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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열왕기하 4:38-41 / 독의 필수성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열왕기하

열왕기하 4:38-41 / 독의 필수성

정인순 2026. 4. 2. 11:40

음성 동영상 Youtube

 

독의 필수성 

 

이근호
2026년 4월 1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4:38-41

(4:38)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생도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4:39)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서 야등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외를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서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되 저희는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4:40) 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외쳐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사망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4:41) 엘리사가 가로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가로되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해독이 없어지니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자들은 선지생도와 엘리사입니다. 모두 선지자 그룹에 속하는 자들입니다. 나라가 아무리 우상의 힘에 흔들리더라도 선지자들만큼은 이스라엘의 핵심 요소를 품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핵심 요소란 바로 애굽에서 분리될 때, 이방민족에게는 없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없으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안에 어린 양의 피의 취지가 계속 유지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선지생도들도 먹을 게 없었습니다. 솥은 걸어놓고 그 내용물은 주변에서 뜯어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야생 참외 안에 독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인간들이 꾸역꾸역 먹고 살 려고 하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인간들은 살 이유도 모르면서 무작정 살아남으려고 합니다. 곧 마치 살아야 되는 것이 인간의 고유 권한이고 권리라고 여깁니다. 이방민족에게는 이것이 당연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런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구원 약속‘을 유지시켜야 할 책무를 지닌 민족입니다. 자신들이 죽든 살든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약속이 약속답게 드러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될 민족입니다. 약속의 땅은 율법대로 지켜지면 젖과 꿀이 흐르고 풍요한 땅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흉년이 들었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약속을 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 그룹은 이스라엘의 본질을 상실하면 아니됩니다. 이스라엘의 본질은 이방민족들처럼 무조건 자신이 살아남아야 하는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의 양의 피‘의 취지를 살리는 겁니다. 곧 ’죽음의 당연함‘ 바탕 위에 하나님의 자비로 건짐을 받는 과정을 유지되어야 합니다.

국에 독에 들었으니 하나님 사람인 엘리사가 반드시 자신들을 도와주어야 하나는 원칙은 통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독이 없이 수월하게 맛있는 급식이 되는 쪽으로 왜 하나님께서 이끌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누가 더 나쁘고 누가 덜 나쁘다가 성립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모든 독의 요소를 거쳐야 합니다.

즉 각자 자신의 취사도구에 음식을 해먹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솥에서 끓인 국을 각자 떠 먹어야 하는데 이로 인해 모든 선지생도들이 독을 고유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 겁니다. 식물성 음식에까지 독이 퍼져있습니다. 음식에 독이 섞인 겁니다. 이 독을 해결하는 방식이 바로 엘리사가 준비한 가루입니다.

여기서 가루의 효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루의 보편성이 중요합니다. 어떤 가루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독의 보편성=가루의 보편성‘으로 만나게 됩니다. 특정 인물에게 집중되든지 누구에게 효과를 독점되는 것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이 독을 먹게 되었다는 보편적 상황과 관련있습니다.

인간은 왜 먹어야 합니까? 그것은 ’먹음‘을 통해서 인간의 운명이 결정되는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식물성 음식물만 허용이 된다는 말은 인간은 결코 자신의 생명을 본인이 유지하는 차원에서 마음대로 먹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 1:29) 이런 식물성만 먹어야 하는 인간에게 그 식물성 먹을 거리 중에서 ’먹지 말아야 하고 먹으면 죽는 식물성 음식‘이 에덴동산 한 가운데 놓이게 했습니다.

