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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34강 / 신명기 15:11(율법 속의 정보) / 250929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신명기

34강 / 신명기 15:11(율법 속의 정보) / 250929

정인순 2025. 9. 29. 17:52

예비강의 음성
음성1

예비 강의 동영상
동영상1

 

녹취:이하림

대전강의 20250929 예비 강의-이 근호 목사


과거와 현재(실선)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데, 미래(점선)는 아직 오지 않았죠. 이미 우리는 지나간 거고.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이렇게 보잖아요. 내 10대, 20대, 내 자식이 있는 그 시대. 그 시대에 나이 많은 사람도 있고 젊은 사람도 있고 어린아이도 있단 말이죠.

이럴 때 뭐가 궁금하냐 하면 70대가 보는 현재, 40대가 보는 현재, 10대가 보는 현재, 4살이 보는 현재에서 ‘걔들은 어떤 세상 현실관을 갖고 있을까?’ 이게 궁금할 거 아니겠습니까. 이게 궁금한 거예요. 70대가 이야기하는데 20대가 안 받아들여요. 심지어 40대는 ‘뭐 조금 알겠다.’ 이렇게 되는데.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게 분명히 진리고 옳은데도. 진리고 옳으면 받아줘야 되지 않느냐 하는 거죠.

예를 들어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3+5=8이잖아요. 그런데 유치원 애들이 그걸 받는 것과 10살 때 받는 것과 30살, 40, 50, 70살이 받는 게 다 달라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3 더하기 5는 어제도 8이고 40대도 8이고 50대도 8 맞는데. “3 더하기 5는 얼마냐?” “8.” “뭐 느낀 거 없어?” “느낀 거 없는데?” 맞는데 느낀 게 없는 거예요. 의미가 충족되지 않는 거예요.

자, 어떤 식으로 그 이유를 밝혀내느냐? 밝혀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좀 난해하더라도 동영상 찍었으니까 보면 돼요. 과거, 현재, 미래가 실제로 있는 게 아니고 내 의식 속에서 이것이 나온 거예요. 현재, 과거, 미래. 내 의식 속에서 나오다 보니까 동일하게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하면 젊은 사람들은 ‘또 내 때, 내 때’ 맨날 그 소리한다 하거든요.

과거, 현재, 미래는 시간 따라서 이 구조와 내용이 바뀝니다. 바뀌어요. 바뀐다는 말은 같은 70대라도 다 다르다는 거예요. 개인마다 지문이 다르듯이 개인이 느끼는 시간성, 의식 속의 시간성은 사람이 백이면 백 명마다 다 달라요. 다 다릅니다.

그러면 그 다른 이유를 설명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 보기에는 2025년도에 사는 사람이 똑같은 사건과 생각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 하는데 그 마땅하다는 생각 자체도 잘못이고, 같지 않아요.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밝히느냐? 누구 하나를 딱 꼬집어요. 10대, 20대, 50대 중에서 아무나, 특별히 샘플 되는 인간을 하나 딱 잡습니다. 잡으면 이 사람이 생각하는 과거, 현재, 미래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과거, 현재를 나타내는 실선 밑에서 나와요. 선 밑에서 주어지는 겁니다. 이게 ‘기억’이라는 거예요.

샘플 되는 인간이 만약에 세 살 아이다. 세 살 아이가 남들 보기에는 “아휴, 쟤 인생 뭐 얼마나 살았다고.” 하지만 걔는 촘촘하게 살았어요. 아주 지독하게 살았고 충실하게 살았어요, 삼 년 동안. 삼 년 동안 힘들게 산 거예요. ‘힘들다, 촘촘하다,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본인의 기억과 사건에서 오는 체험이 기억이 되면서 이 기억이 나를 만들어요. 세 살짜리 자아를 만들어요.

그러니까 세 살짜리 자아, 나라는 것은 복합자아입니다. 강의에서 얼마 전에 했죠. 복합자아. 자아라 하는 것은 결과물이지, 자아가 있어서 뭘 담는 게 아니에요. 자아라 하는 것은 사건의 열매에요. 자기가 살아오면서 느꼈던 모든 사건들이 내 속에 들어와서 기억을 유발하고 그 기억의 다발이 나입니다.

69세의 나하고 70세의 내가 달라요. 똑같은 시대를 살아도 대전에 살던 나하고 대구에 살던 내가 달라요. 뭐가 다르기 때문에? 기억이 다르기 때문에. 뭐 같은 공간이니까 동일한 기억이 아니겠는가? 아닙니다. 아닌 이유가 뭐냐? 과거, 현재, 미래의 선 아래에 선을 하나 더 그을게요. 현재, 과거, 미래를 이해하는 그 바로 밑에, 맨홀이라 하면 맨홀 바로 밑 가까운 층에 기억이 있잖아요. 그럼 가까운 층의 기억은 어디서 생기느냐? 더 밑의 기억에서 이(가까운 층의) 기억을 조작하게 되어 있어요. 더 깊은 층에서.

이렇게 하면 이해하기 힘들죠? 그럼 오랜만에 길에서 여고 동창생을 만났다 칩시다. 갑자기 이름이 생각 안 나는데 어디서 본 듯한 얼굴. 조금 있으니까 아, 기억이 났어요. 반갑죠. 굉장히 반가워요. 반가운데 그 반가움으로 “야, 우리 좀 이야기하다 가자. 어떻게 지냈어? 여기 가까운 카페 있네?”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해본다고요. 그럼 넉넉잡아서 세 시간동안 이야기했다 칩시다. 그 세 시간동안 둘다 과거 여고 시절 때를 회상하면서 생각을 하죠.

그럼 한 사람 더 그려 넣어야죠. 친구 만났으니까 친구 하나 더하겠습니다. 둘다 내뱉는 언어가 있어요. 기억이죠. 기억에서 나오는 언어가 어떻게 되는가? 나는 방금의 사건, 친구 만난 사건+내가 그동안 살아온 사건을 합쳐서 이야기하죠. 그러면 이 친구는? 친구 만난 사건+자신이 살아온 사건 입장에서 말을 주고받아요. 말을.

