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스가랴 4:11-14 / 착각과 환타지 본문
착각과 환타지
이근호
2023년 10월 11일
본문 말씀: 스가랴 4:11-14
(4:11)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4:12)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4:13) 그가 내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4:14)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나무는 사람이 될 수 없지요. 그러나 천사는 두 나무를 두 사람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기름부음을 받은 두 사람’입니다. 즉 이 인간 세계 출신자로서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이는 곧 천사의 설명은 일상의 삶을 사는 인간들에게는 같은 말을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새롭게 추가될 정보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기름부임’을 받은 요소가 인간들을 밀어내기 때문입니다. 기름부음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뜻합니다. 이는 ‘기름부음’이 없는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기름부임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동등하게 보지를 않고 차등지게 하십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 인간세계를 띠로 형성해 놓은 인간들은 환타지라고 배격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을 정상적인 존재로 유지하고 싶어서입니다. 따라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세계는 더 확실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이 분명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분입니다. 하지만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두 분입니다. 1이 2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환타지의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환타지의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 안으로 들어오려면 눈에 보이는 방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바로 비유요 그림자요 모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 내용은 뒤에 감추고 가시적인 면으로 등장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왕직이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제사장직입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6)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내에서 많은 왕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는 인간들이 다른 이방나라가 부려워서 왕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영웅 중심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꾸미고 싶었던 겁니다. 이런 의식에 대해서 당연히 하나님께서 분노하십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왕’을 허락하신 겁니다.
분노의 표시로서 말입니다.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지도자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곧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호 13:10-11) 그리고 진노의 표시로서 왕을 없애버리십니다.
그 가운데서도 꾸준히 제사장직은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수의 제사장들의 출현을 이어가면서 지속되는 제사장직은 철폐할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가시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요 모형이요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를 통해서 반복되는 제사장들 말고 ‘별다른 제사장직’을 생각해 두신 겁니다. 레위지파에서 유다지파로 제사장직인 인수받는다는 것은 왕이 출현되는 지파가 제사장직도 인계받았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히 7:14-15) 멜기세덱은 원래 왕입니다. 그러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창 14:18)
제사장은 여럿이라도 이스라엘은 왕은 예전부터 오직 한 분입니다. 그 한 분이 제사장직을 담당하신다는 것은 왕직+제사장직이 하나로 통합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더는 다수의 제사장들이 제사를 담당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동안의 제사장들은 그저 반복해서 늙어죽어가는 자에 해당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여럿 죽음’이 아니라 오직 단 하나의 죽음뿐입니다. 제사장직마저 완수하는 왕의 죽음 뿐입니다. 죽음을 다루는 기능을 제사장이 합니다. 그런데 왕이 바로 이 죽음을 완성하신 겁니다. 곧 기름부음 받은 자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만 하나님께 받습니다. 이 죽음 외에 일체 다른 죽음을 하나님께 의미있게 보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환타지가 이 죽음의 세계에 나타난 것은 하늘의 성자 하나님께서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가 되기 위함이요 이 그리스도는 구체적인 가시적인 육신을 입고 와서 성립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도들을 핍박한 사울에게 ‘나사렛 동네의 구체적인 인물은 예수’로 오신 겁니다.(행 22:8)
성도는 하나님에게 눈동자와 같은 존재입니다. 분명 눈동자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 눈동자 안에 성도가 들어있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이는 곧 우리가 어떤 그림을 볼 때, 그 그림은 우리의 눈동자 속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그 그림 안에 우리가 들어있는 격과 같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사나 죽으나 상관없이 살아 있는 우리에게 찾아들어야 비로소 그리스도, 곧 ‘기름부임을 받은 자’로 완성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발생되는 상황에서 일반인은 자신이 평생 착각 속에 살아왔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떤 착각 말입니까? 죽은 자임에도 훌륭하고 정당하게 살았다는 착각말입니다.
