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시편 34:21 / 꺾이지 않는 의 / 220711 본문
녹취:한윤범
20220711a 부산강의 : [시편]50(34:21)-꺾이지 않는 의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시편 34편. 성경에 보게 되면 특이한 게 34편 6절에 보면, ‘환난’이란 단어가 나오지요. 그리고 16절에 보면, 땅에서 끊어진다는 말이 나오고, 17절에도 ‘환난’이란 말이 나오고, 그다음에 18절에 ‘마음이 상한 자’란 말 나오고, 21절에 죄를 받는다는 말이 나오고, 21절에,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22절에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죄란 단어가 나와요.
성경을 사람들이 잘 안 보려는 이유가 일상 사회생활에서 통용되지 않는 단어들로 이렇게 구성돼 있습니다. 일반사회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거요. 그것은 성경의 세계, 말씀의 세계죠. 말씀의 세계가 따로 형성돼 있어요. 일반적인 사회, 일반적인 또는 일상적인 생활세계가 따로 또 형성돼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세계를 신약적 단어로 ‘세속’이라고 이야기해요.
세속이라면 성경의 세계는 거룩한 세계가 되는 거예요. 거룩한 세계, 그리고 세속의 세계 이 세계를 연결시키는 것이 특이한 개인이 들어가는 거예요.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 세계는 자기 눈으로 보기에 그냥 천국이 보이고 자기 일상의 세상이 보인다면 우르르 천국으로 몰려가면 되고, 세상 사람들도 따로 살고.
이렇게 되는데 이 세상이 어떤 특이한 개인에게 집중이 되고 그 특이한 개인이 초월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이 할 수 없는 능가하는 다른 어떤 힘에 의해서 사적으로 천국을 이야기하게 돼 있어요. 눈으로 보느냐? 아니. 사적으로 고백되느냐? 오케이. 천국이란 어떤 특정한 개인이 사적으로 고백되면서 이 세상에 알려집니다.
그냥 천국이 하늘에 환상적으로 보이면 이거는 개나 소나 다 쳐다보고 천국이 저기 있네, 이러면 되는데 이게 모든 인간에게 다 보이는 게 아니고 개인적으로 그것도 특이한 개인에게 천국이 소개되고 있다 이 말이에요. 특이한 개인에게 소개되고 있으니까 여기서 특이한 개인 앞에서 나는 뭐가 되느냐? 나는 부정돼야 된다. 이게 인간으로서는 힘든 거예요. 특이한 개인에게 천국의 소식이 일임됐다는 나는 뭐냐 이 말이죠.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뭐.
그래서 이 원리는 여러분들의 꼭 아셔야 돼요. 인간, 인간류, 나죠. 나는 끝까지 아무것도 아니다. 왜 아무것도 아닌가? 아무것도 아니기에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내가 왜 아무것도 아니냐고 되묻지 마세요. 왜? 뭔가 된 양 여기니까 화가 나서 내가 왜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묻는데, 아무것도 아닌 근거를 대라, 이유를 대라 하는데 이유도 근거를 댈 자격도 안 돼요.
왜? 애초부터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무것도 아니게 살면 되지 뭐 아무것도 아니라는 평가가 그렇게 불만이 되어 내가 왜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대들지 말라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특이한 개인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성경을 이해할 때는 항상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는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어요. 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말씀을 지킬 능력이 아니니까 특이한 개인이 아니에요. 그래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말씀의 결과는 받되 말씀의 실천에서는 손을 떼게 하는 겁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말씀이 누가 특이한 개인이 이룬 성과는 받되 내가 말씀의 실체라는 능력에서는 우리를 배제시킵니다. 안 그러면 자기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닐 것이라는 그런 오해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일반적인 생활 사회에서 뭘 느끼느냐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 양쪽은 조금씩은 느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티비 시청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요. 티비 켜고 들여다보면 되잖아요. 그런데 잠자는 것 됩니까?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이런다고 잠이 와요? 안 되지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알아요. 그리고 땀을 흘려서 샤워하는 것 우리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변비 걸리면 내 속에 들어있는 데 내 마음대로 이게 빠집니까? 안 빠지지요.
인간이 할 수 없는 게 있어요. 인간은 한계를 느껴야 되는데. 가장 결정적인 중요한 것은 코로나 백신 맞는 것,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십자가 예수님 흘린 피 앞에서 내가 근원적으로 죄인이며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고 받아들이는 것, 아무나 할 수 있습니까? 자식이 출세하고 자기가 성공한 삶을 살고 넓은 아파트에 살면서 재산은 한 100억 되는데 “나는 정말 죄인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할 수 있어요? 안 되지요.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변비 정도가 아닙니다. 잠자기 정도가 아니에요. 정말 인간이 못해내는 거예요. 못하니까 주님께서는 성도는 말씀의 결과는 받되 말씀이 실천에서 손을 떼게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존재는 끝까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좀 남아라 이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일반적인 생활세계에서 말씀의 세계가 들어오게 돼요. 들어온다, 또는 거기서 발생시킨다, 같은 말입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다윗을 통해서 발생시켜요. 다윗은 하늘에 계신 사람이 아니니까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니까 발생시킵니다. 발생시켜버리면 다윗으로 하여금 이 일반적인 세계에 들어오게 해요.
일반적인 생활세계의 핵심요소가 특이한 개인, 오늘 본문은 다윗이죠. 다윗을 통해서 이 일반적인 생활세계의 아무것도 아님의 근원, 이유, 근거, 왜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게 뭔가 된 양 하는 현상이 일어나는지 다윗을 통해서 다 까발려요. 까발려버리면 다윗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돼요. 하나님의 계시가 되고 말씀이 되는 거예요. 특이한 개인이 설치고 다니는 그 흔적 자체가 계시로 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시가 되려면 반드시 어떤 요소가 구비돼야 되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아무것인 체하는 일반적인 생활체제가 필수적으로 이 세계가 있어야 돼요. 그래서 시편 34편에 다윗의 특이한 개인의 활동을 그대로 신약시대에 있는 성도에게 그걸 반복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계속해서 세속으로 되돌려 보내요. 우리의 삶을. 다윗이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시편 34편 1절 이전에 보세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이렇게 돼 있지요. 이게 노래니까 노래제목이다 이 말이죠. 노래제목처럼. 이것이 노래제목도 계시에요. 1절 이전에 0절, 1절부터 나오게 만든 어떤 현실적인 계기, 사건 이걸 이렇게 표시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하다가 쫓겨났다. 여기 다윗이 하나님 말씀 지키고 자시고 했습니까? 그냥 일반적인 생활세계에 부딪치고 튕겨져 나온 거예요. 이것은 미친척하다가 시껍했다고 자기가 큰일 날 뻔했다, 죽을 뻔했다 하고 튕겨져 나온 거죠. 튕겨져 나온 이것을 추방으로 이해한단 말이죠. 특이한 개인 다윗이 아기스 왕, 여긴 아비멜렉으로 돼 있는데 블레셋 왕들의 전체를 아비멜렉이라고 해요.
옛날에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땅이 없어서 돌아다닐 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처나 이삭의 처가 예쁘니까 탐을 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탐을 낼 때마다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저주해버렸어요. 아비멜렉, 블레셋 추장. 그때부터 하나님의 특이한 개인을 건드리면 여기서 뭐가 주어진다? 하나님의 징벌이 주어진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린 징벌은 그냥 나쁜 짓했다고 징벌 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특이한 개인이 갖고 있는 의미와 가치를 건드릴 그때 벌이라는 게 생겨요.
그래서 인간은 죄에 대해서 몰라요. 악에 대해서 모릅니다. 악은 하나님의 특이한 개인의 활동을 건드릴 때 비로소 악이 발생되는 거예요. 통회하는 것도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통회가 되지 다른 데서는 반성이 되지 통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제 낮 설교하면서 통회는 지옥에서 하는 거죠. 하나님께선 통회된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뭐로 만드는가? 지옥 그 자체로 만드는 겁니다.
지옥이 뭡니까? 잘 들으세요. 지옥이란 예수님이 없는 곳이 지옥이에요. 간단하지요. 뭐 불 심판, 그런 건 나중 문제고 그것부터 먼저 챙기지 말고 내가 고통 받는데 자꾸 그렇게 하지만 그건 불교에 염라대왕 있는 것과 똑같은 거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이 없는 세계가 지옥이에요. 마태복음 9장에서 기뻐야 될 혼인잔치가 슬픔이 되는 것은 어떤 경우냐? 신랑이 없는 경우에요. 다들 신랑 계시지요. 다들 신랑 있지요.
