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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역대상 16:22 / 하나님의 음식물 / 230303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역대상

역대상 16:22 / 하나님의 음식물 / 230303

정인순 2023. 3. 3. 23:32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한윤범

20230303a 울산강의-역대기상(18강) 16장 22절 : 하나님의 음식물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상 16장 22절,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다윗이 예언하면서 그 백성들에게 선지자와 왕의 입장에 서서 장차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그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을 통해서 나타나셨을 때 이걸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언약의 특징은 특정 인물로 나타난다. 그럼 이건 무엇과 대조되느냐 하면, “평소에 나는 누구 쳐다보고 사는가?” 이것과 대조하면 대번 알 수가 있지요. 이게 사람들은 두 개를 이야기해요. 하나는 나는 나를 쳐다본다. 두 번째, 나는 하나님(신)을 쳐다본다. 나는 나를 보고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쳐다보고 산다. 이게 하나님이 실제로 언약으로 일하는 특징에 의하면 여기에 들어갈 수 없어요. 모조리 다 잘못입니다.

오늘 뉴스에 루마니아 대통령이 나왔어요. 루마니아 대통령이 이야기를 하는데 뭐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챗GPT 보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챗GPT가 거울 같이 생겼어요. 그러면 루마니아 대통령은 오늘 아침에 누구와 이야기했는가?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 누가 제일 예쁜가?” <백설 공주>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거울보고 하는 거예요. 챗GPT 보고 나라는 어떻게 하면 되고, 올해 앞으로 경제정책 어떻게 하면 되느냐? 챗GPT 보고 묻는 거예요. 자기는 이렇게 신식 대통령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거울 속에서 챗GPT가 나오고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현대판 <백설 공주>되지요.

그러면 루마니아 대통령은 누구 쳐다보고 있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지요. 거울아, 거울아 자기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자기는 괜찮은 비서 하나 들였다고 주장하는 데, 여러분들은 누구 쳐다보지요? 나를 쳐다보고 하나님 쳐다본다. 둘 다 탈락입니다. 언약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언약은 특정 인물로 등장해서 나와 경쟁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고 인물로 나타나는 거예요. 이게 언약이에요. 노아언약 때는 노아로 나타났어요. 아브라함언약 때는 아브라함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삭에는 이삭으로 나타났고, 야곱에는 야곱으로 나타났어요. 그게 바로 역대상 16장 16절부터 17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영원한 언약이며, 이렇게 돼 있지요.

성경에 아브라함언약이라 할 때 여러분은 여기서 도발적이어야 돼요. 내가 아브라함보다 뭐가 못 났는데 왜 나는 나를 쳐다보는 것을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쳐다봐야 하는가? 아브라함 지가 뭔데? 이렇게 도발적으로 나온다면 여러분들은 성경을 지금 제대로 이해하고 깊숙이 성경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보셔도 돼요. 성경 속으로 들어가려면 화가 나야 됩니다. 분노가 일어나야 돼요.

“왜 나는 나를 못 보고 만들어? 하나님 왜 저를 못 보게 만듭니까?” 그렇게 화를 내야 오늘 본문 16장 22절을 이해돼요.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방금 했던 원칙을 그대로 적용시켜버리면, “하나님, 나는 내 편한 데로 내 행복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런데 그 기름 부은 자가 뭐기에 선지자가 뭐기에 어떻게 나보다 중요합니까, 하나님?”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제대로 하나님 앞에 사로잡힌 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좋은 사이가 아니에요.

그러면 기름 부은 자, 선지자가 언약이거든요. 이게 다윗언약, 다윗에게 이런 다윗이 기름 부은 왕이고 다윗이 선지자니까요. 그럼 왜 우리는 날 못 쳐다보고 그 선지자, 왕을 쳐다봐야 되느냐, 기름 부은 자를 쳐다봐야 되는가? 그것이 33절에 나옵니다. “그리 할 때에 삼림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주께서 땅을 심판하려 오실 것임이로다”

무슨 삼림의 나무들이 뭐 즐겁다고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심판하시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심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삼림들이 아주 춤을 추듯이 좋아하고 기뻐하고, 하나님 조치는 항상 정당하고 잘하셨습니다, 이렇게 찬미하는 모습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왜 이 세상은 심판돼야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특징이 뭐냐? 노아언약도 그렇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특징은 인물로 나타난다 했지요. 그 내용이 뭐냐 하면 ‘멸종 시나리오’에요. 인류멸종 시나리오입니다. 인류만 멸종당하는 게 아니에요. 모조리 다. 인류멸종 시나리오, 세상을 전부 다 멸종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멸망시키려고 하시는 거예요. 심판하시려고.

언약에 의하면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여기 ‘나’ 있잖아요. 나를 쳐다봐선 안 되고 내가 신을 쳐다보는 것도 우상이죠. 왜냐하면 인물로 등장했는데 우린 추상적인 신, 우상이죠. 허망한 신, 추상적 관념적인 신을 맨날 쳐다보면서 신에게 도와 달라 하는 거예요. 누가? 내가. 그러면 인물과 나는 경쟁관계에 있는데 하나님께선 ‘나’ 출발점을 인정하지 않지요. 인물로부터 출발해야 돼요. 나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특정인물로 출발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렇게 이야기하기보다도 실제로 창세기 12장 2절, 3절에 나오는데 여러분 피곤하시기 때문에 그냥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오늘은 아주 쉽게 가겠습니다. 다 이유가 있어요. 몸 아픈 사람이 있어서. 창세기 12장 2절,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택해서 하는 말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보세요. 또 하나님 편애하잖아요. 나한테 복을 안 줘요. 지명한 특정인물을 내세워서 그 인물에게 복을 주는 거예요.

그러니 나만 쳐다보고 사는 사람에게는 성경 하나하나가 분노 유발될 수밖에 없는 말씀입니다. 성경 보고 분노를 안 일으킨다는 것은 성경의 뜻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에요, 결국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딱 택했다니까, 아브라함을. 그리고 아브라함을 쳐다보고 가는 거예요. 너 쳐다보지 말고 아브라함, 왜? 아브라함을 쳐다보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안 쳐다보는 사람은 저주받는다. 이게 방주처럼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우리 쳐다보고 살고 아쉬우면 하나님 찾는 것, 그거는 인류멸종 시나리오에 딱 적합한 거죠. 왜 우리는 우리를 쳐다봐선 안 되는가? 언약적으로 보면 복과 저주가 아브라함에게서 출발하고 거기서 확정이 되고 규정이 된다는 말은, 우리는 이 땅에서 언약적으로 망하고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누가? 우리는. 우리는, 이걸 말을 바꿔도 마찬가지에요. 나는 해도 되고 당신. 당신은 망하고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율동까지 하면서, 당신에게 저주를~, 우리는 저주받기 위해 태어났어요. 그래서 저주받기 때문에 내가는 족족 나를 망하게 하는 일만 하게 돼 있어요. 내가 하루일과 족족. 일기 쓸 때 아침에 맑았다, 아침에 출근해서 하는 일 족족 나로 하여금 나를 폐허로 만드는 그러한 일을 축적을 하는 것에 우리는 시간을 다 보내고 있어요. 내가 나를 망하게 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주 열심을 다하고 매진을 하고 몰입을 하지요.

그래서 인간이 망하는 이유는 자기 일에 자기에게 이익이라 생각하고 자기에게 이익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매진했던 그것이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인생 다 가보니까 앞에 철벽이 있어요. “이건 길이 아니네?” 실컷 한 평생 살았는데 여기서부터 지옥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무리 오래 살고 평생 살아도 나만 쳐다보고 사니까 그런 거예요. 이거는 언약이 아니고 비-언약이에요. 언약적이 아닙니다. 이걸 좀 어렵게 말씀드릴까요.