고린도후서 4: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사람들은 자신을 사나 죽으사 무의미한 자로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적이란 딴 게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훌륭하게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환타지가 오면 비로소 인간은 자신에게 속고 살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야곱이 요셉의 아들 둘에게 축복주려는 대목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계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신에 대해서 착각했음이 드러납니다. “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창 48:17-19)
아버지 야곱이 자신에 대해서 오해한 바로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성도에게 있는 복인 겁니다. 바로 단회적 이미 완성된 이 상태를 위하여 오늘날 모든 성도에게 기름부임이 주어집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바로 이런 자가 오늘날의 ‘주님의 증인’입니다. 이들 속에서 심판과 죄사함과 재림의 스케줄이 담겨 있습니다. (히 9:27-2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죽음조차도 주님에게 넘어가야 의미가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강-스가랴 4장 11-14절(착각과 환타지) 23101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4장 11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그가 내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아멘.
질문이 뭐냐 하면 두 감람나무가 무슨 뜻입니까? 거기에 대해서 천사가 대답하기를 두 감람나무는 두 기름 발린 자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거에요. 이거는 동어반복이에요. 같은 말 하는 것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두 감람나무가 누굽니까?”를 물은게 아니고 무엇입니까 물었다고요. 나무는 나무니까 사람이 아니니까. 근데 “두 감람나무가 기름 발린 자다”라고 어떤 특정 사람을 언급을 한거에요. “이 나무는 무엇입니까? 이 두나무는 무엇입니까?” “그거는 두사람이다.” “그 두사람은 뭡니까?” “두나무다.” 아무런 추가적인 정보가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걸 가지고 ‘환타지’라고 이야기하는거에요. 환타지. 환상. 그러니까 이 환타지라는 것은 인간을 밀어버리는거에요. 밀어내는 겁니다. “저리가.”하고 밀어내는 것. 밀쳐버리는 것. 기름부음 받았다는 것은 이 인간세계에 ‘일반인들이 아니다’라는 뜻이에요. 기름부음, 환타지에 속한 두 인물입니다. 환상에 속한 두 인물이에요. 일반인들이 아니죠. 그러면 환타지의 인물은 뭐냐하면 하나님을 대신해서 일하는 사람. 그럼 일반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대신 일하지 못하고 밀려난 자. 뭐가 없기 때문에? 기름부음이 없는거에요.
기름부음이 있는 자는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 앞에 모셔 섰는자가 되고. 기름부음 없는 일반인들은 하나님에게 내침을 당하는 인간이에요. 이것을 명확하게 알려면 이렇게 하면 쉽습니다. 하나님의 원수, 하나님의 적이 누굽니까 이렇게 물으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원수에요.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환타지가 아니기 때문에, 현실이기 때문에 그런겁니다. 현실적 인간은 환타지에 밀려나가야되고 거부당하고 배척당하는 존재가 일반인이죠. 그래서 이 일반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 방법은 그들을 다 죽여버립니다. 그 죽일 때 일반인들을 죽이는 이유가 기름발린 자가 아니기 때문에 죽이는거에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름발린 자를 하나님께서 영원히 보존을 하는데요. 주앞에 서서 보존을하는데 이 보존하기 위해서 기름발린 자가 어디에 내려오느냐 하면 이 세상에 구성된 이 세상에 섞여 들어오는 환타지 세계에 기름 발린 자가 투입이 됩니다. 투입이 되면 그 기름발린 자가 이 세상에 왔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죽습니다. 그렇게 되면 죽음 질이 두 종류의 질이 생겨버려요. 하나는 그냥 일반인으로 죽는 죽음. 기름발린 것 관계없이 그냥 죽는 죽음. 아무 의미없는 죽음이죠. 그런데 기름발린 자가 이 현실 속에 들어와서 죽는 죽음. 그게 유일하게 가치있고 의미있는 유일한 죽음이에요. 다른 죽음은 죽음으로 취급도 안해요. 그것을 신약에서는 그걸 간단하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늘에 계신 성자 하나님께서 자기가 자기의 창조물 속에 들어올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기름 부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걸 그리스도라고 해요. 그리스도. 창조자가, 창조하시는 분이 창조물 속에 들어와 버리는 것. 그게 기름부음입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환타지가 하늘에 있는 환타지가 이 지상에 그리스도 예수, 예수그리스도 이름에 유일한 단독적인 환타지가 발생됩니다. 그래서 현실 속에 들어와있는 기름발린자, 또는 기름발린 자니까 아까 여러분 보시다시피 하나님 앞에서 일하시는 그분이 기름 발렸다는 그러한 환타지를 동반해서 지상에서 활동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활동을 하는데 이 스가랴가 선지자가 질문하기를 “이 감람나무 두 그루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어요. 왜 감람나무가 두 그루이냐? 왜 두 그루. 왜 하나가 아니고 둘이냐? 그거는 기름부음의 기능이 이 땅에 나타날 때는 한가지 기능으로 와요. 한가지 기능으로 기름부음이. 보통 구약에서 기름 부음의 직분을 세 개로 봅니다. 하나는 뭐냐? 왕이고, 제사장이고 선지자인데 이 선지자는요, 왕과 제사장직이 원활하지 않을 때 이게 파토날 때 그때 그걸 지적하고 고발하기 위해서 기름부은 선지자들이 등장해요.