즉 처음부터 인간은 언제든지 독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고려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이것이 ’독의 필수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때 전반적인 대홍수로 세상을 심판했습니다. 이때 표적처럼 죽어야 했던 대상이 있는데 그것들이 바로 땅에서 호흡으로 살아가는 동물들이었습니다. (창 7:21-22)

그리고 홍수 끝나고 난 뒤에는 인간에게 동물성 음식이 허용되었는데 이는 동물 안에서 ’물 심판의 취지‘를 품은 조건이라서 인간은 피를 먹지 못한 채 동물을 음식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기본은 여전히 식물성 음식입니다. 이처럼 악은 당연히 품고 있는 인간의 생존과 일생이기에 이 독을 전제로 해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마 20:21-22)

즉 예수님께서 먼저 마신 바로 그 ‘쓴 잔’‘을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심판성이 필수적으로 함유하는 구원의 잔을 마신 자가 되는 겁니다. ’가루‘란 철저하게 사적이고 개별적인 식사용을 배제하는 모양입니다. 레위기 2:1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식물성 음식도 ’가루‘로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이 식물성 가루에는 기름과 유황이 들어가지만 특히 인간들이 먹기 좋게 하는 누룩(이스트)와 꿀을 들어가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드실 하나님의 식사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소제(식물성 제물)에는 소금이 꼭 들어가야 합니다. 소금은 제물의 시간을 나타나는 첨가물입니다. 영원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대하 13:5)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먹었던 양식은 식물성이었고 그 음식은 지상에 그 어느 누구도 만들 수 없었습니다.(출 16:16-18)

즉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는 타인에 대해서 자아의 가치를 단독적으로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성도는 이 보편적 은혜를 세상을 전하는 자입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일반적인 악 위에서 사는 저희들이 우리들 힘이 아닌 방식으로 구워내 주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오용익

9강-열왕기하 4장 38-41절(독의 필수성) 26040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4장 38절에서 41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4:38-41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생도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서 야등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 외를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서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되 저희는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외쳐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사망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엘리사가 가로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가로되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해독이 없어지니라.”

이 땅이 어떤 땅이냐 하면 이스라엘 땅, 약속의 땅입니다. 그 땅은 보통 땅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그 안에 들어옴으로써 그 땅에서는 ‘약속의 땅’의 기능이 작용하게 돼요. 다 같은 인간인데 그 땅에 이스라엘 말고 다른 사람이 살게 되면 약속이 없고, 이스라엘은 뭔데 이스라엘이 살 때만 약속이 피어나고 나타나는 그 이유가 뭐냐?

대체 이스라엘 민족 안에 어떤 요소가 들어있느냐? 그것부터 우리가 정립해야 하겠지요. 이스라엘 민족의 특징은 뭐냐? 유월절의 피가 없었으면 굳이 애굽에서 나올 이유가 없는 자들이에요. 그들이 애굽에서 나가겠다고 무슨 운동을 하거나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하자’라고 했던 사람은 모세 한 사람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힘들지만 이 애굽 외에 우리가 살 곳이 없음’을 다 같이 분명히 했던 사람들이에요.

그들이 애굽에서 사는 것은 정상이고, 애굽에서 그들이 나온다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 되고, 비정상이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 덕분에 애굽에서 나왔던 거예요.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이 되려면 어떤 취지가 살아 있어야 하느냐?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그 땅에서 계속 유효하게 적용이 될 때만 그들은 이스라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고, 그 땅은 약속의 땅이 되는 겁니다.

그 약속의 땅은 흉년이 들면 안 돼요. 그런데 오늘 본문 열왕기상 4장 38절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라고 되어 있어요. 흉년이 들었으니 일단 그 땅에서 살 수 없다는 뜻이고요, 약속의 민족이든 아니든 먹을 것이 없어 다 굶어 죽게 생겼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율법을 어기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이것은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아 죽게 되어 있어요.

레위기나 신명기에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면 이 땅에서 흉년들어 죽게 될 것이다, 머리가 되지 못하고 꼬리가 될 것이다, 저주가 너희를 덮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했잖아요. 그래서 흉년이 들었으면, 먹을 게 없어서 죽게 되었으면 그냥 죽으면 돼요.

본문에서 선지 생도가 국 끓이는데 야생 참외를 넣어서 끓인 모양이에요. 39절에 ‘들 외’라고 되어 있어요. 야생 참외를 넣고 국을 끓였어요. 그러면 맛있게 먹지 왜 안 먹지요? 그 안에 독(毒)이 있다는 거예요. 독이 들었으면 독이 든 그 국을 먹고 다 같이 집단으로 죽으면 되잖아요. 그걸 왜 안 먹겠다고 버티는 겁니까?

