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시편 39:5 / 허무의 강 / 230213 본문
녹취:한윤범
20230213a 부산강의 : [시편]55(39:5)-허무의 강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39편입니다. [다윗의 시]라고 돼 있지요. 다윗으로부터 나라가 둘로 나눠져요. 물론 솔로몬도 나눠지지만. 다윗에서 그다음에 솔로몬 하면서 나라가 둘로, 이쪽을 북이스라엘이라고 이야기하고 남쪽을 유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이 둘로 깨어졌어요. 당구에서 당구공 하나 탁 치면 같이 묶여있던 두 개가 튕겨져 나가지요.
둘로 나눠졌다는 것은 나쁘다는 뜻이에요. 원래 하나님의 원했던 이스라엘이 안 되었다, 그것이 파괴되었다는 이스라엘의 파괴를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이 파괴될 때는 다윗과 솔로몬으로 넘어오면서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제대로 개선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언약이 다윗에서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파괴됩니다.
B.C.721년에 파괴되고, B.C.586년에 파괴돼요. 둘 다 멸망합니다. 이렇게 멸망하게 되면 다윗언약은 이 땅에서 멸망의 형식으로 완성이 되는 겁니다. 다윗언약이 멸망했다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하늘과 땅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매개로 하는 거예요. 매개 또는 매체. 여기서 건너갈 수 없고 중간에 다리 역할 하는 게 있어줘야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거예요.
이거는 야곱에서 사다리 역할을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야곱언약에 있어서 아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야곱의 꿈속에 나타나는 사다리 있잖아요. 그 사다리에 오르락내리락했던 것이 사람이었던가요, 사람이 아니었던가요? 천사들이지요. 야곱이 있는 여기와 하늘의 문이 열렸어요. 벧엘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열릴 때 사다리가 있는데 이 사다리에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고 천사가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천사들이 왕래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은 아니올시다, 란 뜻이에요. 사람은 매개체, 연결체에서 사람은 끼어들 자격이 없다. 이것은 바로 창세기 3장 24절에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추방시키고 난 뒤에 일관된 취지입니다. 인간은 들락거릴 수 없고, 인간은 이곳에 올 수도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지시받는 천사들이 야곱에게 왔다는 말은, 야곱에게 언약의 본질의 하중을 가한다, 언약의 본질이 무게로 내려찍고 내리누르는 거죠. 그러면 야곱이란 인간이 우리 보기에는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야곱의 자리는 뭐냐 하면 공백의 자리, 빈자리가 되는 거예요. 언약은 천사들만 왕래하잖아요. 언약이란 매개는 천사만 거기에 뛰어들 수 있어요.
유월절 어린양 할 때 히브리인들이 애굽 사람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칼 들고 맏이를 죽인 게 아니죠. 유월절 밤에 히브리인들 뭐하고 있었습니까? 자고 있던지 너무 무서워서 잠이 안 왔던지 그냥 있었지요. 그냥 가만히 있었던 거예요. 인간이 끼어들 자리가 아닌 거예요. 이걸 신약에서 단순화시키면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끼어들 자리가 있다, 없다? 없다. 이걸 두 자로 ‘믿음’이라 하는 거죠.
믿음이란 로마서에서 행함의 반대입니다. 로마서에서 행함이란 주체자가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의 행함을 행함이라 해요. 인간의 행함과 반대되는 것이 뭐냐 하면 믿음이에요. 그리고 믿음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로마서에서 은혜라고 이야기하고, 그 믿음은 인간이 아무것도 안 했는데 뭔가 일이 생겨버렸어요. 무슨 일이 생겼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가 발생되고, 그걸로 영생을 얻고, 그걸로 인하여 부활의 사람이 되고 천국을 가게 된 이야기가 로마서입니다.
교회 왔으면 천국은 확실하게 가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야 남는 장사가 될 것. 교회 와놓고 천국 못 가면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교회 다녔으면 남들에게 천국은 확실히 간다, 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되겠지요. 확실히 간다 할 때 로마서의 뜻도 모르고 그냥 믿음으로 간다, 이렇게 돼버리면 믿음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 포함이 되어 상대방에게 오해의 소지가 굉장히 강해요.
“너는 행하지 말고 믿어라.” “믿지, 뭐.” 믿음도 인간이 평소에 해왔던 거잖아요. 남편은 아내 믿고, 부모는 자식을 믿고, 자식은 부모 믿고. 전부 다 믿음관계가 형성돼 있는 이 세상, 인간이 어떤 단어를 사용할 때 그 단어에는 믿음이 뒷받침돼 있어요. 떡볶이 주세요, 했는데 호떡 내놓으면 믿음이 형성 안 되잖아요. 떡볶이라는 것은 이야기하는 사람이나 가게주인이나 전부 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믿음이 형성돼 있어요. 이 땅에서는.
이 땅에 있는 그 믿음이, 믿음을 훼방하는 것, 믿음을 방해하는 것 뭘까요?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믿음이 믿음을 방해하는, 이미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믿음을 방해해버립니다. 하나님의 믿음은 뭘 경유해야 되느냐 하면 인간의 행함은 안 된다는 것을 경유를 해야 될 텐데 인간의 행함은 안 된다는 걸 경유하지 않고 믿으려고 하니까 믿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의 항목 중에 하나가 되어 덥석 믿는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덥석 물자, 이렇게 되겠지요.
십자가를 물던지, 예수님의 피를 물던지 물면 그것이 영생을 얻는다, 이렇게 돼버리면 하나님의 일에, 분명히 야곱의 사다리에 사람은 들어갈 수 없잖아요. 사다리 할 때 야곱은 자고 있었어요. 자고 있던 야곱마저 하나님이 야곱에게 계속 언약 일을 하니까 야곱의 자리가 뭐가 됐다 했습니까? 공백, 빈자리. 그럼 야곱이란 존재는 뭘 해야 하느냐 하면 여기 내가 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꺼졌어요, 지진 나서 완전히 묻혔어요. 여기는 내가 없다는 말을 표시하는 용도로 본인이 서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여기 있는 내가 아무것도 한 적이 없습니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보초 서는 거예요. 빚쟁이들이 왔을 때 주인이 빚쟁이 피해서 도망치면서 아르바이트 학생을 집 앞에 세워놨어요. 세워놓은 이유가 뭡니까? “여기 주인 어디 갔어?” “주인 없습니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시급 받고 그 집 앞에 서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할 게 뭐 있어요, 없어요? 있기는 있는데 굉장히 쉽지요. 안 쉬워요? 성도가? 이놈의 전도, 선교, 예배 다 하려하니까 힘든 거예요. 헌금까지. 기도에다가 성경공부까지. 이것 하려하니까 거기다가 시부모까지 모셔야 되고 자식 키워야 되고. 아르바이트나 직업까지 가지려하니 도대체 하나님은 저를 왜 힘들게 합니까? 뭘 힘들게 해요?
간단한 문제입니다. 여기에 나 있는 곳에는 인간이 의미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이 뭘 해봐야 그거는 하나님 일과 아무 상관없는 일을 합니다, 라는 일을 하기 위해서 그 현장에 하나님께서 꽂아준 거예요.
이번에 터키에 지진 보면서 제가 느낀 게 있어요. 그 낯선 동네에 왜 사람은 그렇게 많이 사는지, 그게 이상했어요. 아하, 어디 가도 인간들은 있구나, 라는 사실. 물론 이슬람 쪽에 아이를 많이 낳으니까 다 분산 못 시켜서 모여 사니까 그런데 어딜 가도 땅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산다는 겁니다. 살만한 곳에 인간이 다 모여 있어요. 마치 소돔과 고모라 같이.
그런데 인간들이 모여 있다는 그 점을 하나님께서는 노리고 있지요. 그 모인 장소가 지진이 일어났지요. 지진이 일어나면 건물 잔해만 남고 사람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구멍을 만들고 그 구멍에서 누가 나오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나오는 겁니다. 뭘 통해서? 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 나오지요.
이스라엘은 예수님입니다. 야곱언약의 본래 매개체, 본래 야곱언약의 수행자가 등장해요. 담당자가 야곱언약의 완성자가 야곱으로부터 등장합니다. 등장하면서 야곱은 등장했다는 표시를 본인이 갖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김대중처럼 저는 것, 지팡이 집고 일본 가서 안기부에 당해서 문제 있었어요.
야곱이 졸지에 태어나서는 장애인이 아니었는데 하나님 만나고 뭐 됐어요? 장애인이 됐어요. 강남강의에 의하면 그게 멀쩡하지 않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처음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난 게 아니고 처음부터 멀쩡하게 태어나서 하나님 만난 티를 뭐로 보여준다? 장애로 보여주는 겁니다. “나 온전치 않아.” 온전치 않은 존재가 됨으로써 자신의 출처 자체가 온전치 않다는 것을 나중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언약사람으로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참 야곱이 안 됐다, 불쌍하다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여러분, 나중에 요양병원 가면 모든 사람이 장애인이에요. 장애가 신체적 장애만 장애가 아닙니다. 나중에 정신, 시냅스, 신경전달물질 날아가 버리면 점점 더 정신적인, 치매 현상이라 하잖아요. 장애 오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나이 많아서 장애인 됐습니까? 아닙니다. 출처, 출생부터 그런 요소가 뒤늦게 연세 많아서 발현된 겁니다. 인간은.
