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25여름 수련회 교재 / 고린도전서 본문

십자가마을 수련회/25여름(고린도전서)

25여름 수련회 교재 / 고린도전서

정인순 2025. 6. 1. 13:39

 

2025년 여름수련회 교재 / 이근호 목사

[십자가 능력]

- 고린도전서 속의 그리스도 -

Ⅰ 서론

1. 자연이 있다.

- 진화론적 세계관의 입장 -

1) 양자역학부터 출발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양성자, 중성자, 전자와 같은 아주 기본적인 입자로 이루어져 있어 인간 몸속의 모든 양성자를 다른 양성자로 교체하더라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즉 우리의 몸은 이 세상의 모든 ‘죽어 있는 사물’과 별달리 특별한 것이 없다.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가 중요하며 그러기에 우리는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양자역학 같은 아주 작은 미시 세계에서는 입자들의 상태나 위치와 같은 속성들이 결정되어 있지 않고 여러 가지 가능성으로 ‘중첩’되어 있으며 오직 다른 물체와 상호작용, 곧 관측의 순간에만 결정되어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한편, 생명체의 몸은 아주 큰 물체이지만 몸을 구성하고 있는 입자들이 따뜻한 몸속에서 진동하고 서로 부딪치며 중첩 상태를 유지하기 힘든 환경이다.

2) 최초의 생물

처음 등장한 생물들은 가만히 바다를 부유하며 빛 알갱이나 삼키는 수동적인 존재들이었다. 이것들이 만들어낸 광합성 폐기물, 즉 산소 때문에 스스로 질식하기 시작했다. 결국 산소 호흡으로 사는 것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옆의 것을 먹는다는 옵션이 생기니 새로운 전략 두 개가 탄생한다. 하나는 희생물 오기를 기다리는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희생물을 직접 만드는 전략이다.

이 중 희생물을 만들어 가는 것들에게 몇 가지 해결할 과제가 있다. 첫째는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이고, 둘째는 ‘어디를 향해 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지금은 눈에 보이는 생물들이 좌우대칭을 가지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3) 좌우대칭 생물의 출현

왜 좌우대칭인가 하면, 좌우대칭 형태는 움직임을 구현하는 데 유리하다. 전진, 혹은 방향 틀기, 이 두 가지만 구현하면 되는 것이다. 과연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아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나쁜 선택을 하면 변사체가 될 수 있다. 좋은 것, 나쁜 것 구분할 능력이 필요하다. 이에 외부 자극을 평가하는 ‘감정(感情)’ 시스템과 그리고 이후 감정의 기원이 되는 시스템이 탄생한다.

오직 좌우대칭 동물만이 뇌를 가지고 있다. 이런 사실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뇌와 감정은 움직이기 위해 좌우대칭 동물의 탄생과 함께 처음 탄생한 것이다. 뇌 있는 것들이 서로 배틀 로얄을 벌이다 보니 점점 더 생존환경이 복잡해지게 되었다. 먹이를 찾는 일도 쉽지 않고, 날 먹어 치울 포식자도 도처에 존재한다. 그래서 점점 더 복잡한 전략 개발이 필요했다. 단순히 뇌로는 종이 울리면 먹이가 나온다는 걸 학습할 정도는 되지만 조건 반사로 자극에 반응하는 그 이상의 복잡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4) 기능이 발달한 동물 등장

그런데 인간의 조상 격인 척추동물과 어류가 탄생하면서 새로운 학습 방법이 나타난다. 뇌에 껍질 부위가 생겨나면서 새로운 정신의 능력이 같이 탄생했다. 이제 스스로 이런저런 행동을 해보고 어떤 행동이 나에게 이득을 주는지 배워가면서 새로운 행동전략을 개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한다고 해서 곧바로 멋진 보상을 얻는 게 가능했던 건 아니었다. 맛있는 옆 친구 덕에 바로 기분이 좋아질 수 있었던 것에 비해 환경이 복잡해지면서 행동-보상 간 시간 간격이 길어진 것이다. 그래서 ‘호기심’이라는 특성이 나타나는데, 이에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는 행위 자체가 보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덕분에 척추동물들이 복잡한 행동전략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5) 다기능 동물의 등장

식물이 지구의 왕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식물들이 이산화탄소를 너무 많이 먹어서 스스로 지구에 빙하기와 대멸종을 불러일으켰다. 위기는 곧 기회였다. 육지는 절지동물 같은 징그러운 생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때다 싶어 어류들이 육상진출을 시도한다. 그런데 물 밖은 춥고 덥고, 난리였다. 물의 수온과 달리 지상 기온은 변덕이 심했다.