여성의 창조적 의미는 본인을 쳐다보지 않고 신랑을 쳐다보라고 여성을 만든 거예요. 그리고 여성들이 이 땅에서 혼인을 할 이유는 신랑 같지도 않은 제대로 나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는 신랑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결혼하게 하신 겁니다. 해봐야 아닌 걸 알지. 결혼해보지 않으면 지가 잘난 척한다니까. 그러니까 여성이 결혼한 자체가 실패작이에요. 그런데 실패가 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게 통회가 되거든요. 내가 미쳤지, 결혼은 왜 했나. 애는 왜 낳았나, 넷이나 낳았는데.
신랑이 왔다가 빠져나간 세계에 여전히 인간들은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내년은 잘 되겠지, 대통령 바뀌면 잘 되겠지. 여전히 희망을 걸잖아요. 이게 무슨 생활이다? 일반적인 생활세계에요. 이 세상의 삶이 세속입니다. 주님께선 이 세속에다 성도를 돌려보내요. 거기서 지내라 하는 겁니다. 말씀 지키지 말고 그런 것 하지 말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지 말고 그냥 이 생활세계에 살아라.
살아가게 되면 이 세상의 특징이 뭐냐 하면 몇 가지 같은 단어지만 여러 가지 단어를 나열해보겠습니다. 뺀질이, 그다음에 깍쟁이, 또 비슷한 말 뭐가 있지요? 얍삽한 것, 요령꾼. 이게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이 쫓기니까 겁나니까 죽을 게 무서우니까 내놓을 것은 뺀질이, 깍쟁이, 얍삽함, 요령꾼 이것밖에 없어요. 누굴 속이는가? 아기스 왕을 속인 겁니다. 그 대목을 찾아볼게요. 사무엘상 21장 10절에서 15절.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다윗이 진짜 미치광이 노릇을 한 거예요. 연기대상 받은 겁니다. 연기를 하고 연출을 한 겁니다. 상대를 속인 겁니다. 이 세상의 특징은 속고 속이는 세상에서 각자 재주껏 연기를 피우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앞에서 속이고, 부모는 자식 앞에 속이고, 남편은 아내를 속이고, 아내는 남편을 속이고, 목사는 교인을 속이고, 교인은 목사를 속이고. 속이는 것 외에는 내놓을 게 없어요. 왜? 내가 살기 위해서. 여기 “두려워하여”
인간은 왜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게 들킬까봐 두려워하는 거예요. 죽어도 무방한 존재인 것이 들킬까봐 연기를 피우는 겁니다. 인생이라는 게. 말로는 쉽지요. “주여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로는 쉬운데 그 말했다고 말씀 지켰다고 하지 말고, 네가 이 세상을 세속을 다녀오너라. 말로 지킨 걸 순종이라 하지 말고 다녀와.
다녀오면 뭐로 변한다고요? 뺀질이, 깍쟁이. 특히 깍쟁이 앞에 뭐가 붙어요. 서울깍쟁이. 얍삽한 것, 말이 ‘것’이지 얍삽한 놈이죠. 여자는 말을 빼겠습니다. 천하의 요령꾼. 얍삽한 것, 깍쟁이, 뺀질이 이게 우리의 속셈인데 우리의 본질인데 어떻게 합니까. 이게 본질이에요. 신을 믿는다,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을 찾는다? 뺀질이에요, 깍쟁이입니다. 얍삽한 것, 요령꾼으로 신을 믿어요.
신을 자기에게 끌어당기면서 신에게 원망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내 인생 왜 이렇게 꼬이게 하십니까?” 원망할 대상을 총체적으로 전체적으로 한꺼번에 모아서 원망하기 위해서 신을 믿는 겁니다. 대들기 위해서, 항변하기 위해서, 비난하기 위해서 신을 믿어요.
우리는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이걸 세속세계에 속해봐야 압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이것을 감추는 식으로 뭔가 된 양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잠을 못 자지요. 그러면서 변비가 되는 거예요. 왜? 십자가 앞에 나올 생각을 안 하고 있습니다. 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내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안 된다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평소에 말을 해도 행동을 해도 늘 분노가 섞여 나와요. 고객님 안녕하십니까, 해도 그 안에 분노가 있어요. 반갑습니다, 이럴 때 분노가, 식당에 와서 밥 안 먹고 가기만 해봐라. 인간의 모든 행동과 태도에는 분노가 들어있어요. 그 분노가 압축해서 뭉쳐진 걸 네 자로 ‘대표기도’라고 하는 겁니다. 어린아이부터 당회까지, 그게 분노의 화신으로 터져 나온 거예요. 이렇게 성경대로 기도해도 하나님 제 소원한 것 안 들어줄 거요, 이거죠.
십자가 앞에서 내 인생 어떻게 망가져도 괜찮아요, 하나님, 이런 게 없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이 오죽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죄인을 위해 피를 흘렸겠나, 그런 게 없고 이 정도까지 해줬는데 주께서 성의를 표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거래하려고 시도하는 것, 이게 바로 특이한 개인 다윗이 실생활에서 보여주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친 척하다가 어떻게 됐지요? 미친 척하다가 쫓겨나지요. 왜? 여기 가드 나라 입장에서 볼 때는 다윗이 이스라엘에서는 만만이고 뭐 대단한지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아무 쓸모 짝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추방을 시킨 겁니다. 추방된 그것을 다윗은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환난에서 건져냈다고 이해한 거예요. 오늘 시편 34편 6절에,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자, 여기서 좀 더 생각해봅시다. 다윗이 왜 이렇게 미친 척을 해야 되느냐? 다윗을 뭔가 떠미는 쪽이 있었어요. 이 이야기가 길더라도 여러분 알아야 돼요. 다윗을 떠미는 쪽이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 쪽이었어요. 사울 왕이 다윗을 미워한 게 아닙니까? 사울 왕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게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 사울 왕을 누가 용납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용납을 했다니까요.
우리가 이 점을 알아야 돼요. 아무리 사적으로 어떤 사람을 돕고 싶어도 지가 속해 있는 집단의 힘이 나의 개인적인 힘을 지금 압박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 중요한 것 많이 한다. 21절 누가 읽어보세요. 중요하니까요.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됐습니다. 악인은 개개인이 악인이에요. 그러나 악이 개인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고 전면적으로 그걸 압제하는 다른 엄청난 전체적 악이 사적인 개인을 쥐고 악인으로 살도록 붙잡고 있고 통제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개인적으로 다윗 좋아하는 사람 많아요. 그러면 뭐합니까? 전체 권력은 누가 쥐고 있는데? 사울 왕이 쥐고 있잖아요. 이걸 복음을 알고 큰 교회 부교역자로 생활해보면 그 부교역자가 제일 크게 느끼는 것은 주님의 뜻, 그런 걸 느끼는 게 아니에요. 세속세계, 교회세계죠. 교회라는 생활세계, 세속세계에서 권력의 맛을 봤다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전도사 좋아하고 부교역자 좋아하는 사람 많아요. 심지어 삼분의 이가 넘는다 할지라도 교단에서 인정한 당회장의 권력이 교인들을 압제하고 교인들의 모든 결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 그 부교역자는 당회 마치고 종용히, 조용히도 아니고 종용히 불러다가 그다음부터 잘리는 거예요. 교회는 그래서 유지되는 겁니다.
여전도사가 왜 버티는 데요? 뺀질이, 깍쟁이, 얍삽함, 요령꾼이기 때문에 버티는 거예요.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입니다. 권력의 라인을 찾는 거예요. 교회에서 줄이 어느 쪽인지, 장로들 열 명 중에서 유력한 말발 있는 장로라인과 이쪽 라인이 어느 쪽인지, 지금 당회장이 허수아비인지 아니면 진짜 권력을 탈취해서 목사가 마음대로 부리는지? 어느 정도 부리느냐?
죽은 유훈통치라고 하지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김일성이 북한을 다스리는 것처럼 이미 죽은 당회장이 그 교회를 다스리는가? 어느 교회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수영로교회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영락교회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영락교회 가서 설교하면서 한경직 목사 욕하면 그 목회자 어떻게 됩니까? 대번에 잘리지요.