인간은 나와 너의 관계가 아니에요. 단 둘의 관계가 아닙니다, 인간은. 언약의 인물이 개입해서 조성된 상황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린 눈에는 뭐냐 하면 나와 너, 너와 나만 보여요. 우리 단 둘이, 맨날 우리 단 둘이,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좀 더 공부를 하고 좀 더 세상에 대해서 넓게 알게 되면 이 세상은 단 둘이란 자체가 이 세상에서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신혼부부가 제주도 신혼여행 가서 호텔에 묵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단 둘이 여기 방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런데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다른 모든 중산층 계급사회가 함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문화양식, 사고방식,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그 시대의 중산층들이 평균해서 평균된 층들이 했던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고 흉내 내는 거니까요. 그 문화양식에 그들은 푹 젖어있습니다.

그들은 단 둘이 있는 게 아니고 그들 주변에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은 그 시대에 보편적으로 용인이 되는 용납이 되는 스타일, 삶의 스타일 안에서 그들은 노닥거리고 있고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단 둘이 해놓고 행동하는 것은 남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주의하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남들에게 거슬리지 않도록.

그러니까 우리 단 둘이 해놓고는 거기서 무엇을 플러스하느냐? 남들 보기에 우리는 너무 오버하지 않게 살자. 결혼했으니까 주변의 사람들, 어른들에게 실망스럽지 않게 살자 할 때 이 단 둘이 성립 안 돼요. 제3의 요소, 타인의 시선을 떠안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세상은 오늘 강의 진도에서 이걸 필히 여러분들이 아셔야 돼요. 방금 이것을 어려운 말로 단일화된 총체화라 합니다. 세계는 단일화된 총체화로 뭉쳐져 있음, 묶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세상은 모두 다 여기 하나로 모여라, 하는 쪽으로 묶여져 가고 있어요.

오늘 우리 외손녀가 휴대폰을 샀는데 애들 휴대폰이 따로 있어요. 초등학교 2학년이 휴대폰이 왜 필요하냐? 학교 등교하고 보니까 자기 빼놓고 휴대폰을 다 갖고 있어요. 몰랐지요. 외국에 살다보니 그걸 몰랐던 거예요. 단일화잖아요. 총체화고. 이 땅에 이 시대를 거주하고 있는 것은 전부 다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한 구덩이로 서로 담겨서 한 덩어리 되는 그런 원칙에 모든 인간은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이걸 마태복음 7장에선 뭐라 하느냐? 이걸 넓은 길이라 해요. 많은 사람들이 한 덩어리로, “어서 와, 어서 와. 모여, 모여.” 서로 모여서 한 덩어리로 뭉쳐야 뭔가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결합해야 인류가 지구에서 살 출구가 생겨. 모든 지혜 다 끄집어내, 라고 한 덩어리 되어서 가는 거예요. 흩어지는 것은 낙오자에요. 그 중심축으로 모아지는 겁니다.

그 중심축이 뭐냐? 그 중심축이 바로 너와 나, 우리지요. 이 땅에 주인공은 없어요. 서로가 동일한 마음가짐으로 하나같이 집결되는 성향을 보입니다. 이 세상은. 세상이 뭐냐 할 때 전부 다 한 덩어리 되는 성향을 보인다, 이렇게 보시면 정답이에요.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 갈수록 그 성향이 강렬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기가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어디서 거주하든지간에 이 세상에 아프리카 가든지 북극에 남극에 가든지 관계없이 전부 다 세상은 한 덩어리입니다. 일종에 잡아당기는 블랙홀처럼 강한 중력이 작동하지요, 서로.

그래서 초등학교나 중학교 애들한테 너 어떻게 살래, 인생관이 뭐냐? 애들은 그걸 몰라서 너 장차 뭐 될래? 대통령 될래, 난 연예인 될래, 손흥민이 될래, 이러는데 그 복잡한 것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나, 어떻게 살래? 나 이렇게 살래. “나 남들과 떨어지지 않을래. 나는 중심축에서 벗어나지 않을래.” 이게 지 고백이 아니고 본능입니다.

그 중심축에 누가 있는데? 본인이 있지요. 어떤 영웅이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은 영웅을 원하지 않습니다. 내 자신이 영웅이에요. 그래서 떨어지지 않는 이걸 이익이라 하고, 떨어지면 이걸 손해 또는 더 노골적으로 낙오자라 해요. 시대의 낙오자. 그렇다면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이 원하는 것은 뭐냐? 평화, 화해, 평등, 소외된 자 돌아보기. 멀리 있는 사람 안아서 자꾸 한 구석으로 모으는 거예요. 누가? 이 세상이.

모든 인류가 한 덩어리된 것, 이것은 이미 마이클 잭슨이 노래한 거예요. 라는 가수들 한 오십 명 나와서 부른 것도 있고, 마이클 잭슨이 주기도문 주제로 부른 노래도 있어요. 한 덩어리 된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의라고 하는 거예요. 정의라고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학교에서 배운 정의란 소외된 자를 돌아보고 억울하고 어려운 사람을 챙겨서 그다음 뭔데? 한 덩어리 되는 거예요.

애가 태어나서 일 년 되면 그걸 뭐라고 하지요? 돌이죠. 돌잔치 해주잖아요. 돌잔치 왜 해줍니까? 일종에 서약 같은 거예요. 너는 이제 우리 집안사람이라는 서약이에요. 집안사람이면 한 덩어리가 돼요. 따로 놀지 말란 말이죠. 전에는 우리는 뼈대 있는 집안이라서 선조나 아버지 섬기자, 이랬는데 현대는 아버지고 선조고 없어요. 각자가 아버지고 각자가 어른이고 그래요.

각자가 어른인데 따로 노는 어른이 아니고 한데 뭉쳐지는 한 가정으로서의 다 같이 어른이 되는 조건 하에 뭉쳐지는 것, 그걸 네 자로 ‘민주주의’라 하는 거예요. 학교에선 그 민주주의 교육을 시키고요. 그 민주주의가 어떤 범위에서 못 벗어나느냐? 민족주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민주주의는 정치적 제도지만 민족주의는 혈통적 주의잖아요. 인간이 만든 관념이 혈통을 못 이겨요. 그러니까 민주주의를 하되 우리끼리 민주주의. 우리끼리 민족? 북한에서 나오는. 그걸 국뽕이라 해요. 자기 민족에 대한 광신도.

자, 이러한 세상적으로 지금 방금 이야기한 것이 뭐냐? 세상은 가만있는 게 아니고 끊임없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 데 그 움직임은 어떤 움직임이 되겠습니까? 멀리 있는 사람들, 가까이 있는 사람들 전부 다 어떻게 된다? 한 덩어리가 되는 움직임. 요한계시록 17장에서 19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모든 것이 모든 나라, 민족이고 뭐고 모든 게 결국은 한 통속이 되는 거예요. 아담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마지막도 아담의 몸체로 마감되는 것이 인류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 한 덩어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 고립시켜버립니다. 자,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하냐 하면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게 된 이유가 이런 데서 나와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주변 나라와 교역을 해보니까 경제적 고립이 나라를 망친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독고다이, 우리 중심으로서는 나라 자체가 유지가 될 수 없어요.

큰 나라들이 어떻게 했는가? 큰 나라들이 교역이 활발하면 할수록 강대한 나라, 주변의 힘을 자기 나라 쪽으로 쫙쫙 빨아들여줘야 나라가 튼튼해져요. 이걸 현대식으로 이야기하면 투자가 없으면 나라꼴이 안 됩니다. 외국투자가 없으면. 외국투자가 지금 주식을 팔고 나가버리면 울산 80%가 수입이 없게 돼요.

