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말라기 2:5 / 함께 죽음 / 230316 본문
녹취:공은주
안양20230316a말2장5절(함께 죽음)-이 근호 목사
말라기2장1절~5절에서 읽어보면,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이리 되어있지요.
이 말씀을 우리가 보면서 어떤 압박감을 받느냐 하면, 제사장이 드리는 그 제사. 제사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다 알아야 된다는 그걸 우리한테 그런 기초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이것은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초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레위와 세운 언약. 너희들이 들어본 적 있었지? 그치?” 이런 뜻이다 말이죠.
그러면 이방인인 우리 입장에서 레위와 세운 언약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뭔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면 되잖아. 레위라는 말을 왜 집어넣어야 되고, 언약이라는 말이 왜 집어넣어야 되고, 생명과 평강이 들어왔다는 말은 이 언약 바깥에는 생명이 없고 평강도 없고, 그렇다는 뜻이고요.
2장2절에 보게 되면, 내가 복을 저주하리라. 너희에게 준 복을 뭐로 바꾼다는 말입니까? 복을 줬지만 복을 뭐로 바뀐다? 저주로 내가 바뀌게 하겠다. 바뀔 수 있는 계약이라면 애초에 우리가 알았던 자체에 대해서 신뢰감이 확 떨어지겠지요. “내 식대로 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나 도중에 바꿀게.” 애초부터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계약할 때에 복이 저주로 바뀐다는 그런 조항은 없었잖아요.
실컷 하나님을 믿어놨더니만 어떻게 됐습니까? 복 받은 줄 알았더니만 이게 뭐가 되었다? 저주가 되었다면 그동안 줄곧 하나님을 믿습니다. 신뢰합니다. 나는 꼭 믿습니다. 이렇게 했던 모든 우리의 각오와 결심이 허사로 끝나버리지요. 복이 저주로 바뀐다고 진작 이야기했더라면 우리도 몰빵하지 않고 어느 정도 피할 곳을 딱 내 것을 챙기고 이렇게 할 건데, 복 줄게 해서 다 투자했는데, 그 복은 저주였다. 이 시점에 와서 완전 깽판 나버리면 우리가 하나님 뭘 믿느냐, 뭘 믿을만해서 믿느냐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요거 하나 정리할 수 있어요. 하나님은 계약자 위주가 아니다. 하나님은 뭐 위주냐 하면, 계약이 위주다. 그러면 이 계약자. 하나님의 언약을 믿겠다고 온 사람은 계약 앞에 와서 튕겨나옴으로서 계약의 본질과 진수를 드러내겠다는 거예요. 아주 무시무시하지 않습니까.
이 전세 계약에 도장 찍으세요. 할 때, “그러면 당신과 우리는 계약 맺은 겁니다.” 딱 계약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허위 계약서, 허위 사기, “나는 당신과 계약을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철회하겠습니다. 무효로 하겠습니다.” “그럼 계약금 돌려주세요.” “못 돌려줍니다.” “왜요?” “당신이 맘에 안 들기 때문에요.” 이런 세상에. 이런 계약이 어디 있어요. 이런 계약이.
그럼 처음부터 계약을 하지 말든지. 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해놓고는 이제 와서 딴 소리한다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계약자를 내치는 이유는 딱 이거에요. 너는 계약을 믿은 게 아니고, 계약 맺은 너는 너 자신을 믿었다. 너 자신을 믿었다. 너가 제사장으로서 제사하면서 나한테 희생제물을 가져왔는데, 나는 그걸 똥으로 여긴다. 3절에 나오지요. 나는 너를 똥으로 여긴다. 일방적인 단언이고 선언을 하는 겁니다. 나는 너를 제사를 더러워서 안 받겠다.
그러면 인간 입장에서 지금에 와서 그럼 우리는 최선인데, 우리가 할 수 있는 도리를 했는데, 여기서 더럽다, 안 받는다 해버리면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평강과 영생이 있으니까, “생명과 영생을 얻을 그러한 기회는 애초부터 우리한테 없었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나올 수 있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없다. 처음부터 없다.”
무슨 이런 게 다 있어. 진짜 욕 나올만 하잖아요. 너는 너 자신을 믿었다. 하지만, 세상치고 지 자신 안 믿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 거예요. 너는 나를 믿을 때, 너는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 믿는 너 자신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에요. 너는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믿는 너 자신을 니가 믿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니는 너 하나님을 믿는 너 자신을 믿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하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하나님 믿는지 안 믿는지 점검에 나서는데, 내가 늘 평가를 해야 되는데, 그 평가 없이 잘 믿었다, 못 믿었다, 를 어떤 수로 판정을 할 수 있느냐 되는 거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니가 레위언약을 모른다는 거예요. 자, 레위언약. 레위언약은 뭐냐, 여기 4절에 레위언약을 세운 나의 언약은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했는데 레위 언약이 뭐였는가. 레위 언약은 이런 구덩이 하나를 만들어 놓고 그 구덩이에 레위 언약을 믿는 하나님과 레위 언약을 지시한 선지자와 백성들과 전부다 죽음 속으로 빠지는 것. 이게 언약입니다. 희생물도 빠지고요. 희생물 어린양, 소,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음 속으로 다 빠트리는 게 레위 언약이라는 거예요.
실제로 초반에 레위 언약이 진행될 때, 이 문제를 초반에 어떻게 시작했는가를 보면 여러분들이 이해하실 거예요. 어떤 두 사람이 음주운전을 하다가, 둘 다 술 먹고, 한 쪽은 운전하고 가다가 차가 가로수에 박아서 조수석에 사람이 죽던지 운전석에 사람이 죽던지 한 사람이 죽었다 칩시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죽은 사람이 편하겠습니까, 살아남은 사람이 편하겠습니까. 죽은 사람이 편해요. 치어 죽인 사람은 욕을 바가지 바가지 얻어먹습니다. 바로 레위 언약이 그렇게 시작되는 거예요. 살아남은 자의 수모. 살아남은 자의 수모를 니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레위언약은 죽은 자를 희생으로 해서 산자가 덤벅으로 얻어먹을 각오로 살아남은 자가 레위지파입니다. 그게 출애굽기 32장 26절에서 29절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이렇게 보게 되면 구원 받는다는 게 제가 계속해서 압박감을 주는 이유가 구원 받는다는 것이 이게 있을 수 없는 일을 지금 제가 강하게 강조하는 거예요. 인간이 천국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래서 성경이 이렇게 두꺼운 거예요. 천국 간다고 여겼던 자를 계속 탈락시키는 여정이 구약성경이고, 신약성경이에요.
출애굽기32장26~28절에 보면,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자기 아들을,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형제 죽이고, 친구 죽이고, 이웃사람 죽였어요. 그래서 죽은 사람이 몇 명이냐, 삼 천명 죽었습니다.
왜 죽였느냐 하면, 그들이 모세가 떠난 그 사이에 황금송아지 만들어서 여호와라고 우상 섬겼다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징벌을 내리는 그 장면이에요. 삼천명 죽었는데. 자 이 상황이 우리들 상황에 있다고 봅시다. 삼천명이 죽었어요. 다 고생했던 사람입니다. 이 죽은 삼천 명이 놀다가 죽은 사람이 아니에요. 시내산까지 고생 고생하면서 온 사람들이고 유월절 어린양 다 바른 사람들이고 홍해 건너왔던 사람들이고 홍해 건너올 때 찬양했던 사람입니다. 만나와 물을 먹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29절에,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그래서 레위지파가 특수한 지파가 된 거예요. 이게 레위언약이에요. 하나님의 지시를 그냥 그대로 해서 적을 친 게 아니에요. 같은 형제, 같은 가족, 같은 친구, 이웃을 죽이는데 있어서 주저 없이 나섰던 것을 29절에서는 하나님 앞에 헌신했다. 그래서 그 헌신한 집단이 레위지파였습니다. 욕을 바가지 바가지 얻어먹게 되어있지요.
어떻게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레위지파가 거침없이 나서서 해버렸잖아요. 거침없이. 같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러한 짓거리를 아주 주저 없이 해버린 것을 여기서는 여호와께 헌신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죽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누구한테 맡기느냐 하면, 같은 이스라엘지파인 레위지파한테 그걸 맡김으로서 레위지파가 그때부터 하나님과의 언약대상자로서 대표자가 된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간신배 역할을 제대로 했다고 할 수 있지요. 간신배 역할을.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지요. 선생님이 자기 애들 때리기 싫으니까, “여기 애 때리고 싶은 사람 나와!” 그 애 보고 친구들 패라고 시켜놓고, 선생님은 팔짱 끼고 옆에서 해가지고 다 줘패니까, “오늘부터 반장해!” 그런 것처럼. 천인 공노할 간신배지요. 그 간신배인데 하나님께서 언약 상대자로 해서 이름이 무슨 언약? 레위언약.