보이지 않는 악의 힘이 있어요. 그 악의 힘은 거기에 속한 교인들로 하여금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준 그 은덕과 혜택을 입지 못한 겁니다. 나로 하여금 죄인 아니게 해준 내가 멀쩡하게 살 가치가 있음을 어느 누군가 나에게 그걸 덧입혀준다면 나는 그에게 충성봉사하리라. 이런 악의 권력에서 인간은 못 벗어납니다.
그래서 악인들이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악에 의해서 그냥 죽어요. 지은 죄 때문에 죽는 게 아니고 나로 하여금 죄에서 못 벗어나게 하는 더 큰형님 같은 죄, 악, 악이란 인격화되거든요. 악마지요, 악마. 악마가 말씀의 세계와는 전혀 질이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야. 너 가치 있어, 이걸 유포시켰던 그래서 내가 기분 썩 좋았던 그것이 한 통속이 되어서 같이 지옥으로 망해버립니다.
사람들은 죄라는 걸 몰라요. 가치 있는 내가 가치 있게 사는 이게 무슨 죄냐? 내가 무슨 남한테 해코지했나, 지금껏 내가 경찰서 간 적 없어. 나는 착실하게 자식 잘 키우고 밥벌이하는 게 왜 지옥 가야 돼? 거기에 대한 정답은 이렇습니다. 그거는 네가 할 수 있는 거야. 샤워하는 것, 티비 시청하는 것 할 수 있는 거거든요. 백신 맞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뭐냐?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뭔가 가치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에 인간은 모든 걸 할 수 있는 거예요. you raise me up 산에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어요. 찬양도 할 수 있고 헌금도 할 수 있어요. 예배 참석할 수 있고 교회 나올 수 있습니다. 왜? 누굴 위하여? 특수한 개인이 아닌 보통 그렇고 그런 개인을 위해서 내가 긍정되기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부정이 아니고 내가 긍정할 수 있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 교회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여러분 아셔야 돼요. 교인들은 돈만 내고 예배 마치고 집에 가니까 모르지요. 그러나 그 실무자들 교회를 운영하는 실무자들 여전도사, 남전도사, 부교역자, 강도사, 당회장 목사, 그리고 그 행정에 참여하는 장로급들 이게 교회가 얼마나 위험한 곳이지 그냥 평신도로 뒤에 앉았다가 설교 듣다 자고 돈만 천원 내고 집에 간 사람 아무것도 몰라요.
교회가 운영된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됐어요. 무슨 하나님이 교회를 운영해요. 그런 것 없어요. 교회는 없애는 거예요. 운영이 되는 게 아니고 계속 없애는 거예요. 일곱 교회 없애듯이. 교회는 있다가 없어지는 흔적만 남기라는 게 교회가 존재할 이유입니다. 흔적만 남기고 떠나간 그냥 사라지만 됩니다. 개인이 무가치한데 개인이 모인 교회도 역시 무가치한 거예요.
왜 무가치하냐? 실생활 속에서 우리는 뺀질이고 깍쟁이고 얍삽하고 요령꾼이니 무가치할 수밖에 없지 여기서 뭐가 잘난 게 나올 수 있습니까. 특수한 개인이 다윗이 실생활 현상 속에서 권력장 속에서 그는 무능하기 짝이 없고 내가 여기서 아부하고 미친 척하는 연기 피우는 것 외에는 살아남을 재주가 없음을 혹독하게 다 경험한 거예요. 그게 계시에요. 그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지키란 말은 뭐냐 하면 네 주제파악하란 이야기에요. 아무것도 아닌데 이만큼 산 것도 복입니다. 십오 년 전에 진즉에 죽어도 할 말 없는데 지금껏 버티고 있는 것은 뭔가 내가 할 수 없는 은택을 입었기 때문에 바로 이런 나를 발견하라고 기회를 계속 부여하신 거예요. 아직도 너 모르지? 더 살아야 되겠어. 더 살면서 네가 아무것도 아닌 걸 알아라. 그런 기회를 계속 주께서는 은혜를 주셔서 혜택을 주신 겁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어려운 것, 일단 여러분들이 아셨다 치고. 추방당했습니다. 누가? 다윗은 쫓겨났다했으니까 맞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추방당한 걸로 보지 않고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배제 당했다고 보는 겁니다. 다윗이 이 관점에서 시편 34편을 썼습니다. 다윗이 미친 척하고 내가 아무것도 아닌 순간 관점이 내 가치와 살기 위한 관점에서 뭐로 바뀌었냐 하면 주께서 왜 나로 하여금 미친 척하는 그런 환경을 조성했느냐, 로 관점이 바뀌어요.
사울 왕은 이스라엘 왕이죠. 그러면 아기스 왕은 가드 왕입니다. 공통점이 아기스 왕, 사울 왕, 오늘 본문에는 아비멜렉으로 돼 있는 블레셋 사람이죠. 우리 아는 상식은 성경에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상극이고 서로 원수이며 화합될 수 없는 융합될 수 없는 질적인 대척관계에 있다고 우리는 분명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란 인물로 인하여 사울이나 아기스나 둘 다 한 통속이 된 거예요. 왜? 둘 다 공동의 적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에. 공동의 적을 추적하는데 그 추적하는 이유가, 제발 너는 이 세상에서 꺼져줬으면 좋겠다, 아예 없어졌으면 좋겠다, 라고 누가 이야기한다고요? 세상에서 이야기하죠. 사울이 이야기하고 아기스 왕이 그렇게 원했던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우리는 죄에 대해서 모릅니다. 악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특이한 개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서 비로소 우리가 예수님을 반기는 존재가 아니고 예수님을 미워해서 배척하는 존재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배하고 있는 악, 그리고 죄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등장함으로 비로소 알 수 있는 거예요. 내가 나쁜 짓해서 그게 죄가 아니고 예수님과 연관해서 죄가 죄답게 규정이 되고 악이 악답게 규정이 되는 겁니다.
교회에서 만날 성경 들이대면서 부모를 공경하라, 왜 부모 공경 안 합니까? 여러분 죄인입니다. 이런 식으로 몰아갈 때 한 달에 부모 용돈 백만 원하고 늘 요양병원에 열 번 찾아가는 사람한테는 엄매 기 살아, 이러고 있다고요. 그 이야기 듣고. 왜? 지는 자기가 보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자기는 죄인이 안 되지요.
왜 인간은 죄인이 안 되고 싶어 하는가? 인간이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있어요. 죄책감은 외부 타자에 대해서 외부인에 대해서 외부 사람에 대해서 외부 존재에 대해서 분노하게 돼 있어요. 반발하게 돼 있다고. 마치 개가 낯선 사람 오면 본능적으로 짖는 것처럼. 인간은 개와 똑같습니다. 내가 오줌 눈 영역 안에 들어오면 그다음부터는 무조건 경계하고 짖습니다. 그러다 엘에이 갈비 하나 던져주면 좋다고 꼬리 막 흔들고 그러지요.
인간이 죄책감을 갖는 것은 이미 자기 안에 떳떳치 못한 게 가득 들어있다는 것이 외부인으로부터 그게 들킬까봐 두려워하는 겁니다. 겁을 내는 거죠. 그래서 서로서로의 만남은 악수하고 만남은 서로를 지금 속이고 있는 현장이 포착된 거예요. 반갑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서로 속이고 있는 거예요. 서로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악수를 한다는 것은 난 당신의 적이 아니라는 그러한 증거로 당신은 결투의 대상이 아니라고 해서 옛날 외국에서 내려온 거예요. 인사하는 이런 것도 전부 다 우리 서로 싸우는, 당신을 때리는 손이 아닙니다, 하고 손을 내미는 거예요. 그런데 악수를 내치는 사람 있잖아요. 정치적 발언하지 않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사울과 아기스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다윗을 내쳤다는데 그러면 사울과 아기스 둘 다 다윗을 표적으로 노리면서 공격하는 이유가 뭐냐? 그걸 생각해봅시다. 인류의 역사에서 시대가 지나가면서 인류 문명 가운데 두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구분한다면 하나는 뭐냐? 전제군주현식이에요. 또 하나는 뭐냐? 자본주의입니다. 사람이 짐승처럼 살아가는 게 아니에요. 어떤 형식을 보여주면서 살아갑니다.
전제군주가 뭐냐? 제가 함축해서 적어볼게요. 설명하면 많이 기니까. 혈육을 통해 가문을 유지하는데 혼인전략으로 재 조직화하는 방식, 이게 전제군주입니다. 이게 성경에 나오는데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가인의 칠대 후손 라멕이 국가를 조직해요. 도시국가를 조직하는데 그때 자기가 자기 조상 가인보다 더 당당하고 더 힘이 세다는 것을 자기 아내에게 이야기하죠.
