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38:3-6 / 예수님의 조각 본문
예수님의 조각
이근호
2025년 5월 18월
본문 말씀: 예레미야 38:3-6
(38:3)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붙이우리니 그가 취하리라 하셨다 하는지라
(38:4) 이에 그 방백들이 왕께 고하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치 아니하고 해를 구하오니 청컨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38:5) 시드기야 왕이 가로되 보라 그가 너희 손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릴 수 없느니라
(38:6) 그들이 예레미야를 취하여 시위대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리웠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흙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흙 중에 빠졌더라
선지자가 죽음으로 내려갑니다. 인간 세계의 일부로 할애되어 죽음으로 이어지는 공간이 마련되고 그 공간에 선지자가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죽음의 공간 외의 공간은 삶의 공간으로 자기 마음대로 지정해 놓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죽음의 공간에 들어가고 우리 삶의 공간에 들어갈까요?
오늘 본문 38:4에 보면, 그 내력이 나와 있습니다. “이에 그 방백들이 왕께 고하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치 아니하고 해를 구하오니 청컨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즉 사회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말 한 마디로 통해서 사회 단결력에 약화된다면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에 대해서도 적용된 원칙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요 11:50)
자, 그렇다면 이런 법칙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진리란 이 세상 사회가 성립되는 와중에서 필히 불필요한 요소라’는 겁니다. 진리가 들어가면 나라나 사회나 가정이나, 특히 교회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작용합니다. 진리는 그 모든 것과도 대척관계에서 등장합니다. 진리는 천대받고 미움받습니다.
예레미야 1:5에서는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예언을 받게 됩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이렇게 대단하고 거룩한 사명자가 오늘 본문에 와서는 졸지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전하는 선지자를 과연 하나님께 이렇게 허비하셔도 되는 걸까요?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선입견은 버려야 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즉 ‘진리는 따로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 말입니다. 실은 진리란 선지자의 현장에서 새로이 만들어지고 나타나는 겁니다.
진리란 따로 수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가 가는 삶의 길목과 풍경 속에서 새삼스럽게 등장하는 겁니다. 즉 선지자가 외친다고 진리나 계시가 아니라 선지자의 삶의 현장에서 악의 세력과 부딪히고 무시당하고 죽임을 당하면서 생산되는 겁니다. 이러한 원칙은 신약에 나오는 세례 요한도 예외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1:15-16에 보면,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보면 세례 요한은 큰 일을 하는 자로서 아무도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을 자같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4:6-11에 보면,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침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 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처참하고 허망한 죽음 같습니다. 철없는 딸과 어미에 의해서 성령받은 천하의 선지자 요한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앞으로 큰 일을 계속 이어 나갈 저력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나 세례 요한이나 모두 예수님을 모습을 형성하는 그림의 일부입니다.
두 탁자의 어느 한쪽 탁자에는 그림으로 된 타일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빈 탁자를 향하여 한 조각씩 옮겨놓다고 해봅시다. 처음 몇 조각 옮길 때에는 무슨 그림으로 완성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 옮겨놓는다면 비로소 완전한 그림이 나옵니다. 완전한 그림은 최종적 진리입니다. 곧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따라서 선지자가 전하는 계시나 진리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겁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그냥 자신이 그 시대에 처해있는 몸의 죽음으로 알립니다.
이게 바로 세상 사람들이 선지자를 대하는 한계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선지자나 메시야를 배격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회 공동체가 망할까 두려워서 그러합니다. 그런데 ‘망한다’가 과연 인간 세계에서 성립하는 개념일까요? 인간에게 ‘망한다’, 혹은 ‘성공했다’는 적용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그냥 원래대로 돌아갈 뿐입니다. 인간들이 “나는 망했다”는 표현은 상당히 건방진 생각입니다.
인간이 원래 안 망한 경우가 있을까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진리의 조각, 예수님의 일부가 아니라 독자적인 삶을 시도하게 됩니다. 갓난 아이가 커가면서 몸을 뒤집고 앞으로 기도 두 다리로 서게 되면서 표현되는 것은 자기 만의 가치 뿐입니다. 즉 그 누구의 조각이거나 그 누구의 부분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만의 절대적 존재로 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 중에서 예수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리콜 방식으로 삼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도 역시 세상 사람과 다를 바없이 기어이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간섭하여 마치 주님의 죽으심에 빨리 합류하려고 경주하게 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1-23)
따라서 성도의 존재 방식은 다음과 같으면 족합니다.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 8: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존재하는 이 자리에서 예수님의 죽으심만 펄펄 풍겨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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