여기서 운명을 가르는 두 전략이 탄생한다. 하나는 ‘추워지면 그냥 쉬자.’ 하는 쪽(파충류의 조상)이고 다른 쪽은 생체 핫팩을 항상 달고 다니는 쪽이다. 포유류의 조상이며 수궁류라 불리는 온혈동물이 채택한 전략이다.

수궁류(獸弓類, Therapsida)는 고생대 페름기부터 중생대 트라이아스기까지 번성했던 단궁류(Synapsida) 진화 계통의 한 분류군으로, 오늘날 포유류와 그 조상들이 속하는 주요 그룹이다. 수궁류는 파충류와 포유류의 중간적 특징을 가지며, 포유류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생물학적 특성(예: 복잡한 턱 구조, 다양한 이빨 형태, 몸통 아래로 뻗은 사지 등) 이 이 그룹에서 처음 나타났다. 초기 수궁류는 파충류와 유사한 변온 동물이었으나, 진화가 진행되면서 항온성(온혈) 특성을 일부 획득한 것으로 추정된다.

추우면 움직이지도 못하는 수궁류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온통 수궁류의 세상이다. 그러다가 페름기 트라이아스기 대멸종 때문에 수궁류는 짧은 전성기를 마치고 쪼그라들었다.

※ 페름기(Permian)는 지질학적 시간대 중 하나로, 대략 2억 9,890만 년 전부터 2억 5,190만 년 전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은 고생대의 마지막 시기로, 대륙들이 하나로 모여 있던 판 구조의 변화와 함께 다양한 생물군의 발전과 멸종이 있었다. 특히 페름기의 끝에서는 페름-트라이아스기 대멸종이 발생했는데, 이는 지구 역사상 가장 큰 대멸종 사건 중 하나로, 생물 종의 약 90%가 멸종했다고 알려져 있다.

핫팩을 유지하려면 밥을 많이 먹어야 했기에 먹이가 부족했던 생태계적 IMF 시대에 절전 상태를 가지고 있던 파충류에게 허구한 날 양식을 빼앗겼다. 생쥐 같은 작은 몸체를 가진 것들이 덩치 큰 파충류가 영업을 종료하는 밤에 활동하며 눈물을 흘리고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한다. 하도 파충류한테 눌려 살면서 질질 짜다 보니 초능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연습 시도’를 시작한 것이다. 포유류의 겉질(바깥층)이 새겉질로 진화하고 머릿속으로 자기 행동을 미리 시뮬레이션(가상현실 구성) 할 수 있게 되면서 강화학습과 달리 행동하지 않고도 무언가를 학습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능력으로 진화할 수 있었을까?

6) 시뮬레이션 기능의 발달

따뜻한 피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뜻한 피는 포유류가 밤에도 활동할 수 있게끔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대단한 도박이었다. 앞서 말했듯, 따뜻한 피를 유지하는 것은 에너지 소모가 아주 크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일 크기의 보아뱀보다 30배 정도 더 많은 칼로리를 소비해야 한다. 한번 사냥에 성공하면 한동안은 안심할 수 있었던 파충류와 달리 포유류는 매일매일 생과 사의 기로였다.

그래서 조금 더 효과적인 인지적 능력으로 효율적인 사냥 방법을 고안해야 할 강한 선택압박을 느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능력이 있는 동물은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지각하지 않고 이 세계를 닮은 시뮬레이션 세계를 지각하는데 그 덕분에 그 세계 안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게 된 동시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가능성의 세계를 뇌신경 활동으로 재현해 내야 했기에 계산량과 에너지 소모가 상당했다.

이러한 막대한 계산량을 위해선 신경세포의 효율성이 중요한데 신경세포의 활동 속도는 특정 온도에 최대가 된다. 포유류의 체온인 37〬˚C에서 변온 동물의 체온에서보다 이론상 두 배나 빨라진다.