내가 기분 나빠서 소년을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요. 그러면 그 소년은 어디 속하지 않느냐? 혈육에 속하지 않습니다.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자기와 혼인한 사람에게 이야기해요. 왕과 혼인이 되면 여기서 왕가가 돼요. 왕가가 계속 세습제로 이어지요. 이게 바로 전제군주인데 독재 같은 전제군주체제가 돼요. 이게 뭐냐 하면 삼국시대,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구한말까지 계속 이어지지 않습니까. 전주 이 씨, 조선을 이 씨 조선이라고. 이거는 유럽도 마찬가지에요. 이게 바로 전에 있던 문명의 모습이고 현상입니다.
자, 사울이 보는 이스라엘, 그리고 아기스 왕이 보는 가드 왕, 둘 다 전제군주체제에요. 전제군주체제는 인간이 개인이 갖고 있던 욕망을 자신의 가문으로 통제하는 겁니다. 왕가의 핏줄로 통제하는 거예요. 철저하게 혈육적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적인 힘을 자기 개인 가문에 다 끌어 모으는 거예요. 힘이라 하는 것은 여럿 다른 힘들을 모았기 때문에 그게 강력한 힘이 돼요.
지가 강력한 힘을 만드는 게 아니고 남의 것을 빼앗아야 영끌 강력한 힘이 된다고. 네가 갖고 있는 힘,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힘을 반 토막을 빼앗아 오던지 삼분의 일을 빼앗아 오던 빼앗아 와야 돼요. 그래야 힘이 하나의 질서가 중심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힘을 가지려면 딸이나 아들의 자유권에서 일부를 아버지 통제 하에 둬야 돼요. “저녁 열 시 이전에 집에 들어와.” 이게 뭡니까? 그 자식을 전면적으로 자식의 자율권을 보장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엄마가 어린아이한테, “너 김치 안 먹으면 다른 반찬 계란말이 안 준다.” 이거 뭐예요? 계란말이 먹고 싶은 그걸 빼앗아버리는 거예요. 여기서 생기는 게 뭐냐? 죄책감이에요.
법은 엄마, 아빠라는 법에 대해서 자식은 뭘 배우느냐 하면 법이란 것은 위반했음과 위반 안 했음을 그걸 통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거예요. 그 죄책감을 안고 다른 친구들 만날 때 열 시가 돼갈 때 “나, 집에 가봐야 돼.” 왜? “우리 집은 열 시 이전에 들어가야 돼.” 그런데 친구가 붙들다보면 10시 2분 됐습니다. 뭘 느낍니까? 서두르게 됩니다. 왜 서두릅니까? 의와 죄 그 경계선에서 죄 쪽에 악 쪽에 속하지 않기 위해서 빨리 집에 가야 돼.
그래서 가장은 가장의 힘을 전제적인 군주로 할 수 있습니다. 가정 내에서. 국가도 마찬가지에요. 방법이 뭐냐 하면 보통 세 가지에요. 지대, 노역, 세금. 세금과 지대는 좀 구분해야 되는데 왕이라 하는 것은 어떤 특별한 가문이 왕이 되는 것은, 인물 좋다고 왕 되는 게 아니고 선거해서 왕 되는 게 아니고 이 왕이 깡패입니다.
깡패의 특징은 뭡니까? 지는 일 안 하고 남의 뺏기 위해서 사조직 만들어서, 깡패 밑을 양아치라 하지요. 양아치 조직해서 남들은 평화롭게 농사짓고 하는데 지는 칼 갈고 무술을 연마하고 싸움질 그런 것 배워서 자릿세 내놔라, 이게 깡패에요. 이 깡패가 상대방 깡패조직을 이기고 권력을 차지하게 되면 이게 바로 왕이 되는 거예요.
왕들은 사고방식이 깡패 되고 싶어서 어릴 때부터 재목감이 달라요. 깡패 되고 난 뒤에는 과거의 자기 이력과 역사를 어떻게 합니까? 조작하지요. 깡패가 아니었고 하나님의 뜻이었다. 날 때부터 이미 재목감이 지도자, 우리의 영도자 감이었다. 그 깡패 중에 하나가 김정은이 아닙니까.
김정은이 어릴 때부터 배운 게 뭡니까? 어떻게 하면 남의 것을 빼앗는가, 그것 연구한 사람이에요. 어떻게 하면 희생하는지를 배운 게 아닙니다. 스위스 유학 가서 그런 짓하면서 배운 게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남의 것을 빼앗을 수 있는 기능과 기술을 협박과 공갈로 빼앗을 수 있다는 것, 자기 고모부 총으로 쏴 죽이고. 그런 걸 배워야 돼요.
놀면서 월급 몇 천만 원씩 타는 그걸 네 자로 뭡니까? ‘국회의원’이라 하지요. 국회의원은 자기 직업에 환멸을 느낀 거예요. 이제는 고리타분해서 권태로워서 더 이상 자기 직업을 못하겠어. 그럼 때려치우고 뭐합니까? 검사 때려치우고 국회 나오면 돼요. 놀면서 싸움질하면서 월급 받는 사람들, 국회의원들. 권력을 쥐고 있거든요.
집안에 국회의원 나가면, 다른 국회의원 욕하지요. 지 동생이 국회의원 나가면 믿어주세요, 유세 나갈 거예요. 유세하다 총에 맞고. 왜 아베를 죽입니까? 아베를 죽인 이유가 자기한테 아버지도 아니면서 아버지 노릇을 한 것에 대한 부모 때문에 아베를 죽인 거예요. 이 왕이 모든 국민에 어떤 이미지냐 하면 아버지 이미지에요. 아버지 때문에 뭐가 생긴다? 죄책감이 생기는 겁니다. 아버지가 법을 만들기 때문에. 아베가 수상인 건 좋은데 왜 우리 엄마 재산 다 날아갔느냐, 이것 때문에 죽였잖아요.
분노라니까, 분노. 분노한다는 것은 힘을 느꼈다는 거예요. 누구로부터 통제받고 있다는 걸 느꼈고 그 통제를 계속 받고, 받고 하다가 마지막 자기 엄마의 재산, 곧 지 재산이죠. 자기 재산이 날아가니까 복수할 길이 없으니까 총으로 쏴 죽인 거예요. 아베가 종교단체에 가서 그 종교단체를 선전하는 연설도 하고 동영상을 날리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종교단체를 허물기 위해서 개인이, 그 41살 먹은 청년이 개인적으로 도살하는 방법은 뭡니까? 이미 그 종교단체의 소속 인들은 종교의 우두머리, 장의 정신적으로 예속돼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한둘이 총으로 죽인다고 종교가 사라질 건 아니잖아요. 대가리는 대가리치는 충격을 줘야 된다고 생각해서 다른 간부가 안 나오니까 아베를 찾아가 죽인 거예요.
죽임으로써 무엇을 면제한다? 나는 나한테 죄책감을 줬고 나로 하여금 못난 존재로 만든 그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자기 확인을 자기 증명을 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신에게 대들기 위해서 신을 믿는다고. 10분 쉽시다.
20220711b 부산강의 : [시편]50(34:21)-꺾이지 않는 의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전제군주 이야기했지요. 전제군주와 자본주의사회. 대체로 전제군주에서 자본주의사회로 넘어왔지요. 전제군주에서는 혈통중심주의. 혈통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것을 국가의 시조라 합니다. 시조의 특징은 힘을 가지고 뺏는 자였고, 뺏기는 자는 힘이 없는 자였고, 힘 있는 자는 힘 있기 빼앗은 거예요.
그런데 힘을 모으기 위해서 일단 자기 사조직, 자기 부하들까지 포섭을 해야 되잖아요. 그 포섭하는 과정에서 그 주민들이 하나님이 특별한 영웅적인 힘을 부여했기 때문에 저 사람은 우리와 다른 특출한 영웅이라고 영웅시되는 그러한 절차가 필요했던 거예요. 한 번 영웅은 영원한 영웅이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걸 신화라고 해요.
이 신화가 어디 속하느냐 하면 신화는 역사 안에 있어요. 그냥 역사라 하면 그렇고 그런 역사인데 역사를 빛내기 위해서 신화를 제일 앞장세우지요. 열차에 기관차 있고 뒤에 객차 있잖아요. 기관차 쪽에 신화를 해버린 겁니다. 그래야 이 역사는 어디로 가느냐? 하늘로 가요. 우리의 조상은 신과 관련돼 있다. 그게 단화신화 아닙니까. 모든 민족들은 다 그런 거예요. 단군신화가 있어요.