그러면 젊어서 정신 바짝 차린 게 정신 바짝 차린 게 아니에요. 정신 바짝 차려봐야 마귀 생각밖에 더 나옵니까? 정신 바짝 차렸는데 마귀 생각이에요. 그럼 주님께 감사하지요. 내가 찾아내지 못하는 나의 원형을 요양병원 가서 치매 걸려서 우리는 하나의 흙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의 언약은 매개인데 이 매개에 인간은 관여됩니까? 인간은 일체 관여되지 않습니다. 야곱을 자고 있었을 때에 천사가 하늘 문을, 하늘 문이 있어요. 분명히 하늘나라 천국이 있습니다. 하지만 있으면 뭐합니까, 야곱은 자고 있는데요. 야곱은 거기에 사다리 지가 오르락내리락 지가 배달의 기수도 아니고, 짜장면 시키신 분, 해서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아니에요. 천사가 다 해요.
이걸 뭐라 했습니까? 믿음이라 하지요. 더 확실하게 믿음의 내용을 꽂아주기 위해서 가만있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 뼈를 쳐버리죠. 그러니까 이제 뭐 할 건더기도 없게 만들어버리죠. 믿음 곱하기 믿음, 믿음의 제곱, 말로는 난 아무것도 못합니다, 라고 말로 때울 게 아니지요. 완전히 하나님이 야곱에게 실증적이에요. 실증적 또는 실제적으로 아예 너는 믿는 자라는 티를 굳히기 위해서 야곱으로 하여금 멀쩡하지 못하고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려요.
오늘 시편 39편 이야기가 다윗을 뭐로 만든다? 다윗을 장애자로 만들어버려요. 다윗을 장애자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오늘 핵심, 어렵겠지만 쉽게 하기 위해서 미리 이야기합니다. [다윗에게 건너갈 다음 세계는 없다.] 이게 아까 야곱에서 이야기한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 언약에 부합되는 믿음의 일관성이에요. 다음 세계가 없어요. 다음 세계는 기대하는 것은 인간의 종교적인 아이디어에 의한 발상입니다. 거기서 나온 거예요.
다음 세계가 없다는 이것이 신약에 오면 세례요한을 통해서 나타나는 데 이걸 한 마디로 구약에도 나옵니다만 이렇게 이야기해요. 세례. 특히 예수님 당시에 물세례가 있었거든요. 세례요한의 물세례. 물세례를 두 자로 하면 ‘익사’하는 거예요. 물에 빠져 죽는 거예요. 어디를 다음 세계, 천국을 넘봐? 죽어.
어떤 매개가 있을 때 그 매개에 대해서 우리가 그걸 기대하거나 요청하거나 건너갈 권리를 우리 인간 쪽에서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이 세계에 살지만 다음 세계에 산다는 그 상상조차마저 주께서는 물에다가 익사시켜야 돼요. 내가 하나님 믿으면 다음 세계, 하늘나라에 살 것이라는 그 생각, 그 발상마저 제거해야 돼요. 이것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농락하고 속이는 거예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믿음을 방해하는 건 뭐라고요? 믿음이죠. 믿음을 방해하는 건 믿음이에요. 진짜 하나님의 믿음은 인간들은 천사가 와서 발생시키는 결과물이 믿음이기 때문에 진짜 믿음은 하나님에 속한 하나님의 일이에요. 인간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일을 마중 나오면서 인간들이 뭘 준비하느냐 하면 인간이 나름대로 본인의 의사가 종합된 믿음을 미리 준비했어요.
그러니까 아직 인간세계에 나타나지 않은 진짜 믿음은 인간세계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순간순간 나타나지요. 믿음은 어디에 방해받습니까? 인간들의 아주 경건하고 성스럽고 거룩하고 아주 순결하기 짝이 없는 그 믿음에 방해받고 있는 거예요. “기다렸습니다, 메시아를.” 뭐 이런 식으로. “어서 오시옵소서.” 그런 식으로. “학수고대했습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학수고대하는 것처럼. “우린 메시아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들은 오신 메시아를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죽였잖아요.
어제 오전 설교에 이런 것 했어요. 성령이 오셔서 하는 일은 우리 모든 인간을 어디 보내느냐 하면 유일무이한 대체불가 살인사건으로 인도해요. 이천 년 전의 그 살인사건이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 이거는 거기서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관계없어요. 그게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옵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관계없이 인간이냐? 그렇다면 너희들은 전부 다 어디로 소집당하느냐 하면 십자가 앞으로 소집시키는 것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이 성령의 일을 위해서 성령께서 먼저 누구한테 오셨느냐? 사람에게 오기 전에 일반인에게 오기 전에 특별한 사람 예수님에게 먼저 왔어요. 세례요한 할 때. 그러니까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예수님이 받은 성령세례와 비교시켜서 물세례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은 성령 받고 요단강에서, 다른 사람들은 물에 빠져 익사하고. 끼어들 자리가 아니란 말이죠.
예수님 단독으로 하는 일이 인간들이 거기에 편들거나 응원하거나 끼어들 자리가 아닌 거예요. 인간은 주님의 일에 응원할 역할을 맡은 게 아니에요. 응원하지 말아야 돼요. 응원하는 사람은 상당히 수상한 사람입니다. 호응한 사람은 수상한 사람이에요. 세례요한도 이야기했어요. 주님은 흥해야 되고 나는 쇠해야 된다. 같이 흥하면 왜 안 되지요? 세례요한도 같이 흥하면 왜 안 되는 겁니까? 같이 흥하게 되면 본인이 하는 일에 십자가가 방해된다니까요.
십자가는 어떤 성과를 이루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음을 확실하게 하는 거예요. 확실하게 하는 대체불가 사건입니다. 확정된 사건, 최종 사건이에요. 인간에게 성도의 기쁨이 있다면 기쁨은 뭐냐 하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거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호하고 애매하고 애매모호한 게 아니고 성도의 기쁨은 이미 모든 게 확정 났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하는 일에 내 구원과 전혀 별개라는 걸 확정지었어요. 내가 하는 일 또는 내게 일어나는 일, 애가 이태원에 가서 까불다가 죽었다든지 밀려서 죽었다든지 네팔에 놀러갔다가 부자간에 비행기 사고로 죽는다든지, 내게 일어난 어떤 일도 그거는 나의 구원과 상관이 없다는 말이고 그걸 더 압축해버리면 나에게 일어난 어떤 일도 장차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믿음은 꾸준히 자기 위주로 믿음을 구축하고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고 자기를 살리기 위한 그런 의미체제를 갖추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일이 하나 일어나게 되면, 애가 뭐 이번에 수능이 좋았다, 이걸 자기가 형성한 단단한 견고한 믿음체제에 보탬이 될 거냐, 손해가 될 거냐 이걸 따지면서 집어넣고 있어요. 이 믿음이 진짜 믿음을 훼방한다니까요.
이게 지난 번 여러 번 여기서 이야기했습니다만 그건 뭐냐 하면 의미체계입니다. 내가 있고 내 의미를 만드는 게 아니고 의미체계에서 나를 새롭게 뽑아내요. 그래서 의미체계가 무너지면 뭐도 수정에 들어갑니까? 내가 누구냐도 수정 들어가는 거예요. 드라마에 그런 내용 많잖아요.
아버지, 엄마가 재벌이고 재벌 집 아들의 의미체계는 뭐냐? 나는 재벌 2세다. 또는 재벌 3세다. 있었는데 나중에 이북에서 내려온 진짜 아들이 있어서 그 재벌 우리 아버지고, 우리 할머니다 하니까 졸지에 그동안 재벌 3세라고 자아성을 구축하고 있던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의미체제가 무너지니까 내가 알던 내가 아니었던 겁니다. 환경이 떠나서 내가 알던 내가 아니었어요. 그러니 이건 뭐냐? 자아는 수시로 바뀐다. 자아는 환경 따라서 그때그때 달라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만약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실제로 비유로 든 건데 누가복음 16장, 거지 나사로가 있을 때 모든 사람은 거지 나사로를 보면서 거기서 천국을 뽑아낼 수가 없었어요. 모든 인간들은. 왜냐하면 환경이 인간이 이미 믿음체제로 운영되는 환경이기 때문에 저주받은 걸로 여기고 참 안 됐다. 심지어 개까지 와서 안 됐다고 아픈 거지 나사로를 핥을 정도로 측은하게 여겼어요. 누가 누굴 동정하는지 분간이 안 되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거지를 보고 뭐라고 하느냐? “참 하나님도 너무하시지. 저 거지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억울한 삶을 사는가.” 어렵고 힘들고 아픈, 그러니까 거지가 삼종세트에요. 인간들이 제일 듣기 싫은 게 뭐냐 하면 돈 없는 거잖아요. 돈이 없다는 것은 힘이 없다는 뜻이니까.