한편, 시뮬레이션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짓수는 무한대나 다름없기에 영원히 계산이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시뮬레이션 능력은 시뮬레이션을 통해 자기가 무엇을 이루려 하는지, 자기 행동에 대한 의도를 창조해 내는 새로운 기능과 함께해야 한다.

이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가상 세계를 만들어내는 능력, 그리고 자기 의도를 추구하는 능력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서서히 눈덩이를 굴리게 된다.

7) 정치의 시작

과일을 주식으로 하는 영장류들이 있다. 풀떼기나 먹던 영장류들은 하루 종일 풀을 씹고 소화해야 겨우 살아갈 수 있었는데 과일은 열량이 풍부하고 소화도 빨랐기에 과일을 주식으로 하는 영장류들은 동물들에겐 정말 흔치 않았던 자유시간을 많이 가지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람도 할 게 없으면 정신이 살짝 나가는데 이 과식하는 영장류들도 조금 살만해지니까 정치질하기 시작한다. 먹고살 만해지니까 외부 환경의 위협과 외부의 적보다 내 옆 동료들과의 경쟁이 생존에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쪽수와 동맹! 이것이 나를 해치려는 존재인지 나를 도와주려는 존재인지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그런데 어떻게?

일단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접근한다. 상대도 나랑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하겠지, 하면서, 앞서 언급했던 내 의도를 읽어내는 시뮬레이션을 상대에게 투사해서 꿍꿍이를 파헤친다. 이 능력을 위해 영장류에게만 특수한 새겉질 영역인 과립이마옆앞겉질(gPFC) 구조가 존재한다.

이 구조물이 하는 역할은 이 세상에 대한 시뮬레이션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만들어서 내 행동의 의도뿐 아니라 내 사고와 사고의 의도까지도 만들어내는 역할인 것으로 추측된다.

예를 들면, ‘목표: 죽음을 무릅쓰고 먹이 구하기’로 정해졌으면 “이번에 먹이를 구하지 못하면 다른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며 적이 많지만 숨을 곳이 많아 상대적으로 안전한 상황으로 판단됨”으로 스스로 정리하는 식이다. 이중 첩자인 셈이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는지, 내가 어떤 시뮬레이션을 왜 돌리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메타(초월) 인지(認知)의 탄생인 것이다. 이 능력이 선행되어야 다른 경쟁하는 것들이 어떤 시뮬레이션을 왜 돌리고 있는지 추측해서 그 생각과 마음을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외부 세계에 대한 시뮬레이션의 모델, 그리고 그 모델에 대한 시뮬레이션 모델, 그리고 그 모델을 기반으로 한 타자의 마음 모델까지 이 모든 것이 갖추어지고 나서야 뇌 안에 언어와 논리가 들어설 수 있는 진화적 배경이 갖춰진 것이다.

8) 꿈과 시뮬레이션

그런데 시뮬레이션 능력은 포유류의 전유물은 아니다. 파충류의 친구의 친구인 조류들도 온혈성을 독립적으로 진화시킴으로써 시뮬레이션 능력까지 얻은 것으로 추측된다. 꿈을 꾼다는 증거가 명백히 드러난 부류는 포유류와 조류뿐이다. 많은 가설이 존재하지만 꿈 또한 생존과 관련된 중요 상황을 이루는 시뮬레이션일 수 있다는 증거가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렘수면 상태[REM 수면, Rapid Eye Movement sleep은 수면의 한 단계로, 급속 안구 운동이 특징이며 뇌 활동이 활발해지고 꿈을 자주 꾸는 상태다. 렘수면은 전체 수면 주기의 약 20~25%를 차지하며, 깊은 수면 단계인 비(非)렘수면과 번갈아 가며 주기적으로 나타난다]에서는 전두엽 활동 저하로 정보처리 과정에 오류가 증가하기에 꿈이 만들어낸 시뮬레이션은 뭔가 미완성인 부분이 많고 불안정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덕에 깨어 있을 때는 생각지도 못하던 방식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게 된다. 꿈이 시뮬레이션이고 시뮬레이션이 꿈이라면 우리는 꿈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꿈이 그토록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꿈이 현실을 닮아서가 아니라 현실이 꿈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단지 자면서 꾸는 꿈보다 더욱 정교하고 정확한 꿈인 것이다.