그리고 더 희한한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사망의 독이 있나이다”(왕상 4:30). 뭐 어쩌라고요?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독이 들어있습니다.” “독이 들어있어? 그러면 그냥 먹고 죽어!” 왜 그들은 독을 먹고 죽을 생각이 없을까요? 흉년이 들었다는 말은 율법을 위반했고 우상을 섬겼다는 증거인데 약속의 땅답지 않은, 젖과 꿀이 흐르지 않는 요소가 나왔다는 것은 자기에게 문제가 있고, 문제가 있으면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는 중이고, 그러면 율법을 살리기 위해서 흔쾌히 저주받아야 마땅한 거지요.

설교 초반에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 대목을 보면서 보는 사람 족족 이렇게 생각해요.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는 사랑의 선지자가 되어서 국솥에 독이 있을 때 그것을 참지 못하고 가루를 풀어서 해독을 시켜서 앞으로 말씀을 전할 선지 생도들을 살렸으니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고 사랑입니까? 그러니 우리도 앞으로 인생 살면서 힘들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절대로 부정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믿고 기도하면 엘리사의 놀라운 기적이 여러분의 가정에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믿을찌어다!”

은근히 교인들이 그런 설교를 고대하고 있는 거예요. ‘먹다가 독이 나왔다고? 아마 먹고 죽으라고 독이 나왔겠지.’ 왜 이런 생각을 못 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중보자를 도와줘요.

수십 년 교회 다니고 4대, 5대째 교회 다녀도 에베소서 1장 10-12절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은, 예수님을 도와줘요. 왜? 예수님 중심으로 통일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중보자를 제껴버려요. 그리고는 날 도와달라는 거예요, 날, 날 도와달라는 겁니다. 집에서 자식이 애를 먹이니까 날 도와달라는 거예요. 직장에서 쫓겨나게 생겼으니 날 도와달래요. 말기 암이니까 날 도와달라고.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오늘 본문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선지 생도들이 국 솥에 독이 든 것을 해독해 줬잖아. 이것이 하나님의 정신이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목자로서 교회 양들이 어려울 때 중보 기도 해서 그들의 인생 가운데 있는 독들을 해독시키는 것이 할 일이다.’ 그러니까 목사한테 잘하라는 거예요.

아, 도대체 교회를 수십 년 다녀도 그 사고방식이 바뀔 생각을 안 해요. 하나님이 왜 우리를 도와줘야 합니까? 그것부터 좀 생각을 해 보세요. 죄는 죄대로 다 지었는데 왜 도와요? 독을 넣어서 죽이는 것이 마땅하지요. “우리는 독을 마시는 것이 합당하니이다!” 그래야 해요.

오늘 본문에서 솥에 독이 있었던 것은 바로 보편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떤 보편성인가? 어느 누구도 이 독에서 예외로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독 같은 것은 나에게 오면 안 돼. 왜? 나는 특별하니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집단으로 급식하는 그 단체가 뭐냐 하면, 선지 생도들이에요.

선지 생도라는 이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이 뭐냐? 이스라엘에 품어져 있는 하나님의 일관된 원칙이 있어요. 이스라엘은 유월절의 피로 애굽에서 떠났다고 했지요. 그게 원칙이라 했지요. 선지 생도는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그 원칙, 언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언약적 본질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약적 본질이 현실을 율법에 의해서 계속 만들어 가고 있으니, 이스라엘이 어떻게 타락하고 망하고 범죄하든 간에 선지자만큼은 이스라엘의 본질을 유지시켜야 하고 간직해야 합니다.

그게 선지 생도, 선지자들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선지자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무효가 될 수 없는 사실을 전하는 자, 인간의 어떤 노력에도 무효가 되지 않는 내용을 전하는 자, 이들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선지 생도는 선지자 되기 전에 양성되는 학생들이잖아요. 그러면 선지 생도 그들이 어느 수준, 레벨까지 와야 하느냐 하면, 엘리사의 레벨로 건너와야 해요.