첫 번째, 돈이 없지요. 두 번째, 돈 없는 것에서 멈추는 게 아니고 (목탁소리까지 신경 쓰지 마세요) 돈 없지요. 그다음에 건강 잃었지요. 세 번째, 결정적인 것이 뭐냐 하면 타인을 잃었어요. 남을 잃었어요. 그걸 사회적 죽음이라 하는데 인간이 진짜 죽는 것은 아무도 나에게 전화 한 통 없을 때 죽은 거예요. 살아도 의미 없습니다.
저 목탁소리라도 들리면 괜찮지요. 목탁소리도 안 들리고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그 빈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개 키웁니다. 고양이 키우죠. 처음엔 한 마리 키우다 두 마리 키우고, 나중엔 고양이 오십 마리 키운다고. 그만큼 빈자리가 커지니까 허하니까 허한 것을 숫자로 그냥 계속 메우는 거예요. 개 한 마리니까 “너 나처럼 외롭구나. 한 마리 더 키우자.” 이렇게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개 키우고 고양이도 키우지만 어떤 사람은 사람 키우는 것도 있어요. 아이 열두 명 키운 사람도 있어요. 어쨌든 간에 그거는 그만큼 허한 겁니다. 삼종세트에요. 다 잊어버렸지요. 첫째, 뭐 잃었다? 돈 없고, 두 번째는 돈 없으면 힘들어 노동할 수 있는 여력 없어요. 시급도 안 되니까 아픈데 누굴 써줘요? 너는 없는 채로 계속 줄곧 가라 이 말이죠.
그다음에 세 번째로 뭐 없다? 타인을 잃어버린 거예요. 돈 없고 아프니까 누가 찾습니까? 아무도 찾지 않지요. 주위에 아무도 없어요. 그럼 누가 누구의 동정의 대상이 되고, 인생 망가진 대상이 됩니까? 이게 기존의 의미체제에서는 왜 주님께서는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드느냐 하면 거지 나사로의 모습이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누가복음 16장에 나와요.
“지금 너희들이 제대로 율법과 선지자를 해석했어, 해석 안 했어?” “우리는 해석했어.” “해석했으면 내가 비유 이야기할 테니까 들어봐.” 이렇게 된 거예요. 율법과 선지자에서 그 당시 바리새인 이야기가 그 앞에 나와요. 바리새인은 돈을 더 좋아한다고 나오기 때문에 바로 이야기 나오거든요. 율법과 선지자를 해석하면서 어떤 식으로 뽑아냈는지 묻는 거예요.
어떤 예수님, 어떤 메시아를 뽑아냈느냐고 묻는 겁니다. 예수님을 말합니다. 이 율법과 선지자에서 내가 뽑아낸 메시아는 바로 이런 메시아라고 해서 거지 나사로를 내세운 거예요. 그럼 거지 나사로는 누구의 신세와 동일합니까? 예수님의 신세와 동일한 거죠. 이게 상당히 무서운 이야기인데…….
이게 뭐냐 하면 메시아가 구원자 아닙니까. 언약의 매개체입니다. 이거는 사람이 관여치 못하고 누구만 한다? 천사만 하지요. 신약에 와서 사람은 못하고 누구만 한다? 예수님만 다 하시는 거예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어요. 예수님이 혼자 다 하신 거예요. 예수 이름으로.
예수님이 구원자로 오실 때에 율법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그걸 옛날에 그리스도라 했으니까 ‘예수님=그리스도’에서 ‘=’을 찾아낼 수가 없었단 이 말이죠. 왜 그런가, 이 말이에요. 왜 그런가? 예수님이 오실 메시아 맞습니다, 라고 인간들은 찾아낼 수가 없었어요.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 다윗이 건너갈 다른 세계가 없다는 것과 관련돼 있어요.
다윗이 다윗1과 다윗2로 나눠집니다. 다윗1과 2로 나눠지면서 나라가 둘로 북이스라엘과 유다로 나눠져요. 남쪽 유다는 다윗이 들어가는 게 아니고 다윗언약이 들어가요. 북이스라엘은 다윗이 갖고 있던 인간적인 면이 이리로 빠져요. 다윗이 갖고 있던 인간적인 면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 다윗의 육체에서 난 자식이 누구냐 하면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대단히 화려했어요.
대단히 화려한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뭐라 합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뭔가 건너가야 될 강이 있는데 그 강을 건너지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강 하나도 건너가지 못할 허무의 강이죠. 허무의 강을 건너지 못할 정도로 이 정도밖에 내가 안 됐구나.
부귀영화 모든 것, 내가 아는 지식, 책도 많이 쓰고 책도 많이 읽었던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던, 전도서에 나와요. 모든 걸 알고 있는 나, 스스로 자기를 지혜자로 불러요. 솔 지혜자. 솔 씨 가문의 솔 지혜자. 나는 지혜자다. 자기를 소개할 때 솔로몬이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윗의 아들이죠. 다윗의 자손, 솔로몬이 말하기를, 잠언도 마찬가지고요. 다윗의 대변자에요. 다윗의 연속체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하죠.
다윗의 연속체가 자기가 하나님의 그다음 체제, 다윗언약을 연속되는 그다음 내용에 대면했을 때 자기는 비로소 건너지 못한 존재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다윗언약을 줬다는 사실이에요. 다윗언약을 줘놓고는 받은 당사자 다윗은 건너가지 못한 존재로 발각시켜놓고 그다음에 언약의 진짜 수행자, 실행자, 성취자는 누굽니까? 다윗언약을 따라 딴 분이 오셔야 되는 거예요.
그것을 솔로몬의 엄청난 부귀영화가 지진이 나더니 와르르 무너집니다. 야곱이 형을 제치고 자기가 복을 받아냈잖아요. 그 복 받은 야곱이 얍복 강에서 어떻게 됩니까? 아까 했지요. 공백으로 와르르 무너져버리죠. 내가 사라진 거예요. 물건이 사라지고 내 자식이 사라진 게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던 당사자, 꿈속에서 천사가 왕래했던 당사자, 언약의 주인공 내가 무슨 역할 한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올시다.”라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오늘 시편 39편에 다윗이, 4절 봅시다. 누가 읽어볼까요? “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그다음에 주의 앞에는 뭡니까? 없다, 있다 공간적 연관성이에요. 생성과 소멸은 시간적 연관성입니다. 공간적 연관성에서 나는 현재 있어도 없다고 규정되는 이유는, 시간성으로 보게 되면 결국은 없어진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언약 안에 내용이 뭐냐? 시편 39편도 하나님의 계시니까요. 하나님의 예언이잖아요. 그 계시 안에 뭐가 반드시 포함돼요? 나는 있어도 없는 거다, 라는 내용이 포함돼야 그게 언약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언약을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언약의 적용을 받게 돼 있지요. 언약의 적용을 받게 된 상황은 그게 실제적으로 실증적으로 우리에게 덮쳐서 우리 일생의 길이를 통해서 나타내게 돼 있지요.
그러니까 성령 받아 믿음 있는 신앙인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범사에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의 언약을 언약대로 이루시는 거기에 참여된 것을 굉장히 감사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지요. 지는 거진데, 지는 거지 나사로인데. 나중에 거지 나사로의 환경이 바뀌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니까 누가 걱정 대상이 되느냐 하면 앞집의 부자가 자기 동생이 다섯 명이에요. 나는 이미 버린 몸이고 아직 진짜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결과는 천국과 지옥으로 구분되는 데 그렇다면 이 세상의 삶은 뭐냐? 속임수였던 거예요. 그게 야곱의 속임수였잖아요.
에서가 자기가 형이라고 했지만 그게 역전되는 경우는 무엇이 개입됐습니까? 야곱으로 준 거짓말이 개입되어 역전됐지요. 주님의 거짓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자기로 인하여 거짓말치고 있는 거짓말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이 주님의 거짓말과 부딪치게 될 대상이 되는 겁니다. 거짓말로 구원하시는 주님이에요.
이게 야곱언약에 준한 주님의 일관성 있는 활동이에요. 야곱이 괜히 거짓말하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거짓말하셔야 되는 거예요. 거짓에는 뭐로 대결한다? 거짓으로 대결하는 거죠. 인간의 거짓말은 뭡니까? “나는 구원 받아야 되겠다.” 이게 거짓말이거든요. 창세기 3장에서 추방되어 놓고 추방된 자기 입장을 애써 거부하는 거예요. 이 교회는 그런 교인들 없겠지만 교회 나오는 교인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거짓말을 써보겠습니다. 긴장하지 마세요. 여러분한테는 해당 안 되니까.