왕이 왕답지 못하고 제사장이 제사장답지 못할 때 선지자에게 기름 붓거든요. 그럼 세 번째 기름 부은 선지자는 보조적인 거에요. 주된 내용이 아니고 주된 내용은 뭐냐 하면 왕과 제사직입니다. 근데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게 되면 이스라엘도 왕과 제사장 그 기름부은 분이 동행을 하는데 왕은 없어요. 이스라엘 처음 왕은 없어요. 왜 왕이 없느냐 하면 왕은 하나님이 왕이시기 때문에 이 땅에 현실적인 왕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이스라엘 통솔을 누가하느냐? 제사장이 하는거에요. 제사장이. 이스라엘 나라는 제사장 나라입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나와요. 거룩한 제사장 나라라고 했어요.
이거는 무엇을 염두에 두느냐 하면 세상 모든 나라는 왕이 있는데 여기는 제사장밖에 없다. 그러면 이스라엘 있어서의 왕은 어디 있느냐? 제사장을 제사장되게 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제사장들을 동반하고 있는겁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그 점을 보게되면 호세아 13장 10절에서 11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호세아 13장 10절에,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방백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이렇게 돼있어요.
왕을 달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나라가 되고싶어서 그들과 같이 되고 싶어서 ‘우리도 왕이 있어서 강한 통솔자가 있었으면 좋겠다’하고 달라하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달라고 하는 것은 살기 위해서 왕을 달라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왕을 줬어요. 줬는데 준 이유가 분노함으로 왕을 주고 진노함으로 폐하였노라. 줄 때도 분노해서 왕을 주고, 경상도 말로 하면 “아나 먹어라. 아나. 자. 느그들 좋아하는 너희들 지도자 왕. 자, 왕이야. 받았나? 내가 도로 뺏을 거야.” 왕은 보이지 않는 영역이어야 돼요. 보이지 않아야 돼요.
분명히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입니다. 제사장 나라에서 왕은 뒤에서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제사장직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유지하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왕의 역할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왕을 찾는 이유가 ‘그들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라는 거에요, 살기 위해서. 그러니까 왕 달라, 이게 바로 살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그러나 제사장의 역할은 인간들의 환타지가 없는 모든 인간은 그 환타지에 의하면 기름 부음을 받지못한 자들의 공통점은 결국은 다 죽어야 된다는 거에요. 왜? 살아도 의미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필요한 것은 기름부음이에요. 내가 살아있다가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그리스도 오신 것은 모든 인간은 살아도 소용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신거에요. 기름부음도 없는 주제에, 없다면 그들은 하나님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거는 살아도 아무 의미 없이 사는 거에요.
그냥. 죽어가기 위해서 사는 것은 그건 산다고 하는게 아니에요. 죽은거에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은 죽었던 이유를 알리기 위해서 제사장들을 그렇게 나타난 직은 제사장이에요. 왕은 안 보이지만 나타난 것은 제사장이에요. 그래서 제사장 나라에요. 제사장들은 우리들이 제사장들도 기름부었는데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무슨 일을 하느냐 하면 우리의 죽음은 아무 의미없는 죽음이라는 것을 제사장은 바로 제사 제도를 통해서 이스라엘 내내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 가운데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왕 되심이 살아있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있을 때 비로소 이스라엘은 의미있다. 그런식으로 이스라엘과 너를 연계시키지 말라는거에요. 이스라엘은 제사장과 관련돼서 있는 나라지 그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돼서 이스라엘이 있는게 아니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제사장은 기름 부었기 때문에. 기름부음과 관련해서 이스라엘이 있는 거에요.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 아무 의미 없는 나와 관련해서 그 기름부음이 있는게 아닙니다.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죽음을 다루는 업무에요.