그게 민수기에도 나와요. 민수기25장에도 나옵니다. 이방제단에 참여했던 것 때문에 하나님이 분노했고,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 전체에 퍼지니까 모세가 대단한 결정을 합니다. 대표로 죽을 사람. 대표로 죽일 사람을 죽이는데 여기에 나섰던 사람이 11절에,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여기서 내 질투심, 내가 누구냐 하면 여호와 질투심이에요. 여호와의 입장에서 사태를 보는 사람이에요. 여호와의 입장에서.
‘이거 다 죽여버려야지.’ 라는 고 입장과 동일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어떻게 했는가, 그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그쳤는데 그 때까지 죽은 자가 이만사천명 죽였습니다. 이만 사천명. 적군에게 패배해서 죽은 게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죽은 겁니다. 이 죽음에 있어서는 예행연습도 없었습니다. 한 번 해보고 나쁘면 안 해야지. 이런 게 없었어요.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언약 계약자를 살리겠다는 게 아니고, 언약이라는 것이 이스라엘 속에서 어떻게 피어나고, 어떻게 형성되느냐를 보이는데 주께서 집중하시는 거예요. 모든 사람을 다 죽이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홀로 부활시킨 이유는 모든 사람을 다 죽이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애초부터, 범죄할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다 죽어도 나는 상관없어. 내 아들만 건지면 되는 거야. 아들도 아닌데 내가 왜 건져?” 이게 하나님의 질투심이에요.
사람이 숫자가 아깝다든지, 사람이 귀하다든지, 그런 안목은 일체 없습니다. 내 아들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넣어주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 의지를 받들어서, 그 의지를 자기 것으로 가져와서, 주님이 허용했지만, 주님이기 때문에 허용했지만. 가져와가지고 자기 이름책에 기록된 사람만 살리고 나머지는 다 죽이는 거예요. 자기 이름책에.
그럼 자기 이름책에 기록된 것은 뭐냐 하면, 대신 죽으심이거든요. 그 대신 죽었다는 말은 흔히 아까 공식, 잘못된 공식 봅시다. 나는 레위지파, 레위언약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지금 이것 때문에 문제되거든요. 나는 레위지파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걸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은 레위지파에 대해서 뭔가 니가 오해하고 있으니까, “믿습니다.” 하게 되면, ‘레위지파가 나한테 해당 된다.’ 이리 생각한 거예요. 나도 멀쩡하고 레위지파도 멀쩡하다. 이런 것을 인간들은 상상하는데 실제로 레위지파는 이런 게 없다는 겁니다. 레위지파는 레위 지파의 주인공 예수님도 여기 죽음에 들어가고 희생제물도 들어가고 완전히 부대찌개 같은 거예요. 여기에 다 들어가요. 솥 안에. 솥 안에 햄 들어가고 소시지 들어가고 당면 들어가고, 라면 스프도 들어가면 더 맛있어요. 다 집어넣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나와 너는 죽음 속에서 만나자. 죽음 속에서. 멀쩡하게 살아서 주여, 믿습니다. 주께서는 일체 그런 것은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니와 나와의 만남은 죽음 속에서 만나자. 그러면 아까 음주운전 사고 났던 예처럼 죽은 자가 편하냐, 죽여야 될 자를 죽이는 그 자들이 편하냐, 죽은 자들이 편하겠지요.
주님께서는 레위를 살려서 자기 손으로 자기 형제 이스라엘을 죽였던 그들. 지파를 살림으로서 레위지파가 제대로 레위지파만큼 못한다면 니도 끝장난다는 것을 말라기에서 말해주는 겁니다. 이 제사장들아! 이 레위인들아! 초반에 레위언약이 어떻게 만들어졌는데. 너희들은 이제 와서 마음이 안일해가지고 배불렀다 이거지. 편안하다 이거지. 이제는 형식적인 제사 반복해서 정기적으로 조상 제사 드리듯이 날자 맞춰 제사 드리면 내가 너희들 영생 준다고 그렇게 너희들은 내 언약을 그런 식으로 그 딴 식으로 그렇게 오해했다면 이제는 너희들이 레위지파에 따라서 죽을 차례다. 너희는 영원히 죽어야 돼! 그게 말라기에요.
그렇다면 이 레위지파가 출애굽기, 민수기에서 우리가 보는 건 말라기잖아요. 그럼 그 사이에 레위지파는 잠잠하게 그냥 끽소리 안 하고 조용하게 갔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레위지파는 그렇게 곱게 흘러갈 지파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망한 이유가 레위지파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 못했고 대응하지 못해서 망했습니다. 그게 사사기 17장에 나옵니다. 상당히 복잡한 이야기가 구조로 되어있고요, 그 레위지파의 운명이 이스라엘을 결정했다는 이게 두께가 있는 아주 두꺼운 이야기지만, 알기 쉽도록 제가 이야기해볼게요.
사사기17장6절을 보면,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이리 되어있지요. 왕이 없음으로 자기 소견으로 행했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레위지파 언약 또는 레위언약이라 합시다. 레위언약이 정상적으로 가동될 때 이 레위지파의 정상적으로 가동될 때 그 위에 뭐가 있느냐 하면, 왕 언약이 와요. 왕 언약은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언약은 무슨 언약이냐 하면, 다윗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윗 언약.
레위지파가 실패해서 다윗 언약이 있는 게 아니고, 왕이 레위지파를 완성하는 차원에서 왕이 등장하는 거예요. 원래 인간 왕은 필요 없어요. 그럼 누구 왕이 필요하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에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밑에는 이스라엘 전체가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겁니다. 제사장 나라. 여러분이 아는 거지만, 이 이야기를 진척하기 위해서는 아는 거지만 정리하고, 딱딱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임금님이 필요 없어요. 쉽게 말해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할 권한이 없습니다. 자격이 안돼요. 둘 다 죄인인데, 누굴 자격을 해요. 이걸 단도직입적으로 짧게 해보면 이렇습니다. “인간아! 인간을 믿지 마라.” 인간아! 인간을 믿지 마라. 나이 한 50대 후반부터 60중반, 후반까지 나오는 부부싸움에 나오는 멘트 있지요. 인간아! 인간아~~ 인간아~~, 그런데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결혼식 할 때 자기 남편이 아내보고 이런 소리 안하지요. 으이그, 인간아. 그 때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일단 살아보고. 일단은 살아보고요. 20대 후반 살아봤는데 40년 살아보니까, 인간아~~, 이리 된 거예요. 으이구, 내가 니를 믿고 불쌍하다. 정말. 내 청춘 돌려도. 내가 또 무대한 번 쳐볼까. 무대 밑에 한번 쳐가지고 청춘 돌려달라고 한 번 해 봐! 이리 나오지요.
하나님에는 제사장 나라, 레위언약입니다. 레위언약을 통해서 인간은 인간을 믿어서는 안 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왕으로 되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게 충분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사장 언약에 대해서 레위언약에 대해서 인간의 그 취지가 점점 더 옅어지니까, 취지에 대해서 완전히 사람의 관심이 없으니까, 다른 나라 잘사니까, 이방나라 잘사니까, 이방나라 잘사는 이유를 보니까, 다들 왕이 있네요. 그 왕이 어떤 왕이냐 하면, 영웅적인 왕이에요. 영웅적인. 영웅적인 왕은 눈에 보인다는 특색이 있어요. 특정 왕. 안중근 의사. 의사치고 최고의 의사는 안중근의사에요. 눈에 보이잖아요.
안중근 의사가 만약에 살아있으면 대통령감이지요. 그렇지요. 윤석열보다 표 더 많이 받을까싶어. 유관순누님. 살아있다면 여자 국회의원 나올법하다 말이지요. 인간은 혹하는 거예요. 아무리 우리는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도 아무리 큰소리치고 믿음 있는 척척척하지만, 이방나라의 모습이 그들의 내면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유혹을 안 받을 수가 없지요. 자기의 본모습을 옆에서 약을 올리고 있으니까. 그 나라가 못살면 말이 없어. 그런데 더 잘살아요. 하나님 믿는 사람보다 본색대로 하는 게 더 잘살아요. 그러니까 사는 게 힘드니까, 그 나라가 힘이 세니까, 지배를 받으니까, 우리도 옆의 나라처럼 우리 편한 대로 우리 친근한 대로 우리 가는대로 합시다.
