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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7:21-28 / 끝 모습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7:21-28 / 끝 모습

정인순 2023. 4. 23. 16:52

음성             동영상

 

끝 모습 

 

이근호
2023년 4월 23일                 

 

본문: 예레미야 7:21-28

(7: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7:22)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7:23)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7:24)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하였으며

(7:25)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7:26)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열조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7:27)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지라도 그들이 너를 청종치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지 아니하리니

(7:28)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국민이라 진실이 없어져 너희 입에서 끊어졌다 할지니라

율법에 의하면 번제물 고기는 먹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1:9)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에서는 번제물 고기를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제사에 관한 율법 이전, 곧 율법이 없는 시절부터 새로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겠다는 겁니다.

율법 없던 시절에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했을까요? 율법이 없기에 그들은 자기네 쪽에서 내세울만 것들은 전혀 없었습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만 살아왔습니다. 즉 만나라는 음식을 그들의 착하고 선하다는 조건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에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그저 주시듯이 하나님의 목소리도 그저 주셨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목소리조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했을 때 유독 빈번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란 인간과 거래나 흥정을 시도해보자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치 배구 경기 심판이 직접 코트를 뛰면서 선수들의 빈번한 위반사례를 시범조로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즉 율법이란 이스라엘들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 위반 사례를 친히 챙기시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점점 그들의 내부를 파고들어가십니다. 보다 근원적인 위반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십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라고 하시면서도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말씀에 위반하는 자들로 노출되도록 사태가 흘러가는 것이 확정된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인간이 기를 쓰고 뭘해도 하나님의 목소리에 등보이고 얼굴 돌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결과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키신다는 겁니다. 번제에서 ‘고기 먹어서는 아니된다’는 율법적 명령은 ‘고기 먹으라’는 것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고기 먹으라’고 한들 인간의 본심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래도 인간 본성은 안 바뀌고, 저래도 인간 본성은 안 바뀐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원인은 신약에 들어서서 최종 밝혀집니다. 인간들에게는 뭔가 사수하고 싶은 것이 있었던 겁니다. 마태복음 9:12에 보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집에 들어가려고 하니 상대방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의 집에는 쓰레기가 많은데요?” 그러니까 방문하고자 하는 자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제가 청소기 들고 갈 건데요? 그래서 눈에 안 보이는 쓰레기까지 들추어낼 것인데요? 도대체 무엇을 지키고자 합니까? 자기 쓰레기 마저 남들에게 들키는 것이 공포스럽습니까?”라고 되묻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 말씀, 즉 “그동안 이스라엘이 형식과 제도에 억매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형식을 파기하고 내가 계속 추가적으로 제시하는 목소리를 들으라”라고 하면, 이스라엘 쪽에 무슨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이제 목소리만 전하면 우리는 등이나 얼굴을 돌리지 않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 이점이 이스라엘의 문제점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해도 하나님에 대해서 등돌리게 하는 속성에 변함이 없다는 점을 왜 너희들이 안 받아들이느냐는 겁니다. 인간들이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외부에서 오는 말씀에 자기 해석으로 마중 나와서 그러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감사할 거리를 찾으면서 각가지 요건들을 거론할 수가 있습니다. 키, 몸무게, 혈액형, 출신 지역 등등을 말합니다. 여태껏 요건들이 감사거리가 된다고 하더라도 멈추지 않고 새로운 요건들을 계속 들이닥치게 되면 언젠가는 전의 감사를 무효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이 방식을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쓰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아무리 청종하고자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추가적인 지시와 요건들을 끊임없이 투입시키면 결국에는 인간들은 자기 본성대로 행하여 하나님께 등돌리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자 이럴 경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동안 제시한 법들은 어떻게 성취가 될까요?

누가복음 16:16에 보면,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침입’이라는 단어에 유념해보시기 바랍니다. 일방적 침투입니다. 공격입니다. 이는 율법과 복음이 직접 만나 해결짓는다는 겁니다. 인간의 배재하고 말입니다.

인간은 장소만 제공될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나님의 하신 일이 직접 만나서 완성시키시겠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현상이 일어나기 위해 율법은 일단 인간으로 하여금 ‘아무 것도 아닌 정도’가 아니라 더 내려갑니다. 그렇게 되면 ‘뭘 해도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등돌리고 사는 존재’가 됩니다.