“하나님 보시옵소서. 내가 자력으로 얼마나 큰 성공을 이루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자, 물어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 존재를 인정합니까, 인정하지 않습니까? 인정하지요. 인정하는 데 하나님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는 뭘 해야 된다? 무슨 힘으로? 자력으로. 이 자력속에 기도도 포함되지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끄집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그럴싸한 신앙인으로 살겠습니다. 이게 교회가 만들어낸 거짓말입니다. 이 거짓말에 말려들면 안 되겠지요. 큰일 나지요.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하나님이여,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이렇게 만들었지요. 나로 하여금 있어도 없는 자. 없는 자는 그다음 건너갈 새로운 자기의 나라를 생각할 자격조차 같이 없는 거예요. 없는 자가 있는 세계를 구현해요. 그걸 왜 기대합니까. 없으면 그런 것도 없는 거지요.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다윗은 이 매개를 넘어서서 다른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에 멈춰있다. 들어갈 수 없는 거예요. 그 다윗의 자손이 솔로몬이에요. 솔로몬이 허무하다. 전도서 마지막에 보면 솔로몬이 허무한 허무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기껏 거기서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심판을 이야기해요. “청년들아, 마지막에 심판 때 오기 전에 똑바로 살아라.” 이게 솔로몬이 할 수 있는 전부에요.
그러면 다윗은 건너갈 수 없다 이 말이죠. 다윗은 건너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열왕기상으로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솔로몬 이야기로 끝나는 게 아니죠. 열왕기상 8~11장 솔로몬 이야기에요. 12장 넘어오면 르호보암 나오고, 13장에 여로보암 북쪽 왕 이야기 나오는데 성경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죠. 지금 신약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럼 그 사이에 뭐로 메워질까요?
자, 지금 다윗이 아파요. 여기 39편, 제일 마지막에 보세요.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13절) 다윗이 지금 아픕니다. 아픈 것도 다윗의 예언이에요. 아프다는 말은 내가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자생적으로 내게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아픈데 내가 못 고친다는 말은 아픔조차도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 속에 언약에 의해서 절차 속에 포함이 된 내용입니다. 아픈 것조차.
그러면 이게 예수님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입니다. 자손이란 말은 이어졌다는 말이거든요. 다윗과 예수님 사이에 점선이 있는데 이 점선은 뭐로 이어졌느냐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선지자에요. 선지자 계열이고, 솔로몬 계열은 뭐냐 하면 국가 왕 계열이에요.
그래서 열왕기상 13장 들어가면서 부딪치는 것은 무엇과 무슨 계열이 부딪치는가? 국가 왕, 힘의 융합체, 힘의 결집, 국가라는 것, 국가와 선지자 계열이 충돌합니다. 선지자 계열의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사람 만나지 말라. 사람을 만나면 힘이 생겨요. 국가의 특징이에요. 내가 지목한 사람만 만나라.
그 예를 보겠습니다. 보기 전에 먼저 아셔요. 다윗에게 고난이 임했잖아요. 지금 아프고 싶어서 환장한 것 아니잖아요. 다윗의 고난으로 인하여 다윗은 자기가 무능력한 것을 발견한 거죠. 아파 죽어가니까 나의 마지막 끝장은 주께서 나를 아까 무슨 넓이만큼? 손 한 뼘만큼 살고 고만 죽어. 그것도 하나님이 다윗에게 준 계시니까요. 아파? 네가 죽으면 돼. 하나님의 계시가 그거에요.
그런데 현재 다윗은 왕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왕이죠. 왕인데 왕의 역할이 뭐라고요? 그냥 죽어, 이 말이에요. 왕의 역할이 그냥 죽는 거예요. 그거는 왕에게 힘이 완전히 빠졌을 때나 일어날 일이거든요. 국가와 선지자에 있어서 두 계열이 어떻게 나눠지는가? 누가복음 4장 24절에 그게 나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여기 엘리야 이야기 나오는 데 다윗에게 이미 언약을 줘버린 상태에서 최초의 선지자는 엘리야입니다. 그전에 선지자 대표자는 모세입니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와 그다음에 예수님이 어디에 나타났느냐? 마태복음 17장 변화산에 구약을 대표해서 모세와 그다음에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율법의 대표자 모세, 선지자 대표자 엘리야.
그 선지자가 엘리야가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그전에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고향이란 기본 토대지요. 존재의 토대에서 출생지를 말합니다. 고향은. 출생지 성장했던 자기 자아가 형성됐던 토대에서부터 선지자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은 거기서 하나님께서 계열을 강제로 이탈시켰다. 그럼 남아 있는 건 뭡니까? 기존의 고향의 집단적 힘을 고수하겠지요. 그게 커지면 국가가 되는 거예요.
여기는(선지자) 국가에 속하지 않는 게 아니라 국가에서 내침을 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나중에 예수님에게 만나요. 국가는 예수님을 힘으로 치고 예수님은 여기서 죽었다가 선지자로 살아나올 예정이죠. 여기서 어떻게 구분하느냐, 구분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누가복음 4장 24절 하는데, 그때에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뭐가 들었습니까? 큰 흉년이 들었지요.
그 뒤에 보세요.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과부가 한두 명이 아니었어요.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그다음에 ( )에 뭐라고 돼 있습니까? 그다음의 글자? ‘않고’ 부정성이죠. 그러니까 사람을 만나지 말라는 것은 기존의 모든 사람을 부정하되 내가 찾아간다는 것은 엘리야가 찾아간 그 인간으로 인하여 기존의 모든 부정성은 더욱더 강조되는 거예요.
그림을 그리는 데 그냥 백지는, 백지라는 표현이 덜 돼요. 그런데 거기서 점 하나 딱 찍고 미완성으로, 점 하나 찍으니까 그림이겠어요? 아니지요. 그림은 미완성이죠. 미완성의 의미가 강조된 것이 하나의 백지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냥 백지가 아니고 나는 그림을 여기서 그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점 하나 찍은 거예요. 그 점에 해당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지목한 사람에게 찾아가는 거예요.
그럼 지목한 과부는 누구 신세와 동일해요? 그 시대의 그 공간의 그 시간의 선지자와 똑같은 신세가 되는 겁니다. 이 노선이 누구한테 이어진다고요? 예수님에게 이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끼어들 게 아니다, 라는 것을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더욱더 강화되고 강조가 되는 겁니다.
다윗은 나는 이 땅에 없는 자가 되고 구원? 없는 자가 무슨 구원을 기대해요. 안 되지요. 그래서 주께서 많은 과부들, 주께서 과부들 구제 사업하시려 오신 게 아니에요. 과부되어 죽으나 멀쩡하게 남편 있어 죽으나 그거는 하늘나라 의미 없어요. 의미 있으려면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에게 갔을 때 이게 선택 개념이거든요. 과부에 딱 갔을 때 그 과부는, 나는 구원 받았다는 이야기하면 안 돼요. “내가 구원 받을 쨉이 아니구나.”를 알면 돼요.
그게 바로 엘리야 증인되는 거예요. 그 과부는. 나한테 안 찾아와도 되는데 찾아왔다는 겁니다. 실제로 과부한테 찾아왔을 때 과부가 엘리야를 곱게 대했습니까, 반항했습니까? 반항했지요. “일부러 아들 죽였잖아요. 왜 우리 집에 와서 아들까지 죽이느냐. 누가 도와 달라 했어?” 이런 식으로 반항했는데 나중에 아들 살리지요. 그럴 때 그 과부의 변화가 뭡니까? 이거는 내가 선지자 오라고 도와 달라고 요청할 입장이 못 되는 이 세대 저주받아 마땅한 세대를 대표해서 그 과부는 구원 받은 겁니다. 엘리야에게. 10분 쉽시다.
20230213b 부산강의 : [시편]55(39:5)-허무의 강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아까 첫째 시간 마지막에 엘리야 이야기했지요. 이렇게 보시면 간단합니다. 다윗에게 예수님께서 나오실 때에 다윗이 둘로 쪼개져 왕, 왕이 힘이죠. 솔로몬의 화려함은 붕괴됐습니다. 솔로몬의 화려함은 소용없었어요. 화려함을 인간은 유지할 수가 없어요. 나라가 둘로 쪼개졌으니까요. 그럼 여기 선지자 계열에서 나온 게 뭐냐 하면 목자 개념이에요. 목자 개념이 나와요.
목자 개념은 어떤 개념이냐 하면 이거는 생성해야 돼요. 새롭게 생성돼야 돼요. 근데 목자 개념이 다윗 속에 분명히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솔로몬도 목자 개념을 갖고 있었어요. 기브아에서 큰 제사, 일천 번제 드리고 나서 꿈에 하나님 나타났습니다. 나타나서 솔로몬이 뭐냐 하면 목자 개념으로 왕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이 백성을 다스려야 되는데 저한테 지혜가 부족합니다. 네가 너의 건강, 재산, 그리고 원수가 소멸, 네 원수가 너한테 퇴패, 지는 것 이게 전부 다 왕 개념이에요. 하나님의 전쟁에서 자기가 승리하는 것, 자기가 건강한 것, 재물 이 왕 개념을 구하지 않고 어느 개념을 구했다? 백성을 어떻게 지혜로 다스립니까, 라는 개념을 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솔로몬에 대해서 칭찬을 했지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목자 개념을 동그라미로 본다면 그다음에 전쟁에서 승리하고 평화롭고 재산과 재물이 많아지고 건강한 것은, 이거는 목자 개념이 핵이다, 진짜 핵심 하나님이 원하는 건 이거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덤으로 뭘 주느냐? 네가 구하지 않은 건강과 그리고 적들이 도망치는 것과 그리고 네가 모든 재산은 목자 개념을 둘러치고 있는 목자 개념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덤으로 주신 목자 개념에서 나온 영광이죠. 영광 개념이에요.