그게 뭐냐, 훌륭한 영웅을 주셔가지고 우리는 눈에 보이는 그 사람 말 따박따박 말들어가지고 다 들을 테니까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왕을 허락해주소서.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느냐, “너그들 맛 갔다. 너그 이스라엘 아니야.” 그들은 뭐냐 하면 언약을 잊어버렸어요. 레위언약을 잊어버렸어요. 레위언약은 우리가 마땅히 죽어 마땅한 레위지파가 하나님 앞에 헌신했기 때문에 그나마 우리가 꾸역꾸역 살고 있다는 레위지파의 본래 취지 있잖아요. 출애굽기32장, 민수기25장.
그래서 인간은 무엇을 하느냐 하면, 20대후반이나 30대초반에 결혼할 때, “나는 당신만 믿을게.” 나온 거예요. “인간아!” 인간을 뭐합니까? 믿지마라. 찍지마라. 하는 건데. 멘트가. 인간은 인간을 믿어서는 안 되는데 하나님 믿는 것은 너무 멀어. 하나님이 너무 멀리 있는 거예요. 아스라이. 까마득히. 너무 모호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허구를 잡는 거 같아요. 그러나 인간을 믿는 것은 대화가 돼요. 인간은 인간을 믿는 것이 더욱 더 믿음직스러운 느낌이 확 오는 거예요. 하나님 믿는 것보다 목사 믿는 것이 더 낫듯이. 더 믿는 것처럼.
허황된 하나님보다 인간을 믿자, 라는 것이 이게 레위지파의 언약에 의하면 인간이 죽어 마땅한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 레위언약이 계속 있는 한, 그 다음부터 계속 언약이 진행되면서 그 상황에 퍼지는 상황들은 이래서 인간은 진작 죽어야 돼! 그 상황만 이스라엘 역사 끝날 때까지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 계약자를 믿는 게 아니고, 언약을 믿는 거예요. 언약을. 그럼 레위언약의 끝은 뭐냐, 대신 죽음입니다. 대신 죽음.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다 죽을께.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 죽고 나죽고 다 죽는데. 먼저 첫 번째 부활로 먼저 나를 부활시키면 줄줄이 소시지 있잖아요. 알알이 소시지. 예수님 부활하고 나면 예수 이름으로 다 붙어서 알알이 다 기어 나오는 거예요. 죽음에서 부활로 기어 나오는 방식이 언약의 완성입니다. 줄줄이 소시지. 우리 사촌누이 회사가 알알이 메주에요. 줄잡고 나오는 거예요. 제일 앞에는 맏이. 그래서 하나님이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라.
맏이가 천국에 걸쳐있으니까 나머지 막내까지, 어제 수요일날 방향성했지요. 크기보다 방향성이라고. 베들레헴에 태어난 그 분이 천국으로 가니까 이게 하나의 긴 객차처럼 딸려 같이 구원받는 방식인데, 그것이 레위언약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맏이 되시는 주님이 죽음에 들어갔잖아요.
따라서 그 뒤에 부활에 이르는 사람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걸쳐야 돼요. 이걸 세례라고 합니다. 로마서6장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줄줄이 소시지처럼 살 것이라. 그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기존의 모든 한국교회 믿음은 다 엉터리입니다. 믿어라!가 아니라, 죽자! 가 되어야 돼요. 우리 죽음에서 만나자. 나는 나의 죽음에서 죽을 테니까 나의 죽는 자리에 너희 같이 죽자.
사사기17장6절에 보면,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렇게 되어있지요. 그 다음에 7절,8절에,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 그 사람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가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이리 되어있어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왕이 있는 나라를 선망하기 때문에, 선호하기 때문에 하나님 믿는 신앙이 날아가버렸어요. 날아가버리니까 뭐가 해체되느냐 하면 이 지파 자체가 이건 뿔뿔이 누가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뿔뿔히 헤어져서 지 먹을 건 지가 챙겨야 돼요. 투잡, 쓰리잡하는 목사. 챙겨주지를 않아요.
그래서 9절,10절에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하는지라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 이리 되어있는데. 이 미가가 어떤 집이냐 하면요, 3절에 보면, 우상을 만든 집이에요. 드라빔이라는 우상을 만들어가지고, 그 신상에게 4절에 나오지요. 은장색을 우상을 만들어서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그 신상을 세워놓고 뭐가 필요하느냐 하면, 그 신상을 모실 제사장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때마침 떠돌이 레위인이 오니까 우리 집에서 연봉 얼마 받고, 옷주고, 거주지 줄 테니까 이제는 우리 가정에 축복을 위해서 니가 여기서 사적인 제사장 노릇 해라. 지금 이스라엘 사태가 이 지경이 되어버린 거예요. 복 빌어주는 거예요. 역할이. 병원의 원목, 군에 군목, 기독교 학교의 교목, 회사의 목사, 전부 다 같은 신세에요. 같은 처지에요. 병원에 원목으로 있으면서 이 병원 망하라. 이런 건 용납 안 되고요, 교목으로 있으면서 우리 학교 서울대학 많이 들어가지 말라. 그렇게 기도하는 목사는 학교에 버텨낼 수 없어요. 고등학교가 의대 많이 가는 고등학교가 우수한 고등학교가 아니야.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이렇게 하다가는 월, 연봉이고 뭐고 추방되지요. 목사가 그런 식으로 빌어먹고 살아야 되는 시대에요. 그 시대가.
언약을 위해서 죽겠다는 게 아니고 마땅함이 통하는 세계가 아니라, 살아 마땅함이 통하는 세계에 지금 레위인들이 떠돌이 신세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다가 18장에 보게 되면 이 개인집에 연봉받고 살다가 18장에 오면 단지파가 역시 땅이 없어 돌아다니다가 누굴 만나느냐 하면 사사기18장18절, 19절에 보면, “그 다섯 사람이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지고 나오매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하니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 미가 집에 있을 때에 레위 청년이 단지파를 만났어요. “나를 고용해서 자기 제사장을 삼았느니라.” 이렇게 하니까 그 사람들이 가로되, 이제부터는 니가 개인적인 제사장하지 말고, 우리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라. 18장, 19절에.
19절에,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어느 것이 더 낫겠느냐. 라고 하면서 사사기에 반복해서 나오는 것이 그 당시에 왕이 없음으로 다시 말해서 무엇이 와해됨으로서, 이스라엘은 왕같은 제사장나라라는 제사장 체제가 깨어짐으로 개인의 소견대로, 그러니까 이방나라와 다를바 없이, 이방나라와 진배없이 똑같이 지 맘대로 살았던 그 시대의 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레위지파가 이렇게 나라가 망하도록 하면 그러면 레위지파도 같이 소멸 되도록 허락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이스라엘이 망하도록 만들어요. 사사기19장에 나옵니다. 사사기19장에 보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 또 왕이 없다는 거예요. 왕이 없을 그 때에 이 사람이 베들레헴 첩을 맞이했더니만, 라고 시작해서 그 이야기는 아까운 시간 다 하지 않겠습니다. 19장25절에 보면, 그 레위인들을 옹호하지 않으니까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 없지요.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 없으니까 성깔대로 사는 거예요. 자기 성깔에 자기가 정의로운 거예요.
그러니까 불량배들이 레위지파의 첩을 밤늦도록 능욕하다가 나중에 능욕을 너무 심하게 해가지고 죽어버렸어요. 동틀 때 보니까 죽어버렸어요. 29절에 그 집에 가서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서 그 마디를 찍어서 열 두덩이를 나누어 이스라엘 전체에 택배로 보냅니다. 새벽탁송으로 보내요. 택배로 쫙 보내버려요. 이게 뭔 뜻이냐 하면, 레위지파는 아직도 열두지파 전체 위에 지배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너희들이 이 레위지파를 죽였어!” 하고 레위언약의 기본이 뭡니까? 죽음의 구덩이에다가 죽여버리는 거예요.
제사는 어린양을 죽이고, 소를 죽이고, 염소를 죽이지요. 아니에요. 레위언약은 그런 식으로 죽이는 게 아니에요. 레위지파 자체가 여기서 죽음의 구덩이에 들어가야 돼요. 그리고 하나님도 같이 들어가고. 나중에 예수님도 같이 들어가고.