그러니까 “반갑다, 친구야.” 하면서 되게 할 말 많은데 여기서 말하다 보면 둘다 결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결이 다르면 카페에서 세 시간으로도 충분하고 그다음부터 만날 이유가 없어요. 같은 기억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난 뒤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죠. 같이 살 이유도 없고. “다음에 보자.” 하고 헤어지면 그만입니다.

헤어지고 그다음에 우연히 또 만났어요. 그때는 세 시간이 아니고 3분만 하면 충분하죠. 3분만 하면 충분해요. 그래서 3분 만에 헤어지려고 하는데 그 친구가 “좀 더 이야기해. 사실은 남편 몸이 아프거든. 내가 지금 보험하고 있다고.” 이렇게 나오죠. 그럼 그건 내 기억층에 없는, 그 친구만의 기억층이 내 속에 강제로 침투하려는 시도가 되겠죠.

그러면 나는 말하기를 “지금 보험 든 게 대여섯 개 되거든. 더 넣을 여유가 없어.” 그러면 그 친구도 굳이 나에게 전화할 필요 없고 만날 필요도 없어요. 그 친구를 만나보니 남편이 아프다는 사건이 있는데 우리 남편은 안 아파. 살 빼려고 지금 애쓰고 있어요. 친구 남편이 내 남편은 아니니까. 전혀 다른 기억 속에 있다고요.

그럼 이 기억이 어디까지 가느냐? 이거는 내가 찾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갓 태어났을 때 기억조차 성립되지 않을 때 있던 그 사건이 몸에 새겨져서 아버지, 엄마는 아는 기억이 아버지 언어의 말을 통해서 “너 말이야. 자전거 조심해.” 갓난애가 자전거 배우지도 않았는데… ‘자전거 조심해야 돼.’라는 아버지, 어머니의 기억이 언어화 되어서 그게 나한테 습성으로, 윤리와 도덕으로 일방적으로 개입되어버린 거예요. 경험하지도 않은 것이 언어의 폭력에 의해서 나한테 개입되어버리면 내 속에 뭐가 있느냐? ‘자전거는 조심해야 돼.’ 이게 남아있다고요. 아버지가 잡채 먹다가 체해서 그다음부터는 엄마가 잡채를 일체 안 해준다. 그러면 그 덕분에 자녀들은 잡채가 별맛이 없다는 새로운 기억이 들어오겠죠.

이게 ‘자아=나라는 공식이 엉터리’라는 뜻이에요. 나는 없어요. 나는 없고 다음에 나이가 더 들어서 이번 겨울에 내년 봄에 또 어떤 사건이 오게 되면 내 기억은 유동적이라서 내 기억은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고 내 기억이 달라지면 자아도 달라져요. ‘아, 작년에 내가 이랬지.’ 이런 거요.

또 하나 예를 들면 20대 있잖아요. 20대에 들었던 팝송 또는 포크송을 들었어요. 그땐 눈물 흘리면서 굉장히 감동받았어요. 그런데 지금 60대 되어서 그 팝송을 다시 듣게 되면 시공간이 바뀌고 자기 기억이 바뀌어서 ‘눈물까지는 흘릴 필요가 없다’ 이렇게 돼요. ‘그땐 참 좋았다’ 이정도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랬는데 60대에 무슨 사건을 만나서 갑자기 서글프다. 그런데 20대에 들었던 노래를 들으니까 20대의 감흥이 아니고 40대의 아픈 사건 속에서 그 노래 들으면 눈물이 날 수 있죠. 눈물이 나면서 그 팝송 들을 때에 그동안 생각 안했던, 같이 듣던 친구의 얼굴이 생각나고 그때 그 줄담배 피우던 다방이 생각나고, 어두침침한 조명의. 그 다방이 어딘가 가보면 벌써 재개발되어서 날아가버리고. 이게 뭐냐 하면 20대를 형성하던 모든 시공간의 배치물들이 내 기억 속에 들어왔을 뿐이고 현장에 가면 그때 그 기분 나지 않습니다.

방금 이 설명이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바로 부부생활까지 이어져요. 처음에는 ‘당신 없이 못산다.’가 되잖아요. 그런데 부부생활 한 30년 하게 되면 ‘없어도 괜찮다’가 되죠.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바닷가에 가서 밀어버릴까? 없어도 괜찮다,가 되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때 그 감흥을 상대 배우자가 계속해서 유지시켜주고 더 새로움으로 업그레이드를 못 시켜주니까 결혼이라는 게 지루하고 답답하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차라리 저 인간하고 안 살고 자식하고 살래, 이런 식으로. 그렇게 되어가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갈 때 그러면 이참에 헤어진다는 것도 싫어요. 남편의 존재가 내 현재 자아의 구성요소로 이미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잖아요. 이미 차지한 이상 그 사람을 떼어내게 되면 내가 상처받아서 안돼요. 그래서 일종의 계량, 저울질을 해보는 거예요. 헤어지는 조건은 안 헤어질 때의 고통보다 더 심할 때는 헤어진다는 거예요. 이런 계량적인 요소가 있어요.

자, 계량적인 요소가 있을 때 방법은 뭐냐? 30대에 결혼을 했던 그 희열, 그걸 정신분석학에서는 주이상스(Jouissance)라 해요. 주이상스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쾌락’이라 하는데 쾌락보다도 ‘희열’이라는 단어로 옮기는 게 좋아요. 쾌락은 기분 좋은 것을 쾌락이라 하잖아요. 희열은 고통 가운데서도 즐거운 걸 희열이라 합니다. 탈(脫)자아, 자아를 잃어버릴 때.

자아 속에 ‘참 좋았다. 좋았다.’가 나한테 고통이 되는 거예요. 그때 20대, 30대 만났을 때 ‘참 좋았다’ 아예 그게 없으면 덜 답답할 건데 좋았던 적이 있었다는 과거가 되어버리니까. 그럼 그걸 어떻게 회복하느냐? 회복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남편이 1년 동안 나갔다가 나중에 사고당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고, 이 양반 죽었구나.’ 했는데 사흘 뒤에 “아, 행정착오였습니다. 살아 돌아왔습니다.” 이럴 때는 “반갑다, 여보야.” 했을 때인데 그런 경우는 흔하지 않고요.

