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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스가랴 10:6-12 / 이중 출애굽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가랴

스가랴 10:6-12 / 이중 출애굽

정인순 2024. 5. 26. 10:12

 음성 동영상 Youtube

 

이중 출애굽

 

이근호
2024년 1월 24일                  

 

본문 말씀: 스가랴 10:6-12

(10:6)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내게 내어 버리움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

(10:7) 에브라임이 용사 같아서 포도주를 마심 같이 마음이 즐거울 것이요 그 자손은 보고 기뻐하며 여호와를 인하여 마음에 즐거워하리라

(10:8)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 불어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

(10:9) 내가 그들을 열방에 뿌리려니와 그들이 원방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의 자녀와 함께 다 생존하여 돌아올지라

(10:10)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돌아오며 그들을 앗수르에서부터 모으며 길르앗 땅과 레바논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리니 그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

(10:11) 내가 그들로 고해를 지나게 하며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홀이 없어지리라

(10:12)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케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을 받들어 왕래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왜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놓고서는 영원히 약속의 땅에 살지 못하고 과감하게 추방시켜 이스라엘을 멸망케 하시는가요? 그것은 그들이 애굽에 나올 때 그들 끼리만 나온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린양과 더불어 나왔습니다. 그들의 앞길을 막던 장애들이 그때마다 치워지는 것은 그들을 위함이 아니라 어린양의 존재 때문입니다.

이들은 어린양이 죽어야 하는 취지를 잘 몰랐습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처럼 생존하고 번성하기만을 원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추방하여 도로 이방민족의 종으로 난민으로 흩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다시 그들을 약속의 땅을 불러들이겠답니다. 이 추방시키고 다시 제 2의 출애굽을 하시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통해 다윗을 왕으로 한 완성된 왕국을 계획하셨던 겁니다. 그 증거는 바로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는 기간이 70년이라고 못박은 데 있습니다. 에스겔 37:24에 보면, “내 조상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왕으로 나타날까요?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은 계약의 체제를 바꿀 의사가 전혀 없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하실 때,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대기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 15: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을 옮길 때는 저쪽 약속의 땅의 토착민들이 그 땅을 살 수 없는 정당성을 위해 그들을 심판하는 형식으로 히브리인들을 동원시킬 작정이었던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려면 그들의 죄가 다시 다윗 왕을 모실만큼 죄가 관영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의 정화 기간이 70년으로 정해진 것은 다윗언약 체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유지하겠다는 차원입니다. 70년이라는 기간은 사무엘하 5:4에 근거합니다. “다윗이 삼십 세에 위에 나아가서 사십 년을 다스렸으되” 즉 다윗의 출생가 그가 죽을 때 까지의 생존 의미가 약속의 땅에 건설한 하나님 왕국의 체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70년간 약속의 땅에서 살았던 그 다윗과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계약을 맺어 하나님 왕국을 만드시고자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 언약에 준해서 추방되어야만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충분히 관영했음을 보이는 상황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이 지상 사역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런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분에 사람들 손에 죽었다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고기를 잡던지, 농사를 지었기에 사람 손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목수 일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전체 일은, ‘인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면서 살해 당하신 겁니다.

그 당시 유다 땅과 예루살렘은 혼혈 출신으로 가득한 북쪽 갈릴리 지방과 비교해서 자신들을 빛의 백성으로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활동은 소위 ‘어두움의 고을’부터 시작하셨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사 9:2)

이 하나님과 끊어짐은 제자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에베소서 5:2에 보면,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다 드렸습니다. 참 훌륭하고 장하고 대단한 일을 하셨지요. 문제는 주님의 그 대단함에 아무도 합세할 의사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덕을 보려고 하지 예수님과 같이 모든 것을 드릴 의사가 없습니다. 설사 베드로처럼 자신의 목숨을 예수님을 위해 걸었지만 예수님께서 거부하셨습니다. (요 13:37-38) 즉 아무도 예수님과 함께 할 자가 없습니다. 첫 번째 출애굽 때에 사람들이 어린양의 덕은 봤지만 어린양의 취지에 진정으로 합류한 자는 아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2중 출애굽을 생각해 두셨습니다. 먼저 이 더러운 세상에서 깨끗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예수님께서 단독으로 출애굽을 단행합니다. 그리고 난 뒤, 예수님과 합류될 자를 데리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출애굽을 단행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가시면서 형성한 것은 예수님과 접속이 가능한 관계를 완성해서 예수님이 부르시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님과 연결이 가능하도록 하신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어떻게 연결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심로 모든 인간은 실은 ‘하나님의 원수’에 불과한 것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롬 5:10) 즉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원수가 되는 이유는 예수님의 시작과 끝점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작점과 끝점과 일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성도는 그의 시작점을 자기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십자가에서 버려진 그 ‘그 버려짐’부터 출발하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마태복음 1:23에서는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이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즉 이스라엘의 수평적 출애굽이 신약에서 수직적인 경로로 바뀝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수직적으로 제자들을 놔두고 하늘로 승천하십니다.(행 1:8)

