런 작업을 바로 3장 10절에서 율법이 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미 저주 아래 있다고 되어 있어요. 저주의 반대말이 뭐죠? 복이죠, 복. 그런데 아까 갈라디아서 3장에서 아브라함이 믿으매 의가 되고 복을 받는다니까 우리도 복 받으려고 설쳤는데 중간에 율법이 끼어드는 거예요.

아브라함 이후에 사백삼십 년 후에… 사백삼십 년이라는 것은 갈라디아서 3장 17절에 나와요.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미리 정한 것을 다수가 받기 전에 먼저 누구를 경유하는가? 한 분을 경유해서 새로운 다수가 받지요. 내가 다수라 기대하는 다수가 아니고, 내가 기대한 내가 아니라 내가 아는 나 말고, 예수님을 경유한, 내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나의 이미지, 나의 자아가 바로 율법을 경유하면서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 안에서 저주받는 자는 누구입니까? 나잖아요. 나죠. 그러면 그 저주를 통과해서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고 천국 가는 나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어디에서 온 믿음입니까? 바로 다수, 곧 나의 믿음은 율법에 의해서 전부 다 배제당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그 하나의 믿음을 분산되게 할당받은 자들이 오직 누구든지 동일한 믿음으로 동일한 나라, 천국에 가는 거예요. 복을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두 번 다시 자기를 쳐다보지 않죠. 자기의 행위나 자기의 행동이 발랐느냐, 안 발랐느냐 그걸 안 봐요. 왜냐하면 그것은 율법에 의해서 다 걸러내야 되니까.

3장 18절에, “만일 그 유업-천국,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천국입니다-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약속 덩어리가 뭐냐? 이삭이에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받고 누구하고 누구를 바꿔치기해야 돼요? 아브라함 자기 계열과 누구 계열을 바꿔야 돼요? 이삭 계열과 바꿔야 돼요. 왜냐하면 이삭 계열은 죽었다가 수풀 옆에 어린 양 때문에 살아난 것이고,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육의 계열이 있잖아요.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데려가서 그것을 바꿔치기하는 작업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삭을 바쳐라.” 이삭을 바치란 말은, 그것도 사랑하는 독자를 바치라는 말은, ‘아브라함 너는 천국 계열이 아니었다. 아니다.’ 바통이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바뀌면 ‘아브라함이 있고 그다음에 이삭이 있다.’ 시간상 그렇게 되죠.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이삭을 위하여 아브라함이 시기적으로 약간 일찍 왔을 뿐이다.’ 이렇게 돼요.

세례 요한이 먼저 태어났습니까, 예수님이 먼저 태어나셨습니까? 세례 요한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가 서로 친족 관계고 출생에서 6개월 차이나요. 누가 봐도 세례 요한이 6개월 먼저 이 땅에 선배에요. 나중에 태어난 것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이 반대로 이야기해요. “그 분은 나보다 먼저 앞섰다.”(요 1:15)고 이야기해요.

그 고백을 오늘날 예수님의 믿음을 받은 우리도 똑같이 하면 돼요. “나보다 예수님이 먼저였었습니다.” 그게 바로 믿음 아닙니까. 그게 믿음이거든요. “호두과자 누가 구웠어요?” “나보다 먼저 계신 주께서 구웠습니다.” 이러면 되잖아요. “당신은 이제 늙어 죽습니다.” “아니요. 나보다 먼저 죽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본받기 위해서 우리가 뒤따라 죽습니다.” 이게 믿음이잖아요. 참 쉽죠? 참 쉬운 거예요.

그런데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여러 군데 나오는데요. 제자들이 다른 건 다 예수님을 믿는데, 예수님이 죽는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못 믿었어요. “주님,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 말이 입에 달렸어요. 그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죽는다는 것을, 잡히고 죽을 때까지도 몰랐어요.

심지어 유대인들도 예수님이 긴가 민가 했겠죠.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 죽이는 것을 뭐로 실시했느냐 하면 진짜 그 사람 말대로 하나님인지, 그냥 허망하게 죽는 인간인지 시험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시험 삼아 죽여 봤어요. “진짜 천사가 와서 구하나 보자.” 뭐 이렇게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시험을 거는 시험 안에, 확인해보겠다는 그 확인 안에 인간이 꼼짝 못하고 갇혀 있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 발각시켰어요. 이걸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믿음 안에 갇혀있다.’ 인간은 자기 믿음 안에 갇혀있습니다.