어떻게 하느냐? 남편과 만나서 기쁠 때가 철딱서니 되게 없었던 그때 그 시절의 시공간이라면 지금 이 시공간, 이미 그 기억이 충만 된 시공간에서 남편의 존재 자체가 고맙게 느껴질 다른 일을 벌이면 되겠죠. 그래서 돈 많은 사람들이 주로 하는 것이 뭐냐? 부부끼리 골프치기. 돈이 좀 들어요. 한번 라운드 돌때마다 50만원씩 내니까. 그런데 가진 사람들은 그 돈 50만원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회원권이 수천만 원, 수억 되니까.

같이 골프를 치는데 그럼 남편을 보고 같이 하면 기쁘다는 그 말이 아니고, 다른 쪽의 부부가 얼마나 잘 나가는지 비교하는 데서 희열이 생겨요. 그러면 이제 남편 데리고 라운딩 하잖아요. 그럼 같은 급에 속한 부부들이 같이 만나서 계모임을 하잖아요. 거기서 여자들이 내놓는 희열이 뭐냐? “이번에 자식이 또 전교 1등 했다. 지금 어디 갈지 모르겠다. 나는 의대 시키고 싶은데 걔는 카이스트 가고 싶다고 한다. 어쩌면 좋아?” 이런 식으로.

10대의 희열은 그 상대자인 아빠, 엄마를 기쁘게 하면 돼요. 이미 20대를 지나면 친구를 이기면 돼요. 친구보다 잘 나가면 돼요. 그러나 30대 되면 지금 자기 시대의 타인과 비교해서 우월하면 나는 옛날에 있었던 그것과 족히 비교되지 않는 큰 희열로 사는 보람과 재미를 느끼는 겁니다.

그걸 어제 낮 설교에서 했어요. 나는 스스로 나를 승인하고 인정하는데 그게 효과를 발휘하려면 누구로부터 확인되어야 돼요? 타인이 있어줘야 돼요. 타인을 통해서 확인되어야 돼요. 타인이 잘났다는 말을 굳이 안 해도 그냥 입 다물고 있더라도 ‘나는 너를 이겼어. 네가 나보다 돈 많이 벌지만 나는 행복해. 나한테 이런 게 있는데 너는 없지?’ 말을 안 해도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내 희열로 만족하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결국 인간은 이기주의입니다. 악마의 자식이다. 악마의 자식이에요. 자기밖에 몰라요. 그래서 어제 낮 설교에 좀 심한 말을 했죠. 자기를 위해 살거든 차라리 죽어라. 주님은 그 나라 의를 안 구하면 주께서는 안 받아주기 때문입니다. 받아주지를 않죠.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죠. 기적이 뭐냐? 전부다 누구를 위합니까? 나를 위함이잖아요. 주님의 시공간이 따로 있거든요. 주를 위해 살아야 돼요. 그래서 어제 낮 설교에 보면 주를 위해 사는데 주를 위해 살 때 출발을 자기부터 하니까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내 쪽에서 자꾸 완전을 추구하게 돼요.

거기서 나온 노래가 뭐냐? 임재범의 <너를 위해>. 제목은 거창해요, 너를 위해.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을 위해. 주님을 위해 하는데 본인이 스스로 조정하는 거예요. 너무나 고귀하고 사랑스럽고 마땅히 섬겨야 되는데 누구 꼬라지를 보느냐? 자기 꼬라지를 보면서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왜 불안해요? 설교시간에도 했죠? 왜 자꾸 불안하냔 말이죠. 본인도 종잡을 수 없지요.

그러면서도 ‘그걸 바라보는’ 뭐라고 했습니까? 가사에서는, 내가 이렇게 불안한 것을 주께서 지금 지켜보고 계시지요? ‘너’라고 하잖아요. ‘너’가 아니고 본인이 본인의 자아를 조작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쳐다보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율법을 보지도 않는데 자기 혼자 법으로 자기가 정당한 존재인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녹취:김혜근

대전-신명기(34강) 신명기15:11(율법 속의 정보) 20250929a(강의: 이근호 목사)

오늘은 신명기 15장입니다. 1절 “매칠년 끝에 면제하라.” 그렇게 시작되지요. “시간에서 십자가 사건을 끄집어내라.” 십자가 사건을 어떻게 시간 개념에서 끄집어낼 수 있느냐? “십자가 사건이 시간 속에 품어져 있다.” 이러면 되겠죠. 이 세상 사건 사건 속에 십자가 사건이 거기에 담겨있다.

그러면 담겨있는 십자가 사건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정보” 어제 오후 설교 내용을 다시 얘기해 볼게요. “정보” 이 정보는 이 땅이 창조되기 전이에요. 이것을 가지고 에베소서 1장 4절에서는 “창세 전에”라고 해요.(엡1: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정보가 있었고, 그 정보를 담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을 만들었어요, 창세기 1장에서. 그게 바로 현실 세계예요. 현실 세계는 뭐 때문에 있다고요? 정보를 펼치기 위해서 현실 세계가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뭘 알아야하느냐 하면, 이 현실 세계가 히브리서 11장에 근거해서 ‘가상 세계’라는 걸 알아야 돼요.

분명히 없는 게 아니고 있는데, 뭐로 있다? 허상과 가상으로 있는 거예요. 망상은 아니에요, 망상은 인간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망상은 아닌데, 어쨌든 실상은 아닌 채로 이 현실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이 정보는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창조 전에는 정보가 있었고, 이제는 현실 세계가 있다, 이 말이죠.