마치 나무를 심기 위해 흙은 표면보다 더 깊이 내려가게 파야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 성취를 위해 성도의 마음은 움푹 파여지게 됩니다. + 표면이 아니라 –표면입니다. 이 움푹 파여진 곳에 복음이 와버리면 성도는 ‘복음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이 복음 안에는 필히 다음과 같은 내용도 담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7-8) 인간은 누구나 쉬지 않고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끝장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장소를 마련하셨습니다. 한쪽은 율법과 복음의 만나 완성하는 장소요, 다른 한쪽은 그냥 율법의 저주가 작렬하는 장소입니다. 성도에게는 율법의 지배와 복음의 지배, 둘 다를 받고 있습니다. 마치 훌라후프 같습니다. 율법과 복음 사이에 절단성이 있습니다. 책 속에 있는 책갈피줄처럼. ‘사람에게 버려진 돌’ 바로 그 돌이 새로운 창조물의 모퉁이 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에게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자라는 점을 사전에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48강-예레미야 7장 21~28절(끝모습)230423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7장 21~28절입니다. 구약성경 1062페이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하였으며,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열조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찌라도 그들이 너를 청종치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지 아니하리니,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국민이라 진실이 없어져 너희 입에서 끊어졌다 할찌니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취지가 시작과 끝을 일방적으로 결론 내려버립니다. “너희는 이렇게 해라. 아니~아니~그렇게 안 할걸. 너희는 이렇게 해야 한다. 내가 그렇게 말해 봐야 너희는 그렇게 안 할걸. 그러니 내가 너희들을 망하게 하리라” 이렇게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다 해버려요. 그게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명령할 때는 마치 우리 인간과 거래하는 것처럼, 흥정하는 것처럼 시도했다가 “나는 너희들과 흥정 안 해. 나는 너희들과 이야기도 안 할 거야”라고 주님께서 모든 관계를 철회해버립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24절에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하였으며”라는 이 말은 너희들이 나에게 등 안 돌리고 얼굴을 향하도록 내가 그냥 방치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계속 추가적인 요건들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점이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엄마가 아이에게 ‘너 이번 시험에 성적 좋으면 휴대폰 바꿔줄게’라고 엄마 쪽에서 먼저 말을 건네죠.

조항이 구체적이지 않고 굉장히 모호합니다. 보험회사 문구도 그 정도는 아니에요. 굉장히 모호해요. 그랬을 때 아이는 휴대폰 얻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이 올랐습니다. 그래서 휴대폰 사달라고 하니까 ‘아니, 너는 수학은 좀 올랐지만, 영어가 내려갔잖아’라고 하거나 ‘수학 10점 오를 때 영어는 5점밖에 안 올랐어. 안 해줘’라고 조건을 철회해버려요. 그 자식이 엄마에게 얼마나 실망스럽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들이 기어이 하나님이 너무 실망스러워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등 돌린 것을 정당화하게 만드는 조치를 해버려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느냐. 그건 인간세계에서 감사하게 하는 요건들이 새로운 요건들이 추가되면 감사가 모호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와 사귈 때 ‘너 혈액형 뭐야?’라고 묻습니다. 그럴 때 ‘나 A형이야’라고 하면 ‘나도 A형인데’라고 하며 갑자기 막 친구삼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건 조건이 하나잖아요. 그다음 조건을 하나 더 내밉니다. ‘고향이 어디인데?’ ‘전라도인데’ ‘나도 전라도인데’ 조건이 두 개 됩니다. 그런데 자꾸 조건이 늘어나요. 늘어나게 되면 ‘너 군은 어디로 갔다 왔는데?’ ‘방위인데’ ‘에이~~참’ 이렇게 갑자기 추가되는 조건에 의해서 감사가 철회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께 감사 하고 싶어도, 오늘까지 감사 하고 싶어도, 내일 어떤 사태가 주어지 게 되면 오늘까지의 감사가 철회되는 것이 인간 조건이에요. 인간들 자체가 그런 겁니다.

계속해서 조건이 무한대로 늘어나게 되면 인간에게 온전한 감사라는 것은 성사될 수 없습니다. 그걸 주님께서 감안하신 거예요. ‘네 쪽에서 나에 대한 감사가 그렇게 유보적이고 지연된다면 내 쪽에서 너의 구원도 율법을 통해서 계속 지연시킬 거야’라고 나가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이렇게 등 돌리게 만들고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끝을 미리 마중 나오게 만들어요.

모든 인간은 끝을 향해갑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끝은 나중 문제로 여기기 때문에 어디에 치중하느냐 하면 ‘어떻게 행복하게 잘살아볼까?’라는 것에 모든 정신을 여기에 매진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끝을 미리 정해버리셨어요. 미리 정해서 그들에게 끝을 미리 접촉하게 만들었어요. 그게 오늘 본문 21~22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라고 나와요.

