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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3:15-19 / 천국 조각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3:15-19 / 천국 조각

정인순 2024. 5. 26. 19:31

음성 동영상 Youtube

 

천국의 조각

 

이근호
2024년 5월 26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3:15-19

(3: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3:16)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3: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3:19)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말씀과 믿음이 화합치 않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대표적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구약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구체화한 유일한 민족입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따라서 이스라엘이 실패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실패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말씀의 요소에 인간쪽에서 총동원한 그 어떤 믿음과도 화합치 않는 요소를 품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은 죽어서 좋은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합치될 수 없는 요건을 가지고 천국을 생각해 두게 됩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분명히 예수님은 주님이 맞습니다. 주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과연 천국이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겁니다. 마태복음 7:19에 보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으로 모자라고 아름다운 열매까지 맺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실은 바로 이런 것조차 이미 자신들이 ‘죽은 자’라는 사실을 일절 인정하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겁니다. 인간세계는 생명나무 없는 곳에서 마귀가 살기에 이미 전체가 죽은 세계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이러한 죽음의 망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습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례 치르게 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단언하셨습니다.(마 8:22)

예수님의 장례, 곧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예수님의 아버지께서 해내셨습니다. 즉 천국이란 완전한 죽음이 아니면 도달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장례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세라는 인물은 단지 물에서 살아남은 자 정도가 아니라 불속으로 들어간 자입니다.

그가 불 속에서 나올 때, 본인이 살아 나온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고서 살아나온 겁니다. 즉 그는 말씀과 더불어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 모세가 경험한 세계를 함께 해야 합니다. 신명기 4:33에 보면,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물에서 나오고 불 속에서 생존하고 있는 유일한 민족입니다. 그것은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율법 나름대로 완성을 향한 목표가 있습니다. 이 목표로 향하여 율법은 계속 성취해 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 자체의 목표는 불 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불은 인간이 결코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불 속에 있지 않는 살아있는 상태에 자신이 놓여 있다고 간주해서 자신이 살 동안에 죽어서 가는 세계에 미리 대비하려고 믿음이라는 것을 총동원합니다. 죽기 전에 죽음 이후의 세계에 나아지는 삶을 위해 사전에 조치를 취하려는 겁니다.

이런 태도는 모세가 ‘말씀과 자신의 목숨을 맞 바꾼’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바로 이러한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고 그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양이 발생됨을 언급하니, 이 야기를 듣은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이 예수님을 평했습니다.

“ 그 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요 10:20)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 들으면 이런 태도를 필히 쏟아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러한 요건을 통과해야만 천국에 이른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인간의 생존여부와 그들의 행함에 대해 궁극적으로 모욕적인 발언을 쏟아놓으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는 현장은 그동안 인간들을 묶어놓은 죽음의 망이 그 실체를 드러내는 현장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살아 있다고 여기고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예수님에게 반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릴 때에 필히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물이 나왔다는 것은 ‘심낭삼출 pericardinal effusion’ 현상으로서 완전히 심장마저 망가졌다는 뜻입니다. 죽음과 삶 사이의 연결에 산  인간으로서는 그어떤 식으로 손 쓸 수 없음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곧 율법의 제사법은 인간의 죽음 이후의 생활에 대한 시스템을 내부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식사를 같이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레위기 1장에 나옵니다.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1:8-9)

이로 인해 죄인들은 하나님에 언약의 투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식구가 됩니다. 마치 레고 장난감 조각들이 모아서 레고의 큰 장난감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신약에서 성령께서 이 이 일을 담당하십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고전 12:12-16)

신약의 성도는 맏물되시는 예수님의 몸이기에 예수님의 신앙으로 인하여 이미 예수님의 가족의 입장에서 안식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신 26:1-2)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 더는 미련두지 말고 자아라는 짐을 놓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7강-히브리서 3장 15-19절(천국의 조각)240526 - 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3장 15-19절입니다.

히브리서 3:15-19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그 전제가 성립되어 있는데 따로 어떤 조건을 달아놨어요. 하나님께서 ‘이러이러한 자는 못 들어온다.’는 말은 그 취지가 들어올 자만 들여보내시겠다는 그것이 바로 천국의 요건이 된다는 겁니다. 아무나 들어오지를 못하는 세계를 따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들의 의도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서 좋은 천국에 가고 싶다는 것으로 충만한 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그 희망을 좌절시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천국 가고 싶으냐?” “예.” “오지 마. 못 가.”라는 것이 주님이 조건을 내거시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교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어쨌든 사람들을 끌어모아야 한다는 것, 그 핑계로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지시와 명령이 있었다는 걸 핑계로 대지만 실은 교회가 숫자 모으는 데 급급하지 않았던가요? 우리는 그걸 교회가 당연히 해야 할 일로 그렇게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인간이 인간에 의해 천국에 들어가기를 시도하는 것에 불과하고요.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봐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들여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 수 없는 곳이 천국이다. 그것은 너희들에게 의도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천국 가서 잘 살겠다는 그 의도가 천국의 요건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죽어서 좋은 데 가겠다는 그 소박한 희망이 천국의 요소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하나님께서 주시면서 어떤 사례를 들었는가?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지만 약속에 땅에 못간 사례, 그런 경우들을 하나님께서 계시로 우리에게 들이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처럼 실패를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민족이 되었는데 그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특수성은 신명기 29장 29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오묘한 일은” 숨겨진 일은 하나님께 있지만 그 오묘한 일이 나타나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나타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오묘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인간들이 직접 아는 방법은 차단되어 있다는 겁니다. 차단되어 있고, 정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라.