이 정보를 ‘보이지 않는 것’, 창세 후에 만들어진 것은 ‘보이는 것’이 되겠죠. 그러면 이 정보가, 자기 정보가 온전하게 다 충족되게 되면 뭐해도 됩니까? 장날 끝나면 저녁 때 상인들이 뭐해요? 철수하고 다 철거하죠. 시장 중앙에 휑하니 바람까지 불면, 황야의 무법자처럼 되죠. 사람들도 없고, 다 날아가죠.

이 현실은 철거 대상이고, 이제는 무너져야 될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 전에, 로마서 9장에 보면 뭐가 있다고 하냐 하면, 창세 전의 정보 안에 사람이 들어있다는 거예요. 창세 전에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또 우선이 아니에요. 사람이 또 허상이에요. 사람 자체가 허상입니다.

그러면 사람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제가 쉬운 영어로 한 번 써보겠습니다. 사람은 허상이에요. 사람 안에 정보는 진짜입니다. 진짜는 실상이니까. 그 실상 정보를 영어로 쓰겠습니다.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이걸 우리나라 영화제목으로 바꾸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입니다.

’황야의 무법자‘의 주제곡 제목이 이거에요.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세 종류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9장에 보면 세 종류가 아니라 정보가 두 개밖에 없어요. 사랑과 증오에요. 더 쉽게 말하면 뭡니까? 사랑과 미움이죠.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롬9:13)

그런데 야곱이라는 인간 작자가 없어요. 그리고 에서라는 인간 작자가 없습니다. 정보가 먼저니까요. 이 말을 달리하면,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랑받는 자가 나중에 만들어져야 돼요. 주님의 미워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미움 받는 자가 나중에 드러나고, 나타나야 되는 겁니다. 이것은 이미 확정된 거예요.

확정된 존재가 나타나려면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가두어져야 돼요. 이 정보가 가두어져야 돼요. 바깥으로 막 새나가면 안돼요. 모든 정보는 바깥으로 새지 않고 안에 딱 함축되도록 하는 정보가 필요한데, 그것이 뭐냐 하면, 언약입니다. 그게 언약이에요. ’언약이 주어졌다.=정보가 주어졌다.‘

그런데 그 정보는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창세 전에 아버지와 예수님이 의논해서 이미 확정된 겁니다. 확정된 거예요. 이 확정된 것을 쭉 펼친 것이, 마치 카펫을 둘둘 감았다가 호텔 로비에 쭉 펼치잖아요. 밟고 오라고요. 쭉 펼칠 때, 밟힌 카펫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은 구원받지 못해요. 이스라엘을 밟고 오신 분이 구원 받죠. 그런데 그 카펫을 밟고 오시는 분이 이스라엘 역사를 그냥 밟고 오시는 게 아니고, 밟으면서 이스라엘의 죄악 된 역사를 자기 몸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요. 손톱에 봉숭아 같은 꽃물들이죠. 손톱에다 꽃물들이면 손톱이 발갛게 되잖아요. 해봤죠?

하나님의 이름에 이스라엘의 죄가 꽃물들여집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은 뭐가 되느냐, 온전하게 죄인이 돼요. 이스라엘이 지었던 죄로 물들여졌기 때문에. 마치 염색약에 옷감이 푹 잠기듯이 주님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푹 잠깁니다. 잠길 때 그냥 잠긴 게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름이 있잖아요.

그래서 주님도 그들의 죄를 인수인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원래 이름이 없는데, 피조물 돼야 되는데, 하나님 스스로 이름을 가져 버렸어요. 이름을 가지니까 이름 대 이름에서 저쪽 이름의 운명이 이쪽 이름으로 이전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주의 이름이에요. 그동안 이스라엘과 동행했습니다.

자, ’이름‘이 나왔으니 잠시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모든 이름은 존재에 붙어있는 이름‘입니다. 이름이 있다는 말은 뭔가 있다는 뜻이에요. 존재는 있음이니까. 있기 때문에 이름을 붙입니다. 이름을 붙이게 되면 그 다음부터 이 존재는 이름으로 불리게 돼요. 애 낳으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뭐에요? 이름부터 짓죠.

이름이 있다는 것의 첫 번째 의미는, ’너는 있다.‘가 되고, 두 번째는 뭐냐? ’이름으로 불린다‘. 또는 ’이름으로 관계한다.‘ 이렇게 됩니다. 자기 자식 부를 때 “가만 있어 보자. 키는 180이고 몸무게는 80 나가는 오래전부터 우리 식구랑 같이 살았던 밥 먹으러 오는 애” 이렇게 얘기 안하죠? 간단하게 뭐라고 합니까? 이름을 부르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름을 짓는 자가 이름을 부르면서, 이름의 내용은 이름 불리는 본인이 분명히 존재하잖아요. 본인이 존재한다고 했죠? 있으니까 이름 붙이잖아요. 그런데 이 이름 속에 뭐가 스며들었냐 하면, 이름을 부르는 자, 타자의 힘, 권력이 이름에 작용합니다.

이름 지은 자가 이름을 불러버리면, ’나는 누구의 소유‘가 돼요. 이름 부르는 자의 소유로 다뤄져요. 그래서 제가 공식 하나 적어볼게요. 제가 일방적으로 만들었으니까 참고로 하시면 됩니다. “성령 안에 있는 자는 그 누구의 소유가 아니다.” 성령 안에 있는 자는 그 누구의 소유가 아니다.

값을 주고 샀기 때문에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에요. 이것을 어제 낮 설교 제목으로 바꿔보겠습니다. “징계 중에 있는 자는 그 누구의 소유에서 벗어나야 된다.” 모든 성도는 징계 대상이에요. 징계 중에 있는 사람은 어떤 누구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죠. “내가 말할 테니까 너는 누구의 말도 듣지 마라. 너는 사람의 말을 듣지 마라.”

마태복음 17장에(마17:5-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변화산 상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이 직접 얘기 안하시는데 직접 이야기하시는 데가 몇 군데 나와요.