이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반복해서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죽어가는 그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제사장들이 제사직을 하다보니까 제사장직도 반복해서 죽어요. 계속 죽어요. 아버지 죽고 아들 죽고 계속해서 해마다 죽어요. 나이 들면 다 죽어요. 계속해서 되풀이 되는거에요. 되풀이. 제사장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10장에보면 그점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10장 1절에서 3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라고 되어있어요.
반복해서 드리는 것은 온전치 못하다는거에요. 그럼 제사장직은 기름부은 제사장이 제사드리는 것은 온전치 않다, 온전치 않다, 온전치 않다를 매일같이 반복하는 거에요. 우리는 죽어도 살아도 의미 없다. 죽어도 살아도 의미 없다. 이걸 반복하는 거에요. 그러면 왜 그러느냐고 우리가 묻게 되겠죠. 여기 뭐라하느냐 하면 너희들은 그림자거든요. 그림자. 모형. 그리고 비유. 이런거다 이말이죠. 눈에 나타난 것은 현실이에요. 지금 스가랴에게 나타난 것은 환타지입니다. 환타지가 의미있고 환타지가 중요하지 눈에 보이는 것은 그 환타지를 위해서 소실돼야 되고 사라져야되고 없어져야 된다는거에요.
그게 히브리서에서는 뭐라고 되어있느냐하면 그거는 모형이기 때문에 모형은 언젠가 사라져야 된다는 겁니다. 히브리서 8장 5절에 잘 나와있어요. 8장 5절에보면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그림자라 하는 것은 안에 내용이 하나도 없어요. 실루엣이니까. 얼룩덜룩한 얼룩이니까. 그 자체에 어떤 내용이 없어요. 우리 인생 자체가 아무 내용이 없습니다. 뭐 똥배나와도 의미없고요, 다이어트해서 살빼도 의미없고 100살 살아도 의미 없고 한 살 돼도 의미 없고. 의미 없습니다. 이게 모형이고 그림자에요. 기름부음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기름부음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어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것은 무가치하단 뜻이에요. 그러기에 성도라 하는 것은 이미 자기가 그림자요 모형에 불과하고 납작한 실루엣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아는게 바로 오늘날 신약의 성도거든요. 그 성도에 대해서 고린도후서에 보면 이렇게 사도바울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4장 11절에보면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죽을 육체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생명이, 예수는 그냥 예수가 아니죠. 기름 부은 예수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에요. 그리스도라는 뜻이 ‘기름 부었다’ 이 말이에요. 기름 부은 자의 생명이 이 죽을 육체를 가지고 나타나게 한다면 그게 바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고 단번에 다 이루신 하나님의, 모형이 더이상 아니고 더이상 그림자가 아니라, 그게 진짜로 실체로 있는거에요. 그 실체가 스가랴에서는 뭐냐? 환타지로 스가랴 선지자에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실을 제대로 아는 성도라면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호소하고 이렇게 기도해야 옳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 인질은 이미 죽었습니다. 마음껏 공격해 주세요. 하마스에게 잡힌 인질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아주 묻지도따지지도 말고 마음껏 봉쇄 포위해가지고 싹쓸이 다 하세요. 뭐 우리가 기도 하든 안하든 벌써 주께서 그렇게 하고있어요. “하나님, 이 처벌이면 나는 어떻게 돼요?”라고 할게 없어요. 우리는 그림자요 모형이고 비유기 때문이에요. 환타지가 진실이에요. 눈에 보이는 이것은 모형입니다. 그게 제사직이에요. 제사직의 특징은 반복하는데 있습니다.