이것은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 참여한 사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율법에 흠이 없다고. 그런데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믿음에 갇혀있는 그것으로부터 탈출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내 믿음으로 포착될 분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먼저 내 믿음이 작살나야 됩니다. 내 믿음이.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이것이 바로 마귀 짓인 것을 인정해야 돼요. 우리는 믿음 없이 한 순간도 살아본 적 없기 때문에. 저는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폭파’라는 말로 하겠습니다. 폭탄가지고 폭파시킨다, 폭발시킨다.

자, 예를 들면 지금 이 책상 위에 만년필이 몇 개 있습니까? 만년필이 몇 개 있어요? (없습니다.) 없지요?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0’이라고 해요. 사람들은 ‘없다’를 ‘0’이라 했습니다. 왜 0이라는 숫자를 붙였느냐 하면 ‘없음’을 살려내기 위해서. 없음까지 아울러서 내가 이 세상의 모든 현상과 움직임을 내 믿음 안에 다 포함시키기 위해서 0을 만들었어요.

1,2,3,4,5,6,7,8,9, 그 다음에 뭐냐 하면 ‘0’이에요. 처음 찾아온 0이라서 ‘1’자를 붙여요. 그러면 ‘10’이 되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11,12,13,… 이렇게 하면 돼요. 그 다음에는 100. 얼마나 편리해요. ‘편리하다’는 말은 세상의 어떤 현상도 숫자화 시켜서 무한까지 전부 다 내 믿음 안에 집어넣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죠, 인간에게는.

그런데 이걸 생각해봅시다. 6÷0은 얼마죠? 6÷0=x. 0을 옮기면 x×0=6, x가 어떤 숫자가 되면 0을 곱했을 때 6이 될까요? 똑같은 수식이에요. 6÷0=x, 이 말은 x×0=6이 된다 이 뜻이거든요. 어떤 숫자에 0을 곱하면 6이 나올까요? 어때요? 그런 숫자가 없어요. 수학에서 ‘이것은 정의되지 않는다.’ 이렇게 했어요. 수학이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모든 현상을 수식으로 다 설명하는 것은 이게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나오는 ‘0’은 인간의 모든 숫자를 ‘폭파’시키는 겁니다. x-3=0이라 할 때, 이것은 폭파가 아니에요. 이때 ‘0’은 ‘없다’입니다. ‘어떤 숫자에서 3을 빼면 없어집니까?’ 이것을 수식으로 할 때, x-3=0이에요. 정답은 0+3=x가 되니까 x=3이 되죠. 3에서 3을 빼면 ‘없다’가 돼요. 토마토 한 개 있는데 먹으면 있어요, 없어요? ‘없다’가 되죠.

‘없다’가 되면 앞에 토마토가 없어졌잖아요. 그래서 이 말도 마찬가지에요. ‘0’이라 하는 것은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없애버리는 것. 그게 ‘없음’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세계 속에 숫자로 ‘0’으로 표현된 그 ‘없음’을 지목하고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모든 있는 것들은 다 사라지도록 만들었어요. 0이 되게 만들었어요. 없음이에요.

그것에 대해 제가 약간 언급한 것이 어제 낮 설교였습니다. 낮 설교 앞부분 잠깐 해볼까요? 아담이 만들어졌죠. 아담이 만들어졌으니까 살아있어요, 죽어있어요? 살아있죠. 살아있는 자는 살아있으면 끝이잖아요. 그런데 왜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을 해서 살아있는 사람 기죽게 만들었냐는 말이에요, 왜?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걸로 종결시켜야죠. 계속 살 것 같으면 죽음 이야기가 뒤따라오면서 말씀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없다고요.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아니고, ‘이것을 따먹는 날에는 죽는다.’는 말씀이 살아있는 것이 창조의 뜻입니다. 말씀이 살아있는 것. 말씀이 나중에 육신이 됐잖아요. 주님 아닙니까. 예수님이 영원한 것이 주의 뜻이에요.