그러면 선지 생도들이 성경 신학하고 조직신학 한다고 해서 엘리사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필수적으로 뭘 집어넣느냐? 독을 마시고 다 죽어버리는 그러한 체험을 해줘야 엘리사로 건너올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왔다고 했고,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는 요소라면 그 요소에서 누락이 되면 그것은 독을 먹든 마약을 하든 뭘 먹든 죽어버려야 해요.

여기서 선지 생도에게 독이 있는 국을 먹게 했다는 겁니다. 국을 끓여서 먹으라는 그 이야기는 엘리사 쪽에서 먼저 했어요.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생도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왕하 4:38).

엘리사가 몰래 독을 푼 게 아니고요, 그냥 국을 끓이라고 했어요. 국거리를 뜯으러 들에 간 것은 어떤 선지 생도였어요. 어떤 사람은 들에서 가져온 것이 야생 호박이라 하는데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쨌든 들에 가서 야생 참외를 가져와서 국 솥에 넣으니까 선지 생도들이 예상도 못 한 일이 일어난 거예요.

엘리사는 하나님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들은 엘리사 밑의 문하생들이니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서 우리를 엘리사처럼 키워줄 것이라는 생각만 했지, 어느 누구도 엘리사가 우리를 죽일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본 사람이 없어요. 국 솥에 독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경하고 생소하게, 예상 밖 사태라고 낙담하게 되는 겁니다.

독이 있다. 엘리사의 뜻은 이거예요. ‘독이 너희에게 있지 아니하면 너희는 나에게 올 수 없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그래요. 모든 인간은 이미 독을 품고 있는 인간들이에요.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요. 이스라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나온 게 아니고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써 나왔다는 말은 뭐냐? 왜 피가 필요할까요?

이 이야기를 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한데 제가 그것을 긴 시간 들여서 해야 해요. 독을 먼저 마셔야 하고 그다음에 해독작용을 통해서 천국 가야 한다는 그 절차를 우리가 모르게 되면 이런 오해를 할 수밖에 없어요. ‘왜 병 주고 약 주는가? 선지 생도 같으면 신체적으로 하나님이 알아서 잘 보호해 줘야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인데 왜 하나님께서 죽으라고 독을 풀었는가?’

식물에 독이 들어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흉년이 들어서 황폐하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황폐한 이유가 뭐냐? 그것은 범죄했기에 율법에 의해서 황폐할 수밖에 없어서 황폐해진 거예요. 가뭄이 들 수밖에 없어서 가뭄이 든 거예요. 기름값이 오를 수밖에 없어서 기름값이 오르는 겁니다. 호르무즈고 뭐고 간에 이 세상 사는 것이 빡빡해요.

왜? 독이니까. 왜 그 독을 마셔야 해요? 네 안에 죄가 들어 있으니까, 악이 들어있으니까 하나님의 대처로 악이 있는 곳에 저주가 있는 그것은 너무나 마땅한 것인데 나만은 거기서 빼달라는 식의 이기적 발상은 안 됩니다. 그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서 다시 정리해 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선지 생도가 솥을 걸고 야생에서 뜯은 식물을 넣고 국을 끓여 먹었습니다. 질문을 이렇게 해야 해요. “왜 먹는가?” 답변은 “사람이 먹어야 살지.” “먹어야 산다고 누가 그렇게 이야기하던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것, 그 당연한 게 당연한 것이 아니에요. 당연하게 여기는 그 속에 우리가 놓쳐버린 하나님의 일관된 구원의 뜻이 담겨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계속 살려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내가 사는 것이 과연 당연한 겁니까? 음주 운전으로 난데없이 사람이 죽는 그것은 안 된다고 하면서 그게 꼭 나일 필요는 없다고, 나를 빼달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나 당연한 거고 우리의 이기주의지요.

창세기 1장 29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식물성입니다. 식물성 음식을 줄 때 그 식물성 음식 안에 장차 올 유월절 어린양의 피, 그리고 십자가의 피가 그 안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아담은 몰랐고 하와도 몰랐어요.