아까 히브리서 10장봤지요? 계속 반복하는 거에요. 제사장은 날마다 하고 또 죽고, 죽고 난 뒤에 아들이 또 하고 또 죽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눈에 보이는 제사 말고 참된 눈에 보이지 않는 제사장을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를 했는데요. 그게 뭐냐? 왕이 직접 제사장이 되는 그때를 하나님께서는 다 이룬 하나님의 뜻이 “이제 비유 그만 모형 그림자 그만” 이제 진짜 환타지가 진실로 나타나는 그 때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마태복음 27장 51절에 보면,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자, 성소 휘장이 찢어졌어요. 성소 휘장이 찢어졌는데, 히브리서에 보면 이 성소 이것을 장막이라 했어요. 장막의 휘장이 찢어졌어요. 장막의 휘장이. 물론 장막에서는 성소와 지성소 나누면 그 휘장이 찢어진거죠. 그 장막이 찢어졌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예수님의 몸이 찢어졌다는 거에요. 예수님이 안에 기름부음에다가 플러스 죄 된 육신의 몸으로 오셨잖아요. 그 육신의 몸이 찢어진거에요. 그러면 더 이상 오직 환타지만 진실이고 나머지 눈에 보이는 것은 다 거짓임이 완전히 확정된거에요. 눈에보이는 모든 것은 거짓되다 라고 확정된겁니다.
근데 아직도 사람들은 오해해서 착각을 하죠. 뭐냐 하면 휘장찢어졌으니까 뭐 있겠지. 휘장 찢어졌으면 그 자리에 뭐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눈에 보이는 휘장입니다. 눈에 보이는 장막 휘장이에요. 눈에 보이는 것이 찢어지면 그냥 찢어진 거에요 그게. 찢어졌다는 사건 뿐이지 아무것도 그 뒤에는 없어요. 뭐 보고자 하는 것도 아직도 눈에 보이는 것에 의미 두니깐 보고자 하는거에요. 이건 착각인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셨다. 죽으셨잖아요. 죽으시고 무슨 일 있습니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아무일도.
뭐 잠시 해 어두워지고 지진이 난건 하나의 잠시고 그 뒤에 다시 고요, 조용. 뭐 사흘만에 예수님 부활하셨다. 그다음에 고요. 아무 일도 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저 예수의 십자가 전부터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밀침을 당한 아무 의미없는 거고. 그들이 죽든말든 의미없는거고. 십자가 죽고난 뒤에도 여전히 똑같이 이 세상은 의미없는거에요. 아무 가치 없는거에요. 기름부음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 구원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 자신이 실제로 진실이고 현실이다. 내가 살아있는게 현실이라 여겼던 그것이 착각임이 드러나는 사람. 그 사람이 환타지를 접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게 구약 때부터 나오는데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구약 창세기 48장 13절 14절에 보면, 좀 긴데요. 한번 쪽 읽어보시면 여러분 길어도 무슨 뜻인지 압니다. 우수로, 야곱이 요셉의 두아들 데리고 오라해요. 므낫세와 에브라임. 므낫세가 먼저 태어났으니까 장자고 에브라임은 둘째 아들, 차자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그 아버지가 요셉보고 “야 너희 손자 내가 축복해줄게 데려오라” “요셉이 아비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우수로는” 요셉이 한거에요. 아버지가 눈이 어두우니까.
“우수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좌수를 향하게 하고 좌수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우수를 향하게 하고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상당히 복잡하게 되어있죠.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고려해 가지고 “아버지 눈 어두우니까 큰아들 작은아들 제가 구분해서 축복 주기에 좋게 해드리겠습니다.” 축복은 뭐냐? 오른손으로 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오른쪽이 주의 이름이 앉을 자리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부터 개시해서 세상의 모든 일이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오른손의 능력이에요. 장차 오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창세기 보기 전에 히브리서 1장을 먼저 보고 가겠습니다. 히브리서 1장에 보면 오늘 본문과 관련돼있어요. 1장에 보면 여기에 1장 8절에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보좌는 숫자가 둘이 아니고 하나에요. 2가 아니고 1이에요. 1인데, 여기에 그 예수님을 기름 부어서 너의 동료보다 성하게 하였다. 이렇게 기름부음이 나와요. 궁극적으로 주의 앉을 분은 두 분이 아니고 한 분이 주의 자리에 앉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아들이 둘이라도 축복 자리는 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레위 제사장도 기름 붓고 왕도 기름 부었지만 레위 지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왕이 직접 제사장이 되어서 이 두 가지의 기능을 한 분이 왕 되시는 분이 하시는 것, 그게 히브리서 이야기랑 주님의 계획입니다. 어떻게 왕은 왕하고 제사장은 제사장 하지 어떻게 왕이 처음부터 제사장을 할 수 있는가? 왕은 처음부터 왕이었고 제사장은 제사장, 어떻게 둘이 결합될수 있는가?