제자들은 걱정이 늘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버리고 가신 것처럼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천사 둘이 나타나서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올라가신 대로 그대로 내려오신다고 핬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제자들은 한데 모였을 때에 불이 각 사람머리 위에 주어집니다. 불의 심판을 제자들이 먼저 받은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이 성령의 활동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곧 이어 그들은 입을 벌려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활동입니다. 임마누엘을 전하는 겁니다. 막힌 세상에서도 예수님 함께해서 천국갈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음을 제자들은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원한 출애굽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시작점을 십자가로 늘 이동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8강-스가랴 10장 6-12절(이중 출애굽) 240124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10장 6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내게 내어 버리움이 없었음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 에브라임이 용사 같아서 포도주를 마심 같이 마음이 즐거울 것이요 그 자손은 보고 기뻐하며 여호와를 인하여 마음에 즐거워하리라,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 불어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 내가 그들을 열방에 뿌리려니와 그들이 원방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의 자녀와 함께 다 생존하여 돌아올찌라,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돌아오며 그들을 앗수르에서부터 모으며 길르앗 땅과 레바논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리니 그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 내가 그들로 고해를 지나게 하며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홀이 없어지리라,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케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을 받들어 왕래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멘.

다시 애굽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제2의 출애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출애굽이 한번으로 다 완료가 되어야 될텐데 그들은 다시 이방나라로 포로잡혀 쫓겨나가고 또 다시 두 번째 출애굽이 그들에게 굳이 있어야 되겠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애굽 이스라엘이 첫 번째 출애굽해서 나올 때 어린양과 더불어 같이 나왔거든요.

그런데 어린양과 인간의 생각이 이렇게 연결을 제대로 합치된 마음으로 나왔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분명히 어린양이 앞장서서 홍해도 건너고 요단강 건너고 약속의 땅에 도착했는데 문제는 그 어린양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 공통점이 없어요. 연결점이 없다고요. 그들은 어린양 덕분에 약속의 땅에 오기는 왔는데 그점에 대해서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히 여기는데 어린양의 의식과 그들의 의식은 지금 연결되지 않은 상태가 되어버린겁니다.

약속의 땅에서 사는 조건이 뭐냐? 어린양의 출애굽 정신을 계속 계승하고 이어나가는건데 그들은 약속의 땅에 차지하고 난 뒤에 “이만하면 됐다. 우리 땅있다. 다른나라도 땅 있지만 우리도 땅있다.” 이러고 어린양이고 뭐고 형식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올 때 어린양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연결이 결합되지 않은채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혜택만 주시고 결국은 그들로 거기서 다 드러내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를 알려면 예수님께서 이땅에 왔을 때 어느 누구도 예수님하고 생각이 결합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과 관련지어서 생각하면 돼요.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보통 예수 믿는다고 하잖아요. 예수믿는다고 하는데 사람이 누굴 믿으려면 당신은 지금 뭐하고계십니까?를 물어봐서 그사람이 하는 일이 내게 도움된다 싶으면 우리는 그걸 믿는다고 이야기하는거에요. 그런데 예수님 하는 일이 무슨일인지 모든 인간 보기에는 엉뚱한 일을 하신거에요.

예수님께서 뭐 귀신쫓아내고 예수님께서 피흘려서 죄사함 준다 하니까 고맙기는 되게 고마운데, 고맙기는 고마워요. 고마운데 예수님과 같이 결합되기는 싫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야돼요. 교회를 뭐 다니고 예수믿는게 한 50년 됐다 해도 확실하게 물어봐야됩니다.

“예수님 뭐하십니까? 예수님 지금 뭐하시는거에요? 농사지으면 농사짓죠. 직장생활은 직장생활하죠. 사도바울은 천막장사했죠. 다른사람은 고기잡는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공무원으로 군대에 근무하는사람이 있고 각자 자기 할 일이 있어요. 어떤 가정주부는 애 키우고, 할 일이 있는데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 당신은 직업이 뭐에요? 지금 뭐하고 계십니까? 목수도 아니고, 아버지가 목수죠. 그럼 본인은 뭐 백숩니까? 노시는 분이에요? 뭐하는거에요?”