그러려면 아담이 살아있는 것이 방해가 될까요, 아니면 도움이 될까요? 생명나무를 안 따먹었잖아요. 생명나무를 안 따먹은 상태에서 인간은 자꾸 살아있다고 우긴다고요. 영원한 생명은 아담이 아니고 생명나무 자체가 영원한 생명이거든요. 왜? 나무의 이름이 ‘생명’이니까요. 그걸 위해서 방해되는 누구를 제거해야 되죠? 임시적으로 살아있는 인간을 제거하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늙어죽는 것은 주의 선한 뜻입니까, 선한 뜻 아닙니까? 선한 뜻이죠. 우리가 죽어줘야 말씀이 사니까. 그러니까 죽는 걸 그렇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달리다굼”이 뭐에요? “소녀야 일어나라” 소녀는 왜 일어나야 돼요? 말씀대로 ‘정녕 죽으리라’를 품은 채 일어났기 때문에 ‘달리다굼’, 살았잖아요.

예수님도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죠. 누구도 예수님을 따라올 수 없게 하기 위해서 삼일 간의 텀을 줘요. gap을. 3일 간에 gap을 줘버리죠. 그 gap이 ‘시간의 막(幕)’이 되는 겁니다. 시간의 막이 되면 막을 통해서 새롭게 안과 밖이 성립됩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말씀처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예수님이 ‘있다’, ‘없다’의 새로운 기준으로 등장해요. 내가 있으니까 ‘있다’가 아니라, 네가 있다고 ‘있다’가 될 수 없고, 주님의 사랑이 있을 경우에만 우리는 ‘있다’가 돼요. 하늘의 별처럼. 하늘의 별이 되어야 돼요. 땅에서 하늘의 별이 되게 되면 이것은 애초부터 창세 전부터 별이어야 했기 때문에 별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약속의 승리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약속의 승리, 인간의 능력에서 벗어나는 승리. 그래서 예수님이 죽는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마땅히 죽는다,를 보여주고 그리고 성도가 죽는다는 것도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는 겁니다.

이 ‘없다’에 대해서 ‘없다’가 나오는 성경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37편 10절,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어떤 인간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어떤 인간도 죄인입니다. 그러면 죄인은, 악인은 어떻게 되어야 돼요? 이 땅에서 마땅히 없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예언대로 되는 거예요, 예언대로.

‘우리’를 없애고 ‘우리’를 나타나게 하는 거예요. 자꾸 안 없어지려고 발악할 게 아니고, 우리가 없어짐으로써 없어지는 우리가 이미, ‘이미’입니다, 이미 하늘에 별이 되어서 영생을 얻은 우리와 꼬랑지가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연결되어 있어요.

내가 모르는 ‘나’와 지금의 알고 있는 ‘나’가 연결되어 있어요. 계열화 되어 있어요. 이 계열화 중간에 누가 들어갑니까? 멜기세덱 반차를 따르는 예수님이 들어가죠. “네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연결되는데 이것은 내가 아는 ‘나’가 아니에요. 내가 아는 ‘나’가 아니고, 이것은 시간 속에 있는 내가 시간 이전에 벌써 확정된 나와 교체되기 위해서 중간에 예수님이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죽이는데, 그 죽음을 대신 죽으심으로 예수님이 끼어드는 거죠. “너 대신 내가 죽었다.” 그게 논리 따지지 말고, 확실히 따지지 말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나 대신 죽었지.” 이게 순하게, 마치 빨려 들어오듯이 확 밀려 들어오면 그게 바로 내 믿음이 아니고 쳐들어온 믿음이고 오늘밤에 죽더라도 네가 오늘밤에 주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그 믿음이.

이걸 옆에서 “네가 어떻게 해서 그 믿음을 가졌느냐? 복도 많지.” 이렇게 하고 “어느 기도원에서 응답 받았어? 말씀을 몇 독해서 그렇게 되었냐?”… 이거는 미리 예측한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찾아온 거죠.

여러분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세요. 시장에 갔을 때나 극장같이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그런 장소에서 여러분들이 네 살쯤 됐다 치고. 여러분들 누구 따라갑니까? 풍경 볼 시간 없어요. 엄마, 아빠만 죽자고 따라가잖아요. 우리는 엄마, 아빠 뒤만 따라간단 말이죠. 그럼 어른의 특징은 뭐냐? 자기가 헤쳐 나가야 되는데, 어린아이의 특징은 앞에 누굴 보고 따라가는 거예요.

내가 선두에 설 거냐, 아니면 복음, 다른 말로 하면 성령님이 선두에 설 거냐? 그러면 여기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뭡니까? 앞에서는 성령님과 말씀과 복음이 있어 나와 연관되어 있고 그 뒤에서 쳐다보며 따라가는 것, 이게 바로 믿음이고요. 내가 선두에 서는 것은 뭡니까? 이건 믿음이 아니죠.