그게 바로 멜기세덱 반차이기 때문에, 멜기세덱 계열이기 때문에 그게돼요. 그럼 멜기세덱의 계열이 아니고, 족보가 아니고 일반 족보 같으면 먼저 레위지파부터 먼저 등장하고 레위지파가 한계를 드러내면서 그게 별다른 다른 지파로 넘어가요. 레위 지파에서 유다 지파로 넘어가면서 유다 지파가 레위 지파가했던 제사장제를 인수인계해서 유다 지파에서는 왕이 이룬다. 라고 그게 이스라엘 역사에 나오거든요. 이스라엘 그런 역사는 애초부터 이스라엘 역사 이전에 있었던 멜기세덱에는 왕이요 제사장, 그 왕과 제사장이 인간의 역사 속에 순항을 한, 역사속에 들어와서 시간 따라 진행을 하니깐 이게 두 개로 나누어져서 처음에는 레위 제사장직, 그다음에 왕직으로 스펙트럼처럼 구분되어서 되다가 나중에는 유다지파의 왕이 제사장까지 완성을 한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 보면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어떻든 간에 이거는 레위든 왕이든 간에 이게 기름 부음에 관한 것이에요. 기름 부음은 왜 했습니까? 환타지에요. 기름 부음이 없는 일반인들은 하나님의 원수에요. 오늘 스가랴의 예언이 그겁니다. 왕으로 온 스룹바벨 그 당시 제사장 여호수아. 이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스가랴 시대때 있었거든요. 바로 이 두 사람. 눈에보이는 이 두사람의 기능을 장차 예수님 홀로 다이루신다 그런뜻이에요.
다시 창세기 돌아와서 지금이제 착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와서 아버지를 돕겠다고 아버지가 눈이 안보이니까 이렇게 했을때에 “근데 아버지 이스라엘이” 여기 야곱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둘째아들 에브라임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게 얹었더라.” 애를 바꿔. 이게 아니고 애 바꾸지 말고 어긋맞게 하는 거에요. 어긋맞게. 이게 뭐냐 하면 요셉은 일반인이에요.
일반인들은 이 세상이나 하나님이나 장차 메시아나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환타지가 오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오지 아니하면 알 길이 없어요. 환타지를, 신약으로 하면 성령입니다. 왜냐 환타지는 환상이니까. 젊은 사람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 사람들은 꿈을 꾸고 이렇게 하거든요. 그 성령이 오는 것을 환타지라 해서,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세상에서 배척받은 영이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기름 부음이없는 이세상을 배척하니까 이 세상 입장에서 보면 기름 부은 자는 배척받는 대상이 되는거에요.
그렇게 배척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기 이성적인 판단을 옳다고 늘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건 요셉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요셉이 “하하 이 아버지가 이제 치매걸렸다 하니 맞구나 세상에 이 중요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리에서 이런 실수를 하시다니.” 해서 이제 창세기 48장에서 요셉이, 17절에보면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라고했어요.
그때 19절에 야곱이하는말. 정말 중요한 말. 그게 뭐냐? “나도 안다” 나는 알지만 너는 너 자신이 의미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의미 없는데. 아무 의미 없는데. 이게 바로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성령이 찾아온 사람의 특징입니다. 아까 고린도후서 이야기했잖아요.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육체에요. 인질? 이 세상의 마귀 인질? 이미 죽었어요. 나 살려달라고 기도할 하등의 권한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인질이었고 죄의 인질이었어요. 하마스의 인질이었어요. 폭격을 하든 원자폭탄 터트리든 마음껏 터트려도 괜찮아요. 착각은 내가 나에 대해서 그동안 속아왔다는 사실이에요.