우리는 예수님이 뭐하는 분인줄도 모르고 예수님 효과를 보려고 하는 생각이 있어요. “고생하시고 나는 덕이나 봅시다” 이런식으로 해가지고는 처음 출애굽할 때 다떨어져 나간 것 하고 똑같은 겁니다. 어린양과 결합이 안된 것처럼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았다 이야기하면서 예수님과 결합이 안돼요. 연결이 안된다고요. 결합점이 전혀 없어요. 예수님이 한 일은 하늘과 땅이 끊어졌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땅에 일하시는겁니다.

예수님이 한 일은 농사짓는것도 아니고 고기잡는것도 아니에요. 세관에서 세금걷는것도 아닙니다. 그들을 제자로 삼되 예수님 본인의 일은 지금 인간들은 하나님과 단절되어있다 그일을 하기위해서 온겁니다. 처음에 유대민족들은 갈릴리를 어둠이라 보고 자기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은 빛의 세계로 봤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갈릴리는 혼혈아들이고 유다와 예루살렘은 그나마 정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에 준해서 “저들은 잡족이고 우리는 정통이다. 그들은 어두움이고 우리는 빛이다” 하는거에요. 이사야 9장에보면 거기에 예언되어있습니다. “어둠에 속한 곳에서 빛이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어두움이라고 지칭되는곳에서 시작해서 유다 예루살렘을 공략합니다.

너희들 보기에 갈릴리가 끊어졌잖아? 끊어졌지만 이사야 9장에 보면 그 끊어진 어두움에, 이사야 9장 잠시 보면 이렇습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하면 예수님의 시작점과 그당시 유대민족의 시작점이 맞지를 않아서 예수님과 통한게 없는거에요. 인간들은 시작점을 자기부터 시작해요. 나 구원받겠습니까? 나 천국 가겠습니까? 항상 시작점을 자기로부터 한다고요. 주님께선 모든 인간의 생각과 시작을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을 아시고 그게 그 생각 자체로 인해서 이미 하나님과 끊어졌다는 그 이야기 하기 위해서 오신거에요.

그래서 제2 출애굽이지만 저는 제2 출애굽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중 출애굽이에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먼저 어린양이 오셔서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어두움의 땅에서 빛의 나라로 건져주는 것, 이게 출애굽이고, 그렇게 출애굽이 되고 난 뒤에 다시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와서 이 어두운 세상,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어둡다 하는 것을 확정지어놨기 때문에 어두운 세상에서 끄집어내서 하늘나라 올리는 것, 이게 이중 출애굽이 되어야 돼요.

이중 출애굽, 신약에 나오는 이중 출애굽을 구약에 있는 수평선, 지평선의 관점에서 평평한 관점에서 설명하면 뭐냐? “너희들이 약속에 땅에 왔다가 추방되어서 다시 돌아온다”, 수평적인 동일성을가지고 장차 메시아가 오는 수직적인 동일성을 설명해주는겁니다. 그게 스가랴 예언이에요. 상당히 여기에 복잡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만은 오늘 그 복잡한 문제를 놓칠수는 없어요. 꼬깃꼬깃 챙기면서 한번 나가봅시다.

수평적부터 먼저 이야기합니다. 자, 수평적부터 먼저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 자손을 출애굽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애굽에서 대기상태에 놓이게 했습니다. 창세기 15장 13절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기를, 너희 후손이 4대만에 나올 것이다. 4대가 될 때까지 너희는 너희 자손을 괴롭게 할 것이고 그렇게 4대만에 나오는데 왜 3대째 안하고 2대째 안하고 왜 꼭 4대를 거쳐야 하는가?

그것이 창세기 15장 16절에 보면,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들어가야될 약속의 땅의 죄가 심판 받을만큼 숙성되지 않은거에요. 죄가 무르익지를 않은거에요. 죄가 무르익어야 너희들은 하나님과 끊어졌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살 자격 없고 하나님과 이어진 백성이 대신 살아야 된다는 것의 정당성이 확보돼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있다가 추방되었고 추방되었는데 다시 출애굽 된다는 거에요. 출애굽 되는, 다시 돌아오는 그 연도가 역대하 36장 21절에보면, 그 기간이 나와있어요.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물론 예레미야 29장 10절에보면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예레미야 29장 10절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왜 50년도 아니고 60년도 아니고 왜 70년이냐 하는거에요.