그래서 인간이 계획하는 것은 다 헛방이라는 겁니다. 내가 나서서 이렇게 하면 될 거다, 하는 거. 삼성 팔아야 돼, 일주일 뒤에 환매해야 돼, 이런 거 있잖아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주식이 오르고 돈을 벌겠습니까, 돈을 꼴아 박겠습니까? 돈을 벌죠. 왜? 믿음이 없으니까. 야, 이거 되네? 그럼 다른 거 또 하겠죠.

그럼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누가 헤엄쳐 나갑니까? 본인이 헤엄쳐나가는 거예요.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못가요. 그런데 본인이 어른이라. 본인이 헤쳐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겠습니까?’ 한 이유가 예수님이 자기하고 반대쪽으로 죽는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죽을 때까지 몰랐어요. 베드로도 세 번씩 배신했잖아요. 몰랐습니다. 자기 인생은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에. 나서고 안 나서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앞에 누구 꽁무니가 보이는 그쪽이 본인에게 없는 거예요.

어린아이처럼 따라가야 된다고요. 따라 가보면 주님께서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가? 복음을 주고 성령을 줄 사람과 안 줄 사람을 귀신같이 알아서 미꾸라지가 수초를 헤치고 가듯이 날렵한 지느러미로 물고기가 해초 사이로 숨어 가듯이 사람들이 ‘믿습니다’해도 다 피해버려요.

어제 오후 설교에서 했잖아요. 팔 내민다고 손잡지 마란 말이죠. 여기! 여기! 손 내민다고 가지 마라. 왜? 그들은 개돼지거든요. 복음을 줘봐야 개돼지처럼 활용하는 사람들이에요. 자기 복 받기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이에요. 귀한 것을 개돼지에게 주지 마라. 설마 말씀을 진짜 자기가 키우는 개돼지한테 줄 사람은 없을 것 아닙니까. 인간으로 생겼기 때문에 줬는데 나중에 보니 개돼지라.

자기 개에게 자기 주식투자나 자기 인생에 보탬 될까봐 예수 믿는 사람들. 그냥 교회죠, 그냥 교회. 그냥 딱 교회죠. 그런데 주님께서 귀신같이! “안줘. 안줘. 너한테는 안줘.” 해서 꼭 줄 사람에게만 찾아갑니다. 줄 사람에게만 찾아가요.

어제 낮 설교에서 제가 예를 들었는데 ‘제자 국제 크리스천 학교’라는 것, 대구 경산에. 가까운 데에 그런 학교가 있는 줄 몰랐죠. ‘부모를 떠나 자식을 우리한테 보내서 중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하게 되면 우리는 반드시 좋은 대학에 넣어드리겠습니다. 그것도 유수한 외국대학에. 출세 길이 훤히 폅니다.’ 이렇게 하는데요.

설교 시간에 시간이 좀 있었다면 제가 여러분들보고 반박해보라 했을 거예요. 자식을 가진 부모 중 어느 부모가 거기에 대해 탐을 안 내겠습니까? ‘야, 저런 데가 있구나.’ 왜 부모가 그걸 탐내냐 하면 본인은 믿음이 없어서 애를 그렇게 신앙적으로 키울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가 통박을 굴립니다. ‘나는 믿음생활 안 해도 좋으니까 자식만큼은 제대로 믿음생활해서 이 부모한테 자랑스러운 자식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면 내가 아낌없이 국제학교 비싼 공납금도 댈 용의가 있다.’ 그래서 자식을 보내거든요.

그런데 그 학교가 조건이 있어요. 아빠, 엄마 양부모가 다 거듭나야 돼요. 이단 말고 기존 교회에서 세례교인으로서 거듭나야 된다는 거예요. 거듭나지 않은 자식은 우리 학교에 못 보냅니다. 거듭난다는 기준은 뭐겠어요? 본인 교장 선생님과 남편 되는 목사님이 갖고 있는 신앙과 일치될 때 거듭난다고 보는 거예요. 기존 교회 안 다니는 사람 끝났어, 끝났어. 아이비리그 끝났어, 이제.