레위지파가 자기 첩, 자기하고 한 몸인 첩이 죽었으니까 열두 토막내가지고 이스라엘 전체의 지파에다가 죽음의 구덩이를 다 집어던져버려요. 죽음의 구덩이를 만들어버려요. 오늘날 레위지파는 언약은 이 지경되었다고 다 던져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누구야? 이렇게 율법에 위반되는 자가 누구냐?” 베냐민지파였다. 불량배였다. 그래서 베냐민지파한테 그 불량배들 우리가 처리할테니 내놔라. 베냐민지파가 “우리 애는 우리가 보호한다.” 완전히 조폭이에요. 우리는 의리로 뭉쳤다. 우리가 보호한다. 못 내놓는다. 그 자체부터 이스라엘 다 깨졌지요.
그래서 사사기20장에 보게 되면 전쟁하게 됩니다. 누가 이겼느냐, 베냐민지파가 이겨요. 베냐민지파가 1차 전쟁, 2차 전쟁 이깁니다. 무슨 의미겠어요? 누구라도 이스라엘에서 정의를 논할 자는 아무도 없다. 누구라도. 아무도 “하나님, 우리편 돼주세요.” 하나님 편 삼을 만한 위인 이스라엘에 아무도 없다.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 되지 못하고 사사기 끝날 때 열한지파로 끝내버립니다. 지파 하나가 빠져버려요.
이건 무엇에 위반되느냐, 야곱에게 복이 올 때, 열 두지파가 구성되어야 하나님의 복을 받을 그릇이 됩니다. 이빨 빠지듯이 한 개 빠져버리면 열 두지파가 아니라 열 한지파가 되어버리면 아예 하나님하고 무관한 쪽이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이 이스라엘이 진퇴양난에 빠졌지요. 베냐민 지파가 순하게 나오면 불량배만 처리하고 지파 유지를 할 수 있는데, 베냐민지파가 전체 똘똘 뭉쳐가지고 반항하니까 공격을 안 할 수도 없고, 공격하면서 처음에 공격해가지고 공격하면 군사 얼마 죽더라도 그 남아있는 베냐민 지파가 남아있으니까 그걸 이렇게 모종삼아 키우면 열 두 지파 유지가 되는데. 이 베냐민지파가 몽땅 털 때까지 싸워서 몽땅 다 털려버린 거예요. 열 두 지파 된다는 그 자체를 베냐민 지파가 격렬하게 이상하게 격렬하게 반항해가지고 지파 하나가 날아가버렸어요.
그러니까 남아있는 열한지파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어떤 근거지가 날아가 버렸어요. 남아있는 것은 뭐냐 하면 레위지파가 와해되었다는 점이 열두개를 차지하고 있는 거예요. 열두개를. 그래서 사사기 끝에 보게 되면, 이래서 레위지파 없으면 안 된다 해가지고 여자를 보쌈해가지고 억지로 베냐민지파를 근근히 대를 잇게 만들어서 억지춘향으로 레위지파를 끄집어내는데 이 와해된 이스라엘을 건져내는 것은 사사기 다음에 무슨 기 나옵니까? 룻기. 바로 외국 용병이 등장하는 겁니다. 용병.
외부인 룻이 이 썩어빠진 레위지파를 룻이 들어가서 룻을 통해서 그 뼈대, 그 혈통을 통해서 드디어 왕을 끄집어냅니다. 그럼 왕을 끄집어내면 이 다윗 왕은 레위지파 전체를 통솔할 하나님의 유일하게 권위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 왕으로 등장합니다. 왕 밑에 레위지파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전에는 하나님 밑에 레위지파가 이리 있잖아요. 여기에 인간적인 왕 하나가, 왕 자리가 하나님에게서 마련되면서 레위지파는 이 왕에게 철저하게 종속되어야 될 조건하에 다윗이 된 거예요. 그러면 레위지파가 이루어야 될 모든 의로움과 성과와 제사의 그 마무리는 왕이 대신 책임자가 되는 겁니다. 다윗이 책임자가 되는 거예요. 제사장 위의 제사장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걸 왕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레위지파, 레위지파니까 제사장이지요. 제사장과 여기 왕. 그것도 왕이 필요 없잖아요. 하나님이 그만큼 낮아졌다고 보면 돼요. 하나님이 왕이잖아요. 하나님이 왕인데, 왕이 그만큼 가까이 인간세계에 오셔서 마중을 나서면서 결합했다고 보면 돼요. 레위지파가 망쳐버린 레위언약을 왕이 책임지려면 왕이 레위지파의 약속대로 이 저주받은 레위지파에 죽음으로서 가담을 해야 돼요. 그래서 말라기는 레위지파가 저주받아 마땅한 제사장 집단으로 들추어나야 돼요. 들추어진 레위 제사장 집단에 하나의 제사장으로서 투입되는 자리가 마련되는 겁니다.
언약을 살리겠다는 거예요. 아까도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아! 우리를 구원하는구나!’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언약을 살리겠다는 거예요. 언약 안에 함께 투입된 사람만 살려요. 어제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했지요. 스바냐에 나오는 2장1절에서 3절의 내용, 겸손한 자는 혹시 건진다 하지만, 아무도 겸손한 자 없습니다. 예수님만 겸손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말씀을 이루어서 겸손하시고,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에게만 합격이에요.
그래서 제자들로 하여금 처음 영이 없는 경우에 제자들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 한계는 인간이 스스로 넘어설 수 없는 한계에요. 베드로가 얼마나 예수님을 절실하게 믿고 따르고 순교할 마음 자세 다 됐잖아요. 그게 한계지요. 그게 구원받지 못한 자의 끝 지점이에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그렇게 나옵니다.
순교하겠다고 나서고, 열심을 다해서 믿겠다고 나서고, 누구는 배신해도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다고 나오는 것이 불신자의 끝 모습이에요. 불신자의 끝물이지요. 끝 모습이지요. 그럼 신자는 허~ 실성하지요. 왜 실성하느냐, 이럴 수는 없습니다. 주여! 왜 저를 사랑하십니까. 이건 예측 불가고 어처구니없는 복을 받은 거예요. 어처구니없는 복.
안 줘도 되는데 왜 주십니까? 이리 나오는 거예요. 사랑 안 해줘도 되는데 왜 주십니까. 사랑의 위력이 자기에게 욕을 하는 모든 욕을 바가지 바가지 얻어먹을 때 사람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그러나 그 기분 나쁜 것보다 더 센 웃음으로 그걸 거뜬하게 강도가 세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 죄 많은 여자에게는 비웃음이 왔지만, 스데반 집사님한테는 돌이라는 이런 금속 재질에 단단한 돌멩이가 날아왔지요. 그걸 넘어설 수 있었던 거예요. “그들이 하는 짓이 한계에 빠졌습니다.” 이걸로 끝나버렸지요. “그들은 그들이 하는 짓을 모릅니다.”
이 레위지파의 이야기가 이스라엘 역사 이걸로 말라기까지 바로 오는 게 아니에요. 또 한 군데를 더 들려야 돼요. 어디를 들리느냐, 열왕기상17장 17절을 들려야 됩니다. 열왕기상17장은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를 찾아간 이야기에요. 제가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는다는 이야기했지요.
강제로 떡을 뺏은 거죠. 강제로. 뺏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7장에 보면 강제로 뺏는 것도 선택됐기 때문에 빼앗지 아무나 빼앗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레위지파에 해당되는 레위지파는 영생입니다. 그리고 평안입니다. 천국입니다. 레위언약은 천국입니다. 천국이 왔을 때는 어떻게 들어가느냐 빼앗김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빼앗기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어요. 그것도 선택된 자에게 이러한 빼앗기는 혜택이 주어지지요.
17장17절에 보게 되면, 그전까지는 여러분이 아시지요. 마지막 떡을 먹고 죽으려 하다 그것마저 엘리야한테 빼앗기고 난 뒤에 통에다가 끊임없이 통에 가루가 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다. 계속 나오지요. 그래서 이 이야기가 여기서 다 끝난 줄 알았지요. 1부 이야기가 끝났지요. 2부가 남아있었어요.
2부가 17절입니다.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왜 숨이 끊어져야 됩니까. 레위 언약은 죽는 구덩이에 빠져야 돼요. 밀가루 계속 나오고 참기름 계속 나온다고 이게 복 받은 게 아니에요. 아이고~ 하나님 덕분에 우리 복 받았어. 부자 되었어. 1부 순서에요. 1부. 축구로 말하면 전반전이에요. 전반전.
이야기 끝난 거 아닙니다. 숨이 끊어져야 돼요. 안주인 난리 났습니다. 이러려고 우리 집에 찾아왔습니까? 18절 이야기지요. 이러려고. 당신하고 내가 언제 봤다고? 언제 봤다고? 를 오늘 본문에서는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런 뜻이에요. 언제 봤다고? 우리 집에 우리 아들 죽게 하려고 오셨군요. 당신 오기 전까지는 멀쩡하게 아들이 살아있었잖아요. 당신이 와가지고 도와주는 척하는데 내 아들 잡아간 거예요. 끌고 간 거예요. 납치했지요.