그런데 그 이스라엘 역사는 어떤 역사냐? 실패한 역사에요. 천국 가기를 최선을 다해 노력은 했지만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그들은 믿지를 못한 거예요.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믿지 못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제시한 요건이 인간 속에 들어 있는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믿음을 총동원해도 이룰 수 없는 요건을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저희가 믿지 아니함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했다.’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정말 천국에 가고 싶다면 천국에 가고 싶은 희망가지고 버티고 들이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왜 그들과 함께 있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조건마저 믿음 없는 것으로 판정 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 봐야되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그들이 믿음이 없이 들어갔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줘서 우리가 그 믿음으로 쉽게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과연 ‘신약 시대가 구약보다 더 쉬울까요?’ 하는 생각을 해 봐야 돼요. 더 쉬운 게 아닙니다. 더 노골적으로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신약에 있어서.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음에서 파선했다면 신약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어요. 왜? 그들은 이방이니까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 우리가 들어가 봐야 되는데요. 신약에 있어 믿음이 과연 쉬운 문제가 아니라 구약보다 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어디서 알 수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을 때 요한복음 19장 3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라고 되어있어요. 피와 물이 나오더라.

로마 군인이 예수님의 시체를 창으로 찔렀는데 그냥 피가 나왔다, 이 정도 같으면 피는 흘렸지만 실신했을 수 있다, 이렇게 가능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피와 물이 나왔다는 말은 죽지 않으면 도저히 생길 수 없는 신체적 현상이 되는 거예요. 피가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물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심장 주변에 수분이 쌓이는 층이 있어요. ‘심낭 삼출’이라고 하는데 pericardial effusion, pericardial은 심장 주변을 의미하고 effusion은 유출한다는 뜻입니다. 물이 나오는 거예요. 이 말은 이런 거예요. 예수님을 창으로 찔렀을 때 피뿐만이 아니라 물도 같이 나왔다는 것은 이미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걸 고대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어요. 물이 나오면 이미 죽은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말은, 예수님처럼 죽지 아니하는 자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천국 그 부활의 세계에 넣어주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이스라엘 역사처럼 살아서 어떻게 해보고, 이게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아있었잖아요. 애굽에서 나와 움직였고.

그런데 신약에서는 그 조건보다 더 불가능한 조건이 제시된 겁니다. 예수님이 갔던 그 길 아니면 천국 가는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을 뻔 하신 분이 아니에요. 완전히 죽으신 분이에요. 물과 피가 나왔으니까요. 그래서 성경 말씀을 대하면서 제대로 성경을 본다면 제일 어려운 게 뭐냐?

엄연히 우리가 살아있는데 성경에서 우리보고 죽었다고 이야기를 해요. 사람이 ‘죽으려고 한다, 살다 보면 죽는다, 죽기 전에 준비하자.’ 이럴 것 같으면 죽기 전에 미리 조치를 취해서 자기가 어떻게 하든지 자기 사는 쪽으로 피신할 수 있는 방안을 아직 죽지 않았을 때, 뭔가 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상태에서는 뭘 해볼 수 있는 가능성 같은 게 있어요.

교회를 간다든지, 예수를 믿는다든지,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든지, 성경을 공부한다든지, 성경 백 독을 한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회개를 한다든지, 참회를 한다든지 어떤 가능성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는데 성경에서 ‘네가 죽었다.’ 이 말은요, 살아 있는 내가 살아 있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통해서 내 쪽으로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 조차도 하나님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죽은 자가 설쳐봐야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질 않아요.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데 실패했다. 그러면 우린 이 본문을 보고 ‘제대로 좀 하지. 어떻게 하나님께서 같이 동행하는데도 그렇게도 감이 없는가? 물주고 고기 줬으면 정신 좀 차려야지. 왜 그들은 자꾸 하나님을 원망할까? 우리가 있었으면 원망 안하고 감사했을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실패했으니까 우린 정신 바짝 차려서 그런 실패 하지 말아야 된다.’ 하고 여기는 그 마음 자세에 대해 주님께서는 “넌 이미 죽었어.” 죽었다 그 말이지요.

죽은 자는요, 죽은 자기 자신의 장례를 치를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장례는 하나님이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살았던 거예요. 마태복음 8장 22절에 어떤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만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장례 치르고 가겠습니다.” 할 때에 예수님께서 하는 말씀이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죽은 자들은 죽은 자로 장례해라, 죽은 자들의 세계라 이 말이에요.