단군신화는 단군을 섬기자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만든 유구한 오천 년 역사를 신봉하자. 그 법적인 테두리 밖으로 나가지 말자. 만약에 이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곧 역사의 죄인이 되는 거죠. 죄인이 되면 죄책감을 지니게 되고 그는 그 공동체에서 추방돼도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는 거예요. 모든 역사가.
그러면 이 역사를 선조 못지않게 후손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남의 것을 빼앗아야 돼요. 빼앗으려면 전쟁을 해야 됩니다. 전쟁을 하려면 군사력을 키워야 되겠지요. 그렇게 해서 푸틴 자신이 영웅이 되기 위해서 자기보다 약한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겁니다. 현재 러시아 백성들은 기분 좋아요. 자기가 우열한 민족의 국민인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거예요.
개코도 없으면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북한이고 그건 빌어먹게 돼 있고, 좀 가난하지만 뭔가 자부심 갖는 것은 러시아고. 그들은 미국의 자유분방함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 자기는 하나같이 단결해서 이번 전쟁을 푸틴이 앞장서서 끝내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 푸틴의 승리가 나의 승리와 결부돼 있기 때문에. 내가 승리될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닌 게 돼요. 가치 있는 존재.
이게 바로 뭐냐? 사울이고, 이게 뭐다? 아기스에요. 여기서 다윗이 추방된 거예요. 추방되면서 다윗을 추적했던 사울과 다윗을 쫓아냈던 그 아기스가 왜 악의 화신이고 이게 왜 범죄자인지 비로소 하나님의 계시차원에서 말씀차원에서 규명이 되는 거예요.
사람이 아무것도 없이 가난하고 아플 때는 자기가 천하의 의인처럼 여겨지지요. 그러나 몸이 아파서 같은 병원에 여럿이 있는 병실에 누워있으면 저희들끼리 환자의 전쟁이 벌어집니다. 면회 가면 같잖지도 않지요. 저 할망구가 나에게 비난했다, 자기 아들 자랑했다. 그 내부, 좁은 병실에서도 간호사가 왕질하고, 의사는 대왕이며 회장님 역할하고. 조그마한 조직인데 하여튼 인간들이 모였다 하면 이게 전부 다 전제군주의 신화가 거기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 전제군주가 자본주의사회로 변했어요. 변할 때 1789년에 이게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전제군주 혈통에 준한 세습된 어떤 혈통은 고귀한 혈통이고 왕가라 하는 그 왕가의 모가지를 친 사건이에요. 이게 프랑스대혁명이란 거예요. 프랑스대혁명에서 세 가지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평등, 자유, 박애(사랑). 특히 평등. 왕, 그다음에 성직자 계급, 그다음에 귀족계급 이게 프랑스혁명 때 전체에 3%에요.
3%가 97%를 다스리고 거기서 뭘 냈다 했습니까? 지대, 노역, 세금 이걸 3%가 다 가져간 거예요. 특히 성직자들은 십일조를 거둬서 다 가져간 거예요. 왜 지대냐? 땅을 넓혔기 때문에. 남의 땅을 넓혀야, 군인들의 지휘관이 누굽니까? 왕이죠. 왕이 다른 나라에서 돈 빌려서 용병 사서 전쟁에 일단 승리만 해놓으면 땅이 생기고 그 땅으로 지대 받아서 먹고 살면 빌려왔던 돈을 갚고도 자기 왕가는 돈이 남아돌죠. 왕가가 돈이 있어야 또 용병과 무기를 구입할 수 있어요. 그러면 왕가는 계속해서, 계속해서 긴긴 세월 최고의 혈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게 돈의 힘이에요. 돈의 힘=잉여의 힘, 여분의 힘. 아껴 쓰고 바꿔 쓰는 것 있지요. 아껴 쓰면 여분의 힘 남고 이 여분의 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 남의 것의 노동의 가치를 싸게 구입할 수 있는 제도가 자본주의제도입니다. 그러니까 모가지 날아갔잖아요. 이제는 대대로 물려주는 혈통이 아니라 누구도 돈만 있으면 귀족적인 생활할 수 있어요.
그래서 한 시대의 문화와 문명은 귀족이 살던 것을 얼마나 많은 퍼센티지로 따라 붙이는 것, 이게 바로 문명세계의 특징입니다. 옛날에 귀족들의 누렸던 것을 지금의 평민들이 그걸 누리는 동시에 귀족 맛을 보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커피에요. 커피, 클래식음악, 골프, 마장경기. 이거는 돈 한두 푼으로 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리고 그림을 수집하는 것, 이건 전부 다 화가들의 귀족에게 팔기 위한 그림을 그렸거든요.
그러니까 귀족들의 누렸던 것을 너만 귀족이냐? 귀족 모가지 날리고 나도 귀족 될 수 있다. 어떤 개인에게 개인의 가치를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줄 수 있는 목표를 누가 정했는가? 이 전제군주의의 귀족들이 정한 거예요. 따라서 돈만 있으면 내가 옛날 귀족 대우받던 그때처럼 살 수 있다고 보는 것, 이게 자본주의에요. 자본주의가 달라진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달라진 게 없어요.
그러면 나라는 게 뭐냐? 전에는 나라는 왕의 나라에요. 이게 사무엘상 8장에 나옵니다. 나라의 모든 것은 왕이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는데 너희는 아직도 왕 제도를 좋아하느냐? 사무엘상 8장에서 사무엘이 백성들을 나무랬어요. 이방나라는 왕을 구해도 우리는 왕이 필요 없다. 율법대로 살면 된다, 이렇게 이야기했고, 이스라엘이 그걸 반대했지요. 반대해서 나온 자가 사울이었고 그 사울이 왕이 되면서 이스라엘은 망해버리죠. 이스라엘이 망하고 그 뒤에 다윗의 나라가 등장합니다.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전제군주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죄와 의의 기준은 하나님이 원했던 죄와 의의 기준이 아니다. 전제군주를 박살내고 전제군주한테 추방당하고 밉상 받고 쫓기는 죽기를 바랐던 독특한 개인의 나라에서 죄가 무엇이며 의가 무엇인가 비로소 밝혀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의 개인의 활동이 계시에요. 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지킬 수가 없어요.
왜? 다윗 개인의 문제기 때문에 지킬 수가 없어요. 다윗에게 일어난 상황을 시편 34편이고 그 상황을 오늘날 말씀으로 성도의 삶의 상황으로 바꿔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효과입니다. “네가 현재 시편 34편의 상황에 놓여있어.” 이걸 우리한테 일깨워주는 거예요. 지키라는 게 아니고, “네 눈 뜨고 똑바로 봐. 네가 똑같은 처지야. 세속 세상으로부터 쫓기고 있는 그런 입장이야.” “제가 언제 쫓깁니까?” “네가 지금 얍삽하게 노니까 모르지.”
사기를 한 번 당해봐야 내가 나만 쳐다보고 살았구나, 그걸 봐야 돼요. 사람들에게 실망을 느껴봐야 되고 남에게 애매한 모독과 무시와 비난을 받아봐야 되고 복음을 안다는 이유 때문에 교회에서 추방돼봐야 아아 세상이 교회가 이게 믿을 게 못 되는구나 비로소 아는 거예요. 교회도 하나의 권력단체고 돈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는 겁니다.
이 나라가 해야 될 일이 뭐냐? 자본주의에서 계급을 칠 때 돈을 누리는 것을 너희들만 누리느냐, 나도 누리자. 돈, 자본의 축적된 잉여의 힘에 대해서 사람이 이미 규정이 되고 난 되에 자본에서는 뭐냐 하면 적어볼게요. [자본의 증식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 이게 오늘날 현대국가입니다. 나를 위함이 아니에요. 뭘 위한?
자본의 증식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가 국가에요. 자본을 지키는 거예요. 나를 지키는 게 아니고 자본을 지키는 겁니다. 돈 값 못하는 인간들은 죽어야 돼요. 돈 값, 옛날에는 밥값 못하는 인간은 죽어야 됐어요. 그러니까 뭔 뜻이냐 하면 나이 칠십 넘어 이미 은퇴한 사람이 집에서 빈둥빈둥 노는 것을 이미 가정의 권력을 쥐고 있는 안 사람 입장에서는 꼴 보기 싫은 거예요.