보통 예수님을 경유해서 예수님이 이야기 하시는데, 직접 아버지가 이야기한 경우가 별로 없는데, ’구름 사이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일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가 없다.‘ 그것이 효과가 있으려면 성령이 와야 효과가 있어요. 성령이 와야 돼요. 안 그러면 제자들이 또 권력이 무서워서 내빼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출, 구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새로운 이름으로 소유시킨다는 뜻이에요. ’새로운 이름으로 소유화‘시킨다. 제가 광주강의 내용 중 일부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또는 일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대신 하여 삽니다.” 이런 취지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에 ’주님이 우리를 대신‘했다는 말이 한두 번 나온 게 아니고 여러 번 나오죠. 그런데 그 다음에 ’우리가 주님을 대신하여 산다.‘는 말은 간단하게 말해서 성경대로 하면, ‘우리가 주님의 증인된다.’는 거예요. 주님의 증인되게 되면, 뭐가 중지가 됩니까? ‘나는 이렇고, 나는 잘났고’하는 내 증인 노릇하는 것은 중지되고, 금지되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바로 주의 이름으로 전환시켜서 주의 이름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말하면, 징계를 우리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님 보고,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징계가 이루어진 거예요. 이미 이루어진 징계를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시키느냐, 그게 징계거든요.

“네 속에 나의 형상이 있다.” 그걸 끄집어내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우리가 주님 대신하여 산다는 것은 주의 이름 되시는 분이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구원을 성취하는데, 거기에 같이 딸려 나왔던 자들이 주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주의 이름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거죠.

그러면 이것은 더 나아가서, 날마다 주님이 자기 몸을 확인하는 그 과정이 자기 백성을 모집하는 과정이 되어 버려요. 에베소서 1장에 교회는 뭐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이죠. 주님은 교회의 머리라고 했죠. (엡1:22~23-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머리와 몸체 사이에 에너지, 권력의 힘이 작용하겠죠. 지금 이런 이야기가 바로 어디에 해당되는가? ‘정보’에 해당됩니다. 지금 중요한 걸 제가 일부러 빠뜨렸는데요, 뭐냐 하면, 지금까지 이렇게 이야기하면 굉장히 간단한데, 빠뜨린 게 하나 있어요. 누락된 게 뭐냐?

창세기 1장에 사람이 안 나옵니다. 사람 창조는 창세기 2장에 나오죠. 창세기 1장 27절에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만든다고 나오잖아요.(창1: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런데 그 구체적인 것은 2장에 나옵니다. 그러면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을 언제 만들었어요?

제일 마지막 날에, 짐승보다도 더 뒤에다 배치를 한 거예요. 짐승보다 뒤에 배치를 해버렸어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앞에 있는 어떤 창조에 대해서 인간이 ‘이것은 내 소유다, 나를 위해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일절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창조가 먼저 있고, 인간은 제일 마지막에 창조된, 말하자면 신참이기 때문에.

신참인데, 그 신참된 인간을 2장에 보면, 인간이 없고, 뭐라 했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정보를 위해서 주께서 만든 가상현실, 현실인데 ‘가상현실’이라고 해도 돼요. 현실이 곧 가상이니까. 현실적 존재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인간이에요. 실제로 정보는 뭡니까?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이 유지되지 않으면 인간은 뭐로 바뀌느냐? 인간은 없이 흙으로 바뀌는 구조를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다가 두 그루의 나무를 통해서 그 장치를 미리 선점해서 심어놓았던 거예요. 나무 이름이 하나는 뭡니까? ‘생명’이죠. 우리 인간들의 상식에서는 생명은 그냥 있어도 생명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반드시 죽음과 짝을 이루어야 생명의 의미가 산다는 거예요. 죽음이 없는 생명은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죽음과 비교하면서 비로소 생명은 그 의미를 드러내는 거예요. 그래서 산다는 것은 엉터리, 가짜예요. 하나님의 형상이 유지되려면 선악과 따먹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선악과 따 먹으면 안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 인간 입장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 이제 인간이다. 누가 뭐래도 인간이다, 형상 있다.’ 이렇게 나오겠죠.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인간은 거기에 부차적인 존재인데, 인간이 만들어지게 되면, ‘나는 여기 있고, 하나님의 형상은 내 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부차적인 것이다.’ 라고 순서를 바꿀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그 가능성을 보고, 그 틈새 가능성을 보고 누가 왔느냐 하면, 뱀이 거기에 들어온 겁니다. 뱀을 왜 에덴동산에서 그런 되지도 않는 소리 하도록, 마귀가 들어오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셨는가? 생명이라는 것은 죽음이 실효성이 없으면 생명도 실효성이 없어요. 생명을 위해서 실제로 죽음이 일어나야 돼요.

상당히 골치 아픈 이야기입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을 간단히 하면 이겁니다. 인간은 부차적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생명과 죽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리고 뱀, 악마, 그것들도 하나님이 누구신가 들어내기 위해서 부차적인 하나의 소재로서, 재료로서 인간이 만들어진 거예요.

이미 우리가 범죄하고 난 뒤에 나를 생각하니까 하나님이 부차적인 게 되어버렸어요. “하나님이 사랑이 어떻고..나를 뭘 도와줄 겁니까?” 이게 뒤바뀌어서 그래요. 창세기 3장으로 안 넘어갔어요. 2장까지만 합시다. 2장까지 하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이 주도권을 갖고 있죠.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 뭐냐? 우리의 형상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우리의 형상” 이에요. (창1:26-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이게 복수냐, 단수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부터 시작해서 신학자들은 골치 아프게 됐어요. 우리의 형상.

골치 아프단 자체가 내 중심으로부터, 나부터, 내 생각부터 먼저 시작을 하니 이게 골치 아픈 이야기예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꼭 단수일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의 나라가 단수죠. 어차피 피조세계는 하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걸 따질 수 있는 자격자를 피조물 속에 용납하지 않죠. 그냥 하나님의 형상이 주도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부터 해서 앞에 다 창조가 되어 있죠. 그러면 이 단락에서 결론을 내려 보겠습니다. “정보가 우선이다.” 창세 전의 정보가 우선이다. 이게 실제 현실 세계에 나타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셨고, 그 창조 속의 일부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짐승만도 못해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단,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 속에 있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자격으로 창조 세계를 다스릴 자격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조건으로. 이걸 달리 이야기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천지를 다스리는 겁니다. 그러면, 천지만물을 풀이하면 뭐냐, ‘시간+공간’입니다.