하나님께서 희생의 번제물, 또는 제단이나 성소에 여러 가지 설비를 구비 하고, 하나님께서 이벤트를 벌인 거예요. 성소라는 것에. 제단 만들고, 거기에 양을 잡게 만들고, 거기에서 안수하고 피 흘리게 하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 만들어 놓고, 지성소랑 성소를 천막으로 만들어 놓고, 향불이랑 등잔 피워놓고, 언약궤 위에 엎드려서 천사들이 서로 마주 보게 만들도록 하신 이 모든 이벤트, 이런 설치들은 너희들이 모르고 있는 너희들이 가야 할 끝을 하나님께서 미리 그들에게 알려준 겁니다.

끝은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줬어요. 그러면 자기 백성을 어디로 끌어당겨야 하느냐. ‘갈 데까지 가보지.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라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데 자기 백성은 모르고 하나님만 아시는 것을 가지고 그들에게 미리 마중을 나와야 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배구 심판이 심판은 보지 않고 갑자기 뛰어 내려가 코트에서 배구선수 뛰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의자에 앉아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심판 보면 되는 건데 ‘아~~답답해서 안 되겠다’라고 몸소 서비스하고 스파이크하면서 ‘이게 바로 규칙 위반되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안 된단 말이죠~공을 이렇게 만지면 안 돼요’라고 직접 심판이 코트 뛰면서 김연경이라 배구공 함께 주고받으면서 코트에서 배구를 하는 거예요. 이걸 바로 선지자들이 그걸 하는 거예요. 선지자의 역할은 뭐냐, ‘이게 아니다’라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아이고, 그냥 살다 죽지’라고 이걸로 끝나지 진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언약궤 앞에 도착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주님께서 율법을 주신 취지가 얼마나 복되고 고마운 줄 아셔야 해요. 어떤 사람이 방문해서 ‘혹시 댁에 들어가도 됩니까?’라고 하면 ‘들어오지 마세요. 쓰레기가 많아서요’라고 하면 ‘제가 청소기 들고 갈 건데요’라고 하는 거죠. 무슨 선물 들고 온 줄 알았더니 청소기가 선물이에요.

청소기가 어디 필요합니까? 청소기가 왜 필요합니까? 쓰레기가 있기에 청소기 들고 가는 거예요. 청소기 들고 가겠다는데도 불구하고 ‘아이고, 오지 마세요’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뭘 지키기 위함이에요? 마태복음 9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의사가 가겠다는데 ‘제가 알아서 합니다’라고 하면 의사에 대한 모독이죠.

‘제가 의사라니까요?’ ‘아니, 견딜 만합니다’라고 하면 이게 지금 무슨 뜻이냐 하면 당신의 의술을 내가 못 믿겠다는 거예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이렇게 꾸중 듣는 이유는 딱 하나예요. 하나님을 못 믿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못 믿겠다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을 해석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해석해서 하나님 믿을 만하면 믿겠다는 건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해석 이전에 계속 은혜를 주고 있었어요.

은혜를 줬다고요. 그쪽 아니고 이쪽이라고. ‘너희들이 가는 길은 한 길밖에 없지? 인간은 태어나서 죽으면 그만이라는 그 길 하나라고만 알지? 아니야. 그쪽 아니고 이쪽이야. 모르겠어? 그러면 내가 내 아들 보내볼 게’ 하며 아들 보냈습니다. 아들이 죽고 난 뒤에 마지막 끝은 죽고 난 뒤에 부활로 아버지께로 가신 거죠. 바로 예수님 가신 그쪽이에요. 그게 길이고, 진리이고, 그게 생명이에요. 예수님이 심판이지만 그분이 실제 이 땅에서 코트를 뛰었다니까요.

‘아니, 아니, 그렇게 사는 거 아니야. 그건 위반이야. 반칙이야. 규칙위반이야. 그건 저주야. 이렇게 되어야 해’라고 예수님을 보냈듯이 구약에서 누구를 보냈는가 하면 선지자를 보낸 겁니다. 끝을 미리 마련해서, 성소죠, 그들 앞에서 규칙을 하나하나 주는데, 어떤 규칙을 주었느냐 하면 희생을 드리되 번제물인 고기를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출애굽기나 민수기에서 분명히 언급했어요.