그렇게 해서 그들이 뭉쳐서 원하는 게 외치고 싶은 게 있을 것 아닙니까. 자꾸 하나로 응집이 되는 데요. 태양의 오십 배 되는 별이 응집이 되면 그것이 블랙홀이 돼요. 무게가. 천문학에서 계산을 해보니까. 스스로 큰 깊은 우물을 만드는 거예요. 뭉치면. 자꾸 뭉쳐서 외치는 구호가 뭐냐? 이겁니다. 참 이거는 진짜 아무나 안 가르쳐주는 건데. 살아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거예요. 이게 인간세계입니다.

지금껏 강의하면서 제일 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하나님의 언약은 특정 인물을 내세운다 하지요. 그렇다면 언약 바깥에, 언약이 없는 곳에는 특정 인물이 아니고 자기만 쳐다보고 신을 쳐다보는 그들끼리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끼리 모여서 하나의 덩어리가 이뤄지는 거예요. 그런데 역대상 16장에 보면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고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해서 특정 인물을 내세웠잖아요.

아까 이야기했는데 다시 말씀드리면 그 특정 인물이 하는 일이 뭐라고 했습니까? 33절에 심판이죠. 심판이니까 우리가 지금 방금 내린 결론이 뭐냐? 인간 뭉친 이유가 결국 마지막 도달한 게 뭐냐 하면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 하잖아요. 주님께서는 이 자랑스럽다는, 뭉쳐 있는 모든 인간이 살아 있는 모든 인류에 대한 자체적인 찬미죠. 자체적인 흐믓함, 뿌듯함 이런 거란 말이죠.

이걸 뭐로 만드는가? 이걸 폐허로 만들어버려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으로 폐허로 만들어버리면 이 안에 있는 인간들, 폐허에 사는 인간들을 두 자로 하면 뭐라 할까요? 폐허의 위에서 사는 인간을 뭐라 할까요? 폐인. 폐인의 특징은 자기가 쏟아낸 오물, 쓰레기 안에서 못 빠져나온 걸 폐인이라 하지요. 자기가 쏟아 부은 그 쓰레기 안에서 그 쓰레기가 너무 아깝고 쓰레기가 너무 자랑스러워서 거기서 나갈 생각을 못하는 걸 두 자로 폐인이라 하는 거예요.

한쪽은 폐허가 될 인간들의 집단, 덩어리 이쪽은 복이 되는 하나님의 인물. 언약 속의 인물은 복이 되고 그 복에 의해서 공격 대상이 되는 인간의 뭉쳐진 단체는 뭐가 되겠습니까? 복 반대 저주가 되겠지요. 성경 참 쉽지요.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쉽게 하십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 때문에 신을 찾는 것, 그것 그 인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물을 따로 내세워요.

하나님이 인물을 따로 내세운 걸 아시는 분은 성경을 보면서 살짝 분노해야 돼요. 왜 내가 아니고 저 사람입니까, 나 아니고 왜 아브라함입니까, 나 아니고 왜 이삭입니까, 나 아니고 왜 야곱입니까, 나 아니고 왜 예수님이십니까, 라고 질문을 진지하게 심각하게 할 수 있어야 돼요.

그러면 다시 봅시다. 나는 가만있지 않고 뭘 찾습니까? 나는 나를 찾고 나를 쳐다보고 살고 또 누굴 쳐다본다? 신을 쳐다보지요. 이 신을 구약성경에서 이걸 우상이라 했습니다. 우상의 반대말은 뭐냐? 인물이죠. 왕이죠. 언약의 인물, 왕. 그 왕을 바로 오늘 본문 역대상 16장 22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거예요.

우상의 반대말은 참된 신, 이렇게 이야기하지 마세요. 참된 신이 언약을 가지고 특정 인물을 이 땅에 내세웠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을 쳐다보게 되면 다 신자 같아요. 그런데 신을 쳐다보는 그 인간이 누굴 쳐다본다, 평소에? 자기 자신을 쳐다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의 인물을 주신 이유는 너를 쳐다보지 말고 누굴 내세워라? 하나님이 인물화 시킨 그 사람을 네 대신 쳐다보라 이 말이에요.

아주 쉬운 말로 하나님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예수님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이 이야기거든요. 어느 쪽이에요? 둘 다 안 되지요. 둘 다 안 되죠. 누굽니까? 둘 다 믿으면 구원받는다? 성경에 없어요. 성경에 주 예수를 믿어라, 이렇게 돼 있지요. 하나로 한다고. 둘 다 믿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항상 단 둘이 있는 것 같지만 항상 짝을 찾아요. 일단 나는 집어넣고 나한테 잘해줄 짝.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나도 보고 그 짝도 보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요. 모든 사람이.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너도 믿고 너도 쳐다보고 나를 쳐다보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아니면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라 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라 했지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나는 언약의 인물이 아니고 아까 말씀대로 하면 나는 폐인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종내 잊지를 못해요. 내가 했던 모든 일, 노동뿐만 아니고 사랑, 미움, 여러 가지 열심, 내가 신혼여행 간 것, 아기 낳은 것, 그 하나하나 내가 장로 되고 안수 받아 목사 된 것, 인간은 자기에 관한 모든 것을 잊지를 못합니다. 잊지를 못할 정도가 아니고 거기다가 의미를 부여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망하고 저주받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우리가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에 대해서 화내지 마세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분명히 했어요. 너 쳐다보지 말고 언약을 지니고 있는 그분을 보라고 분명히 언급했으니까 화낸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나 쳐다보고 아브라함 쳐다보고 둘 다를 보는 게 되니까 이거는 자기를 부인하는 게 아니죠. 너 아니고 아브라함이야, 너 아니고 이삭이야, 너 아니고 야곱이야, 너 아니고 예수님이야, 너 아니고 다윗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한 가지를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무엘하 4장 4절에 보면 제가 읽어볼게요.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 나이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하더니 급히 도망하므로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므비보셋이 다섯 살 때 유모가 급히 도망가다가 넘어져서 다리가 절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무엘하 4장에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에 대해서 어떤 대우를 했습니까? 천대했습니까, 특별대우를 해줬겠어요? 특별대우를 해줬지요. 이게 상당히 문제인데요. 왜냐하면 지금 다윗은 누구와 계약한 게 아니에요. 누구와 의논하지 않습니다.

다윗과 므비보셋의 관계는 점선이에요. 사무엘상 20장 42절에 보면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자기들 친구가 되어 영원한 언약을 맺었습니다. 지금 요나단은 죽었거든요. 자기 아버지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었어요. 죽었을 때에 다윗은 그 요나단을 아끼면서 요나단의 아들에게 영원한 언약을 했어요. 그럼 실선은 뭐냐 하면 이런 게 참 어려운데요.

자, 므비보셋은 현재 사무엘하 4장 때 살아 있습니까, 죽어 있습니까? 절뚝발이 사람은 살아 있지요. 살아 있으니까 실선으로 동그라미 치겠습니다. 실선을 살아 있다는 뜻이에요. 다윗은 누구와 언약했느냐 하면 친구 요나단과 했지요. 요나단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점선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점선으로 처리한 이 언약을 다윗과 므비보셋을 아무 관계없이 의논도 없이 일방적으로 므비보셋에게 모든 혜택을 다 줘버려요. 이게 언약입니다.

지금 우리하고 예수님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우리는 므비보셋 입장이에요. 예수님은 누구와 했느냐 하면 아버지와 언약을 맺고, 그 혜택은 아무 상관도 없는 나만 쳐다보고 사는 나의 행복만 추구하는 나에게 언약적 결실을 효력 있게 적용시켜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천국 백성 만들었습니다. 이게 언약이에요.