그 뒤에 어떻게 됐을까? 10분 뒤에.
안양20230316b말2장5절(함께 죽음)-이 근호 목사
열왕기상17장에서 “하나님 믿습니다. 참, 선지자군요.” 이렇게 했을 때, 그 사렙다 과부가 하나님 믿고, 선지자 믿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이 여인에게 믿음의 대상은 지 자식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발악을 하는 거죠. 기절하듯이 하는 거죠.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몰아세웁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왜냐하면 인간은 뭘 믿느냐, 자기 능력을 믿어요. 자기 능력이 어떠한 절망 가운데도 자기에게 살아있는 한 곧 살아있다는 말은 아직도 내가 일어설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로 받아들여요.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희망이라 하는 것은 이걸 희망이라 하는 것은 대안 없음. 어떤 대안이 없음을 니가 희망해야 된다는 거예요. 아직 먼 대안이 있다는 말은 자기가 약간의 수습해서, 약간의 일어설 수 있는 부시럭 거리는 몸부림 할 수 있을 때, 아직 멀었어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고, 자기 자신을 믿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자기 자신을 믿는 구석이 되는 겁니다.
정말로 헛 웃음이 나올 지경이 되게 되면 그야말로 자유지요. 자유. 자율이 아니고 자유가 되는 거예요. 웃음이. ‘정말 내 인생이 내게 아니구나! 주의 것 맞구나! 로마서14장에 사나 죽으나 주의 것 맞구나!’ 가 되는 겁니다.
이 사렙다 과부 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신약에서는 이것보다 더 센 걸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2장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그 다음에 뭡니까? 제물. 제물의 특징은 입을 다문다는 거예요. 제물이 중얼중얼 그건 제물이 아니에요. 망치로 때려가지고 입도 못 열게 콕콕 때려가지고 주둥이 못 놀리게 만들어야 돼요. 꽁꽁 묶어버려야 돼요.
그냥 산 제물이라는 것은 뭐냐, “끝났네. 나는 끝났어! 내 생애는 여기서 끝이 났구나! 오늘이 최후의 나의 날이구나!” 007영화에 보게 되면 007이 그런 위기에 맞이해요. 선반에 묶여있는데 007살인번호 하는 영화에 나와요. 목재를 자르는 그 쇠톱이 007 몸을 가르기 위해서 다리부터 밑에서부터 올라옵니다. 그 순간 마주 보지 않고 화장실 간 사람은 얼마나 놀랐겠어요. 영화 끝났다. 영화 1시간도 안 됐는데 주인공 죽겠구나.
그야말로 누워있다는 것. 꼼짝 못하게 묶여있다는 것. 이게 제물이에요. 제물의 모션입니다. 제물의 태도에요. 그냥 그대로 드려요. 그대로. 철판구이하듯이 그대로 드린다고요. 그런데 여기 열왕기상17장에서는 아주 사렙다 과부가 발악 발악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제물이 들 되었어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엘리야도 발악해요. 엘리야가 발악하기를 20절에 나옵니다. 엘리야가 부르짖는 거예요. 여호와에게.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요번에는 엘리야가 또 그 과부를 대변해서 지가 같이 하나님께 대듭니다.
그러니까 부대찌개 솥있잖아요. 솥에 엘리야도 들어가고, 과부도 들어가고, 아들도 죽고, 다 들어가요. 다 들어가. 그러니까 그 죽음에 들어가는 자격으로 구원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들어갈 때까지 인간은 발악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안 죽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대로 망하기는 싫기 때문에. 그래서 언약이 나보다 세서 구원받는 거예요.
내가 언약을 지키는 게 아니고, 언약이 아주 내가 안 떨어지려고 하는 것을 강제로 떼내어가지고 신약성경에 의하면 산 제물로 갖다 바치도록 하는 거예요. 그 제물은 우리 혼자 드리는 제물이 아니고 주님이 들어가셨던 그 현장으로 우리를 집어넣는 거예요. 그 현장에 가야 주와 함께 부활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 공간, 아무 장소로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발악 발악해도요, 사실은 우리가 뭔가 몰라서 그래요. 우리는 진작에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에요. 진작에.
남들이 사는 거 보니까 저 사람은 96세 살고, 나는 저 사람보다 더 살아야지. 남들을 보니까 그런데 아까 했잖아요. 사람을 믿지 말라고. 사람은 우리의 구세주가 아닙니다. 어느 인간도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없어요. 구세주는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코스로 갔는가를 봐야지요. 같은 인간들이 어떻게 괜찮게 천당 갔다는 이야기 믿지 마세요. 주님이 천국 간 것만 믿으세요. 누구 천당 가고 주기철이고 뭐고, 철이고 금속철이고 간에 믿지 마세요. 예수님만 하늘나라 갔다는 것만 믿으세요.
그래서 엘리야도 그만 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줄줄이 따라 들어가게 했어요. 아들을 죽게함으로서 극진히 사랑하는 엄마도 탄식하면서 아들이 있는 곳에 쏟아졌고, 거기에 사렙다 엄마, 아들, 모자를 다 살렸던 엘리야도 여기에 죽음에 참여합니다.
어떻게 참여하는가, 아이 몸에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이게 뭐냐, 엘리야가 보여준 바로 기름 부은 자의 모습. 대신 받는 것. 이걸 안수라고 해요. 안수. 요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레위기4장15절, 레위기에 많이 나와요. 제사할 때마다 나오니까.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지요.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안수 없이 잡는 법은 없어요. 안수가 되어야 돼요.
열왕기상17장에 엘리야가 아이에 세 번 펴서 몸의 일치를 하는 거예요. 왜 하느냐 전부 다 마땅함에 동참하는 거예요. 동의하는 거예요. 죽어마땅함에 동의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나도 같이 죽어도 합당합니다. 동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안일하게 쉽게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그냥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반드시 죽음 안에서 우리를 구원합니다. 죽음 안에서. 나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하는 조건하에 우리를 구원해요. 그런데 죽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강제로. 내가 가장 귀한 것 따라서 같이 죽음에 들어오도록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발악 발악하는 겁니다. 사람은 “약간은 희망은 줘야지. 이게 뭐야? 이게?” 하고 난리 치는 거예요.
내 모습의 마지막 모습은 발악하는 모습이에요. 그걸 어제 수요일날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 다시 한 번 적어볼게요. ‘자기를 존중하는 자는 분노한다.’ 제가 이리 하면 어떤 사람은 “늘 웃고 있지요.” 그 내면에는 과연 그럴까요. 내면에는 항상 분노하고 있습니다. 건드리기만 해봐라. 죽여버린다. 자기를 존중하는 자의 분노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12장에서 자기를 무시하라, 멸시하라, 하지요. 자기 자신을 멸시하라. 미워하라. 불가능합니다. 베드로도 안 되는데 우리가 뭐 되겠어요. 되지를 않아요. 그래서 강제로 미워하지 못하는 것을 미워하는 자리에 강제로 납치하듯이 끌어당겨버립니다. 끌어당겨버리면 우리는 격렬한 반발을 하지만 반발보다 잡아당기는 힘이 강렬해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
사랑은 효과가 있어야 되잖아요. 효과가 있으려면 내가 하는 사랑은 효과 하나도 없어요. 그건 상황 따라서 웃다가 울다가 난리도 아니에요. 그런 사랑은 값싼 사랑이에요. 사랑도 아니에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해결 났음을 통보해줄 때 나오는 어처구니없는 혜택 그게 사랑이에요.
어처구니없는 혜택. 어처구니없는 혜택. 이걸 제목으로 삼아버릴까. 더 멋진 말은 터무니없는 용서. 예상한 용서가 아닙니다. 주여,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이건 예상한 거고, 이 용서 말고, 터무니없는 용서. “됐다. 너 죄 없어. 됐다.” 우리가 돼지고기라면 뒤짝에 합격! 도장을 찍어요. 도살장에 푸른색 도장으로 합격을 찍었을 때에 우리는 그냥 허허 웃지요. 그냥. 왜? 합격되어야 될 이유를 찾을 수 없을 때 이걸 사랑이라 하는 거예요.