제가 그랬거든요. 그걸 반박하면서, 엄마 나는 망하는데 자식은 믿음생활 잘 하고 복 받기를 원한다? 이거 욕심 아닙니까? 그거 욕심이죠. 그게 탐욕이잖아요. 이게 엄마가 갖고 있는 하나의 계획이고 엄마의 믿음이잖아요, 엄마의 믿음. 이렇게 이렇게 하게 되면 내 계획대로 이렇게 될 것이라는 엄마의 믿음이죠. 뭐 엄마의 희생정신입니까, 자기 신앙생활 잘 못하는 게?

자식을 누가 신앙생활 시켜야 합니까? 엄마, 아빠가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잘 되는 건 욕심나고, 엄마 아빠는 성경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신앙생활 잘할 자신도 없고, 또 자기가 말하면 권위가 없으니까. 잠잘 때 민수기가지고 축복하자고 “얘, 민수기로 축복하자.”하면 아이는 “하세요.”하고 자기는 게임하고 있어요. 엄마를 너무 잘 알잖아요. 자기 과거에 자식을 오냐오냐 그렇게 키웠기 때문에 권위가 없으니까 돈 들여서라도 경산까지 보내면서 그렇게 하는 것.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부모가 신앙이 없으면 부모를 신앙 없게 만드는 하나님의 그 사랑 안에서 자식을 키워야 돼요. 자식을 키워야 됩니다. 자기는 믿음 없어도 자식은 신앙 있게 하겠다는 그게 망한 거예요. 그게 자기 욕심에 망한 거예요.

믿음은 그냥 주는 게 아니고, 아무리 망했다, 강도다, 살인강도다 할지라도 미꾸라지처럼 찾아와서 “너는 내 백성이야.”하고 딱 말씀과 믿음과 성령과 함께 주시는 그 성령의 활동, 그 활동에 의해서 그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빈틈이 없어요. 하나님은 차질 없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와요. 자기 택한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살리는 거예요. 인간들의 조작이나 어떤 계획이나 프로그램, 거기에 하나님은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럼 그 학교에서 다음과 같은 교육을 시키겠습니까? 요한복음 12장 25절, 어떤 자에게 생명이 주어진다고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어떻게 돼요?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생명을 잃어버리죠. 그러면 그 학교에서 이 식대로 한다면? “아이비리그 가고 싶어요. 가고 싶어요.”하면, “그런 인간을 네가 미워해야 돼!” 이렇게 가르치겠어요? “네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면 네가 원하는 좋은 대학 하나님께서 다 보내주실 것이다. 이게 약속된 축복이다.” 이렇게 나올 거란 말이죠.

그러니 한번 생각해보세요. 모든 걸 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그 얕은 수를 간파 안하겠습니까? 다 간파하죠. 그래서 고맙게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좌절시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어때? 기쁘지 아니하냐?” “기쁩니다.” 이게 바로 성도잖아요.

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 내가 안 설쳐도 이미 모든 것은 확정되어 있고 정해졌다는 그 점을 다시 보게 만들어요. 그 점을 다시 보게 만든다고요.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모독하고 방해해왔는가를, 내 뜻대로 안 경우에만 다시 한번 새롭게 십자가의 그 사랑뿐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식해도 대박 나고 뭘 해도 잘되고 아이는 아이비리그 가면, 내가 결정하는 수법에 대해서 본인이 점점 의존하게 되죠. 그 방향은 바로 주님이 하신 일을 전부 시답잖게 여기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망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좀 살만하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번에는 시편 37편, 이번에는 36절을 보겠습니다.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그건 아까 이야기했죠. 그 다음 보세요.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찌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그러니까 순서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악인은 어떻게 돼요? 무대에서 퇴장하고, 퇴장을 해줘야, 예수님이 죽어야 부활한 예수님이 나타날 것 아닙니까? 내가 죽어야 내가 나타나요! 예수님 돌아가시고 난 뒤에 제자들은 고기 잡으러 갔잖아요. 아직도 그들은 자기가 자긴 줄 알았어요. 자기가 주도권이에요. 누구를 따라갈 필요 없어요.

그런데 그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냐고 할 때, 베드로가 고백하기를 사랑이 앞장서 있고 나는 그 사랑에 이끌린 새로운 관계에 들어갔음을 고백합니다. 항상 “너의 죄는 이미 다 용서했느니라.”하는 그 사랑이 어떤 시장통에 밀집된 군중 속이나 전쟁과 선거와 월드컵과 온갖 시사와 사건이 터지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미꾸라지가 자기 길 찾는 것처럼 뭐만 발견하면 돼요? 십자가의 사랑만, 그 꽁무니를 따라가면 되는 거예요. 참 쉽죠?