왜 꼭 70년을 지켜서 돌아와야 되느냐? 왜 그전에 돌아오면 안되는가? 그 이유가 돌아오시는 분이 약속의 땅에서 추방될 때 하나님께서 추방될 때 있던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이 있었습니다. 그 계약이 다윗계약이었습니다. 다윗과의 약속을 해놨어요. 이제 다윗을 앞장세워서 다윗을 왕을 세워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땅에서 영원히 통치하겠다 라고 계약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그 백성들이 율법대로 지키면 너희가 이 땅에서 영원하리라”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지키지 않으면 이땅에서 너희들이 멸절할 것이다”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모세언약도 마찬가지에요. “율법을 지키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와도 복을 받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들어가도 저주를 받고 나와도 저주받는다.”라고 했어요.

이것은 바로 모세언약도 그렇고 율법도 그렇고 다윗 언약도 그렇고 하나님과 인간이 살만한 같이 살만한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을 왜 영원히 쫓아 내면 되지 왜 다시 출애굽해서 그 이방나라에서 다시 들어오게 하는 이유가 뭐냐? 그게 70년에 그 내용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보기전에, 에스겔 37장에 보면, 아주 에스겔이 이상한 예언을 한 것이 있어요. 에스겔 37장 24절, 이 대목을 제가 수십번 보면서도 볼때마다 참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는 대목인데, 제가 읽어보면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라고 되어있어요. 너희 나라가 망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조치가 내리는데 그 조치가 뭐냐? 다윗 왕을 다시 그들의 왕을 내세운다는 조치를 내세웁니다.

이게 왜 이상하냐 하면 다윗은 이미 돌아가신 분이에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에요. 왜 죽으셨던 그 다윗왕을 다시 살려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느냐 이말이죠. 그렇게 인물이 없는가? 왜 특혜를 주는가? 다윗이라는 인물이 뭐기에 특혜를 주는가?

그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오면서 하나님이 생각한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 나라는 약속의 땅에 다윗왕으로 체제를 갖추는 것으로 이미 다 찼어요. 다른 구조는 없습니다. 그게 구조의 종결이에요. 종결된 구조가 약속의 땅에 다윗 왕입니다. 이걸 인간들이 우상을 섬겨가지고 망쳐버렸거든요. 하나님께서 한 고집 하시는거에요.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망친 그 땅, 그 땅 너희들이 들어와서 망쳤기 때문에 나가라는겁니다. 그걸 브레이크 타임이라고 하죠. 식당에서 3시부터 5시까지 나가주세요. 저녁 손님 받아야되니까. 특히 뷔페할때도 그런거 많죠. 브레이크 타임이죠. 나가라는거에요. 역대하 36장 21절에 보면,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땅이 너희들이 이땅에 들어오기 전에 온전한 구조, 하나님의 왕국이 되기 전에 너희들 괜찮았다. 그러나 너희 왕국 되고 난 뒤에 땅 다 배려놨다.” 약속의 땅 다 아주 조져놨다 이말이죠. “브레이크타임 갖자. 나가라. 손님보고 다 나가라.” 70년동안에 땅이 안식을 누리는거에요. 근데 안식을 누릴려면 7년을 하든지, 뭐 40년을하든지 희년처럼 50년 해야될텐데 70년을 왜 안식하느냐? 다시 메시아로서 다윗왕이 온다는 그 의미를 기간으로 하나님께서는 묘사를 한겁니다.

그 이유가 사무엘하 5장 4절에 보면, 다윗언약을 맺은 당사자 다윗이 출생해서 그 죽을때까지가 70년이에요. “다윗이 삼십세에 위에 나아가서 사십년을 다스렸으되” 다윗의 언약의 의미를 다윗이 있어줘야 의미가 살아요.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은 언약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 언약을 계속 고집해나가시는거에요. 왜? 그게 왕국이기 때문에. 이 땅에 왕이 있는 왕국이기 때문에 그래요. 다윗이전에는 왕이 없었어요. 하나님이 세운 왕은 다윗이 처음이고 마지막입니다.

다윗있을 때 잘했어야 돼요. 그러나 그들은 다윗의 존재의미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고집이 세가지고 “몰랐으면 내가 알게 할게. 다윗왕을 세워준 내 취지에 대해서 알게해줄게” 다윗왕 다시 그 자리에 오는거에요. 에스겔 37장 24절에서 다윗왕이 온다. 설마? 그 다윗왕 물맷돌 해가지고 골리앗 이긴사람 다시 온거에요? 그럼 골리앗도 다시 또 죽었다가 골리앗 일어나야 되나요? 다윗이 어릴때부터 소년부터해서 왕 될 때까지 다윗이 솔로몬에게 위를 넘길때까지 그것을 다시한번 리마인드 해야되는가요? 타임머신을 타고?