우리에게 준 사랑은 이유가 없어요. 왜? 창세전에 결정됐기 때문에 우리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어요. “합격이라니까.” “왜요?” “묻지 마! 그냥 합격이야.” 그냥 합격이라. “누가 저를 도와줬는데요?” “알고 싶어?” “예” 로마서8장에 나오지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대신 기도함으로, 우리를 위해서 따로 기도해주신 분이 계셨던 거예요. 성령께서. “그런데 성령께서 기도한 대상이 왜 하필이면 납니까.” “그건 니가 몰라도 돼. 니를 찍었거든.” 내가 니를 찍었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예수 믿고 뭘 하면 됩니까. 뭘 안하면 됩니까. 아무 의미가 없다니까요. 그게. 그냥 니 하던대로 그냥 살아. 니 하고 싶은 대로 살아. 그게 의미가 없어요. 살다 그냥 죽으면 돼. 아무 의미 없어요. 계획 잡는 거, 목적, 기대, 그게 다 한꺼번에 무산되지요.
심지어 요한일서에서는요, 어렵게 써놨어요. 뭐냐 하면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은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해놓고는 그런 사랑을 받은 것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안다. 이렇게 했어요. 이게 뭐예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을 우리가 안다. “그러면 제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물으면 그건 성령이 와서 안다는 거예요. 일서4장에. 이 말은 뭐냐, 내 내부적인 것은 건드리지 않아. 내 내부에 이런 자질, 이런 생각, 건드리지도 않아요. 성령도 외부적이고, 사랑도 외부적이고. 외부적이 와서 그냥 나를 폐기물 처리에 보면 크레이너 와가지고 딱 집어가지요. 그냥 집어서 잡아당기는 거예요. 폐지인줄 알면서 그냥 집어가는 거예요. 그 많은 폐지가 있음에도, 쓰레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가져가는 거예요.
가져가면서 성도는 그걸 알지요. 올라가서 매달려가면서 보니까 다 쓰레기라. 골프치는 쓰레기도 있고, 장관질하는 쓰레기도 있고, 재벌된 쓰레기도 있고, 어쨌든간 쓰레기에요. 쓰레기에서 너만을 건져낸 거예요. 택해서 건져낸 거예요. 그래서 가끔 크레이너 와가지고 다시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버려요. 쓰레기하고 섞여서 돈 번다고 헤헤 거리거든요. 어깨 무거워서 피곤함으로 축 쳐져와가지고. 또 쓱 꺼집어내고. 말씀이 “쓰레기 봤지? 오늘 죽여줄까?” “예” 내일 또 쓰레기 속에 집어넣고. 그렇게 하니까.
열왕기상17장22절에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의 통로지요. 전달해주지요. 하나님이 살렸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엘리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의 입에 있는 말씀이 진실한 줄로 알겠습니다.” 이게 바로 그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딱 엘리야 시대 때 사렙다 과부에게만 주어진 거예요. 특화된 거예요.
왜냐하면 레위언약이 작동하고 작용하는 이스라엘에서는 항상 이스라엘은 선택이란 요소를 잊어버리면 나라가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선택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선택 중에 또 선택. 선택되었다고 우기는 것을 피하고 또 새로운 선택에 나서서 언약을 그 현장에서 인간이 죽어 마땅할 장소를 물색하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리고 난 뒤에 뭘 보느냐, 본문 보기 전에 더 들려야 돼요. 이스라엘 역사가 그렇게 해요. 시편141편2절, 이것이 다윗의 시로 되어있지요. 시편141편이. 그런데 교회사에서 유명한 시가 되었어요. 성 프란치스코라는 사람이 있어요. 수도사. 새들과 노래한다. 유명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죽을 때 시를 외웠습니다. 그래서 유명하게 되었어요. 천주교에서도 유명하고. 기독교도 유명한데. 2절,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이게 레위언약이에요. 이 시편141편 누가 했습니까? 다윗이지요. 누구지요? 왕이지요. 왕이 다윗이 기도하면서 내일까지 산다. 모레까지 산다, 가 아니라 기도하는 그 순간이 늘 제물이 되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저녁 제사의 제물로서 자기가 드려지는 거예요.
사실은 제사장이 해야 될 것을 누가 하지요? 왕이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점차 왕되시는 분이 오신다는 것을 가까이 전에 보다 더 가까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가까이 가면서 이스라엘 역사는 그만큼 무르익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가.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은 망해가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선택 중에 선택이니까. 남은 자 개념이지요.
이스라엘 자체가 남은 자인데, 남은 자를 계속 남은 자를 깎아나가는 거예요. 남은 자 중에 남은 자. 그 남은 자의 남은 자 깎고 최후의 남은 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이스라엘이지요. 야곱이고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시니까 어떻습니까. 진짜 하나님께서 사람을 천국에 안 넣어주려고 애를 쓰시는 모습이지요. 얼마나 애를 썼으면 부자가 천국가는 게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그 뜻이에요. 어떤 경우라도 들어올 수 없는 자가 들어오는 경우는 일체 주께서 허락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천국 들어오는 것은 그건 용납하면 안되니까. 마귀와 끊어내야 되거든요. 마귀로부터 마음가짐을 끊어내야 돼요. 끊을 수 없어요. 그럼 죽어야 돼요. 끊을 수 없으면 죽어야 되고.
죽음 속에서 새로운 분으로부터 안수 받아야지요. 안수라 하는 것은 전이. 쉬운 말로 이전하는 것. 이쪽을 이쪽으로 이전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있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온 것은 우리의 죄를 주께서 가져가고, 예수님이 다 이루심을 우리에게 이전시키는 거예요. 주선하시는 분이 누구냐, 성령. 성령세례가 물세례보다 훨씬 위에 있지요.
물은 그냥 찍어 바르는 거지만, 성령은 효과적으로 둘을 하나로 뭉쳐버려요. 같이 있게 만들어요. 왜 같이 있는가? 서로 이전하라고. 죄는 이쪽으로 이전되고, 의는 이쪽으로 이전되고. 예수 안에서 의인되게 하기 위해서 성령으로 세례로 오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영이 오셔서 이걸 하는 거예요. 성령은 누구의 영입니까? 예수님의 영이지요.
그 예수님의 하신 일 가운데서 구약 전체가 다 포함이 되어야 돼요. 이 구약 전체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안수하는 게 있지요. 안수함을 예수님이 다 이루어서 누구의 자격으로? 제사장의 자격이 아니고 왕의 자격으로. 왕은 제사장보다 더 포괄적으로 완성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왕이 되었다는 말은 자동적으로 모든 제사기능이 완성이 되었다는 뜻이에요. 제사가 완성되지 않으면 왕에게 죄사함의 능력이 없습니다.
하여튼간에 여기서 141편2절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가 되게 한다. 이리 되어있지요. 그렇다면 요렇게 보시고 오늘 본문 들어가지 마시고 요한계시록을 한 번 봅시다. 요한계시록5장8절,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이게 원래 향단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 제사장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향을 들고 간다는 말은 그 향이 타야 되잖아요. 타는데 불이 필요하고, 그 불은 제단불에서 들어와야 돼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죽음을 통과한 자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받으시는 겁니다. 왜그러느냐 하면 그 기도가 멋있는 기도라서 그런 게 아니고 성도는 누구와 함께 있느냐,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예수님 자체가 성전이니까요.
요한계시록1장에 보면 예수님 자체가 성전의 설계도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 안에서 성전이고, 예수님 그 성전 전체가 예수님이니까 그 안에 성도가 놓여있는 거예요. 그래서 촛대도 있고, 그 안에 일곱교회가 있고 다 있어요. 그 향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자기 기능을 자기 기능이 어떻게 이 현실세계에 확산되고 퍼지는가, 그걸 요한계시록을 보여주는 겁니다.
남들 보기에는 성도가 분명히 숨을 쉬니까 살아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주님안에서는 세상에서는 죽고 주님안에서는 향으로 향기를 날리는 사람으로 살아있는 걸로 그렇게 평가를 해버려요. 평가를 해버리면 어떤 논리에 도달되느냐 하면, 성도가 하는 모든 일이 주의 일이 되어버려요. 성도가 하는 일이 주의 일이에요.
여기서 우리가 새로운 주제로 나아가 봅시다. 새로운 주제. 구약 성경은 어떻게 해석하느냐, 보통 인간들은 구약 성경은 문자로 되어있지요. 글자로 되어있지요. 글자로 되어있으면 인간들이 글자를 볼 때, 글자를 통해서 뭘 끄집어내느냐, 개념을 끄집어냅니다. 이 끄집어낸 개념을 가지고 자기 행동을 모두 다 적용을 시키고, 적용을 시킬 때 어떻게 시키느냐 하면, 옳다, 그르다, 로 적용을 시킵니다. 인간들이 문자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성도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성전되신 성전안에 있다면 구약 해석은 신약에서 해석되어야 돼요. 완성차원에서 해석을 하게 되면 해석은 뭐가 되느냐 하면 성도의 삶이 돼요. 성도의 삶. 문자가 아니고 삶이 되어버려요. 성도는 뭐와 마주치느냐, 우연적 경우들을 접하게 돼요. 우연적 경우입니다. 우연적.