신약에 와서 볼 때 구약의 이스라엘은 믿을 수 있는 가능적 기회는 부여받았어요. 왜? 살아있으니까요. 살아 있는 내가 나의 믿음이라는 이 결정력, 이 선택을 제대로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율법 앞에서 할 수 있는 기회만은 부여가 됐었는데 신약의 모든 인간들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까 말까 하는 어떤 기회조차 부여받은 적이 없어요. 죽은 자인데, 이미 죽어버렸는데 무슨 기회가 있어요?

그렇다면 신약에 있는 성도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기이한 일입니다. 정말로 기이한 일이고 이건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고 일어나지 말아야 될 일어났어요. 왜냐하면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구원받아 버리면요, 이것은 소위 아직도 내가 살아 있다고 여기는 우리 자신에 대한 엄청난 모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독 주려고 그들을 구원하신 거예요. 우리를 모독하려고, 모욕감을 주려고요.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과거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우리 조상들이 했던 과오는 두 번 다시 하지 말고 제대로 한 번 하자, 제대로 성심과 정성 마음을 다하여, 제대로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자고 나섰던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 유대인들과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과 만남의 일이 요한복음 10장 20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하신 말씀이, 내가 죽어야 비로소 양이 생긴다는 것, 지금의 양은 양이 아니고 내가 죽어야 양이 생기는데 그 양은 어떤 양이냐? 목자는 죽는 목자만이 진정한 목자라는 것을 이해하는 새로운 양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할 때 20절에 유대인들에게 분쟁이 일어나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저가 귀신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예수님께서 어느 정도로 그들에게 미쳤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는지,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요한복음 10장 28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했어요.

세리와 창기가 천국 가는 것도 모독인 동시에 그보다 더 센 모독은 뭐냐? 예수님의 손에 붙잡혀 있으면 어떤 권세, 어떤 마귀나 세상도, 내가 저희에게 준 영생을 양에게서 뺏을 세력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 이것도 인간에 대한 대단한 모욕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그들이 천국 가지 못한다고 할 때 뭘 통과해야 믿음 없음에서 믿음 있는 자가 되느냐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 “귀신 들려 미쳤다,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를 통과해야 해요.

예수님 말을 들을 때 제대로 좀 듣게 되면 이건 귀신의 이야기고 미친 자의 이야기라고 들려와야 해요. 그 들려오는 것이 시작점이 되야 하는 겁니다. 지나 내나 교회 가서 “믿습니까?” 하고 “다 믿습니다.” 하니까 천국 가는걸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중간에 뭐가 끼어있어요. 그 끼어있음을 필히 통과해야 합니다. “미쳤어. 완전히 미친 거야. 예수라는 그분은 완전히 미친 거야.” 얼마나 미쳤는지 제가 마태복음 7장으로 제 나름대로 증명해 드릴게요.

마태복음 7장 2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랬는데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했거든요. 이게 미친 이야기 아닙니까?

한 마디 따로 끊어 정리해보겠습니다. 예수님 보고 ‘주’라고 했어요. 예수님 주님 아닙니까? 맞잖아요. 예수님이 주님이란 말이죠. 예수님이 주님이라서 예수를 주님으로 믿으면 구원받겠다고 철석같이 믿었어요. 믿었는데 그 결과가 뭐냐? 너 모르겠다는 거예요. 누가요? 주님 당사자가요.

어떤 사람이 와서 “이 목사님 아십니까?” “이 목사님 잘 압니다.” “누구세요? 나 당신 잘 모르겠는데? 누구세요?” 그럼 그쪽에서 이러죠. “이거 미친 거 아니야?” 맞아요, 그거 미친 거 맞아요. 내가 너를 알아야지 왜 네가 나를 아냐, 이 말이죠. 네가 나를 안다는 말은 네 자신이 스스로 보기를 안 죽고 버티고 잘 살아 있다는 그런 현상 밖에 안 되잖아요.

분명히 죽었다고 한다면 죽은 티를 내야 되고 죽은 결과가 나와야 돼요. 그런데 “예수 당신 살아 있지? 나도 살아 있어.” 이거 가지고는 이야기가 안 된다는 거예요. 주님의 모든 말씀은 네가 이미 죽어서 내가 하는 말은 무조건 미친 말로 들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말씀을 주셨는데 “나는 주님을 예수 당신 말대로 믿습니다. 주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주여, 주여, 저는 이야기 했습니다. 권능을 행했습니다.” “누구세요? 당신 누구세요?”

마태복음 7장 22절을 보며 사람들은 ‘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게 모자라는구나. 뭐 그럼 더 찾아보지. 확실하게 구원받을 수 있는 요건을 한번 갖춰 봐?’ 보니까 마태복음 7장 18절에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아, 아아~! 이거구나.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건 미흡하고 거기에 좋은 열매를 보태야 내가 구원받는구나. 내가 살아 있으면서 해야 하는 조치는 주여+좋은 열매 맺기, 이걸 추가하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본인이 살아 있다고 또 다독거리죠. 그거 아니거든요. 그것도 아니에요.