그렇게 된 입장에서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자기 자랑했겠습니까? “다윗 임금님, 내가 착하기는 착했지요. 내가 훌륭하기는 훌륭하지요. 내가 다윗 왕을 참 좋아했으니까 나한테 잘해주지요.” 이렇게 하면 다윗이 뭐라 하겠습니까? “으응 왜 이래 너? 내가 너하고 상대해서 이런 혜택주는 게 아니야. 너는 내 상대자가 아니야. 나는 네 아버지 요나단과 계약해서 그 혜택을 너한테 주는 거야.”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죽었던 예수님과의 계약을,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그 의를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우리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 언약이 어느 날 우리로 하여금 알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 안에서 우리의 운명, 우리의 미래, 우리의 숙명, 우리의 장래 수시합격입니다. 땅땅땅 끝났어요. 끝났습니다.

특히 언약적으로 하나님의 대상으로서 우리의 미래는 오늘 죽어도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아는 이걸 우리한테 깨닫는 방식이 뭐냐? 악마로 하여금 활발하게 활동하게 합니다. 악마는 이 언약 바깥에 있어요. 아까 공부했으니까 복습합시다. 언약 바깥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 했습니까? 언약을 모르는 인간은 자기를 쳐다보는 인간끼리 한 덩어리가 된다 했지요.

이 땅에서 낙오자 되면 안 되고 출세 못하면 안 되니까 서로 한 덩어리 될 때 성공했다 보는 거예요. 남들이 나를 부러워할 때 나는 어느 정도 선방한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하고 우리 가문의 영광으로 보는 겁니다. 한 덩어리니까.

그래서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 다 성공한 사람이에요. 자기 아들 학폭해서 국가수사본부장 됐다 하루 만에 사퇴한 검사 출신 변호사 있잖아요. 그 정도하면 성공한 사람이에요. 왜? 이름났잖아요. 이재명 성공한 사람이죠. 왜? 티비 나잖아요. 이름난다는 것은 하나의 일시적으로 표준적 인물이 되었다는 우리가 부러운 대상이 되었다는…….

학교폭력해서 소리 소문 없이 지금 아무것도 없는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뭔가 떠야 그 사람의 뒤를 깨낼 여지가 있지요. 임영웅이 말고 황영웅이는 트롯대회에서 1등 했는데 폭력사건에 연루되어 결승전을 앞두고 자진 하차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만큼 떴잖아요. 그 사람이 노래대회 나오지 않았으면 그 사람이 폭력 사태가 있었는지 몰라요.

뭔가 내가 가고 싶은 자리, 성공의 자리를 미리 점유했어야 이 땅에 유명인사가 되는 겁니다. 지금도 마약하고 프로포폴하는 사람 한둘이 아닌데 특정 인간이 마약에 뭐한다 하니까 유명인사 되잖아요. 어이가 없네. 본명이 엄홍식, 영화배우 유아인. 뭔가 이렇게 참 대단한 사람이야, 이렇게 돼야 뒷말이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 프로포폴해야 신문에 나지도 않아.

얼마나 인간은 바로 평소에 정신적으로 스트레스 받는 게 뭐냐 하면 일단은 유명인사 되자. 남들이 부러워하는 존재가 되자. 그게 우리의 삶의 목표다. 삶의 목표지요.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절뚝발이 므비보셋을 부러워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므비보셋은 자기가 아무것도 한 것도 없고 할 것도 없었는데 아버지끼리 계약해서 아버지 대에서 자기 운명은 결정 났어요. 이게 언약입니다.

이걸 누가 방해하고 누가 못 마땅해 하느냐? 마귀가 활발하게 작동해서 이걸 계속해서 “치워버려. 이상한 소리 치워라.” 자꾸 우리 머릿속에 치우고 나중에 마약하든 말든 너도 영화배우로 한 번 떠봐라. 어이가 있든 없든 떠봐라.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할게요, 이러면 유명인사 되니까.

평소에 얼마나 그런 자들을 우리가 씹는 자들을 선망해왔던가를 우리는 여론과 뉴스를 통해서 발견하지요. 하나 되게 하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여론이라 해요. 여론몰이, 여론의 중심에 서는 거예요. 아까 같이 욕 얻어먹는 여론도 있지만 허준이라고 하는 사람, 필즈상이라고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그 상을 받았던 프린스턴대 교수지요, 우리나라 사람.

40세 이전에 상을 주기 때문에 이 사람 될 때 전 세계 수학자들이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봐. 한 곳에 몰빵하니까 성공하잖아.”라고 많은 엄마들이 얼마나 자기 자식들 닦달 냈겠습니까. “네가 한 곳에 잘하면 밀어줄게.” 한 덩어리죠. 한 덩어리잖아요. 우리의 평소의 말씨나 태도나 마음가짐, 행동에 이런 악마적인 언약을 배제하고 우리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그러한 스타일, 그런 방식에 삶이 얼마나 우리를 꽉 이렇게 프레스, 억누르고 있는지 몰라요.

이런 세상에 대해서 주께서는 심판하십니다. 심판하는 근거는 이거에요. “같잖지도 않는 네가 뭘 안다고 너희끼리 뭉쳐.” 그런 마귀들, 그런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뭐 복음이 어떻고 하지 마세요. 개, 돼지한테 복음 전해야 소용없고요. 그냥 허허 웃지요. “열심히 해라.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 열심히 해라.”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데…….” “그래 성공해라. 그건 결핍이야.” 성공이 남아있는 것은 결핍입니다. 확정된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것 누가 쳐다봅니까? 자기 자신 쳐다보고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쳐다보면서. 교회 나와서 신에게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성경에 우상을 보면 반드시 자기를 위해서, 포함돼요.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 비는 걸 우상이라 해요. 그러나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했습니다. 누가? 어떤 인물이. 인물이 누군데? 예수님.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 안 믿고 뭘 믿는가? 하나님 믿고 싶어 해요. 하나님은 나를 부정하지 않아도 예수님은 나를 부정하기 때문에. 예수님 십자가가 나를 부정하잖아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하나님도 믿고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서 뭘 제거하느냐? 십자가 제거한 예수, 새 생명 예수를 믿어요. 마귀가 그 짓한다고요. 새 생명 예수, 부활의 예수. 부활의 예수는 뭐냐? 십자가는 지나갔다는 거예요. 어디 버스입니까, 지나가게?

십자가가 뭐냐? 언약의 마감입니다. 끝입니다. 끝을 소개한 게 부활이에요. 부활의 능력입니다. 안 살아봐도 미래 알게 된 끝, 마감, 마감의 형국, 마감의 상태 이걸 바로 하나님은 하나의 중심으로 대결해요. 자, 요한계시록 인간들은 모두 큰 성 바벨론 하나입니다. 음녀 하나에요. 그럼 이쪽 하나님 쪽, 언약 쪽에도 둘 돼야 되겠어요, 하나 돼야 되겠어요? 하나지요.

그 하나님 쪽에서 말한 하나가 사도행전 2장 1절과 2절에 나옵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그날에 모였더니 하늘에서 뭐가 주어졌습니까? 성령이 불 같이 내려와서 전부 다 한 가지 내용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미 하나가 된 사람이에요. 한 인물에서 예수님께 나온 예수님의 그 덩치, 지체, 신체의 하나로 퍼지게 만들었어요.

저쪽 하나와 이쪽 하나와 대결상태, 대결구도로 이어가는 것, 이것이 이 세상에 남은 양상이고 모습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세계에서 인간 자기 쳐다보는 모든 시도는, 그들은 말합니다. 자기의 자율성을 이야기하죠. 자율성 자주 이야기하는데, 나의 자율성이 결국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도록 하나님이 조치하신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판단하는 모든 것이 나중에 계산해보니까 결국 나를 망치게 하는 거예요. 나를 불리하게 했어요. 나를 파멸에 넣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은 바로 내가 하는 일이 모아놓은 쓰레기 같은 오물덩어리에서 그 오물과 더불어 같이 폐허가 되어가는 그 과정, 그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그 폐허에서 자기 백성을 만들어내고 건지시는가, 그거는 10분 뒤에.