인간들은 서로 비슷한 경험(창조된 꿈)을 공유하며 그 꿈을 배경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서로 비슷한 방식으로 삶의 과제를 이해한다. 꿈꾸고 상상하는 것, 그것이 뇌의 진화요 지능의 진화이다.

2. 인간이 있다.

- 자기에게 몰두하는 자기 중심의 인간관 -

성형외과 의사인 미국인 맥스웰 몰츠(Maxwell Maltz)는 환자 중에서 외모가 바뀌었음에도 성격이나 행동이 변하지 않은 사람들을 관찰하며, 외부 변화보다 내부의 자기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Cybernetics라는 말은 그리스어 큐버네테스(Kubernetics)에서 나온 단어로 ‘조종하다, 통제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사이버네틱스는 스스로를 통제하고 조절해서 목표에 도달하는 장치다. 이게 인간 정신의 전부라는 것이다.

사이버네틱스 시스템은 ‘목표가 있을 때만’ 작동한다. 목표가 주어지지 않으면 정신적 사이버네틱스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이버네틱스 시스템은 의외로 제대로 동작하기 위해서는 의식을 동원해서 이 시스템에 압박해서는 아니 된다. 목표 집착은 도리어 시스템에 변형을 일으켜 도리어 일을 망친다.

인간의 뇌는 구체적으로 목표만 생겨나면 그 목표대로 뇌가 저절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이론을 1960년에 내어놓았다.

시스템이 자동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우리의 뇌가 실제의 경험과 상상 속의 경험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표가 생생하게 상상이 되면 뇌는 그 목표가 실제로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따라서 몰츠 박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토록 한다. 자기 이미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적 믿음과 다르다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자신이 아무리 정직해지려고 해도 결국은 실패하는 이유는 의지로 극복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미지 자체를 먼저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패마저 긍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원래 타고난 해결사로서 자체적으로 해결 능력이 있다. 아무리 자신이 무능하고, 부끄러운 점이 있고, 약점이 있더라도 그것마저 인정할 때 모든 요소가 도리어 장점으로 변한다.

이게 의식 바탕에 깔려있는 무의식의 힘이다. 이 무의식의 세계가 나의 세계의 원형이다.

3. 성경이 있다.

자연에 대해서 말하게 되면 그것은 과학이 되고 지식은 축적된다. 과학의 영역은 측정의 영역이다. 과학은 정확해야 한다. 더는 의심할 게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는 의욕을 불태운다. 그런 식으로 법칙을 만든다.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증명한다. 자부심도 느끼지만, 법칙이 깨어질까 초조하다. 자연은 인간에게 늘 버거운 존재다.

과학 다음에는 예술이 있다. 예술이란 정확함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한다. 표현 못 하는 것을, 표현을 통해서 넘어서려고 한다. 표현 안 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느껴야 한다. 정확성을 따질 대상이 아니다.

예술에는 모든 것이 근사치다. 근처에만 가고 멈춰야 한다. 그래야 보이는 것이 있단다. 예술은 따지면 안 된다. 따라서 예술은 극히 민주적이다. 내가 그냥 좋다는 그것을 타인이 비난할 권리는 없다. 예술은 매료되기를 원한다. 매력이 없는 예술은 도태된다.

예술은 생의 시름을 잠시 덮는다. 고민거리를 잊게 만든다. 자아를 향한 관심이 예술에게 뺏길 때, 상실됨이 도리어 행복이 된다는 역설을 배운다.

숨차게 살아온 경쟁 마당에서 나도 없고 타인도 없는 공간이 예술 세계다. 에너지 소비를 요구하지 않는 동네가 예술계다.

예술 다음에는 죽음이 있다. 화면 전체를 새까맣게 칠해도 그저 ‘죽음 이미지’이다. 죽음과 일치하지 아니한다. 죽음을 느끼려고 하니 살아 있음이 장애가 된다. 죽음마저 정복할 수는 없을까? 죽음 너머 세계로 진입할 수 없을까? 죽음 안에 뭐가 있는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해진다.