물론 속인 자는 마귀지요. 내가 그동안 마귀한테 속았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내가 내한테 속은거에요. 나의 의미 나의 가치 나의 판단에 내가 속아넘어 간거에요. 기름 부음도 모르고 열심히 하면 천국 가는줄로 착각을 한겁니다. 원천적으로 잘못 생각한거에요. 뭐 내 죽음이 무슨 의미있는줄 알고 있어요. 아무 의미 없어요. 주께서 하는 것은 기름 부은자의 죽음만 의미 있고 나머지 죽음은 의미 없습니다. 살아도 그만 살아도 죽은 거고 죽어도 죽은 거고요. 그 아무 의미가 없는거에요.
이런 착각을 한 사람이 신약에 보면 나옵니다. 신약에 그 사울이란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라는 사람이 사도행전 22장 8절에 보게 되면 자기가 사울에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기 위해서 갔는데 그때 환타지가 나타났지요. 그래서 물었어요. 누구십니까. 물었습니다. 사울이. 그때 예수님의 답변이 정말 복음을 요약했다고 할 수 있어요. 사도행전 22장 7절에 “내가 땅에 엎드러져” 빛이났다 이 말이죠.“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라고 물었어요.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했어요. 야, 이 나사렛, 나사렛. 나사렛 예수에요. 환타지 속에 인간들이 실제라고 여겼던 실제 지명을 집어넣었던 거에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말이냐하면 환타지, 환타지가 환타지 될려면 실제하고 결합이 되어야 된다는 사실이에요. 예수님이 예수님 될려면 이 아무 의미없는 죽은 육체가 필요한 거에요. 그게 그냥 예수가 아니고 나사렛 예수고 기름 부음 받은 예수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이래요. 그림을 보는데 그림이 들어오죠. 그림이 내 눈동자에 들어오면 내 눈 중에 비치잖아요. 그럼 내 눈동자에 비친 그림 안에 내가 들어있어요. 성경에서 이미 그이야기가 구약성경에 여러 군데 나와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너는 나의 눈동자라고 이야기해요. 너는 나의 눈동자. 신명기 32장 10절에 한번 읽어드리면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 안에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여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주님 안에 박혀있는 허접스러운 아무 무가치한 나. 주님 안에 박혀있는. 하늘의 왕이신 주님이 왕이 왕답게 될려면 반복해서 죽을 수 밖에 없던 인간의 연약한 그 육신을 하나의 그림자 비유 모형 장막 찢어질 장막으로 사용해서 우리와 결합 됨으로써 그냥 예수가 아니고 나사렛 예수. 그냥 예수가 아니라 기름 부음을 받는 예수가 되는거에요.
그게 바로 스가랴에게 오늘 준 환타지입니다. 환타지가 하나의 두 사람, 사람으로 오는거에요. 환타지가. 이 얼마나 신비롭고 이세상에 이것보다 더 놀라운 상황이 또 있을 수 없어요.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이 더러운 곳까지 실제로 다녀가셨습니까? 이건 놀라운 거에요. 제가 이야기하면 “나 그거 알았어. 나 교회다니니까 안다고요.” 교회다니니까 알고 그말들어서 안다고 하지말고 니가 어떤 대목에서 니가 착각했는가, 니 착각했는것을 고백해보란 말이죠. 기름부은자가 왔다는 말은 나는 기름부음 받은적이 없고 기름부었다 하는 말은 아까 처음에 이야기하면 기름부음은 우리를 내치는거에요. 우리를 밀어버리는거에요.