그리고 오늘날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는 우리도 그걸 단지 음식으로나 보지 그 안에 하나님의 십자가의 뜻이 담겼다는 식으로 음식을 대하는 사람이 누가 있던가요? 있을 수는 있겠지만 거의 드물지요. 인간은 처음부터 동물성 음식을 못 먹게 되어 있었어요. 식물성 음식을 먹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창세기 2장 5-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여기에 경작할 사람이 없어요. 들에 초목도 없었고 밭에 채소도 없었고 안개만 올라왔지요. 그런데 사람을 만드시고 뭘 줬느냐 하면 먹을 수 있는 것을 줬는데 먹을 수 있는 그게 뭐냐?
창세기 2장 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에덴동산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라고 되어 있어요. 에덴동산에서 뱀 잡아먹고, 염소 잡아먹고 그런 것은 없어요. 에덴동산에서는 식물성 음식을 먹었는데 거기에 뭘 섞어 넣었는가 하면,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섞어 넣은 거예요.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왜 섞어 넣었습니까?

아담은 몰랐지요. 하와도 몰랐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걸 알려주십니다. 마태복음 20장 21-2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제자들 엄마가 와서 예수님께 하는 말이 “우리 두 아들을 주의 좌우편에 앉게 해 주세요”라고 했어요. 내 아들만은 개체적으로 특별하게 대우해달라는 말이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들이 내게 원하는 것과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것이 지금 안 맞다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뭐냐?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이 말씀이 중요해요. “너희가 고난의 잔을 마시라”가 아니라 먼저 주님부터 마시는 그 잔을 마셔야지, 스스로 알아서 고생의 잔을 마시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마셨던 그 잔을 마셔야 해요.

창세기 1, 2장에서 뭘 먹게 했느냐? 각종 아름다운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셨어요. 식물성을 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주의 사항을 줬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 실과, 식물성이에요, 동물이 아니에요, 그것은 먹지 말라고 했어요. 그 이후에 아담과 하와가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따먹었을 때 거기에 해독하는 방법이 뭐냐?

인간에게 독이 있을 때 오늘 본문에서 선지 생도가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사망의 독이 있나이다”(왕상 4:40). 이 말은 뭐냐? ‘이 독을 빼낼 수 있는 재주 있는 위인은 우리 생도들 가운데는 없나이다’의 고백을 하나님께서 선지 생도의 입에서 자진해서 고백하게 만들어요. 쉽게 말해서 이 본문은 뭘 말하는가 하면, ‘하나님이여, 내 안에 있으면서 저주를 유발하는 악을 나에게서 빼낼 수가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고백할 때 그 답변이 “그래? 죄를 지었으니 지옥에나 가라.” 이렇게 해도 선지 생도들은 “알겠습니다.” 할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여, 저에게는 제가 해결할 수 없는 독한 악이 있습니다.” “그래? 알았다. 지옥에 보내주마.” 하나님이 이렇게 처리해도 우리는 어쩔 수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선지 생도들이에요. 하나님의 일관된 말씀을 전하는 선지 생도들입니다. 선지 생도들의 그 당시 모델은 그들 앞에 있는 엘리사가 모델이에요. 그러니까 “독이 있나이다” 하는 것은 ‘나쁜 생도는 독을 더 마시고 착한 생도는 독 덜 마신다’가 아니고 보편적으로 어느 누구도 독에서 벗어난 선지 생도는 하나도 없는 겁니다.

왜? 각자 자기 국그릇에 독을 푼 것이 아니고 솥이니까요, 솥입니다. 이것은 단체급식이거든요. 단체 급식하는 국 통에 독이 들어 있었으니까 착해도 독이 들어 있는 국이고, 못된 네 국도 독이 든 국이에요. 제 말을 듣는 여러분의 해결점은 뭡니까? 해결점은 엘리사가 가루를 주는데 이 가루가 밀가루인지 아니면 보릿가루인지, 어떤 효험 있는 것들, 아미노산이나 오메가3, 어떤 영양분이 함유된 가루 같은 것을 염두에 두지 마세요. 무슨 해독 주스인 줄 압니까?