그림대회에서 대상받아도 그런 것 보지 마시고, 사랑만 따라가세요! 사랑만. 사랑 없이는 난 못 살아. 사랑만. 이렇게 못난 나도 사랑했다는 그것만 따라가면 되는 거예요. 가끔은 한 눈 팔고 엉뚱한 일에 기웃거리고 다 하죠. 다 해도 주께서 또 기웃거리는 그 일을 좌절시키죠. 그게 바로 말씀을 통해서 계속 우러나게 하는 겁니다.

시편 104편 보겠습니다. 시편 104편의 전체 내용이 뭐냐? 피조세계는 하나님이 관장하고 피조세계, 곧 지상에 있는 모든 것, 바다에 있는 생물들, 새와 고기 어느 것 하나 심지어 채소까지 주께서 친히 기르시는데 그 모든 것이 35절,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찌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그러니까 주께서 이 땅에 일을 하시는 이유가 악인을 의인과 같이 못하도록 구분 짓기 위해서 일하시고 있는 겁니다. 사랑 받을 자와 결코 사랑받지 않아야 될 개돼지 같은 인간과 그것을 완전히 둘로 쪼개고 나누는 일을, 지금도 주님께서 쉬지 않고 모든 일을 다 하십니다.

대전역 앞에 보면 성심당 빵집이 있잖아요. 빵집 있죠, 유명한 빵집. 빵집에서 줄을 서서 빵을 사더라도 불신자가 줄을 서서 빵 사는 태도와 신자가 빵 사는 태도를, 심지어 성심당까지 성령께서 찾아가서 그 마음을 움직인다니까요. 감사로. 항상 끝부분에 성도는 뭐가 나옵니까? 감사가 나와요. 고마움과 감사만 계속 됩니다. 어디서 빵을 사든 뭘 하든 간에 채소를 가꾸든 꽃을 가꾸든 간에 늘 그래요.

끝으로 성경 한 구절 더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 성심당 빵 살 때 주께서 물으시는 것은 간단해요. “이거 네가 사고 싶으냐? 아니면 네가 이 빵 사고 싶은 마음을 내가 너한테 줬느냐?” 그걸 묻죠, 좀 길지만. 처음엔 내가 사고 싶다 하다가 빵 사고 난 뒤에는 ‘이렇게 맛있는 것을 주께서 주셨구나.’ 이렇게 되죠. 그러면 되잖아요. 어디에도 사랑 없는 곳이 없다 이 말입니다.

자식이 말을 안 듣는다. 자식한테 아주 험한 소리를 했다. 그럼 주님이 그 현장에 찾아옵니다. “자식에게 험한 소리한 것은 내 뜻인가, 네 뜻인가?”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고맙습니다.” 이러면 끝날 문제에요.

‘다시는 자식에게 그런 말 안 하겠습니다.’ 이렇게 반성 같은 것 좀 하지 마세요. 모든 일이 주께서, 얼마나 내가 못난 자이며 내가 앞장서서 일한다는 것을 까발림으로써 주님이 그 현장에서, 그렇게 일어난 것조차도 주께서 일으킨 사랑의 사건인 것을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참 쉽죠?

그 기쁨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 이 대목이 상당히 어려운 대목이에요.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걸 흉내를 낼 수 없습니다. 흉내를. 도저히 이것은… 인간이 속해있는 인간과 인간 세계에서, 남들과 교류하는 세계에서 혼자 히죽히죽 웃는다는 것이요. 히죽히죽 웃으면서 남한테 이걸 설명할 길이 없어요. ‘나는 밭에 보물이 있어서 웃는다.’ 이렇게 설명하더라도 상대방은 히죽히죽 웃는 그 기쁨의 분량이 공유가 안 돼요.

왜냐하면, 이것은 좀 어려운 말인데 적어보겠어요, 어렵지만. ‘감추어진 것이 공개가 되어도 여전히 감추어졌다.’ 이 이야기입니다. 내가 알던 복음을 남한테 설명한다고 그 사람이 공유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말을 잘 해서 믿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건 고린도전서 2장 4절에서 분명히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어요. “내가 말한 것은 사람의 지혜로 말한 것이 아니고” 그 뒤에 나온 말이 뭐냐? “성령의 나타남으로 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그렇다면 그걸 역으로 보게 되면, 내가 어떤 농부인데 밭을 갈다가 뭔가 다른 느낌이 왔단 말이죠. 철커덕 금속 느낌이 왔어요. 뭐 이런 게 걸려서 내 농사를 망치나 해서 파보니까 거기 궤짝이 있고 궤짝 안에 보물이 들었습니다.