요새 뭐 두 번살기 세 번살기 드라마 그런 것 많잖아요. 그렇게 다시 사는겁니까? 다윗 70년이 다니엘에서 뭐로 바뀌느냐? 70이레로 바뀌어요. 70이레로 바뀌면서 주님께서 이렇게 생각하는겁니다. 초반기 다윗은 수평적 시간속의 다윗이라면 다시올 다윗은 다윗인데, 다윗혈통의 다윗언약인데, 수직적으로 내려오시는 분이 옛날 수평적으로 다스렸던 그 다스림의 위를 그대로 이어받아서 수직적으로 아래위로 통일 시키는 영원히 고정된 이스라엘을 만드시는 계획을 하나님이 갖고계셨던 겁니다.

그러면 그 쫓겨났던 이스라엘사람들은 쫓겨난 이유를 알아야 돼요. 그들은 쫓겨난 이유가 다윗 언약을 위반해서 쫓겨난거에요. 다윗 이후에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다윗언약, 다윗의 등불의 의미를 몰라서 쫓겨난겁니다. 그게 아까 창세기에서 죄가 무르익어 숙성될때까지, 다시말해서 너희들이 하나님 다윗 언약을 이해 못할때까지 죄가 숙성되는겁니다.

다윗언약을 이해 못했다는 것을 신약에 와서 밝혀지는데 그게 뭐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을 이스라엘이 죽여버렸어요. 그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죽인 이유는 간단해요. “지금 너희들이 빛의 자녀라고? 유대인은 구원받는다고? 너희 잘렸어, 너희 끊어졌어.” 예수님 하는일은 인간은 하나님과 끊어졌다는 이야기를 계속하는거에요. 끊어졌다는 이야기.

실제로 어느대목에서 끊어졌는지 우리가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절에요.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되어있어요. 중요한 대목을 읽으면,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예수님이 참 훌륭한 일을 하셨지요? 왜냐? 전적으로 아버지께 다 바쳤으니까요.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훌륭하고 착하고 좋은분이라서 자기 몸을 다 드렸는데 우리는 우리것을 하나님이라도 드릴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이래보면 예수님과 우리사이에 어린양과 이스라엘 끊어진것처럼 이거는 연결 고리가 없어요. 예수님 훌륭하면 뭐합니까? 우리가 예수님 가는데 못따라가는데요. 따라갈려면 뭐 붙드는게 있어야 될텐데.

주님은 훌륭하시죠. 하나님께 다 바쳤으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바칠 마음 없어요. 아직 애가 6학년도 안됐는데 뭘 바쳐요. 아직까지 살 재미도 남아있는데. “아이고 훌륭하십니다. 예수님 존경합니다.” 그러면 그게 예수님과 같이 갈 때 따라갈 수 있는 연결점이 됩니까 그게? “아이고,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아이고, 대단하십니다.” 박수 쳐주면 돼요? 어림도 없는 소리죠.

베드로가 감을 잡았어요. 감을 잡고 에이, 모르겠다. 나도 바치자. 해서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예수님께 바친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거부했습니다. 이 말은 뭔뜻이냐 하면 우리 목숨 조차도 예수님 가는 그 나라에 따라갈 수가 없다 이말이에요. 연결점이 없어요. 신학하면 뭐합니까? 성경 100독하면 뭐합니까? 연결점이 없는데요. 우리는 다른 꿍꿍이 속을 갖고있는데요. 주님을 이용해 먹을 생각하지.

같이 갈 수가 없어요. 예수님에 대해서 연구 많이 해요. 그러나 같이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 연구 많이하죠. 영화도 명량 나오고 뭐 많이 나왔는데, 하, 그렇게 인생 살기는 싫어요. 죽을 때 영의정 한번 해야되는데 총탄맞고 죽어버리고 기껏해야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 어디 아이스크림 선전합니까?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 그렇게 허무하게 죽기는 싫은거에요. 존경은 해요. 한산도 가서 사당 이렇게 수학여행가서 뭐 이렇게 “존경합니다. 당신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후손들이 삽니다.” 하고 싶은데 따라하기는 싫어요. 긴칼? 긴칼도 싫어요. 길칼 옆에 차기도 싫어요.

사도행전 1장에 제자들이 묻습니다. “예수님. 이스라엘 회복하는게 언제입니까?” 예수님께서, “니가 알아서 뭐할래? 안가르쳐줘.” 다시말해서 너희들은 몰라야된다는거에요. 왜 몰라야 되는가? 핵심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인간의 시작점이 자기 존재로부터 시작하거든요. 시작과 끝이 안맞아요. 시작과 끝이 안맞으면 따라붙일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지식으로 성경지식으로 이렇게 가득 쌓아놓으면 그게 천국가는데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거에요.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그것 많이했어요. 바르게살면 된다고 생각하는거에요. 바르게 살든, 공부를 많이하든 지금 내가 공부를 하고 바르게 산다는 것은 아직 나의 자신에 대해서 뭔가 건전한 것이 남아있다는 미련을 갖고있기 때문에 그런거에요. 자기 부인이 안되는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수직적으로 통으로 이뤄버립니다. 하늘로 올라가요, 구름 타고. 여기에대해 제자들의 반응은 간단했어요. “오.” 다시 말해서 뭡니까? “또 헤어집니까?” 두 번째 출애굽이에요.