“네가 그 고기를 먹지 말라”라고 하셨는데 오늘 본문에서 고기 먹으라고 하는 겁니다. 이래나저래나 해석이 문제인데, 하나님께서 율법대로 제사를 지내고 안식일 지키라고 하니까 인간들이 그대로 해요. 이게 문제였어요. 22절에 나온 것처럼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시면서 23절에 보면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라고 나와요.

번제 하지 말고, 제사 형식 취하지 말고 내 목소리를 들으라는 거예요. 내 목소리를. 이 말이 뭐냐 하면 또 어려워졌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속 비비 꼬시는 거예요. 율법에서 하늘나라 성전, 설비 다 갖춰서 만들라고 하셨고, 만들어서 거기서 정기적으로 안식일에 예배드리라고 다 해놓고, 거기에 제사하는 순서까지 일일이 매뉴얼로 다 줬단 말이죠. 그 준 것 중에 뭐냐 하면 번제물을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해놓고 지금 와서 뭐냐 하면 내가 너에게 제사법 주기 전까지는 번제물 먹지 말라는 말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거 없을 때, 제사하는 율법 없을 때, 그때 나는 너희들과 어떻게 사귀었고 어떻게 함께 했지?’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때는 주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선지자 모세를 통해서 목소리를 전해주었잖아요’라고 대답하니까 ‘그래, 바로 그거야. 그거. 내 목소리를 들으라니까’ 그러면 목소리를 들으라고 처음부터 말하든 하지 번제, 속죄제 이런 거는 왜 하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율법이 있어야 인간에게 문제가 발생 됩니다. 인간이 얼마나 형식적이냐는 형식에 관한 법률 조항들이 투입될 때, 인간은 자기의 본색을 형식에 담아서 뿜어낼 수가 있어요. 하나의 예를 들면 시골 교회에서 투표를 통해서 새로운 장로를 선출하려고 장로투표를 하는데 노회법에 보니까 세례교인 3분의 2가 찬성해야 한다고 되어있어요. 그래서 자기가 미는 장로가 선출되게 하려고 사전 탐색을 해보니까 3분의 2에서 한 표가 모자라요.

그러면 투표하는 그날 일당 10만 원 주고 자기 친척을 교회 오게 해서 투표를 하도록 하는데 다른 교회 노회장이 와서 주관하니까 누가 누구인지 그걸 알 수가 없죠. 그러니까 ‘3분의 2 가결되었습니다. 땅! 땅! 땅!’ 이렇게 할 때 그 장로를 밀어준 사람들은 ‘음매, 기(氣) 살아~’라고 되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돈으로 한 표를 매수한 겁니다. 그러면 3분의 2는 뭐였던가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러니까 3분의 2 지키지 말고 내 목소리를 들으란 말이야”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3분의 2’가 있어야 인간의 수작 부리는 것이 밖으로, 행동으로 노출되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이 주어지지 않으면 인간 자체가 항상 자기가 깨끗하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자기가 늙어 죽는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어려운 것이 나오는데 본문 23~24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테니까 추가적인 말씀을 계속해주세요’라고 사람들이 생각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십니다.

“내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이야기했잖아”라고.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 우리는 들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말씀하세요. 언제든 들을 준비 되어있어요’라고 나오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가 전하라는 말씀 안 전했나?”라고 묻죠. 전했습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다시 전해봐라. 하나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러면 예레미야가 다시 예레미야 7장 24~28절을 전하는 거죠. 그게 뭐냐 하면 “너희들은 결국 내게서 얼굴을 돌리고 등을 내 쪽으로 향할 것이다”라는 말을 전한 거예요. 이해되시죠? 예레미야가 지금 제대로 이야기를 한 거예요. ‘너희들은 백날 이야기해봐야 안 돼~~~’라고 그걸 이야기한 거예요. 너희들은 안 된단 말이야. 지금 너희들이 ‘주의 말씀을 듣겠나이다’라는 이 자체가 지금 주의 말씀에 정면으로 충돌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끝까지 질질 끌고 갈 거야. 끝날까지. 그러면 끝날에는 무슨 현상이 나타납니까? 이제부터 여러분이 좀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이제부터 굉장히 어렵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6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율법과 복음은 직접 관여하고 인간은 그냥 그 자리만 제공해야 할 뿐입니다.

