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30:18-24 / 야곱의 장막 본문
야곱의 장막
이근호
2024년 11월 1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0:18-24
(30:1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포로된 야곱의 장막들을 돌이키고 그 거하는 곳들을 긍휼히 여길 것이라 그 성읍은 자기 산에 중건될 것이요 그 궁궐은 본래대로 거하는 곳이 될 것이며
(30:19) 감사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자의 목소리가 그 중에서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케 하리니 쇠잔치 아니하겠고 내가 그들을 영화롭게 하리니 비천하지 아니하겠으며
(30:20) 그 자손은 여전하겠고 그 회중은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며 무릇 그를 압박하는 자는 내가 다 벌하리라
(30:21) 그 왕은 그 본족에게서 날 것이요 그 통치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며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므로 그가 내게 접근하리라 그렇지 않고 담대히 내게 접근할 자가 누구뇨 여호와의 말이니라
(30:22)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30:23) 보라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30:24) 나 여호와의 진노는 내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장막이란 임시 거처를 말합니다. 영원한 거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13-16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비한 한 성’과 대조되는 개념이 장막입니다.
땅에 있는 것은 장막이요 하늘에 있는 ‘한 성’입니다. 이 둘 사이의 연결은 언약이 찾아드는 겁니다. 창세기 18:1에 보면, 아브라함 장막에 누가 찾아옵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천사 세 명이 아브라함의 찾아듭니다.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 장막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이름이 바뀝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전환됩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곧 인간으로는 ‘능치 못할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계속 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서 자기 가치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시각, 미각, 촉각, 청각, 후각들입니다. 이러한 외부 감각을 통해서 인간들은 끊음이 자극적인 것을 유발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치 못할 일을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일로 가려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일어나는 일은 장막에서 일어나는 것과 대비가 됩니다.
장막은 이 땅의 것으로 머무르는 것을 거부하는 거처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찾아들었기 때문입니다. 언약이 찾아오게 되면 이때부터 그 장막은 인간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인간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말은, 인간의 자기 시간 의식으로 모든 일을 추진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과 ‘하나님 시간’이 다릅니다. 인간의 시간은 미래의 희망에 준해서 현재에 느끼는 시간 감각이 현저하게 달라지게 됩니다. 즐겁고 좋은 일을 앞두고 인간의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갑니다. 그러나 암담하고 절망적인 사태를 예상하고자는 시간은 참으로 더디갑니다.
반면에 자연의 시간은 참으로 차갑고 기계적으로 이어집니다. 하늘의 달과 별과 해가 땅 위의 인간 기분에 맞쳐줄 리가 없습니다. 자연의 시간은 해와 달과 별의 변화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이 변화에 따라 이스라엘 나라에 안식일, 안식년, 희년 등이 의미있는 내용으로 전달됩니다.
이로서 인간의 자기 기분에 따라 변동되는 시간감각과 자연의 시간은 전혀 상관없이 따로 움직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과는 달리 따로 성립됩니다. 즉 하나님에게 있어 시간은 ‘스톱’됩니다. 멈춰져 있습니다. 이 지상의 자연시간과 인간 시간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의 시간감각에 대해서 자연시간을 갖고 조정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미래에 기대되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무산시켜 버립니다. 그 징후와 징조가 인간의 장막으로 쳐들어온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성립됩니다. 천사가 찾아왔던 아브라함 장막 말고 그 뒤에 이스라엘의 장막에 무엇이 들어오게 될까요?
출애굽기 26:33-34에 보면, “그 휘장을 갈고리 아래에 늘어뜨린 후에 증거궤를 그 휘장 안에 들여놓으라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위에 속죄소를 두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장막 안에 언약궤가 들어오므로서 장막의 주도권인 인간에게는 언약궤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종적인 것은 아닙니다. 최종적인 것은 신약성경에서 이루어집니다. 마태복음 1:23에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능치 못할 일이 없음’입니다.
즉 장막을 가운데 두고 그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음과 인간이 할 수 없음을 극단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언약에 의해서 이름이 바뀌는 이유는, 인간의 할 수 없음을 극단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살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함께 사시겠다는 나오십니다.
따라서 장막 안에서 이 작업을 위해 언약궤가 들어오고 그 언약궤 취지가 자체적으로 완성이 되면서 인격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됩니다. 언약궤의 취지는 십자가에서 완성이 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빈 무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빈 무덤을 통해서 승천에 이릅니다. 이는 예수님의 본래의 세계로 가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된 백성’은 예수님의 코스를 밟아서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아담의 육적인 것도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면서 인간의 육신 자체가 이 지상에서 ‘나그네’의 운명을 밟게 됩니다. 이러한 신약적 결론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거쳐서 이루어집니다.
이사야 7:14에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처녀 안에서 임마누엘로 오실 분은 이스라엘이 왕이 되십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신의 약속을 위한 하나님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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