첫째, 예측이 안됐죠. 이건 불가능이에요. 이쯤 해서 뭐가 나올 건데, 이게 아니잖아요. 예측이 전혀 안되니까 예측이 누구를 짓밟느냐? 나의 자아의 선택과 결정과 행위를 이 예측이 나를 사정없이 짓밟아버려요. “너 쪼다 맞지? 네가 여기 보물 있는지 알았어, 몰랐어?”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너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것도 아님을, 새삼스럽게 보물이 나타남으로서 그게 확인되어지고 분명해진 거예요. ‘나의 예리한 촉으로…’ 촉 같은 소리하고 있네. 촉이 필요 없어요. 촉이 아무 소용없다니까요! 아무것도 아닌 자의 촉은 아무것도 아닌 촉이에요, 그거. 그거 의지하고 믿을 필요 없어요.

동시에 더 나가야 돼요. 내가 이 보물을 발견했다,가 아니라 보물이 나를 기다린 거예요. “이제 와? 이제 땅을 팠어?” 주도권이 보물에게 가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늘나라의 특성입니다.

포도원에 하루 일꾼을 삼았을 때 노동의 대가를 받을 거라고 해서 아침과 오후에 포도원을 갔잖아요. 그런데 진짜 포도원에 나를 취직시킨 것을 아는 사람은 마지막에 온, 퇴근 직전에 온 사람이 유일하게 알죠. “이것은 주께서 먼저 아셨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하셨죠.

“주께서 이걸 먼저 아셨습니다. 나는 그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 앞에서 내가 태어났다는 사건, 내가 취직하고 결혼했다는 사건, 내가 몸이 아프다는 사건은 십자가 사건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나한테 그러한 징조를 지금 발생시켰습니다.” 징조.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기쁨이죠. 이게 성령의 기쁨인데, 성령의 기쁨만 있으면요, 자동적으로 그 옆에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그것은 덤으로 같이 생기는 거예요, 덤으로. 이것 지키고 이것도 지키고 온유 지키는 것이 아니고. 기쁨만 있으면 자동적으로, 공작새가 꼬리를 펼치는 것처럼, 오므렸다가 보물이 등장하니까 알아서 활짝 펴버리는 거예요. 만세! 기쁨이 오는 거예요, 기쁨이.

그런데 이 보물의 특징은 어떻게 되느냐? 마태복음 13장에 가루 서말 나와요(33절).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은 밀가루가 소유합니까, 안 합니까? 소유되지 못하죠. 오히려 누룩이 밀가루를 점점 더 팽창시키죠. 하나님 나라가 오게 되면 하나님 나라가 알아서 나를, 기쁨이 유지되도록 형상을 만들어가요, 우리 인생을.

내가 보물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보물이 나를 가져요. 나는 보물에게 소유권을 빼앗겼습니다. 사나 죽으나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 되는 거니까.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온 말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다음에 뭡니까? “그 밭을 샀느니라”

그 밭을 샀다는 것은 소유됐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모든 소유를 다 팔았으니까 소유가 넘어간 거죠. 소유가 넘어갔어요. 내가 보물을 소유한 기쁨 같으면 이 보물을 잃을까봐 걱정이지만, 보물이 나를 소유했다면 그 보물이 있는 한 나는 계속해서 보물이 주는 그 때 그 기쁨을 소멸하지 않겠죠.

이게 바로 처음부터 이야기한 겁니다. “이미 확정된 보물이 하늘에 박혀있는데 저 별이 바로 너다. 그런데 네가 지금 땅 보며 살잖아. 내 언약으로 언약을 이루어서 네가 예전부터 있었던, 이미 있었던 구원받은 그 별이 되게 해줄게.”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 성경이 우리의 예상을 넘어서는, 성경 자체가 말씀 자체가 이제 보물로 다가오게 하옵소서. 성경을 보고 이해해서 기쁜 것이 아니고 말씀 자체가 이제는 기쁨이 되어서 말씀이 포함된 내용대로 우리가 움직여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이 새로운 기쁨으로 등장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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