자, 다시 한 번 신명기 15장을 봅시다. 1절 “매칠년 끝에 면제하라.” 7년이라는 숫자가 카운트되었다는 것은 시간을 카운트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도 시간을 카운트 했어요. ‘6일 째에 마지막으로 인간 만드셨고, 칠일 째 쉬셨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5) 하나님 쪽에서 카운트를 했죠.

이걸 인간 위주로 생각하고, 해석하면 안 돼요. 주님, 하나님의 형상 위주로 해석하게 되면, 시간과 공간마저도 누구한테 봉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을 만들었다고 보시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아까 던진 문제. ‘시간 속에서 십자가 사건이 어떻게 나오느냐?’ 벌써 나왔잖아요.

하나님의 형상이 누굽니까? 바로 골로새서 1장 15절에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예수님이죠.(골1:15-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모든 만물은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만들었다고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와 있고(골1: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 없이는 아무 것도 없다고 되어 있어요.(요1:1~3-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말씀이 빛으로 왔으되”, ‘말씀이 빛으로 왔다’와 동시에 천지 창조에서 ‘빛이 있으라’ 했던 창세기가 요한복음 1장을 딱 보고, 그 다음에 창세기 1장을 가지고 릴레이 하듯이 바통을 이어가다보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1:3)”가 이제 아귀가 맞는 거예요.

그 다음에 문장은 어디냐 하면, 이 빛이라는 것조차도 피조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빛조차도 ‘생명이 누구냐, 생명이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만들어졌단 말이죠. 이렇게 보시면 되죠. ‘빛이 왔으매’ 빛이 어떻게 돼요? “어두움에 막혀서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죠. 요한 복음 1장 5절에요.

그럼 빛이 누구를 못 이겨요? 빛이 어두움을 못 이기게 되어버린 거예요. 어두움에 막혀서 빛이 어두움 속까지 들어오지를 못하니까요. “빛이 왔으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 말은 뭐냐? 생명 되시는 분이 생명을 위해서 죽음이 필요하고, 어두움도 필요하고, 마귀도 필요하고, 인간도 필요하고, 이런 것들이 필요한데 이제 본격적으로 이 땅에 무슨 작업을 개시한다는 뜻이에요.

이 작업을 시작하신단 뜻이에요. 이 작업에 말려든 것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말려든 겁니다. 그 전에 누구부터 말려들었습니까? 이스라엘 역사가 말려든 거예요. 그래서 여기 “제 칠년 일곱째 년에는, 돌아오는 1,2,3,4,5,6,7, 일곱 째 년에는 그 동안 빚진 사람에게 네가 빚을 탕감해줘라.” 그 이야기가 의미 있게 다가오는 거죠.

그게 어떻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지를 한 번 보겠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두 견해가 있을 수 있어요.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 입장에서 시간과 공간을 생각하는 것, 두 번째는 인간 입장에서 시간과 공간을 생각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이 죄인 된 이스라엘 속에 동행해서 역사를 준동시키고, 이끌어 내시고, 사건을 주시는 것은 이 두 가지 견해를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하나님 형상 입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버리면, 인간은 뭐가 되느냐 하면, 죽음이 되고, 어두움이 되겠죠.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죽음 없고, 어두움 없으면 생명과 빛이 그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겁니다. 드러나지 않아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신데 일부러 이 땅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을 경유해야 만천하에 생명과 빛이 온전한 하나님 형상의 의미를 살릴 수가 있습니다.

창세 전에 있던 그 정보가 이제는 실상의 세계라는 것이 드러나고, 이 땅은 허상의 세계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 말입니다. 그 일의 작업을 위해서 이런 어두움과 죽음에 속한 인간이 필요하고, 여기에 뱀이 필요하고, 마귀가 다 필요한 거예요. 방금 이야기 한 것을 이렇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십자가 사건으로 전부 다 빨려 들어가요. 십자가 사건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말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모든 것이 펼쳐진다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 되려면 인간은 내가 누구냐를 알아야 되고, 그걸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진짜 누구신가를 알아야 되겠죠.

거기에 필요한 무대 장치가 시간과 공간입니다. 일곱째 해에 누구든지 돈 빌려 준 사람은 빌린 사람에게 이스라엘에서는 빚을 면제해줘라. 독촉하지 말고, 일곱째 해에 면제해줘라. 그래서 이름을 면제년이라 칭했다고 15장 2절에 나옵니다. 자, 이렇게 이야기할 때, 우선 이 말씀에 대해 인간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인간 입장, 죽음과 어두움, 생명이 아니고 죽음이고, 빛이 아니고 어두움인 인간 입장에서 이 대목을 설명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 입장에서는 뭘 놓치느냐 하면,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여전히 가치 있게 살아갈 이유가 생길 수가 있어요.

내가 1억 빌려준 사람이 나한테 1억 갚아야 되는데, 하필 7년째 해가 돌아왔어요. 법에 의해서 7년째에 그 빚을 탕감해주고 “안 줘도 돼.”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할 때 내가 죽어있어요, 살아있어요? 살아있죠? 이게 인간의 해석입니다. 이게 문제예요. 이게 인간의 문제입니다. 그런 인간은 죽여야 돼요. 법대로 사는 인간은 죽여 버려야 돼요.

왜냐 하면, 모든 법은 지금 내 해석이 나의 어두움과 지옥 속에 나를 가두어 두었다는 그 점을 간파를 해야 되는데, 법대로 살아버리니까 갑자기 자기가 업 되고, 훌륭하게 돼요. UP~UP~UP~ 자기가 그만 훌륭하게 되어버린 거예요. 거기에 이스라엘 전체가 빠졌고, 심지어 예수님 죽일 때도 유대인들이, 십일조 한 자들이 죽였어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고요, 금식하는 자들이.