“나가! 돈 벌어와. 돈 안 벌어오려면 집구석 들어오지 마! 한 푼이라도 벌어. 십만 원이라고 오십만 원이라도 벌어와. 어딜 놀고먹으려고.” “내가 젊을 때 많이 줬잖아.” “젊을 때 번 것 자식 장가가고 집 사주고 다 끝났어, 그건. 딸 시집보낸다고 없어 우리는.” 돈 버는 기계로 보는 거예요, 기계.
그래서 돈을 벌지 못하면 자본 증식에 보탬이 되지 않으면 이걸 가지고 죄인 됩니다. 그러니까 돈 없으면 빈대떡, 요새 빈대떡이 얼마나 비싼데 가사를 이핼 못하겠어. 돈 없으면 죄인이고 돈 있으면 의인이에요. 돈 없으면 빌어먹든지, 권력을 인수인계라도 하든지 아내 돈 벌고 남편 못 벌면 아내에게 일임이라도 하든지 종속되든지, 난 당신의 영원한 부하입니다, 딸랑딸랑. 이거는 돈도 없는 주제에 꼴에 남자라고 자존심은 살아서, 돈 벌 때 남자지 돈 못 벌면 남자 아니에요. 빌어먹는 첫째 아들에 불과하지요.
여기서 뭐냐? 법과 제도에요.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전제군주의 원칙에서 전제군주는 계급제도잖아요. 지금은 계급제도가 사라졌다는 걸 제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사람이 높은 계급이 없으면 살맛이 의욕이 없어요. 그래서 계급이란 말 안 하고 민주주의니까 이렇게 이야기해요. 계층이라고 이야기해요. 계층이나 계급이나 둘 다 똑같은 거예요. 계급하면 공산주의 생각나서.
공산주의는 뭐냐? 돈 있는 놈 조져서 계급을 뒤집자는 이런 의식이 있어서.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을 쳐서 파업하든지 태업하든지 해서 그들의 돈을 뺏자, 이러면 사회주의사회에요. 진보에요. 진보적 가치라 하는 것. 평등을 유지하자는 거예요. 그 평등을 같이 하는 인간들이 뭐가 되느냐? 그게 계급이에요. 평등을 주장하는 그들이 하나의 계급단체가 되는 겁니다. 계급은 이 세상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 인간은 눈에 보이는 세속세계에 미련을 갖는가? 그것은 하나님께 피할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사울이 여호와를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사울이 여호와를 믿었단 말 하지 말고 사울이 여호와를 알았어요, 몰랐어요? 알았지요. 사울이 율법을 몰랐습니까, 알았습니까? 알았지요. 그래서 사울이 전쟁할 때 뭐했는가? 율법대로 제사를 드린 거예요. 그 제사 드리고 요새 같으면 예배드리고, 예배드린 의도가 뭐예요?
사무엘상 15장에 아멜렉과 전쟁할 때 분명히 다 죽이라 했잖아요. 그러면 사울 왕은 다 죽이면 자기에게 남은 게 없잖아요. 사울 왕은 하나님을 의식한 게 아니고 백성들을 의식해요. 이게 전제군주의 특징이에요. 목사가 교인을 의식해요. 주님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주님 의식하려면 아예 목사 된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어요. 예수 믿는 사람이 목사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용납이 안 되는 세계에요. 예수님을 안 믿는 대신 교회를 믿는 목사가 된 거예요.
일반교인들은 몰라요. 그들의 영혼을 교회 악마에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몰라요. 목사가 되고 교회가 되고 난 뒤에 그들은 뭘 해야 되는가? 자기가 교회의 어른이 되기 위해서 이단을 만들어야 돼요. 적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돼요. 이단이 하는 주장을 이야기함으로서 나는 이단이 아님이 교인들에게 세뇌하듯이 그들의 정신을 장악하는 방법을 씁니다. 그걸 두 자로 ‘목회’라고 하는 겁니다. 신천지는 여기 들어오지 마세요, 라고 붙여놓은 것 있지요. 그게 정치영역이에요. 성경을 알아서 목사가 아니라 정치를 배워서 목사가 되는 거예요.
그 대표자가 누구냐? 사울이에요. 사울은 입만 떼면 전부 다 이스라엘을 위함이고, 보세요. 이스라엘은 사람들이죠, 백성들이죠. 백성들은 좋아하지요. 내가 다윗을 싫어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위함이고, 사람들 일단 기분 좋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그다음 뭘 위한다?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함이 되는 거예요.
이 논리를 그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서 하나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 이야기 안 한 목사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교인들이 평생을 두고 속고 있어요. 저 목사 비난하는 것은 우리 교인들이 할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실 거야. 이게 바로 계급화잖아요, 이게 계층화잖아요.
사실은 그 말이 믿어서 하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간증해서 친구들 목사 와서 설교할 때 어떤 사람 목사 건드려서 그 집안 파탄 난 이야기하니까 그걸 안 믿지만 내 인생에 흠이 나는 일은 내가 싫으니까, “내가 굳이 나설 필요가 뭐 있나. 하나님이 알아서 하겠지.” 이거는 그 목사를 사랑함이 아니고 누구 것 챙기려고? 내가 갖고 있는 누적된 내 재산과 내 자본을 챙기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 말은 앞으로 목사를 사랑하면 목사를 지적하자, 그런 이야기도 하지 마세요. 인간은 자기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것에 손상이 가는 일은 어떤 일도, 그걸 어제 설교에 분란을 일으키는 일, 내 평화에 분란을 일으키는 일을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지를 않는다. 나는 내가 원하는 평안만 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주님의 평안은 없는 거예요. 내가 익히 알던 평안, 가정의 평안, 교회의 평안만 있으면 그걸로 인생 선방한 것처럼 여긴다니까요.
사울 왕은 이스라엘에 호소해서 이스라엘이 자기를 왕 되게 한 바탕되는 힘의 집결로 본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다고 사람들에게 거짓말한 거예요. 그런데 거짓말이지만 백성들은 하나님을 몰라요. 모르고 이스라엘이란 국가의 체제와 법을 알기 때문에 사울 왕의 주장에 대해서 조금도 이의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이 네가 힘없는데 힘 있는 자에게 대충 고개 숙이면 되잖아. 거기에 나오는 오늘날 상투적인 것이 교회에서 무슨 일 나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 하잖아요. 계란으로 바위 치면 계란이 깨지지 바위가 깨지냐. 그만 대충 넘어가라. 그냥 은혜롭게. 교회 모든 회의는 마지막에 은혜로 끝나요. 주님께서 계란으로 바위 치는 이유는 계란이 깨지기 위해서입니다. 바위가 깨지는 법은 없어요.
바위가 깨지지 않기 때문에 바위가 악이며 바위에서 계란이 깨짐으로서 계란은 비로소 생길 수 없는 의인이 되는 겁니다. 그 깨진 달걀이. 그게 오늘 본문이야기에요. 안 깨지면 같은 악인이에요. 깨지라고 계란, 힘을 안 주신 거예요. 내가 힘이 있어서 교회 문제, 국가의 문제 정치적으로 데모하면 이거는 지가 악인이에요, 그게. 마치 자기가 가치 있는 존재가 돼버려요.
우리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닌 거야.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계속 아무것도 아님을 유지시켜야 되는데 뭔가 의롭고 정의로운, 이걸 세 자로 이렇게 합니다. ‘오지랖’이라. 문재인 그 집 앞에 가서 데모하고, 데모하면 일당 나오거든요. 양산에 가서 데모하고, 수갑 네가 차야 된다고 주렁주렁 수갑들 달아놓고.
왜 그런 짓하나? 할 일이 없어서 그래요. 그것보다 달리 돈 되는 일이 없어서 그래요. 모든 것은 자본의 세계니까. 자본을 돈을 가져야 계급이 내가 귀족 생활할 수 있어요. 고급차를 탈 수 있고 내가 호사롭게 살 수 있고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고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적을 만들어야 돼요. 그래야 자기가 정당하게 돼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견고한 바위 같은 사울 왕의 나라와 누구와 대결시켰다? 특이한 개인 다윗과 대결시켰습니다. 다윗은 자기 힘으로 사울 왕일 이깁니까, 못 이깁니까? 못 이기죠. 그러면 어디로 피합니까? 여호와께 피하는 거예요. 그게 여호와께 피하는 것, 그게 통회하는 것 이게 시편 34편에 쭉 나옵니다. 18절에 봅시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고 돼 있지요.