그런데 후에 솔로몬이 혼인정책을 통해서 그 이스라엘을 화려함을 유지하려고 한 거예요. 안의 목자 개념을 지켜야 되는데 뭘 지키느냐 하면 이 외부에 있는 화려함, 많은 재산 여기를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초창기 1960년대 우리나라 재벌들이 재벌 되기 위해 얼마나 고생 많이 했습니까? 엄청 고생했거든요. 그렇게 재벌 되고 난 뒤에 재벌 3세들은 마약하고 이런다고요. 물론 재벌 집 막내아들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만.
목자를 지키기 위해 줬는데 껍데기 이것에 그만 마음이 빼앗긴 거예요. 그럼 여기서 둘로 쪼개지죠. 하나는 목자 계열과 왕 계열, 왕권 강화되는 계열, 이 계열 빠져나가면 뭐가 되느냐? 바로 이방나라가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에서 이방나라 되는 조건은 뭐만 빠지면 돼요? 언약에서 이탈하면 이방나라 돼요. 그러니까 나라가 아무리 크다, 화려하다, 견고하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안에 있는 언약이 빠져버리면 큰 이방나라 되지요. 여로보암 2세 같은 경우는 북이스라엘인데 너무너무 영토가 다윗, 솔로몬보다 영토가 컸어요. 그러면 뭐합니까? 망해버렸잖아요. 별이 망하기 직전에 별이 최후를 맞이하기 전에 잠시 커져요. 그래놓고 태양의 50배 이상 되는 별은 이게 응축이 돼버리면 그 큰 힘으로 응축이 되면 그게 블랙홀이 되어 별마저 자기가 자기의 쓰레기로 자기 안에 들어가요.
블랙홀은 아무 실체 없고 그냥 구멍입니다. 구멍 안으로 들어가 버려요. 그런데 그 큰 구멍은 원래 본인이 있던 그거에요. 본인의 것에 본인이 함몰되는 것, 그것을 혼돈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무질서지요. 지금 다윗이 왕이잖아요. 왕 개념을 뚫고 목자 개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다윗을 아프게 합니다. 병들게 하고 허무하게 만들고 알 수 없는 고통에 휩싸이게 만들어요. 그럴 때 여기 있는 다윗의 모습은 쉽게 말해서 모든 만사가 다 허사군요.
허사란 말이 39편 6절에 나와요. 진실로 각 사람은 뭐와 같다? ‘그림자’ 같다. 그림자 같다는 말을 이렇게 표현하면 됩니다. [현상은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림자 같다는 이것은 가짜입니다, 라는 뜻이에요. 내가 그림자란 말은, 여기 있는 나는 가짜입니다. 진짜는 나도 모르겠어요. 나는 진짜의 그림자일 뿐이고 하여튼 어쨌든 간에 나는 가짜입니다. 가짜에 대해서는 어떤 기대나 희망이나 포부를 가질 권한도 일체 없습니다. 나는 그림자입니다.
그건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언약에 하나님의 일에 인간은 개입되지 못한다. 처음부터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이미 개입된 상태에서 개입되지 못한다가 침범했으니까 인간은 개입된 데서 철수해야 되고 철수하되 그냥 곱게 철수하겠습니까? 안 하지요. 자기 구원을 자기가 포기하겠습니까? 안 하지요.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 다시 해보겠습니다.
물세례, 건너갈 수 없어요. 물세례라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다윗도 마찬가지고 다윗이 건너갈 그다음 세계는 없습니다. 이걸 세례라고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의 표현에 의하면 이걸 ‘세대’ 무슨 세대? 세대에는 두 종류 있어요. 하나는 ‘이 세대’ 있고, ‘오는 세대’ 있어요. 주님께서는 오는 세대로 이야기했어요. 이 세대는 아무리 기다려봤자 공격을 받을 뿐이지 이 세대에서 미리 오는 세대로 건너갈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오는 세대기 때문에.
이 세대에서 오는 세대로 건너가는 것은 오는 세대를 확정짓는 그걸 수행자만이 이 세대에서 오는 세대를 같이 중첩되어서 함께 있을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게 가능했던 것은 성령께서 하는 거예요.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이 세대에서 오는 세대로 이끄시는 분, 또는 오는 세대를 형성하시고 완성시키는 분으로 성령께서 오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에게 오는 세대는 그야말로 오는 세대에요. 오는 세대가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친히 만들어나가야 돼요. 시편 110편에 보면 오는 세대를 만들 때 방해꾼이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원수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주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뭐를 겪어야 되는가? 하나님의 원수를 발등상을 발로 밟고 있는 발로 딛고 있는 발로 꽉 눌러버리는 그러한 일이 벌어져야 됩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은 그냥 단독으로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지 않아요. 반드시 여자의 후손은 짝이 등장해야 되는데 그 짝에 대해서 여자의 후손이 하는 행위를 통해서 여자의 후손임을 드러냅니다. 여자의 후손의 짝이 뭡니까? 뱀의 후손이고, 그냥 등장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뱀의 후손의 뭘 치느냐? 정수리를 쳐버리죠. 머리를 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류의 역사입니다. 확정된 거예요.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다시 말씀드려서 신앙인의 좋은 점은 확정된 것을 미리 눈치 챘다는 사실이에요. 나한테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확정된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을 알 때 우리의 정서나 심리는 안정이 돼요. 소소한 사적인 일로 정신적으로 흔들리거나 우울증 걸린다? 이럴 수가 없지요.
우울증 걸리고 이런다는 것은, 그러니까 경상도 말로 우짜꼬, 다른 정통적인 경상도 말로 우야꼬. 부산이니까 일본과 가까우니까 우야꼬, 우짜면 조으노. 이게 매일같이 되풀이 되거든요. 어제는 오늘 ‘우짜면 조으노’가 내일 ‘우짜면 조으노’ 이게 연속이에요.
제가 주일 낮 설교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교회 어떤 집사님 보니까 남편 보고 이야기할 때 웃으면서 이야기하더라. 세상에 우째 그런 일이 다 있어요? 아내가 남편 보고 웃으면서 평소에 웃으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평소에 정서적으로 안정돼 있다는 뜻이거든요. 다시 말해서 당신이 어떤 짓을 해도 내 정서는 흔들림이 없다. 난 당신이나 믿고 있는 사람 아니다, 이런 뜻이란 말이죠. 어디 믿을 것 없어서 당신이나 믿나. 믿으려면 주님이 다 이루심을 믿어야지 왜 사람을 믿습니까?
목자의 개념은 단독 개념이기 때문에 어떤 인간을 만나거나 의논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파도 본인이 아파야 돼요. 다윗이 있는데 주님께서 다윗을 뚫고 다윗 내부로 들어옵니다. 내부에서 만나는 다윗은 어떤 다윗이냐? 아픈 다윗이에요. 아픈 다윗으로 인하여 다윗은 고백합니다. 나한테 형성돼 있고 부여돼 있는 모든 세계는 뭐냐? 혼돈이고 무질서하다. 목자의 기능이라 하는 것은 질서 세계 속에 혼돈을 심는 거예요. 이것 누가 하시느냐?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내 안에 내가 그동안 평생 노동해서 얻었던 안정돼 있는 나의 삶 속에 내가 어떻게 저 허무의 강을 건널 수가 있을까? 그거는 그 허무의 강을 눈으로 보는 게 아니고 허무의 강을 내 속에 집어넣게 되면 바로 우리는 뭐와 합류하게 되느냐 하면 목자의 고통과 아픔에 환란에 같이 동참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잘 들으세요, 어렵습니다. 질서에서 혼돈이 오고, 혼돈에서 새로운 새 질서가 주어질 때 이 질서는 새 질서를 전혀 이해 못하게 돼 있어요. 이 질서세계에서 혼돈을 겪고 어떤 질서세계를 구상한다면 이거는 백 프로 가짜입니다. 내가 생각한 안정된 내가 십자가를 건너서 안정된 천국을 내다본다면 이 천국은 완벽하게 가짜입니다. 내 속의 혼돈이 내 속에 들어와야 돼요.
그리고 내 질서라는 것이 헛되고 허사고 가짜 질서인 것을 혼돈을 앞장세우신 새 질서 앞에서 내 질서는 이거는 질서도 아니고 의미도 아니란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돼요. 이것이 다윗언약의 다가옴입니다. 이걸 여러분들의 아는 멘트로 이야기한다면 이미 마귀에 속한 또는 율법의 저주에 속한 우리가 마귀의 지배받는 이 자체가 가짜인데 가짜가 상상하는 천국, 백 프로 가짜지요. 주님의 혼돈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러면 기존에 있는 질서는 어떻게 형성됐는가? 이 질서는 바로 사람과의 만남에서 형성된 거예요. 사람과의 만남, 아까 엘리야, 엘리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 문둥병자들이 많았는데 27절에 그 많은 문둥이들을 고친 게 아니라는 거죠. 엘리사가. 그럼 누구한테만 찾아왔습니까? 나아만 장군에게만 고쳤다. 이걸 왜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 세상은 문둥병 걸려야 싸다, 이 세상의 질서 안에서 뭐가 뿜어져 나온다? 너희들 문둥병 걸려 다 저주받으라는 그런 하나님의 지시가 뿜어져 나오는 그런 세상에 너희들이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메시아를 구할 때는 고쳐달라고 하지요. 고쳐주는 것 없어요. 그래서 같이 망해야 되지 지진에 무너진 아파트더미 깔려서 죽어야 되지 살려달라고 살려주는 신은 없습니다. 그건 알라 신이죠. 알라 신이 그런 것 해주죠. 살려주는 건 없어요. 예수 믿어도 안 살려줘요. 그래서 우리가 늙어가고 있잖아요. 우리가 병들잖아요. 안 살려줍니다.