주께서 우리의 어두움과 죽음이라는 것을 끄집어내는 방식이, 주님의 전략은 아주 대단합니다. 이걸 지킴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마귀와 한패’라는 것을 알게 하는 거예요. 이걸 지키게 함으로서.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에서의 주님은 시간과 공간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빚진 자로 나타나죠, 빚진 자. 왜 그런가? 왜 빚을 졌는가 하면, 신명기 15장 4~5절과 11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4~5절“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밀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그 다음에 뭡니까? “없으리라”고 되어있죠.

11절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둘 사이에 뭔가 안 맞단 생각이 들지 않아요? 가난한 자가 아예 없어야 되는데, 가난한 자가 왜 생겼죠? 11절에 보면, “이 땅에 가난한 자가 늘 그치지 않는다.” 는 말을 왜 하시느냐? 일가친척이고 가족이고 집안 식구고 간에 옆에 가난한 자가 있으면 골치 아픕니다.

차 사고 나서 어디 보상금이라도 나와서 이익이 되든지 해서 쓸모 있으면 좋겠는데, 밖에 나가지를 않아서 차 사고 날 가능성도 없고, 비행기 사고 나면 보상이 큰데, 비행기 탈 일도 없고, 추석 때 집구석에만 박혀 있어요. 그냥 밥만 축 내죠. 밥만 축 내고, 무슨 백수가 자격증인줄 알고 권리를 주장하고 있죠.

바로 이 가난한 자가 없어야 된다는 건, 율법으로 제대로 하면 없어요. 그런데 가난한 자가 있다는 말은 율법이 잘못 되었느냐? 아니면 율법을 제대로 안 지켰느냐의 문제를 인간인 이스라엘의 자기 문제로 돌려줘버리는 거예요. “지금 율법에 하자 있는 게 아니고, 너희들에게 하자가 있다.”

그리고 가난한 자의 앞장 선 분이 누구냐? 여호와의 이름이 가난한 자 앞장서서 이스라엘에게 다가서고 있는 거예요.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무시하고 멸시하면 곧, 나 여호와에 대한 학대고, 무시다.” 그러니 그 당시 가난한 자에 대한 직업군, 사실 직업도 없죠. 직업이라고 계급화 시키면, 딱 세 종류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신약에 오면 하나 더 보태요. ‘옥에 갇힌 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합치면 ‘가난한 자’, 먹을 거 입을 거 마실 거 없는 자, 여기다가 하나 더 보태면 옥에 갇힌 자. “옥에 갇혔을 때 너희가 돌아보았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추울 때 입을 의복을 주었고,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다. 너희가 나에게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나는 너희에게 보상하겠다. 이 천국에 속한 자들아, 이 양들아. 저 쪽은 지옥 가거라. 이 염소들아.” 이렇게 나누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동행하는 하나님이에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고.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 했던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위해서 이 지상에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사태를 일으킵니다. 그게 전쟁이고, 일찍이 아버지 병으로 돌아가시고, 남편은 전쟁에 나가서 전사해서 돌아오고, 그리고 갑자기 그 땅에 가뭄 들어서 못살고 남의 나라에 빌어먹게 하는 거, 나그네 삶을 살도록 주께서 의도적으로 사태를 유발시켜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도피성에 가는 사람들입니다. 도피성에 들어가는 게 ‘이야, 좋다!’ 이런 사람은 없어요. 할 수만 있다면 도피성 같은 데에 안 살고 싶어요. 나는 내 소유된 토지에서 내가 노동한 덕으로 살고 싶어요. 도피성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도피’잖아요. 정처 없다는 말이죠. 쫓겨서 수배 당했다는 말이거든요.

도피성은 이스라엘의 요단강을 중심으로 해서 요단강 동쪽(게데스, 길르앗 라못, 골란)에 세 군데 있고요, 서쪽에 세 군데, 헤브론, 세겜, 그리고 베셀 해서 총 여섯 군데에 있습니다. 도피성에 가는 사람은 그 시대의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 밖으로 나오면 안 돼요.

이것은 뭐냐 하면, 도피성에 있는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했잖아요. 지 때문에 죽은 사람도 억울하지만, 죽일 의사도 없이 살인자가 된 나도 억울한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죽은 자는 죽은 자대로 율법을 인격화시킨 하나의 샘플이 되고, 본의 아니게 남을 죽이고 살아있는 나도 율법화된 하나의 인물로서 주에 의해 다루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 도피성에 있는 사람은 철저하게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인생이죠. 징계라는 것은, 능동성에서 피동성으로 바뀌는 것을 징계라고 할 수 있어요. ‘뭐든 내 자율적인 의지로 내 뜻대로 한다.’에서 ‘뭐든 주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라고 바꿀 때, 이 징계의 효과가 나거든요.

이런 수동적, 피동적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고, 이런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능동적으로 율법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없고, 피동적으로 가차없이 율법화된 인물로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가난하다는 거예요. 가난하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돼요? 빚내야죠, 빚진 자가 되는 겁니다.

빚 졌을 때에 그들이 느끼는 인생의 감사와 고마움과 기쁨은 ‘그 빚진 거 다 갚아줘!’ 라는 율법의 선언만이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고 기쁨이 되겠죠. ‘매칠년 끝에 면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그들의 유일한 기쁨이 되겠죠. 그런데 이 세상은 어떤 세계라고요? 가상 세계죠. 가상 세계, 인간의 견해가 우세하고 넘치는 세계죠.

법적으로는 승소했지만, 실제로는 한 푼도 못 받죠, 현실 세계에서는. 한 푼도 못 받아요. 그럴 때 이 가상 세계는 주님의 처벌의 대상이고, 심판의 대상입니다. 어떤 일가친척이 집이 홀랑 망해서 우리 집에 얹혀산다고 할 때에, 그 친척이 교회도 안 다니다가 신세가 처량했는지 교회 가서 은혜 받아 말씀을 본단 말이죠.