시간이 중요한 것 남아있는데 이제부터 해보겠습니다. 이제 어디까지 갔느냐 하면 다윗에게 사울에게 철저하게 깨졌지요. 그걸 사무엘상 24장 14절 누가 읽어보세요. 그것 읽고 본격적으로 갑니다.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자, 여기 두 종류의 동물 나오지요. 하나는 개도 그냥 개가 아니고 뭡니까? ‘죽은’ 개. 또 하나는 뭡니까?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벼룩.
다윗은 이걸 누구라고 합니까? 본인. 본인이 죽은 개고 벼룩인데 아무것도 아닌데 왜 이스라엘 왕 사울은 현재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는 임금이요, 임금 앞에서 나는 죽은 개고 벼룩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세속적으로 미친 척해도 이렇게 쫓겨 다니는데 갖고 있는 재산이나 능력이나 나를 추종하는 세력 이것 아무짝도 소용없는 그야말로 연약한 계란밖에 안 되는데 왜 저를 자꾸 쫓아오십니까, 라고 표현한 거예요.
그러면 다윗이 사울의 위세 앞에서 이 상황 전체를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느냐 하면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의 세계, 언약의 세계, 진짜 이스라엘 세계에서는 이런 상황들이 필수적으로 있어줘야 말씀이 말씀답게 구체화되고 실현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자신은 어떤 역할? 아무것도 아닌 역할, 그리고 세상은 어떤 역할? 아무것도 아닌 것을 추방하고 쫓아다니는 역할을 하는 그것이 필수적이에요. 하나님의 세계가 필수적인 거예요.
하나님 나라 천국은 특이한 개인을 통해서 나타난다, 강의 첫 번째에 이야기했지요. 그러면 지옥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지옥은 특이한 존재를 비난하면서 지옥이 구체화해서 나타납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추적하는 이 현상이 일어나줘야 이 지옥은 지옥답게 되는 거예요. 그걸 저는 악이라 했고 악의 힘이 돈의 힘과 어떤 특정 인물의 힘이 모든 인간의 마음속을 조종하고 있고 장악하고 있는 이 상태, 이게 지옥인데 아까 지옥은 뭐가 없다 했어요? 예수님이 없는 곳이 지옥이죠.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도 따라 벼룩 될래,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저도 주님 따라 개 될래요. 이게 바로 예수 믿는 거예요.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예수 믿는 게 아니에요. 또 자기를 새로이 영웅시하는 그런 태도밖에 안 됩니다. 세상에서 배운 가락이 힘을 갖는 것밖에 안 배웠기 때문에 우리 가정 무시하지 말고 나 무시하지 말라, 그것만 철저하게 조종 받고 배웠기 때문에 백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적을 만들고 해도 전부 다 똑같이 한 통속입니다. 다윗은 좀 특이하죠. 복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 같은데 이런 다윗의 이야기가 하나님과 관련돼 있는가? 그게 여기 나옵니다. 아주 충격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20절 다 같이 읽어봅시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어디서 많이 듣던 구절이죠. 요한복음 19장에 나오는 말씀, 31절에서 37절에 보면 바로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에 빌라도가 군인들에게 실무자에게 지시를 했어요.
“뼈 꺾어라.” 왜 꺾느냐 하면 십자가 달리는 가운데 간혹 숨이 살아 있는 사람이 있어야 아예 야무지게 끝까지 죽이기 위해서 꺾으라 했어요. 그래서 십자가에 예수님만 달린 게 아니고 몇 사람 달렸습니까? 두 사람 추가해서 세 사람 달렸지요. 양쪽 강도는 꺾였어요. 뼈가 꺾였어요. 그 사람들 특이한 개인이 아닙니다. 다윗 계열이 아니에요. 그냥 보통사람이었지요. 뼈가 꺾였어요.
뼈가 꺾였다는 말은 악에게 패배했다는 거예요. 뼈가 꺾였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의가 악에 꺾였다는 이야기고 사실은 악인이 악에게 꺾였다는 말이고, 뼈가 꺾이지 않았다는 말은 악이 어떤 것인지 고스란히 드러내기 위해서 마지막에는 그 악은 모든 자는 다 꺾을 수 있었어도 딱 특이한 한 분의 뼈는 고스란히 손 못 되고 남겨두었다는 것이 요한복음 19장에 나오는 취지입니다.
이 본문 말씀을 요한복음의 십자가 달린 것과 바로 연결시켜버려요. 그 연결고리에 우리가 주목해야 돼요. 이거는 우리가 모르는 악과 의, 의와 악이 어떻게 해서 이게 가름되는지를 이거는 주님의 시선, 주님의 관심사고 주님의 모든 일의 초점이 바로 십자가에 있습니다. 부활의 새 생명으로서는 알 수가 없어요. 십자가에 가야 돼요. 십자가에서 멈춰야 돼요. 최종적은 십자가지 부활이 아니에요. 부활에 가면 자꾸 자기 이익만 생각해서 지 편한 것만 생각하죠.
그러나 모든 비밀은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겁니다. 부활에서 이룬 게 아닙니다. 재림에서 이룬 게 아니에요. 십자가에서 이룬 거예요. 십자가에게 내가 하나님 믿고 어떤 이득이 있는지 그 자체가 날아가 버려요. 내가 구원 받는다, 천당 간다 이득을 위해서 만약에 하나님 믿는다면 그 사람은 십자가 속에 있지 않아요. 십자가 앞에 오질 않았습니다.
십자가 앞에 오게 되면 뭐가 날아가느냐? 나의 일 자체가 다 날아가 버리고, 주께서 무슨 일을 하느냐, 주님과 특이한 개인 예수님과 아버지가 어떤 일을 했는가, 그것만 남아요. 그게 남아줘야 우리가 몰랐던 의, 우리가 몰랐던 악의 정체가 밝혀지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에 관련된 성경말씀을 제가 찾아서 읽어드리겠습니다. 스가랴 12장 10절, 요한복음 19장부터 먼저 봅시다. 요한복음 19장 31절에 보면,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실무자가 두 사람은 꺾었는데 예수님을 꺾으려할 때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그러니까 이 군병들이 하는 행위가 예수님의 예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군병들은 몰랐지요. 찌르는 것조차도 말씀에 예언됐다는 걸 몰랐던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36절에,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그런데 말입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다음에 37절 보세요.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야 이게 요한복음 19장에서 36절에서 마감되는 게 아니고 37절까지 성경 두 구절을 바로 그냥 연결해버리는 거예요. 찌른 자를 본다는 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스가랴 12장 10절에 나옵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이렇게 돼 있지요. 여러분 지금 정신 좀 바짝 차려야 돼요.
누가 찔렀고 누가 본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리고 누가 찔렀고 누가 찔림을 당하고, 그리고 찔림을 당한 자가 본다는 말인지 찌른 자가 본다는 말인지, 아니면 찌른 자도 아니고 찔림을 받은 자도 아니고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 찌르는 사건 행위를 본다는 말인지, 이게 성경말씀마다 다 달라요. 틀리게 돼 있어요.
뼈를 꺾지 않았습니다. 뼈를 꺾지 않았다는 말은 악은 악인에게만 작용할 뿐이지 하나님이 택하신 준비된 의인한테는 그 뼈가 유지가 돼줘야 악이 저지른 그것이 그대로 남아있어요. 증거용이니까. 그러니까 찌른 자가 나쁜 게 아니고 찔렀던 자가 찔림을 받은 자에 의해서 찌른 자뿐만 아니고 그를 보는 모든 자가 다 나쁘다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몰아세우시는 겁니다. 찔림을 받은 특이한 한 분을 중심으로 해서. 세상을 재편해버려요.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애초에 구원을 시도해도 소용없어요. 구원을 시도하는 자체도 나쁜 짓이 돼요. 왜냐하면 인간이 구원 받으려고 그렇게 애를 써봐야 나중에 닭 쫓던 개 신세가 됩니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누구냐?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열두 제자들이잖아요. 주님 따라가겠다는데 주님을 훌쩍 담 넘어가버렸어요.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버렸어요.
주님은 천국에 간 게 아니에요. 천국은 누가 찔러줘야 돼요. 찔림을 받은 그 창자국 아니면 천국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막혀있으니까. 사람들이 구원 받겠다고 교회 오잖아요. 교회 가니까 목사가 성경대로 말씀대로 믿고 실천해야 된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목사 시킨 대로 그 성경말씀 믿습니다, 하고 실천한다 이 말이죠. 그래 막 달려가지요. 결국 남는 것은 에이와 씨가 남아요. 합치면 뭐가 되지요? 에이씨.