20230303a 울산강의-역대기상(18강) 16장 22절 : 하나님의 음식물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상 16장 22절,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다윗이 예언하면서 그 백성들에게 선지자와 왕의 입장에 서서 장차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그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을 통해서 나타나셨을 때 이걸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언약의 특징은 특정 인물로 나타난다. 그럼 이건 무엇과 대조되느냐 하면, “평소에 나는 누구 쳐다보고 사는가?” 이것과 대조하면 대번 알 수가 있지요. 이게 사람들은 두 개를 이야기해요. 하나는 나는 나를 쳐다본다. 두 번째, 나는 하나님(신)을 쳐다본다. 나는 나를 보고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쳐다보고 산다. 이게 하나님이 실제로 언약으로 일하는 특징에 의하면 여기에 들어갈 수 없어요. 모조리 다 잘못입니다.

오늘 뉴스에 루마니아 대통령이 나왔어요. 루마니아 대통령이 이야기를 하는데 뭐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챗GPT 보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챗GPT가 거울 같이 생겼어요. 그러면 루마니아 대통령은 오늘 아침에 누구와 이야기했는가?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 누가 제일 예쁜가?” <백설 공주>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거울보고 하는 거예요. 챗GPT 보고 나라는 어떻게 하면 되고, 올해 앞으로 경제정책 어떻게 하면 되느냐? 챗GPT 보고 묻는 거예요. 자기는 이렇게 신식 대통령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거울 속에서 챗GPT가 나오고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현대판 <백설 공주>되지요.

그러면 루마니아 대통령은 누구 쳐다보고 있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지요. 거울아, 거울아 자기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자기는 괜찮은 비서 하나 들였다고 주장하는 데, 여러분들은 누구 쳐다보지요? 나를 쳐다보고 하나님 쳐다본다. 둘 다 탈락입니다. 언약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언약은 특정 인물로 등장해서 나와 경쟁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고 인물로 나타나는 거예요. 이게 언약이에요. 노아언약 때는 노아로 나타났어요. 아브라함언약 때는 아브라함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삭에는 이삭으로 나타났고, 야곱에는 야곱으로 나타났어요. 그게 바로 역대상 16장 16절부터 17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영원한 언약이며, 이렇게 돼 있지요.

성경에 아브라함언약이라 할 때 여러분은 여기서 도발적이어야 돼요. 내가 아브라함보다 뭐가 못 났는데 왜 나는 나를 쳐다보는 것을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쳐다봐야 하는가? 아브라함 지가 뭔데? 이렇게 도발적으로 나온다면 여러분들은 성경을 지금 제대로 이해하고 깊숙이 성경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보셔도 돼요. 성경 속으로 들어가려면 화가 나야 됩니다. 분노가 일어나야 돼요.

“왜 나는 나를 못 보고 만들어? 하나님 왜 저를 못 보게 만듭니까?” 그렇게 화를 내야 오늘 본문 16장 22절을 이해돼요.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방금 했던 원칙을 그대로 적용시켜버리면, “하나님, 나는 내 편한 데로 내 행복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런데 그 기름 부은 자가 뭐기에 선지자가 뭐기에 어떻게 나보다 중요합니까, 하나님?”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제대로 하나님 앞에 사로잡힌 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좋은 사이가 아니에요.

그러면 기름 부은 자, 선지자가 언약이거든요. 이게 다윗언약, 다윗에게 이런 다윗이 기름 부은 왕이고 다윗이 선지자니까요. 그럼 왜 우리는 날 못 쳐다보고 그 선지자, 왕을 쳐다봐야 되느냐, 기름 부은 자를 쳐다봐야 되는가? 그것이 33절에 나옵니다. “그리 할 때에 삼림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주께서 땅을 심판하려 오실 것임이로다”

무슨 삼림의 나무들이 뭐 즐겁다고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심판하시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심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삼림들이 아주 춤을 추듯이 좋아하고 기뻐하고, 하나님 조치는 항상 정당하고 잘하셨습니다, 이렇게 찬미하는 모습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왜 이 세상은 심판돼야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특징이 뭐냐? 노아언약도 그렇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특징은 인물로 나타난다 했지요. 그 내용이 뭐냐 하면 ‘멸종 시나리오’에요. 인류멸종 시나리오입니다. 인류만 멸종당하는 게 아니에요. 모조리 다. 인류멸종 시나리오, 세상을 전부 다 멸종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멸망시키려고 하시는 거예요. 심판하시려고.

언약에 의하면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여기 ‘나’ 있잖아요. 나를 쳐다봐선 안 되고 내가 신을 쳐다보는 것도 우상이죠. 왜냐하면 인물로 등장했는데 우린 추상적인 신, 우상이죠. 허망한 신, 추상적 관념적인 신을 맨날 쳐다보면서 신에게 도와 달라 하는 거예요. 누가? 내가. 그러면 인물과 나는 경쟁관계에 있는데 하나님께선 ‘나’ 출발점을 인정하지 않지요. 인물로부터 출발해야 돼요. 나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특정인물로 출발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렇게 이야기하기보다도 실제로 창세기 12장 2절, 3절에 나오는데 여러분 피곤하시기 때문에 그냥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오늘은 아주 쉽게 가겠습니다. 다 이유가 있어요. 몸 아픈 사람이 있어서. 창세기 12장 2절,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택해서 하는 말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보세요. 또 하나님 편애하잖아요. 나한테 복을 안 줘요. 지명한 특정인물을 내세워서 그 인물에게 복을 주는 거예요.

그러니 나만 쳐다보고 사는 사람에게는 성경 하나하나가 분노 유발될 수밖에 없는 말씀입니다. 성경 보고 분노를 안 일으킨다는 것은 성경의 뜻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에요, 결국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딱 택했다니까, 아브라함을. 그리고 아브라함을 쳐다보고 가는 거예요. 너 쳐다보지 말고 아브라함, 왜? 아브라함을 쳐다보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안 쳐다보는 사람은 저주받는다. 이게 방주처럼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우리 쳐다보고 살고 아쉬우면 하나님 찾는 것, 그거는 인류멸종 시나리오에 딱 적합한 거죠. 왜 우리는 우리를 쳐다봐선 안 되는가? 언약적으로 보면 복과 저주가 아브라함에게서 출발하고 거기서 확정이 되고 규정이 된다는 말은, 우리는 이 땅에서 언약적으로 망하고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누가? 우리는. 우리는, 이걸 말을 바꿔도 마찬가지에요. 나는 해도 되고 당신. 당신은 망하고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율동까지 하면서, 당신에게 저주를~, 우리는 저주받기 위해 태어났어요. 그래서 저주받기 때문에 내가는 족족 나를 망하게 하는 일만 하게 돼 있어요. 내가 하루일과 족족. 일기 쓸 때 아침에 맑았다, 아침에 출근해서 하는 일 족족 나로 하여금 나를 폐허로 만드는 그러한 일을 축적을 하는 것에 우리는 시간을 다 보내고 있어요. 내가 나를 망하게 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주 열심을 다하고 매진을 하고 몰입을 하지요.

그래서 인간이 망하는 이유는 자기 일에 자기에게 이익이라 생각하고 자기에게 이익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매진했던 그것이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인생 다 가보니까 앞에 철벽이 있어요. “이건 길이 아니네?” 실컷 한 평생 살았는데 여기서부터 지옥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무리 오래 살고 평생 살아도 나만 쳐다보고 사니까 그런 거예요. 이거는 언약이 아니고 비-언약이에요. 언약적이 아닙니다. 이걸 좀 어렵게 말씀드릴까요.

