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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6:12-15 / 씻김굿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6:12-15 / 씻김굿

정인순 2023. 2. 19. 16:17

음성           동영상

 

씻김굿

 

이근호
2023년 2월 19일             

 

본문: 예레미야 6:12-15

(6: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6:13)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6: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6:15)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왜 선지자들이 사람들에게 평강을 말하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이 세상에서 해서는 안 되는 질문으로 분류됩니다. 경솔하고 무례한 질문으로 간주됩니다. 사람이 되었으면 같은 사람에게는 친절하고 위로하고 긍정적인 언사로서 상대방에게 힘 실어주어야 하는 것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마땅한 태도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다음과 같은 질문은 의미있는 질문으로 여겨집니다. “왜 선지자라고 자처하면서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부정적인 발언을 해대는가?”라는 질문말입니다. 선지지가 ‘평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평강을 없애는 쪽’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평강이 없다’고 선지자들로 말하게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냥 세상 돌아가는대로 방치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수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세상을 멸망할 거니까요.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미리 망함을 언급하므로서 ‘차이’를 부각하려고 하시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두 개의 선택지를 주시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 인간은 필히 화평이 없는 쪽을 선택하는 그런 내재적 속성을 발휘하게 됨을 하나님께서는 나타나게 하시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을 보내실 때에, 인간들은 필히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는 쪽으로 그들의 선택을 실시하게 됩니다.

인간들은 오로지 평소에 자신이 기대한 평강을 놓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망하기가 싫은 겁니다. 따라서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상에 부합되는 선지자를 찾아가거나 초청합니다. 사람은 싫어하는 일을 하면서 돈 벌고, 좋아하는 일을 위하여 돈을 내놓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돈이 되는 식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모든 종교는 동일한 행위를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미가 3:11-12에 보면,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백성들이나 선지자들이나 마음이 일치된 겁니다. 하나님을 끌어당기되, 자신에게 올 재앙이나 지금 자신들에게 들이닥친 불행이 소멸되기를 위한 용도로 확정된 채 굿판을 여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란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자기 인생 노선이 원활하게 잘 돌아가기를 바라는 뜻을 말합니다.

씻김굿이란 자기에게 붙어있는 불길한 기운을 떨어내는 굿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확고한 입장은 ‘차이남’을 보이시는 겁니다. 인간들이 예상한 세계와 이것과 확연하게 차이나는 다른 세계를 다 보여주는 겁니다. 기존의 노선과 오는 노선, 둘 다를 말하고 이 노선들에게는 그 어떤 연속성이 없음도 아울러 보여주시는 겁니다.

한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결혼을 앞둔 여자에게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고전 7:26-28)

혼기에 든 여자들은 누구나 아름다운 미래를 희망합니다. 자신이 너무 너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그 남자로부터 전폭적으로 사랑을 받고 늘 자신이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미리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자꾸만 상상으로 그 내용을 채울 뿐입니다.

사도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주신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대신 고린도후서 4:10-11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이게 바로 차이남의 진수이지요.

결혼이고 뭐고, 날마다 자신을 죽음에 넘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손해보지 않는 기존의 인생노선을 고수하기 위해 하나님의 제사나 예배까지 그대로 모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단호하십니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암 5:21-23)

그렇다면 거짓 선지자들이 돈을 밝히지 아니하면 참 선지자로 처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근원적으로 돈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문제점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말씀 성취’는 이 땅에 환란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발하신 ‘차이남’은 환란 형식으로 정립됩니다.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암 6:5-6)

요셉의 환란은 요셉조차도 예상하거나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를 향하여 작용하는 말씀에 의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인간의 자기 관리를 벗어나는 일입니다. 이는 마치 왕이 되기 전에 사울에게도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삼상 10:5-6)

아버지 명따라 암나귀 찾으려 갔다가 졸지에 사울은 선지자가 되어버린 겁니다. 짧은 순간이기도 하지만 이것도 두 개의 차이남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예입니다. 구약의 이 세상 못함은 신약에서는 십자가 죽음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누가 의도를 가지고 받아들이겠습니까? 세상과 하늘의 차이남을 위하여 부름받은 자들 뿐입니다. 비록 가족들과 원수가 되는 상황이 온다할지라도 말입니다.(마 10:34-3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두 노선을 함께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