여기서 ‘가루’는 어느 누구도 독점할 수 없고, 나에게 집중을 요구할 수 없다는 뜻이 가루입니다. 왜? 독이 보편적인 것처럼 가루도 보편적이에요. “그 가루 나한테 두 번 뿌려주세요.” 이럴 수는 없어요. “저에게 가루가 많이 뿌려지기를 원합니다.” 안 돼요. 여기서 가루의 성분을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루는 입자가 아니에요. 입자가 부서지고 뭉개지고 해체된 것이 가루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것은,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독과 보편적으로 해독이 되는 가루를 연결시키는 그 기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보편성을 가로막는 것이 누구냐? ‘나만 특별히 봐주세요’라는 자기 자존심, 자기 가치 이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피의 보편성으로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상관없이 피 발린 사람은 애굽에 그대로 있지 않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왔다는 그 보편성을 반복시키는 기적을 엘리사가 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제가 강조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독이 없으면 해독의 의미도 도달하지 못합니다. 독이 없으면 해독의 지점까지 올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독은 나만 나쁘다? 아닙니다. 자꾸 본인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본인을 특별히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너나 나나 나쁜 데서 다 태어났기 때문에,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만 쓰레기인가?’ 아니에요. 모두 다 독이 들어 있어요. 그 보편성을 알아야 선지 생도 답습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흉년이 든 이스라엘에 있어서 해결점은 선지자가 살아나야 해요, 선지자가. 선지자만이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보편성을 이스라엘의 본질로서 유지를 해줘야 이스라엘은 그 선지자 가운데서 살아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가루에 대해서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어디까지 스며들어야 하느냐? 레위기 2장 2절에서 하나님께 제사할 때 하나님께서 어떤 음식을 받는다는 것, 하나님께서 음식 잡수실 때 어떤 식의 음식을 받느냐를 소개한 것이 레위기예요. ‘레위기에 들어 있는 모든 제물은 일단 하나님의 음식이 되고, 하나님의 음식이 된 상태에서 그다음에 너희도 내가 먹던 것을 먹으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이 먹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먹는 것을 분배받을 때, 공유될 때 하나님이 먹는 것은 영생이잖아요, 그 영생을 누릴 수가 있는 겁니다. 레위기 2장 2절에 하나님의 소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소제는 식물성입니다. 피라는 것은 동물성이지요. 창세기 9장 3-4절에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이미 심판의 요소를 갖고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동물을 음식으로 먹도록 하셨습니다. 참고로 더 이야기하면 창세기 7장 21-22절에 보면 “땅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육지에서 코로 숨 쉬는 거, 동물은 다 죽여 버렸어요. 노아가 방주 안에 있는 비둘기를 띄웠을 때 비둘기가 지렁이를 물고 온 게 아닙니다. 뭐냐 하면 잎사귀, 식물 잎사귀를 물고 왔잖아요(창 8:11). 감람나무 잎사귀, 새 잎사귀를 물고 왔거든요. 이게 기본이에요. 노아 홍수 때 동물을 다 죽였잖아요.

“동물은 다 죽어 마땅하다. 원래 식물만 먹던 너희로 돌아가는 게 원칙이야. 그게 심판의 취지야”라고 알려주면서 왜 동물을 먹을 수 있도록 허용했느냐 하면, 호흡이 있는 동물들은 노아 심판 때 심판받아 마땅했음의 증거물로써 그 증거물이 그들의 음식에 스며들고 가미가 되고 추가가 되는 거예요.

추가되면서 뭐 먹지 마라? 피는 먹지 말라고 했단 말이죠. 그중 하나가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이거든요. 그러니까 식물, 그다음에 동물, 그다음에 인간이 하나님을 죽이잖아요.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이 나중에 보니까 하나님이었어요, 하나님. 그러니까 순서를 밟을 때 반드시 독을, 너희들의 죄악, 보편적인 죄악과 독을 거기다가 삽입시키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생을 맛보는 코스를 따라오게 하신 겁니다.