예수님이 먼저 출애굽을 하는거에요. 전에 어린양 따라서 나왔잖아요. 이제는 주님따라 하늘로 못올라갑니다. “평소에 몸무게좀 빼지” 몸무게 빼도 안돼요, 지금. 주님 홀로 출애굽하고 있어요. 지금 이 더러운 땅에서 홀로 빠져나가고 있어요. 제자들은, “어어” 이러고 있어요. 다른 아무런 대책이 없어요. “어이 베드로. 니 한번 대책 해봐라.” 무슨 베드로가 대책이 있습니까? 목숨도 안받는다는데.

여기에 천사 둘이 알려줍니다. “왜 쳐다보느냐? 왜 자꾸 여기서 헤어지는것만 쳐다보느냐.” 주님의 계획은 두 번째 출애굽에 있어요. 왜? 스가랴에 예언되어있으니까. 구약 역사 자체가 맞이한 것은 출애굽은 한번이아니고 두 번이라는거에요. 어린양이 먼저 출애굽되고 그다음에 어린양에 붙을 백성이 출애굽되는거에요. 이중 출애굽을 주께서 생각한겁니다. 왜? 그냥가면 인간은 자기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같이 들어붙어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서 뭐냐하면 예수님의 오심을 들어붙지 않는 것을 들어붙게해서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방식을 하나님이 채택하신거에요. 두 번째 들어가는 방안을 끄집어낸겁니다. 천사가 와서 “왜 쳐다보느냐? 주께서 올라가신대로 다시 온다.” 여기서 제자들은 알아야 돼요. 지금 왜 데려가지 않고 왜 떠나고 난 뒤에 다시 와야되는가? 지금 상태로서는 천국에 갈수가 없습니다.

공부하고 성경공부한다고 구원받는게 아니에요. 그런식으로 갈 수가 없어요. 시작점이 ‘나’이기 때문에 안되는거에요. 시작점 나를 어떻게든 파내야되는겁니다. 여행하고 출애굽하고 차이점이 뭐냐? 여행은 자기가 떠난곳을 알고 그리고 갈곳도 알고 가다가 다시 올곳을 아는게 여행 스케쥴이에요. 그러나 출애굽은 떠난곳이 어딘줄도 모르고요. 갈곳도 몰라요. 그냥 출애굽은 어린양이 가는대로 그냥 갈 뿐이었습니다.

요엘 2장 13절에보면, 이미 이스라엘나라가 망하고 난뒤에 선지자를 통해서 계속해서 “준비하라, 준비하라.”는 그 시그널을 계속 보내 왔었어요. 요엘 2장 13절에 이런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자, 이게 뭐냐하면 이스라엘에 있었던 그 역사를 어디다 집어넣는가? 이젠 우리 마음까지 침투하도록 그러한 수단 방식을 주님께서 하늘로 승천해서 올라가야 이게 장만이 돼요. 이점을 좀 알게 쉽게하기위해서 시편을 잠시 보겠습니다.

시편 137편에 보면,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슬 접근해서 놀립니다. “어이, 그 노래 뭔데?” “옛날에 여호와 섬길 때 노랜데요?” “그 노래 한번 해봐” 이게 아픈데다가 더 찔러보는 식으로 노래를 해보라고 합니다.

하니깐 4절에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찐대”라고 해서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찌로다” 그래서 뭘 그리워 한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 깨진 그 날을 생각하게 되면, 너무 가슴아프다는거에요.

이게 뭐냐하면 죄가 무르익어서 쫓겨나면서 뭐를 준비하느냐 하면 다시 돌아올 마음준비는 우리 마음안에 아픔이 있어줘야 된다는 거에요. 아픔이. 사람이 제일 불쌍한게 떠돌이에요. 강남에 아파트 한 채 있고 제주도 놀러가는 것 하고 갈곳도 없이 제주도 몽돌 해변에 가는것하고 이거는 완전히 달라요.