예상한 게 아니에요. 모든 우연적 경우에요. 우연적 경우를 했을 때에, 우연적 경우를 맞이했을 때에 개념을 끄집어내는 게 아닙니다. 거기에 대한 성도가 보여주는 반응이 곧 성경해석이 되도록 그렇게 되어있어요. 왜냐하면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까요.
이리 생각하시면 편해요. 예수님이 하나의 거대한 배인데, 이 배가 아래쪽에 유리로 되어 투명하게 있다고 봅시다. 그 배 안에 어린애들이 초등학생들이 그 배 안에 있다고 칩시다. 어른도 타고. 제일 안쪽에 있으면서 투명하게 되어 있으니까 배를 타면서 제일 안쪽에 보니까 바다속에 여러 가지 물고기들이 유리판을 맞대고 마주쳐 보이잖아요. 그럼 애들이 가만히 있지 않지요. “와! 저건 오징어다. 상어다. 저건 돌고래다.” 할 때에 그 반응이 있잖아요. 반응.
반응이 성경해석이 된다니까요. 예수 안에 있으면서 세상과 마주치는데 그 마주침이 애들 눈에 그게 오징어가 올지, 미역이 올지, 문어가 올지, 갈치가 올지, 가자미가 올지, 애들은 몰라요. 그냥 유리판에 보이는대로 아주 쾌활한 반응만 나타낸다 말이죠. 쾌활한 반응이.
그러니까 이게 책 들고 신학 공부해서 성경 해석되는 게 아니에요. 그럼 누가 이렇게 했는가, 바로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약에 오기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개념으로 성경을 해석해 온 겁니다. 책 펴고 연구하는 거예요. 연구하면서 갈라디아서3장, 2장에 나오는데 다시 해봐야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거기다가 자기의 행함으로 만나요. 율법을. 행함을 만날 때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문자로 했을 때는 또는 행동을 할 때 적용할 때 뭐로 했습니까? 이것은 옳고, 이것은 그르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그런데 성도는 “와! 야! 이거 감사할 일이네. 와~ 이거 기쁘네. 아~ 저건 슬픈 일이네.” 예상하는 감정이 아니고, 예상 못한 감정이, 신선한 감정이 나오지요. 새롭고 신선한 감정.
그런데 이건 뭡니까? 미리 딱 예상을 해요. “하나님, 제가 바르게 살겠습니다. 말씀 연구해서, 탐구해서 하나님 보라는 듯이 차카게 살겠습니다.” 나는 차카게 살겠다. 차카게 이리 써요. 나는 차카게 살면 하면 된다. 조폭 문구거든요. 나는 차카게 산다. 하고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그른가를 두고 딱 마음에 준비를 해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QT들어갑니다. 정숙있게 묵상의 시간 들어갑니다.
아침에 QT노트 펴놓고 읽고, 오늘 계돈 타야 되는데 되겠십니까? 안되겠십니까? 오늘 아 수능있는데 어떻게 잘 성적대로 나오겠십니까? 실수해서 한 줄 다 내리써가지고 다 망치겠십니까? 선악체계지요. 선악체계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 율법사들이 성경 율법해석이 굉장히 발달한 거예요.
얼마나 발달했는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간다 할 정도로 인간의 한계점을 찍어버렸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마음가짐부터 해서 모든 것에서 항상 어느 구석을 해도 이것은 옳고, 이것은 그르고. 기준으로 인간이 옳고 그른데 옳다는 것도 행할 수 있고, 그르다는 것도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그 짓을 안 할 수도 있고 그렇게 결정한 거예요.
그런데 어제 수요일날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하나님의 진짜 성령에 의한 계명에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속아넘어가는 짓이에요. 배후에 악마가 계명을 타서 인간을 속인다는 사실을 생각도 못했지요. 내가 그렇게 마귀한테 그런 식으로 속아넘어갈 줄은 누가 생각하겠어요. 자기는 순수한데요. 사도바울은 사도되기 전에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에요. 악마의 속임수라는 것을 전혀 예상 못했어요.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 죄라는 그 리스트, 그 내용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 믿는다는 그 이단을 척결하는 것이 하나님 믿는 가운데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충성심이 악마에 대한 하나님의 적편에서 최고의 적으로서 살았던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사실을 이건 속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했겠어요. 성령 받고 난 뒤에 그걸 알게 된 겁니다.
요한계시록5장8절에 나오는 그 내용이요. 그 이십사장로들이 다 순교자들이에요. 성도들도 그 뒤를 줄줄이 소시지처럼 따라가는 사람들이고, 주어진 상황이 있잖아요. 그 당시 요한계시록 주어진 상황이. 그냥 편하게 안일하게 예수 믿는다는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믿는다는 용납하는 세대가 아닙니다. 권력과 협상하고 타협하지 아니하면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그런 세대였습니다.
그럼 이제 많이 돌아다녔으니까 돌아올 때 됐겠지요. 말라기2장6절 봅시다.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그들이 제사를 안드렸습니까? 제사를 드렸잖아요. 진짜 똥을 드렸습니까? 아니지요. 아니 제사드리면서 흠있고 이런 걸 모르겠어요? 알지요. 평소에 행위 자체가 삶 자체가 꼼수가 있었던 거예요. 우리가 이 제사법을 꾸준히 하기만 하면 우리가 고대했던 메시아가 우리를 도우러 오신다. 그것으로 곧장 밀어붙이자. 이렇게 한 거예요.
2장9절에, “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리 되어있지요. 방금 유대인들이 구약을 해석할 때 하는 방법을 한 번 적용시켜 봅시다. 성령 없다고 치고. 여러분한테는 너무 안되는 일이지만 할 수 없어요. 성령 없다고 치고. 너무 안되는데. 조금만 참으세요.
자, 여러분들이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제대로 신앙생활 잘하나를 보이기 위해서, 딱 성경을 봤는데, 말라기2장9절이 나왔어요.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레위기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 사람들에게 치우치게 하였음으로 내가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리라. 이리 되어있지요.
그러면 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했다고 딱 봤을 때, 여러분들이 성경을 덮고 한 번 생각해 보는 거예요. ‘내가 주의 길을 지키지 않은 경우가 과연 있었겠는가, 요모조모 따져봐도 없어요. 왜 없겠어요? 자기는 선하니까요. 자기는 지은 죄는 있지만 옛날에 회개해가지고 그 처리 다 했기 때문에. 자기는 아무 문제 없어요.
5절, 6절에는 메시아가 와서 지킵니다. 메시아가 와서 레위언약을 지키면 그가 나와요. 그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불의함이 없느니라. 그는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사람을 죄에서 떠나게 했다. 메시아거든요. 메시아인데, 이걸 메시아 없이 문자로 개념을 보는 사람 같으면 6절과 9절을 딱 비교하면서 어느 편에 서고 싶습니까. 6절 편에 서고 싶지요. 불의함이 없어 싶지요. 그러나 인간한테는 이게 해당이 안돼요. 모든 인간은 9절이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아까 그 이유를 설명할게요. 이런 게 좀 어려운데, 왜냐하면 이게 모든 상황이 우연이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상황은. 내가 정직하고 착한 것을 확인해주고 보장해주는 일들만 나타나지 않아요. 우리는 내가 착하다고 간주하면요, 착함을 억지로 밀어붙입니다. 그러면 주어진 상황을 내가 골라요. 저거는 내 탓아니고, 내 탓 아니고, 이렇게 되어버리면 우리는 비겁하게 살아가요. 항상 비겁하고 피해버리고 내가 선함에 유리한 것만 찾아다니면서 내가 나는 선하다. 훌륭하다. 나는 복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그 쪽으로 자꾸 자기 자신을 조작해내는 겁니다.
그걸 어제 수요설교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연출. 연출은 나의 역사, 인생사가 연출입니다. 연극배우들이에요. 인생이 연출한 것밖에 없어요. 문제는 나의 연출과 타인의 연출이 충돌한다는 사실이에요. 그 때는 화가 나는 거예요. 니가 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세우는 거야? 응? 그런 유명한 말이 “너는 왜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최근에 이런 사건이 있었지요. 정명석에게 속아서 했던 그 사람이 정명석이 자기를 비참하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바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거짓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강의 설교시간에 한 적이 있어요. 낮 설교시간에. 정신과 의사한테 갔다가 했다는 이야기. 내가 죽을뻔했다가 돌아와서 큰일날뻔했다고요. 큰일날뻔했다. 아이구 식겁했다. 이런 거요. 넘어갔어야지. 그 식겁하지 말고 도대체 망함이란 무엇인가? What is 망함. 망함이 무엇일까. 넘어갔어야지요. 넘어가서 내 힘으로 못 돌아왔어야지요. 아~, 그게 레위언약이거든요.