죽음의 영속성과 자연의 영속성 중, 어느 것이 더 길까? 막상막하처럼 여겨진다. 모르겠다. 죽음 이후를 모르는 판에 지금껏 알아 온 것도 다 ‘모르겠다’에 삼켜진 것이 아닐까? 애초부터 무능했던 것은 아닐까?

성경은 ‘모르겠다’의 집대성이다. ‘모르겠다’라는 인간의 숨은 마음을 하나님께서 대신 발설해 주신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마 13:13-14).”

인간의 본성은 산낙지 같다. 자꾸 답이 담긴 쟁반을 벗어난다. 성경에서 튀어 나간다. 이것이 성경의 기능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인간 세계에 쓸모 있다.

어릴 때부터 과학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고 예술에서 가끔 매력을 느끼고 잠시 휴식을 갖다가 결국은 죽는데, 왜 죽는지도 모르고 육신이 사라진다. 끝마무리가 안 된다.

정확함, 그리고 그 너머의 신비로움마저 죽음의 불안을 해소하지 못한다.

과연 천국은 인간이 넘볼 곳이 아니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5-16).”

Ⅱ 본론

(줄거리)

예수님 승천하시고 난 뒤 역사에 남겨진 교회가 현실 속에서 어떤 갈등과 고민거리를 안고 있으며 그것과 교회 본질 사이의 상관관계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 고린도전서이다. “예수 안에서” 비로소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을 수 있다(1:23)고 한다면 ‘예수 안에서’가 교회의 실체를 규명하는 관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 아담 계통인 “우리 안에서”가 성립이 안 되는 것일까? 왜 은혜가 계속해서 요구되며 왜 하나님의 평강이 지속적으로 공급(1:3)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소위 거룩한 자들이 “예수 안에서”만 비로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음을 알 때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기 때문이다(고후 4:4-6).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의 영광이 아닌 세상을 초월한 주의 주되심의 영광으로 덮어버리기 위함이다. 그것은 성도의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성도에게 남긴 것으로 추진된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는 성도를 보고 교회를 잘 세우라든지 어디를 개척하라든지 그 방법은 이러하다든지 조직력을 강화하여 질서 안에서 교회가 자체적 세상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라든지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 안에 있는 단체로서의 교회가 예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늘의 것을 제대로 세상에 보여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다움이다. 그 교회다움은 오직 하나님의 예수 안에서의 은혜와 평강이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책망하고 훈계하는데 그 기준은 바로 이 은혜 됨과 평강의 훼손에 관한 것이었다. 은혜란 비-소유를 의미하며 뭔가 이미 우리 쪽에서 확보한 것을 인정치 않고 몰수하고 들어간다. 그것이 고매한 품성을 지닌 사도라 할지라도 예외일 수 없다(1:12-16/3:4-6/21-22).

바로 이 은혜의 출발이 십자가이며(1:17-2:2) 그 뒤에 진행되는 모든 성령의 사역도 이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며 능력이 있으며 구원과 영광까지 좌우하고 있음을 소개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2:3-3:1). 그러면 이 은혜 됨이 무엇과 대조되어 교회 내에서 부각될까?

그것은 성도의 육신 됨이다(3:3). 사도는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에 대한 선언(1:25) 이후 그것이 왜 위대한가를 고린도 교회의 부정적인 면들을 통해 보여준다. 첫째는 당파 싸움이었다(3:4-6).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그 누구도 구원의 기초에 개입될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다(3:7,11-15).

성령께서 성도를 성전으로 삼아 일하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3:16-20).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일하는 자가 아니라 만물을 제공하신 하나님의 것으로 종사하기 때문이다(3:21-23).

그래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계속적인 신뢰(faithful)이다(4:2). 자신의 것에 관심 두는 것이 아니기에 외부에서 볼 때 만물의 찌끼같이 보이고 미련하게 보이지만 그 판단은 하나님이 하신다(4:4, 9-13).

사도의 이러한 세상관은 누구나 본받아야 한다(4:16). 그러나 사도의 이러한 철저한 신앙이 그들 눈에 띄지 않으니까 마구 방탕의 길로 간 것이다(5:4-5). 그것을 사도는 ‘교만’이라고 한다(4:1, 9).