새 시대의 의미가, 예수님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새 시대를 막아요. 마치 얍복 강의 천사, 그분이 예수님이죠. 이스라엘이 야곱을 막는 거예요. 이스라엘로 오신 주님이 야곱을 막아버려요. 야곱은 결코 이스라엘 속에 들어가면 된다, 안 된다?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죽여 버리죠. 죽여 놓고 이스라엘을 죽였다는 그것으로 이스라엘에 합류시켜버려요.
합류시키면 이거는 부산의 유명한 여자고등학교, 브니엘, 내가 해 돋을 때 나는 죽었다가 살았다는 말이에요. 죽었다가 살았다는 걸 내가 믿는 게 아니고 내 자체가 죽었다가 살아난 대상으로 주께 다뤄져야 구원이다 이 말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 이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잘 나오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할 때 그 십자가는 사도 바울의 이름으로 걸어 다니는 십자가가 되지요.
십자가가 내 안에 있으니까 나로 하여금 너희들 보기에 사도 바울이 살아 있는 걸로 보이나? 그러나 제대로 성령으로 읽어버리면 죽이고 살리는 식으로 주님이 내 안에서 지금 살고 있다는 게 눈에 안 보여, 라고 이야기하면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십자가는 누가 알아먹는 십자가입니까? 사도 바울처럼 성령 받은 사람만 알아먹는 십자가에요.
“당신은 십자가 덕분에 살았다며?”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건 사도 바울에게서 뭘 뽑아낼 수 없어요? 사도 바울의 존재에서 십자가의 존재를 뽑아낼 수 없는 사람이 돼요. 공식으로 하면, [십자가를 보여주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도 아니다.]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여기에 목자성, 이 목자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을 만난 게 아닙니다. 시편 39편 오늘 본문에 의하면 누가 누굴 때립니까? 하나님이 목자를 때리거든요. 그게 목자성이거든요.
뭔 뜻이냐 하면 양은 없어요. 왜 양이 없느냐 하면 목자가 없는데 양이 있을 수 없어요. 목자가 등장하면 그다음 차례로 뭐가 등장한다? 양이 등장해요. 그런데 이 양은 철저하게 목자의 목자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부속된 종속된 양입니다. 목자를 목자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양이에요. 나 목자 덕분에 살았다, 지금 자기 양 쪽으로 그런 양은 목자가 부르지 않은 양이에요.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그 목자는 내가 원하는 양은 따로 있다는 그 목자에요. 양인데 양을 살려주는 그런 목자는 없어요. 왜냐하면 문둥병이 그렇게 많고 과부가 많더라도 과부와 문둥병을 살려주는 선지자를 주께서 보낸 적이 없습니다. 아까 누가복음 보셨잖아요. 왜 살려주면 안 되느냐? 이 세대가 옛 세대가 새 세대 돼버려요. 큰일 날 이야기에요.
십자가 살인사건은 예수님 살인사건을 옛 세대를 옛 세대답게 완전히 폐기처분한다는 겁니다. 아까 전도서에 보면 솔로몬이 허무의 강을 못 건너지요. 끝까지 이 세상을 뭐로 표현합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고 표현하지요. 마지막에 전도서 12장에 보면 심판 이야기하지요. 솔로몬도 다윗언약을 아니까 솔로몬은 뭘 봤느냐 하면 허무를 건너는 것은 뭐밖에 없다? 심판밖에 없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솔로몬 후에 목자 되신 주님은 뭐냐 하면 심판을 유보해요. 심판 안에 갈라지게 하고 그 안에다 뭘 집어넣느냐? 목자성을 매개체로 집어넣어요. 그러니까 목자도 심판 안에 있고 심판을 건너는 양도 심판 안에 있는 거예요. 하지만 목자와 양은 목자라는 방주 안에 또는 뗏목, 예수 안에 십자가 안에 함께 있기 때문에 늘 보이는 심판이지만 심판을 보면서 구원 받고 있는 그런 상황이 되는 겁니다. 나름 알기 쉽게 했는데 이게 알기 쉽다고 기뻐하는 것과 별개 문제겠지요.
심판을 못 벗어나요. 우린 옛 세대에 속하고 육에 속했기 때문에 심판을 벗어날 길이 없어요. 우린 예수 믿어도 늙어요. 예수 믿으면 나중에 기초화장도 안 받아요. 예수 믿는데 왜 안 받느냐? 심판의 소나기가 떨어지거든요. 제가 설교할 때 어떤 예를 들었냐 하면 소나기가 먹구름 비가 쏟아지는 벌판에 우산 없이 돌아다녀 보세요. 그게 동으로 가도 우산 없고, 서울, 대전, 부산, 대구, 미국 이민 가도 우산 없고, 독일 가도 우산 없고, 뉴질랜드, 호주, 캐나다 가도 거기 우산이 없어요. 없다고요.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처럼 예수와 함께, 가 안 돼요. 어딜 가도 자동적으로 예수와 함께 되는 동네는 없어요. 그런데 예수와 함께 있다면 캐나다 사나 미국 사나 한국에 사나 그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 그것이 새 세대고 그것이 오는 세대에요. 그게 옛날 찬송가 495장에 있잖아요.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3절)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게 하늘나라에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 하지만 사실은 목자와 함께 있다, 또는 아버지로부터 매 맞은 분과 함께 있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관건은 뭐냐 하면 건널 수 없는 심판을 어떻게 견디느냐 그게 관건이죠. 하나님의 심판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심판은 포기하지 않는데 그 심판 속에서 어떻게 건너갈 것이냐? 제가 오늘 강의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비법은 뭐냐? 사람 만나지 말라. 왜냐? 사람 만나면 힘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 만나게 되면 이 세대, 현 세대에 살만한 아이디어를 얻기 때문에 그래요.
자, 사람 만나지 말라는 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열왕기상 12장에 나옵니다. 열왕기상 12장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둘로 쪼개진다 했지요. 다시 해봅시다. 예수님 계시고 여기에 다윗 있지요. 다윗 사이의 계열이 뭐로 바뀐다 했습니까? 하나는 왕, 권세 계열. 언약은 없고 껍데기 강력한 이스라엘 국가를 유지하겠다는 그 의지만 가득한 것, 유다의 왕족도 다윗의 혈통 자손이에요. 솔로몬 자손입니다. 이쪽은 뭡니까? 이거는 선지자.
아까 누가복음 4장을 자꾸 강조하는 이유는, 선지자 특징은 뭐냐? 사람을 만나지 않아요. 사람을 피하는 건 아닙니다. 지정한 사람에 가서 외치는 거예요. 그게 열왕기상 13장 봅시다.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1절) 누굴 만납니까? 여기 여로보암을 만나지요.
열왕기상 14장, “그 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1절) 병들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히야 선지자 4절에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대로 하여 일어나 실로로 가서 아히야의 집에 이르니 아히야는 나이로 인하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더라 여호와께서 아히야에게 이르시되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 아들이 병듦을 인하여 네게 물으러 오나니 너는 이리이리 대답하라 저가 들어올 때에 다른 사람인체 함이니라“ 이렇게 돼 있지요.
자, 아히야 선지자지요. 여기 13장에 보면 이름 모를 선지자 등장하지요. 선지자 특징이 뭡니까? 본인이 사람을 만나선 안 돼요. 근데 13장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분명히 사람 만나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얻지 말라고 분명히 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사람은 오던 길 말고 다른 길로 가라 해요. 다른 길로 갔는데 여기 북쪽의 선지자가 와서 의도적으로 우리 북쪽 여로보암에게 예언한 소리 듣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지요.
자기는 피하려 해도 피할 길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결국 뭐냐 하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북쪽에선 뭘 필요했다? 선지자가 필요했는데 이 선지자는 어떤 선지자다? 기존에 있는 옛 세대, 다윗의 영광과 솔로몬의 화려함을 그냥 그리워하는 가짜 선지자와 무슨 선지자의 또 차이가 나는 거예요. 왕권에 복속된 왕권에 예속된 왕으로부터 월급 받는 가짜 선지자죠. 이쪽은 뭡니까? 의도적으로 왕권에 대해서 관여할 필요도 없고 관여해서도 안 되는 거예요.