‘이것도 아니야?’ 그럼 또 더 보태죠. 마태복음 7장 23절에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을 다 지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반석 위에 지은 집처럼.

그러면 ‘주여+좋은 열매+예수님의 산상설교 다 지키기.’ 마음속으로 일체 간음하지 않기, 누가 와서 돈 달라고 하면 거저 주기, 옷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벗어주기, 보물을 일체 땅에 쌓아두지 않기, 마음속으로 맹세하지 않기,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기, 뭘 입을까 뭘 마실까 먹을까를 일체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기, 남 비판하지 않기, 산상설교, 주의 이름으로 고난받기. 그거 뭐 잘들 하고 계시죠? 잘들 하고 계십니까? 주의 말씀 안 놓치려고.

그런데 그걸로 끝이면 ‘아, 이게 다구나.’ 하겠는데 그게 다가 어니였었어요. 그다음에 열세 번째 사도라 할 수 있는 사도바울에게 주님께서 계시를 줘버렸습니다. 계시를 주며 하시는 말씀이 ‘누구든지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한 거 + 또 빈칸 남겨두고 거기에 성령 받기를 또 적어야 해요. 거기다가 또 사도가 가는 고난까지 추가를 해야 해요. 평생 해보세요. 평생 교회 다니면서 이 짓 해보세요. 구원이 되는지. 구원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어디까지나 끝까지 기이한 일이고, 시작도 기이한 일이고 끝까지 기이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히브리서까지 거기 추가를 해보시죠? 주 믿기+열매 맺기+오늘 본문까지, 믿지 아니하는 자는 들어가지 못 들어간다 하니까 믿으려고 애쓰다가 잠시 잠깐 한 5분 동안 남과 싸워 분노할 때 믿음이 잠깐 없어진 그 순간에 주님이 재림하시면 못 들어가죠. 그 순간에 믿음이 빠졌으니 못 들어가요.

더군다나 난처한 일은 나이 80이 가까이 되면 치매 현상이 일어납니다. 제가 왜 웃느냐면 이번에 여행하면서 같이 가신 분이 80대셨는데 자기가 점점 더 치매 현상을 보인다는 거예요. 제가 목사니까 저보고 나를 위해 기도를 좀 해 달라고 이야기했어요. 불쑥 튀어나왔어요. 민박집에서 식사시간에요. 그래서 “제가 충격받았습니다. 죽여 달라고 기도를 해야 하는데, 치매 걸리기 전에 죽여 달라고 기도를 해야지 어떻게 아직도 치매 안 걸리도록 기도해 달라고 하는지 저한테는 굉장히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거기서 했습니다.

도대체 이 한국 교회, 모든 교회의 문제가 이거에요. 천국에 들어간다는 이 자체가 죽은 자한테는 해당되지 않고요, 주님은 이렇습니다. 죽은 자를 모아서 천국 만들기에 나서죠. 레고 장난감은 한 조각 한 조각이 모여서 하나의 큰 장난감으로 이뤄져요. 주님께서는 죽은 자, 죄인, 천하의 몹쓸 인간을 주님 자신의 부활의 영 성령을 보내 죄인들을 모아 천국을 이룹니다.

그게 뭐냐? 죄인들을 수집하는 하나님, 다른 말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따라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라는 말을 해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언약이 없던 죄인을 언약을 투입시켜 언약으로서 언약 안으로 끄집어 당기는 거예요. 언약 안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언약 바깥에는 어떤 힘의 망(網)이 있는데 그 힘의 망, 그 힘의 망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어요. 악마의 망. 인간은 이 힘 자체를 모르고 성경을 보면서 열심히 자기 자신의 노력에만 열중할 뿐이죠. 성경을 보면서. 그런데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이 망은 그 망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들의 집합체에요. 그 망 자체가.

죽음이라는 것은 생명 나무가 없으면 그냥 죽은 거예요. 너무나 쉬운 이야기에요. 생명 나무 없는 곳에 마귀하고 인간들이 오글오글 모여 사는 거예요. 이거 자체가 죽음이에요. 이 죽음의 힘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때문에 주님께서는 천국을 이야기할 때 그 환경, 배경 전체에 대해서 말씀을 언급하는 겁니다. 찾아가는 거예요. “너는 죽었다. 너희는 빠져나오지 못한다.” 못 빠져나와야 비로소 한꺼번에 전체가 하나님의 천국과, 약속과 무관한 세계인 것을 말씀을 통해 그들에게 알려줄 수가 있습니다. 확실하게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죽음의 망과 더불어서 또 하나의 망을 준비했는데 그게 바로 생명의 망, 성령의 망인데, 여기서 망이란 관계망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성경에 나온 대로 유대인의 입장에서 예수님에 말씀에 대해 ‘이건 귀신들린 말이고 말도 안 된다, 자꾸 뭔가 천국 가서 하나님을 경배하려 해도 주님 쪽에서 막았잖아. 주여, 주여 하면 천국 간다면서요? 사도행전 2장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니 난 다른 건 모르겠어. 나 머리 나빠서 다른 건 못 챙기고 이것만 챙기겠어.’ 하면서 주여, 하고 부르짖는다고요.