말씀을 보면서 무엇을 주목하는가 하면, 소위 자신보다 넉넉하게 가진 저를 보고, 적어도 목사니까 말씀을 잘 알 게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알아도 프로페셔널한 전문가니까 본인 같은 초짜, 교회의 교인들보다 얼마나 말씀대로 실천에 옮기는지 그 다음부터 탐색하는 거예요. 설교단에서는 말씀을 유창하게 하는데, 실생활에서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지 안 옮기는지를 본인이 점검해보는 거예요.

점검해볼 때, 산상설교 같은 데에 뭐라고 나옵니까? ‘도와달라고 할 때는 그냥 줘라.’고 나오잖아요. 그러면, 시험을 해보는 거예요. “아재요, 내가 이렇게 어렵고 돈이 필요한데 돈 좀 빌려주세요.” 그러면서 녹음기 몰래 숨겨 놓고요. 과연 산상설교대로 하는가?

그 목사가 마침 지난 낮에 산상설교를 설교했네요? 과연 그런가 싶어서 시험해본다고요. 주기는 뭘 줘요? 줄 리가 없지요. 주지를 않는 거예요. 그럴 때 그 가난한 친척이 뭐라고 합니까? ‘아, 인간은 이중적이구나. 세상에 나 빼놓고는 다 불신자구나.’ 이런 생각이 들겠죠. 그게 바로 불신자입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8장에 나와요. 헌금을 할 때 넘치도록 했다든지, 거저 주라고 해서 거저 주었다 할 때, 사도바울의 계시 즉, 예수님의 계시죠, 예수님의 계시는 그 사람이 능동적으로 어떤 자유 의지를 발휘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자비의 결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그 자체가 은혜란 말이죠.

돈 있는 집안에서 나를 천대할지라도 그 사람 탓으로 돌리지 말고, 이렇게 건사해준 것만 해도 ‘이게 웬 떡이냐.’ 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돼요. 그래서 어제 낮 설교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이 내 원수를 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치는 거예요, 말씀으로. “네가 원수야, 네가. 뭐, 너 대신 복수해 달라고? 난 너한테 복수할거야, 너한테”

인간적인 관점은 죽을 때까지 자기가 말씀에 비추어서 얼마나 정당하고 의로운가, 그것 밖에 내놓을 게 없어요. ‘어떤 사람도 가난한 나를 도와준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지옥이다.’ 그러면 주님은 “네가 지옥이야. 그걸 왜 기대해? 세상을 왜 바래?“

그러니까 이 말씀을 주는 것은요, ‘나는 이걸 지키는데, 남은 이걸 못 지킨다.’ 이걸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똑같이 죄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을, 여기 보면 내용이 나와요. ‘내가 이렇게 말씀대로 하면 땅을 주겠다’는.

그 땅은 이스라엘 사람 보고 준 게 아니고, 그들과 동행하시는 분의 작업 때문에, 주의 이름이 율법을 가지고 우리를 죄로 지적하는 하나님의 고유의 작업을 계속 하기 위해서 바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고,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의 형상의 일을 위해서 주는 것이지, 형상도 날아가 버린 인간을 위해서 시간과 공간이 주어진 게 아닙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 제7년 면제년, 안식년, 안식일, 희년, 이 모든 시간은 주님을 위해서 죄인인 우리를 경유해서 이 작업이 진행되도록 그렇게 하신 거예요. 참, 이게 굉장히 복잡해요. 주님의 전략, 작업은 이런 겁니다. ‘제주도 한 달 살기’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 헛짓을 왜 하죠? 그게 뭐냐 하면, 조작입니다. 조작, 흉내 내기, 연출하기입니다.

내가 스스로 확인하는 거예요. 내가 믿음이 좋은지 나쁜지를 내가 확인하듯이. 재벌 집 자식도 아니면서 재벌 집 자식이라고 바꿔서 한 달 살기 하는 드라마가 있어요. ‘친밀한 리플리’ 리플리(reply) 라는 것은 응답, 답장이라는 뜻입니다. 친밀한 리플리, 한 달 살기, 한 달 살기 해보니까 본인이 그 집 자식도 아닌데, 그 집 자식인 듯이 착각해서 그 재벌 집을 지가 삼키려고 시도하는 드라마예요.

인간은 누구나 허상이에요. 그러나 나만은 실상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왜? 자기에게 이름이 있으니까, 자기 이름을 빛내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 이름 자체가 가짜예요, 엉터리에요. 이 이름은 결국 무슨 이름으로 바뀌어야 돼요? 주의 이름으로 바뀌어야 그 사람은 자기 이름으로부터 구원받아요.

자기 이름으로부터 구원받아,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이 가짜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 가짜, 허상의 세계에 푹 잠겨서 인간이 갖고 있는 죄가 도대체 얼마나 다양하고, 얼마나 다채로운지를, 얼마나 거기서 자기가 꼼수를 부리고 연출을 하는지를 그런 것을 주께서 이 땅에 실험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지옥 같은 삶에서 start, 출발시키는 겁니다.

첫째 시간 끝으로 출애굽기 21장 1절에서 6절 보겠습니다. 종이 나와요. 2절에 보면,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칠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며”라고 했죠. 이게 종의 주인 입장에서는 자유가 짜증나요. 그동안 들어간 밑천이 있거든요.

아이돌(idol) 키운다고 옷 입히고, 숙소 주고, 음반 제작하고, 돈 얼마나 들었습니까? 그런데 좀 떴다 하면 재판 걸고 나오고, 노예계약이니 어쩌니, 잘 되면 전부 다 제 덕이고, 못 되면 전부 다 엔터테인먼트 회사 탓이고, 잘 되면 전부 다 자기 탓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동일한 현실 세계에서 종과 주인의 관계를 가지고 인간이 누구 편에서 이 현실을 해석하느냐, 종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어떻게 됩니까? 뭐, 6년쯤 되면 제대 말년이잖아요. 일을 안 해요, 나가는데, 뭐. 보세요, 인간이 이렇습니다.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인지. 율법을 나한테 적용시킬 권리나 자격은 이 인간 세계에서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에 대해서 모든 율법은 죄인이라고 규정하기 위해서 신명기를 준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