레위기 2장 1절에서 소제를 하는데,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가루를 내는 거예요, 가루를. 어떤 것도 덩어리가 지면 안 되고 입자 노릇을 하면 안 돼요. 모든 걸 가루로 함으로써 개인적인 특성 같은 것, 개성 같은 것이 의미가 없음을 제물에다가 나타내라, 표현해라 이 말이에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먹는 음식에는 어떤 요소가 있느냐 하면, 2장 1절을 계속 보면, 여기에 “유황과 기름”, 소제의 예물, 그 가루에 기름과 유황을 반드시 섞어요. 기름과 유황, 기름이라는 것은 분리됨, 차이 남, 독특함, 특별함의 의미입니다. ‘기름 부음’이라고 하는 것은 레벨이 다른 차원에 속한다는 의미예요.

유황은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향기로운 거, 그걸 섞어서 드리면 일단 하나님께서 그 음식을 먼저 시식하시고 기뻐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는 음식을 같이 할당받는 식으로 그 하나님의 음식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그들은 영생의 떡, 영생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한 식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그 절차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레위기 2장 11절에 보면,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찌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찌니라.”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뭘 넣지 말라고요? 여기서 방해되는 게 있다는 거예요. 뭐냐 하면, “누룩과 꿀을 섞지 마라.”

누룩과 꿀은요 누구 음식용이냐 하면, 하나님의 용도가 아니에요. 인간이 맛있게 음식을 먹기 위해서, 그러니까 빵이 몰랑몰랑하고 맛있게 잘 씹히도록 누룩, 이스트yeast 집어넣고 꿀 넣어서 맛있게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은, 음식은 하나님께 어떤 요소가 있을 때 방해된다는 말이냐 하면, 인간이 ‘자기 즐거운 용도로 먹을 것을 찾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음식에 가미되어서 나오는 독소 같은 요소라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소제에다 뭘 섞느냐? 레위기 2장 13절에 보면,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소금과 식물성 제물과의 교합. 소금을 여기다 넣는 이유는, 소금은 바로 소제의 예물, 식물성 번제 안의 이것이 영생까지 이어진다는 시간적 요소를 나타내는 첨가물이 소금이라는 의미에요.

역대하 13장 5절에 그게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 이것은 시간 요소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지금 이야기의 시작이 ‘우리 인간이 먹을 게 없어서 먹어야 하겠습니다’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네가 뭔데 왜 살려고 먹느냐?”부터 문제 삼아요.

“뭐야? 너, 왜 먹으려고 하는데?”
“흉년이 들었어요.”
“흉년? 흉년, 왜 들었지? 흉년이 왜 들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

지금 북이스라엘이 다 망한 거예요. 전부 다 망했을 때 ‘북이스라엘은 망해도 진짜배기, 그 알짜배기 이스라엘은 선지자 네가 담당해야’ 돼요. 그 선지자들이 뭘 담당하는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했던 그 독소, 인간의 근원적인 그 죄, 악과 죄를 해결하는 그 요소가 이스라엘 언약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선지자 너희만큼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걸 알고 있어야 돼요.

예를 들면 광야 생활 때, 이스라엘이 먹었던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역시 보편성이에요. 뭐냐? ‘만나’였습니다. 만나 레시피가 어떻게 되죠? 만나를 잘 만드는 셰프가 누굽니까? 모세입니까? 만나를 어떻게 만드는지를, 이 세상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다만 그들은 “먹었다, 나는 만나 먹었다.” 이것으로 끝나지, ‘어떻게 이 맛이 나지?’ 이것은, 인간에게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어야 돼요.