그런데 시골 교회 다니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성경이 이야기하기를 “주여, 주여 한다고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게 아닙니다.”라고 하면 그들은 얼마나 낙담하고 절망하겠습니까? 그다음부터 주일 날 교회 안 나올 거예요. 로마서 9장 3절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대로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주의 일이라면 제가 반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 교회 누가 나오겠어요? 그동안 자기가 수고한 것이 다 허사로 끝나는데요.

그래서 우리는 이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다시 봐야 해요. 오늘 본문 히브리서 3장 16절에 모세 나옵니다. 차분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모세 따라 나왔어요. 맞죠? 모세 따라 나왔습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요게벳이에요. 민수기 26장 59절에 모세의 어머니가 나와 있어요. 그런데 모세 아버지 이름은 없어요.

민수기에 나오지요. 아므람이라는 이름(민3:16)은 있는데 그 이름 뒤에, 또 뒤에 진정한 아버지는 계속 핏줄로 이어져 있습니다. 아므람은 레위 족보에 속해요. 레위 족보는 야곱에서 나왔죠? 야곱은 이삭에서 나왔죠? 야곱은 이삭에서 나왔죠? 이삭은 아브라함에서 나왔죠? 아브라함은 어디서 나왔느냐? 모세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세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에요.

모세는 그 당시에 예수님 같은 역할과 기능자로서 이스라엘 속에 합류되어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모세가 물에서부터 건짐을 받은 이름을 가진 것입니다. 모세의 엄마나 아버지는 자기 자식을 그렇게 하질 못해요. 그들은 모세의 이름을 짓지도 않았어요. 모세 이름의 뜻은 물에서 건져낸 자에요. 그럼 모세를 따르는 이스라엘은 어떤 한계를 보여야 되느냐? 물을 통과해야 약속의 땅에 가는 그런 민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갔을 때,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예요, 애굽에서 나왔을 때 그들이 40년 동안 광야에 있을 때 홍해에서 건너 나왔거든요. 광야로 나왔으면 그걸로 약속의 땅에 그냥 골인하면 될 텐데 그들은 광야에서 죽었어요. 홍해 건너 온 사람 다 죽었습니다. 물론 갈렙과 여호수아는 빼놓고요.

그다음에 죽고 난 뒤에 요단강이 또 준비되어 있어요. 요단강이 평소에 그렇게 물이 많은 강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건너고자 할때에 갑자기 홍수가 일어나서 건너지 못할 강으로 변하고 그들은 요단강 앞에서 멈춰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가 물에서 건짐을 받았고, 이스라엘이 물에서 건짐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이 죽고 난 뒤에 다시 살지 아니하면 약속의 땅에 갈 사람이 되지 못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죽고 나서 산다고 할 때, 인간이 죽게 되면 죽음으로 끝나요. 다시 산다는 것은 죽음과 삶의 끊어진 그 관계를 이어줄 때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의 요소가, 천국의 요건이 집어 넣어져야 죽은 자와 삶이 연결되는 겁니다. 그 요건이 없는 사람은 천국에 못갑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허무해야되는 것이 아니고요, 이 이야기가 반가워야 해요. 왜 반가우냐? 그래야 내 인생, 내 운명에 대해 어찌 해보려는 무거운 짐에서 홀가분하게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의 24퍼센트가 우울증 환자라는 거예요. 24퍼센트가요. 엄청나죠? 4분의 1 가까이가 우울증 환자예요. 나머지는 우울증 환자 아닌가요? 그건 잠재적 우울증 환자인 거고요. 그러면 왜 노골적 우울증 환자냐? 자기에 대해서 미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 대해서 미련이 있어요.

살아 있는 자기가 더 살아야된다는 그 압박감 때문에 스트레스가 우울증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럼 76퍼센트는 왜 우울증이 아니냐? 얼추 자기 뜻대로 살아 있는 내가 연금 받으면서 대충 살아갈 수 있겠다, 하면서 우울 증세가 약간 완화된 거예요. 사는 게 힘들면 탓을 누구 탓을 하느냐 하면, 본인 탓을 하는 거예요. 본인 탓을 하는데 이걸 감추기 위해 남 탓으로 손가락질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우울증 중에 어떤 우울증이 있느냐? 내가 천국 가지 못하면 어쩌냐, 하는 교회 우울증도 있어요. 그런데 중세에는 그 우울증이 없어요. 이번 여행에서 제가 단기 유학처럼 생각하고 공부를 꽤나 했거든요. 유럽의 대성당 같은 곳을 가요. 그 건물들의 양식을 바로크 양식이라고 합니다.

