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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말라기 1:9-10 / 성전의 기능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말라기

말라기 1:9-10 / 성전의 기능

정인순 2024. 6. 20. 07:09

음성 동영상 Youtube

 

성전의 기능 

이근호
2024년 6월 19일                    

 

본문 말씀: 말라기 1:9-10

(1: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성전’이라는 단어가 우리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그만큼 평소에 인간들의 성전 중심이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성전’이라는 단어보다는 ‘가정 행복’, 혹은 ‘출세’, 혹은 ‘재벌’이라는 단어에 친숙해져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전 중심으로 다가오기에 인간들의 성전 태도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 중심이 아니라는 바는 제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수치심을 느끼고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 느낀 수치심을 자기 백성에게 되돌려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단정 내리십니다.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성전 문 닫자” 바로 이러한 선지자의 발언도 하나님의 수치심을 그대로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당연히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지적해주시고 수정하면 되잖아요”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취지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필히 망해야 하고 제사 제도도 멈춰야 하고 성전문도 필히 닫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수치를 느끼지 않을 정도의 제물은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 신약시대에나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내뿜은 수치는 인간이 스스로 제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다 근원적입니다. 창세기 2:25에,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태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조성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뿐만아니라 선악과 과실을 때먹고 일어난 변화도 인간이 의도적으로 조성할 수 바가 아닙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그냥 인간 존재의 속성에서 수치가 나오기에 인간이 뭘 해도 이 수치스러움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성전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은 성전 안에서 이 수치심이 제거된다는 말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자없는 ‘양’이라는 제품으로 천국에 납품됨을 뜻합니다. 반면에 신약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이지요. 그런데 구약의 성전 중심을 전제로 하지 아니하면 신약의 ‘믿음의 구원’로 실내용이 없는 바가 됩니다.

그것은 구약 성전을 통해서 레위언약이 가동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양은 레위언약이 가동되면서 생산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양을 생산하는 공장이며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그 종업원이고 공장주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전 안에서 어떤 식으로 양이 생산되는 걸까요?

민수기 3:12-1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여기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천국의 양이란 죽어야 될 자에 해당되고, 그것도 스스로 죽는다고 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죽어야 합니다. 레위지파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처음 태어난 자들을 대신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들은 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진즉에 죽은 자’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위지파의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언약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그런 자를 희생제물의 정결한 피로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즉 온전히 죽여서 온전한 양을 생산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취지는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 자신부터 유지되어야 합니다. 비록 자신들이 살아 있지만 성전에 들어오면서 죽은 자가 되고 오로지 살아있는 것은 레위언약, 즉 제사에 관한 약속만큼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자들이 됩니다.

그런데 말라기 시대에 이 제사장들의 드리는 제물에 대해 하나님께서 수치심을 느꼈다는 것은 실제로 완벽한 제물과 제사장은 말라기 다음 세대에 준비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은 더 이상 양이 아니라 인물로 나타나는 그런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기준으로 봐서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은 실제로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하지 않고 산 자로 여기면서 레위언약을 수행해 왔던 겁니다. 산 자로서 죽은 자 흉내를 내면서 대충 묻혀 갈 수있다고 여겼던 겁니다. 이것은 동화assimulation입니다. 나름 열심히 하고 드리면 하나님께서 얼추 받을 것이라고 여긴 겁니다.

그 이유는 성전은 인류의 근원적인 것을 모두 포함되어서 작용하는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인간인지라는 단편적인 기억들을 발췌하면서 그 지식으로 최선을 다해서 제사하려고 했습니다. 그만큼 온전하지가 않은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문을 닫자’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내리십니다.

성전의 문을 닫음으로서 여기서 ‘성전 안’과 ‘성전 밖’이라는 구별된 두 공간이 발생합니다. ‘성전 안’에서 CCTV를 달아 감시체제에 나선 하나님께서는 이제 성전 밖, 즉 모든 세상 지역을 감시체제로 돌입하시는 겁니다. 이는 곧 세상의 모든 곳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수치를 느끼는 것들을 모두 챙기겠다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 양의 생산은 오로지 예수님 의해서만 성립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요 10:1)라고 하시면서 진정한 양은 다음과 같이 생산된다고 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즉 실질적으로 죽지 아니하는 목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안 받아주는 양입니다. 반면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삽입된 양은 하늘에서 반드시 받아주시는 양이 됩니다. 이로서 천국은 다음과 같은 사람으로 채워집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

그래서 진정으로 천국이 양이 된 사람은 이 예수님의 죽으심이란 복음이 자신의 목숨을 가져가는 방식으로 자기에게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7)

복음의 하나님의 자랑이요 또한 성도의 자랑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삶이 늘 유월절의 피 발린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