“나 니하고 상대안한다”고. 그러면 어떻게 사느냐. 죽어서 오라는거에요. 죽어서 오라. 좀더 어렵게 이야기해서 히브리서 9장을 한번보겠습니다. 히브리서 9장 24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란 말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라는거에요.“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은 인간이 개입한 것은 이거는 마땅히 허물어져야 마땅하다는 뜻이에요. 우리 스가랴 지난번에 스가랴 4장 할 때 했잖아요. 사람의 힘으로 하지 않고 사람의 능으로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한다고요. 사람이 손때가 묻었다. 사람이 뭔가 했다. 쉽게 말해서 눈에 보이는 것 다 부숴 버립니다. 다 허물어져야돼요. 그 사람의 손으로 지어지지 않는 영원한 성소에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시게 된거에요. 그러면 그 뒤부터 인간의 스케줄은 본인의 스케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제는 기름부은자 예수님이 다 이루신 그 행하심의 스케줄만 남아있어요.
그게 그 스케줄대로 하면 27절에 나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것이고”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 이것이 인간의 운명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스케줄에 관한 것이에요. 내 죽음앞에 니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죽음으로 오직 유일한 의미있는 죽음은 예수님죽음밖에 없어요. 왜? 제사장이시니까요. 한번 제사거든요. 반복되는 제사가 아니라 단번에 된 제사. 여러분 이 단번과 관련돼서 의미가 살아나려면 갈라디아서 5장 4절과 연관시키면 의미가 확 삽니다. 거기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율법 안에서 의롭게 함을 얻으려 한자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다시 한번, 율법 안에서 의롭다하는 것은 인간의 행함. 인간의 손때가 묻은 거에요. 기름부음 받지도 못 한 인간이 뭔가 자기 인생을 의미 있고 옳았다 정당했다 열심히 살았다. 그걸 하기위해서 날마다 법을 지키고 날마다 반복해서 되풀이 해서 또 해서 또 또 매일같이 매일같이 지키고 지키는 이런 것들은, 그런 시도는 그렇게 해서 의롭다 하고 얻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거에요. 왜? 그거는 반복이기 때문에. 단번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성도가 매일같이 밥 먹고 매일같이 애 유치원 보내고 이거 뭐해야 되는가? 우리의 죽음은 단 한번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의미없는 죽는모습을 살아있는 모습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일어난 일들이에요.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애 유치원에 보내니 뭐하겠노. 나중에 그렇게 해서 대학 들어가도 소고기 사먹겠지. 뭐 기껏 소고기 사 먹는 것. 뭐 돼지 갈비 정도. 그것 밖에 안돼요. 우리 애가 박사학위 받았다고. 박사학위면 뭐하겠노. 좋다고 소고기 사 먹겠지. 소고기 사먹으면 뭐하겠노 소고기 사 먹다가 죽겠지. 의미없어요. 나를 위한 스케줄을 하나님이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천하고 천한 아무것도 의미 없는 죽음을 주님의 스케줄에 집어 넣어준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걸 반복해서 매일 삶을 통해서 주님의 다 이루었다는 이제는 죄가 없다는 영생뿐이라는 그 죽음 안에 제사장의 죽음 안에 이걸 집어 넣는거에요. 빨아당기니깐. 그러니까 우리는 하루하루 살면서 기름 붓지 않은 내 삶과 내 정당성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날마다 대조하면서 환타지가 나를 살렸다는 사실을 발견하는거에요. 그 와중에서 필히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은 내 인생 있었다는 것은 이거는 반복한 나의 착각이었습니다. 내가 나를 몰랐기 때문에 그런 착각이었고 요한복음 9장대로 하면 저는 태어날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눈이 감긴채 태어났습니다. 그 한번 죽는 것 스케줄 있을 뿐만 아니고 그다음에 나와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당연하죠.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 단번에 드리신바, 이게 스케줄의 핵심이 단번에 드리신 바 됐기 때문에 구원을 이르게 하시고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에게 두 번째로 나타나심이라. 그러니까 내 인생은 없고 전부다 환타지가 한번에 이루어진 환타지, 이루어지고 완성된 환타지가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 하루하루에 어떻게 스며들고 있는가. 그것을 가지고 예수의 증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환타지의 사람이죠. 이 환타지의 사람을 요한일서 2장 27절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너희가 매일 허접스러운 삶이 바로 주님의 증거하고 주께 감사하는 기름부음의 삶이 됨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자신에 대해서 엄청난 오해를 갖고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환타지에게 감사하고 다 이루심에 고마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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