닭 쫓던 개, 제자들 모습 그대로 굳어집니다. 우리 놔두고 혼자 떠나버리면 우린 어쩌란 말이냐? 노골적인 가룟 유다였어요. 사전에 내가 알았지. 그러니까 돈 삼십 냥 챙겼잖아, 이런 식으로. 나중에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했지만. 지 양심이란 게 인간의 자기의 죄를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무마시킬 수 있는 게 안 됩니다, 양심이란 게. 인간의 어떤 선함과 내세울 수 있는 어떤 착함도 우리를 가둔 악의 권세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요.
내가 설친다고 노력한다고 구원 되는 게 아닙니다. 이거는 특이한 그분만이 빠져나오는 그 힘이 아니면 우리는 구원의 구멍이 어딘지 알 수도 없게 돼 있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할 때 아까 두 개의 구절이 거기에 집중된다 했지요. 뼈가 꺾이지 아니한다. 도대체 뼈가 꺾이지 않는 게 뭔 뜻인가? 또 한 가지는 거기에 찌른 자도 볼 터이요.
요한계시록 1장 7절 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보면,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자를 뭐로 규정하는가? 그를 찌른 자로 보는 거예요.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그 찌른 자가 누구냐 하면 군인들이에요. 그 군인들이 잘 찔렀는지 못 찔렀는지 자기가 예수님을 찔러놓고 찌른 것을 군인들이 그걸 봤어요.
요한복음 19장 다시 봅시다.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이게 힘들어요. 성경구절 같이 연결시킬 때는 반드시 십자가 실로 꿰매야 돼요. 십자가 피가 통하지 않으면 성경해석 일체 되질 않아요. 십자가 피가 남는 해석이 돼야 되지 나 구원 받았다는 해석이 되면 안 돼요. 그거는 지는 마치 구원 받아 마땅한 잘난 존재가 되니까 그렇게 돌아오면 안 됩니다. 십자가 피만 나와야 돼요.
33절에서 찌르니까 피와 물이 나왔지요. 그러면 다 나온 거예요. 뼈 꺾는 이야기 나왔지요. 그다음에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37절) 이 말은 뭐냐 하면 찔린 자가 예수님이고 찌른 자는 그 당시에 누구냐 하면 군병이죠. 그 당시 군인들이죠. 그 군인들이 어떤 최후의 목격자 노릇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십자가 현장에서 마지막에 성경말씀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끝까지 쳐다보는 유일한 목격자가 찌른 자에요. 악입니다.
악의 지시를 받는 악인이 십자가의 유일한 목격자에요. “상관님, 지시대로 처리했습니다.” 없애버렸습니다. 이 전제군주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에서 아무짝도 소용없는 예수를 없애버렸습니다, 라고 보고할 수 있는 그 마지막 보고자가 직접 창을 들고 직접 예수님을 찌른 자, 바로 그 자가 악의 마지막 모습을 대신해서 보여준 자에요.
그러면 악은 뭡니까? 예수님의 존재도 아니고 예수님의 인물도 아니고 바로 십자가 사건을 유발할 때 거기에 참여된 자가 악이에요. 그게 악마에요.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지요. 나는 십자가 지혜 외에는 다른 지혜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너희가 예수님 죽은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은 것, 그 사건.
사도 바울이 왜 그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부활해서 만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나를 핍박한다. 그때 사울은 뭐하다가 예수님 만났습니까? 예수 믿는 자를 공격하러 가면서 예수를 만났잖아요. 그러니까 전 세계 모든 움직임이 십자가 그때 그 사건의 현장화 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래야 이 세상이 악의 천지고 저주받고 지옥이 된다 할지라도 그들은 할 말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게 바로 언약에 의하면 저주의 세계,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받는 하나님의 일관된 취지가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들이대지 아니하면 이 세상은 소위 잘난 자들이 등장해서 이거는 중구난방 아무 진리가 가려져요. 십자가 사건의 되풀이고 반복이에요. 그 말씀에 찌른 자도 볼 것이요, 했는데 스가랴에 의하면 그 찌른 것 때문에 그다음에 뭐냐? 애통하는 자가 등장해요.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애통했습니까? 애통 안 했지요. 걸음아 날 살리라고 도망쳤잖아요. 애통 안 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질 때 애통한 사람,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도 될 자격 있는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성도는 찔림을 받은 자가 자기를 찔렀던 그 세계로부터 찔림을 받았다는 이걸 근거로 해서, 십자가 사건을 근거로 해서 주님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그 사람에게 그대로 일어나게 하는 대상이 된 자만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이걸 미리 그 삶을 살았던 자가 오늘 본문에 누굽니까? 다윗입니다.
다윗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에요. 얍삽한 사람이고 비겁한 사람이고 요령꾼이고 연기 피우면서 자기 살 길을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 과정을 겪으면서 다윗은 여호와께 피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요. 그게 말씀 완성의 세계에 피하는 거예요. 그때 피하면서 다윗은 통회해요. 애통하는 겁니다.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할 문제가 아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34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주께서 원하는 것은 무슨 심령이다? 상한 심령이다. 그 상한 심령의 당사자가 누굽니까? 다윗인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다윗을 세속사회에 보내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를 교회 마치고 자꾸 세속세계로 보내는 이유가 우리의 기도는 오직 회개하는 기도만 하라는 거예요. 계속해서.
십자가 사건의 악의 조종을 받아서 예수님이 내 인생에 대해서 쓸데없는 대상인 것을 계속해서 내 내부에서 그게 끓어오름을 고백하면서 이미 구원 받은 자로서 예수님을 싫어하는 그 육신의 본성을 보면서 아까 통회가 시편 34편 몇 절이죠? 상한 심령이 몇 절입니까? 18절, 19절이죠.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편 34편 18절을 그게 과거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현재 삶 속에서 시편 34편 18절이란 말씀이 늘 살아 있게 하시는 것,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의 증인되게 하시는 거예요. 뭐 느긋하지요. 왜? 이미 우리는 말씀세계에 있기 때문에, 주님께 피했기 때문에,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이건 뭐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죽을 때까지 되풀이하는 거죠.
이 되풀이도 나중에 죽고 나면 뭐예요?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면 더 이상 세속세계에서 떠났기 때문에 육신은 죽었기 때문에 상한 심령이고 뭐고 할 수 없습니다. 지옥 같은 세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통회가 돼요. 우리 자신이 몰랐던 것 말씀이 와서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시편 34편에서 다윗은 감사하지요. 주의 환난에서 감사하고 뭐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느냐, 21절 보겠습니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비로소 죄라는 게 뭔지 아는 거예요. 죄라는 것은 의인인 특이한 개인이 등장하지 않으면 죄를 몰라요. 내가 죄 사함도 감사하지만 내가 죄가 뭔지 근원적으로 알게 된 것이 감사하지요. 죄가 뭐냐? 주님 없었으면 죄가 없었다.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비로소 저주가 개시되고요.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주께)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그 죄, 다시는 저주를 받지 아니하는 입장에서 시편 34편의 삶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마음껏 재현해도 괜찮습니다. 죄를 받지 않기 때문에.
왜? 죄를 아니까. 내 힘으로 거기서 빠져나가지 못했고 흘린 피와 물로써 그 피로 누가 찔렀는데 찌른 자나 우리나 같은 통속이었는데 그 찌른 자도 볼 것이고 누가 찔림을 받았는지 누가 이 세상에서 밉상 받았는지를 이제 우리에게 찾아오신 그분이 나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에게 밉상 받은 분이 피로 말미암아 그 죄를 대신 담당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겐 죄가 없어진다는 이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대로 된다는 것이 우리 손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예수님 손으로 실천되었음을 우리가 그 혜택이 얼마나 큰 혜택이고 혜택 자체가 복인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 > 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37:1 / 창조자의 리듬 / 221114 (0) | 2022.11.14 |
---|---|
시편 35:1 / 덫 / 220913 (0) | 2022.09.15 |
시편 33:17 / 상다리 / 220613 (0) | 2022.06.13 |
시편 32:1 / 심판 속의 구원 / 220516 (0) | 2022.05.16 |
시편 31:19 / 문제해결책 / 220411 (0) | 2022.04.11 |