이 원칙을 아까 이렇게 했습니다. 질서 그다음에 혼돈, 그다음에 질서인데 이 질서는 상상 못합니다. 어떻게 될지를 몰라요. 왜냐하면 혼돈 자체가 앞에 어떤 질서인지 다 커버하고 덮기 때문에 어떤 질서가 오는지 우리가 몰라도 되고 알 필요도 없어요. 혼돈 속에서 이 혼돈은 심판이거든요. 심판 속에서 지금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가서 멋들어진 삶, 그건 의미 없는 거예요. 그건 나의 욕심인 거예요.
신앙은 이겁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신앙은 지금 예수님이 살아 있다.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글로 하면 신앙인데 반드시 여기 조건이 하나 더 붙어야 돼요. 예수님이 살아 있다면 나는 지금 죽어 있다와 짝을 이뤄서 살아 있다가 돼야 돼요. 죽은 인간은 행하는 것, 죽은 인간이 생각하는 이것은 전부 다 가위표 치는 거예요.
신앙은 뭐냐?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 있으니까 주님이 살아 있다는 그걸 외치고 증거 하면 이게 바로 성도의 할 일이잖아요. 어느 구석에 가든지 간에 신앙생활 참 쉽지요. 신앙생활 되게 쉬워요. 주여, 성도인데 제 할 일이 뭡니까? 주님이 살아 있어 일한다, 이것 증거 하면 성도의 할 일입니다. 뭐 조직신학이고 뭐고 그런 것이 방해될 뿐이에요. 자꾸 내가 다듬을 생각 말고 죽은 자가 뭘 다듬습니까?
방금 똑똑 소리 나니까 그 생각나네. 떡국 집에 가서 떡국 주세요, 하면 되는데 내가 거기서 도마에 떡을 썰어야 됩니까? 이 소리처럼. 내가 떡을 직접 썰어야 돼요? 안 그러면 그 집에 있는 떡을 주방에서 하겠지요. 주께서 새로운 세대에 필요한 모든 주방일과 모든 일은 지금 주께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것 증거 하면 되지 우리가 할 게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지요.
그런데 뭐가 이러한 우리의 일을 방행합니까, 누구 방해합니까? 내가 방해하는 거예요. 내가 나름대로의 내 할 일을 찾아야 되지 않겠느냐. 찾지 마세요. 내가 찾는 하나님은 백 프로 가짜입니다. 내가 찾는 하나님은 나를 지우는 하나님이 아니고 나를 업그레이드하는 나를 돋보이게 하는 가짜 하나님이에요.
지진이 일어나서 여러분 아시다시피 시리아의 어떤 가족 열두 명이 다 죽었어요. 그 동네는 대단위 가족으로 사니까. 큰 가족으로 소가족이 아니고 대가족으로 사니까 열세 명 가운데 자기만 살고 다 죽었어요. 파묻혀 있다 이 말이죠. “신이여, 알라 신이여 도와주소서.” 이것 성립 안 됩니다. 이게 살아나도 문제에요.
신이여 도와달라는 것은, 내 안에 나는 내가 질서 있는 쪽으로 그걸 목적으로 살아왔다는 본색을 지진을 통해서 티를 낸 거예요. 나는 예수님보다 내가 더 중요합니다, 라는 것은 그만 자기의 실체가 드러나 버린 거예요. 열왕기상 보고 사사기 보고 강의를 끝내겠습니다. 열왕기상 13장 이야기했고 14장 이야기입니다.
눈이 어두운 아히야 선지자에게 여로보암의 아내가 찾아왔어요. 변장해서 찾아왔지요. 왜냐하면 선지자가 눈이 어두우니까 모를 것이라고. 사람은 시각적 존재잖아요. 시각을 통해서 정보가 제일 먼저 오거든요. 인간의 두뇌가 있는데 시각적으로 모이는 데가 있어요. 중반에 고랑 있고 측면에 있는 신경세포로 해서 이거 대뇌 전전피질, 여기 이마 있는데 정보를 모아서 이미지를 만들어요. 상황을 만들어서 해석을 하는 거예요. 여기서. 인간은 늘 이렇게 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히야 선지자의 특징이 뭐다? 못 보지요. 그러니까 이건 멀쩡합니까, 장애인입니까? 장애인이죠. 장애인 선지자가 하나님 일을 한다는 말은 결국 뭐냐 하면 국가를 전복함에 있어서는 장애자도 상관없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니까 선지자가 뭘 하는 게 아니에요. 선지자가 속해 있는 곳이 이 세대잖아요. 이 세대에 주님의 다윗언약에 의한 목자 개념 아까 했지요. 하나님에 의해서 얻어맞은 개념, 혼돈 개념이죠.
혼돈 개념이 선지자에 와버리면 선지자가 기존의 세대에 대해서 뭘 선포합니까? 혼돈을 선포하는 거예요. 지금 북쪽이스라엘 여로보암 아들이 죽습니다. 후계자가 죽어요, 후계자가. 죽는데 이걸 죽는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질서에서 혼돈에서 그다음에 하나 들어가는 데 이게 무가 돼요, 무. 이게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방향을 이렇게 보시면 이해 쉽습니다. 목자가 다윗이 지금 아프잖아요. 아파서 살려 달라 하지요. 그런데 다윗은 살려주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됩니까? 안 살려줍니다. 예수님이 죽음이 되지요. 이 죽음이 뭐가 되느냐? 기존 세계 안에서 죽음이 여기서 원자폭탄 돼서 파급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죽은 그 현장은 몽땅 무슨 일이냐? 몽땅 혼돈이고 죽음이고 그리고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게 지금 하나님이 벌이고 있는 일이에요. 확정된 일입니다. 결정 난 일이에요. 나는 우에 사느냐, 하지 마세요. 이걸 기뻐하라니까. 어떻게 나만 살 궁리하지 마시고 이걸 그냥 기뻐하시면 되는 거예요. 주여, 이 사실이 이 복음이 내 속에 깊숙이 있어서 나로 인하여 이 사실이 죽었던 주님이 살아서 이런 활동을 그대로 반복하여 적용한다는 것을 그냥 우리를 통해서 알려주는 하나의 눈먼 선지자가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안경은 썼다만 아직 눈먼 건 아니죠. 그냥 눈먼 선지자에요. 차라리 눈이 멀었으면 좋겠는데 안 멀어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계획하지만…….
열왕기상 14장 이 이야기가 어디서 나왔는가? 다윗언약의 연속체란 것. 하나님이 주신 다윗언약이 솔로몬처럼 그렇게 왕이 강화되고 화려한 것도 있지만 그 화려한 것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실제로 안에 있는 다윗언약 안에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었던 이 땅에서 없어지신 그분, 그분이 다윗언약부터 이게 안에서 이스라엘부터 새겨져 온 거예요. 그게 다윗언약 속에 새겨져 있으니까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리든 말든 결국 그 나라는 둘 다 멸망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는 말은 그다음 차례는 누구 차례입니까? 이 세상 자체가 다 멸망하는 거죠.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보면, 나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 마지막에 이 세상 심판할 때 예수님의 찔리심이 예수님의 그 손자국, 못 자국에 그것이 이 세상이 붕괴돼야 될 유일한 최후의 바탕이고 근거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 사도 바울은 그것을 십자가를 증거 하지요.
자, 그다음의 문제, 그렇다면 우리 오늘날 성도는 이러한 사실이 실제로 박혔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실제로 주께서 이렇게 한다는 것이 우리 인생 가운데 어떤 식으로 내부에 박혔습니까? 그게 바로 세례요 그게 바로 구약에서 할례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서 할례부터 먼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사사기 15장 18절,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여기 할례 나오지요. 삼손이 알고 있어요. 삼손이 여자 사귈 때 아버지가 말렸습니다. 어떻게 할례 받은 여자도 있는데 할례 없는 여자를 하느냐? 삼손은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지만 삼손의 기능은 사사거든요. 선지자의 전신 사사. 사사의 특징은 기존의 타락한 이스라엘 요소를 듬뿍 함께 지고 가야 돼요. 타락한 이스라엘 요소를 지고 가면서 내부는 무엇을 만난다? 천상의 요소와 만나게 돼 있어요. 타락한 이스라엘을 주께서는 어떤 식으로 구원할 거냐? 그거는 삼손의 내부에서 밝혀지는 거예요.
그러면 타락한 이스라엘에서 할례에 대해서 할례의 중요함을 압니까, 모릅니까? 알지요. 율법으로 하니까 알거잖아요. 알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언약의 완성은 주님의 일로 되어야지 내가 율법을 이루신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안다 할지라도 언약적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문제에요. 별개 문제에요. 전혀 상관없어요. 율법에 이게 있고 성경에 이게 있습니다. 그거 백날 우리의 변화를 주지 못합니다. 그냥 지식만 늘어날 뿐이죠.
실제로 손대는 것은 내부가 와야 되는데 그 많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누굴 꼭 집었다? 삼손을 집었어요. 사실 삼손은 내부 사람도 아니에요. 왜냐? 삼손을 태어날 수 없는 사람이에요. 마노아 가정에 천사가 왔어요. 천사가 왔을 때 벌벌 떨었지요. 부부 다. 겁났지요. 왜 하늘이 인간 세상에 찾아오셨는지 겁냈습니다. “누구십니까?” “내 이름 묻지 마. 난 기묘해. 기묘한 세계에서 기묘한 일을 벌일 거야.”