인간은 나와 너의 관계가 아니에요. 단 둘의 관계가 아닙니다, 인간은. 언약의 인물이 개입해서 조성된 상황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린 눈에는 뭐냐 하면 나와 너, 너와 나만 보여요. 우리 단 둘이, 맨날 우리 단 둘이,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좀 더 공부를 하고 좀 더 세상에 대해서 넓게 알게 되면 이 세상은 단 둘이란 자체가 이 세상에서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신혼부부가 제주도 신혼여행 가서 호텔에 묵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단 둘이 여기 방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런데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다른 모든 중산층 계급사회가 함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문화양식, 사고방식,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그 시대의 중산층들이 평균해서 평균된 층들이 했던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고 흉내 내는 거니까요. 그 문화양식에 그들은 푹 젖어있습니다.

그들은 단 둘이 있는 게 아니고 그들 주변에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은 그 시대에 보편적으로 용인이 되는 용납이 되는 스타일, 삶의 스타일 안에서 그들은 노닥거리고 있고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단 둘이 해놓고 행동하는 것은 남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주의하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남들에게 거슬리지 않도록.

그러니까 우리 단 둘이 해놓고는 거기서 무엇을 플러스하느냐? 남들 보기에 우리는 너무 오버하지 않게 살자. 결혼했으니까 주변의 사람들, 어른들에게 실망스럽지 않게 살자 할 때 이 단 둘이 성립 안 돼요. 제3의 요소, 타인의 시선을 떠안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세상은 오늘 강의 진도에서 이걸 필히 여러분들이 아셔야 돼요. 방금 이것을 어려운 말로 단일화된 총체화라 합니다. 세계는 단일화된 총체화로 뭉쳐져 있음, 묶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세상은 모두 다 여기 하나로 모여라, 하는 쪽으로 묶여져 가고 있어요.

오늘 우리 외손녀가 휴대폰을 샀는데 애들 휴대폰이 따로 있어요. 초등학교 2학년이 휴대폰이 왜 필요하냐? 학교 등교하고 보니까 자기 빼놓고 휴대폰을 다 갖고 있어요. 몰랐지요. 외국에 살다보니 그걸 몰랐던 거예요. 단일화잖아요. 총체화고. 이 땅에 이 시대를 거주하고 있는 것은 전부 다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한 구덩이로 서로 담겨서 한 덩어리 되는 그런 원칙에 모든 인간은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이걸 마태복음 7장에선 뭐라 하느냐? 이걸 넓은 길이라 해요. 많은 사람들이 한 덩어리로, “어서 와, 어서 와. 모여, 모여.” 서로 모여서 한 덩어리로 뭉쳐야 뭔가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결합해야 인류가 지구에서 살 출구가 생겨. 모든 지혜 다 끄집어내, 라고 한 덩어리 되어서 가는 거예요. 흩어지는 것은 낙오자에요. 그 중심축으로 모아지는 겁니다.

그 중심축이 뭐냐? 그 중심축이 바로 너와 나, 우리지요. 이 땅에 주인공은 없어요. 서로가 동일한 마음가짐으로 하나같이 집결되는 성향을 보입니다. 이 세상은. 세상이 뭐냐 할 때 전부 다 한 덩어리 되는 성향을 보인다, 이렇게 보시면 정답이에요.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 갈수록 그 성향이 강렬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기가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어디서 거주하든지간에 이 세상에 아프리카 가든지 북극에 남극에 가든지 관계없이 전부 다 세상은 한 덩어리입니다. 일종에 잡아당기는 블랙홀처럼 강한 중력이 작동하지요, 서로.

그래서 초등학교나 중학교 애들한테 너 어떻게 살래, 인생관이 뭐냐? 애들은 그걸 몰라서 너 장차 뭐 될래? 대통령 될래, 난 연예인 될래, 손흥민이 될래, 이러는데 그 복잡한 것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나, 어떻게 살래? 나 이렇게 살래. “나 남들과 떨어지지 않을래. 나는 중심축에서 벗어나지 않을래.” 이게 지 고백이 아니고 본능입니다.

그 중심축에 누가 있는데? 본인이 있지요. 어떤 영웅이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은 영웅을 원하지 않습니다. 내 자신이 영웅이에요. 그래서 떨어지지 않는 이걸 이익이라 하고, 떨어지면 이걸 손해 또는 더 노골적으로 낙오자라 해요. 시대의 낙오자. 그렇다면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이 원하는 것은 뭐냐? 평화, 화해, 평등, 소외된 자 돌아보기. 멀리 있는 사람 안아서 자꾸 한 구석으로 모으는 거예요. 누가? 이 세상이.

모든 인류가 한 덩어리된 것, 이것은 이미 마이클 잭슨이 노래한 거예요. 라는 가수들 한 오십 명 나와서 부른 것도 있고, 마이클 잭슨이 주기도문 주제로 부른 노래도 있어요. 한 덩어리 된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의라고 하는 거예요. 정의라고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학교에서 배운 정의란 소외된 자를 돌아보고 억울하고 어려운 사람을 챙겨서 그다음 뭔데? 한 덩어리 되는 거예요.

애가 태어나서 일 년 되면 그걸 뭐라고 하지요? 돌이죠. 돌잔치 해주잖아요. 돌잔치 왜 해줍니까? 일종에 서약 같은 거예요. 너는 이제 우리 집안사람이라는 서약이에요. 집안사람이면 한 덩어리가 돼요. 따로 놀지 말란 말이죠. 전에는 우리는 뼈대 있는 집안이라서 선조나 아버지 섬기자, 이랬는데 현대는 아버지고 선조고 없어요. 각자가 아버지고 각자가 어른이고 그래요.

각자가 어른인데 따로 노는 어른이 아니고 한데 뭉쳐지는 한 가정으로서의 다 같이 어른이 되는 조건 하에 뭉쳐지는 것, 그걸 네 자로 ‘민주주의’라 하는 거예요. 학교에선 그 민주주의 교육을 시키고요. 그 민주주의가 어떤 범위에서 못 벗어나느냐? 민족주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민주주의는 정치적 제도지만 민족주의는 혈통적 주의잖아요. 인간이 만든 관념이 혈통을 못 이겨요. 그러니까 민주주의를 하되 우리끼리 민주주의. 우리끼리 민족? 북한에서 나오는. 그걸 국뽕이라 해요. 자기 민족에 대한 광신도.

자, 이러한 세상적으로 지금 방금 이야기한 것이 뭐냐? 세상은 가만있는 게 아니고 끊임없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 데 그 움직임은 어떤 움직임이 되겠습니까? 멀리 있는 사람들, 가까이 있는 사람들 전부 다 어떻게 된다? 한 덩어리가 되는 움직임. 요한계시록 17장에서 19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모든 것이 모든 나라, 민족이고 뭐고 모든 게 결국은 한 통속이 되는 거예요. 아담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마지막도 아담의 몸체로 마감되는 것이 인류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 한 덩어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 고립시켜버립니다. 자,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하냐 하면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게 된 이유가 이런 데서 나와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주변 나라와 교역을 해보니까 경제적 고립이 나라를 망친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독고다이, 우리 중심으로서는 나라 자체가 유지가 될 수 없어요.

큰 나라들이 어떻게 했는가? 큰 나라들이 교역이 활발하면 할수록 강대한 나라, 주변의 힘을 자기 나라 쪽으로 쫙쫙 빨아들여줘야 나라가 튼튼해져요. 이걸 현대식으로 이야기하면 투자가 없으면 나라꼴이 안 됩니다. 외국투자가 없으면. 외국투자가 지금 주식을 팔고 나가버리면 울산 80%가 수입이 없게 돼요.