사법고시, 지금은 사법고시없지만, 사법고시 합격해서 곧 사법연수원에 들어가서 검사나 변호사나 판사가 되는 자기 영원한 안정된 직장이 보장되고 난 뒤에 뭐 성산포 가서 “야호” 할 수 있어요. 근데 방금 직장 짤려가지고, 애는 둘이고 애는 돈쓰는데 아내는 아프지 자기도 몸도 아프지 돈벌데 없지 성산포가면 그 바다에 뛰어들어 죽고싶어요. 안정성. 갈곳이 없는 것. 이것 기가막힐 짓이거든요.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 자기 고향이에요. 근데 고향에서 하나님이 추방시켜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남의 나라에 종 노릇 노예 생활 난민생활 할 수밖에 없지요.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요. 그런데 시편 126편을 한번 보게되면,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열방에게 자랑하는거에요.

“우리하나님 봐라 우리하나님이 해냈잖아 봐라. 우리를 다시 고향으로 돌려 보내잖아. 이래도 안살아있어? 여호와 살아있는거야.” 하는거에요.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그다음에 유명한 구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눈물이 없는자는 기쁨이 없어요.

바로 요엘 2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니 마음을 찢어라.” 마음을 찢어버리면 다시 다윗왕을 줄 때 다윗왕이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죽음으로서 어떤 인간도 하늘나라를 고향삼을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거에요. 왜냐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그 죄의 숙성을 니가 못받아들였기 때문에 문제라는겁니다. 로마서 5장 10절, “우리는 다 하나님께 원수된 자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다 할 정도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대해서 너무나 무지했습니다.

원수이면서도 원수인 것을 모르고 시작을 “하나님 저 구원해주세요. 저 천당보내주세요.” 원수 주제에. 이걸 몰랐던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 대신 죄를 가져가서 우리의 진짜 모습을 십자가에 걸어놓고 보여준거에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게 내가 할 소리냐 니가할 소리냐? 니가 할 소리잖아. 왜 니 주제 니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몰라? 너 버림받았어 너 짤렸어.” 이게 예수님이 와서 할 일이 이거에요. 잘린거에요.

고향도 없습니다. 이미 잘렸으니까. 그럼 이제 어떻게 해요? 주님께서 출애굽할 때 시작을 하늘나라로부터 시작해서 끝을 하늘나라로 돌렸습니다. 주님은 출애굽에 오는것과 가는 것을 알아요. 수직적입니다. 인간은 수직적으로 자기 원래 자리가 뭔지를 인간은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이 없어요. 마귀는 자꾸 거짓말했죠. “니가 시작이야, 너가 시작이고 인간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시작은 너가했으니까 시작된 너를 니가 지켜야지.” 맨날 마귀가 우리에게 그걸 가르쳤어요.

다시 말씀 드립니다. 예수님 이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뭡니까? “너희들 다 잘렸어. 너희 다 하나님께 버림받았어.” 지금 그 일을 하시는 거에요. 고기잡고 농사짓는 일을 하신분이 아니에요. 목수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 아버지의 일을 우리에게 알려주신거에요. 우린 자신의 일에 미쳐있고요. 우리 자신의 일은 뭐냐? 이왕 태어난 것 시작점이 나니까 성공으로 마감해보세. 이게 우리 일이에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된 자에요. 처음으로 우리의 시작점을 이야기했어요. “너는 바로 죄를 지어서 원수였었어. 그래서 너는 예수 내가 오더라도 붙잡을 수 없는거야” 따라서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는 존재에요. 자, 그러면 그다음의 조치. 제2 출애굽은 어떻게 되는가? 사도행전 2장에서 그렇게해놓고 120명에게 기도할 때 여기 2장 1절에보면,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불의 혀에요. 하, 참 이것도 하여튼 신비로워요. 왜? 불은 무엇이냐? 불입니다. 불은 불이죠. 각자 머리위에 불이 왔어요. 그들중에 아무도 이게 성령이란 것을 안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불이 왔는데 불이 왜 와야 되는가. 일단 태워요. 일단 불의 심판을 받게합니다. 먼저 심판을 매를 먼저 맞게하는거에요. 심판을 받게하는거에요. 그러면 뭘 심판하는가? “나는 시작점입니다. 내가 기도해서 응답받았어요. 내가 헌금해서 복받았어요.” 이 시작점을 심판해 버리는거에요.

시작점을 너로부터해서 예수그리스도로 바꿔라 이말이죠. 시작점을. 그래야 임마누엘이 돼요. 그런데 우리가 임마누엘 못되는 이유는 나를 안버리고 예수님을 연구하려하니까 이게 임마누엘이 안되는 겁니다. “예수 10년 믿었다. 복음 20년 했다. 근데 하나님이 나한테 해준게 뭐가있습니까?” 이런식으로. 목만 쉬었지. 목이 갑자기 목감기가 되어가지고. 기도 많이 해서 된 것 아니에요.