애를 임신하지 못했는데 없는 앤데 있음이 됐어요. 있는 애가 사사로 등장한 겁니다. 그럼 사사 안에 그다음에 뭐가 오느냐 하면 사사는 멸망하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그것도 잠시나마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이걸 하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억압을 받는데 이스라엘보다 누가 더 셉니까? 블레셋이 더 세지요. 블레셋의 억압을 받고 있던 그 이스라엘, 블레셋은 뭐냐 하면 할례 없는 자들입니다. 할례 없는 자를 삼손이 이렇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까 자기 임무가 뭐냐 하면 여기서부터 할례 없는 자로부터 건지는 거죠.
할례 없다, 이건 뭐냐? 율법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하지 않다는 뜻이에요. 더럽다. 더러운 데서 율법의 깨끗함을 뽑아내는 깨끗한 백성을 뽑아내는 역할을 삼손이 하게 되는 겁니다. 그건 전혀 어려운 건 없어요. 문제는 삼손의 기능 가운데서 이 절차가 그대로 삼손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더러운 것이 무엇인가? 그걸 블레셋 방식이 아니라 그 당시 타락한 이스라엘 방식으로 블레셋을 묘사하는 거예요. 그 심보가 그 심정이 삼손에게 주어진 겁니다.
그 부모가 사사기 14장에 보면 3절에,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 삼손이 뭐라고 합니까? 삼손이 아비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가 좋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그 당시 타락한 이스라엘이 할례 없는 것과 결혼하지 말라는 율법을 엄연히 알면서도 그 불신앙적인 본성을 이스라엘 자체적으로 이겨내지 못하는 거예요. 이겨내지 못해도 괜찮아요. 우리에게는 뭐가 있다? 삼손이 있기 때문에. 삼손은 자신만만했던 겁니다. 본인은 남은 이기지 못해서 자기는 사사기 때문에 또는 성신 받았기 때문에 자기의 힘이 있기 때문에 이 힘으로 뭘 이겨낸다? 자기 하나는 건사할 줄 알았던 거예요.
그게 아까 제가 같이 봅시다한 사사기 15장 18절입니다. 그렇게 보셔야 삼손의 행위가 이해됩니다. 삼손이 수수께끼를 냈잖아요. 그런데 맞췄지요. 맞췄을 때 삼손이 약속대로 수수께끼 풀면 그들에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 준다 했지요. 이걸 어디서 충당합니까? 그걸 엉뚱한 다른 데 쳐서 충당해요. 14장 19절에,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이고”
아스글론은 뭐냐? 블레셋 땅이에요. 지금도 아스글론 가봤는데 블레셋 유적지가 있어요. 현재 이스라엘 땅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옷을 주고 집으로 돌아갔거든요. 얼마 후에 자기 아내를 라이벌 된 삼각관계인 친구한테 자기 마누라를 줘버렸어요. 장인어른이 그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뺏긴 거죠. 뺏겼으니까 화가 납니까, 안 납니까? 화가 나지요. 화가 나서 그 힘을 어디다 소화하느냐? 자기의 연적을 치는데 힘을 사용해요. 사적인 거예요.
그리고 핑계는 뭐냐 하면 이렇게 합니다. 핑계를 아까 읽으신 것처럼 할례 받지 못한 손에 내가 죽을까 싶어서 할례를 핑계대면서 나귀 턱뼈로 몇 명을 죽이는가? 천 명을 죽였습니다. 할례 받은 나는 할례 받지 않은 너를 그냥 무조건 진멸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에 합당한 걸로 삼손은 이해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삼손이 그 율법을 자기가 그런 식으로 힘으로 블레셋에서 구원하면서 뭘 빠뜨렸습니까? 힘으로 지금 구원하고자 했는데 뭘 빠뜨린 거예요? 그 힘이 하나님이 원하는 힘은 어떤 힘이었습니까? 삼손이 희생당하는 힘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당한 힘으로서만 이 권세, 세상 권력에서 심지어 나 자신으로부터 뽑아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나 하나도 지키고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으로, 하나님도 좋고 율법도 지키고 나도 덩달아 구원 받고 하는 자기 하나를 못 놓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부인을 못하는 거예요.
이런 식이라면 예수님께서 절대로 그 쓴 잔을 마셨겠어요, 안 마셨겠어요? 안 마셨지요.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믿는 예수는 뭐냐? 쓴 잔 마시지 않는 예수. 예수님이 만약에 쓴 잔을 마셔버리면 그 예수님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도 예수님 짝 나고 꼴 나니까 그게 싫은 거예요.
예수님 덕분에 예수님도 잘 되고 나도 잘 되는 어떤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예수님 덕분에 내가 부자 되고, 예수님 덕분에 건강하고 병 낳고, 예수님 덕분에 자기 자자손손 잘 되고, 교회 부흥 되고 그런 예수를 생각한 거예요. 그것은 무엇의 오류입니까? 아까 삼손 봤지요. 이 더러운, 더러운 아닙니다. 더러분 세상이에요. 이 더러분 세상에서 악마가 만들어낸 예수에요. 십자가고.
이거는 우리가 마음의 할례 안 받은 상태고, 이거는 세례 안 받은 거예요. 그렇게 살면 결국 솔로몬처럼 만납니다. 솔로몬은 무엇의 강을 만났습니까? 허무의 강. 건너갈 수가 없어요. 공부도 많이 하고 신학도 많이 하고 연구도 많이 하고 성경공부도 많이 했는데 아무리 해도 나 자신을 돌아보면 나 자신이 허무하다는 겁니다.
심지어 인간은 솔로몬에 의하면 전도서에 의하면 인간은 어느 정도로 허무하냐 하면 인간은 돌아다니는 바람이요 어디로 가서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물의 일종, 인간이라 하는 것은 바람의 일종, 물의 일종. 여기서 나오는 유명한 노래 있지요. 여러분 다 같이, 그대 이름은 바담 바담 바담, 이 가수가 발음이 잘 안 되거든.
이 말이 맞지요. 그렇게 하면 지도 바람이죠. 최백호는 <낭만을 대하여>, <부산에 가면> 막 나온다, 방언인가. 전부 다 허무해요. <산장의 여인> 전부 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허무입니다. 허무의 강을 건널 수가 없어요. 예수 믿었는데 내가 장로, 집사인데 백날 하면 뭐합니까? 허무한데요. 아니 귤이나 까먹으세요. 허무하기 짝이 없어요.
허무는 뭐냐 하면 천국 가면 좋기는 좋겠는 데 자신이 없네. 그냥 한 번 걸쳐볼까? 보람상조 걸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뗏목을 같이 타야지요. 십자가 혼돈을 같이 건너야지요. 혼자 건너려하니까 이런 사단 나는 거예요. 나는 살아 있는 게 아니고 누가 살아 있다? 주님의 뗏목이 내 안에 살아 있는 거예요. 내 안에 주님의 뗏목이 떠있는 거예요. 증강현실처럼. 내 안에 주님이 살아 있는 거예요.
주님이 살아 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는 거예요. 나는 진즉 죽어도 괜찮은 데 지금 주님이 살려줘서 살아 있는 거예요. 뭐하라고? 사도행전 1장 8절, 성령이 너한테 임하면 땅 끝까지 누구의 증인되리라? 너의 증인 아니야. 예수님이 모든 일을 확정짓고 그걸 그대로 실행한다는 증인으로서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서적으로 안정돼야 되죠. 우울증인가 그런 것 하지 마시고요,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그러지 마세요. 억울하다. 뭘 억울해. 개코나 있어야 억울하지. 처음부터 없는데 뭐 억울해요. 다윗이 억울합니까, 지금? 다윗은 지금 왜 이렇게 갑자기 몸이 아프고 죽어 가는지, 왜 갑자기 헛된지 하나님이 언약을 줬는데 왜 언약 준 당사자가 왜 이렇게 허무해야 되고 그야말로 그림자 같이 돼야 되는지 그 다윗 해석은 어디서 합니까? 다윗언약 계통을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다윗에게 해답을 줘버린 겁니다.
우리는 지금 문제도 알고 뭐도 알고? 해답도 양쪽을 알면서 두 축을 형성해요. 우리 내부에서 다윗부터 시작해서 주여 이러려면 차라리 죽이든지 하다가 십자가 거치고, 아하 나 증인 아니고 주의 증인하라고 이런 일이 벌어졌구나. 웃다가 울다가 미친 것도 아니고 웃다가 울다가. 회전하면서 회전하면 할수록 예수의 살아 계심만 주님의 살아 계심만 십자가의 살아 계심만 증거 하면 끝이고요. 우리 강의도 끝이고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다윗에게 난처한 일이 벌어진 것처럼 우리도 매일같이 어찌할 줄 모르는 헛되고 헛된 현상이 매일같이 일어나는 것은 주님이 의도하신 것을 이제는 웃으면서 신나게 감사하면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께서 일으킨 일인 것을 이제는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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