내가 믿으면 내가 철회가 가능해요. 좀 해보고. 야, 위험하다 싶으면 빼자. 빼야 돼! 니가 정통 신학이 아닌 곳에 빠졌구나! 빨리 빼라. 하면 빨리 뺄게요. 쓱 빼는 것처럼. 내 힘으로 뺄 수 없는 곳에 가세요. 이건 내 힘으로 믿은 게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내가 뭔가 조작을 해서, 내 심리를 내가 조작을 해서 했다면 조작한 주인공이 나기 때문에 내가 그 조작을 조작해서 내가 빼낼 수 있어요.
아따, 식겁했다. 자칫하면 지옥갈 뻔 했네. 이렇게 하는 자체가 지옥가고 있는 거예요. 진짜 천국가는 사람은 “아이구, 한 번 온 천국을 내 힘으로 밀어낼 수 없네.” 이리 되어야지요. 그리 되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그게 바로 메시아의 세계지요. 내가 메시아를 믿으려고 애쓴 게 아니고 오직 그분만이 행한 곳에 내가 행하지 않았는데 그분만이 행한 것에 내가 거기에 빠졌다는 사실이에요. 우물에 빠지듯이. 깊은 우물에 빠지면 못 기어나옵니다. 그 우물에서는 예수님이 행한 것만 나한테 상황으로 벌어지게 되어있어요.
이런 논리가 신기한 논리입니다. 내 일어나는 모든 상황은 십자가 죽으신 그 분께서 의도적으로 유발한 상황이다. 그러면 식구가 뒤에서 뒤통수 막 때리면서 정리차려라! 인간아! 니는 과거에 안그랬었었잖아! 왜 그래? 니 어디에 미쳤어? 어디에 미쳤어? 니는 얼마든지 니 자유와 이성과 판단력으로 니 깨끗함과 정직함으로 좋은 성과와 결과를 낼 수 있단 말이야. 그런 자유로움을 니가 왜 어디 미쳤어? 니가 왜 포기해. 개선하고 발전할 수 있는데 왜 니는 접냐! 인간아! 언제든지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는데. 발전할 수 있는데. 그걸 왜 접나. 발전한다는 그게 우리의 희망이야.
얼마나 그들 입장에서는 건전한 충고지요. 하지만, 건전한 충고는 자기가 자기의 선악이 이미 기준이 되어있어요. 그거 일방적 판단입니다. 좋은 것만 뽑았어요. 비겁하게. 딴 데는 눈 감은 거예요. 자기의 평판 좋지 않은 것은 눈을 다 감아버렸어요. 제켜 버렸어요.
2장7절에,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 메시아가 무슨 모습으로 온다? 왕인데도 이 땅에 올 때는 제사장의 모습으로 오셔가지고 성도에게 말라기2장 상황을 우리에게 반복시켜 버려요. 21세기에. 우리가 살아있는 현장에. 말라기2장이 죽지 않았어요. 하나의 상황으로 살아있어요.
말씀이 하나의 상황으로 현실화 되었어요. 우리가 말씀의 상황을 니가 만들어라가 아니라 예수님이 만들어서 말라기2장 상황 속에 우리를 여기에 놓이게 만들어버린 겁니다.
그래놓고 말라기2장2절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 이것을 바리새인적인 해석을 해보세요. 내 이름을,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 사람은 저의 반에서 누가 일등하겠어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않겠지요. 바리새인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데 일등입니다. 누구보다도 바리새인보다 나은 자가 없어요. 최고로 나은 자에요. 그래서 바리새인이 마귀 자식 아닙니까.
요즘 교회와서 말라기 보고 ‘아, 말라기 이런 말씀있었네. 아이구, 내가 생각해보니까 여호와 이름을 영화롭지 않게 했구나! 그래, 영화롭게 해야지’ 맨날 그래봐야 바리새인 시다바리밖에 안돼요. 바리새인 뒷줄밖에 안돼요. 바리새인 지옥가는데 따라 지옥가는 거예요.
모든 말씀은 일단 어디를 경유해야 되는가, 예수님을 경유해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말합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 못 믿어요. 뭐냐, 예수님의 죽은 자리에 합류해야 그게 믿음이지요. 예수님의 죽은 자리에. 오늘 첫째시간, 둘째시간에 계속하는 것이 그거에요. 합류해야 돼요. 어떤 수로 합류합니까. 우리는 좋게 좋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말로 하고 싶어요. 안다치고 싶어. 주님이지만 평생동안 나의 일구워온 이 역사에 흠집이 나는 것은 나는 지독하게 싫어요.
마치 사렙다 과부같아요. 못 먹어서 자살은 하지만, 그렇다고 내 인격마저 모독하지 말라. 엘리야야! 이런 꼴에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모자간에 죽으려고 했는데 새삼 하나님이 죽였다는 거예요. 안 왔으면 그 날밤 죽었어요. 마지막 만찬 먹고 죽었어요. 꼭 우리 같아. 어제부로 죽었는데 살려주니까 나의 가치 내놓으라는 식이에요.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이에요.
주님은 이 레위기를 할 때,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석하세요. 그러면 됩니다.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십자가에 예수님 혼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끄잡아당겨서 십자가가 뭔지를 알려준 사람과 함께 다시 말라기 말씀이 아니고, 말라기 상황 속에서 말라기 말씀을 보게 하는 거예요. 말라기2장을 보게 하는 거예요. 우리의 삶속에서.
성경 보지 말라는 게 아니라 성경이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보게 하시면서 예수님이 말씀을 어떤 식으로 다 이루었는가를 매일같이 우리로 하여금 부딪치게 하고 만나게 해주는 거죠.
자, 끝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로마서12장1절 다시 한 번 되새기겠습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하나님에 드리는 산 제물이 되지요. 우리의 저녁 기도는 마지막 최후의 제사가 되게 만들지요. 하나님의 제사의 기도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억지로 하면 율법되겠지요. 억지로.
그런데 제사가 되려면 혼자 장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내 모습도 스냅 찰칵! 찍어서 위로 찌고 아래로 찍고, 장하다. 나야! 이런 식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와 함께 포개진채 누웠을 때에 그야말로 막달라 마리아의 주님이 준 사랑을, 사랑이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잖아요. 사랑을 다시 한 번 느끼는 겁니다. 주님, 제가 저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주인공 아닙니다. 여고때 찍은 앨범 사진에 웃음찍고 45도 각도 친구와 찍은 거. 그 때 제가 주인공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마저 주의 일입니다. 하는 것을 매일 늘 앨범 보고 있지 않잖아요.
부딪히는 모든 일상생활 속에서 그걸 느끼게 하는 거예요. 컵을 보고서도, 그림도 보고서도 그렇고, 가짜 꽃이지요. 모든 매사가 일어나는 것 속에서 없는데 왜 그게 있었지. 어? 당신 없는데 왜 있지? 이런 거.
모든 사이에 있어서 하나가 주님의 가져다준 선물로 솜씨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말라기2장2절의 완성입니다. 네가 나를 이 주님을, 너 대신 희생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모습이에요.
그게 바로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러니 이건 하는 게 아니고요, 가만히 있어도 상황이 부딪히는 거예요. 주께서는 우리를 이 쓰레기장에다가 내일 되면 또 보냅니다. 쓰레기장에 또 보내면서 쓰레기라고 하면서 어느덧 2시간 이야기하다보니까 본인이 쓰레기에요. 똑같아요. 다른 거 없어요.
아이고~ 부러워라. 부러워라. 또 댁의 아들이 서울대학 들어갔다면서. 부러워라. 우리 애는 뭐하노. 집에서 놀고. 누구는 취직되어가지고 독일에서 아르바이트한다는데 나는 뭐야. 이런 식으로. 내가 뭘 잘못했는데 도대체 얼마나 더 희생해야 되고 믿어야 됩니까.
갑자기 화를 내고 이렇게 분개하고. 그럼 주님이 “이리 와! 너를 사랑해줄게.” “미안합니다.” 항상 주와 함께 동행하는 기쁨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 말씀 앞에 있다는 자체가 당연한 걸로 여겼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실물로 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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