성당 천장에 프레스코화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은 신자들이 앉아서 볼 때 마치 천장이 없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거기에 천국이 환하게 그려져 있죠? 천사들도 있고, 예수님 있고, 삼위일체 그려져 있고, 성자들 순교자들의 열린 공간인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는 걸 보며 거기 있는 신도들이 자기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누가 지어줬는가? 교회를 그 당시 최고의 지배자, 군주가 지어줘요. 군주가 유대인들한테 돈을 빌려서 큰 예배당을 지어줘요. 백성들이 각자 돈 내서 그 성당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비용이 너무 들어서. 최상의 건축가를 이태리에서 수입해서 교회를 짓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갔잖아요.

그 교회를 지어 놓고 들어간 비용, 관리비까지 해서 은행에 빚내놓은 걸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느냐? 돈 많은 영주들에게 돈을 빼내는데 빼내는 방법은 교회 천장 안에 해골을 수입해요.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16세기 즈음 유럽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을 지배할 때의 일입니다. 합스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 600년을 지배했던 왕의 가문입니다. 로마 시대에 초대 교회 때 당시 많이 죽었잖아요? 당시 로마 시대에 죽은 기독교 신자들의 해골을 한데 모아놨다고요.

그다음에 기독교가 공인돼서 유럽 전체가 기독교 국가가 되니까 로마의 담당관청은 그들을 순교자로 간주해서 그 유골들에 가상의 이름을 붙여주고 감정가를 받아서 각 유럽에 판매를 해요. 구매자 이름과 일치되는 이름을 붙일 수도 있습니다. 원한다면 순교자의 이름이 없는 유골에 자기 이름을 붙여서 끄집어낼 수도 있어요.

그 순교자 유골을 예배당에 안치하게 되면 다음부터 그 교회가 의미 있는 교회가 되는 거예요. 수녀들은 앉아서 유골에 옷을 입히고, 눈에 색유리를 집어넣고, 손가락에 장식을 끼운 다음 비스듬히 뉘어 놓으면 로마가 아닌 다른 지역들, 헝가리, 체코, 오스트리아 등 각 지역들, 영국도 마찬가지고요, 각처에서 방문해서 그 순교자들을 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오늘날에도 해요. 성심회라는 수녀회가 있어요.

그렇게 하게 되면 공덕이, 그 순교자의 공덕이 우리의 성당에까지 계속해서 유효하게 작동을 하기 때문에 성당에서 하는 성만찬이 실제로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을 준다고 보는 거예요. 마치 절에서 사리 모시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1619년의 일입니다. 마티아스(1557-1619)라는 왕족이 있었는데 죽으면 그 시신을 3등분해요. 3등분해서 유명한 성당에 팔면 그 성당에서는 하나님의 은덕을 받은 사람의 시신이 우리 교회에 있으니까 그 교회는 공덕의 보물창고, 보고가 돼요.

그러면 사람들이 거기서 미사를 하게 되면 망자의 물리적인 접근성에 힘입어서 그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 자기 시신을 성당에 맡기면 성당에서 후대 신도들이 기도를 해주니까 영혼이 천국에 가는 속도가 세배나 빠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당은 항상 거기에 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영혼이 구원받는데 이익이 되는 요소를 새겨놓습니다.

그러면 신심이 없는 사람들, 술망나니라든지, 못배웠다든지, 농사만 지으면서 성경을 잘 모르는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 그들에게는 영주가 뭘 하느냐? 인간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심성, 다시 말해서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만 있어도 믿음으로 간주하는 장치를 마련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성모마리아에 대한 숭배입니다. 성당마다 성모마리아가 없는 곳이 없어요. 인간 속에 있는 신심은 다른 게 아니고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신심이 하늘이 주는 믿음의 내용이기 때문에 그 사랑, 자식에 대한 그 애정 그걸 사랑으로 간주해서 그 사랑이 있다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할 때, “당신이 당신 자식 사랑하지. 그 사랑과 동일한 사랑으로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당신이 비록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할지라도 엄마 백이 있잖아. 그 엄마의 백으로 당신을 위해서 마리아가 기도해주고 성자들이 기도해줘서 당신으로 하여금 연옥을 통과해서 천국에 이르도록 해 주십니다.”

그래서 “당신은 자식 사랑 안 해요?” “사랑하지요.” “마리아가 그 사랑을 이해한다니까! 그러니까 교회 와서 교회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그 말이에요. 그러면 당신을 구원해주겠습니다.” 이것은 기이한 일이 아닙니다. 납득이 돼요. 이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이럴 것 같으면 오늘 본문에서 안식에 못 들어갈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을, 홍해를 건너왔지만 실패하고 요단강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은 땅에 대한 미련을 여전히 본인이 갖고 있었던 겁니다. 모세는 물에서 건져내었지만 그래서 물에서 건져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땅에 대한 집착이 있었던 거예요. 주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땅에서 물과 구분하고, 물에서 불과 구분합니다.