그렇게 해서 그들이 뭉쳐서 원하는 게 외치고 싶은 게 있을 것 아닙니까. 자꾸 하나로 응집이 되는 데요. 태양의 오십 배 되는 별이 응집이 되면 그것이 블랙홀이 돼요. 무게가. 천문학에서 계산을 해보니까. 스스로 큰 깊은 우물을 만드는 거예요. 뭉치면. 자꾸 뭉쳐서 외치는 구호가 뭐냐? 이겁니다. 참 이거는 진짜 아무나 안 가르쳐주는 건데. 살아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거예요. 이게 인간세계입니다.

지금껏 강의하면서 제일 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하나님의 언약은 특정 인물을 내세운다 하지요. 그렇다면 언약 바깥에, 언약이 없는 곳에는 특정 인물이 아니고 자기만 쳐다보고 신을 쳐다보는 그들끼리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끼리 모여서 하나의 덩어리가 이뤄지는 거예요. 그런데 역대상 16장에 보면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고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해서 특정 인물을 내세웠잖아요.

아까 이야기했는데 다시 말씀드리면 그 특정 인물이 하는 일이 뭐라고 했습니까? 33절에 심판이죠. 심판이니까 우리가 지금 방금 내린 결론이 뭐냐? 인간 뭉친 이유가 결국 마지막 도달한 게 뭐냐 하면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 하잖아요. 주님께서는 이 자랑스럽다는, 뭉쳐 있는 모든 인간이 살아 있는 모든 인류에 대한 자체적인 찬미죠. 자체적인 흐믓함, 뿌듯함 이런 거란 말이죠.

이걸 뭐로 만드는가? 이걸 폐허로 만들어버려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으로 폐허로 만들어버리면 이 안에 있는 인간들, 폐허에 사는 인간들을 두 자로 하면 뭐라 할까요? 폐허의 위에서 사는 인간을 뭐라 할까요? 폐인. 폐인의 특징은 자기가 쏟아낸 오물, 쓰레기 안에서 못 빠져나온 걸 폐인이라 하지요. 자기가 쏟아 부은 그 쓰레기 안에서 그 쓰레기가 너무 아깝고 쓰레기가 너무 자랑스러워서 거기서 나갈 생각을 못하는 걸 두 자로 폐인이라 하는 거예요.

한쪽은 폐허가 될 인간들의 집단, 덩어리 이쪽은 복이 되는 하나님의 인물. 언약 속의 인물은 복이 되고 그 복에 의해서 공격 대상이 되는 인간의 뭉쳐진 단체는 뭐가 되겠습니까? 복 반대 저주가 되겠지요. 성경 참 쉽지요.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쉽게 하십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 때문에 신을 찾는 것, 그것 그 인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물을 따로 내세워요.

하나님이 인물을 따로 내세운 걸 아시는 분은 성경을 보면서 살짝 분노해야 돼요. 왜 내가 아니고 저 사람입니까, 나 아니고 왜 아브라함입니까, 나 아니고 왜 이삭입니까, 나 아니고 왜 야곱입니까, 나 아니고 왜 예수님이십니까, 라고 질문을 진지하게 심각하게 할 수 있어야 돼요.

그러면 다시 봅시다. 나는 가만있지 않고 뭘 찾습니까? 나는 나를 찾고 나를 쳐다보고 살고 또 누굴 쳐다본다? 신을 쳐다보지요. 이 신을 구약성경에서 이걸 우상이라 했습니다. 우상의 반대말은 뭐냐? 인물이죠. 왕이죠. 언약의 인물, 왕. 그 왕을 바로 오늘 본문 역대상 16장 22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거예요.

우상의 반대말은 참된 신, 이렇게 이야기하지 마세요. 참된 신이 언약을 가지고 특정 인물을 이 땅에 내세웠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을 쳐다보게 되면 다 신자 같아요. 그런데 신을 쳐다보는 그 인간이 누굴 쳐다본다, 평소에? 자기 자신을 쳐다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의 인물을 주신 이유는 너를 쳐다보지 말고 누굴 내세워라? 하나님이 인물화 시킨 그 사람을 네 대신 쳐다보라 이 말이에요.

아주 쉬운 말로 하나님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예수님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이 이야기거든요. 어느 쪽이에요? 둘 다 안 되지요. 둘 다 안 되죠. 누굽니까? 둘 다 믿으면 구원받는다? 성경에 없어요. 성경에 주 예수를 믿어라, 이렇게 돼 있지요. 하나로 한다고. 둘 다 믿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항상 단 둘이 있는 것 같지만 항상 짝을 찾아요. 일단 나는 집어넣고 나한테 잘해줄 짝.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나도 보고 그 짝도 보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요. 모든 사람이.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너도 믿고 너도 쳐다보고 나를 쳐다보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아니면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라 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라 했지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나는 언약의 인물이 아니고 아까 말씀대로 하면 나는 폐인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종내 잊지를 못해요. 내가 했던 모든 일, 노동뿐만 아니고 사랑, 미움, 여러 가지 열심, 내가 신혼여행 간 것, 아기 낳은 것, 그 하나하나 내가 장로 되고 안수 받아 목사 된 것, 인간은 자기에 관한 모든 것을 잊지를 못합니다. 잊지를 못할 정도가 아니고 거기다가 의미를 부여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망하고 저주받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우리가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에 대해서 화내지 마세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분명히 했어요. 너 쳐다보지 말고 언약을 지니고 있는 그분을 보라고 분명히 언급했으니까 화낸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나 쳐다보고 아브라함 쳐다보고 둘 다를 보는 게 되니까 이거는 자기를 부인하는 게 아니죠. 너 아니고 아브라함이야, 너 아니고 이삭이야, 너 아니고 야곱이야, 너 아니고 예수님이야, 너 아니고 다윗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한 가지를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무엘하 4장 4절에 보면 제가 읽어볼게요.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 나이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하더니 급히 도망하므로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므비보셋이 다섯 살 때 유모가 급히 도망가다가 넘어져서 다리가 절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무엘하 4장에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에 대해서 어떤 대우를 했습니까? 천대했습니까, 특별대우를 해줬겠어요? 특별대우를 해줬지요. 이게 상당히 문제인데요. 왜냐하면 지금 다윗은 누구와 계약한 게 아니에요. 누구와 의논하지 않습니다.

다윗과 므비보셋의 관계는 점선이에요. 사무엘상 20장 42절에 보면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자기들 친구가 되어 영원한 언약을 맺었습니다. 지금 요나단은 죽었거든요. 자기 아버지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었어요. 죽었을 때에 다윗은 그 요나단을 아끼면서 요나단의 아들에게 영원한 언약을 했어요. 그럼 실선은 뭐냐 하면 이런 게 참 어려운데요.

자, 므비보셋은 현재 사무엘하 4장 때 살아 있습니까, 죽어 있습니까? 절뚝발이 사람은 살아 있지요. 살아 있으니까 실선으로 동그라미 치겠습니다. 실선을 살아 있다는 뜻이에요. 다윗은 누구와 언약했느냐 하면 친구 요나단과 했지요. 요나단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점선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점선으로 처리한 이 언약을 다윗과 므비보셋을 아무 관계없이 의논도 없이 일방적으로 므비보셋에게 모든 혜택을 다 줘버려요. 이게 언약입니다.

지금 우리하고 예수님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우리는 므비보셋 입장이에요. 예수님은 누구와 했느냐 하면 아버지와 언약을 맺고, 그 혜택은 아무 상관도 없는 나만 쳐다보고 사는 나의 행복만 추구하는 나에게 언약적 결실을 효력 있게 적용시켜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천국 백성 만들었습니다. 이게 언약이에요.