출애굽기 16장 16-20절에서 그 만나의 특징이 뭐냐 하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이 만나의 레시피, 만나의 성분이 도대체 어떤 성분이기에 아침까지 두면 벌레 생기고, 냄새가 나는데 이런 요소를 인간의 요리사가 이걸 첨가할 수 있습니까? 너무나 이질적이죠. 너무나 이질적이에요. 지금 이 광야의 이스라엘은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을 판이에요. 그럴 때 이스라엘은 자꾸 먹을 걸 달라고 합니다. 고기 먹고 싶다, 참외 먹고 싶다, 수박 먹고 싶다, 정력에 좋은 마늘을 먹고 싶다…, 자꾸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 자체가 사고방식이 잘못된 거예요.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이미 죽은 집합체예요. 그 집합체가 어린 양 ‘피’ 때문에 사는 특이한 집합체이기 때문에 단독적으로 ‘우리 살아야 되겠다’라는 말을 하면 안 돼요. 어린 양의 피가 어떻게 개인의 자질이나 인품과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제공되는지를 만나가 보편적으로 제공되게 함으로써, 그 안에 있는 내가 ‘이 중에서 내가 제일 잘 났지’라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제가 아까 분명히 했습니다. 우리들이 그냥 자신의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게 아니고, ‘예수님부터 먼저 먹었던 그 잔’을 우리가 먹는 거예요. ‘상위 30%는 전쟁민생지원금 못 받고, 하위 70%는 10만 원부터 60만 원까지 받는다.’ 이것은 보편성 아니에요, 아닙니다. ‘받을 만해서 받는다.’ 인간에게 그런 게 없습니다.

지금 이 선지 생도들이, ‘우리는 선지자니까 하나님이 살려 주겠지.’ 아니, 아니, 안 돼! 그거 안 돼요. 그들은 처음부터,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야 해요. 하나님이 살려주시는데 그 안에 뭐가 들었느냐? 악한 것을 해독시키는 요소가 핵심으로서 들어 있는 음식을 너희가 먹어서, 너희가 먹던 음식의 그 취지, 하나님의 일관된 취지를 너희가 말씀으로 외쳐야 할 사명, 완전히 바알로 넘어간 이 북이스라엘에서 선지자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보편적인 거예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이 죄지었음에, 구원받는 것도 예수님이 가졌던 그 의가 너, 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 의만, 그 의만 영생으로 해결됩니다. 그 영생으로 해결될 때 예수님이 누군가를 알아야 돼요. 예수님은 바로 마땅히 우리가 먹어야 될 그 저주의 잔을 먼저 마신 분이에요.

따라서 하나님 보고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요. ‘주님께서 주신 쓴잔을 저희들이 먹게 하옵소서.’ 이렇게 돼야죠. 이것이 신약에 보면 성령의 은사입니다, 성령의 은사, 성령은 우리가 달라고 해서 오신 게 아니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생 얻을 자에게만 성령이 오십니다. 나에게 성령이 안 옵니다. ‘주님의 몸’이라는 조건하에 성령이 오십니다.

따라서 성령이 오는 순간 나는 날아가 버리죠. 왜? 우리는 가루가 돼야 하니까. 무슨 가루? 착한 가루? 나쁜 가루? 모래가루, 밀가루가 아니에요. 가루는 그냥 가루예요. 가루라고 하는 것은 이미 악이 완전히 퍼져 있다는, 보편적으로 악은 너나 나나 누구에게나 다 퍼져 있다는 것, 가루 안에 그 취지가 담겨 있는 것이 바로 해독 가루예요.

바로 소제를 통해서 소금이 있고, 그 소금이 퍼지듯이 그 소금이 누구한테나 각각 있듯이, ‘나는 어떻고 너는 어떻고’ 하는 그러한 자기중심적인 소리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이 왔던 신약에서는, 이 소금과 관련해서 이 보편성과 관련해서 어떤 말씀이 나오는가?

골로새서 4장 6절에 이 말씀 나옵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소금이라는 것이 퍼지듯이, “제가 하는 말은요, 제 뜻은 이렇다는 제 사견이 아니라 주의 은혜에 밀려서 은혜가 쏟아내는 대로, 저도 악한 자인데 예수님의 그 희생에 입각해서, 예수님이 마신 쓴 잔에 의해서 제가 이렇게 예수님 이야기를 하게 되었네요”라는 그 취지로, 누구를 만나든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영원한 소금 언약, 소금이 고르게 퍼지듯이 내 주장을 빼고 ‘주님의 뜻은 이것입니다’라고 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도와줘야 한다고 마땅히 생각하는 그것이 악인 것을, 하나님을 오해한 것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우리 편이 아니고 ‘예수님 편’이라는 이 마땅하고 당연한 것을 당연시하지 못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지금부터는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 중심으로 우리가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