그게 바로 광야 때 주었던 율법이 있어요. 신명기 4장 33절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어떤 국민이, 이 세상에 어떤 민족이 불속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생존할 수 있었는가,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이야기에요. 굉장히 축약해서 말씀드리면 호렙산, 불붙은 산이 시내산, 호렙산이에요. 그 호렙산에서 모세가 불 가운데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물속에 들어갔다가 건짐 받은 모세가 이번에 하나님 만날 때는 불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요. 누구든지 불속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불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죽었다고 알고 있었던 모세가 불 속에서 다시 살아나올 때는 사람들은 모세가 살아나왔다고만 봤어요. 그러나 모세가 살아나온 게 아니고 모세는 돌판과 더불어서 살아나온 거예요. 말씀과 더불어서 살았던 겁니다. 모세는 자기 목숨과 말씀을 맞바꾼 거예요. 본인이 그렇게 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모세 너는 이미 죽었고 불속에서 튀어나온 사람이 되는 겁니다. 다만 모세가 튀어나온 게 아니고 모세는 율법을 전달하는 도구로서 튀어나온 거예요.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로서 불속에서 튀어나온 거예요. 불속에서 나오는 그 말씀이 구체화되는 것이 뭐냐? 제사법입니다.

제사법에 보면 제단이 있거든요. 그 제단에서 하나님께서 홀라당 그 불의 철판에다 다 태워버려야 돼요. 다 태워야 돼요. 다 태운다는 말은 인간의 궁극적인 죽음은 물에서도 죽지만 불에서도 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불에 다 태우고 남아있는 몸통이 있어요.

피는 제단에서 뿌립니다. 이런 것을 시간관계상 다 찾아볼 수는 없으니 여러분이 듣기만 하세요. 레위기 1장에 보면 몸통에서 기름과 피는 따로 구분해서 피는 다 뿌려요. 기름은 발라요. 그 뿌려진 피와 기름은 네가 손댈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제물을 양이나 소나 염소로 보지 말고 하나님 자체로 보자는 거예요.

하나님 자체로 봐서 하나님의 피와 기름에 대해서는 네가 손댈 수 없다는 거예요. 제단에다 피 뿌리고 기름을 발라놓습니다. 그다음에 남아있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양식입니다. 몸통이 고기거든요. 그 고기를 누가 먹는가? 그 백성의 대표자인 레위지파나 제사장이 먹습니다. 고기를 먹는데 그 고기를 먹을 때 레위인이나 제사장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 광야에서 살리려고 먹이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그 양식은 레위지파가 먹는 양식이나 제사장이 먹는 양식이 아니고 하나님이 먹는 양식이에요. 하나님이 레위인과 제사장을 대표로 해서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이 제사법입니다. 식사를 같이 해요.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나는 너와 한 식구가 된다는 뜻입니다. 식구라는 것은 천국가족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식사에요, 그게.

그 연기를 흠향하시는 양식이 돼요. 다 태우는 양식. 화목제에서는 그 남은 고기를 같이 먹어요. 하나님과 더불어서. 이것이 너희의 응식이다. 레위기에서 그렇게 하거든요.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는 너와 네 자녀가 너와 함께 정결한 곳에서 먹을찌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 희생 중에서 네 응식과 네 자손의 응식으로 주신 것임이니라 그 든 뒷다리와 흔든 가슴을 화제의 기름과 함께 가져다가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을찌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너와 네 자손의 영원한 응식이니라”(레 10:14, 15)

그러면 이 레위지파나 제사장들은 뭐냐 하면, 늘 불과 가까이하면서, 피와 가까이 하면서 모세가 경험했던 그 불 속의 세계, 모세의 죽음 이후의 세계, 하나님이 모세를 받아준 그 세계, 그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떤 작동이 있고,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는지를 몸소 체험하는 세계가 율법 안의 세계에요. 불 속의 세계에요. 이게 말씀 속의 세계입니다.

믿고 자시고, 뭘 믿고 안 믿고 그런 세계가 아니에요. 그냥 침범해서 쳐들어온 세계에요. 율법이 다스리는 세계지요. 그 세계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뜻이 무슨 뜻인지를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미 죽은 자의 세계, 죽은 자는 죽은 자가 장사하면 안되고 이미 인간이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장례를 치르는데 장례 치르고 난 뒤에 새로운 세계가 마련되어 있어요.

새로운 세계가 마련되어 있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참여해서 한 식구로, 가족으로서 같이 산다는 게 이게 무슨 뜻인지를 그들은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비로소 그 세계의 실체가 성령을 통해서 알려지게 됩니다. 그게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아셔야 되고 보셔야 돼요.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마태복음 7장에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한다고 해서 이게 합격되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의 주 되심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야 돼요. 성령을 주는데요, 고린도전서 12장 4절에 보면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 가지’와 ‘같음’을 같이 통합할 수 있는 것은 나만의 세계가 소멸될 때, 사라지고 이게 죽게 될 때는 비로소 여러 가지와 하나가 통합이 성립이 돼요. 여러 가지가 다 하나에서 나왔다는 그것이 성립이 돼요. 그런데 내가 안 죽으면 우울증 걸려서 내가 안 죽으면 나는 나고 너는 너라서 ‘여러 가지’가 그냥 ‘여러 가지’가 돼요. 하나가 안돼요.