그렇게 된 입장에서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자기 자랑했겠습니까? “다윗 임금님, 내가 착하기는 착했지요. 내가 훌륭하기는 훌륭하지요. 내가 다윗 왕을 참 좋아했으니까 나한테 잘해주지요.” 이렇게 하면 다윗이 뭐라 하겠습니까? “으응 왜 이래 너? 내가 너하고 상대해서 이런 혜택주는 게 아니야. 너는 내 상대자가 아니야. 나는 네 아버지 요나단과 계약해서 그 혜택을 너한테 주는 거야.”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죽었던 예수님과의 계약을,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그 의를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우리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 언약이 어느 날 우리로 하여금 알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 안에서 우리의 운명, 우리의 미래, 우리의 숙명, 우리의 장래 수시합격입니다. 땅땅땅 끝났어요. 끝났습니다.

특히 언약적으로 하나님의 대상으로서 우리의 미래는 오늘 죽어도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아는 이걸 우리한테 깨닫는 방식이 뭐냐? 악마로 하여금 활발하게 활동하게 합니다. 악마는 이 언약 바깥에 있어요. 아까 공부했으니까 복습합시다. 언약 바깥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 했습니까? 언약을 모르는 인간은 자기를 쳐다보는 인간끼리 한 덩어리가 된다 했지요.

이 땅에서 낙오자 되면 안 되고 출세 못하면 안 되니까 서로 한 덩어리 될 때 성공했다 보는 거예요. 남들이 나를 부러워할 때 나는 어느 정도 선방한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하고 우리 가문의 영광으로 보는 겁니다. 한 덩어리니까.

그래서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 다 성공한 사람이에요. 자기 아들 학폭해서 국가수사본부장 됐다 하루 만에 사퇴한 검사 출신 변호사 있잖아요. 그 정도하면 성공한 사람이에요. 왜? 이름났잖아요. 이재명 성공한 사람이죠. 왜? 티비 나잖아요. 이름난다는 것은 하나의 일시적으로 표준적 인물이 되었다는 우리가 부러운 대상이 되었다는…….

학교폭력해서 소리 소문 없이 지금 아무것도 없는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뭔가 떠야 그 사람의 뒤를 깨낼 여지가 있지요. 임영웅이 말고 황영웅이는 트롯대회에서 1등 했는데 폭력사건에 연루되어 결승전을 앞두고 자진 하차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만큼 떴잖아요. 그 사람이 노래대회 나오지 않았으면 그 사람이 폭력 사태가 있었는지 몰라요.

뭔가 내가 가고 싶은 자리, 성공의 자리를 미리 점유했어야 이 땅에 유명인사가 되는 겁니다. 지금도 마약하고 프로포폴하는 사람 한둘이 아닌데 특정 인간이 마약에 뭐한다 하니까 유명인사 되잖아요. 어이가 없네. 본명이 엄홍식, 영화배우 유아인. 뭔가 이렇게 참 대단한 사람이야, 이렇게 돼야 뒷말이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 프로포폴해야 신문에 나지도 않아.

얼마나 인간은 바로 평소에 정신적으로 스트레스 받는 게 뭐냐 하면 일단은 유명인사 되자. 남들이 부러워하는 존재가 되자. 그게 우리의 삶의 목표다. 삶의 목표지요.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절뚝발이 므비보셋을 부러워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므비보셋은 자기가 아무것도 한 것도 없고 할 것도 없었는데 아버지끼리 계약해서 아버지 대에서 자기 운명은 결정 났어요. 이게 언약입니다.

이걸 누가 방해하고 누가 못 마땅해 하느냐? 마귀가 활발하게 작동해서 이걸 계속해서 “치워버려. 이상한 소리 치워라.” 자꾸 우리 머릿속에 치우고 나중에 마약하든 말든 너도 영화배우로 한 번 떠봐라. 어이가 있든 없든 떠봐라.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할게요, 이러면 유명인사 되니까.

평소에 얼마나 그런 자들을 우리가 씹는 자들을 선망해왔던가를 우리는 여론과 뉴스를 통해서 발견하지요. 하나 되게 하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여론이라 해요. 여론몰이, 여론의 중심에 서는 거예요. 아까 같이 욕 얻어먹는 여론도 있지만 허준이라고 하는 사람, 필즈상이라고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그 상을 받았던 프린스턴대 교수지요, 우리나라 사람.

40세 이전에 상을 주기 때문에 이 사람 될 때 전 세계 수학자들이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봐. 한 곳에 몰빵하니까 성공하잖아.”라고 많은 엄마들이 얼마나 자기 자식들 닦달 냈겠습니까. “네가 한 곳에 잘하면 밀어줄게.” 한 덩어리죠. 한 덩어리잖아요. 우리의 평소의 말씨나 태도나 마음가짐, 행동에 이런 악마적인 언약을 배제하고 우리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그러한 스타일, 그런 방식에 삶이 얼마나 우리를 꽉 이렇게 프레스, 억누르고 있는지 몰라요.

이런 세상에 대해서 주께서는 심판하십니다. 심판하는 근거는 이거에요. “같잖지도 않는 네가 뭘 안다고 너희끼리 뭉쳐.” 그런 마귀들, 그런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뭐 복음이 어떻고 하지 마세요. 개, 돼지한테 복음 전해야 소용없고요. 그냥 허허 웃지요. “열심히 해라.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 열심히 해라.”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데…….” “그래 성공해라. 그건 결핍이야.” 성공이 남아있는 것은 결핍입니다. 확정된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것 누가 쳐다봅니까? 자기 자신 쳐다보고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쳐다보면서. 교회 나와서 신에게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성경에 우상을 보면 반드시 자기를 위해서, 포함돼요.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 비는 걸 우상이라 해요. 그러나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했습니다. 누가? 어떤 인물이. 인물이 누군데? 예수님.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 안 믿고 뭘 믿는가? 하나님 믿고 싶어 해요. 하나님은 나를 부정하지 않아도 예수님은 나를 부정하기 때문에. 예수님 십자가가 나를 부정하잖아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하나님도 믿고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서 뭘 제거하느냐? 십자가 제거한 예수, 새 생명 예수를 믿어요. 마귀가 그 짓한다고요. 새 생명 예수, 부활의 예수. 부활의 예수는 뭐냐? 십자가는 지나갔다는 거예요. 어디 버스입니까, 지나가게?

십자가가 뭐냐? 언약의 마감입니다. 끝입니다. 끝을 소개한 게 부활이에요. 부활의 능력입니다. 안 살아봐도 미래 알게 된 끝, 마감, 마감의 형국, 마감의 상태 이걸 바로 하나님은 하나의 중심으로 대결해요. 자, 요한계시록 인간들은 모두 큰 성 바벨론 하나입니다. 음녀 하나에요. 그럼 이쪽 하나님 쪽, 언약 쪽에도 둘 돼야 되겠어요, 하나 돼야 되겠어요? 하나지요.

그 하나님 쪽에서 말한 하나가 사도행전 2장 1절과 2절에 나옵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그날에 모였더니 하늘에서 뭐가 주어졌습니까? 성령이 불 같이 내려와서 전부 다 한 가지 내용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미 하나가 된 사람이에요. 한 인물에서 예수님께 나온 예수님의 그 덩치, 지체, 신체의 하나로 퍼지게 만들었어요.

저쪽 하나와 이쪽 하나와 대결상태, 대결구도로 이어가는 것, 이것이 이 세상에 남은 양상이고 모습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세계에서 인간 자기 쳐다보는 모든 시도는, 그들은 말합니다. 자기의 자율성을 이야기하죠. 자율성 자주 이야기하는데, 나의 자율성이 결국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도록 하나님이 조치하신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판단하는 모든 것이 나중에 계산해보니까 결국 나를 망치게 하는 거예요. 나를 불리하게 했어요. 나를 파멸에 넣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은 바로 내가 하는 일이 모아놓은 쓰레기 같은 오물덩어리에서 그 오물과 더불어 같이 폐허가 되어가는 그 과정, 그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그 폐허에서 자기 백성을 만들어내고 건지시는가, 그거는 10분 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