그 방탕 중의 하나가 음행의 문제다. 교회가 이런 자를 용납 하는 것 자체를 사도는 책망하고 있는데 그것은 유월절 양 되시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 된다(5:7). 교회가 오히려 세상을 판단해야 하는데 세상에 판단 거리를 만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씻음을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6:11).

성도의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은 성전으로서 움직이는 것이다(6:19-20). 이 몸이 내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만 값으로 산, 팔린 것이 되었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6:20/7:23).

인간이 자신의 욕정을 이길 수는 없다. 따라서 혼인은 하지만 그 혼인 자체가 성도에게 궁극적인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그 이유는 세상 행적은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7:29-32).

두 번째 문제는 우상의 제물에 관한 것이다. 우상 제물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 때문에 교회 내에 신앙 약한 자들이 볼 때 교회가 마치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듯한 인상을 받고 낙심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8:12). 그래서 기존 교인들에게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자들을 생각해서 절제 있는 행동을 취할 것을 당부한다.

사도 자신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한다(8:13). 그러면서 그런 양보가 바로 사도가 가지는 특권을 결코 포기하는 것이 아님은 자신이 아내나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자비량하고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복음 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가 자유하지만 그 자유를 가지고 약한 자들을 망하게 하는 분별없는 자유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모든 절제는 생명으로 향하는 다른 목표가 있기에 생기는 것이다(9:25). 이 모든 이야기가 신앙인이 넘고 또 넘어서야 할 시험들이다.

하지만 감당치 못할 시험은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시험을 당할 때면 다시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즉 원망할 권리조차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킨다(10:13).

옛 습관으로 기독교를 이해한 자들에게 우상 제물 먹는 그것이 하나의 큰 도전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가치 기준이 있는 것이다(10:31).

세 번째 문제는 교회 내에서 남녀 간의 구별 문제와 무절제한 은사로 화평과 조화가 깨어진 것이다. 사도는 남녀의 문제를 창조 때의 원래 자기 자리에서 볼 것을 요구하면서 해결한다. 은사는 모든 것을 원래 제공하신 분, 즉 같은 주님에게서 나왔다. 그래서 그것을 소유 개념에서 야기된 것으로 규정하면서 해결한다.

무엇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주신 분이 무슨 목적으로 무엇을 드러내라고 주셨나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된 교회에 봉사하고 또 그 봉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은사를 위한 것이다(12-14장).

이상과 같이 사도가 전달하는 복음이 진실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모든 것이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해 제공된 내용이기 때문이다(15:8). 단순히 성도가 이 복음을 받고 자기가 알아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활된 분이 제공한 복음이기에 부활이 오히려 성도의 운명을 이기는 것이다(15:14, 55-58).

이미 영광중에 계신 분이 준 내용이기에, 흙에 속한 우리의 몸도 영광스럽게 한다(15:4, 9). 복음 자체가 이미 부활의 내용을 지녔기에 동시에 죽음의 내용도 지녔는데 그 죽음의 능력은 아담 안에 있는 자 누구든지 적용되고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에 적용이 된다(15:22-24).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교회 안에 충만하여 연보도 하고 돕기도 해야 한다(16:1-2, 14). 이런 사랑의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가 가지는 또 다른 면, 즉 저주가 임하게 될 것이다. 교회가 교회 됨, 성도가 성도 됨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가능하다(16:24).

Ⅲ 결론

예수님에게 극단적으로 위험한 곳이 이 세상이며 현재 우리는 이곳에 태어나서 여태 살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성도에게 이곳의 위험성에 대해서 쉬지 않고 알려주시고 체험케 하신다.

그 단서는 사도 서신을 통해서 주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흘리신 피로 쓰여졌다. 서신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성도는 피의 축축함에 젖어 든다. 이로써 성도는 목숨을 걸고 사수할 것이 생겼다. 할 일이 생긴 것이고 사명이 생긴 것이요 존재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말씀에 담긴 피의 가치에 대해 경멸하거나 제멋대로 해석하는 이 위험한 세상의 경망스러움에 대해서 주저 없이 저항감을 가져야 한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