고린도전서 12장 12절에 보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많은데 하나가 되고 하나인데 여러 가지가 되는 것,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육체로 태어난 이상 불가능해요. 족보를 따지고, 너는 너고 나는 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교육받기 때문에 남하고 경쟁하고 비교하는데 익숙해 졌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그런 것은 네가 아직도 살아 있다고 여길 때나 가능하다’는 거예요. 살아 있을 때나. 내가 살아 있으니까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신경 써서 우울증 걸리는 거예요. 내가 이미 죽은 자고 주님께서는 레고, 하나의 장난감 조각으로 본다니까요.

우리가 천국을 가는 게 아니고 주께서 우리를 가지고 천국을 만들어요. 하나님의 가족을 만들어요, 우리를. 이미 죽은 자를 가지고. 내가 내 인생을 다룰 어떤 부담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요. 옛날 중세 때는 군주가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서 종교도 끝나버렸어요. 군주의 종교가 그 백성의 종교가 됩니다.

왜? 다른 종교 믿으면 경찰들이 칼 들고 오기 때문에. 그래서 믿는 척을 하지요. 믿는 척만 하고 자식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마리아가 알아서 다 처리해주고. 좋~지요. 지금 유럽의 대성당들에 교인 없어요. 그 사람들에게 물어봅시다. “성당 이렇게 잘 지어 놓았는데 일요일에 왜 축구 보러 가고 성당에 안갑니까?” “내 종교는 내가 결정합니다.”

내 종교는 내가 결정한다는 거예요. 아니에요. 나는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5절에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이 말은 너는 너 자신이 누구냐, 로부터 시작하면 안 되고 우리는 어떤 한 몸이 있는데 그 몸중에서 우리는 무슨 기능을 담당할 뿐이냐,를 생각하라는 거예요.

너나 나나 한 몸을 위한 구성요소에 불과한 거예요. 천국요소에 불과한 거예요. 단독적으로 나의 가치, 의미를 따로 빼내면 안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 인생이라는 것은 없어요. 내 인생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나의 이야기는 주님의 이야기지 내 이야기 아니에요. 왜 내가 걱정합니까? 21절에 보면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오늘 본문 히브리서에서는, 구약에서는 이걸 몰랐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한 몸이라는 것을 모르고 내 살기 바빠서 각자 바알 섬기고 아세라 섬겼던 겁니다. 모세를 원망했다는 거예요. 모세하고 자기하고 한 몸같은 거지요. 모세는 어디에 밀리는가? 모세에게는 말씀이 있어요. 말씀이 자체적으로 완성의 길로 가고 있어요. 약속의 땅으로.

그러면 우리는 뭐냐? 우리는 지금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버렸어요. 조건이 뭐냐 하면, 내가 주님을 믿었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했습니다, 주를 소망했습니다, 나는 주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이런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지켰습니다, 하는 그걸 없애라 그 말입니다, 그걸!

내가 회개했습니다, 내가 반성했습니다, 내가 교회 나왔습니다, 그걸 없애라 그 말이지요. 그걸 없애는 방법은 히브리서 4장 12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를 완전히 발라내지요. 따라서 믿지 않는 자는 못간다, 그 말은 우리를 가게 하는 믿음의 맏물이 있어요, 맏물. 시간 가더라도 진짜 이것은 꼭 보셔야 되겠습니다. 신명기 26장 1-3절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당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이걸 누가 합니까? 우리의 맏물 되시는 예수님께서 하셔요. 누가 나보고 죽었다, 할 때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그 줄의 제일 끝에, 제일 앞에 주님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 뒤에 서 있어요. 주님께서 이 땅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 죽은 자리 뒤에 서 있는 거예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죽는 문제 네 문제가 아니고 내 문제였어, 인간아! 이 바보 같은 인간아! 자꾸 네가 너 자신의 죽는 문제, 사는 문제 연연해하지 말라. 죽음은 너한테 해당 없어. 내가 내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네가 시체가 된 거예요. 십자가 죽음이 뭔가를, 이 쪼다같은 인간도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이 세리와 창기같은 인간, 강도도 구원된다는 사실을.”

그 줄, 맏물이 보이는 줄이에요, 그게. 다른 인간들, 나 중심의 우울증 걸린 인간들은 줄이 없어요. 자기가 시작이고 자기가 마지막이에요. 자기 인생 자기가 개척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천당 가려고 교회 나온 거예요. “뭘 믿으면 됩니까? 주여주여, 할까요?” 다 실패에요.

지금도 이 조건은 유효합니다. 예수님의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서, 우리 믿음이 아니지요, 주님의 믿음이 들어와서 그 믿음으로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여전히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구원받습니까, 천국 가겠습니까’라는 생각으로 무심코 툭 튀어나오는 버릇이 아직 육신 속에 남아있음을 우리가 인정하고, 말씀으로 우리를 쪼개고 성령으로 우리의 형편을 확실히 해서 주님의 양으로서 주님 손에 있는 자는 영원히 영생을 빼앗기지 않는 그 기쁨과 반가움으로 저희들 안에 꽉 차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