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31:10-14 / 기쁨의 차이 본문
기쁨의 차이
이근호
2024년 12월 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10-14
(31:10) 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무리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31:11) 여호와께서 야곱을 속량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
(31:12)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 그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31:13)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니라
(31:14)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의 남은 유대인들은 이 약속과 말씀에 기뻐하고 이런 상황을 고대했고 이 상황을 충실하게 위해서 처신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파멸이었습니다. 어디서 어긋났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그들은 자기 기쁨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그들은 힘든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라는 도저히 감당치 못하는 거대 제국의 눌려 살면서 그들의 자율성은 박살이 났습니다. 사람이 자율성이 보장받을 때 자유의 희열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악의 힘은 이런 점을 너무나 잘 간파해서 그들로 하여금 정치적, 경제적 자율 뿐만 아니라 종교적 자율까지 개입했습니다.
즉 그들이 원하는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게 된 겁니다. 유대인 사회에 당연한 심리적인 불안감이 확산되게 마련입니다. 강력한 외부 세력에 의해서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을 빌미로 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민족을 더 압제케 하지는 않는지 제대로 정립이 되지 않는 겁니다.
자연적으로 기쁨이란 소멸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레미아의 예언의 내용은 하나님 홀로 신이 나 있습니다. 거칠 것이 없고 장애될 만한 것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마음껏 즐거워하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은 하나님의 기쁨에 흡수될 때나 성립하는 겁니다.
즉 내가 원하는 기쁨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보장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름대로의 기쁨이 따로 설정되어 있었던 겁니다. 인간의 기쁨에서 하나님의 기쁨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단절’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즉 ‘존재→환상→혼돈→새 질서’가 되는 절차입니다. 사람들은 중간과정을 모르는 겁니다.
나의 존재가 환상에 불과하기에 내가 원하는 기쁨도 헛된 기쁨인 것을 감을 잡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혼돈을 준비하셨어 모든 것이 마땅히 멸망되어야 될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점을 다음과 같이 달리 말씀하셔도 됩니다. 인간 자체가 환상이 되는 이유는 인간의 가치 토대는 인간이 아니라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의 나무들은 모두 ‘하나님의 기쁨=에덴’을 위해서 그곳이 있습니다. 그 많은 나무 가운데서 인간의 죽음과 생명과 관장하는 나무는 딱 두 나무로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는 선악나무요 다른 나무는 생명나무입니다. 바로 이런 모든 조치가 모아져서 ‘에덴’ 즉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동산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은 그 기쁨의 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두 개의 나무가 있던 곳에 추방되어 환상의 세계 안으로 가두어졌습니다. 이곳은 불로 저주받기로 작정된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쁨은 이 세계 안에서 어떻게 성립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세 번째 나무를 준비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1-2) 이상한 나무가 하나 등장합니다. 떨기나무입니다.
이 나무의 특징은 외부에서 에너지를 주지 않더라도 자체적으로 불이 붙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와 같은 존재가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이방 민족에게 일개 늙은이일지 모르겠지만 모세는 불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산에서 갖고 나온 돌판도 불에서 나온 겁니다. 이는 이 세상 자체가 심판과 저주의 대상일 뿐임을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계속 확인시켜 나가는 겁니다.
그 한 가지 예가 열왕기상 21:1-2에 나옵니다.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 왕 아합의 궁에서 가깝더니 아합이 나봇에게 일러 가로되 네 포도원이 내 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나물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합의하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여기서 인간, 즉 아합왕의 기쁨과 하나님의 기쁨에 또 차이가 납니다. 나봇이 아합왕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그 포도원이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봇은 단지 관리자입니다. 나봇의 포도원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의 주신 상속분이 연착륙하듯이 이스라엘 내에 이어져 나갔던 겁니다.
나봇에게 하나님의 기쁨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존재가 등장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아합의 아내 이세벨입니다. 그녀는 무역업으로 나라는 크게 번창시킨 시돈왕의 딸이면서 바알 종교의 여사제였던 겁니다. 아합왕은 국력을 키우기 위해 사돈왕의 협정을 맺었습니다.
이때 북쪽의 강대국인 앗수르나 남쪽이 강대국인 이집트가 외부 사정을 신경을 못쓸 때입니다. 따라서 아합왕 때, 북이스라엘은 참으로 번영했던 시기입니다. 여기에 이세벨의 정치력이 영향을 입혔습니다. 그녀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여선지자 400명을 신학교까지 세워서 양성했습니다.
온 나라는 국가 권력에 몸을 맡기고 그 정책에 환호했습니다. 그 당시에 바알에게 무릅을 꿇지 않는 자는 7,000명 정도 뿐이었습니다. 즉 온 나라가 세상 기쁨에 도취되어 있었던 겁니다. 인간 세계는 이렇게 인간들의 기쁨의 집결에 사족을 못쓰는 겁니다. 과연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진정한 기쁨의 상태에 대해서 시편 84:10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즉 이 혼돈의 세계 속에서 더는 자신의 자리를 따로 찾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에 편입되는 겁니다.
끝으로 신약 시대에서 소개하는 하나님의 기쁨의 상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29-31)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을 가리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