인간에게 율법을 주고 율법을 통해서 인간은 진짜 지독히도 선지자의 말을 안 듣는다는 거, 목소리를 줘도 목소리를 일체 인정 하지 않는다는 거, ‘우리 집에 쓰레기 많으니까 들어오지 마세요’라는 식이에요. 부끄럽다고. 뭔가 자기 의가 있으니까 버티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율법을 주신 것에 하늘나라가 침투하는 거예요. 본문에는 침입이라고 나오죠. 침입해서 율법과 복음을 직접 맞닥뜨리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여기서 뭐냐? 인간 안에 구덩이가 생겨요. 구덩이가 생긴다는 말을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고 난 뒤에 마리아가 올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부활하셨고 이제 재미나게 손잡고 덩실덩실 춤추면 되는데 “만지지 말라”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복음과 율법이 직접 관여할 때는 인간은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면 그 율법과 복음 성취에 있어서 관여가 끊어진 상태가 되어야 해요. 인간은 제로, ‘0’의 상태가 아니라 마이너스(-) 상태가 되어요.

푹 파여야 거기에 뭐가 담기거든요. 톡 튀어나온 플러스(+) 상태가 아니고 인간은 있는 것조차도 더 내려가서 마이너스(-)상태가 되어서 푹 파여야 해요. 파여야 한다는 것은 제가 뭔 뜻으로 이야기하느냐 하면 인간은 더는 원래 상태나 의로운 상태로 돌아갈 가능성이 전무 해야 해요. 아예 없어야 해요. 아예 등 돌려야 하고, 아예 얼굴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 원래 인간의 상태입니다. 푹 파여야 한다고요.

율법을 통해서 푹 파여야 한다고요. 나무 심기 할 때 땅을 파야 하잖아요. 그냥 나무 가져다가 바닥에 붙이는 것이 아니잖아요. 푹 파인 상태에서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이 묻히고, 심기어지는 그런 구덩이 역할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뭣이 어려우냐, 쉽지’라고 하시지만 이게 어려운 이유가 인간이 거기에 푹 파였을 때 훌라후프를 생각해야 해요. 훌라후프가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도넛처럼 동그라미 두 개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훌라후프 바깥쪽 테두리인 동그라미와 안쪽 테두리 동그라미 그 안에 빈 공백, 공기가 들어가 있겠죠. 빈 여백이죠. 안쪽이 율법이라면 바깥을 복음이 둘러싸는 겁니다. 우리 내부에서. 푹 파인 우리 내부에서. 율법이 날아간 것이 아니고 율법이 있고, 그다음에 그것을 복음이 둘러싸고 있는 입장에 있는 겁니다. 그 바깥쪽 원과 안쪽 원 사이에 틈이 있고, 그 틈이 무엇이냐 바로 단절성이에요. 왜 그렇게 단절되어야 하느냐 하면 그래야 예레미야 7장 24절이 성취됩니다.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하였으며”라는 말씀이 성도 내부에 예레미야 7장 24절에 이 말씀이 영원토록 계속 살아있어야 해요. 그래야 뭐가 사느냐 하면 우리가 관여하지 못하고 복음이 율법과, 그러니까 복음도 주인공이 하나님이고 율법도 주인공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하나님과 직접 관련해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갔다가 성취가 되는 겁니다.

큐티하면서 예레미야 7장 24절을 보고 ‘오늘은 내가 등짝을 바깥으로 돌리고 얼굴을 주님 쪽으로 향하여야 하겠다’라고 이거 백날 해도 새로운 감사의 요건이 와버리면 한 방에 훅 갑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너는 너에게 단절성이 어디 갔지? 십자가라는 단절성이 지금 어디 갔어?” 저는 주님 주신 은혜로 감사합니다. “아니, 아니, 그런 감사 말고, 너는 너의 죽어 마땅한 마지막을 보여주는 감사가 있어야 해”

어떤 감사도 이제 더는 감사가 아니고 죽은 나를 살렸다는 그 감사할 거리가, 그게 있어야 해요. 여러분들이 두꺼운 책, 좋은 책 보면 안에 책갈피를 할 수 있는 천으로 된 줄이 있지요. 우리가 성도라면 나와 하나님 사이에 끊어놓는 선, 그 선이 십자가고, 그 선이 있을 때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끝으로 과연 이 말이 진실한지를 베드로전서 2장을 통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7절에 보면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건축자들의 버린 돌. 시편 118편 22절에 나오죠.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성도라는 새로운 창조물의 유일한 기초가 되는 돌이기 때문에 이걸 빼면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버렸고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버림받아 마땅하고, 그 마땅함이 여러분 마음속에 책갈피, 빨간 책갈피 끈으로써 계속 살아있기를 원합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만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우리가 해석하지 않게 해주시고 성령이 와서 해석하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우리의 종말, 최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 기쁨이 세상의 어떤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