불이 올 때 이게 성령인줄 몰랐어요. 그냥 불로온거에요. 서로를 보며 “어, 당신 불.” 똑같은 입장. 성격이나 인품이나 관계없이 전부다 심판받아야될 인간들이에요. 그런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그 불이 태우질 않고 불이 뭐냐? 그다음부터는 이게 사람의 입을 열어서 예수님에대한 복음, 십자가와 부활에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는거에요.

아, 그러니 이게 뭐냐하면 시작점이 “나 예수믿고 천당간다. 나 예수 믿고 잘됐다.” 시작점이 나로부터 시작한 것이 십자가부터 시작하게 하신거에요. 그게 마태복음 1장에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죄에서 구원할자. 구원이 되려면 우리를 우리의 원래 죄인자리에다가 집어넣어줘야 이게 구원의 개시가 된겁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니 행한 것 소용없다는거에요. 니 목숨도 더러워서 안받아. 목숨도 안받는데 무슨 선교 전도 그런걸 받아요? 누가복음 15장에나오는 탕자이야기. 탕자이야기는 간단합니다. 탕자는 집나오고 난 뒤에 자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자기대신 자기자리에 아버지가 차지하고있어요. 나는 내 없어도 아버지만 있으면 아버지가 반지를 주든 안주든 쫓아내든 관계없이 나는 그걸로 족합니다.

아버지를 알게 된 거에요. 그전까지는 뭐냐? 집나가기 전까지는 나에 대해서 연구했던겁니다. 아버지가 그냥 있겠지 생각했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십자가를 경유해서 내가 죄인될 때 비로소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되는겁니다. 나를 죄인 되게 하신 그 자체가 사랑이고 나 인생을 쫄딱 망하게 한게 주님의 복이고 사랑이에요. 성도라하는 것은 그사람이 뭐 얼마나 많이했느냐를 가지고 하는게 아닙니다. 벌써부터 저쪽오면 냄새나요. 이게 고린도후서 2장에나오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래서 술냄새 하면 벌써 술냄새 나고 담배 피우면 담배냄새 나고 다 나요. 여기는 뭐냐? 망하는자에게는 지옥으로 가는 냄새가 나요. 지옥가는 냄새가 뭐냐? 나는, 나는 나는. 그런데 구원 받는자는 복음의 냄새가 나요. 주님은, 주님은, 주님은 우리를 막아놓고 살렸다. 너희 못들어간다 해서 우리를 보내주는 방법이에요. 그래서 첫 번째는 우리가 못들어가는거에요. 갈 수 없던 존재에서, 그걸 새삼 알게 된 것을 기뻐해야 돼요.

우리는 죽어도 천국 못 갑니다. 지옥갑니다. 이걸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복음에 냄새가 막나는 사람이에요. 좀 나는거 같아요. 언제 죽어도 남는장삽니다. 우리는 언제죽어도 왜 지금 죽이십니까 하지 말고. 시작점이 우리자신이 아닌 시작점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끝으로 마태복음 27장에서 이방인 백부장이 이걸 발견했어요.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고 난뒤에 예수님은 아들이다 이게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 죽는모습을 보고 “저분이야. 저분이 진짜 메시아다.” 죽는 메시아를 메시아로 믿었어요.

왜? 내 대신 죽으시니까. 정작 죽어야 되는 것은 예수님 죽는 것 보고 “아니야 아니야, 내가 죽어야돼”라고 백부장은 생각한 겁니다. “내가 죽어야 돼. 왜 주님이 죽으십니까?” 주님이 생축이고 주님이 제물이 되시거든요. 이제는 그 마음이 우리 새언약, 다윗언약 새언약에 의해서 우리 마음속까지 들어온다는 것이 히브리서 10장 16절에서 17절에 나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그러니까 우리는 마음을 찢어야 되죠.

찢어서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그 들어온 하나님의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우리에게 들어오길 바랍니다. 그렇게되게 되면 다시는 죄를 위해서 제사드릴게 없다는겁니다. 우리쪽에서 할건 없고 남아있는 것은 우리 속에 주께서 분란을 일으키든 뭐 어떻게 되치든 매어치든 주께서 하는 일만 여러분들이 우리안에 늘 구경하시면서 어떤일이라도 주께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시작점이 잘못잡혔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주께서 뭘 해주시겠습니까? 그것이 잘못되었습니다. 주여, 우리는 버림받아야 마땅함을, 그게 우리의 시작점이 되게 해주시고 거기서 우리 대신 흘려준 그 예수님의 피보다 더 귀한 복이 없음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